[퍼옴완결/] [은세] 내 집에 사는 남자 1부 上 + 허락메일 ayuda 수정/삭제 + 스크랩하기 (HIT: 4772/VOTE: 96) [허락메일] -------------------------------------------------------------------------------- dlsgud님, 안녕하세요?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마유동에 이 글을 퍼가주시는 분으로는 dlsgud님께서 벌써 세 번째이신 듯합니다. 본의 아니게 여러 분들의 수고를 빌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내 집에 사는 남자' 1부 완결 이후 마지막 2부는 연재가 아닌 완결로 찾아뵐 것 같습니다. 1월 즈음 2부도 넷상에 올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dlsgud님,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드리고, 읽어주시는 모든 마유동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은세님의 따끈따끈한 신작 내 집에 사는 남자입니다 2부완결이 빨리 나올수 있도록 모두 은세님께 압박을...쿨럭=_=;;; 농담이구요 즐겁게 감상하세요 ========================================================== 내 집에 사는 남자 1부 上 <목 차> 01. 약(弱)한 것이 곧 악(惡)한 것이다 02. 아직 잃을 것이 남아 있다 03. 신세를 질 뿐, 기대진 않을 거다 04. 그림자는 존재의 귀납적 증명이다 05. 모르는 사이, 아마도 잊게 될 거야 06. 끊임없는 되새김이 기억을 낳는다 07. 여기 짓는 집에는, 네가 살아라 08. 반사, 눈 감아 버리다 09. 우리가 크면 괜찮아질까? <약(弱)한 것이 곧 악(惡)한 것이다> 몸의 여림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며, 마음의 여림은 타인에게 상처가 된다. 이를 아는 것이 또한 커다란 두려움이 된다. 1. 탁. 어딘가에 부딪힌 것 같다. 내가 만든 소리인데도 멀리서 들리는 괴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쿵! 둔탁한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또 다시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미안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구부정하게 숙일 듯 말 듯 해 버린 허리 때문에 조폭 형님들 포즈가 나온 듯 하다. 부딪친 순간 비명을 질러댄 남자가 안 그래도 아픈 나의 어깨를 획 잡아챘다. 손아귀 힘이 장난 아닌 게, 화가 꽤 많이 난 것 같다. 흔들흔들. 휘청휘청. 그가 내 어깨에다 팍팍한 성질을 부리는 동안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도시의 불빛이 나과 같은 속도로 흔들린다. "십새끼, 이거 어디서 굴러먹던 뼉따구야!" "칠……." "뭐?" 내 대꾸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남자가 불쾌해한다. 난 우리 엄마의 일곱 번째, 막내아들이라고. 1번 새끼, 2번 새끼, 쭉 나가다 6번 다음 7번 새끼. 나는 정면에 위치한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마치 멍청한 학생을 꾸짖듯이 그는 한참 동안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그 집요함이 귀찮다. 피곤하기도 하고. 바르게 정정해주려던 걸 포기한 채, 나는 가만히 다리에 힘을 풀었다. 하긴 낯선 이의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겠는가. 천천히 주저앉아 버리는 내 행동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는지, 어깨를 잡은 손을 놓지 못한 상태 그대로 남자도 나를 따라 앉아 버린다. "이 봐." 당황했는지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음성으로 날 부른다. 의지와 상관없이 내 눈길이 자동인형처럼 남자의 얼굴로 향한다. 그런데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 때문에 남자의 표정이 잔뜩 흐려 보인다. "아, 이거 재수 없게 왜 또 울고 지랄이야." 잡아챌 때처럼 내 어깨에서 빠르게 손을 확 떼면서 그가 밀쳤다. 털썩. 힘없이 뒤로 쓰러지는 나의 등에 딱딱한 길바닥이 착 하고 붙는다. 차갑고 매정한 그 느낌 때문인지 잠시 잊고 있었던 설움이 또 다시 밀려왔다. 산다는 게, 살아있다는 게 이렇게 고단한 일인지 몰랐다.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고, 특별히 비뚤어진 마음으로 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사랑을 시작한 이후로 늘 아팠다. 가슴 안쪽이 너덜너덜해졌다. 게다가 이제는 혼자다. 이 속에 가득 품었던 단 한 사람이 나를 떠나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비겁하게. 그 사람 때문에 가족도 잃고 친구도 잃었는데, 나는 이제 하루아침에 올인 했던 패에 배신당한 도박사 신세가 돼버렸다. 상우는 말도 없이, 빈 공간조차 남겨두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불과 며칠 전, 내가 잠든 사이에. 싸운 것도 아니고, 이상한 낌새도 없었다. 그냥 없어진 거다. 진상우, 나쁜 놈아! 대체 너 어디 있는 거야. "흐윽. 상우야……." "취했나 본데." 근처가 포장마차 밀집 지역이었나 보다. 가까운 곳에서 장막을 걷고 나온 다른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일행인가 보다.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욕쟁이 남자가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취하다니. 나는 술 같은 건 마시지 않았는데.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는데. 하긴, 외로움에도 인간이 취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음, 나는 취한 거 맞다. 아마 서러움에 취했을 거다. 세상에서 단 하나 믿었던 놈이 깨끗이 사라졌으니. 공허함이 부풀어 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은 제정신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낯선 남자들이, 엉망으로 취한 나를 좀 가만 나뒀으면 좋겠다. "형. 안 가고 뭐해?" 뒤에 나타났던 포장마차맨이, 여전히 코앞에 쭈그리고 앉은 욕쟁이를 재촉한다. 고맙게 시리, 당장 사라져줄 것 같은 폼이다. 그들이 가고 나면 나도 좀 쉴 수 있을 것 같다. 뒤통수가 딱딱한 바닥에 닿아 있어 죽도록 불편하지만, 하루 종일 상우 찾느라 헤매고 다녀서 무척 지친 상태다. 당분간 일어날 마음이 없다. 그런데 이 눈치 없는 형이란 남자는 오지랖이 넓은 건지 제 일행에게 짜증스레 외쳤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남태양, 건조한 새끼야! 여기 이 놈 자빠져 누운 꼴 안 보여?" "보인다." "그런데도 그냥 가자고? 저 봐, 저 봐. 지나가는 년놈들 침 흘리는 거. 암튼 이렇게 생긴 새끼들은 어두워지면 집밖으로 안 나와야 돼." "흠." "뭐가 흠이야! 씹, 빨랑 그 넙적한 등판 안 갖다 대!" "왜?" "왜긴, 이 쪼만한 주정뱅이 갖다 얹으려고 그러지." 심히 불만스럽다. 나는, 잘못된 사실은 정정해주어야 하는 성격이다. 물론 나도 취한 것처럼 보일 거라는 건 인정했다. 적어도 정상은 아니니까. 그런데 쪼만하다니. 내 키는 대한민국남자 표준인 173이란 말이다. 하, 게다가 주정뱅이? 대체 누가 주정을……. 헛! 순간, 내 몸이 갑자기 들려졌다. 아니 업힌 거다. 심하게 놀란 탓에 나는 허공에서 뻣뻣하게 얼어 버렸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팔다리가 의외로 따뜻한 몸에 닿자, 경련이 인다. 이런 반응은 다만 '체온'이라는 것이 가진 마력 때문이다. 사람의 체온이라는 것. 이것보다 중독성 강한 게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의 체온’이다. 따스함과 푸근한 위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서로 의지하고 지켜주는 관계라는 사실에 대한 암묵적 승인. 스킨십은 곧 나에게, 앞서 열거한 감정들을 대입시킬 수 있는 소중한 행위이다. 문제는, 내가 부여해온 의미만큼 세상이 스킨십을 무겁게 보지 않는 데 있다. "나쁘다, 정말." 욕쟁이를 형이라 불렀던 남자는 내 중얼거림에 멈칫 선다. 어이가 없어서인지, 내동댕이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건지 나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그러고 섰다가, 내가 조용해진 걸 확인한 후에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넓은 등판이 편안하게 내 몸을 받히고 있는 지금 상황이 현실 같지가 않다. 어째서 이 남자는 군소리 없이 나를 업고 걸을까? 나는 왜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그냥 업혀서 실려 가고 있을까? 후, 남자가 문득 내쉰 뜨거운 한숨이 차갑게 식은 팔에 닿았다. 그 숨에 생명을 얻은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그리고 남자의 목을 느리게 끌어안으며 버릇처럼 고개를 그의 뒷덜미에 묻는다. 따뜻해. 추위에 오소소 돋았던 소름이 잠을 잔다. 슬픔으로 얕게 쉬던 숨을 이제야 길게 뱉어 본다. 순간 갑자기 떠오른 기억 하나에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나는 가슴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오래 못 걷는 나를 평생 씩씩하게 업어주겠다고 제 가슴 팡팡 치던 녀석. 짜고 뜨거운 음식 못 먹는다고 언제나 차가운 생수를 국그릇 옆에 놓아주던 녀석. 피곤을 잘 느끼는 내 유약한 체력이 안쓰러워 늦잠을 자도 절대 깨우지 않던 녀석. 흑. 보고 싶다. 상우야. 돌아와 줘. 내가 더 잘 해줄게. 넌 돌아오기만 해라. 제발! 응? 플리이즈! "사랑한단 말이야……." 눈물이 따가운 소금기를 머금고 뺨으로 흘렀다. 스윽 남자의 따스한 목덜미에 물기를 부비며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넓은 마당에 무방비로 널어놓은 빨래가 햇볕에 소독될 때,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깔끔하게 걷어진 커튼 덕에 침대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고스란히 눈을 부시게 한다. "깼으면 일어나지 뭐 하고 있어?" 무뚝뚝한 음성으로 내뱉은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약간 까무잡잡하고 건강해 보이는 피부. 모양 좋은 입술은 굳게 닫혀 있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이지적인 눈매가 서늘한 매력을 지닌 얼굴이다. 까만 반곱슬의 머리. 짧게 잘려져 보기 좋게 빗어 넘긴 스타일이 세련된 느낌이다. 누굴까?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지? 멍한 물음이 내 눈빛에 실려 힘겹게 올라가 그에게 닿는다. 상당히 키가 큰가 보다.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저 위에 있다. 곧 이어 툭 던져진 남자의 대답은 중력 탓인지 곧장 내 가슴을 짓누르듯 떨어졌다. "내 집이다." 그거면 대답이 충분하다는 듯 돌아서 방을 나간다. 저 남자,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다. 특히 더 넓은 등. 아, 그렇구나! 어젯밤 날 업고 온 그 남자구나. 모르는 사람 집에 신세지게 된 것이 경악스럽긴 하지만, 요 며칠 슬픔과 절망에 허우적대고 있는 내 머리는 잔뜩 굳어있는 상태다. 그저 한숨을 푹 내쉰 뒤, 위로 뻗친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욕실 좀……." 저기, 라며 남자가 가리켜준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그리고는 멈칫 그가 서 있는 부엌 쪽을 본 순간 얼어버렸다. 구조가 똑같다. 지난주까지 내가 살았던 오피스텔과 말이다. ‘혹시’ 하고 돌아본 그의 집 내부 역시 이전 집과 거의 흡사했다. 고급스런 소파와 최고 사양의 전자제품들로 채워진 인테리어가 다를 뿐이다. 스윽 훑기만 해도, 이 집 주인이라는 저 남자는 얼리어댑터가 분명해 보인다. TV 도, DVD도, 우퍼도, 저기서 충전 중인 테이블 위의 핸드폰도 모두 최신 모델이다. 고개를 갸우뚱 하며, 그가 가리켜준 욕실 대신 나는 현관으로 나섰다. 슬리퍼를 끌며 현관문을 열고 빠끔히 복도를 내다보면……. 이런, 역시 똑같다! 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남자는 힌트를 주는 대신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재인. 건물 구경은 나중에 하고 일단 씻지. 국 식히고 싶지 않다. 얼른 아침 먹고 나 출근해야 한다." "……!" 믿을 수가 없다. 처음 보는 남자가 내 이름을 막 부르다니. 혹시 내 지갑을 뒤졌나? 그런 의심을 하며 가슴팍과 바지 주머니 부분을 마구 더듬자, 만져지는 건 오직, 커다란 잠옷의 편안하고 부드러운 순면 감촉뿐이다.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는지, 남자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던져준다. "바닥과 친하게 지내자던 네 옷은 이 건물 지하세탁소에 맡겼다. 나중에 알아서 찾아가. 네 지갑은 침대 옆 협탁 위에 있고, 열어보지 않았으니까 혹시 돈 따위가 없어졌다 해도 날 탓할 생각은 마라." "내 이름……." "난 엄연히 더러운 길바닥에서 뒹구는 널 안전하고 쾌적한 내 집에 하룻밤 재워준 은인이다. 그러니까 함부로 굴면서 이것저것 따질 생각도 마. 그런 건 꿈도 꾸지……." "내 이름!" 단호하게 다시 한번 내뱉은 내 똑같은 말에, 혼자서 실컷 아니꼬운 생색을 내던 그가 말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날 재인이라고 부르냐고요!" "하! 지금 니 이름이 여재인이 아니라고 우길 참이냐?" 내 참. 말이 안 통한다. 가뜩이나 기운 없어서 긴 말 하고 싶지 않고만. 기가 차다는 내 표정에 더욱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남자가 눈에 힘을 준다. 한숨을 폭 내쉬자 어깨가 축 쳐지면서 헐렁한 잠옷 상의가 흘러내리려고 한다. 에잇. 덩치 좋은 사람을 상대로 대화를 하자니 나도 지친다. 배도 너무 고프고. 당연히 대접 받겠다는 뜻으로 내가 물었다. "아침 메뉴는 뭔데요?" "삼겹살과 계란찜." 우욱. 말만 들어도 느글느글 속이 메스껍다. 입맛이 뚝 떨어진 나는 욕실로 터덜터덜 걸어가 최대한 오랫동안 구석구석 씻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왜 나를 이리로 데려왔는지, 그리고 반말은 어째서 찍찍 해대는지, 궁금한 점들을 하나씩 꼽을 때마다 머릿속이 둥둥 울리며 두통을 일으켰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며 상우 녀석을 찾아 헤매고, 중간 중간 흐느끼다가, 결국 슬픔에 짓눌려 넉다운 돼 버렸던 어제. 만약 나의 인생에서 하루를 없앨 수 있다면 바로 어제를 지우고 싶다. 우울한 기분에 찬물을 세게 틀어 버렸다. 피부에 닿는 그 세찬 기운이 생각을 마비시킨다. 마침내 내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고소한 토스트와 베이컨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삼겹살은?" "농담하고 진담도 구분 못하나?"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흘끗 돌아본 남자가 내 몫의 접시를 식탁에 놓으며 대꾸했다. 아, 젠장!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삼겹살이라고 대답하는데 그게 농담이라고 받아줄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냐고! 넥타이 매는 손놀림이 무척 재빠르고 능숙하다. 말없이 마주앉아 드문드문 뜨던 식사는 남자가 일어나는 순간 끝이 났다. 욕실과 방을 왔다 갔다 하는 남자를, 여전히 식탁의자에 앉은 채로 지켜본다. 되게 바빠 보이네. 설마 질문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서두르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며 빈 접시를 개수대에 넣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분명 익숙한 구조와 공간이지만, 결코 익숙하지 않은 작업이다. 나는 내 손에 물 묻혀 설거지라는 걸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예전에는 엄마가, 최근까지는 상우가 하는 걸 옆에서 구경한 적만 있다. 음. 그때 저 세제를 이 까끌까끌한 수건에 묻혀 그릇에 비벼댔었지, 아마. 나는 마치 인류를 구원하는 실험에 참가한 연구원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포크를 집었다. 뾰족한 날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닦으며 매번 눈앞으로 가져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 정도면 된 건가? 어느 정도 문질러야 하지? 뭐 이쯤에서 포크 대신 접시도 예뻐해 줄까나……. "설마 그 정도 노동의 대가로 이 집에 눌러 앉을 생각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갑자기 차가운 말이 날아와 내 집중을 방해했다. 정말 찬 바람을 맞은 것처럼 선득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반사적인 움직임 덕에 나의 손에 들렸던 접시가 툭 하고 미끄러졌다. 쿠다당! 다행히 바닥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 개수대에 굴러서 깨지진 않았다. 아까 접시바닥을 보니 로얄 어쩌고 하는 되게 되게 비싼 명품 도자기던데. 놀란 마음에 거품 묻은 손을 가슴에 얹자, 입고 있던 남자의 잠옷이 축축해져 버린다. 아, 이런! 차갑고 시린 감촉과 당혹스러움에 나는 시선을 내리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바닥엔 온통 내 손에서 떨어진 세제거품과 물이 뚝뚝 떨어져 있다. 어쩌지, 싶어 곁눈질로 올려다보자, 남자는 아예 팔짱을 끼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당장 거기서 나와." 명령조다. 기분이 팍 상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내가 잘못한 거니 일단은 할 말이 있어도 참아야지. 그를 향해서 한 걸음 내딛는데, 갑자기 남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팔을 거칠게 움켜쥐고 개수대로 가서 차가운 물줄기 밑에 밀어 넣었다. "읏, 차거!"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이 거품투성이인 내 손을 씻어 내린다. 벅벅 아프게 문질러대는 남자의 손힘에 나는 손등의 껍질이 벗겨지는 줄 알았다. 아픈데. 자존심 때문에 아픈 티도 못 내고, 나는 또 다시 입술만 꼭 깨문다. "방에 옷 내놨으니까 갈아입고 와." "지금요?" "지금! 설마 널 내 집에 두고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무표정한 얼굴로 정말 궁금하다는 듯 날 빤히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진다. '설마, 설마!' 무슨 어릴 때 이산가족 된 동생 이름이 설마이기라도 해? 아니면 설마란 자식한테 얻어맞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기라도 한가? 왜 자꾸 설마래? 눈, 코, 입, 뺨, 눈썹, 이마, 턱. 이 남자는 뭐 하나 반듯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나무랄 데 없이 정갈한 인상과 사람 질리도록 완벽한 구성의 외모로 딱딱 무 자르듯 내뱉는 음성이라니. 재수 없는 로봇 인간. 요즘은 인간미 넘치는 로봇도 나온다더구만, 이 인간은 로봇만도 못하다. 그러나 탁 깨놓고 말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헐렁한 티셔츠와 면바지를 꿰어 입는다. 워낙 키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날씬한 편인 남자의 옷도 나에겐 많이 크다. 딱 딱. 그가 밖에서 신경질적으로 노크를 해댄다. 서두르라는 뜻임을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 무뚝뚝하기 그지없고, 얄미운 언변의 대표주자인 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고 싶진 않으니까. 역시 사람한텐 말씨가 참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나를 재워주고, 밥도 주고, 옷도 챙겨준 사람인데 말이다. 저 남자는 실컷 다 해주고 욕 얻어먹는 케이스가 아닌가. 방문을 열자, 팔짱을 낀 채 활짝 열린 현관문에 기대 선 남자가 보였다. 짜증이 치민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눈에 띄게 확 들어 시계를 보는 거다. 하!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쳇! 그를 지나치며 할 줄 아는 유일한 욕을 던졌다. "바보." 유아적이라고 흉 볼 테면 보라지. 내가 이런 식의 대응을 할 때마다 상우는 웃으며 내 코를 살짝 쥐고 흔들어댔었다. 스물일곱 살 먹은 어른을 가지고 노는 거냐고 인상을 써도, 내가 좀 심하게 귀엽다 했다. 그 녀석 생각에 또 다시 코끝이 시큰하니 아파온다. 눈가가 제멋대로 또 붉어지고 있다. 바보, 진상우. 내가 너 죽기 전에 반드시 꼭 찾아낼 테니, 기다려. 말뜻 그대로, 'You shall die.' 다!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몸을 실은 뒤, 나는 닫힘 버튼을 세게 꾹 눌렀다. 뒤따라오던 남자가 당황하며 달려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얄미운 미소도 지었던 것 같다. 잡히면 얻어맞을지도 모를, 이 같은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한다. 지금 타고 있는 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속도를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거. 저 정도 떨어진 거리로는 남자가 나를 잡을 수 없다는 확신이 어느 정도 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살고 있는 저 802호에서 지난주까지 만 2년을 살았던 사람이고, 그 2년 동안 이 빠르게 닫혀 버리는 엘리베이터를 수도 없이 놓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침대 위에 전기요를 깔아놓고 설정온도를 최고로 높인다. 이상하게 으슬으슬한 감각이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가 막힌 얼굴로 내가 하는 양을 뒤에서 지켜보던 지효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지금 한여름이다, 여재인. 너 어디 아프냐?" "응."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물론 눈앞의 친구는 내 진실한 대답에 위로를 해줄 위인은 아니다. "아무리 아파도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가 겨우 접어서 쑤셔 넣은 이 장판은 또 어디서 찾았어?" "아프니까 당연히 따뜻하게 자보려고 애쓰는 짓이지. 그리고 이건 창고에서 찾았어. 니가 숨겼으니 더 잘 알 거 아냐." 나의 뻔뻔한 대답에,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지효는 고개를 젓는다. 하긴 저런 면에 내가 반한 거다. 나를 응석받이처럼 '취급주의'하지 않는 친구. 기집애지만 의리도 있다. 저 봐라. 저 두꺼운 이불을 날 위해 꺼내와 주지 않는가. "그럼. 아예 쪄 죽어라." 이불과 함께 그 말만 던진 채, 지효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상우 얘기와 어젯밤 신세진 남자 얘기를 다 들어준 후라 피곤한 얼굴이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도 많아 보이지만 일단은 참는 기색도 엿보인다. 물론 날 배려해서라기보다 질문하기가 귀찮아서겠지. 성지효.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쓸모 있고 괜찮은 녀석. "으으으. 추워." 성급하게 이불을 덮고 누운 나는 아직 데워지지 않은 전기요 위에서 부르르 떨었다. 감기에 걸려 버렸다. 남들 독감처럼 나는 감기도 한번 걸리면 죽도록 앓은 후에야 낫는다. 싫은 느낌. 아프고 싶지 않다. 아프면 약해진다. 그건 더 싫다. 이게 다 진상우, 그 나쁜 놈 때문이다. 도로록. 눈꼬리 쪽으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맺힐 새도 없이 흐른다. 나는 이제 거지다. 몸도. 마음도. 재산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적어도 상우가 내 집을 몰래 팔아 버리고 떠나기 전까지는 나에게도 듬직한 짝과, 사랑으로 벅찬 마음과, 포근한 아지트가 있었다. 그 모든 걸 하루 만에 다 잃었다. 듬직한 짝은 나를 배신하고 잠적했고, 마음은 변질된 사랑으로 가슴앓이 중인데다, 아지트는 웬 커다란 생색의 대마왕이 이사해 살고 있다. 거지왕자, 그러니까 '나'는 딱 하나 남은 친구 지효네로 기어 들어왔다. 대학 시절 소개팅으로 만나 지금껏 듬성듬성 알아온 지효는, 작업 중에 방해받는 걸 죽도록 싫어해서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다. 한 마디로 마이 페이스의 전형인 삶을 알차게 꾸려가고 있는 녀석이다. 자칭 '소설가'지만, 타칭 '소설가의 탈을 쓴 괴팍한 마녀'다. 그래도 나는 지효가 좋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녀는 나를 평범하게 대한다. 어쩌면 무관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더 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에도 오래 머물 순 없다. 일부러 집을 나와 혼자 사는 녀석의 집에 신세를 질 수는 없는 거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암담한 심정으로 머릿속을 요리조리 뒤집어본다. 아주 잠시 잠깐, 백만분의 일초 동안, 부모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곧 격렬하게 고개를 저어 없애 버렸다. 아구, 머리야. 너무 갑자기 그것도 세차게 흔든 탓에 울렁증이 도지려고 한다. 사실 오갈 데 없이 비참해진 내가 의지할 곳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아들의 사랑을 이해해 주시지 않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남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상우와의 사랑을 지키겠다고 집을 뛰쳐나오면서 내가 속으로 한 맹세 때문이다. 반드시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그 분들께 보여드리겠다고 주먹 쥐고 결심했었다. 세속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꿋꿋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해 보이고 말겠다고 가슴을 치며, 이를 꼭 물며, 다짐했던 그 맹세 때문이다. "하아. 죽을 것 같아." 도로록. 다시 뜨거운 눈물이 귓속으로 흘러든다. 나는 참을 수 없이 속상해졌다. 병신 같이 숨어서 울고 있다, 내가. 침침하게 커튼이 쳐진 친구의 방에 숨어 세상을 등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쓰러져 있다. 그 생각에 속이 상해 죽을 것 같다. 이대로 끝이 날까 봐, 이 상태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할까 봐, 나는 지금 너무 무서워서 딱 죽을 것만 같다. <아직 잃을 것이 남아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땅 속으로 무기를 파묻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약해져 다시 찾게 되더라도, 찾을 수 없도록. 나는, 내 적을 알고 있고 맨손으로 싸워 이길 때까지 강해질 생각이다. 지난 길이 단지 위안이나 위로가 되도록 현재를 그냥 방치하지는 않겠다. 2. 다음 날 아침, 나는 곧장 극장으로 출근했다. 명색이 하우스 매니저인데, 주말에 무단결근을 하고 만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큰 공연은 늘 주말에 있으므로 사실 극장 직원들은 오늘 같은 월요일이 휴일이 된다. 나로서는 변명이라도 할 겸 들른 거다. 특정 시간 동안 한정된 공간에 많은 인원이 몰리는 곳인 만큼 주말 동안 극장에서 안전사고는 없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각종 시설의 청결 상태나 접수된 고객 불만 사항도 체크해야 한다. 공연이 없는 오늘 같은 날은 그런 업무를 차분히 처리하기에 좋다. 사무실 쪽으로 향하는 내 발소리가 조용한 공연장 로비를 울릴 때였다. "여 매니저님!" 성이 '여'이니 만큼 저렇게 불려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도통 적응이 안 된다. 자칫 '여사장', '여학생' 등의 호칭에 쓰이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지도 모르니까. 나는 조금 굳은 얼굴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오늘 당직인 부매니저, 현진이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다. "박 실장님이 찾으세요." 안 그래도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성격도 급하다. 한숨을 푹 내쉬자 묘하게 걱정이 섞인 얼굴로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왜요? 라는 표정으로 마주보자,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어디 편찮으신가 봐요. 안색이 굉장히 창백해요." "아아, 어제 좀 아팠어요. 푹 쉬었으니 이제 곧 괜찮아지겠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금방 다 괜찮아졌으면,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안다. 이미, 상처가 깊다. 흉터가……크게 남을 것 같다. "실장님 기분이 굉장히 저조해요. 참고하세요, 매니저님." 친절하게 일러주고 나서도 현진은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본다. 나는 그 시선이 불편해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뒤돌아서서, 막 걸음을 떼는 그녀를 불러 세운다. "참! 임현진 씨." "네?" "황유진 감독 바뀐 작업실 연락처 좀 내 책상에 올려놔 줘요. 얼마 전까지도 대본 수정 작업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라 하던데, 공연일자는 다가오고 어떻게 되어가나 미리 알아 봐야 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시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펑크가 나면 큰일이다. 모든 하우스 매니저가 관여 하는 부분은 아니겠지만, 이곳은 업무 세분화가 잘 되어 있을 만큼 큰 극장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다. 내 일, 남의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신경 써서 챙기는 사람이 곧 그 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굳게 닫힌 실장실 문을 열기 전에 짧게 심호흡부터 한다. 그리고 경쾌하게 똑똑 노크한 후 문을 열었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린 포스터와 신문 자료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시선을 조금 들면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두꺼운 손바닥으로 마구 쓰다듬고 있는 박영한 실장이 보인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야. 변명을 해 보라는 거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박 실장의 얼굴을 차분히 마주보았다.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자꾸만 피곤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박 실장은 진득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내 얼굴이 엉망이라는 둥, 어제 관객들 수준이 형편없었다는 둥, 매점 실적이 점점 낮아진다는 둥, 자기 불평, 불만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저럴 거면 질문은 왜 한 건가 싶다. "그런데 말이야. 어제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결국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나의 발목을 붙잡듯 박 실장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다소 흐려진 톤이 신경 쓰여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웬 남자가 자넬 찾아왔더라고.” “남자라뇨?” “자기가 당신 애인이랬어." 툭. 소파 팔걸이로 힘 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이게 무슨 얘기지?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갑자기 숨이 차올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수다쟁이 박 실장이 알아서 뒤를 잇는다. "이름이 상우인가, 상아인가 그랬는데. 여 매니저,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알다 뿐인가. 한 집에서 살 맞대고 살았는데. 지난주에 그가 갑자기 집문서와 통장들을 들고 날라 버리는 바람에, 비록 우리의 동거가 단 2년 만에 쫑 나버리고 말았지만. 있을 만한 곳 다 뒤져도 나오지 않던 상우가 여기에 왔었다고? 그 동안 한 번도 내 직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녀석이 바로 어제, 날 찾아와? 믿을 수가 없어서, 아니 속이 타들어갈 만큼 초조해져서 나는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뭣 때문에 왔다고 하던가요?" "그냥 왔대. 자네 보러 왔겠지 뭐. 진짜 애인이야? 아니지? 그 덩치에 여자로는 안 보이던데." "……!" "심각한 얼굴로 농담도 참 징 하게 한다며 웃어줬어. 안 그러면 어쩌겠어? 여 매니저는 연락도 없이 안 오지, 공연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지. 그래서 그냥 바로 돌려보냈어. 애인이라니까 연락처 남기란 말도 안했는데. 당연히 알고 있겠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는지, 박 실장이 만족스레 웃는다. 나는 얼이 빠진 기분으로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무작정 극장을 벗어났다. 무언가에 취한 사람 마냥, 꼭 어제처럼 복잡한 거리에서 이리저리 부딪친다. 이러다간 얼마 못 가서 온 몸이 멍투성이로 푸르죽죽해지겠다. 어지럼증 때문에 나는 가로수 그늘에 잠시 멈춰 섰다. 혹시 너 지금 어딘가에 숨어서 날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널 찾을 수 없는 걸까? 넌 내가 서 있는 곳을 아니까. 그렇게 숨어있지 마, 상우야. 너 나 사랑하잖아. 니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한테 왜 이래? 아무리 그 사랑이 변했다 해도, 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시큰. 또 다시 눈가가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나야말로 바보 같아. 대학 나와 곧바로 취직하고 고속 승진도 했는데, 그래서 조만간 행복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부모님께 찾아갈 수 있겠구나 했는데. 너 정말 나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진상우! 이제 난 무얼 하지? 너를 어떻게 찾지? 당장 어디서 지내지? 머리 아픈 질문들만 떠올리며 스스로를 고문하는 중에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받지 말까 하다가 무심코 들여다본 액정엔 놀랍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번호가 떠 있다. " 아…빠?" 수화기 너머에서 헛기침 소리가 두어 번 들려왔다. 띄엄 띄엄 말을 건네는 사람은 분명 2년 만에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는 아버지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이 음성이 나에게 그랬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게이 자식 따위 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고 억장이 무너지니까, 아예 사라져 버리라고. 되도록이면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조금도 가감 없이 되살아난다. 금방 뜬 번호 하나에 이처럼 다시 선명해진다. 하필, 어떻게 이처럼 얄궂은 시기에 전화를 걸어오셨을까? 궁금한 마음도 잠시 품었지만, 그보다는 본능적인 반가움이 앞섰다. 용서해주시는 걸까? 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신 건가? "재인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그래, 부모 형제 버리고 나가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느냐?" 내가 버렸던가? 나, 버림 받았던 거 아니었나?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 때 상황이 나의 배신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족이 아닌 상우를 택했다고 생각하시니까. 하지만 아직도 모른다. 아무리 진한 피를 같이 나누어 받았어도 내 형제들조차 모른다. 나는 그 날, 상우가 아닌 내 자신의 인생을 택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음성은 다소 초조하고 슬픈 느낌을 주었다. 일주일 전만 됐더라도, 행복한 웃음을 푼수처럼 터뜨리며 마구 긍정을 해댔을 질문이다. 아마 나는 잔뜩 감격해서는 당장 아버지와 온 가족들 얼굴이 보고 싶다고 말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비참하고,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기분으로 적당한 답을 고르고 있다. 어쩌지? 뭐라고 말씀드리지? "왜 대답이 없어? 잘 못 지내는 게야?" "아, 아뇨. 아빠. 물론 잘 지내요. 실은 지금 좀 바빠서……."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전혀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버벅거리며 2년만의 귀한 통화를 이어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역시 아버지는 만만치 않은 분이셨다. 그간 내 소식을 들어왔다는 걸 숨기지 않으신다. "너 극장에 취직했다던데, 거기 오늘 쉬는 날 아니냐?" "그렇긴 한데요, 일이 좀 많이 밀려서 오늘도 출근을 했거든요." 그 때 누군가가 툭 날 치고 지나가며 욕을 했다. '잘 보고 다녀, 개새꺄! 안 그래도 더워서 열 받는데!' 라고. 바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인지라 핸드폰의 송화구멍을 통해 들으셨을 게 분명하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내 변명에 묻은 식은땀까지도 감지하고 계신 게 아닐까? 나는 불안함에 어느 새 두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쥐고 있는 것도 몰랐다. "정말 끊어야겠어요. 제가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 "오늘 이렇게……고맙습니다, 아버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우리 사이에 '아버지'라는 호칭은 처음이다. 절로 거리가 생겨 움츠러드는 마음이 죄송하다. 울고 싶은 기분. 백지 시험지를 냈는데, 교수님이 보지도 않고 칭찬해주신 느낌이다. "잠깐, 재인아!"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시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보다 더 당황하신 듯한 음성. 끊으려고 해서 놀라셨나? "내가 오늘 너 사는 곳으로 가마. 주소는 전에 네가 보내준 편지에 있으니 걱정 마라." "예에? 아, 아빠! 저기……!" 뚝! 전화가 끊겼다. 이렇게 놀라울 수가. 요 며칠 사이에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다 믿기지가 않는다. 오직 나만 바라보며 사랑을 약속했던 녀석이 배신도 모자라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신 나간 놈처럼 헤매다가 내 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 등에 업혀가 하룻밤 신세도 졌다. 그런데 이젠 2년 동안 모질게 연락을 끊고 살던 아버지가 대뜸 오늘 집에 찾아오시겠단다. 잠깐, 난 이제 집이 없는데……! 헉. 이를 어쩌지? 심장이 초고속 인터넷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나는 미칠 듯이 아드레날린이 치솟으며 입안이 바짝 마르는 현상을 경험 중이다. 지금의 내 상황을 부모님이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건 지금껏 나를 지탱해주었던, 마지막 꿈과 희망이 짓밟히는 일과 같다. 이마를 세게 짚으며 나는 곧장 달려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제발 그 로봇처럼 딱딱한 생색 대마왕이 집에 있어야 할 텐데. 오늘 그가 아무리 얄밉게 굴더라도 그 모든 수모를 다 감당하고 말 테다. 이번 일에 협조만 제대로 해준다면, 그를 평생 내 은인으로 모시고 섬기리라! 불끈! 다행히 신호음이 간다. 급하게 쫓겨나듯 집을 빼느라 전화국에 해지 신고를 안 해서, 만약 그가 새 번호를 신청하지 않고 단지 전화선만 꽂아놓았다면 받을지도 모른다. 그 로봇의 핸드폰 번호를 모르니 이 방법 밖에 없다. 젠장! 안 받네. 속이 바짝 바짝 탄다. 초조한 마음에 고개를 들다, 룸미러를 통해 택시기사 양반과 눈이 마주쳤다. 날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저 눈빛, 무섭지만 충분히 이해한다. 달칵. "……." "……?" 분명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났는데, 저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 자꾸만 떨릴 것 같은 목을 가다듬으며 내가 먼저 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 여전히 숨소리만 들리고 대답은 없다. 응답기가 발동했나? 전화를 잘못 걸었나?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을 보자 번호는 맞다. 설마 벌써 다른 곳에서 이 번호를 채간 건 아니겠지? 해지도 안 했는데. "저기, 전 여재인이란 사람인데요." "……왜 또." 이런 무뚝뚝한 인간을 보았나. 바닥에 깔리듯 낮게 떨어진 음성에 미묘한 열기가 느껴진다. 자고 있었나 보다. 회로에 전원이 덜 들어온 로봇이 상상된다. 그런데 오히려 그 작은 차이가 그도 인간임을 나타내주는 것 같다. "저 지금 로비 앞인데요, 잠깐만 내려와 보실래요?" "이유." "묻지 말고 그냥 와 보……, 아니, 와 주세요."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이런 걸 보통 진땀이라고 하겠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곤혹스러웠던 상황이 잘 없었던 나로선, 생소한 만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도 마지막 모습이 유쾌하지 못했던 입장에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이 난감한 시추에이션이라니. 짧은 숨소리가 들린다고 느낀 순간, 로봇이 대답했다. "내려갔는데 너 없으면,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다." 이건 무슨 황당한 코멘트일까? 자기가 장난 전화라도 걸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피식. 그의 독특하고 단순명료한 사고체계에 웃음이 난다. 그것도 잠시, 나는 전화가 끊기기 직전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저기! 지갑도 가지고 와요!" 그랬다. 아까 아버지와 통화 중에 일부러 부딪쳐놓고 성내던 놈이 소매치기였던 거다. 신입 거지의 지갑을 훔쳐 가다니! 사람은 럭셔리한 외양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단 말이 있다. 그 천벌을 받아도 모자를 미친놈이 아직도 그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내가 무슨 강간살해사건 피해자의 부모나 뼈대 굵은 강력계 형사라도 된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꽉 쥐었던 주먹이 부르르 떨리자 화들짝 펼쳤다.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심히 손바닥을 관찰한다. 가시라도 박혔나? 뭐 하긴, 내 마음 속이 온통 가시나무 정원이고, 내 미래가 가시밭길이다. 음……, 손톱 깎아야겠네. 역시 빠르다. 이 엘리베이터, 마음에 든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밀폐공간에서 정체불명의 로봇과 단 둘만 있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물론 가장 힘든 장면은 집 안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펼쳐지겠지만. 조금 전 내 절절한 외침을 못 들었는지 남자는 지갑을 안 가지고 내려왔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남자의 청바지 주머니에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가 들어있었다. 헌데 택시기사가 미터기를 끄지 않아, 도착했을 때보다 천 원이 더 올라가 있는 걸 발견했다. 뭐 나도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는데, 거지가 되고 나니 사람 쫀쫀해지는 건 시간문제더라. "너 얼굴 하얗다." 갑자기 웬 칭찬? 나는 엉뚱한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엘리베이터의 조명 탓인지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창백해 보인다. 그럼 그렇지. 칭찬일 리가 없겠지. 이상하게 실망스럽다. "꼭 그거 같다. 헌혈 실컷 하고 곧바로 죽은 시체." 흰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승강기 벽을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강조하듯이 그렇게 또박또박 덧붙이는 건 실례 아닌가? 게다가 저 말투 봐라. 누가 로봇 아니랄까 봐. "걱정 마. 안 죽어. 할 일이 많아서 아직은 시체 될 날 멀었어." 내 신경질적인 대꾸에 물끄러미 날 내려다본다. 흥분한 김에 끝말 다 잘라먹은 내 반말이 기분 나쁜 걸까? 나는 흘끔 곁눈질로 그를 보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훌쩍 뛰어내렸다. "점심 메뉴는 뭐야?" 내 집, 그러니까 지금은 남자의 집인 802호 앞에 서서 일부러 씩씩하게 물었다. 나는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온 사냥꾼도 아니고, 너구리 잡자고 너구리 몰러온 라면애호가도 아니다. 그러니 긴장 풀자. 그저 나는 가볍게 부탁 하나 하러 온 사람에 불과하다. 좀 뻔뻔해도, 들어주는 그의 입장에선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 천천히 뒤쳐져 걸어오던 남자가 나의 물음에 살짝 눈썹을 들어올렸지만, 적어도 화를 내거나, 나를 내쫓거나, 괜히 비꼬진 않는다. 좋은 징조라 여기련다. "재료만 정했어." "더우니까 국이나 찌개는 생략했으면 좋겠는데. 재료가 뭐야? " 싱긋 웃으며 올려다보는 내 얼굴을, 그는 대답 대신 빤히 본다. 그런 다음 묵묵히 비밀번호를 눌러대더니 번호키를 열고 현관문을 열었다. 활짝 열어젖힌 채 먼저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내며 살풋 그가 웃었던 것도 같다. "여재인의 용건부터 들었으면 하는데. 그 다음엔 끓이든 태우든 네 마음대로. I don't care." 아침에 엘리베이터 속에서 내가 보여준 미소도 저만큼 얄미웠을까? 어, 그런데 방금……. "또 내 이름!" 얼음처럼 굳어버린 나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한 다음, 남자는 먼저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문고리를 잡은 나는 씩씩대며 따라 들어가 신발을 벗고 외쳤다. "처음에 반말 해댈 때부터 수상했어. 당신 정체가 뭐지?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바보냐?' 지금 딱 그 표정이다. 나의 질문에 오히려 마음이 상한 듯 남자는 슬쩍 흘겨보기까지 한다. "설마 모르는 사람을 재워줄 만큼 내가 아무런 개념도 없어 보이나?" 또 나왔다. 그 놈의 ‘설마’. "그러니까, 날 어떻게 아느냐고?" "같은 반이었으니까." 입이 딱 벌어졌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그런데 아무리 쳐다봐도 그의 진지한 표정은 사라질 줄 모른다. 에이……. 진짜 나랑 동갑이라고? 이런 눈빛으로 턱을 당기고 더욱 빤히 올려다본다. 끄덕끄덕. 허억, 놀랍다. 실로 믿기 힘든 시추에이션이다. 키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만한 재력도 그렇고. 같은 나이라면서, 이렇게까지 나랑 가진 게 차이가 나도 되는 거냐? 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면서 거칠어진 숨을 조용히 삼켰다. 침착해야지. 동갑이라니까 사실 좀 만만해진 감도 없지 않다. "같은 반, 언제?" "고2, 고3." "2 년씩이나?" "바보." 아침에 내가 해준 욕과 똑같은 말을 뱉으며 그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졸졸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나는 저처럼 눈에 띄는 로봇과 한 교실을 썼으면서도 기억을 못하는 걸까? 순간, 심장이 뛴다. 생각보다 내 증상이 더 심각해졌나? 너무도 아찔한 자각에 재인은 가만히 심장 부근에 손을 얹어본다. "너 내 이름 모르지?" 내 말이 그 말이잖아, 지금. 남자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며 묻고는, 날 가만히 주시한다. 그 시선에서 묘한 긴장이 느껴져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손에서 생수를 뺏어들었다. 꿀꺽. 한 모금만 넘겼는데도, 식도가 얼어버릴 만큼 지독한 차가움에 숨이 멎는다. 다시 거실로 걸어 나가는 그의 등을 노려보지만,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다. 나보다 더 많이 마셨는데도 멀쩡한 거 봐라. 생각해 보니 로봇이라는 애칭이 아깝다. 얼음 소재 미래형 사이보그에 더 가까운지도. "숙제다." "뭐?" "앞으로 10분 안에 내 이름, 한 자도 틀림없이 대라." "대면?" 남자의 눈썹이 위로 들린다.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잠시 후 아무렇게나 말한다. "니 소원 한 가지 들어준다." 별꼴이다. 자기가 무슨 램프의 지니라고. 아, 아니지! 그게 아니지. 이건 횡재잖아! 굉장한 기회. 결국 하나님도 이 거지가 불쌍해서 도저히 못 봐주시겠단 말씀 아닌가. 눈이 동그래진 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남자가 재빨리 덧붙였다. "대신 내 이름 못 대면, 네가 내 소원 하나 들어줘야 한다." 그는, 이래도 네가 내 이름 안 대고 배겨? 라는 표정이다.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상황을 잘 해석하자면, 이 선량한 신의 아들이 저 인간미라곤 티끌만큼도 없어 보이는 동창 로봇에게 비굴한 부탁 같은 걸 애써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그로 하여금 저 어리석고도 극적인 한 문장을 뱉게 하심으로써,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 용의가 있었던 이 거지왕자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동아줄이라며, 옜다! 신께서 내려주신 거다. 딱 한 가지 문제만 배제한다면 말이다. 도통 모르겠다는 거. 끙. 그러고 보니 나 업혀 오던 날, 욕쟁이 형이란 사람이 이 녀석 이름을 불렀던 것 같은데. 그 뒤에 덧붙인 '건조한 뭐시기'란 욕만 기억난다. 젠장, 이런 거지로 짱박힐 것 같은 경우를 보았나! 시계를 들여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보그 앞에서 뇌 주름을 하나하나 펼쳐가며 옛 기억을 더듬는 기분이란, 흡사 광활한 바다 속에서 끊어진 낚싯바늘을 찾는 막막함 같은 거다. 그러나 절망은 아직 이르다.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게임의 승패를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죽도록 어려워서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일수록 의외로 쉽게 풀리기도 하니까. 아마도 그 순간 기적적으로 그의 핸드폰이 울린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을 게다. "또 쳐 잤냐?" 오, 욕쟁이다! 잽싸게 뛰어가 대신 받았던 내가 예의상 묻는다. "누구시죠?" "어, 남태양 새끼 전화 아뇨?" 황당해하는 전화 상대의 목소리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본다. 나의 얼굴에 찐하게 깔리는 회심의 미소. 곧장 내 눈빛을 읽어낸 남자의 기막힌 표정. 그 모습이 뜬금없이 가깝고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 맞습니다. 잠시만요." 이렇게 쉬울 수가! 이렇게 착착 풀릴 수가! 나는 그의 이름처럼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폰을 건넸다. "남태양 씨, 전화 받으시죠." 잔뜩 어이없고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말없이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저쪽으로 가서 몇 마디 단답형의 대답만 한다. 얼마 못 가 툭 폴더를 접어 전화를 끊더니, 뒤돌아서 곧장 나를 비난한다. "편법이야." "애초에 법 같은 건 없었어. 시간 제약 외에는." 그 짧은 10분 안에 이런 전화가 걸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 그래서, 소원이 뭐야?" 그가 한 발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하며, 차분히 묻는다. 소원이 뭐냐고? 아, 이 얼마나 달콤한 질문인가? 그의 눈빛을 가까이에서 마주보는 순간 두근, 심장이 울리기까지 한다. 심호흡을 깊게 한 후,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랑…… 같이 살아." <신세를 질 뿐, 기대진 않을 거다> 버스를 타면 창문을 열고 싶다. 술자리에만 가면 취해야 할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라지는 꿈이 아쉽고, 밥 먹자는 말을 들으면 벌써부터 배가 부르다. 잊어야 할 것이 있다는 증거다. 3. "당장 갈 곳이 없어서 그래. 딴 건 필요 없어. 그냥 같이 살기만 해." 눈이 가늘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실은 오늘 부모님이 오신 동안만 함께 사는 것처럼 연기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지낼 데 없는 내 처량한 신세를 외면해 버릴 수는 없다. 일석이조의 유혹. 난 어릴 적부터 유혹에 약했다. 이번 유혹에는 특히 이길 재간이 없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도 불쌍히 여기는 신입 거지왕자 아니겠냐고. "나 조용하고, 밥도 많이 안 먹고, 정리정돈 같은 거 잘 해. 같이 살기 나쁘지 않을 거야. 물론 혼자만의 공간에 누군가 함께 들어와 산다는 거 받아주기 쉽지 않지. 나도 알아. 하지만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지낼 자신 있어. 일단 한 번 살아보고 정 네가 못 참겠다 싶으면 그 때 꼭 나가줄게." "……." "아, 원하는 거 들어준다며! 당분간 만이야. 영영 눌러 살겠다는 게 아니라고. 대답하기가 싫으면……." 손에 땀이 배는 느낌은 둘째 치고라도, 제일 간단한 숨 쉬기조차 힘들다. 저렇게 심각한 얼굴로 날 노려보지 않아도 난 충분히 긴장하고 있는데. 결국 나는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맺는다. "그냥 고개만이라도 끄덕이던가." 당분간 만이라는 내 마지막 말에 한숨을 후 내쉬던 그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보일 듯 말 듯한 정도의 움직임이었지만, 슬쩍 눈을 위로 뜨고 그의 반응을 살피던 나는 그제서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이 난감할 것이다. 가볍게 소원 한 가지라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누군가와 같이 사는 문제가 거론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이해한다. 그래도 농담이었다고 잡아떼거나, 거절하지 않아 주니 고맙다. "단, 내가 잘 때 너로 인해 깨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해. 난 수다스럽고 사고뭉치 동거인을 오래 견딜 위인이 못 돼.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관리비는 반반 부담하고, 저쪽 작은 방을 네가 써." 고맙다는 거 반은 취소할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둔다. 사실 저렇게 딱딱거리지 않아도 내 처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첫인상이 반이라더니, 처음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실컷 베풀어주고 좋은 소리 못 듣는 거, 이 녀석 버릇인가 보다. 쪼르륵. 대답 대신 배고픈 소리가 내게서 흘러나오자 그가 피식 웃어버린다. 민망해 죽겠지만 그래, 웃어라. 솔직히 웃지 말라고 대들 힘도 없다. 어제부터 꼬박 다섯 끼를 내리 굶었는데, 이 소리도 안 나면 그게 사람이냐. "저기,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내 조심스런 물음에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큰 몸이 천천히 돌아선다. 똑똑하게도 질문 속에 담긴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한 거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잘 읽히지 않는 고증서같다. "오늘 내 부모님이 여기 들르실 거야. 이유는 모르겠고 갑자기 오신다고 연락이 와서……. 저기, 그래서 나…… 그 분들께 아주 잘 살고 있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거든." "그런데?" 자꾸만 빙빙 도는 내 말이 지루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한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자 목안이 거칠거칠한 것이 느낌이 별로 안 좋다. "당신이 내 애인인 척 해줬으면 해. 다정하고 부드럽게 날 대하는 파트너, 기대하실 거야." "그게 네 타입인가?" "응?" "다정하고 부드러운…… 남자." 내가 게이냐고 묻는 걸까? 저렇게 담담한 말투로 되묻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혹시 저 고요한 표정 뒤에 폭풍같은 분노와 혐오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이대로 당장 내쫓길지도 모른다. 그럼 큰 일인데……. 큰 일이지만, 거짓으로 얹혀 사는 건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내 삶과 소망을 지키기 위해서, 잠시 부모님께 거짓말 하는 문제는 예외다. 동거도 못하겠다 하면 어쩔 수 없다. 얼마나 더 같은 반복으로 상처 입을지도 모르지만……. 상처는 입어도 울진 않는다. 분명 이게 끝은 아닐 테니 견딜 거다. 혹 울게 되더라도 주저앉지는 않을 거다. 그게 나, 여재인이다. "맞아. 그게 내 타입이라고 알고 계셔. 그래서 지금껏 가족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어. 부모님이 날 찾아오시겠다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전보다는 마음을 열고 날 봐주시기 시작한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더, 지금 이런…… 내 모습으로 두 분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 딱딱한 내 대답에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날 바라본다. "결국 너는 효자란 말이군. 그 분들이 어떻게 느끼시든 말이야." "받은 게 많으니까. 그래서 부모님이 느낀 배신감도 얼마나 클 지 이해해.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 분들 심정 이해하고도 남아." "문제는, 넌 그 분들을 이해하려 애쓰는데, 네 부모님은 널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군."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다. 그는 간단히 정곡을 찔렀지만, 나는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아무튼 지금 내겐 애인 연기를 해줄 사람이 필요해. 해줄 거야, 말 거야?" "그보다는, 부모님이 지금의 너에게 바라는 게 뭔지 그것부터 아는 게 먼저 아닌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안다. 다만 나의 고집이 그걸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내가 증명하고 싶었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가장 먼저야." 내 단호한 말에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을 뿐, 금세 뒤돌아 부엌으로 가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지금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걸 알만큼 그는 눈치가 빨랐다. 태양이 차려준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뻑뻑한 머리 속은 복잡하기만 하고, 현실을 정리하기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게다가 몸 상태마저 그다지 좋지 못해서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나에겐 사치다. "그래서. 옮겨 오겠다는 네 짐은 지금 어디 있는데?" "이삿짐 보관 센터." 자동 응답기처럼 읊고 있는 내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온 것처럼 희미하다. 그가 날카롭게 내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더니 한숨을 후 내쉬며 지나가듯 물었다. "그거 찾아올 돈은 있나?" "……." 내 묵묵부답에, 그가 차 열쇠를 집어들면서 짧게 말했다. "이자 쳐서 갚아. 아까 그 택시비도." 빌려준다니 고맙지만, 마냥 고마워하긴 어려운 말투다. 그를 좋아해야 할 지, 싫어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나는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줄곧 젓가락으로 쑤시고 있던 계란말이를 해방시켜 주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 앞에서 당연히 그가 애인 행세를 해줄 거라 믿었다. 믿었던 사이보그에게 배신 당해도 유분수지. 터미네이터 이후 가장 강력한 적을 만난 기분이다.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핑계 삼아 방 쪽으로 향하며, '솔직히 나는 댁네 아들한테 티끌만큼도 관심 없소.' 라고 내 부모님 앞에서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를 몰래 째려봤다. - 너도 니 애인 닮아가냐? 말도 없이 사라졌더라. 지효다. 화가 난 목소리. 나는 전화기를 고쳐쥐고, 달래듯 사분하게 물었다. "야야, 그럼 나 출근하는 거 보고하기 위해, 새벽에 잠들었을 널 깨웠어야 해?" - 오후에 전화는 할 수 있었겠지. "그럴 정신 없었어." - 핑계야. "……그럴 지도." 갑자기 못 견기게 피곤이 밀려왔다. 지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좋지만, 일일이 대꾸하는 건 힘이 든다. 전화했어야 한다는 그녀 말이 맞다. 기다리다가 먼저 전화 걸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친구라면, 그녀가 걱정할 거란 생각 했어야 했다. - 오늘 잘 데는 있어? 어딘데? "오피스텔. 지금 부모님이 와 계셔." 내 대답에 지효는 잠깐 뜸을 들이다 툭 내뱉었다. - 핑계가 아니었군. "미안." - 후우. 재인아, 너……."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가 날 부른다. 염려와 혼란이 담긴 음성이라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궁금해하며 지효의 다음 말을 기다리릴 때 방문이 살짝 열렸다. "부모님 가신다는데." 태양이 문고리를 잡고 조용히 말한다. "어, 응. 알았어." 지효에게 다시 연락하겠다 말하고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8시다. 벌써 가시다니, 저녁도 안 드시고. 초조한 마음에 거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두 분 다 현관에 서 계셨다. "오늘은 일이 있어 일찍 일어나야겠다. 재인이 너, 이젠 집에 자주 좀 들르렴." 조용히 말씀하신 어머니가, 묵묵히 구두를 신으시던 아버지와 눈빛을 교환했다. 말을 아끼시는 모습이 오늘 이곳에 들러 눈으로 확인한 모든 게 탐탁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다. 아들이 웬 놈에게 반해 같이 살자 떼를 써서 동거 중이라는데, 어느 부모가 기뻐할 것인가? 그것도 예전에 안 떨어질 거라고 난리쳤던 그 애인과 헤어지고 곧바로 일어난 일이라니. 게다가 상대 남자는 자신들의 아들에게는 관심도 없고, 그저 동창이라는 이유로 차마 모질게 내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나라도 기가 막히겠다.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복도로 나서는 두 분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왜 이리 말랐니?" "별로 그렇지도 않아요." 속상한 듯 혀를 차는 어머니께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꾸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춘 어머니는 문득 나를 품으로 당겨 안으신다. 조그만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버튼을 누르고 계신 아버지의 등이 보인다. "재인아." "응?" "행복하니?" 내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시던 어머니의 나직한 물음. 철렁 내려앉아 버리는 심장. 그리고 곧 다시 격하게 솟는다. 아주 잠시지만, 숨을 쉴 수가 없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포근한 체온에 녹아버릴 것 같다. 다 포기하고 그저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무너져 엎드리고만 싶다. 하필……. 왜 하필 지금 그 질문을 하세요, 어머니!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서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턱이 몇 번이고 어머니의 여린 어깨에 불안정하게 부딪혔다. 결국 가슴 속에 꽉 차오른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고 눈물이 왈칵 솟고 만다.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급히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야 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내 침대와 책상이 비좁게 들어찬 작은 방 안을 둘러본다. 불 꺼진 공간은 창문으로 비쳐든 달빛이 뿌옇게 채우고 있다. 나는 바닥에 앉아 가만히 침대에 기댔다. 고개를 뒤로 넘겨 천정을 바라보며 얕은 숨을 쉰다. 일주일이다. 딱 일주일 만에 내 인생이 거꾸로 엎어졌다. '왜?' 라는 물음은 이미 빛을 잃고 말았다. '꼭' 이란 다짐만 남았다. 찾아낼 거다, 진상우. 너 찾아내서 내 앞에 무릎 꿇고 빌게 만들 거다. 어떤 이유가 따라붙건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난 오늘을 잊지 못할 테니까. 후우.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조용한 집안,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태양의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있는 방문 근처에서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멈춘다. 들어오려는 걸까? 노크를 하면 대답하지 말까? 숨 죽여 기다리는 사이, 다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쓸리는 슬리퍼의 마찰음이 사락사락 마냥 부드럽다. 거칠거칠한 이쪽 가슴을 가만히 쓸어주듯 규칙적인 걸음이다. 부모님이 가시자마자 저녁도 마다하고 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연인인 것처럼 거짓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반항으로 비쳐도 할 수 없다. 어지러운 마음 속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꽤나 지쳐 있는 것이다. 길다면 길었던 우리의 사랑에……. 갑작스럽고 완벽한 상우의 배신에……. 결국 지킬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맹세에…….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알콜은 뇌세포를 마비시키고 인간의 기억을 농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꼭 처절한 숙취에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두통이 묵직하게 내려앉았고, 목은 꽉 잠긴 데다, 어질어질함에 걷기조차 힘들다. 쿵. 결국 욕실 문 옆의 벽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둔탁한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기대서 있는데, 어김 없이 뒤에서 빈정거림이 들려온다. "설마 벽을 뚫고 들어가려던 건 아니었겠지?" 두 번째 함께인 아침에 다시 만난 '설마맨'이다. 내 바로 뒤에 서 있는 건지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상쾌한 치약향이 맡아지는 걸로 봐서 태양은 벌써 다 씻었나 보다. 나도 얼른 씻고 출근해야 하는데, 아직은 몸을 움직일 자신이 없다. 세면대를 붙잡고 차가운 욕실 바닥에 쓰러지는 취미 따윈 없으니까. "어디 아프나?" 내 어깨를 쥐는 손가락은 말투와는 달리 부드럽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면서 내가 말했다. "미안한데……." 벽을 짚은 내 손등 위로 서서히 이마를 가져다 댄다. 호흡이 거칠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 때문에 목소리도 떨려나온다. "정신차리게…… 나 한 대만…… 세게 때려주라." "……." 아무 반응이 없다. 싫으면 말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잠시 바닥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겠다. 무리해서 일어난 게 잘못이었나 보다. "너 어제보다 더 하얗다. 밤새 뱀파이어한테 피 빨린 사람 같다." 젠장. 헌혈하고 바로 죽은 시체 같다는 표현이 차라리 더 인간적이다. 뱀파이어라니. 안 그래도 혼자 자는 거 싫어하는데, 밤에 생각나면 어쩌라고. 내 굽혀지는 무릎과 상관 없이 바닥이 너무 빨리 가까워진다고 느낀 순간, 나는 내가 쓰러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식이 이렇듯 천천히 멀어지기도 하나? 옆으로 넘어가는 내 몸을 안듯이 받쳐든 사이보그의 넉넉한 가슴팍이 보였다. 그 때……. "날 모른다는 말 믿어야 하나, 여재인? 내가 또 속아주면, 넌 나한테 뭘 해줄 건데?" 완전히 의식을 잃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뜻 모를 혼잣말을 내뱉는다.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마치 다른 누군가를 향한 듯한 태양의 슬픔에 잠긴 목소리였다. "더 예뻐지다니, 심히 유감이다." 회사에 못 간다는 전화를 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쉬는 건 괜찮았다. 그런데 왜 이 사이보그까지 출근을 안 하고 여기 남아있냔 말이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내가 누운 침대 맡에 앉아있던 그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대체 누가 환자한테 커피 따위를 준단 말인가. 낫지 않기를 바라거나 빨리 죽으라고 염불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하지만 그가 내민 머그 잔의 향기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유혹에 무척 약한 인간이다. 그래서 받아마셨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건 커피라기보다는 닝겔 대용인 것 같다. 묽은 디카페인 커피에 초콜릿을 다량 녹인 달콤한 에너지원. "이 다 썩겠다." "빠른 체력 회복엔 단 게 좋아." 고맙다는 말 대신 중얼거린 내 말에 그가 진지하게 대꾸한다. 불편하다. 이불을 끌어당겨 턱밑까지 덮어도 그의 시선이 편치 않다. 벽 쪽으로 돌아누우려는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감기몸살 같은데, 혼자 견딜 수 있겠어? 난 지금 나가면 며칠 못 들어올 거다." 딱하다는 느낌이 물씬 배여있는 그 말에 왠지 울컥했다. 태양인지 달덩이인지, 못 들어오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난 이제 혼자인데. 동정한다고 저가 대신 아파줄 것도 아니잖아. 아까짓 아픈 거 쯤이야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됐다! "조용히 쉴 수 있으면 나야 더 좋지." 너무 냉랭하게 말했나? 태양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다. 그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참는다. 내 등을 레이저 쏘아대듯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긴 시간 침묵이 흐른 후에 조용히 방문이 닫혔다. 이렇게 또 혼자가 된다. 익숙한 천정을 올려다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에 머물고 싶었던 이유, 그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더불어 혼자도 아니니까. 난 태양을 이용하고, 태양은 무슨 이유에선가 이용당해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대체 왜? 내가 기억은 못하지만 한때 자신의 친구였기 때문에? 천성이 무뚝뚝한 녀석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완벽하게 생긴 주제에, 사람 기죽게 마구 딱딱거리다니. 휴우. 아무렴 어떤가. 아픈 머리로 이 정도 생각한 것도 용하다. 이유를 따지든, 후회를 하든, 이미 시작돼 버렸다. 거지왕자와 사이보그의 아슬아슬한 동거 말이다. <그림자는 존재의 귀납적 증명이다> 밤 중에 깨어 사람이 그리우면, 이불 털고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내 그림자라도 보야야 안심이 된다. 적어도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4. 자는 사이 열이 더 올랐나 보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다. 이런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는 느낌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켜지 않고도 어둑하나마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걸 보면 아직 낮인 것 같다. 이러다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급기야 과격한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목에 손을 갖다댔다. 편도선이 잔뜩 부어올라 침을 삼키기도 힘들다. '이까짓 아픈 거 쯤'이 아니었다. 젠장, 죽을 것 같다. 나는 이불을 걷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을 향했다. 입술이 바짝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다. 냉장고까지 마라톤하는 기분이다. 힘이 하나도 없어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나쁜 놈. 이렇게 아픈 사람을 두고 저 혼자 출근을 해? 괜히 애꿎은 사이보그를 원망해 본다. 그래도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컵……. 컵이 어디 있더라? 찬장을 뒤지다가 크리스탈 잔을 발견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갖가지 음식들으로 꽉 차 있다. 그 잘난 인물과 재력으로 성격 좋은 우렁이각시라도 키우나 보다. 생수병을 꺼내 잔에 따르는 것조차 힘들다. 한심하다, 여재인. 스스로를 향해 낮게 혀를 차면서 탁자를 짚는다. 세상은 다리다. 어릴 적 읽었던 코란에 그런 말이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되, 그 위에 집을 짓지는 말라고. 순간을 바라는 자는 영원을 바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원을 바라는 자는 불행해지게 되어 있다. 어려워서 그냥 넘겼던 얘기가 이제야 마음에 푹 꽂혀, 기어이 피를 낸다. 나는 다리인 줄도 모르고 내 작은 사랑 위에 집을 지었다. 사랑이 영원히 밑에서 굳은 땅처럼 버텨줄 거라 미련하게 믿었던 거다. 이젠 땅도 집도 무너져 버렸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진이 일어났던 걸까? "뭐야? 일어나 돌아다니는 거야?" 갑작스레 현관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바람에 손에 가까스로 들려있던 크리스탈 잔이 툭 떨어져 박살이 나고 만다. 챙그랑! 이건 사고다. 상황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사고. 엉망으로 깨진 유리 파편들 속에 서서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거기 가만 있어, 꼬맹이!" 모르는 사람인데 어쩐지 목소리가 설지 않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남자는 굉장히 빠른 동작으로 다가와 유리를 쓸어담는다. 살짝 발을 들려는 찰나 어떻게 알아챘는지 내 다리를 손으로 꾹 잡아 눌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 "재인이라고 했나?" 난 내 이름 말한 적 없는데……. "태양이 새끼가 아까 전화했더라고. 그 날 주워 가라고 널 억지로 떠맡긴 건 난데, 그 새끼도 걱정이 되긴 되나 봐. 암튼 내가 오프인 건 귀신같이 알아서 접수해요, 제기랄." 욕쟁이 형이로군.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선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주위를 쓸어가며 중얼중얼대는 머리 꼭지가 참 동그랗고 이쁘다. 얼굴은 고운 사람이 말은 어찌 저리도 험할까? 그건 그렇고, 사이보그가 날 걱정해서 사람을 보내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닦아낸 남자는 고개를 들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 됐다. "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곧장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날 끌어안듯 들어올린다. 헉. 너무 놀라 대꾸할 말도 찾지 못하는 새, 남자는 태양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커다란 침대 위에 날 폭삭 내려놓고는 만족스러운지, 흐음 하고 자신의 턱을 매만진다. 가슴을 마주댄 채 안아서 들어옮긴 거라, 내 등이 그의 젖은 손에 닦인 물기로 축축했다.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자. 네 침대보단 편할 테니까." "여긴 왜 오신 거에요?" "아, 태양이 새끼가 저희 집에서 송장 치르기 싫다고 지랄을 했다니까." 그가 걱정했다는 게, 내 건강이 아니라 그런 거였어? 별로 놀랍지도 않다. 아니, 놀랍지 않아야 하는데……. 당연한 건데……. 그런데……. "뭐 나도 꼬맹이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하고. 시간도 있겠다, 약 사들고 달려와 봤지. 내가 보기와 다르게 요리도 잘 하거든. 좀 있다가 맛있는 죽 끓여줄게." 문제의 우렁이 각시가 이 남자였던 건가? 서글서글한 말투나 표정이, '경계심이 뭔데요?' 하게 해준다. "재인, 몇 살이야?" "스물 일곱입니다." 거칠하게 쉬어버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짜네. 태양이 새끼가 동창이라길래 절대 안 믿었는데. 야아, 너도 참 그 얼굴로 세상 살기 힘들겠다." 댁 얼굴도 만만치 않으신데요. 태양에게 '형'이라고 불렸던 만큼, 나이도 꽤 있으신 것 같은데. "꼬맹이라고 부른 거 기분 나빴겠군." 내 말이 그거였거든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꼬맹이라는 호칭이 내 키 때문이 아니라 동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조용히 눈을 감자, 의외로 잠이 솔솔 덮어온다. "그래, 그래. 푹 자라. 환자는 자고, 수다쟁이는 밥 하러 가자." 그 말 끝에 싱긋 웃는 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따라 지었던 것 같다. 호랑이가 이번엔 바로 정면에 도사리고 있다. 으르릉거릴 때마다 보이는 거대한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쩍였다.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설 때마다 오히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리. 나는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도 있는 힘껏 발을 떼어 도망친다. 공포를 이기지 못해 비명을 질러대다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져 버린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몸을 날려 날 덮쳐버리는 야생의 짐승. 밀쳐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더 무겁게 짓누르는 놈의 무게에 숨이 막힌다. 다음 순간, 내 머리통을 삼킬 듯 커다랗게 입을 벌려 포효하던 호랑이가 내 왼팔을 덥썩 물어뜯었다. 미쳐 버리고 싶을 만큼 숨막히는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찐득한 피내음. 나, 이대로 죽는 거야? '죽긴 왜 죽어....' 멀리서 형체도 없는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응? 누구……? 잘 안 들려. '넌.....말이다. 아깝지도.... 그렇게 막 웃지.......' 시원한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목소리가 중간 중간 끊긴다. 라디오 주파수가 어긋나는 것처럼 잡음도 심해서 알아듣기 힘이 든다. '이젠......정 마...... 살려줄게.......너.......이쁘....' 응, 살려줘.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나 좀 어떻게 해 봐봐. 따뜻한 물처럼 온 몸을 감싸는 듯한 그 목소리에 매달리며 난 눈물을 흘렸다. "이 봐! 이쁜이. 눈 떠! 정신 좀 차려 봐." 날 마구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흥건하게 젖어있는 베개가 축축하지만 차갑진 않았다. 식을 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파? 나쁜 꿈 꿨어?" "……." "괜찮아. 아프면 원래 악몽 같은 거 꾸게 되어 있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일어나 앉은 내 등을 토닥토닥 쳐준다. 자는 새 땀을 많이 흘려 찝찝했지만, 몸은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뜨거운 물에 간단히 샤워를 하고 새 속옷과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구수한 향을 풍기는 소고기죽이 식탁 위에 간장과 함께 놓여 있다. 남자는 내가 다가가자 활짝 웃으며 의자 하나를 가리킨다. "내 이름은 남강호다. 태양이 사촌 형이지. 재인이 너도 그냥 편하게 형이라 불러." "네, 강호 형. 맛있게 먹겠습니다." 내 붙임성 있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또 웃는다. "씨발 놈의 쇠고기가 다 떨어져서 내가 저 지랄 맞은 비 맞고 나가 사왔잖냐. 죽 더 있으니까 많이 먹어라, 이쁜이." 내 젖은 앞머리를 슬쩍 쓸어넘겨주며 친근하게 웃는다. 어느 새 형성된 절친한 형, 동생 같은 분위기. 이게 바로 정상인 거다. 태양과의 딱딱한 대화는 사교성 풍부한 내가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그것이다. "그런데 재인아." 죽 한 숟가락을 떠서 후후 불고 있는데, 진지한 음성으로 강호 형이 부른다. 눈을 올려뜨고 그대로 죽을 입으로 가져가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너 정말 태양이 기억 안 나냐?" 푸풉. 앗, 뜨거! 콜록, 콜록!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괴롭게 기침을 해댄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내가 당황한 건 둘째 치고라도, 날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강호 형의 얼굴은 심상치 않다. 차분하게 찬 물을 빈 컵에 따라주며 내 쪽으로 밀어주는 움직임이 다소 느릿하다. "기억 못 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솔직히 내내 궁금했다. 기분 나빠 하지 마라." "강호 형……." "듣자 하니, 태양이 입장에선 충분히 섭섭할 수 있겠어. 2년이나 같은 반이었다면서." 여태 숟가락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굳어 버렸다. 태양과 내가 친했을까? 그…… 고2, 고3때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학창시절에 반의 어느 누구하고도 서먹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사교적이기도 했지만, 특별히 모나지 않을 뿐더러 돕는 걸 좋아하는 성격 탓이었다. 수줍은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다행히 먼저 말 걸어주는 녀석들이 많아서 곧잘 친해졌다. 적도 없었고, 특별한 단짝도 없었다. 어찌보면 반 친구들 모두가 내 울타리 안에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기억을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모두와 친하다는 건, 아무와도 특별하지 않았단 뜻이니까. "혹시 태양이 새끼가 심술궂게 굴어도 이쁜이가 이해하라고." 그런 적은 없다. 태양이 딱딱하긴 해도 지금까지 쭉 날 곤경에서 구해주는 쪽이었다. 태양을 많이 아끼는 듯한 욕쟁이 아니, 강호 형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쁜이'란 표현은 좀 거슬린다. '꼬맹이'보단 준수하지만, 아무래도 '멋쟁이'보단 약하지 않나 싶다. 다음 날, 출근을 하면서 올려다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가 예상되지만, 비에 젖은 눅눅한 공기보다는 반가웠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부매니저인 현진이 내 자리로 빠르게 다가온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두터운 서류철을 보면서 나직이 한숨을 쉰다. 어제 결제하지 못한 안건이 수두룩하겠지. 다들 바빠보이니 일단 우리 셀만이라도 회의를 소집해야겠다. "좀 더 쉬시지 그랬어요." 말과는 달리, 급한 듯 결제안부터 내민다. 나는 현진에게 대꾸하는 대신 펜을 들고 그것부터 받아들었다. 꼼꼼한 그녀가 체크한 사항이라면 그다지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문건 하나 하나를 넘기며 살펴보던 내 눈에 의외의 사안이 잡혔다. "황 감독. 역시 무리였나 보군." 내 중얼거림에 현진이 코끝을 찡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역시 대본 때문인 것 같아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무작정 공연 일정을 연기할 순 없지. 내가 한 번 말해볼 테니 이 건은 일단 보류하죠." 고개를 끄덕이는 현진에게 나머지 서류를 건네주며 미소지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린 듯 했지만, 곧 감춘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한 마음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현진의 등을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전화기를 들어 일단 황유진 감독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시오." 뒤가 길게 늘어지는 특유의 응답. 언제나 똑같다. "중앙예술관의 여재인입니다." 비스듬히 기댔던 자세를 바로 하는지, 의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여 매니저! 몸은 괜찮나? 목소리는 왜 그래? 그래도 출근해서 이렇게 전화한 걸보니 살만 한가 보군. 어제 자네와 통화가 안 돼서 어찌나 답답하던지! 내가 말이야, 소식 들었나? 빌어먹을 스크립터……." "이번에도 잠적했겠죠?" 황 감독의 횡설수설을 자르며 내가 물었다. 저 즉흥적이고 거친 입담 때문에 밑에서 오래 견디는 사람이 없다. 나이에 비해 워낙 혈기왕성한 황 감독은 뭐가 그리 좋은지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역시 자네야. 어째 알았어? 이번엔 잠적 뿐만이 아니라 협박까지 해대고 있어. 그 동안 부려먹은 삯을 밤낮으로 계산해 지불하라고 말이야. 근데 그게 자그마치 얼만 줄 알아?" "약 40 여일 근무했으니, 적어도........이백은 넘겠군요." 잠시 암산을 해보고 답하자, 이번에도 황 감독은 껄껄 웃어댄다. "맞아. 정확히 2,275,300원이라는 거야. 이백이면 이백이고, 삼백이면 삼백이지 끄트머리에 삼백 원은 또 뭐야! 안 그런가?" "시간 당으로 보수를 받는 계약직원들에겐 당연한 계산법입니다. 삼백 주셔도 그 분은 마다하지 않고 받을 겁니다." 내 이성적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뜸, '그럴까?' 묻는다. 그래도 스크립터가 돌아오진 않을 거란 내 말에 금방 시큰둥해지긴 했지만. "사태가 심각하긴 하지만, 이런 일 있을 때마다 무작정 공연을 미룰 순 없어요." "알지만, 어떡해." "제가 잘 아는 작가 소개시켜 드릴게요. 손발이 맞나 시도나 해보세요." "오오, 그럼 나야 좋지. 이왕이면 오늘 중으로 부탁해." "당연하죠. 대신 경고해두는데, 황감독님 못지 않게 괴팍한 작가니까 요령껏 써먹으세요." "오케이! 괴팍은 괴팍으로 다루어야 참맛을 우려낼 수 있는 법. 자네 그거 아나?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탐나는 친구야. 하는 짓마다 내 마음에 쏙 들어. 아하하하!"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황유진 감독처럼 단순해 보이는 사람도 깊이 알고 보면 무척 복잡하고 까다롭다. 마음지도가 있다 해도 결코 닿지 못할 부분이 많은, 각종 미스테리를 갖춘 인물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듣는 칭찬은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기보다 적지 않은 긴장을 수반한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앞으로 더 잘 해야지, 라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소설가 친구의 집으로 전화를 걸면서 희박한 가능성을 점쳐 본다. 황감독과 지효가 기적처럼 일 궁합이 맞아, 대작을 탄생시킬 확률 같은 것 말이다. 원래 낮은 확률에 베팅할수록 크게 터지는 법이니까. "여 매니저, 나 잠깐 보지." 오후가 되자, 박영한 실장이 내 책상 위를 톡 치며 말했다. 생전 이쪽 사무실로 건너오는 법이 없는 그가 친히 와서 면담 요청을 하다니. 회사 오래 다니고 볼 일이다. 조금 불안정해 보이는 표정이 썩 개운치가 않다. "무슨 일이시죠?" "내가, 이런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혹시 내가 어제 결근한 것 때문에 이러나? 하긴 입사 이래 결근은 최근의 두 번이 전부다. 그러니 갑자기 우려가 될 만도 하겠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자네 인기 좋은 거 내 알지. 인형처럼 곱상하게 생겨서는, 일 똑 부러지게 하지, 동료들과 잘 어울리면서 사무실 분위기 화사하게 이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있나." 칭찬을 늘어놓자고 부른 건 아닐 게다. 욕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어떻게든 웃음으로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말로 시작되는 대화의 끝은 나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런데요?" 내 단정하지만 차가운 물음에, 일순 박 실장이 입을 다문다. "그런데…… 남자 애인이 있다는 걸 그 동안 숨겼다니, 좀 의외였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째서 그 얘기를 다시 꺼내는 걸까? 그리고 대체 어떻게 저처럼 확신하게 됐을까? 그저께는 마치 농담처럼 지나치듯 흘려 묻던 질문을……. "어제 또 찾아왔었어. 상우, 진상우라는 사람 말이야." "……!" 이번엔 이름도 정확히 외운다. "자네 출근 안했다고 말했는데도, 한참 동안 가질 않는 거야. 자네 애인이라면서 어떻게 전화 번호도 모르냐 물으니까, 그냥 먼 발치에서 보고 갈 생각이라고,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더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나? 우리 예술관의 최고 인기인으로 공인된 자네의 연인이라는데. 대형 스캔들 터진 줄 알라고. 이미 극장 내에 쫘악이야." "그래서요?" 내 짤막한 물음에 애써 결론을 피해가려던 박실장이 헛기침을 한다. "권고사직." "이런 법은 없지 않나요?" "법이야 그렇지. 경영진들도 대놓고 말하진 못해. 하지만 나중엔 충분히 그러고 싶어질 걸." 자네도 알잖아, 그런 말투다. 나는 대답 대신 주먹을 꼭 쥐었다. 물론 박 실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 출근해서 인사를 나눈 사람이라곤 현진이 다였다. 몸살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내가 피곤한 탓도 있었지만, 먼저 다가와 인사하지 않는 동료들의 눈치가 이상하긴 했다. 이렇게 슬쩍 언질을 주는 것도 박 실장 나름의 우정 표현일 게다. 이것 역시 오지랍 넓은 성격 탓에 나온 마지막 우정의 제스처겠지만. "이 계통에 동성애자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자네도 알 테지만, 오히려 천재예능인들의 사생활에서는 공공연히 엿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문화예술관 매니저란 위치는 그런 예술가들의 범주에 들긴 힘들지. 인정 받기 힘들 거야. 다들 말은 안 해도 그 속이야 뻔하지. 이제 시작일껄. 할 수만 있다면 자네도 해명하고 싶겠지. 하지만 어떡해, 이미 들춰졌을 걸. 여 매니저가 거짓말 못하는 거야 내 뻔히 잘 알고." 무슨 말인지 안다. 험한 소리 듣기 전에 사표를 쓰란 얘기다. 그게 나를 위해서 좋다는 것도 안다. 상처 받길 두려워하던 예전의 나라면 말이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마음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동성애자라는 비난과 혐오의 손가락질보다, 사표를 내도 회사는 끄덕없다는 뉘앙스에 내포된, 내 일과 업적에 대한 하찮은 평가가 더 가슴 아프다. 그래도 졸업 후 최선과 열정을 바쳐온 직장이었는데.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몇몇 직원들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 중 아무도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신경 쓰기 시작하자, 마구 걸리적거리는 이 불편한 분위기. 결국 복도로 나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랗던 하늘에 꾸물꾸물 먹구름들이 모여들더니 어느 새 쏴아 비가 내린다. 인생 참 재밌다. 아무리 소중해도, 죽이게 애절해도, 완벽한 내 것은 없는 거구나. 시나리오로 써도 꽤나 괜찮은 소재겠다. 공기가 그 새 빗물을 먹고 축축해졌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비가 셔츠를 적신다. 어깨 위로 한기가 들더니 오솔오솔 몸이 다시 떨린다. 젠장. 커피가 쓰다. <모르는 사이, 아마도 잊게 될 거야> 날은 덥고, 무언가 끈적한 것들이 나를 둘러싼 느낌이다. 선풍기 바람은 꺼릴 것이 없다는 듯 가슴을 지나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막연해져 간다. 5. 언젠가 상우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다. 곧장 죽어버린다 해도 네가 부르면 뛰어갈 것 같다고. 그것은 큰 길의 신호등 앞에서 핸드폰을 통해 들려준 말이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4차선 대로의 건널목, 내 건너편에 서서 파란불을 기다리던 상우가 그 새를 못 참고 전화를 걸어왔었다. "재인아, 지금 니가 부르면 난 곧장 니 곁으로 뛰어간다." "빨간불인데? 그럼 죽어, 바보야." "무섭지? 나도, 실은 무섭다." 그럴 수 있는 자신이 저도 두렵다 했다. 급속도로 무작정 나에게 빠져드는 자기 자신이. 그 때의 내가 소리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파란불로 바뀌면 와, 상우야. 빨간불일 땐 안 부를게.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건널목 양쪽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들었을 때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졌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향해 걸었던 우리 두 사람은 건널목 한 가운데서 만났다. 두근대도록 깊었던 포옹.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무서웠니, 진상우? 너 그래서 도망간 거야? "사랑은.... 무섭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니?" 소용 없는 혼잣말. 답해줄 사람도 없는 질문. 사랑에 빠졌다면, 무서울 게 없어야 했다. 적어도 날 사랑한다고 믿었다면, 너 무서워도 극복해야 했다. 겁쟁이 주제에, 내 마음 질긴 건 어찌 알았어? 모든 걸 밟아놓지 않으면, 이렇게 감쪽같이 숨지 않으면, 내가 널 포기하지 못할 거란 생각 그 둔한 머리로 어떻게 해낸 거야? 적어도 후회하게 만들진 말아야지……. 널 만나고, 널 사랑하고, 너와 함께 했던 순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이건…… 아닌 거잖아…….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 버렸다. 맨정신으로 집에 들어갔다가는 그 끊어낼 수 없는 정적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술이 이렇게 괴로운 건지 이전엔 정말 몰랐었다. 취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굳게 닫혀 있는 현관문에 퉁 등을 기대고 섰다. 어둠이 이 안에 있다. 날 삼키길 기다리는 적막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감이 이 문 뒤에 있다. "여재인?" 그 때, 내 등을 밀어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환하게 쏟아져나오는 실내의 불빛이 금세 날 노랗게 물들인다. "남태양 씨. 웬일이야? 며칠 안 들어온다고 으스대며 사라져 놓고." 아팠다. 술이 날 아프게 했다. 그래서 멀쩡한 모습으로 날 맞이한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머리가 벗겨지도록 밤새 이마를 쓸어주던 연인은 사라지고, 냉정하게 등을 보이며 집을 나갔던 동거인은 거짓말처럼 돌아와 있다니. 희안하네. 세상 참 우스워.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놔! 누가 나 잡으랬어. 응? 남태양 씨, 명심해. 난 자유인이야. 이제 아무도 날 못 잡는다고. 왠 줄 알아? 드디어 자유를 얻었으니까. 난 완전히 혼자야. 겁나도록 신속하게 버림받은 몸이거든. 빌어먹을……!" "빌어먹을." 예민해져 있다. 참을 수 없이 뭔가로 가득 차 버려서 흘러넘치고 있다. 남태양. 너 오늘 재수 참 없다. 그러니까 왜 돌아왔어? 오지 말지. 와서 이런 내 꼴 보지 말지. 나는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이 화가 나서 그의 멱을 틀어쥐었다. "왜 따라해! 왜 따라해, 남태양! 니가 뭔데, 남의 말 막 반복해! 그 말이 니 꺼야? 니꺼야!" "비켜." 위험해 보이는 나직한 경고. 그런 건 이렇게 절박한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 법이다, 자식아. 그래서 더 재수 없다. 네 말이면 무조건 다 통할 줄 아는 그 오만함. "싫어! 내가 니꺼니? 왜 함부로 명령이야. 니가 뭔데 날 무시해! 내 주인이라도 돼? 날 가졌어? 가지고 싶어?" "그래! 가지고 싶다! 어쩔래! 줄 꺼냐? 너 나 줄래! 씨발! 아니면 확 훔쳐버릴까? 어? 그걸 원하는 거야, 여재인?" 버럭 버럭 고함을 질러댄 태양의 목청에 내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순간 그의 옷깃을 놓고 두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커다랗고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녀석이 소리쳐대자 좀 많이 무섭다. 화 내지 마……. 지금 나한테…… 그러지 말아줘. 나는 줄곧 분출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터뜨릴 게 너무 많아 온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다. 제 때에 나타나 준 태양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노력 중이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현재 내 상황을 온전히 쓸어안기 위해서. 정신 나간 듯이 횡설수설하던 말의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난 멍하니 섰다. "젠장, 까 먹었어." "……."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다…… 까먹었어. 너 때문에." 어이 없는 표정. 곧 이은 나직한 한숨. 태양이 어찌 납득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화는 내지 않는다. 다시 내 팔을 잡아 끄는 그의 손. 나는 그 위에 자유로운 다른 손을 얹고 천천히 밀어냈다. 내 귀에도 김 빠지게 들리는 음성이, 소파를 가리키는 손끝으로 이어졌다. "앉아, 집주인. 오늘 내가 방값 대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 얼마나 긴 얘기였을까? 한참을 주절거리다 눈을 들었을 땐 뿌옇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앉아서 태양은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했다. 정신이 드니, 새삼 미안해진다. 무슨 말들을 했는지 나도 다 기억 나질 않으니, 듣기는 어땠을까? 즐겁지도 않은 이야기, 인내가 필요했을 텐데. "그럼, 이제 너의 그 애인이었다는 자를 찾는 건 포기한 건가?" 지친 한숨을 쉬며 가만히 소파에 등을 기댔을 때, 태양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헐렁하게 걸려있던 넥타이를 풀고, 목 뒤를 주무르며 나는 짧게 대답한다. "상우가 직장으로 날 찾아 왔었다잖아." "그런데?" "'그런데' 라니. 그게 무슨 뜻인 줄 모르겠어?" "당연히 모른다." '모른다'란 말에 '당연히'를 붙일 수 있는 남자. 그가 남태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도 저 당당한 자신감을 가졌던 때가 있었지. 불과 오래 되지도 않았다. "2년 전에 상우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 아니, 그 사실을 친구들이 알게 되면서부터. 왜 있잖아, 그렇고 그런 반응들. 다들 변하더라. 게이랑 정상적인 우정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무튼 나로선 심리적으로 타격이 꽤 컸어." "그 중에 진짜 친구는 없었나 보지." 태양 다운 코멘트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어쩌면……. "그 날 이후로 동창회 같은 덴 안 나갔어. 친구들도 날 불러내지 않았고. 막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도 나가지 않았지. 그건 상우 역시 마찬가지였어.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조심했고, 직장 근처로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어. 나 역시도. 그런데……." "그가 몰래 다녀갔다? 묻지도 않았는데 너의 애인이라고 굳이 밝히면서?"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게 무슨 뜻이겠어?" "……." 완전히 끝났어. 내가 사람들에게서 어떤 시선을 받든 상관 없다는 뜻이잖아. 직장에서 짤리든, 손가락질을 받아 스스로 사표를 쓰든, 내 인생 망가지는 것 따위 저는 더 이상 상관 없다는 거잖아. 긴 침묵이 흘렀다. 조용한 집안에는 시계 초침소리마저 없다. 많은 걸 털어놓았으면서도 이상하게 부끄럽거나 후회가 되진 않는다. 태양의 진지한 표정이, 무거울 것 같은 입이, 이해가 빠른 눈빛이, 그리고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 손이 내 마음을 진중하게 덮어준다. 마치 두터운 겨울 솜이불처럼. 우습잖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와 마주앉아 있다니. 발코니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해무리가 올라오고 있다. 하늘로 번져오르는 붉은 빛에 시선을 사로잡혀 있을 때, 나직한 음성이 내 귀로 파고들었다. "모르는 사이, 너도 다 잊게 될 거다." 고개를 돌리자, 태양은 날 바라보고 있다. 그의 옆 얼굴에 아침해의 부드러운 빛덩이가 발라져 있다. 새삼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내 눈뿐만 아니라 내 심장도 그를 보고 있다. 고즈넉함 속에서 발견한 그 풍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나즈막히 속삭였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해?" 그러자 그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네 기억력 그다지 좋은 편 아니다." 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아직도 마음이 상해 있나 보다. 언젠가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대학 안에서 우연히 옛 동창을 만났다가 끝내 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상대방 때문에 조금 섭섭했던 적이 있다. 어렸을 때 꽤나 친했던 녀석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그러려니 했다. 바쁘게 살다보면 잊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한참 대화를 나눈 후에야, '맞아, 네가 걔였구나.' 하는 말에 또 한 번 '히끅' 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넘어갔다. 기억에는 개인 차가 있을수 있으니까. 그런데 태양은 꽤나 오래 연연하는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대화 중에, "맞아. 너 그랬었어. 생각 나." 라고 말할 지 누가 알겠는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아무런 설득 없이 지금 내 앞에 있다. 사방에 널린 수 많은 그 불투명함이 날 벼랑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 속에서 단 하나의 투명한 유리벽을 만난 느낌이다. 남태양. 왠지 이 친구만은 꼭 기억해내고 싶다는 갈망. "나랑 장 보러 가." 하루 종일 방에서 잠만 자던 태양이 저녁 무렵 거실로 나왔을 때 내가 말했다. 부스스한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을 턱 얹어 누르던 중에, 내 말을 듣고 흘끗 돌아본다. "배 고프면 냉장고 열어." "내가 먹을 건 슈퍼에 있어. 그 안에 없어." "그럼 너 혼자 가." "……." 짧게 대화를 끝내고 욕실로 들어가려던 태양이 문득 돌아본다. 대답이 없는 내 쪽 분위기가 수상했던 거다. 눈치가 완전 젬병은 아닌가 보지. 원망이 가득한 내 눈빛을 보고, 사이보그는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꾹 다문다. 이윽고 아무 말 없이 욕실로 가서 칫솔에 치약을 꾹 짜갖고 나오더니, 툭 내뱉었다. "뭐해? 옷 입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내 방으로 달려갔다. 돈이 없다는 얘기가 차마 내 입으로 뱉어지지 않는 것도 슬픈 일이다. 그런데, 꼭 한 템포씩 늦긴 하지만 결국 져주는 태양에게 고맙단 말조차 하기가 힘들다니. 그런 짧은 인사도, 갚을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나 쉽게 건넬 수 있는 거였음을 이전엔 몰랐다. 그가 내 상태를 잠시 잊은 건 이해한다. 월급 날만 바라보며 이 모든 원수를 갚으리라, 삼겹살과 소주 팡팡 쏘며 호탕하게 웃으리라, 위안 삼았던 나의 상황이 하루 만에 또 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 치게 된 것이 나는 못내 서글펐다. 어쨌든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살아 있으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라임 색 폴로티에 하얀 반바지를 입고 베이지색 야구모자를 썼다. 며칠 몸살로 고생했다고 그 새 헐렁해진 허리에는 카키색 면직벨트를 맸다. 벨트의 여유분이 많이 남아서 허리 옆으로 둘러 끼워 넣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데, 태양이 노크도 없이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중학생 소풍 가는 거 아니다." "이 차림이 어때서?" 그는 검정색 아르마니 남방셔츠에 짙은 물빛 청바지를 입고 있다. 캐쥬얼하긴 저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웬 시비냐 싶어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 스타일에서 조금 차이가 나긴 한다만, 그렇다고 중학생이라고 폄하할 껀 또 뭐냐. 여전히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고 쳐다보는 그에게 나도 부아가 나서 톡 쏘고 만다. "지갑은 챙겼어?" 내 질문에 보란 듯이 들어보이는 그를 지나치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에게 자꾸만 뻔뻔하고 퉁명스럽게 구는 자신을 꾸짖으면서. 실은 나도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닌데. 아무래도 그가 오해할 것 같다. 멈칫. 갑자기 서 버리자, 따라 나오던 태양의 가슴이 내 등에 부딪혔다. 작게 불만을 토로하는 음성이 들려왔지만 나는 한 가지 생각에 매달려 있었다. 태양이 날 오해하는 게 왜 걱정돼? 그가 날 제대로 잘 보아주길 바라는 거야? 무엇 때문에? 설마……. 도리도리.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태양의 커다란 두 손이 뒤에서 내 머리를 부여잡는다. 어느 새 보드랍고 따스한 손바닥이 내 두 귀를 덮고 있었다. 그의 긴 손가락도 내 머리칼 속에 푹 파묻혀 살짝 힘주어 누르고 있다. 불현듯 밀려오는 낯선 그리움. 설마……. "어지럽다고 쓰러져도 이번엔 안 잡아줘. 무리해서 흔들지 마." 역시나 무뚝뚝한 그의 음성에 나의 '설마'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마음이 다시 평화를 되찾은 것에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지. 암! 내가 저 사이보그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겨우 그거야?" "난 큰 장 본다고 한 적 없어. 그러게 누가 그렇게 멋 내고 나오래?" '멋은 누가'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태양은 군말 없이 지갑을 열었다. 내 팔 안에 가득 안긴 강냉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나나 보다. 시선을 피하는 그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고마워.' 하고는 먼저 나왔다. 이 곳이 여섯 번째로 들른 구멍가게였다. 늘 가던 곳에 마침 내가 애용하던 강냉이가 떨어진 것이 화근이었달까? 근처의 슈퍼나 가게를 30분 동안 뒤져서 겨우 찾아낸 거라 더 소중히 끌어안는다. "몇 개쯤 들어줘도 돼." 그가 계산을 치르고 나왔을 때 내가 말했다. "됐어. 네 말대로, 멋이 안 살잖아." 삐질 줄도 아네. 신기해서 올려다보니, 그가 못을 박는다. "그렇게 생글거려도 소용 없어. 안 들어준다고." "알았어. 근데, 여기 요 옆에 있는 거 빠질 것 같아. 빼서 위로 올려줘." 내 부탁에 태양은 마지못한 얼굴로 다가왔다. 위태롭게 삐져나온 허리 부근의 강냉이 한 봉지를 빼든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몇 걸음 뛰듯이 그로부터 떨어지면서 말했다. "그거 들어준다고 팔 안 떨어져." "버린다." "여기 얹어." 그의 한 마디에 금세 풀이 죽어 항복하고 만다. 모두 합해 7 봉지. 한꺼번에 많이 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멀리까지 온 보람도 느껴야겠고,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다른 곳에도 강냉이 있었잖아.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사야 하는 이유가 뭐야?" 꽤나 억울하고, 궁금한 모양이다. 이해한다는 듯 싱긋 웃으며 내가 대답했다. "메이드 인이 틀려." "강냉이에 웬 산지 타령?" "모르는구나. 공장이 틀리잖아. 공장을 가진 강냉이 회사들도 다 틀리고." 고개를 갸웃 하는 태양. 순간 조금 전에 보기 좋게 넘겼던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까만 색이던 그의 정수리엔 발그레한 저녁 햇살이 수줍게 앉아있다. "그냥 다 시장에서 튀겨내 중간 상인이 제각각 포장하는 거 아냐?" "말도 안돼!" 기 막혀. 이건 내 입맛에 대한 모욕이다. "뭐가 안돼?" 내가 외친 말에,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왜 말이 안 돼느냐면 말이지……. "너 입고 있는 그 옷, 시장 꺼야? 아니지? 브랜드 제품이지?" "그건 왜?" "내가 먹는 강냉이도 시장 꺼 아냐. 브랜드 제품이야." 도리어 제가 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이해할 수 없는 궤변으로 들린다 해도 할 수 없다. 이건 엄연히 내 정직한 취향의 문제니까. 돈 터치다, 남태양! "소 귀에 경 읽기겠지만 꼭 설명이 필요하다면, 조금 전 네 말은, 도떼기시장에서 아무 거나 골라잡은 옷에 판매자들이 마음대로 라벨을 붙여 파는 거 아니냐고 묻는 것과 같아. 이제 알겠어?"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그 강냉이 브랜드 네임이나 좀 알자." 미묘하게 웃음을 누르고 있는 듯한 그의 입가가 보인다. 보기 좋네. 활짝 웃을 땐 꽤나 시원하게 벌어지겠군. 멋지겠다. 나는 조그만 내 입술을 떠올리면서 잠시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대답하기 위해 내가 입을 열자, 그의 입술이 웃을 준비에 들어간다. "태양콘. 강냉이는 꼭 태양식품에서 나온 것이어야 돼." "……!" 응? 왜 안 웃는 거지? 좀전까지 웃으려던 거 아니었나? 이상하게 사이보그는 안 웃을 때 꼭 화가 난 것 같다. 쯔쯔. 저런 인상으로는 사회 생활 하기 좀 힘들겠다. 나온 김에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는 그의 제안에 우리 둘은 쌈밥집에 들어갔다. 두 팔에 가득 안고 있는 강냉이 때문에 식당 안의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왕창 받았다. 단 한 봉지도 들어주지 않은 친절하신 남태양 군은 하필 가운데 상 쪽에 자리를 잡았다. 시선을 받는 것도 그렇고, 강냉이 둘 데도 비좁고. 벽 쪽 좌석보다 여러 모로 불편한데. 아무리 애원하는 눈으로 쳐다봐도, 그는 모른 척 쌈밥 2인분을 주문할 뿐이다. "골라내지 말고 그냥 먹어." 잔소리꾼. 나는 이미 그 앞에서 취향에 대한 상처를 한 번 입었다. "겨자잎은 쏘고, 청경채는 써서 싫어." 그런데……. "다 먹어." 내가 슬쩍 골라내서 한 옆에 포개놓은 겨자잎을 그는 도로 채소들 사이사이 원위치에 끼워 넣는다. 그 얄미운 행동에 숨이 차올라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참아야지. 얻어먹는 게 어디냐. "인생은 쏘기도 하고 쓰기도 해. 달달한 배추나 만만한 상추 같은 줄만 아냐?" "……그걸 내가 모를까 봐?" 내 조용히 대꾸에 그도 입을 다물어 버린다. 가르치려 들었던 좀 전의 말투에 발끈하지 않는 나를 잠시 바라보면서. 그래. 어쩌면 몰랐을 지도 모른다. 가족을 떠나고, 친구를 잃고, 상우마저 사라지지 않았다면, 적어도 직장까지 포기해야 하는 이 상황까지만 겪지 않았다면, 인생은 달달하고 만만하게 골라 살 수 있는 거라고 여전히 믿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침묵으로 사과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인정한다. 적당한 크기의 케일 위에 상추 한 잎 그리고 무 한 장을 얹고 고추장양념 돼지고기와 쌈장을 놓고 잘 오무려서 입에 넣는다. 좀 큰가? 그래도 맛은 좋네. 나름대로 만족스러워서 꼭꼭 열심히 씹는다. 많이 먹고 오래오래 건강해야지. 그래서 돈도 벌고, 이 잘난 태양한테 빚도 갚고, 부자도 되어야지. 제일 큰 겨자잎에 청경채와 치커리를 듬뿍 겹치고 고기와 마늘, 청량고추와 쌈장을 푹 얹어 태양에게 내밀었다. 내가 싸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던 그가 눈썹을 치켜올린다. 말 없이 한 번 더 내미는 내 손을 바라보더니, 짧게 고민을 끝내고 고개를 내려 쌈을 받아먹는다. 엄청 쓰고 매울 텐데. 순순히 씹어넘기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곧장 후회한다. 목부터 새빨갛게 달아오른 열기가 얼굴로 확 몰리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태양은 물 한 컵 마시지 않고 잘 견디고 있다. 눈물도 곧 있으면 흘리겠다. "무슨 의미야?" 내가 줘놓고도, 먹어주는 이유를 묻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손 닦는 하얀 수건을 힘 주어 꼭 쥔 채 쏘고 맵고 쓴 맛을 모두 견뎌낸 그의 대답. "먹어도 사는 덴 지장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도록. 그는 결국 철봉에 맺힌 빗방울처럼 굵은 눈물을 떨군다. 얼마나 매웠으면. 청량고추를 세 조각이나 넣었으니 알 만 하다. "봐. 멀쩡하지?" "별로. 불쌍해 보이는데." 여전히 무감각한 내 대답에 태양은 과장되게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남태양.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 뿐인 걸. 그래, 어쩌면. 앞으로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비록 지금은 인생의 맵고, 쏘고, 쓴 맛에 정신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일단 현재는 불쌍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잖아. 너 나한테 방 내주고, 강냉이랑 밥 사주는 것도 그래서잖아. "불쌍하지 않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단번에 부정해 버린다. 눈을 내린 채 다시 열심히 쌈을 싸고 있는 내 모습을 주시하던 태양은 살짝 고개까지 내저으며 강조하듯 이렇게 반복하는 거다. "전혀 불쌍하지 않아. 더 튼튼하고 강해지고 있는 중이니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도 더 이상 우기지 못한다. 괜히 말했구나. 후회한다. 직장에 사표를 던진 날엔 뇌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우 얘기를 주저리 주저리 해버린 게 오히려 회복이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폭신하게 기댈 어깨가 아니라, 단단하게 지켜봐줄 시선이다. 그래야 울지 않고 똑바로 일어설 수 있으니까. 태양의 입장에선 꽤 난감할 것이다. 어깨든, 시선이든, 물질적 도움이든, 내가 무언가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은 오직 태양 자신, 하나 뿐임을 알아 버렸으니까. <끊임없는 되새김이 기억을 낳는다> 타인의 진심을 듣기 위해서는 그 진심을 넣어둘 가슴이 필요하다. 내가 네 가슴 얼마나 큰지 좀 보자 하면 너는 날 변태라 몰아 세우겠지만, 나는 두렵다. 너에게 담기지도 않을 이야기를 하게 될까 봐. 6.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하며 천재성을 달래던 리버 피닉스. 영화 '허공에의 질주' 속 그의 세상도 빛이 들어오는 순간 어둠이 달아난다. 마사 플림톤. 그를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준 기적의 빛. 풋내 나는 첫사랑. 영화 속 리버와 비슷한 나이였던 열여덟의 태양에게도, 그 당돌한 빛이 들어온 적이 있다. 고2 가을. 허들을 넘듯이 하루를 넘곤 하던 일상의 흔하디 흔했던 어느 날. 영화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녀석을 본 순간 'twinkle, twinkle, little star' 로 시작되는 동요가 떠올랐다는 거다. 한국말로 하면 '반짝반짝 작은 별' 이 되겠다. 가사뿐만이 아니다. 모짜르트도 반했던 그 순수하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어울리는 존재.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고, 조금 마른 듯 해도 보기 좋은 어깨와 새하얀 목이 시선을 붙잡던 소년. 비 개인 후의 하늘처럼 청량한 느낌의 투명한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다. 그 또한 눈에 띈다. [너랑 나랑 주번이야.] 지각도 아닌데 책망하듯 시계와 태양을 번갈아보며 '작은 별'이 한 말이다. 태양도 제 팔목의 시계를 본다. 교실 벽시계와 비교해봐도 역시 지각은 아니다. 책가방만 내려놓았을 뿐, 채 자리에 앉지도 못한 태양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본다. 그때였다. 녀석이 제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더니, 갑자기 생긋 웃는다. [맞다! 넌 미국에서 전학 와서 잘 모르겠구나.] 뭘? 주번을? [음, 여기 고등학교에선 있지. 주번이라는 특수 계급이 있어.] […….] 종알거리는 입모양이 흥미롭다. 태양은 그의 말을 듣기보단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데 집중한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녀석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한 것이다. [체육 시간에 안 나가고 교실에서 쉴 수도 있고, 급식으로 나오는 우유도 제일 먼저 먹을 수 있어. 게다가 다른 아이들보다 선생님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주로 방과 후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선생님들과 얘길 나누곤 하거든. 학교 당국에서는 이에 따르는 차별적 부작용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차례로 돌아가며 이 주번 계급을 주고 있지. 말하자면, 대통령 임기제 같은 거야.] 어때, 좋겠지? 라는 표정으로 태양을 올려다보며 또 생긋 웃는다. 정말 주번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태양더러 주번을 좋아하라는 건지. 말투가 설득적이다. 저 웃음. 위험한 가루처럼 뽀얗게 흩뿌리는 빛. 안개가 내린 밤도 아닌데 빛이 뽀얗게 느껴지다니. 왠지 저 예쁜 얼굴을 양 손으로 붙잡고 마구 뭉개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런데 이런 몇 가지 특혜를 누리는 대신, 지켜야 할 행동지침이 있어. 권리에 따르는 의무. 뭐 그런 거랄까? 그 중의 하나가 일찍 등교하는 거야.] [그래서?] [저기 한 번 봐봐, 저기. 어때?] 태양의 반문은 들은 체 만 체 하고서 갑자기 유리창을 가리킨다. 아니, 커튼인가? 아무튼 깨끗하네. 열어놓은 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나폴 나폴 햇살을 흡수하여 반투명해진 하얀 천이 유연하게 날린다. [그리고 저건?] 이번에 지목된 것은 교실 뒤편의 휴지통. 역시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그래서, 뭐? 라는 시선으로 다시 내려다보자,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갯짓한다. [앞도 좀 봐주시지?] 그의 말을 따라 태양은 순순히 교실 정면을 바라본다. 칠판에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칠판 곳곳에 남아있다. 촉촉하고 선명한 초록. 칠판이 원래는 저런 색이었구나. 다만 놀라운 것은 칠판 상단 꼭대기 부분. 뿌연 분필 자국이 아래쪽과 대비되어 더 지저분해 보인다. [너 키 크잖아. 내가 다 해놓고 막 생색내면 네가 싫어할 까 봐, 네 몫을 억지로 남겨 뒀어. 고맙지?] 또 다시 생긋. 태양은 참지 못하고 오른 손을 그의 얼굴로 내뻗었다. 순간 교실 어느 구석에서 숨을 날카롭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작은 별의 볼을 꽉 꼬집으려 했던 손이 멈칫 한다. 대신 작고 따뜻한 어깨 위에 태양의 손이 턱 올려졌다. [뭘로 닦으면 돼?] 녀석이 말 없이 들고 있던 걸레를 내밀었다. 태양은 그걸 받아들고 성큼 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수건으로 만든 걸레 한 귀퉁이에는 '여재인'이라고 적혀 있다. 이까짓 거, 하네 못 하네로 실랑이 벌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손을 높이 쳐들고 칠판의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열여덟의 태양은 생각했다. 나는 주번 임기가 일주일이라는 것도 다 아는데. 로드 아일랜드에서 전학 오던 날, 담임선생님을 만났을 때 얘기 들었었다. 번호 순으로 돌아가는 주번이 곧 태양 차례가 된다면서 원하면 빼주겠다 하셨다. 특별한 건 무조건 다 싫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조용히 무리 속에 묻히고만 싶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했었는데……. 태양은 온 반 아이들의 시선이 칠판을 닦고 있는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무뚝뚝하게 거절했던 그 순간을 내내 후회했다. [재인아아아아아!] 누군가 또 애타게 '작은 별'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다. 쓰레기통의 양쪽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주번 둘은 소각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키가 큰 태양에 비해 더 자랄 여지가 많아 아직 작은 재인은 힘들게 팔을 들고 있다. 그런데도 꼭 같이 들어야 한다고 우기는 이유를 모르겠다. 원래 이렇게 드는 거란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보는 순간, 또 생긋. 저 미소는 완전 자동이다. 달려오던 녀석이 그 얼굴을 보고 급히 멈춰서는데, 어느 새 귀까지 빨개져 있다. [오늘 남아서 수한이 무리랑 음악 연습하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할래?] 눈빛과 어조는 간절하지만, 의외로 쿨한 단어 선택이 흥미롭다. '같이 할래?' 라고는 하지만, '꼭 같이 해줘. 부탁이야'로 들리니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음악 실기 시험 때문에 그러나 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노래 연습을 여럿이서 뭉쳐 하나? 설마. 그냥 다 같이 모여 놀자는 거겠지. 태양이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데, 갑자기 '작은 별'이 이쪽을 돌아본다. [태양이도 가.] 이게 웬 쓰레기통 뒤흔들어 복권 추첨하는 소린가. 태양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런데, 이 옆에 선 녀석은 왜 또 저런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거지? '와. 와라. 제발 같이 와줘. 그래야 재인이도 올 거 아냐' 라는 눈. [안 가.] 단호한 거절에 아무 말 없이 작은 별이 태양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숨차게 달려온 제 친구에게 더 딱부러지게 거절한다. [그래? 그럼 나도 안 가. 미안해, 정수야.] 그리고는 톡톡 정수란 녀석의 팔을 두드려준다. 더불어 사분하게 웃어주니, 정수란 놈은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선다. 역시 양 쪽 귀가 다 벌게져 있다. 웃긴 놈들. 하는 냥이 보기에 지루하진 않다. 다시 둘만 남자, 재인은 아까처럼 다시 태양을 빤히 올려다본다. [너 노래 잘 해?]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태양은 대답 대신 휴지통을 단단히 쥐고 걷기 시작한다. 속도가 좀 빨랐는지 거의 끌려오던 재인이 자신의 등에 쏘아붙였다. [바보.] 탁. 멈춘다. [내가 왜 바보야?] [아이들이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였잖아.] [그 딴 거, 내가 원한다고 했었나?] 차가운 대꾸에 질린 듯 재인이 노려 본다. 지지 않고 태양도 마주 본다. 어차피 내려다보는 태양의 위치가 훨씬 유리하다. 뻔히 질 싸움을 왜 거는 건지. 참 이상한 녀석이다. 눈에 힘 빼, 임마. 벌써 핏발 섰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엉뚱한 녀석은 아까의 질문을 반복해왔다. [너 노래 잘 하냐고 물었어.] [좀 한다.] [시험 치는 노래, 잘 알아?] [슈베르트의 숭어? 유명한 곡이잖아. 모를 리가 없다.] [그래?] 태양의 대답에 곰곰 생각에 빠지는 작은 별. 바닥에 떨어졌던 쓰레기통을 다시 들며 야무지게 결론 짓는다. [그럼 난 너랑 연습할게.] 이건 그냥 통보다. 그것에 익숙한 듯 이쪽 동정을 살피지도 않는다. 젠장! 네가 무슨 공주님이냐? 겨우 '작은 별' 주제에 꽤나 막무가내다. [난 노래 연습 같은 거 안 한다.] [와, 진짜 잘하나 보네! 그럼 니가 날 가르쳐주면 되겠다.] [까불지 마, 여재인.] 소각장 입구에다 쓰레기통을 뒤엎어 비우면서 태양이 말했다. [뭐라고?] 갑자기 등 뒤에서 모든 동작을 멈춘 듯한 재인의 반문.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감히 별님한테 할 말은 아니란 건가? 툭. 땅바닥에 쓰레기통을 팽기치듯 놓으며 태양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까불지, 말라고, 했다.] 어쩔래? 라는 눈으로 팔짱을 낀 채 녀석을 똑바로 내려다본다. 재인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지만, 역시 속을 알 수는 없다. 다음 순간, '비 개인 오후'표 눈동자가 보기 좋게 구르더니 해사하게 웃는다. [귀엽다, 그 말.] [뭐?] 잘못 들은 건가? 태양은 기가 막혀 몸을 앞으로 약간 숙였다. 그러자 녀석은 '언제나 맑음'표 입술로 너그러움을 과시하며 말했다. [까불지 말라니. 역시 신선해, 남태양.] 그러는 네가 더……. 젠장, 저거 별종이다! 태양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미풍에 살랑거리는 녀석의 결 고운 머리칼을 바라본다. 이미 가벼워진 쓰레기통을 들고 혼자서 씩씩하게 앞장 서 가는 작은 별. 새하얀 교복 셔츠 속으로 바람이 들어가자 까르르 소리 내어 웃는다. 태양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다. 지나치게 맑아,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공기 중에 피워 올려지는 소각장 연기 냄새. 통통 땅에 부딪히며 멀어지는 플라스틱 휴지통 소리. 늦은 오후의 장난기 가득한 바람. 쉴 새 없이 나풀대는 갈색 머리. 파랗게 개인 하늘. 우뚝 선 태양. 하얀 눈은 사람과 같다. 저 보이지 않는 천공에서 똑같이 만들어져 내려 오지만, 세상 어떤 곳에 놓이냐에 따라 한 가지 눈도 천차만별 모습이 달라진다. 사람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와 같이 각자 제 운명을 달리 맞게 되는 것이다. 숲이나 언덕 혹은 누군가의 집 앞마당에서 뽀드득 순결한 결정을 이룰 수도 있지만, 대도시 혹은 시장 바닥, 골목골목 지상의 더러움과 섞이면서 질척한 오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눈 같을 수 없다. 더럽게 뭉쳐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눈도, 사람 형태로 빚어져 입가에 미소를 일으키는 눈도, 결국엔 소리 없이 녹는다. 태양은 자신이 사람이기에, 눈처럼 조용히 사라질 수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리도 지르고, 반항도 하고, 도망도 쳐 봤지만,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다 했던가. 술독에 빠진 엄마는 두 번째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정신 병원에 스스로 들어가셨다. 위탁원에 가기 싫어 무작정 떼를 쓴 결과로 여섯 살 때, 미국 외할아버지 댁에 보내졌다. 그렇게 시작된 로드 아일랜드에서의 삶은 지독히 고독했다. 태어나 처음 만난 외조부와 외조모는 차가운 분들이었고, 대놓고 그를 귀찮아 했다. 왜 마지막까지 엄마가 망설이며 비행기 티켓의 모서리를 씹으셨는지 뒤늦게야 안 것이다. 프로비던스(Providence)는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꽤 보수적인 곳이었다. 늘어선 맨션과 호화로운 저택들 사이엔 뿌리깊은 경쟁심과 탐욕이 숨어있었다. 아마도 이웃인 그들은 외할아버지의 성품과도 닮아 있어서 꼬마였던 태양의 눈에 유독 그렇게 비쳐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손은 차가웠고, 웃음은 공허했다. 이름 모를 동양인 꼬마, 게다가 제 나라 말도 영어만큼이나 서툰 녀석은, 자기중심적이고 똑똑하며 이기적인 그들의 자녀들 속에서 늘 튈 수밖에 없었다. 끝 없는 놀림과 악의 짙은 장난의 대상이 되는 것.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힘들어졌다. 태양은 한국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사람이 강호 형이었다.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의 아들이었던 그는, 태양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죽 왕래가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에 좀더 쉽게 말을 트면서 통성명을 하다가 다섯 살 더 많은 강호가 태양을 먼저 알아 보았다. 그는 어릴 적 헤어졌던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태양을 반갑게 얼싸안았다. 그 포옹은 열여섯의 태양에겐 무척 오랜 만에 겪는 사람과의 진한 스킨쉽이었다. 여섯 살이었던 태양이 공항에서 엄마와 헤어지던 날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강호는 당시 브라운대학에서 pre-med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병원에서 봉사활동 중이었다.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킨 할아버지는 병원 도착 직후 유언 한 마디 없이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너는 이제 어쩔 거니?' 라는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며칠 후, 말 없이 짐을 싸서 나온 태양은 강호의 아파트로 들어가 2년을 살았다. 그 후 태양이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한 절차도, 한국에서의 기반잡이도 강호가 도맡았다. 태양은 혼자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편했다. 거리를 지나다니거나, 학교를 다닐 때도 그를 눈에 거슬려 하는 사람이 없는 한국에서 되도록 조용히, 튀지 않으면서 지내는 것이 그가 원하는 전부였다. '작은 별'처럼 튀는 녀석이 자꾸 옆에서 얼쩡거리지만 않았다면, 태양의 그 소박하고 달콤한 꿈은 쉽게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자.] 마치 태양이 자신의 그 말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재인은 당연하다는 듯 앞장서서 교실을 빠져 나간다. 주번 활동에 대장과 쫄병이 있을 리 없는데, 사사건건 이것 저것 참견하고 알려주며 대장 노릇을 한다. 태양은 말을 섞기가 귀찮아 그대로 따라주는 편이긴 하지만, 저렇게 제 말만 툭 던져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갈 땐 부아가 치민다. 대답도 하지 않고 가방을 든 태양은 재인과 반대방향으로 복도를 걸었다. 조금 돌아가야 하는 노선을 머리 속으로 그려 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 [태양아! 같이 가!] 타다다닥. 뛰어오는 소리. 발소리에도 감정이 묻어난다. 저건, 당황한 느낌? 왜였을까? 그 소리에, 그의 말에 순간 가슴 한 쪽에 흔들 지진이 났다.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비꼬임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 순수함이 무방비 상태의 태양을 우뚝 서게 만들었다. [말 해주고 가지. 하마터면, 우리 헤어질 뻔 했잖아. 나 저리로 가는 거 못 봤어?] […….] [아, 미안. 너 아직 학교 구경도 다 못했겠구나. 이쪽으로 갈래? 내가 안내할게. 따라 와.] 또다. 저 아는 척. 대장 노릇. 그런데도 왠지 이번엔 그냥 따라갈까 싶다. '헤어질 뻔 했잖아.' 꼭 큰 일 날 뻔했다는 투로 말한 재인의 그 말이 마음 속에 앙금처럼 남는다. [강당부터 가볼래?] 재인이 소매를 꼭 잡아오며 묻는다.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 하다. 태양은 대답 없이 붙잡힌 팔을 내려다본다. 그러면 실수한 듯한 얼굴로 곧 그 손이 떨어져 나간다. [아, 미안. 버릇이야.] [버릇은 고치라고 있는 거지.] [응. 노력하고 있어. 어릴 때 백화점에서 미아가 된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생겼어. 그래서 일부러 남들보다 조금 앞서서 걷곤 하는데, 순간적으로 나왔네. 기분 안 나빴지?] 생긋. '작은 별'표 미소. 하지만 조금 경직된……. 민망해하고 있는 건가? 그깟 어릴 적 기억 하나가 아직도 괴로운가? 태양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서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강당은 어제 봤어. 음악실로 가.] [응?] [노래 연습.] [아!] 짤막한 자신의 한 마디에 금세 환해지는 얼굴. 태양의 가슴 속에 진도가 다소 커진 지진이 인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혀를 차며, 태양은 또 다시 앞서가려는 재인을 불러세웠다. [야.] 눈을 딱 감는 심정으로, 손을 내민다. 민망하다. 빨리 잡아라.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잖아.] 빤히 올려다보는 '구름 걷힌 하늘' 표 눈동자. 천천히 태양의 손으로 시선을 내리는 재인의 꼭 깨물린 아랫입술. 싫으면 말든가. 후회하며 내리는 태양의 팔을 탁 붙들고, 어색해진 커다란 손 안에 수줍게 밀어넣는 작은 손. [가자.] 아까와 똑같은 재인의 대사. 그러나 아까와 다른 나란한 발소리. 조금씩 힘을 주는 손가락의 담백한 얽힘. 길고 좁은 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 창으로 비쳐든 석양에 붉게 물든, 태양과 ……별. 언제였던가? 노래 못하는 어린 새일수록 나중에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걸 바로 대기만성형이라고 한다. 듣기 싫은 어린 새소리는 일종의 옹알이라나? 재인의 노래를 듣고 있던 태양은 잊고 있었던 얘기들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군. [니가 부르는 건 숭어가 아니라 메기다.] [숭어 맞아.] [숭어가 디스크 걸렸냐? 왜 자꾸 마디마다 멈춰?] [그야 숨이 차니까.] 어떻게 물고기보다 숨이 더 짧냐? 라고 쏘아주려다 참는다. 갑자기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폭 내쉬는 재인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 시간 째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음정을 잡아주고 있건만, 그다지 가망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가자. 배 고파서 더는 못하겠다.] 악보를 교탁 아래 넣어두고, 태양이 책가방을 챙긴다. 힘 없이 끄덕 한 번 하고 옆으로 다가온 재인도 제 가방을 든다. 그리고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 태양의 손 안으로 조그만 것이 쏙 들어온다. 멈칫. 내려다보면, 재인의 손이 이미 제 손 안에 안정감 있게 들어와 있다. [떡볶이 쏠게. 그게 뭐냐면, 고추장이랑 파, 마늘 넣고 보글보글 끓인 양념장에 떡이랑 오뎅이랑 야채 같은 거 넣고 버무린 건데, 맵긴 해도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맛이랄까? 움, 일종의 한국식 파스타로 라면 사리나…….] [떡볶이가 뭔지는 나도 알아.] 태양이 무뚝뚝하게 재인의 말을 뚝 끊는다. 로드 아일랜드에도 한국 음식 팔거든? 한국 식품점도 많고, 식당은 더 많고, 순대랑 호떡, 붕어빵도 팔거든? 화가 난듯한 그의 눈빛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재인은 '서늘한 그늘'표 입술로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쫄면 사리 많이 넣어주는 데 알아. 삶은 계란도 잘만 웃어드리면 두 개 주셔. 난 단골이거든. 단골은 영어로 VIP라고도 하는데, 자주 오는 손님이란 뜻으로도 써.] 아무튼 고집은……. 끝까지 설명조다. 태양은 그곳에서 처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방과 후에는 교민 주최의 한국어 공부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한국어책을 읽고, 한국 신문도 빠짐없이 챙겨 와서 읽곤 했다. 한국인 튜터의 지도도 받았고, 인터넷으로 한국 교양 TV프로도 즐겨 봤다. 태양에게 있어 부족한 건 지식이 아니라, 실제 경험이었다. 슬쩍 잡아당기는 재인의 손에 마지못한 듯 끌려가며 태양은 피식 웃어 버렸다. 웃음으로 계란을 사는, 디스크 걸린 메기와 함께라……. [태양아, 나…….] 서비스로 얻어낸 계란까지 제가 다 먹은 걸 사과하려는 건가? 혀를 뜨겁게 감싸는 고추장 양념의 향에 빠져 허우적대고는 있지만, 재인의 눈에 비친 태양의 모습은 침착한 시음사의 그것일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탁자 위에 물컵을 내려놓으며 태양은 진지하게 불러오는 재인을 바라본다. 그러나 녀석은 말하다 말고, 지나가는 아줌마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매달린다'지만, 바빠보이는 아줌마도 뿌리치진 않으셨다. 생긋. 전용 미소를 지으며 냉면을 추가하더니, 헛기침까지 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노래, 영 가망 없니?] [……!] 뭐랄까, 지진으로 균열이 가 있던 가슴 한 구석이 여진으로 흔들린 느낌이랄까. 소심하게 기어들어가듯 꼬리에서 자취를 감추는 질문. 그가 긴장하는 게 보인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8 할은 알고 있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 어울리지 않게 안쓰럽다. 태양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힌다. [……그건 아직 몰라.] [그럼 언제 아는데?] [내일 아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살짝 찡그리는 작은 별. 그런 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태양이 말했다. [오늘 밤 꿈에서 니가 노래를 부르나, 잘 봐. 만약에 꿈 도중에 네가 노래 연습을 한다면, 넌 가망이 있는 거야.] [꿈에서 연습해도 실력이 늘어?] [아니. 그보다, 노래를 관장하는 부위가 뇌 속에 따로 있다는 증거거든. 그런 뇌는 잠을 잘 때 더 활성화돼. 노래 잘 하는 새들이 잘 때 그 부위의 뇌를 쓴다나 봐.] 태양의 차분한 설명에 재인이 감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양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핀 채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눈동자.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표정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재인이 녀석은 제가 짓는 저 표정을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못 마주치겠다. 태양은 갑자기 피가 빠르게 도는 걸 느꼈다. 그 순간 갑자기 포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재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 해보인다. [어서 먹어, 우리 태양! 걱정 말고 많이 먹어. 오늘 내가 다 쏜다!] 비장하게 내뱉고는 다시 활기차게 먹기 시작한다. 너, 그 말은 아까도 하지 않았었냐? 태양은 매운 떡볶이를 포기한 채 차가운 물컵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얼음알갱이를 사박사박 띄운 냉면이 탁자 위에 놓이자, 재인은 좋아라 박수까지 친다. 역시나 사리 위엔 삶은 계란 한 개가 덩어리째 올려져 있다. 사랑받는 데 익숙한 녀석. 자신과는 태생부터 너무 다르다. [그런데, 태양…….] 끊어지지 않는 냉면을 입에 문 채,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그가 다시 불렀다. 음식을 먹을 때 말을 하는 취미 따위는 없다. 태양은 재인도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대꾸를 아낀다. 하지만 보람도 없이, 그는 겨우 끊어낸 냉면을 입안에 가득 물고서 다시 물었다. [내가 너 좋아해도 돼?] 쿵. 심장이 놀랐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심장이 먼저 듣고는 막 펌프질을 해댄다. 얼굴로 뜨거운 피가 몰려드는 것을 느끼며, 태양은 딱딱하게 말했다. [안돼.] 당연히 안 된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좋아해주는 감정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이 조그만 녀석처럼 눈에 띄고 반짝이는 생물체의 관심이 부담스럽다. [응. 먹어, 태양. ……알았으니까 그 주먹 풀고 먹으라고. 무섭잖아.] 커다란 냉면 그릇을 들고 후루룩 마시던 재인이 말했다. 그러고도 한 동안 그릇을 내리지 않아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다. 한참 후, 탁자 위로 냉면 그릇을 내려놓은 그는 깍두기를 집으며 조용히 말했다. [있지, 우리의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은 뇌가 아니라 가슴 속에 존재해. 이건 내 생각인데, 그 부분이 활성화 될 때는 바로 음식을 먹을 때야. 내 경험 상 엄마가 맛있는 걸 차려주실 때마다 사랑이 샘솟곤 하거든.] […….] [그러니까 어서 먹어.] [여재인…….] [실은 그 질문 하기 전부터 벌써 너 좋아졌어. 그러니까 일단은 먹기나 하자.] 태양은 자신과 시선을 맞추지 않는 재인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녀석의 앞에 놓인 냉면 그릇을 당겼다. 후루룩. 재인이 잘게 끊어놓은 시원한 냉면이 입속으로 말려 들어온다. 톡 쏘는 식초와 고추냉이의 향이 코끝을 찡하게 울리자, 도록 뜬금 없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맛이구나. 제대로 씹기도 전에 전에 넘어가는 면발의 무게가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것 같다. 목 아래까지 꽉 찬 느낌. 동굴 같았던 허기가 사라진다. 긴 터널의 끝을 만난 기분이다. <여기 짓는 집에는, 네가 살아라> 일단은 벽을 허물고, 땅을 깎아 틀을 다진다. 골격을 세우고, 그렇게 방 하나를 만들어, 문을 내고, 창을 내고, 미장한다. 힘든 일이지만 해야 한다. 누군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서툰 솜씨 때문에 상처 입더라도 가슴에 공사를 해야 한다. 7. 벌써 며칠 째 방과 후,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 들러 노래 연습을 한다. 이젠 한 박자 늦게 들어오던 앞부분은 잘 맞추는데, 음정이 아직도 엉망이다. 태양은 더 이상 피아노 앞에 앉아 있지 않다. 꼭대기 층에 자리한 음악실, 그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밖을 내려다본다. 귓속으로 들려오던 재인의 노래 소리도 잠잠해진 공간. 해가 소리 없이 거의 다 저물었다. 고개를 돌리면, 앞 의자의 반선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녀석이 보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잠든 줄 알고 혼자 노래 연습을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쿡. 웃음이 난다. 이젠 자동화된 버릇 같다. 재인을 보면 웃고 싶어진다. 이렇게 혼자 만드는 웃음이 자신으로서는 영 생소하지만, 요즘은 좀 자주 그런다. 그러니 곧 익숙해지겠지. 모두 다 저 작은 별을 만나고부터다. 늘 저 작은 별을 생각할 때마다이다. 태양은 좀 전까지 차가운 바닥에 한참 동안 누워 있었다. 덕분에 굳어져 버린 등과 어깨를 풀기 위해 느릿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천천히 평화로운 음악실 안을 돌아보았다. 사물들이 가깝게 느껴지고, 좋아지고, 향유하기 쉬워 보인다. 그렇다고 자신이 속기 쉬운 존재라는 건 아니다. 마르틴 들레름처럼 세상이 조용하기 때문에 무섭다고 말하지 않는다. 조용함은 수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무분별하고 거친 소음보다 낫다. 빛도 절대적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저 나른한 햇살 속에 누운 별처럼. 어둠이든 빛이든, 사람은 그 어느 하나에만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니까. [이건 못갖춘마디잖아. 그렇게 자주 숨을 쉬어 버리면 노래가 안 살아.] 아까 태양의 지적에 울상이 되어서 항의하던 녀석이 생각나 또 다시 풋 웃고 만다. [그럼, 어떡해? 숨을 안 쉬면 죽잖아.] 아무튼 과장은……. [숨 쉬는 순간이 따로 정해져 있어. 그 때 재빨리 쉬어주면 돼. 자 봐.] 태양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숨 쉴 타이밍마다 건반에서 손을 높이 뗐다. 그리고 그때마다 재인과 눈을 마주치며 '여기야' 하는 신호를 보냈다. - 솔 도도미미 도 솔 콩. 눈도장 찍고. - 솔 솔솔 레도시라 솔 다시 찡긋. 여기서 쉬는 거다. 죽 한 번 더 반복하다가, - 솔 시시 도시라시 도 솔 재인이 가장 약한 부분에 가서, [도시시 시파레시도] 큰 소리로 계명을 따라 불러주었다. 이 부분의 '시파레시도'에서 재인이 계속 음정을 틀리는 것이다. 녀석의 눈이 동그래지자, 태양은 한 번 더 그 마디를 반복해서 부른다. [태양, 지금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맞춰 봐.] 재인은 피아노 옆에 바짝 기대서더니 태양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건반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멈춘 태양도 재인을 물끄러미 마주 본다. 조용해진 공간.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이 살랑 살랑 애교스럽게 들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침묵을 방해할 엄두는 못 내고 구석 어딘가에 살며시 앉는다. 태양은 속으로 무슨 대답을 할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역시 음정을 잡기 힘들단 얘긴가? 아니면 새삼 내가 무척이나 고맙다는 생각? 혹시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직접 하기 쑥스러운 건가? 설마 또 농땡이 치자거나 그 매운 떡볶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실 없는 농담이 될 게 뻔한 그 말들을 조용히 고개를 저어 지운다. 대신 태양은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팔짱을 끼며 긴 다리를 쭉 뻗었다. ['과연 태양이가 내 생각을 알아 맞출 수 있을까, 없을까?' 그 생각하잖아, 지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인이 입을 딱 벌린다. [어떻게 알았어? 너는 내 머리통 속이 보여?] [여재인.] [응?] [너 맹한 척하지 마. 안 그래도 돼. 공부도 잘 한다면서. 성적도 전교에서 노는 녀석이 그렇게 헤쳐 풀어진 척하면 누가 속냐?] [다들 잘 속아주던데.] 그렇게 씩 웃고는 돌아서서 기지개를 편다. 늘씬한 등이 쭉 펴지며, 가느다란 팔 두 개가 천장으로 솟는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태양은 갑자기 손이 근질거리는 것 같다. 하얀 교복 셔츠 속에 숨어있을 저 재인의 허리를 한번 잡아보고 싶다. 당황스러운 충동이지만, 얼마나 가늘길래 허리춤이 저리도 낙낙할까 싶어서다. [여재인.] 말 없이 돌아보는 재인의 눈꺼풀에 엷은 졸음이 내려앉아 있다. 그 모습이 묘하게 눈길을 사로잡아서 태양은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한 번만 들어봐도 돼?] 뭘? 하고 재인이 묻는 것과 동시에 태양이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두 팔을 뻗어 재인의 겨드랑이 사이로 밀어넣은 뒤, 등을 힘껏 감싸며 쭉 들어 올렸다. 이런, 진짜 가볍다! [으앗! 뭐 하는 짓이야!] 당황했는지 녀석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그 느낌이 고스란히 맞닿은 태양의 가슴으로 전해지고,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히자 재인의 발이 땅에서 더 멀어진다. 몸무게만 대충 알아보고 금방 내릴 생각이었는데……. [이게 무슨 냄새야? 너 혼자 귤 까먹었냐?] 품속에서 버둥거리는 재인의 귓가에 담담한 음성으로 묻는다. 하지만 대답할 여유 따윈 없는지 돌아오는 건 내려달란 아우성뿐이다. 태양은 재인의 빨개진 목덜미에 코를 바싹 붙이고 숨을 들이쉬었다. [야, 간지러워! 그만 두라고! 너 갑자기 나한테 왜 이래? 지금 노래도 못하는 게 키까지 작다고 나 무시하는 거야, 뭐야! 이씨, 바닥에 내려놓기만 해 봐. 살아있음을 후회하게 해줄 테다!] 심히 당황스러웠나 보다. 허공에 매달린 채 쏟아내는 재인의 음성에 노기가 쏭쏭 박혀 있다. 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진부한 대사 일색이라니. 어젯밤 처절한 복수극을 그린, 한물 간 명화극장 비디오라도 본 건가? [그럼 정말 널 내려놓을 수가 없잖아, 바보야. 난 오래 살고 싶다고.] 이런 전형적인 반응이라니. 태양은 갑자기 이 상황이 재미있어졌다. 똑같은 수준의 말을 하고 있는 자신도 재인 못지않게 신기하다. 훗날 만나서 얘기해줘도 강호 형은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품에 꽉 끌어 안겨 거의 자신의 몸에 얹히다시피 한 재인은…… 따뜻했다. 사람을 이렇게 품안에 넣어본 기억이 없다. 그러고 싶어진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이런 충동을,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일단 저지르고 본 것일 게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녀석일까? 한참을 버둥대던 놈은 힘이 부치는지 결국 잠잠해진다. 재인이 힘을 빼자, 고스란히 착 맞붙어 버리는 서로의 몸. 마치 따스하게 데워진 동그란 도자기 찻주전자를 안은 것처럼, 평화롭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맡아지는 귤 향기에서 햇살의 기운이 느껴진다. [남태양.] […….] [나 쉬 마려.] 조그만 음성이 태양의 목덜미에 묻혀 있던 재인의 입에서 나왔다. 조분 거리는 입술의 움직임이 예민한 피부에 닿아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상치 못했던 전율이 목덜미를 따라 어깨로 쭉 내려오는 바람에, 태양은 재인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탁 풀어버렸다. 반대로, 몸에 힘을 다 빼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재인이 그 덕에 바닥으로 추락한다. [으아악!] [아, 미안.] 그래도 태양의 가슴을 타고 미끄러져서인지 바닥에 심하게 박진 않은 것 같다. [이 나쁜……! 아, 아퍼.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런 건데?] 바닥을 짚은 손을 털며 억울하다는 듯 흘겨 보는 재인.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스스로도 놀라 말을 잃어버린 태양. [죽을 준비는 됐겠지?] 아까의 경고를 실행할 셈인지, 혹은 엉덩방아를 찧은 복수를 할 셈인지. 재인은 허리를 짚고 천천히 일어서며 경고의 눈빛을 아낌 없이 발사한다. [너 쉬 마렵다며, 화장실 안 가?] 서서히 몰려오는 위기감을 물리치려고 굳이 상기시켜주자, 조금 음산한,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웃음을 입에 물고, 재인이 잘난 척 종알거렸다. [역시 단순한 우리 태양! 동에서 뜨고, 서로 지는 걸 한 번도 어겨본 적 없는 융통성 없는 녀석! 저한테 쌀까 봐 겁 나서 내려놓지 않고는 못 배길 놈이란 것쯤은 내 예상했지. 치밀한 전략의 승리할까?] 그 말을 끝으로 덤벼오는 재인을 피해 태양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공간이 좁은 책상 사이를 달리자,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재인에게 더 유리했는지 금세 잡힐 듯 거리가 좁혀진다. 다급해진 태양이 의자 위를 밟고 섰을 때 재인이 외쳤다. [반칙이야, 태양! 의자 위로 올라가면 지는 거라고!] 긴 다리로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건너뛰던 태양이 그 말에 코웃음 친다. 반칙이라니. 이게 무슨 룰이 생명처럼 지켜지는 스포츠인 줄 아나 보지. 조금씩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음악실 안의 먼지들이 풀썩 공중 부유에 동참한다. 태양은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 뛰어오는 재인을 뒤돌아보았다. 이건 놀이다. 그저 단순한 장난에 불과하다. 저렇게 갈색 머리를 팔랑이며, 투명한 얼굴을 땀으로 적시고, 필사적으로 날 잡으러 오는 저 별도 그저 우연한 놀이의 참여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왜 이리 심장이 뛰는가. 달리기도 전에 숨이 차고, 잡히기도 전에 울고 싶은가. 돌이켜 보면, 자신은 이러한 놀이가 처음이다. 잡으러 가고, 달아나는 이런 놀이는 혼자 할 수 있게 아니니까.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와주고, 잡히면 죽는다고 협박해주는 일이 어찌 이리도 달콤한가? 이제서야 체험하고 뒤늦게 맛을 본 이 순간이 왜 이다지도 억울한가! 우뚝. 아슬하게 의자 위에 서 버린 태양은 곧장 달려오는 재인을 내려다본다. 피할 생각도 못하는 그를,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당황한 재인이 덮치기 일보 직전이다. [어, 어, 어어!] 결국 그렇게 될 거였다. 재인은 어떻게든 충돌을 면해 보려다 급히 방향을 선회한 통에 옆 의자를 들이받았고, 그 의자는 또 옆 의자를, 그 옆 의자는 또 다시 옆 의자를 들이받아, 결국 태양의 밑에 깔린 의자까지 흔들고 말았다. 우당탕탕탕! 그러니까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몸에 힘이 쫙 빠져 딴 생각에 넋이 나가 있던 태양과 의자가 함께 바닥으로 굴렀다. 갑작스러운 충돌과 소음, 그리고 명백한 사고. 눈을 질끈 감았던 재인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태양아!] 바닥에 드러누운 채 정신을 잃은 듯 아무 반응도 없는 전학생. 재수 없이 자신한테 걸려 이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혹 한국을 싫어하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재인은 태양의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흔들어본다. [죽으면 안 돼.] 조금은 농담처럼 중얼거렸는데도, 그는 계속 죽은 척을 할 모양이다.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재인은 말 없이 태양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 몸을 낮췄다. 새하얀 셔츠 위로 재인의 귀가 닿기도 전에 쿵, 쿵, 꽤나 커다란 울림이 들려온다. 죽지는 않았는데, 이것도 정상은 아니다. 이렇게 과도하게 큰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을 재인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 많이 본 대로 태양의 손목을 잡아 눈 앞에 바짝 가까이 가져온다. 그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박동 수를 세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던 거다. 그런데 잠깐, 이 시계에는 왜 초침이 없는 거지?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며 재인은 태양의 얼굴 양 옆 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갑자기 쑥스러워져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태양이 숨을 쉬는지 미세한 호흡이라도 느껴볼 생각이었다. 그 순간, 재인의 예민해진 귀를 두드린 것은 아까 강조하듯 불러주었던 '시파레시도' 였다. 변성기를 지나 낮게 깔린 사내 아이의 허스키 보이스. 마치 자장가를 불러주는 듯 조심스러운 음절 사이에 떨림이 남아 있다. - 도시시 시파레시도. 천천히 고개를 바로 해서 내려다보면, 어느 새 눈을 뜨고 재인을 올려다보는 태양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인다. - 나그네 길 멈추고 언덕에 앉아서 - 거울 같은 강물에 숭어를 바라네 나직하게도 부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그 소절만 불러준다. 또렷하지만 부드러운 선을 가진 입술에서 불어내는 숨이 재인의 입술까지 닿았다. [따라 불러 봐.] 태양의 명령에, 재인의 심장이 쿵, 쿵 소리를 낸다. 정상이 아니라 했던 태양의 심장병에 전염이라도 되었나 보다. 무식하게 솔직하기만 한 요 심장 소리가 혹 이 무표정한 녀석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재인은 저도 모르게 꽉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낸다. [언덕에 앉-아-서.] [다시! 시파미레도가 아니잖아. 자꾸 농땡이 치니까 실력이 안 늘지.] […….] [왜 안 불러?] 재인에게서 대답이 없자, 태양이 조용히 묻는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뒤얽힌 표정이 작은 별답지 않다. 혹시 자신이 저렇게 만든 건가 라는 의심이 들자, 타르르 소리를 내는 통증이 태양의 가슴을 검게 물들인다. 이 작은 별을 똑 따서 가슴 안주머니에 넣으려 했던 순간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품었던 그 욕심에 대한, 어둠의 냉정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별이, 자신에게 오면 이 아름다운 빛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 [먹는 귤 아냐.] 태양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자신의 탓이라 여겼는지 재인이 불쑥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썹을 들어올라자, 별이 한숨을 폭 내쉬며 털어놓는다. [나는 알러지가 심해서 아무 로션이나 못 써. 어릴 때부터 한 가지만 바르는데, 그 로션에서 귤 냄새가 나는 거야. 피부 뒤집어지면 엄마가 하도 속상해 하셔서 우리 형들이 그것 같고 막 놀리거든. 나는 뭐 좋아서 그 로션 쓰는 줄 아니? 할 수 없어서 바르는 거다, 뭐. 그러니까 나 너한테 딱 걸린 거 아냐. 너 몰래 나 혼자서 귤 까먹고 그런 거 아니라고.] 풋. 진지하게 털어놓은 재인에겐 미안하지만 웃음이 새 버렸다. 태양이 갑자기 안아올린 이유가 그 희미한 귤 냄새 때문인 것으로 납득했나 보다. 태양은 입가로 비져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하고 손을 들어 재인의 볼을 가만 꼬집었다. 비웃는 거라 여겼는지 기분이 상해 버린 재인이 고개를 젖히며 어떻게든 떨쳐 보려 애쓴다. [먹고 싶어.] [응?] [귤. 아까 나 귤 먹고 싶어서 그런 거 맞아.] 그제서야 바닥을 짚었던 팔을 떼고 몸을 들어올리며 작은 별.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조용히 멀어지는 재인을 바라보는 태양. 긴장된 순간이다. 이어진 재인의 설명에 태양은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귤, 미국에선 잘 못 먹었니? 혹시 비싸서? 저런, 저런! 만다린 오렌지라고 하면 미국 식품점에서도 구할 수 있다던데. 있잖아, 만다린은 중국 청나라 관리를 뜻하는데, 그 사람들 옷색깔이 주황색이었기 때문에 귤을 만다린 오렌지라고 부른대. 우리가 아는 그냥 오렌지는 스위트 오렌지, 자몽은 그레이프프룻. 이건 알지? 아무튼 요즘은 하우스 재배가 많아서 우리 나라 국민들은 사계절 내내 귤을 먹을 수 있어. 내가 내일 태양을 위해 사올게. 음악수업료 대신……. 음. 저기……. 태양아, 자니?] 어디선가 잠자고 있었던 바람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서로에게만 몰두해 있는 두 사람 사이를 시기라도 하듯이. 해가 다시 저물고 있었다. 눈을 감은 태양의 얼굴 위로 주홍빛 그림자가 내리고, 어둠을 예고하는 그늘이 그 공간을 서서히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은……. 아니. 북유럽의 탠저린 오렌지가 빠졌잖아. 게다가 나는 금귤이 일어로 낑깡, 영어로 컴쾃이라는 것도 아는데. 다시 시작된 재인의 종알거림을 무시하며 잠든 척 하고 누워, 마음 속으로만 소용 없는 불평을 끊임 없이 투덜투덜 대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말에는 반 녀석들 대부분이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내게 부러운 시선을 던지기도 하고, 괜히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며칠 전 재인이 직선코스를 그리며 내게 다가와, 드디어 노래하는 꿈을 꿨노라고 귓속말로 자랑하던 순간은, 거의 반 전체의 80% 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의 기록했다. 사랑 고백도 아닌데 뭘 저리 숨 넘어가듯 쳐다볼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이 녀석은 그런 관심을 받는 데 익숙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사랑과 집적거림 속에서 살면 저렇게 되는 걸까? [여어, 재인! 요즘 연애하냐? 점점 피부가 고와지시는데?] 암, 그렇지!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가끔 저렇게 시비 거는 녀석들은 있기 마련이다. 까만 눈썹에 푹 들어간 눈, 홀쭉한 뺨. 오며 가며 복도에서 몇 번 부딪쳤던 놈이다. 옆 반인 것 같던데,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굳이 남의 반에 찾아와서 저러는 이유.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다. 태양이 궁금한 건 그저……, 여재인의 반응이다. [오오, 승진이냐? 어제도 밤 새서 공부했나 보네. 얼굴이 더 까칠해지셨어.] 이런 맞대응은 무난한 편이다. 앞서 나가지도 않고, 충분히 자극적으로 비꼬아진 말투. 그나 저나 재인의 저 발음으로 봐선, 놈의 이름이 오승진인가 보다. [봤냐? 교무실 앞에 전교등수 붙었더라.] 승진의 말에 여유만만하던 재인의 얼굴이 일순 하얘진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눈썹을 파르르 떠는 게,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태양의 예상과 달리, 재인은 곧장 승진을 밀치고 달려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교실 뒷문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조그맣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거 재인이 반지야!] 재인이의 짝, 정수란 놈이 항의하는 소리다. 재인의 필통을 마음대로 뒤져 조그맣고 밋밋한 백금 링을 들어보이는 오승진. 울상이 되어 쳐다보는 재인의 짝에게 그가 수백만 년쯤 재수 없게 시불거렸다. [잠시 빌려간다고 전해. 이거라도 들고 가지 않으면 재인이 새끼가 날 찾아올 리 없잖아.] [그러지 마. 승진아.] 저 애처로운 용기하고는! 겁을 먹고 발발 떨면서도 정수는 의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승진의 꼬봉으로 보이는 덩치 큰 빡빡머리 녀석이 탕 책상을 내리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거북이처럼 고개를 쏙 어깨 사이로 묻어 버린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태양의 눈에 놈은 악당이다. 그러한 판단에 도달하기까지는 저 숱 적고 머리 없는 덩치의 영향도 무시 못하겠지만. 쯧. 자, 그렇다면 많이 참았다. 너무 오래 기다린 거다. 태양은 이제 보무도 당당하게 의자를 박 차고 일어날지도 모른다. 혹은 제 자리에 앉아 까딱까딱 손가락으로 그를 불러 혼을 내고 겁을 줄까? 아니면 앞뒤 물불 안 가리고 냅다 교실 바닥으로 놈을 던져 피로써 단죄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양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가락에 재인의 반지를 억지로 끼워 넣고 놈이 흐뭇하게 감상할 때도, 그런 승진의 뒷모습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문으로 아스라이 사라져갈 때도, 태양은 그저 턱을 괴고 지켜보았을 뿐이다. 재인이 돌아와서 짝에게 보고 받는다면, 무척 섭섭해 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 걸로 찌르기라도 하지 그랬어.] [미안해.] 제 필통에서 꺼낸 콤파스의 뾰족한 끝을 가리키며 재인이 말하자,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하던 정수가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듯 사과한다. 아무튼 재미있는 동네다. 끔찍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작은 별이나, 그런 그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은 그의 짝이나. 등수가 많이 떨어졌나 보다. 시험을 얼마나 죽 쑤었길래, 성적 나왔단 말에 그처럼 하얘질까? 씩씩거리면서 교무실에 다녀온 재인은, 자신의 반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화르르 불타 오르며 '오승진 타도'를 외쳤다. 웃긴 것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재인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승진을 적극적으로 말리는 녀석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넌지시 옆의 놈에게 물어보니 당연하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걘 공부를 잘해, 라고. 재미있는 이유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도 로드 아일랜드에서 공부를 잘 했었다. 태양의 표정을 알아챘는지 옆의 놈의 부가설명이 이어졌다. 게다가 부자거든, 이라는. 더욱 어이가 없다. 태양의 집도 부자였다. 조부모의 저택은 이웃들에게도 부러움을 살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온갖 따돌림과 괴롭힘을 다 받았었다. 나도 진작 한국에 올 걸 그랬군. 정말 후회막급이다. 마지막으로 옆자리 녀석이 툭 던진 말에 태양은 비로소 굳어 버렸다. [오승진은 여재인을 좋아해. 아주 많이. 다른 녀석들도 그렇겠지만. 걔네들 중 몇몇은 오승진의 용기를 부러워하고 존경까지 하고 있어. 재인이가 좀 그렇잖아. 모두한테 친절하고 잘 웃고 그래도, 화 나면 얼마나 무서운데. 다들 재인이한테 미움 받을까 봐 겁을 내지. 하지만 오승진은 그렇지 않거든. 미움 받아도 좋아하는 티를 다 내. 그게 안돼 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뭐 대충 그런가 봐.] 오승진이 뭘 하든 애들이 끼여들어 말리지 않는 이유를 이제 알겠지? 그런 눈빛으로 태양을 쳐다본 녀석은 다시 아까부터 후벼 파던 문제집에 집중했다. 아무 것도 관심 없는 척, 모르는 척은 다 하더니, 뒷구멍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유형인가? 태양은, 너야말로 진정 특이하다 라는 눈빛으로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즉, 모두들 재인에게 덤비면 어떻게 되나, 궁금해서 지켜본다는 의미다. 더 간단히 얘기하자면 오승진은 본보기라는 것. 좀 서늘한 이유란 생각이 든다. 꼴 보기는 싫지만, 관여하고 싶지 않아 침묵한 자신과는 다른 이유이기도 하고. 자신은 눈에 띄는 재인의 곁에 서 있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끊임 없이 등 뒤를 따라다니는 다른 녀석들의 시선도 불편했고, 없는 데서 아무 말이나 붙일지도 모를 빌미나 화제 거리를 던져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껏 재인도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었을 테니까, 앞으로도 그대로 살게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하겠지. 오히려 내가 상관하면 자존심 상해 할지도 모르잖아. 이렇게 태양은 아까부터 거슬리는 승진의 존재를 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물려주신 반지라면서 그처럼 허술하게 보관한 재인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나? 다시 턱을 괴면서, 태양이 혼자 생각에 빠져 들던 그 때였다. [남태양. 따라 와.] 한참을 씩씩거리던 재인이 점심시간을 십 분 정도 남겨놓고 말했다. 왜 또 나야?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면, 그의 눈은 벌써 태양의 손이 있을 만한 부근에 가서 딱 꽂혀 있다. 하지만 그 손은 아까부터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지금? 다른 녀석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바로 여기서? 어림 없다, 여재인. 그런 의미의 눈짓을 몇 번이나 보냈는데도, 재인은 고집스레 자신의 손만 본다. 후우. 결국 태양은 한숨을 내쉬고 먼저 교실을 나와 버렸다. 곧 이어 뒤를 따라 나온 재인을 흘끗 보고는, 다시 교실 문이 잘 닫혔나 확인한다. 쑥 교복 바지에서 손을 꺼내면, 쏙 벌써 익숙해져 버린 감촉의 손이 들어온다. [오승진, 다 죽었어!] 용기 백배와 사기 충천으로 반짝거리는 작은 별이, 거의 반 강요에 의해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외쳤다. 그리고……. 그래. 오승진인지 뭔지. 목숨이 몇 개이길래 오늘 '다' 죽나, 구경이나 실컷 해 보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고의 전환을 이루는 데 성공한 태양의 무심한 다짐이 이어졌다. <반사, 눈 감아 버리다> 나는 인내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인내는 비겁한 자의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8. [어디로 가는데?] 처음 가보는 학교 뒷마당 쪽으로 걷다가, 태양이 재인에게 묻는다. [있어. 오승진이 항상 나를 불러내는 으슥한 데.] 말의 뉘앙스가 참 별로다. 태양은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나아가는 재인을 본다. 점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걸 알고나 있는 건지. [봐. 저기 있지?] 재인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강당 건물 뒤 숲으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커다란 밤나무 뒤에 모여 있는 오승진 무리가 보였다. 그러니까 저 악당 자식은 혼자가 아니었던 거다. 늘 이런 식으로 재인이 혼자 그들에게 당해왔던 걸까? 꽤 비겁한걸! 태양은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낀다. 사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어, 문득 멈춰 섰다. 손을 잡고 있는 터라, 조금 앞서 나가던 재인도 팔이 당겨지자 그 자리에 선다. 의아한 눈빛. 그래도 질문은 태양이 던진다. [목적이 뭐야?] [몰라서 물어?] [정말 다 죽일 거냐? 그거 내가 도와줘야 해?] 진지한 물음에 돌연 재인의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붉은 입가에 맺히는 그 달콤한 기운이 손끝으로도 전해져 온다.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미심쩍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리는 태양. 하지만 재인은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태양의 얼굴 앞으로 바짝 붙여오더니, 작전을 구사하듯 말했다. 목소리는 한껏 낮춰서, 그럼에도 잘 들리도록 또박또박 속삭이는 거다. [할머니 반지를 찾아오는 것이 오늘의 목표야. 그 과정에서 몇 놈이 죽어나간다 해도 할 수 없지. 명분이 확실하잖아? 빌미는 저 쪽에서 먼저 제공한 거고. 혹 인권위원회에서 우리의 행각을 낱낱이 따져 묻더라도, 딱 한 가지만 입을 잘 맞춰 놓으면, 무사할 수 있어.] [그게 뭔데?]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네!'] 흠칫.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저 말을 하는 재인의 표정이 너무나 연극적이어서, 태양은 그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잠시 짓는다. 눈을 꼭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상태에서 주먹 쥐고 외치기. 즉, 흥분과 혼란과 스트레스로 인한 히스테리가 아닐까 한다. [너 괜찮냐?] 조심스럽게 물으면, 재인은 금세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아까처럼 낮은 목소리로 설명한다. [뭐 그런 류의 대사를 친다는 거지. 정확하게는, '우리 그냥 학교 다니게 해주세요.' 인데, 제일 중요한 건 마지막의 '네?' 할 때의 톤과 표정이야. 말하자면 정당 방위임을 애절하게 호소하는 거랄까? 가만히 있는 우리를 녀석들이 자꾸 못살게 굴면서 괴롭혔다고 솔직하게 실토하면 돼.] 하지만 난 당한 적 없는데? 그리 묻고 싶은 것을 꾹 참는 태양이다. 전우 의식에 불타는 재인의 눈 앞에서 그런 매몰찬 발언을 했다가는, 오승진과 다시 편을 짜고 자신을 죽이자고 달려들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인권위원회라니?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 작정이길래? 아무리 얄밉고 못된 놈이라도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준비 됐어?] '아직.' 속으로 중얼거리며 태양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되새긴다. 그렇게 찌푸린 표정이 걱정 때문인 줄 오해한 재인이 강조한다. [괜찮아, 태양. 딱 그 톤만 기억해. 우성이 형의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네?'. 그 절규! 가슴을 쥐어짜는 비통함! 거부할 수 없는 호소의 눈빛! OK?] 뭘 대충 감이라도 잡아야, OK를 하지. 대체 우성이 형은 또 누구냔 말이다. 태양은,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재인이 설명해주길 바라며 기다린다. 하지만 재인은 온통 승진의 무리에만 정신이 팔려 태양의 궁금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아, 모르겠다! 하늘은 높고, 적은 가깝다. 생각은 일단 나중으로 밀어두자. [여어! 웬 보디가드?] 결연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 승진이 비꼬듯 말한다. 솔직히 눈에 띄는 외모의 태양이라, 승진도 아까 교실에서 그를 봤던 게 기억 난다. 자신이 하는 냥을 자꾸 신경 쓰이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녀석. 솔직히 조금 쫄았었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재인에게 손을 잡혀 끌려올 정도면 저 녀석도 뻔한 거다. 넓고 탄탄한 어깨하며 고등학생답지 않은 관조적인 눈빛이 범상치 않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선한 눈매라던가,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이 새삼 만만히 느껴진다. 결국은 제가 유유히 교실 문을 나설 때까지도 아무 말 못하던 놈이 아닌가 이 말이다.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자, 승진의 뒤에 서 있던 똘마니 녀석들이 따라 웃는다. 승진의 덩치나 카리스마로 봐서는 그들을 체력으로 제압해 끌고 다니는 것 같진 않다. 역시 성적과 돈의 힘인가? 조금 기가 막히지만, 태양은 여기가 한국이란 사실을 떠올린다. [여재인. 대답해 봐. 니가 무슨 연예인이냐? 어?] [보디가드 아니야. 음, 음…… 얘는 내 바늘이야.] 이건 또 웬 청바지 실밥 터지는 소린가? 자존심이 상한 듯하던 재인이, 잠깐 고민한 후에 내뱉은 말이다.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재인의 말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는 태양이다. 다행히 오승진 무리들도 기가 막혔는지 일그러진 얼굴로 묻는다. [뭐? 그럼 넌 실이라는 거냐? 지금 무슨 짝짓기 놀이해? 게다가 야, 바늘 가는데 실 가지, 실 가는 데 바늘 가냐?] [네가 몰라서 그렇지, 실을 잡아당기면 바늘도 못 이기는 척 뒤로 딸려 와.] 갈수록 모를 소리만. 아아, 누가 이 바보들의 대화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 없을까? 태양은 시름 어린 한숨을 푹 내쉰다. [어서 내 반지 돌려 줘.] 제 아군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그제야 재인이 목적 의식을 되살려 야무지게 말한다. 어느 새 한 발 먼저 나서 그들 쪽으로 다가가는데, 설마 평소에 저 혼자 불려 나와도 이렇게 씩씩하진 않겠지. 여기서 두들겨 맞았거나, 억울하게 뭔가를 뺏겼다거나 하는 안 좋은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당당함이 아닌가. 순순히 줄 반지였으면 가져 가지도 않았겠다. 태양의 예상대로 승진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게시판은 봤어?] [어림도 없어, 오승진. 너랑은 친구도 안 해!] [누가 친구 먹자 그랬냐? 내 등수가 너보다 높으면 나랑 사귀겠다며! 물리기 없기야. 내가 벌써 니 이름에 침 다 묻혀 놨어! 너 5등, 나 3등! 탕, 탕, 탕!] [안 돼. 유효기간 지났어. 난 이제 태양이 꺼야. 실이 바늘 배신하고 골무 따라가는 거 봤냐?] 못 산다! 여재인, 사고 한 번 크게 칠 줄 알았지만, 왜 계속 자신을 걸고 넘어지는지 모르겠다. 기 막혀 하는 오승진 무리의 표정을 하나 씩 바라보며, 태양은 자신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너! 돈 퍼서 받은 족집게 과외 덕에 시험만 잘 본 거잖아. 실제로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너 하늘이 왜 파란 줄은 알아?] 재인이 급소를 찔렀나 보다. 험악해지는 승진의 표정을 바라보며, 태양은 천천히 몸을 긴장시켰다. 뒤의 덩치들이 어깨에 머리를 붙일 것처럼 흔들며 우두둑 소리를 낸다. 준비 운동 한 번 요란하군. 저러다 목뼈 부러지지. 그 순간 종이 울렸다. 5교시 수업이 시작되었단 뜻이다. 하지만 그 소리를 권투 시합 중에 울리는 라운드 벨로 들었는지, 링으로 걸어 나오는 선수의 모양새로 오승진 무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불량하게 다리를 떨며 걸어오는 오 승진과 뭘 해도 불량해 보일 것 같은 세 놈. 한 놈은 눈 밑에 일부러 새겨넣은 듯한 칼자국이, 터질 듯 살이 오른 얼굴에 떡 하니 보인다. 다른 한 놈은 눈이 쭉 찢어진 데다 최선을 다해 위로 올라 붙어, 보기만 해도 주먹이 쥐어지고, 나머지 한 놈은 키가 엄청 큰 데 비해 호리호리 말라서 몸놀림이 가볍고 재빨라 보인다. 녀석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주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는 재인. 하지만 뒤에 서 있던 태양과 부딪치는 바람에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한다. 그리고 태양은 팔짱을 낀 자세로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듯 말 없이 서 있다. [저 새끼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너 곱게 일루 와라. 응?] 턱으로 태양을 가리키며 승진이 인상을 쓰자, 재인은 두 팔을 벌려 마치 보호하는 듯한 자세로 외쳤다. [우리 태양이 다치게 하면, 진짜 너 죽어!] 건들건들. 오승진은 지켜보는 사람이 멀미가 날 정도로 몸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에 비해 재인은 꼿꼿이 서서 너무도 정직한 말투로 상대를 죽인다고 내뱉고 있다. 그리고 한편, 아까부터 조용하던 태양은 속으로 조금 섭섭하다. 그래도 이왕 싸움에 끌고 왔으면, '태양이가 너희 다 죽일 거야!' 이 정도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다. [반지 주면 곱게 살려줄게. 아니면 너희들 다 후회하게 만들 거야.] 저처럼 인상 한 번 안 쓰고 조용히 말하는 조그만 녀석에게 새삼 겁을 집어먹고 무릎 끓을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하지만 웬 걸. 태양은 승진의 눈에서 작은 갈등의 빛을 발견한다. 정말 재인을 좋아하는 걸까? 교무실 앞 성적 게시판에다 간 크게 자기 꺼라고 침 묻혀 놓을 만큼? 그 때였다. [거기 뭐야! 이 자식들, 수업 안 들어가고 뭣들 하고 있어?] 학생주임 선생님 목소리다. 동시에 옆 반 담임이기도 하다. 교무실에서 몇 번 인사도 드리고, 음성도 기억하기에 태양은 꾸벅 인사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녀석들은 죄다 깜짝 놀라며 동작그만에 이은, 화려한 도망자세를 취하고 있다. 빨치산으로 숨어 들었던 공산당이 아닌 이상 여기서 도망가긴 쉽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들처럼 나무 뒤로 몸을 숨기는 오승진 일당. 칼자국 녀석은 지 덩치가 수줍게 나무 양 쪽으로 한 움큼씩 삐져나온 걸 모르나 보다. 그리고 얕은 언덕 뒤에서 몸을 잔뜩 숙인 채 자신을 손짓해 부르고 있는 재인. 조금 난감하다. 저는 작지만 나는 큰데. 저 무덤 만한 언덕 뒤에 숨어질 리 없다. 하도 다급하게 난리 치는 녀석들 때문에 태양은 정신이 꽤 산만해지는 걸 느낀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녀석들은, 무얼 해도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는 태양을 당황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보다 못한 재인이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태양의 손을 잡았다. 막 언덕 쪽으로 뛰기 시작하려는데, 좁게 구부러진 길 끝에서 학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순간, 손바닥으로 움찔 하는 재인의 긴장이 태양에게로 고스란히 옮겨온다.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녀석 때문에 태양은 생각에 잠긴다. 아무래도 이것이 아까 재인이 말한 그 비상 사태인 것 같다. 왠지 모르지만 모두들 숨기 위해 발악을 하는 지금, 자신이 모르는 어떤 심각한 사태가 발발하기 직전인지도 모른다. 손에 힘을 꽉 주며, 태양은 달려오는 선생님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재인이 뭐라고 했었는지 마구 엉킨 머릿속으로 재빨리 기억해내려 애쓴다. 그러니까, 그거 하나만 기억하면 다 괜찮다고 말했던 주문이……. [선생님.] 표정 한 번 심각하다. 무언가 절박함을 내보이라고 했었는데, 기억 나는 건 하늘을 쳐다보던 재인의 얼굴이다. 왠지 하기 싫다. 그래도……. 태양은 후 하고 나직한 한숨을 내쉰 후에, 하늘을 가만 올려다보며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시죠!] 돌연한 침묵. 대체 왜……? 나무 뒤에서 날카로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의 처지를 망각한 녀석들이 낸 소리일 게다. 막대기를 휘두르며 다가오시던 선생님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태양을 멍하니 쳐다보고 계신다. 잘 못 들은 건가, 고민하시는 빛이 역력하다. 게다가 재인은 말똥말똥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꼴깍 침을 삼킨다. 태양은 또 한 번 당황하고 만다. 내색은 않고 우뚝 서 있지만, 이런 분위기 역시 난생 처음이다. 아, 하나가 빠졌나? [네에?] 부자연스럽게 떨리는 음성. 우성이 형님이 누군지는 몰라도 들었으면 꽤나 싫어하실 것 같다. 살짝 눈가를 찌푸리는데, 깔깔거리며 재인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나무 뒤에 있던 녀석들이 대체 뭐라는 거냐고 투덜대며 걸어 나오고, 성큼성큼 태양의 앞으로 다가온 선생님은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혀를 차는 거였다.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냐? 새끼, 걸린 게 미안하면 무릎부터 꿇을 일이지. 그리고 지금이 공부할 때지, 연애질할 때냐? 어? 그건 졸업하고 해, 이 짜식아!] 손에 들린 몽둥이 끝으로 팔을 툭툭 치며 혼내신다. 조금 억울한 느낌. 속은 것 같기도 하고, 당한 것 같기도 하고. [재인이 너는 뭐가 좋아서 또 그렇게 실실 웃고 있냐?] 핀잔을 주면서도 그는 건드리지도 않고, 패스! 앗, 차별이 아닌가 한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손을 풀어내려 애써도, 힘을 꼭 준 재인의 손은 떨어질 줄 모른다. 그걸 슬쩍 내려다보시던 선생님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어주시고는, 오승진 일당에게 엄하게 외치며 달려가 버리셨다. [요 새끼들! 이게 몇 번째야? 어? 수업 좀 들어라, 이 놈들아! 아까 교무실에서 네 놈들 이쪽으로 걸어가는 거 다 봤다. 딱 걸린 줄 알아! 남들 연애하는 거 숨어서 구경하니 좋더냐? 어이구, 지겨운 놈들! 원, 투, 쓰리, 포! 너희 네 놈, 토낄 생각 얌전히 접고 내 뒤에 곱게 붙어 와! 알았어!] 정녕 뭔가 오해하신 거라고 속시원히 말씀 드리고 싶다. 태양은 부연 설명하는 체질이 아닌 자신의 성격이 통탄스럽다. 그 때 이쪽으로 획 돌아본 학주가 호되게 명령을 던졌다. [그리고 너희 둘!] 태양과 재인은 동시에 움칠하며 같은 쪽을 본다. [내 앞으로 튀어 가! 교실까지 들어가는 거 내 눈에 보이란 말이다. 빨리!]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인이 달리기 시작했다. 잡힌 손을 어쩌지 못해 끌려가던 태양도 곧 제 속도를 낸다. 학주의 손에 귀를 단단히 붙잡힌 녀석들의 비명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깔깔 넘어가는 웃음소리에 돌아보면, 재인이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하얀 이마 옆으로 흐르는 땀이 소년의 얼굴에 보석처럼 박혀, 반짝반짝 눈이 부시다. 달릴 때마다 찰랑대는 머리칼이 이마를 덮었다 드러냈다 하며 금빛으로 살아 움직인다. 말랐지만 보기 좋게 뻗은 팔 끝으로, 재인의 하얀 손이 태양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미안해, 태양! 다 내 잘못이야.] 숨 찬 음성이 사과를 해온다. 태양은 돌연 숨이 막힌다. 달리기 때문이 아니다. 또 작은 별 때문이다. 여재인,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이 녀석 때문이다. 자신은 어떻게든 피해 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녀석의 순수한 눈동자가 자신을 찾을 때마다, 매번 돌아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의 살갑고 부드러운 손이 온전히 의지해 오는 동안, 모른 척 눈도 감았었다. 뿌리치진 못해도, 완전히 밀어내진 못했어도,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그를 마음껏 만지지도, 그의 일에 참견하지도 않았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지 모른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내가 아니면 모른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먼저 그를 훔쳐 가슴에 담고 있다. 이건 작지 않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결코, 달갑지 않은……. [어, 남태양. 거기 앉아.] 5교시가 끝나고 교무실에 불려내려 왔다. 담임선생님이 자신을 보더니 옆 자리 의자를 끌어다 앉으라 하신다. 처음에도 건성건성 말씀하시긴 했지만, 좀 차갑다는 느낌은 이제야 받는다. 원래 성격이신가 보다 넘기려 해도, 퉁명스러운 물음은 정도가 좀 심하다. [너 지금 혼자 사냐? 가족 사항이 텅 비었잖아.] […….]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가만 고민하는 사이, 그는 공란이 많은 학생기록부를 넘겨 보며 짧게 한 마디 한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의 학적부가 미국에서 이제 도착했나 보다. [부모님 이혼하셨네? 넌 어느 쪽에 붙었냐?] 순간 주먹이 꼭 쥐어졌다. 담임선생님의 말투나 표정이, 아직 덜 아문 살갗을 할퀴는 것 같다. 외조부한테 붙었다가 핏줄끼리 재산싸움 하는 게 더러워서 돌아온 건데요.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얼굴만 잔뜩 굳힌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때 교무실 문이 열리고 학주가 들어와 이쪽을 보더니 싱긋 웃는다. 태양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불려왔다고 생각했는지 머리에 알밤을 쿵 먹이고 지나간다. 이미 그의 뇌리 속에 자신은 문제아로 찍혔나 보다. 그래도 하나 아프지 않다. 적어도 가까이에서 자신을 흘끗 쳐다보며 던지는 담임의 말에 비하면. [조만간 아무나 한 분은 학교에 들르시라고 전해.] 책상 위에 기록부를 탁 하고 던지며 말을 맺는다. 별 대화도 없이 진행된 면담을 끝내고 걸어 나오는데, 태양의 뒤에서 담임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가 무슨 학원도 아니고 말이야. 자식을 맡겼으면 가타부타 인사나 말이 있어야지.] 교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 동안 태양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모님이라……. 현재 자신에게는 그렇게 부를 보호자가 없다. 어머니와 이미 이혼한 두 남자에게 갑자기 연락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들 중 한 명인 태양의 친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양원에 들어가 계신 어머니를 학교로 불러낼 수도 없다. 한국에 돌아와서 아직 그 분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 보지도 못했다. 몇 번 찾아가긴 했지만, 멀찍이 서서 어머니 모습만 바라보다 돌아왔었다. 이 순간까지 태양은 혼자라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한 줄로만 알았다. 감정을 다치거나 슬픔을 지어내는 일 없는 이상적인 삶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이런 막막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혼자 고래를 상대하는 새끼 펭귄이 된 기분……. 툭. 병째 마구 뒤흔들린 탄산수처럼 속이 답답한 상태였다. 그런 태양의 어깨를 누가 말도 없이 무례하게 치고 지나간다.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힘이 들어간 주먹을 못 본 보양이다. 흘끗 돌아보는 태양의 눈빛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검어졌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작은 병따개 하나였다. 그 정도면 이미 충분했다. 태양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리고, 건들건들 뒷걸음으로 멀어지며 비웃는 녀석을 불러 세웠다. [오승진.] 낮게 깔린 음성이 복도를 울리자, 지나던 몇몇이 흠칫 하며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마치 감은 것처럼 눈꺼풀이 낮게 드리워진 검은 눈동자가 방금 이름을 부른 목표인물에게 정확히 꽂혀 움직일 줄 모른다. [우리 아직 볼 일이 남은 것 같은데?] 그 날 마지막 수업은 음악 실기 시험이었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던 음악선생님은 매년 실기종목을 노래로 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년 노래 실기를 재인은 어떻게 치렀을까 궁금해진다. 옥상의 음악실로 향하는 계단은, 반 녀석들이 괴상하게 불러대는 노래 소리들로 시끄러웠다. 그들 뒤에서 태양은 일부러 재인과 멀리 떨어져 걷고 있다. 아예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서둘러 교실을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재인이, 우르르 재촉하는 친구들에게 쓸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뒤돌아 볼 때마다 자신을 찾는 듯 해서 가슴 한 구석이 울렁거렸지만, 참을 만 했다. 어느 새 텅 비어 버린 계단 위에 잠시 멈춰 섰다가,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녀석은 역시 재인이다. 지금 그는 자신의 짝인 정수와 함께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렇게 노래 연습을 하다 갑자기 돌아보는 바람에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도망갈 곳도 없는 한 공간 안에서, 태양은 쪼르르 달려오는 녀석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 [태양아,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제자가 시험 치기 전에 격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모르나 본데, 나도 오늘 너랑 똑같이 시험 쳐.] [그래도, 그래도.] 무심하게 내뱉으며 자기 자리로 걸어가는 태양을 재인이 바싹 붙어 따라온다. 자기는 꿈을 잘 꿔서 오늘 시험은 자신 있는데 정수가 걱정이라느니, 아까 오승진 짜식을 혼내주지 못해서 속이 부글거려 노래가 나올지 모르겠다느니, 앞뒤 문맥도 안 맞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종알거리며 계속 태양 곁을 떠날 줄 모른다. 곧 선생님도 들어오실 텐데, 얘가 왜 이럴까? 태양은 물끄러미 재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눈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다. [여재인.] [응!] 작게 불렀는데도, 하던 말 금세 멈추고 자신을 열렬히 올려다보는 작은 별. '깜빡' 그 큰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꿀꺽' 가느다란 목으로 침도 한 번 삼킨다. [긴장 풀어.] 끄덕끄덕.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시파레시도'만 기억해. 그 부분 가서 날 보면 내가 손으로 높이만 짚어줄게.] [응!] 끄덕끄덕. 좀 낫지만, 대답하는 목소리 톤이 영 불안정하다. [가사는 다 외웠지?] [그럼, 그럼!] [너는 목소리가 맑은 미성이라서 음정만 잘 맞추면 만점도 나올 거야.] [만점?] 눈이 동그래진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나 보다. [그래, 만점. 그러니까 딴 생각 말고 열심히만 불러.] 그제서야 여유가 생겼는지 엷은 미소가 나타난다. '흐읍' 가슴을 잔뜩 부풀렸다가, '후우' 깊게 속을 비우는 작은 별. 심호흡을 이토록 진지하고 비장하게 하는 녀석이 있다니. 태양은 자리로 돌아가는 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젠 자신이 더 긴장하는 걸 느낀다. 앞 번호인 재인이 먼저 시험이 치르니 다행이다 싶다. 음악시험. 미국에서는 주로 악기로 시험을 쳤었다. 그것도 밴드가 함께 연주를 해서 한꺼번에 점수를 매겼기 때문에, 한 명씩 앞에 나아가 혼자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양은 조용히 앉아, 목청을 틔운다 어쩐다 하며 여전히 시끄럽게 괴성을 질러대는 녀석들을 담담하게 지켜 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에 차 있고 거만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건 태양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그는 '잘 하고 싶다' 가 아닌, '잘 해야 한다' 에 의지를 두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무얼 하든 자신이 못 하리라는 것에 가능성을 두어 본 적이 없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끊임 없이 남 모르게 연습을 했다. 그건 누가 시켜서 라거나, 비웃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했다. 때문에 중간에 멈출 이유가 없었다. 못 한다고 손을 놓는 건, 안 하겠다는 결정과도 같았다. 머리가 해야겠다고 명령을 내리면, 몸은 따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해내지 못할 거란 깨달음은 커다란 고통과 분노를 안겨줄 게 뻔했다. 이겨낼 수 없고, 끝내 참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두려움이 되었다. 태양은 어쩌면, 작은 별을 통해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머리의 명령을 어기고 그의 손을 먼저 찾거나, 다 던진 채 신뢰 가득한 그의 눈에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과연 옳은 일일까? 자신에게, 또 그에게 치명적이지 않고, 다만 청춘의 몇 페이지를 차지하는 일상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줄까? 걸리는 것은, 재인이 자신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라는 거다. 또한 자신도 재인의 세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거다. 그건 절대 좁힐 수 없는 간격으로 보였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차이 말이다. 자신이 아는 한, 모든 '익숙하지 못한 것'들은 반사적으로 거부 되어 버린다. 새 아버지의 가족들에게 어머니가 그랬고, 미국에 있을 때 외조부님과 또래들에게 자신이 그랬었다. 이것은 세상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전투다. 그리고 현재 자신과 재인이 참여한 싸움이기도 하다. 가슴에서 냉소가 흐르는 태양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작은 별은 실패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실패를 하더라도 크게 좌절하거나 주저앉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만났던 대상들 중 최고의 강적이었다. <우리가 크면 괜찮아질까?> 가끔 혹은 자주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끈질기게 매달리곤 한다. 그렇게 '바보'가 되어간다. 조금씩 깨달아감에 따라, 더 많이 잊고 포기해가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니듯,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법이 없다. 9. 그건 꼭 시트콤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재인의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갈 때는 분명 여기저기서 키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 짓궂은 녀석들의 기대에 찬 웃음소리였다. 이미 그가 구제하기 힘든 음치라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란 얘기다. 음악선생님도 잘 안다는 얼굴로 재인의 긴장된 표정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러나 반주가 시작되고 재인이 첫 음을 제대로 내면서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투명한 미성이 공기 중에 부드럽게 섞어든다. 그건 마치 입김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짧은 호흡 때문에 강약 조절에 더욱 신경을 쓴다. 진지하게 노래하는 재인의 볼이 점점 발갛게 상기되고 있었다. 약간 눈썹을 들어올려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선생님은 이젠 살짝 눈을 감고 있다. 웃음기가 채 가시지 못한 녀석들의 얼굴에선 놀란 빛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믿기 힘들지만, 모두가 그의 노래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썩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다. 음정은 여전히 불안했고, 눈을 꼭 감은 재인의 표정은 자유롭게 물 속에서 노니는 숭어를 노래하는 것과 달리 비장하다. 굉장히 열성적인 목소리로 정성을 다해 한 음씩 꼭꼭 짚어 부르고 있다. 결국 듣는 이를 뭉클하게 해주는 노래가 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작은 별만의 특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 길지 않은 노래 중에 반 녀석들과 선생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녀석이 신기했다. 예상을 뒤엎는 노래 실력을 보인 것도 아니면서, 지켜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줄 아는 재인. '시파레시도' 부분에 가서 그가 실눈을 뜨는 걸 보았지만, 태양은 미처 손을 들지 못했다. [17 번 여재인, A 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재인의 점수가 불렸다. 선생님의 기분 좋은 외침에 그의 입이 딱 벌어진다. 그리고 곧장 태양을 쳐다보았다. 제대로 들었나, 확인을 원하나 보다. 싱긋 웃어 보이자, 그제야 선생님을 향해 달려가는 재인이다. 그리고 그 여린 몸으로 거구의 음악선생님을 안아 번쩍 들어올린다. 아이들이 와 하고 웃는다. 이의를 제기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반짝반짝 재인의 웃음을 감상하며 함께 기뻐하고 있다. 태양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빛나는 배우를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관객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공연은 만족스러웠고, 자신은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것처럼. 재인이 곧장 자신을 향해 달려오지 않았다고 해서 섭섭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우와, 우리 태양 노래 진짜 잘 하더라!] 시험이 끝나고 음악실을 막 나왔을 때였다. 뒷자리라 문이 가까웠던 태양이 먼저 걸어 나와 계단을 밟는데, 급히 뒤따라온 재인이 칭찬을 늘어놓는다. 이런 말에는 뭐라 대꾸해야 하는가? 우습게도 자신은 칭찬에도 익숙하지 못하다. 지금껏 '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으쓱할 일이 아니었다. [네 목소리만 듣고도 소름이 쫙 돋았어. 볼래?] 쳐다보지 않는다. 그냥 빠르게 내려갈 뿐이다. 그러면 재인은 또 멋쩍게 웃으며 덧붙이고 만다. [참, 이미 가라앉았지.] 헤헤거리며 쫓아오는 그의 종종거림이 눈에 들어온다. 두세 개씩 밟고 있는 계단. 재인에겐 만만치 않은 속도다. 그럼에도 뒤쳐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뛰어내려온다. 게다가 쉴 새 없이 떠든다. [한 소절만 다시 불러 봐, 태양. 금세 또 소름 돋을걸? 굉장히 저음인데도 멋있더라. 부러웠어! 왜 그거 있잖아. 하얀 크림 듬뿍 얹은 까만 커피. 우리 넷째 형이 잘 마시는 건데, 맛이 좀 강하지만 살살 녹여먹는 게 기분이 좋대. 조금만 맛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느낌 말이야. 딱 네 목소리더라. 아아, 진짜 태양인 좋겠다! 왕 부럽다!] 우뚝.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재인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겨우 한숨을 돌리며 곁에 선다. 아이들이, 꺾어진 바로 위 계단에 도달하려면 아직 몇 초의 여유가 있다. 소란함에 묻히기 전에 태양은 재빨리 말해 버린다. [네 목소리야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었을까? 약 3초 후, 재인의 눈에 행복한 기운이 사르르 퍼져 넘친다. 그 순수한 표정에 매료되어 버린 태양은 진심으로 자신을 그렇게 느꼈다. '달콤하고 새하얀 크림에 섞여 점점 부드러운 갈색이 되어 버리는 에스프레소.' 그리고……. 죽을 때까지 결코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 단어를, 죽을 때까지 오직 이 작은 별을 닮은 묘한 생명체에게만 쓰겠다고 다짐한다. [……아름답더라.] 꼭 비가 올 것처럼 날이 꾸물거렸다. 태양은 하교 길의 눅눅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다시 푹 내쉬었다. 강호 형이 구해준 원룸 형 아파트에 들어서면서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열쇠를 신발장 위에 올려두고 슬리퍼를 신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파에서 한 인영을 발견했다. 역시 강호 형이 알아봐준 일하는 아주머니다. 완전히 곯아떨어지신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오시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나 보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 선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다. 몇 번 마주쳐본 적도 없는 분이지만, 이렇게 고무장갑을 벗지 못하고 곯아떨어지신 모습은 처음이다. 소리 나지 않게 걸으며 태양은 붙박이장 쪽으로 갔다. 편안한 면바지에 티셔츠로 갈아입은 뒤, 흘끗 다시 돌아본다. 나이 드신 아주머니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주무신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면 빼곡하게 채워놓으신 반찬 통들이 보인다. 잘 먹지 않는데도 꼬박꼬박 잊지 않고 음식을 해놓으시는 걸 보면, 이건 강호 형이 신신당부를 했거나 아주머니의 말없는 잔소리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욕실로 가서 씻고 나오다 벽시계를 올려다보자,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다. 가만히 아주머니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혹 저녁에 빨리 돌아가셔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에구머니, 이를 어째! 학생, 미안해. 내가 그만 깜짝 졸았네.] 눈을 뜨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아주머니가 서둘러 일어났다. 뭐가 그리도 미안한지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다가 그제야 혀를 차며 고무장갑을 벗는다. 답답했을 게다. 숨을 쉬지 못하는 피부가 눅눅하게 핏기를 잃어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괜찮으시면 저녁 좀 차려주세요.] 태양이 조용히 말하면 부랴부랴 앞치마를 벗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신다. '그럼, 그럼.' 선선한 대답 후에 부엌으로 들어가시는데, 괜히 태양의 마음이 무겁다. [실은 혼자 먹기 싫어 그런 건데.] 수저를 한 쪽에만 놓으시는 아주머니를 향해 중얼거린다. 그러면 다시 자신을 쳐다보시다가 금세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같이 먹자고? 학생 낯가린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 이미 늦었으니 그럼 나 집에 전화 한 통만 하고, 밥 같이 먹어. 괜찮지?] [네.] 강호 형이 말했나 보다. 이 집 학생은 낯도 가리고 사람 상대하는 것도 싫어하니, 그저 조용히 청소하고 음식만 좀 해주시고, 그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피해주시라고. 그래서 그 동안 그렇게 얼굴 마주치는 일이 없었나 보다. 실은 맞는 말이다. 아주머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태양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혼자 식사하고 책 읽으며 남은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장아찌 좋아해? 내가 오늘 새로 했는데, 맛이 어떤가 봐. 학생 입맛을 내가 모르니. 지난 번 거는 손도 안 댔더구먼. 그건 내가 싸가려고 도로 꺼내 놨어. 학생, 요거 먹어 봐.] 갑자기 밥 위에 턱 올려놓으시는 더덕장아찌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생소한 경험. 무언가를 먹으라고 내밀어 강요하는 것이 불쾌하기도 하련만, 이상하게 태양은 가슴 속이 먹먹하게 무언가가 부풀어 올라 좁아지는 느낌이다. 요즘 자신이 좀…… 이상하다. 그리고 안 먹어본 반찬들이 너무 많다. 태양이 맛을 알 리가 없다. [맛있네요. 제가 천천히 먹을게요. 아주머니도 드세요.] [그래. 어여 들어요.] 묵묵히 수저를 놀려 밥을 먹는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태양은 좀 전 아주머니의 행동들이 어색함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치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그녀는 사레가 들린 듯 황급히 물 컵을 들고 저쪽으로 물러나 기침을 했다. 알고 있다. 자신은 그다지 편한 사람은 못 된다. 특히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상대방이 불편해하곤 한다. 자신의 외조부모님도 늘 자신과 있을 때 그런 빛을 드러내곤 하셨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라며 타인에게 자신을 가리켜 보이신 적도 있다. 그러고 보면 작은 별이 별종인 거다. 참으로 기이한 놈이다. [저…… 여쭤볼 게 있어요.] 자신의 말에 물을 마시다 말고 돌아보신다. 태양은 시선을 피해 눈을 식탁 위에 고정한 채 말했다. [학교에 제 보호자로 와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뭐라고? 하지만 학생…….] [실은 제 어머니는 학교에 오실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제가 전학 온지 얼마 안 되서 보호자나 어른이 한 번 담임선생님을 찾아뵈어야 하나 봐요. 저는 잘 모르지만, 오늘 교무실에서, 그러니까…….] 설명하기가 조금 힘들다. 아까 교무실에서처럼 다시 주먹을 꼭 쥐어 본다. 자신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꼭 제 부모님이라고 누군가를 모셔가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다시는 그런 일로 불려가고 싶지도, 담임선생님 앞에서 죄인처럼 앉아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제 집에서 일해주시는 아주머니에게 부탁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부탁하고 보니,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알았어, 학생. 다음 주에 시간 내 볼게. 나야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인데, 뭐. 어렵지 않아.] 태양이 알기로 이 아주머니의 시간은 곧 돈이었다. 강호의 말에 의하면 억척스럽게 일을 하시는 대신 매우 성실하시다고 했다. 제일 믿음이 가고 일을 잘 해주시는 분을 알아 봤는데, 그 분의 시간을 빼는 게 무척 힘들었다고도 했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오시지 못한다던 말을 태양은 기억한다. 아마도 자신이 불쌍하셨나 보다. 한창 손이 많이 갈 나이에 혼자 사는 것도, 학교에 인사 갈 부모가 없는 것도. 인정 많고 솔직해 보이시는 아주머니는 그 정도 희생쯤 눈 딱 감고 해주실 건가 보다. 김치를 죽 찢어 다시 태양의 뜨거운 밥 위에 얹어 놓으신다. 난감한 기색도 없이 선뜻 받아들여주신 게 감사해서 태양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열심히 밥을 먹는다. 그토록 열심히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고무장갑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손이 부지런히 반찬을 날라다 주었다. 그러면 또 태양은 기다렸다는 듯 밥을 푹 떠서 입 안에 넣는다. [이거…….] 식사가 대충 끝나고 아주머니가 설거지를 하시는 동안, 태양은 서둘러 봉투 두 개를 준비해 가져왔다. 그걸 보시고 금세 눈치 채셨는지 낯빛이 흐려지신다. 하나는 아주머니, 다른 하나는 담임선생님 몫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물론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인학의 말에 의하면 담임선생님의 면담 요청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서인학는 태양의 짝이다. 평소에는 절대 말이 없고 제 할 일만 챙겨 하지만, 막상 말을 시키면 똑 부러지게 충고까지 다 하는 녀석. 그가 진지하게 언급했었다. 고집스럽고 단호한 태양의 표정에 한숨을 푹 내쉰 아주머니는 그냥 또 고개를 끄덕인다. 자세한 내막을 캐묻지 않고, 피곤한 설득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다행이다 싶다.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아까보다 한결 헐거워져 있었다. 소문은 떠들썩하게 퍼져 있었다. 그게 누구의 입을 통한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승진이나 그의 똘마니들일수도 있고, 혹은 그들의 대화를 들었던 다른 놈들일 수도 있다. 태양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의 웅성거림을 흘려들으며 표정을 굳혔다. 백 번의 경고도 무소용이었을 거다. 녀석의 목표는 딱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유치한 표현이긴 하지만, 여재인과의 핑크빛 미래 말이다. 그가 작은 별을 좋아하는 건 분명해 보였으나, 방법은 항상 그의 걸음걸이만큼이나 비뚤비뚤했다. 소문의 요지는, 오승진과 남태양이 재인을 사이에 두고 조만간 대대적인 결투를 벌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좋지 않아.] 자리에 앉는 순간, 옆에서 태양의 짝이 중얼거렸다. 마치 혼잣말 같지만 그건 분명 태양에게 던지는 경고였다. 여재인은 인기가 많으니, 얻는다 해도 그 만큼 잃을 것도 많을 거라는. 오승진과 맞붙는다는 것은, 괜히 땅 속의 나무뿌리를 뽑으려 애쓰는 것과 같다는. 그래서 자칫 그것에 걸려 스스로 넘어지더라도 일으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태양은 물끄러미 인학을 바라본다.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살짝 들어올리며, 그가 표정 없는 눈빛을 들어 태양을 마주본다. 이렇듯 얼굴을 똑바로 마주대하기는 처음인 듯 하다. 이제 보니 녀석은 유난히 갈색이 많이 도는 홍채를 갖고 있다. 오목조목한 생김새가 꽤 섬세함에도, 늘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알지 못했다. 예리해 보이는 인상이다. 무시 못 할 논리로만 말을 하는 입술을 가졌다.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아.] [그건 또 왜?] 태양이 물으면, 그가 시선을 피한다. [어찌 됐든, 여재인을 얻잖아.] 항상 누구보다 일찍 등교하는 인학은 이미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태양은 이미 그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자신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것을 느꼈다. 혹 이 녀석도 아닌 척 하지만 재인을 좋아하는 건가? 의심이 드는 순간 기분은 또 탁해진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면 힐끔 이쪽을 쳐다보던 녀석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모두들 소문을 신경 쓰고 있는 거다. 그 폭풍의 핵 속에 앉아있는 기분이다. 자신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던 오승진을 떠올리며 태양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직도 말을 맺지 못했는지, 인학이 낮게 덧붙였다. [물론 이건 다, 네가 그를 원할 때의 얘기지.] 툭. 무시하자며 책을 펼치던 태양의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추호도 의심하거나 짚어보지 않고 물 흐르듯 넘겨 버렸을 사실이 눈앞에 떡 버티고 서 있다. 이 모두가 자신이 재인을 원할 때 해당하는 얘기라는 것. 즉 원하지 않는다면, 소문도, 그 후의 일도 모두 상관없는 거라는 얘기. 순간 태양은 속으로 아무도 대신 대답해주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재인을 원하는가? 그를 가지고 싶은가? 다른 놈이 채가는 걸 두고 보고 싶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오직 나만 바라보길 원하는가? 여재인이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는가? 드르륵.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소리가 났다. 돌아보면, 재인이 막 교실로 들어오고 있다. 곁에는 한 녀석이 그의 가방을 들어주며 재인의 자리까지 갖다 준다. 그에 비해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 재인은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태양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를 보지 않는다.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이 약간 동요하는 기색도 느꼈지만, 다 소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인도 들었을까? 그래서 저렇게 힘이 없어 보이나? 문득 어깨를 짚는 하얀 손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파리한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놀라서 그의 얼굴을 살피면 창백한 얼굴이 가만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웃어준다. 하지만 재인은 곧 태양의 자리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인사 대신이었나 보다.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며 자신의 짝에게도 똑같이 웃어줄 게 분명했다. [재인아, 또 아파?] 정수 녀석이 재인의 팔을 잡으며 걱정스레 묻는다. 교실 안은 돌연 침묵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인이 답한다. [미안. 걱정하지 마.] 그리고는 엎드린다. 그의 가쁜 숨에서 열이 느껴진다. 태양은 놀란 심장이 거칠게 가슴을 두드리는 걸 느끼고 있다. 마치 작은 별이 아픈 일은 자주 있는 것처럼 모두가 익숙한 모습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왜 아픈 건데? 몸이 약한 건가? 가늘긴 하지만 약골로 보이진 않는데. 작다고 해도 평균보다 약간 작을 뿐인데. 태양은, 책상 위로 힘없이 엎드린 재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 놀랍게도 곁에서 인학이 그런 태양을 흘끗 보고는 아까의 질문에 대신 답을 내려준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네가 여재인을 신경 쓰는 건 사실인가 보다.] 태양이 고개를 숙여 다시 펜을 잡으면, 인학이 짧게 혀를 차며 낮게 속삭였다. [쟤 가끔 아파. 한 번 아프면 무진장 앓는 모양인데, 학교는 절대 안 빠져. 양호실에도 안 가. 고집이 세서 선생님도 못 말리지. 그래서 그냥 내버려둬. 혼자 조용히 아프다 가거든. 신음소리 한번 안 내. 굉장히 아파 보이는데도. 저런 날은 꼭 지네 형이 데리러 교문까지 와. 이상한 녀석이야.] 묘한 녀석이다. 태양도 그리 생각한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들이 많아지는 느낌. 그래도……. 그래도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절대로 아프거나, 힘들거나, 슬프거나,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펜을 잡은 손이 하얗게 된 줄도 모르고, 태양은 그저 앉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다가가 등을 쓸어주고 싶은 것도, 가만히 안아 신음을 실컷 뱉게 하고 싶은 것도 참았다. 자신은 여전히 인내의 화신이었다. 아픈 모습의 재인은 생기가 넘치는 보통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누가 말을 걸기 전에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고,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 그러니까 꼭 보아야 할 것만 보고 필요한 대답만 했다. 그런 재인에게 평소처럼 편하게 다가가 말을 거는 녀석들 또한 거의 없었다. 호들갑스레 챙겨주거나 걱정으로 발을 구르지는 않아도, 간간히 상태를 물어주거나 등을 쓰다듬어 주는 녀석까지도 없었다는 얘기다. 재인의 열이 내리지 않자, 그제야 정수가 보다 못해 양호실이라도 가자고 졸랐다. 색색거리는 숨을 버겁게 쉬던 재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는지 조퇴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3교시는 체육이었다. 때문에 아이들은 모두 머뭇머뭇 운동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혼자 집까지 가야 하는 재인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도 섣불리 말을 걸지 않는 걸 보면, 늘 이렇게 지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퇴증을 받으러 교무실에 가야 하는 재인은 교실이 빌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 그러면 누구 하나라도 따라 나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것조차 거부했다. [태양아.] 나직하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 태양은 교실 뒷문에 홀로 기대 서 있었다. 어깨가 힘없이 늘어져 가만 앉아 있는 작은 별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자신을 알아챘을까? 텅 빈 교실. 수업시작종이 울린 후의 흔들리는 정적. 그 속에서 태양은 조금 놀라운 심정으로 대꾸를 한다. [응.] [그만 나가 봐.] [……!] [너 늦으면 당근한테 맞을 거야.] 당근은 체육선생님의 별명이다. 아이들에게 뭉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그 이유를 복창하게 해서, 당연히 맞아야 하는 몽둥이라는 뜻으로 '당근빠따'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만든 매가 곧 그 선생님의 이름이 된 거다. 대답이 없자, 재인은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다시 말한다. 침을 삼키기도 힘이 드는지 낮고 느리게 흘러나오는, 다정한 충고. [어서 가. 너 안 맞아 봐서 몰라. 그거 되게 아파.] [……응.] 태양은 대답을 하고도 한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 무엇을 그리도 숨기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하다. 재인이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는 부분을 자신은 이미 본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픈 걸 정말 싫어하는구나. 너, 그렇게 약해질 때마다 대신에 마음은 더 안간힘을 써서 버티는구나.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이 의지하는 거,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어하는구나. 어쩌면 그건……. 재인아, 나랑 참…… 닮았구나. 천천히 기댔던 몸을 바로 하고 태양은 조용히 교실을 나왔다. 복도 바닥에 떼었다 붙이는 걸음걸음이 한 없이 무거웠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정말 그렇다면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멀어지고 있다. 그래도, 너 절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아이처럼 자꾸만 되뇌는 걸 멈추지 못하는 태양이다. 눈앞의 무언가가 스쳐 가면 버릇처럼 눈을 감아 버리곤 했다. 그리고 한참을 같은 자리에 서서 그게 무엇이었나 궁금해 하는 것이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고, 대체로 그렇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말이다. 낙천적인 성격처럼, 늘 '혹시'라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곤 하는 재인이었다. 그보다 더 어렸을 적의 재인은 보다 순진했을 것이다. '엄마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게, 세상이 사라진다.'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꼬옥 감아 보이는 아이였으니까. 사라지는 게 아님을, 그냥 그대로 존재함을, 그처럼 몰랐던 때가 있었다. 주인을 깨우면 안 된다고 자신의 귀를 막고 도둑질을 하러 간 바보 도둑놈 같던 자신이. 건강한 아이들 속에서 똑같이 살아간다고 해서 자신도 건강한 건 아니라는 사실. 그걸 알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그러나 아직도 가슴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재인은 교무실에서 나와 상담실로 향했다. 담임선생님을 찾는 그에게 누가 그리로 가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복도 끝 조금 외진 곳에, 거의 사용하지 않아 비어 있곤 하는 상담실이 보였다. 갈수록 힘겨워지는 걸음을 다잡아 걷던 재인은 겨우 그 앞에 다다랐다. 정신이 흐려지는 걸 버티며 간신히 손잡이를 잡아 돌리고 문을 연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화면이 좀 선명해진다. 그 곳에서는 담임과 한 여인이 자신을 동시에 돌아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조금 내려보면, 하얀 봉투 같은 게 보인다. 다시 눈을 깜짝이면, 그제야 화들짝 놀란 두 분의 표정이 제대로 잡히고 만다. 재인은 몰려오는 아찔함에 다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다음 순간, 갑자기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지르는 담임선생님의 음성을 들었다. [여재인! 남태양이 개새끼 지금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모두가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이미 정신을 잃어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얼마나 기쁠까? 재인은 수도 없이 속으로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다른 선생님께 받아 가도 되는 조퇴증이었다. 굳이 모범생인 양 담임선생님께 인사드리고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머리에 뭐가 차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뭐해? 어서 끌고 와, 당장!] 과도하게 화를 내고 있다. 저처럼 발끈하지 않아도 충분히 심각하고 난감한 상황인데. 재인도, 여인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를 견디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도움을 구하는 눈빛. 감당하기 힘든 안타까움과 당황스러움이 느껴진다. 재인은 태양과 하나도 닮지 않은 여인을 바라보며 손에 힘을 준다. 문 손잡이가 비틀어지다가 툭 손에서 미끄러져 빠져 나갔다. 기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재인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너무 아파서 지금 자신은 눈이 잘 안 보인다고 말했다면, 혹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모든 감각이 다 무뎌졌다고 둘러댔다면,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조퇴증 얘기만 꺼내고 재빨리 돌아 나왔다면 어찌 됐을까? 하지만 담임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왜 그곳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조차 재인에게 묻지 않았던 것이다. 곧 쓰러질 것 같은 걸음을 얼마간 옮기다, 자리에 주저앉아 조금 울기도 했다. [퍼옴완결/] [은세] 내 집에 사는 남자 1부 中 ayuda 수정/삭제 + 스크랩하기 (HIT: 2627/VOTE: 69) [허락메일] -------------------------------------------------------------------------------- 내 집에 사는 남자 1부 中 <목 차> 10. 잡초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11. 누구나 처음은 서툴 권리가 있다 12. 솔직하자니, 과묵해지더라 13. 눈 깜짝할 새 일어날 수 있다 14. I will give you everything 15. 봉인된 그를 깨워 정체를 밝히리라 16. 서툰 질문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17. 읽고, 새기고, 버리다 18. 불안은 첩경을 넘었다 <잡초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마늘밭에서는 장미도 잡초일 수밖에 없듯이, 모든 것들이 한발씩만 비켜서면 잡초가 되어 버리고 그 순간부터 삶은 치열해지는 것이다. 10. 어디서부터인가 잘못되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오면서 계획했던 생활이 언젠가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학교를 다니겠다는 것이 과한 욕심일 리 없었다. 태양은 그저 누구의 말이나 행동에도 상처입지 않는 자신을 떠올렸을 뿐이다. 매 순간 어깨를 굳히고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거란 건 착각이었을까? [이 새끼, 니가 날 물 먹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고? 어디서 감히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시켜 촌지 따위를 내밀게 해!]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시건방 떠느라 눈에 뵈는 게 없지, 응?] 퍽! 퍽! 몽둥이를 휘두르는 담임의 매질과 폭언이 동시에 태양을 향한다. 조용한 상담실을 울리는 담임의 음성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네 눈엔 내가 뭐로 보여, 새끼야! 선생이고 뭐고 너한텐 세상이 우습냐? 오늘 한 번 죽어 볼래? 어! 어떤 맛인지 진짜 맛을 보여줄까, 남태양!]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양이 정작 아프게 느껴지는 것들은 따로 있었다.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창백해져서 자신을 부르러 왔던 재인의 모습. 혼자서 집까지 어찌 가고 있을까 염려하던 차에, 운동장까지 자신을 부르러 온 그를 봤음에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니, 아주 잠깐 가슴 속에 빛처럼 퍼지던 온기가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본 순간, 서늘한 동굴 속에 다시 갇히는 느낌이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에게 닥친 불길한 예감보다 그의 거칠고 힘겨운 숨소리가 더 마음을 어둡게 했다. 조용한 상담실 복도에는 마치 벌 받는 죄인처럼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그리고 태양을 보자마자 달려와 두 손을 꼭 쥐며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물끄러미 내려다본 아주머니의 손은 온통 벌건 생채기들로 퉁퉁 부어 있었다. 태양이 놀라서 가까이 당기자, 오히려 화들짝 놀라며 손을 치마 뒤로 숨기셨다. 어젯밤 주무시기 전에 굳은살을 거친 수세미로 닦아내려다 그리 되셨단다. 문득 고무장갑 속에서 오래도록 숨을 못 쉬어 불어 있던 아주머니의 손이 떠올랐다. 자신이 학교에 와 달라 부탁하자, 부끄러운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시던 모습도 함께. 때문에 태양은 좀 전에 만난 두 사람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 손을 하고 와서 차마 내가 태양이 학생 엄마라고는 말 못하겠어서…….] 사과를 듣는 순간 가슴 속에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다 자신 때문이었다. 몹시 아픈 재인이 아직 학교에 머물러 있는 것도, 지금쯤 본래의 일상대로 일하고 계셔야 할 아주머니가 상처투성이 손을 한 채 어쩔 줄 모르는 심정으로 여기 서 계신 것도. 고작 17세 소년이 감당하기엔 벅찬 죄스런 자책들이 태양의 가슴 속에서 쉼 없이 칼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건 정작 태양이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담임의 노여움이 재인에게 들켰기 때문인지, 아니면 속을 알 수 없는 제자의 당돌한 처신이 모욕적이었기 때문인지, 그건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태양이 알고 있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자신은 당연히 혼이 나야 한다는 것. 가혹한 매질을 당해도 싸다는 것. 누가 뭐래도, 어떠한 변명도 구해주지 못 할 잘못을 한 건 사실이니까. 오히려 책상을 짚은 채 엉덩이의 살이 터지도록 맞고 있음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결코 피하거나 빌지 않는 태양이, 신음 한 번 내지 않는 그가, 교사 생활 반납할 각오로 폭력을 가하는 담임을 더 극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태양이 얼얼하고 지독한 열 외에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쯤 담임의 팔에서도 힘이 빠져 결국 몽둥이가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고요한 공기 중으로 어른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소년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미동도 없이 그대로 책상 위로 엎드려 있던 그는 털썩 바로 옆 의자에 앉아버리는 담임의 고뇌어린 표정을 보지 못한다.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자, 흘끗 태양을 올려다보며 담임이 내뱉었다. [누가 움직이랬어. 나쁜 놈의 새끼. 네가……!] 진 빠진 목소리. 축 쳐져 버린 어깨와 팔. 가혹한 처벌행위 후에 찾아온 허탈감이 표정에 나타나 있다. 거친 숨 사이로 노여움이 소진되어 버린 음성이 울리다, 일순 멈춘다. 태양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매를 짚어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긴장한 듯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담임은, 태양이 조용히 내미는 그것을 천천히 받아 쥐었다. [더 맞을래? 그랬으면 좋겠냐?] […….] 제자는 대답이 없다. 선생은 기가 찬 듯 웃음을 뱉는다. [하! 반항 하냐?] [아니요.] 그제야 입을 연 제자의 대답이 반가웠을 것이다. 담임은 말없이 태양을 바라보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대체 이유가 뭐냐?] 돈 봉투를 내민 것에 대해 묻는 걸까? 아니면 살이 터지도록 맞은 것도 모자라 매를 주워 드린 거? 태양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솔직해지기로 한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왜 제가 이런 모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싶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모른다는 사실이 속상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살아야 하는지, 어찌 처신하며 사람들 속에 섞여 지내야 하는지, 저는 정말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태양의 짧은 대답에 허탈한 듯 담임이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잠시 후에 덧붙이듯 입을 연 태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마른 침을 삼키자, 손에 땀이 배이기 시작한다.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선생님.] [……!] [그게…… 너무 힘이 듭니다.] 저에겐 모든 게 너무 어렵습니다. 다른 녀석들에겐 간단해 보이는 것도 저에겐 참 쉽지가 않습니다. [새끼야. 너 몇 살이냐?] 대뜸 나이를 물어온다. 한심하다는 듯한 선생의 표정에 제자는 입술을 꾹 다문다. 대답이 필요할 질문이 아니다. 태양이 몇 살인지는 담임도 안다. [그게 바로 십대라는 거다. 너는 그냥 크는 줄 알았냐? 어른이 거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 [이 자식아. 그래서 내가 너 건방지다는 거야. 돈 많고 공부 잘 하는 새끼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거든. 저 잘난 줄만 알아서는 귀염성 없이 구는 거, 그래서 내가 싫어해.] […….] 담임은 상처나 아픔 따위가 성장을 돕는다고 믿는 모양이다. 남달리 과묵하고 조용한 이 제자의 과거가 어떤지 알든 모르든, 어떠한 위로나 침묵보다도 매섭고 따끔한 충고가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용히 살고 싶어? 하!] 담임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다. [그럼 먼저 치열하게 살아, 새끼야! 일단 죽도록 부대끼면서 살아 봐야지. 안 그래? 지금은 그럴 때다, 남태양. 너보다 못 가지고 못난 놈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어. 왠 줄 알아? 어른이 되고 나면 떠들썩하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못 살거든. 지금 니가 누리고 있는 게 뭔지 제대로 보라고, 임마. 나중엔 후회해도 늦어!] […….] 순간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이었을 거다. 한참 과제발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인터넷 경매로 낙찰 받은 희귀 음반이 때마침 배달되어 왔었다. 밤까지 계속 과제에 매달려도 시간이 빠듯했지만 '한 곡만'이라는 결심에 의지해 이어폰을 귀에 꽂았었다. 그 순간 음악이 너무 좋아서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무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세상에 이토록 송두리째 정신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다니. 덕분에 과제는 밤을 새고 나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 흘끔 흘끔 멀찍이 둔 CDP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다음 날 발표는 무사히 해냈고, CDP와 CD는 다른 녀석들에 의해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후회를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밤새 그 음악을 더 들어야 했다고 혀를 찼는지, 아니면 음반을 학교로 가져가는 게 아니었다고 가슴을 쳤는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자신은 그 날 밤, 무엇에 더 치열하게 매달려야 했을까? '걸을 수 있겠냐?' 라고 묻는 담임의 음성에 태양은 웃을 뻔 했다. 어쩌면 자신을 실컷 괴롭혀온 삶이 '살 수 있겠나?' 라고 묻는 것 같아서다. 그 둘은 조금 다른 뜻이겠지만, 자신에겐 그다지 다르지 않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우리한 둔통과 잔뜩 부어올라 쓰라리는 허벅지는, 미국에서 가끔 못된 녀석들에게 끌려가 터졌을 때보다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 정도는 견딜 만 했다. 더 한 것도 견뎌왔으니까. 괜찮다고 말하긴 힘들어도, 못 살 정도는 아니었다. 담임의 말도 어쩌면 그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컷 죽도록 아파 본 뒤에는, 웬만한 일들에 '이쯤이야.' 하게 된다는. 기다리면, 인이 박혀서 결국 아픔도 기쁨도 잘 느끼지 못하는 어른이 될 거라는. 담임은 꼭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새삼스레 태양이 맞은 부위를 신경 쓰고 있었다. 양호실 들러서 연고라도 바르고 가라는 말투에 다정함이나 후회의 기색은 없었지만, 태양은 그저 묵묵히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상담실을 걸어 나왔다.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며 그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교문을 향해 뻗은 길은 고요했고, 어디에서도 재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피식, 그제야 태양은 김이 빠진 듯 웃는다. 벌써 갔을 게다. 몇 번의 종이 울렸고,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속을 혼자 걷는 태양의 얼굴에선 다시 표정이 사라진다. 드르륵. 문을 열자 붉은 햇살이 창을 통해 가득 들어와 양호실 안을 채우고 있다. 조용한 공간. 작은 소리조차 낼 수 없도록 숨을 참게 만드는 고요함이다. 아무리 떠들썩하게 뛰어든 놈일지라도 금세 입을 막고, 발소리를 죽이게 만들 듯한. 그리고 그 곳의 침대 위에 누워 잠들어 있는 한 녀석을 발견한다. 작은 별이다. 태양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바로 옆 침대에 걸터앉았다. 온몸으로 퍼지는 안도감. 버석한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위로 같다. 상체를 숙이는 순간 진해지는 엉덩이의 통증에 낮은 신음을 내고 만다.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입술을 깨물고 다시 내려다보면, 천천히 눈을 뜬 재인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다. [안 갔어?] 끄덕 끄덕. 그 움직임을 보고, '나 때문에 못 간 거야?' 다시 묻고 싶은 태양이다. [안 아파?] 끄덕 끄덕. 말 없는 대꾸에, '너 되게 아파 보이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는 재인이다. 한 질문씩 주고받은 두 소년은 다시 말이 없다. 무엇 때문인지 비 개인 오후 표 눈동자가 흐려지고 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쏟아 부을 것 같은 눈빛이다. 태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더 깊게 숙였다. 재인의 눈 가까이 상체를 낮추고 후우 숨을 불어넣는다. 마치 하늘에서 구름을 밀어내기 위해 바람을 만들듯이. 살짝 찌푸리며 눈을 감았던 재인이 다시 눈을 뜬다. 물기가 가시자 이번엔 붉은 석양처럼 열기가 피어올라 있다. 그 눈이 걱정스레 자신을 올려다본다. [지금 네 눈에 뭐가 있는지 알아?] 낮게 속삭이듯 물으면, 재인이 시선을 꼭 붙든 채 작게 대답한다. [태양.] 가까이 다가간다. 조금 더 선해지는 귤 향기. 코앞까지 다가온 태양의 얼굴에 조금 놀란 듯 재인의 눈이 커진다. 마치 살 냄새를 맡는 것처럼 숨을 깊게 들이쉬는 기색에 재인은 부끄러운 듯 그제야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그러더니 들릴 듯 말 듯 작게 속삭였다. [네가 좋아.] 조금씩 다가가던 태양의 얼굴이 그대로 멈춘다. 열이 나던 눈가와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진다. 태양은 뚫어지도록 그런 재인을 내려다본다. 이젠 하얀 뺨만 보인다. 조금만 각도를 틀어 움직여도 닿을 듯한 그의 입술이 바로 아래에 있다. [그러니까 바보야. 제발 너 아프게 하지 마.]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재인이 하고 있다. 솜털 보송한 우윳빛 뺨이 발그레 물들어가는 게 보인다. 태양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대로 작은 별을 향해 떨어졌다. 보드라운 뺨 위로 톡 내려앉은 태양의 입술이, 또 다시 방향을 바꿔 재인의 바알간 입술에 닿을 듯 말듯 한다. 흡 녀석이 숨을 멈춘다. 놀랐나 보다. 완전히 굳어 버렸다. 눈을 살짝 뜨자, 느리게 깜빡 감았다 떠지는 재인의 눈꺼풀이 보이고, 금가루 같은 햇살이 묻어 반짝이는 긴 속눈썹이 부드러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지운다. 저도 모르게 재인의 어깨를 당겨 꼭 끌어안은 태양은 몸서리가 쳐지는 것 같다. 그 귤 향 가득한 따뜻한 감촉에. 그리고 딱 맞게 착 감싸이는 나긋한 그의 몸에. 눈을 꼭 감고 그제야 입술을 꼭 붙여 버린다. 따스하고 말랑한 보드라움. 향긋한 귤 향이 진동을 한다. 촉 소리를 내며 떨어진 순간, 하아 하고 숨을 내뱉는 작은 별. 둘 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벅찬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 도리어 낮게 죽인 모습이다. 그렇게 시간이 마냥 흐른다. 순식간에 서로가 그토록 긴장해 버린 거다. 어쩔 줄 모르는 두 소년을 깨우듯 곧이어 양호실 문이 활짝 열렸다. [여재인, 아직 있니?] 다정한 음성은 필시 양호선생님의 것이다. 재빨리 상체를 들어올린 태양이 우뚝 돌아서서 재인을 가린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오후 수업이 막 시작되어서인지 복도 쪽의 기척도 조용했다. 30 대 중반의 유쾌해 보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태양은 꾸벅 인사한다. [재인이 반 친구?] 태양의 키 때문에 양호실이 좁아 보인다며 농담을 건넨다. 어색해하는 그에게 필요 한 거 없냐고 묻더니, 아무 것도 모르는 낯선 어른은 다시 나가 버렸다. 그렇게 또 두 소년만 남는다. 문득 돌아보면 작은 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쓰고 있다. 선생님이 나가며 문 닫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미동도 없고 조용하다. 태양은 할 수 없이 재인의 옆 침대에 그대로 누워 버린다. 반쯤 걷힌 커튼이 반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흔들린다. 눈을 감자, 숨쉬기가 편안해진다. 녀석으로부터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다시 눈을 뜨고 재인을 향해 모로 누우면, 삐걱 이는 철제침대 소리가 낮은 공기를 쭈뼛 가른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푸른 담요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그의 움직임이 보인다. 답답하지 않을까? 태양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진지하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작은 별. 너도 느끼고 있냐? 이 좁은 공간에…… 너하고 나, 둘 뿐이다. 그 사실이 왜 이토록 중요하게 느껴지는지 고민을 해 봐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미 누웠기에 다리는 두고 심장만 너를 향해 뛴다. 알고 있냐? 그 사실이…… 나는 지금 못 견디게 불편하다. 태양이 눈을 떴을 때, 재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편 다행으로 여겨진다. 심장도 제자리를 찾은 것 같으니까. 운동장 한 가운데 운석이 떨어져 움푹 팬 것 마냥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듯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럴 이유가 없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 온전하게 혼자가 되고 싶어 한국에 왔으니까. 교실로 돌아오자 제일 먼저 재인의 빈 자리가 눈에 띄었다.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은 태양은 신음을 삼킨다. 한 시간 동안 좀 괴롭겠지만, 더 이상 혼자 양호실에 누워있고 싶진 않았다. 옆자리를 흘끗 보자 늘 그렇듯 인학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후 수업에 빠진 제 짝이 어디 갔다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재인이가 그러더라.] 툭 내뱉은 태양의 말에 그제야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칫 하는 인학.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용히 말하는 태양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선생님과 단둘이 얘기하는 건, 서로 친해질 수 있는 아주 드문 기회라고.] [……!] [덕분에 좋은 말씀도 듣고, 내가 원하던 것도 말씀드릴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책을 펼쳐 보기 시작한 태양은, 그제야 자신을 돌아보는 짝의 시선을 예민하게 느낀다. 그 상태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 툭 인사를 던진다. [고맙다, 서인학.] [어째서 나한테……?] [한국에 오면 '사랑의 매'라는 것도 한 번 맞아보고 싶었거든? 나쁘지 않네.] 그의 충고대로 담임과의 면담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된통 혼이 났다. 늘 한 가지 질문에 대여섯 가지 대답을 얹어주는 그가 새삼 재미있게 느껴진 거다. 너도 혹시 그거냐? 필요한 건 다 알려줄 테니, 네가 어찌 나오는지 한번 보자, 라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인학에게 태양은 다시 눈을 맞추었다.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텐데도 인학은 피하지 않는다. [재인인, 갔나?] 그러다 딴 소리를 툭 던지면, [좀 전에 걔 형이 와서 데리고 갔어. 해인이 형은 우리 학교 졸업생이야.] 역시나 모르는 거 없이 설명해주는 인학. 태양은 싱긋 웃으며 그의 앞에 펼쳐진 책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까 오전이랑 페이지가 별 차이가 없네.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읽는 건가?] 당황한 눈빛. 그리고 조금 노여운 듯 힘이 들어가는 입가. 태양은 자신의 짝이 느끼는 감정들을 떠올리며 씁쓸해졌다. 인학도 결국 재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보지 않는 척, 듣지 않는 척 해도 결국 그의 신경은 온통 책이 아닌 여재인에게 뻗어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재인과 친해진 듯한 태양이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을 거라는 유추를 해본다. 지적으로 반짝이던 인학의 갈색 동공이 살짝 찌푸려진다. 안경을 벗으면 무척이나 깊고 부드러운 인상을 줄 것 같은 얼굴. 그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라 태양은 살짝 눈썹을 들어올렸다. 인정을 하려는 건가? 인학의 입술이 열린다. 책장을 소리 나게 마저 넘기며 흘러나온 단호한 대답, 의외로 짧다. [다시 읽는 거야.] <누구나 처음은 서툴 권리가 있다> 너의 물음에 난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음이 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태양 때문이다. 눈부심은 말을 앗아가 버렸다. 11. 아무리 독신자 형 아파트라 해도 이처럼 대단지 주상복합 하우스에 어둡고 좁은 길목이 버티고 있다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로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오면서 태양은 밤기운의 으슥함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아까부터 뒤에서 반복적으로 섰다가 다가오고 있는 검은 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집은 제일 안쪽에 위치한 동이다. 그는 빠르게 가까운 경비실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또 잠시 멈춰선 차는 곧 태양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과민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말씀하셨었다. 태양은 긴 한숨을 내쉬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찾아가 보지 못했다. 어차피 매번 인사는 드리지도 못하고 돌아올 거면서, 그냥 보고 싶었다. 그 순간엔 바다 위에 남겨진 섬처럼 기약 없는 고독을 떠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처음 한국에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던 엄마의 냉정한 말이 떠올랐다. 떠나갈 때 내가 원했던 것들을 다 가지기 전에는 오지 마라 하셨다. 그 어렸을 때의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유독 밝은 별 하나가 떠 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말없이 자신을 따라 온다. 그 모습이 꼭 누군가를 닮아 가슴 속이 축축해진다. 그립지 않다. 하나도 보고 싶지 않다! 입술을 꼭 물고 땅을 보며 걷기 시작하는 태양. 그래서 몇 발짝 앞에 멈춰 서 있는 검은 차를 지나치고 있음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운동장에서는 축구부 녀석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늘은 잔뜩 먹구름을 먹어 무겁게 내려앉았고, 축축한 공기가 낮게 가라앉아 피부로 스며드는 그런 오후였다. 방과 후의 떠들썩함도 어느 정도 가신 학교에 우두커니 남은 태양은 조용히 혼자 생각을 정리하려던 계획을 접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부터였다. 이런 날, 이런 기분으로 비까지 맞는다면 어떤 기억이 머릿속을 침범해 들어와 밤새 자신을 괴롭힐지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다. [어!] 작은 탄성과 함께 교실로 한 녀석이 들어왔다. 돌아보진 않지만, 태양은 뒤통수가 조금 당기는 기분이 든다. 창틀 가운데 가로놓인 바에 양쪽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얹은 자세라 돌아보는 것도 내키지 않다. 그냥 떠나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까 보다. [왜 그래, 형?] 순간 열린 문 바깥쪽에서 또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기분. 태양은 천천히 상체를 세워 턱을 든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온 종일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던 여재인! 처음으로 결석이란 걸 하더니 수업도 다 끝난 저녁에 웬일인가 싶다. 아니 그보다, 자신이 왜 이렇게 놀라고 흠칫 떠는지 모르겠다. [2 학년은 야자 없지 않냐? 여기 한 놈 남아 있는데?] [……태양?] 아직 돌아보지 못한다. 사박사박.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재인의 발소리가 들리지만, 여전히 그대로 서서 시선은 운동장을 향한 채다. 비록 손은 주먹이라 해도. 이윽고 정적. 재인이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선 것이 느껴진다. 이건 좀 다르다. 평소 같으면 곁에 바짝 붙어 종알거리기 시작할 텐데. 그런 작은 변화가 태양의 가슴에 묵직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인을 쳐다본다. 몇 걸음 너머에서 뚫어질 듯 자신의 옆모습을 보고 있는 작은 별을. 시선이 부딪치자, 그가 고개를 돌려 버린다. 태양의 가슴 한 쪽에서 지끈 금이 간다. [형, 먼저 가.] 조용한 그의 음성이 교실에 먼저 들어왔던 이에게 향한다. 낮지만 단호하다. 누구라도 반박하기 힘들 듯한 분위기. ' 현관에서 기다린다.' 라고 툭 던지듯 내뱉고 재인의 형이 물러갔다. 저 창백한 뺨 위에 제 입술이 닿았던 기억이 떠올라 태양은 가슴이 뻐근해진다. 겨우 어제의 일인데도, 오늘 종일 보지 못했던 재인의 모습이 몇 년 만인 양 아릿하다. 드디어 이쪽을 다시 바라본 재인이…… 미소를 짓는다. 늘 봐왔던 '방긋'이 아니다.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말 듯 망설임 가득한 미소. 웃음이 아니라고 우겨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엷은 습자지 같은 거다. [나 기다린 거야?] [올 줄 몰랐는데…….] '응, 너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거짓말할 줄도 모르는 태양이다. 재인의 미소가 조금 커진다. 눈에 사르르 퍼지는 마법의 웃음가루가 보일 듯 말 듯. 태양은 재인에게 아픈 건 어떠냐고 차마 묻지 못하겠다. 그가 내내 숨기고 싶어 하던 모습인데, 저는 다 보았다고 그래서 알고 있다고 되새겨주는 치사한 인사가 될 것만 같아서. 그저 홀쭉해진 뺨과 가늘어진 재인의 목 부근에서 눈이 길을 잃은 듯 맴돌 뿐이다. [다음 주 시험이잖아. 책 가지러 왔어. 밤에 공부해볼까 하고.] [응.] [이번엔 승진이를 이겨야지. 자꾸 제멋대로인 녀석, 그만 재워야 할 것 같아서.] [……!] 태양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재인은, 자신에게 부탁한 게 아니었던가? 오해…… 하고 있었나 보다. 오승진 문제는 자신에게 맡긴 거라고. 그래서 뒷산으로 저를 데려간 것이고, 반지도 제가 찾아줄 거라 믿고 있다고. 그런데…… 아니었나? 사물함 앞으로 가서 책을 몇 권 꺼내 드는 재인. 태양은 아까부터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가방에 책 넣는 거라도 도와야겠다 싶다. 그래서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진지하게 책을 고르던 재인이 그 기척에 움찔 놀라는 걸 보고 말았다. 자신이 거리를 좁혀감에 따라 그가 더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대체 왜? 혹시……! 조금 화가 난다. 그래서 더 빠르게 다가가 버렸다.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자, 재인이 놀란 눈으로 올려다본다. [안 잡아먹어.] [으, 응?] […….] 반문하는 재인을 바라보지도 않고 태양은 손에 든 책을 가방 안에 대신 넣는다. 그리고 사물함을 닫아 자물쇠를 걸고, 가방도 여며준 다음 제 어깨에 툭 매 버린다. 자신의 가방도 같은 쪽 손에 들고, 가만 서 있는 재인의 손을 낚아채 단단히 잡았다. [가자.] 이 말을 태양이 먼저 건네 보긴 처음이다. 그제야 '응.' 대답하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주는 재인이다. 파르르. 자신의 손 안에서 작은 별이 떨고 있다. 꼬옥. 그럴수록 더욱 힘주어 잡아 버리는 태양이다. [뽀뽀 한 번 했다고 안 죽어! 걱정 마, 여재인.] [그런 거 아냐…….] 조심스레 입을 여는 재인이 무슨 변명이라도 할까 봐, 그럼 더는 못 참을 것 같아서, 태양은 지레 서둘러 그의 말을 막아 버린다. [어제, 네 눈 속에 있던 태양은 지워라.] 돌아보지 않아도 제 손에 끌려오고 있는 재인의 시선이 느껴진다. 자신이 좋다던 그를, 어제의 일로 잃게 되지 않을 거라고 덮어놓고 믿고 싶다. 그래서 더 강하게 힘주어 못 박는 거다. [그거 절대 실수 아니었어.] […….] [그렇다고 내가 너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야.] 이건 말이다. 좋아하는 거, 아닐 거다. 이렇게 널 꼭 쥐고서도, 터뜨리고 싶을 만큼 다시 욕심나는 거. 그게 화가 나서 몸살 날 지경인데, 이건 좋아하는 거 아니지 않냐? 그냥……. 나는 그냥 네가 많이, 아주 아주 많이 신경 쓰이는 걸 거다. 그것뿐이다. 몇 발짝 더 걸었을까? 갑자기 재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하는 기색에, 태양은 멍이 들 정도로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놔!] 바동거리며 벗어나려 애쓰던 재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앞서 걷고 있던 태양은 그제야 뒤를 돌아 재인을 바라본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 투명한 물기에 젖은 긴 속눈썹이 보인다. 가슴이 쩍 소리를 내며 쪼개지는 것 같다. 그래도 못 놓겠다. 나는 절대 놓지 못하겠다! 하얗게 질린 재인의 주먹이 태양의 가슴을 툭 툭 쳐대기 시작한다. [남태양! 이거 놔! 놓으라고! 나쁜 놈아, 놔!] 끄떡도 하지 않는 자신이, 점점 커지는 재인의 외침과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신이 태양도 막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놓아주라고 머리가 소리를 질러도, 재인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반응을 하지 않는 거다. 놓아주면? 이 녀석을 놓았다가 자칫 날아가 버리면? 그래도 괜찮아? 이 녀석 잃어도 과연 너 괜찮을까? 묻고 있다. 도리어 자신을 향해 손이 묻는다. [재인아!] 복도 저쪽에서 그를 기다리겠다던 재인의 형이 나타났다. 갑자기 울상이 되어 버리는 그의 얼굴을 보자, 태양도 울고 싶어졌다. [제발! 태양아……!] 애원한다. 작은 별이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고 있다. 탁. 그 순간 신기하게도, 손이 풀어지고 그 반동으로 재인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난다. 안돼! 다시 잡으려는 순간, 재인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제 형의 품으로 곧장 뛰어든다. 다시 태양을 향해 따질 듯 다가오려는 형을 힘겹게 당기며 멀어지는 작은 별. 태양은 아까 쪼개진 가슴에서 흐르는 핏물의 뜨끈함을 느낀다. 이리 엉망이 될 줄 알았어. 그러게 내가 작은 별을 조심하랬지. 마음속의 악마가 자신을 비웃는다. 결국 놓쳤잖아. 그를 잃으면 어쩔 거야. 그러기에 내가 꼭 붙들고 있겠다고 한 거잖아. 바보! 가슴을 쳐대며 손이 역정을 낸다. 나는……. 태양은 복도의 창으로 다가가, 교문을 벗어나는 재인을 내려다본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면 안 돼. 안 된다. 강해지려면, 더 우뚝 서려면, 좋아하는 것들도 버리고 가야 한다. 괜찮다, 나는……. 여재인이 뭔데? 애초에 그가 뭐였는데? 잃은 건 아니다. 처음부터 가진 적이 없다. 그러니까 괜찮아. 횡설수설 달래 본다. 나한테서 떠난 거 아니야. 잃어버린 거……, 그런 거 아닐 거야. 절대. 절대로! 멀어지는 그의 고운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아프다 비명을 지르는 저를 달래며 한참을 그렇게 섰다. 태양은……. 해가 넘어간 지 꽤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마당 벤치에 앉은 여성은 일어날 줄 모른다. 손에 든 책은 아까부터 책장 한 번 넘어가지 않고 있는데, 무엇을 생각하기에 저리도 오래 꼼짝 않고 앉아 있을 수 있을까? 태양은 의자를 권하는 간호사에게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이 곳을 갑작스레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도 두 시간은 족히 달려야 하는 요양원에는 밤이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방문 가족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말이면 늘 북적이는 이 곳 카페테리아에도 TV를 보는 몇 명만이 남아 있다. 자신은 미국에서 내내 이런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곤 했었다. 팔짱을 낀 채 같은 자리에 오래도록 서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현듯 시계를 쳐다보며 떠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즈음, 바로 뒤쪽에서 한 치매 노인의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앙칼진지 소름이 돋을 정도라서 그도 화들짝 돌아본다. [미친년들! 밥도 안 주고 이 노인네를 굶어죽일 참이야! 개 같은 놈들, 천벌을 받을 걸! 네 년놈들은 죄다 지옥 가서 된똥 맛을 봐야 해.] 등이 많이 굽은 꼬부랑 할머니. 작은 체구는 아니지만 어울리지 않게 욕설이나 흥분이 좀 과하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주위에 있던 간호사들 눈가엔 미소가 서려 있다. [웃어? 지랄 맞은 년들! 밥이나 내 놔!] 말투나 표정이나 심술 맞기 이를 데 없다. [할머니. 또 드시면 주무실 때 속 부대껴요.] [또 먹긴! 네가 봤냐? 네가 봤어? 점심도 굶었다, 이 쎄 빠질 년아!] [아이구, 아이구. 욕은 정말 대한민국 금메달감이에요, 할머니.] 넙죽 넙죽 받아치면서 잘도 받아 넘긴다. 그러자 얄밉게 눈을 흘기며 숟가락을 집어 던지는 할머니. 그 틈에 휠체어 뒤로 돌아가 방으로 밀어주는 요양사들이 보인다. 저런 건 정말 천직인가 보다. 태양은 속으로 감탄하며,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선다. [거긴 없어. 여기야.] 갑자기 들려온 부드러운 음성에 태양이 멈칫 몸을 굳힌다. [엄마.] 언제 들어오셨는지,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작은 책을 불쑥 태양에게 내밀더니, 다가와 받아드는 그의 모자 끝을 살짝 쓰다듬듯 만지다 마신다. 태양은 줄곧 푹 눌러써 가려져 있던 이마가 새삼 답답하게 느껴진다. 시원하게 머리를 넘겨주곤 하시던 그 옛날 엄마의 손길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11년 만의 모자상봉이라는 걸 누가 믿어 줄까?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불효막심한 태양.] 오늘은 인사하고 가지 않을까 기다렸다 하신다. 밖에서 그처럼 오래 앉아계셨던 것도 다, 태양이 뒤에 서 있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인가 보다. [혹시나 해서…….] [오늘 오후에 다녀갔으니까, 지금은 쥐들도 밥 먹으러 갔을 거야.] 자신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엄마를 찾지 못했던 이유. 그건 외사촌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 테지만, 당분간은 조용히 묻혀 있고 싶었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요양원에서 지내는 엄마도 안쓰럽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깊이 이해하는 태양이다. 세상은 더럽다. 차라리 여기 계시는 게 안전한지도 모른다. [지낼 만 하니? 살림도 강호가 다 알아봐 줬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의 눈빛이 신중해진다. [그 아이도 다 믿지 마. 편지에 적힌 내 말 기억하지?] [세상에 믿을 놈은 딱 하나다.] [그래. 엄마도 믿지 마. 태양이 너 자신만 믿어. 그 외에는 다 가짜야.] [네.] 슬픈 대답이다. 슬픈 당부였으니까. 한 발짝 더 다가서 엄마를 품에 안으려는 태양. 하지만 그 만큼 더 물러서며 빠르게 속삭이는 엄마의 음성. [쥐약을 더 쳐야겠다. 어째 수가 더 늘어났네.] 뒤뜰 나무에 가려진 문 쪽으로 급히 그를 당기며 엄마는 낮게 말했다. 도망치듯 소리 죽여 내딛는 걸음걸음이 오늘따라 더 서럽고 억울하다. [사랑한다, 아들.] 멈칫. 혼자 빠져 나가겠단 뜻으로 엄마의 어깨를 잡았던 태양이 묻는다. [나, 그 말도 믿지 마요?] 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에 빠르게 그 곳을 빠져 나온다.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미 알기 때문이다. 시험기간이 시작되었다. 복도는 한산해지고, 교실은 조용해지는 모습이 꽤 흥미롭다. 태양은 한 손에 턱을 괸 채 종이 넘기는 소리뿐인 정적을 음미했다. 곧 이어 복도쪽 분단에 앉아있던 한 녀석이 쪼르르 달려와 제가 몇 시간을 정성껏 정리했을 게 분명한 노트를 재인에게 불쑥 내민다. 고개를 들어 예의 그 '방긋'으로 고맙다 인사하는 작은 별. 선선히 노트를 받아든다. 저래도 그걸 보진 않을 녀석이란 걸, 이미 수차례 같은 패턴을 지켜본 태양은 알고 있다. 그 노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재인은 스스로 정리하고 익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했다가, 뭔가를 알겠다는 듯 힘주어 끄덕였다가, 빠르게 다른 관련 내용을 찾아 책을 뒤적이다가, 어깨나 목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천정을 올려다보며 외우기. 필기로 정리하는 모습도 드물다. 그저 죽 내리 읽고, 아기새가 엄마새에게 입을 벌려 모이를 구하듯 고개를 위로 든 채 가만 되새긴다.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땐 고민하듯 그 상태로 눈썹을 살짝 찡그리는 모습도 보았다. 곁에서 인학이 불쑥 A4 3장을 내밀지 않았다면, 태양은 계속해서 그런 재인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전에 오후 수업 빠졌던 날,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체크해주신 부분들이야.] 말없이 쳐다보는 태양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책에 집중하는 인학. 그 모습에 차마, '이걸 왜 나한테 주냐?' 라고 묻지 못한다. 태양은 제 앞에 놓인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다 문득 미소 지었다. 인학은 못 말리는 악필이다. 그래서 가끔 저도 못 알아보는 글자가 있다 하더니, 어쩌면 시험 기간마다 이처럼 열심히 워드를 두드려왔을 지도. 남들보다 두 배로 노력하는 그에겐 조금 억울한 일이겠다. 그런데 혹시 이거 말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오승진을 한 번 무찔러 보란 뜻이냐? 태양은 똑바로 앉아 짝이 건네준 요점정리를 읽기 시작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는 인학을 예민하게 느끼면서. 이런 말 실례인지도 모르겠지만, 서인학, 너 참 재미있는 녀석이다. 화장실에 가려나 보다. 한참을 같은 페이지에서 씨름하던 재인이 결국 일어서 교실을 빠져나간다. 안 외워지는 건지, 풀리지가 않는 건지, 꽤나 열이 오른 뺨이 발갛게 상기 된 채다. 자율학습이 두 시간째 이어지자, 공부하다 지쳤는지 몇몇은 엎드려 쉬고 있다. 인학은 여전히 문제집을 푸는데 여념이 없고, 재인의 짝 정수는 아까부터 잔다. 슬쩍 의자를 밀고 일어난 태양은 교실을 나왔다. 소리 없이 움직이던 그의 걸음이 화장실 벽 앞에서 멈췄다. 찰박이는 물소리. '어푸' 소리 하나 없이 세수를 하나 보다. 따스하게 열 오른 재인의 볼이 차가운 물로 식혀지고 있겠다. 태양이 벽에 등을 기대는 순간, 앞머리가 온통 젖은 재인이 나온다. 물기를 뚝뚝 흘리는 하얀 살결. 보는 것만으로도 개운해지는 세수한 얼굴. 그 얼굴이 태양을 발견하자마자 굳어진다. […….] […….] 할 말이 없는가? 이상하게도 태양 역시 그렇다. 마주본 시선이 담담한 척을 해도 불편함 정도는 서로 안다. 우뚝. 자신 앞을 스쳐 지나려는 재인의 길을 가로막아 섰다. 주춤. 다시 반대편으로 걸음을 떼는 그를 따라 저도 다시 움직인다. 비켜줘야 하는데, 비킬 수가 없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오른 쪽으로 가는 거다.] 우연히 서로 부딪친 걸로 이해했나 보다. 재인은 정말 '하나, 둘'을 세며 정말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 그 순간 태양이 그의 어깨를 살짝 밀며 걸음을 한 발 앞으로 내딛는다. 툭 뒤로 물러서게 된 재인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순간, 팔을 꽉 잡고 벽으로 밀어 가뒀다. [남태양!] 재인이 놀라 소리친다. 태양은 눈썹을 들어올리며 똑같이 반문한다. [남태양?] '태양아'가 아니다. '남태양'이란다. 한 번도 날 그렇게 부른 적 없었으면서. 너, 이렇게 오래 거리를 두고 날 내버려둔 적도……. [거슬린다, 여재인.] 태양의 낮은 경고에 재인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원망이 가득 담긴 그 시선이 불편해도 외면하는 것보다 견딜 만 하다. 예전처럼 살갑고 다정한 시선이 아니라도 괜찮다. 그렇게라도 날 본다면. 네가 날 계속 봐 준다면……. 왜냐하면, 나는 니가 갑자기 날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거든. [중독 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쉽게 잡았다고, 네가 날 쉽게 놓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태양은 자신을 노려보는 재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속삭였다. [네가 날 이리 만든 거다.] 낮은 충고와 억지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재인이 눈을 질끈 감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깊게 숙여 재인의 입술을 빼앗아 버린다. 고개를 틀려는 그의 턱을 꽉 잡고 힘껏 밀어붙인 입술이 뭉개지듯 맞붙었다. 낮게 흐느끼듯 울음을 뱉는 녀석의 음성마저 삼켜버릴 듯 태양은 입을 벌렸다. 미치도록 부드럽고 여린 살결과 촉촉한 입술 안 점막을 혀로 어루만져 보면서, 자꾸만 치미는 야수의 정복욕을 간신히 눌러 삼키는 태양이다. 저는 짐승이 아니다. 퓨즈가 나가버릴 듯 위태로운 정신을 끝까지 붙들고, 죽도록 뛰는 심장을 꾸짖는다. [여재인…….] 거부하듯 꼭 감고 있던 재인의 눈이 떠지자, 태양이 지독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신경 쓰여 죽겠다는 놈들한테, 너 지금까지 어떻게 했냐?] [뭐?] 말해 봐라. 나도 좀 어떻게 해 보게. 널 보고 있으면 여기가 불편해서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무슨 짓이든 좋으니까 손 좀 써 보라고, 젠장! 탁. 갑자기 두 손으로 어깨를 밀어버린 재인 때문에 태양이 뒤로 살짝 밀린다. 아니 밀려준다. 어찌했냐 물었으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어 보자는 심산인지도. [너…… 실망이야.] 잘못 들은 걸까? 재인이 방금 자신더러…… 뭐라고? 무슨 기대를 했기에 고작 이것에 실망이란 말을 할까? 그럼 여재인이 좋아한다고 말하던 남태양은 대체 어떤 놈이었는데? 감히 너에게 관심 따위 품지 않고 끝까지 담담하게 대해주던 놈인가? 필요할 때 '태양아.' 다정하게 불러주면, 병신처럼 시키는 대로 다 하던 놈? 그래? 그러냐? [나쁘지 않네.] 태양이 입술을 비틀며 웃음을 이 사이로 문다. 그 표정을 보던 재인의 눈이 습기 먹은 무거운 구름을 안고 가라앉는다. 그러나 태양은 이제, 후 불어주지 않는다. 그럴 짬이 없다. ['실망'이라……. 효과 만점이다.] [태양아……. 이러지 마. 이러지 말자. 응?] 늦었다, 작은 별. 지금 아무리 그 달콤한 혀로 내 이름을 불러도, 넌 이미 나란 놈 떨구어 내는데 성공하고 있으니까. 그래. 먼저 키스를 한 것도 나고, 널 못 가게 붙든 것도 나다. 알고 있다. 그래도 그 말은 네가 했다. 내가 좋다는 말. 기억하냐? 아프지 말란 말 역시 여재인, 네가 한 거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왜 이렇게 숨이 막히고 아프냐? 왜 내가 더 상처 입은 것처럼 정신 못 차리고, 미친놈처럼 구는 건데? [앞으로 나 피하지 마라.] [……!] [다신 안 해. 그러니까 피하지 마.] [남태양.] [내 이름 부르지도 마라.] [너 정말……!] 부르지 마! 그 따위로,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처럼 딱딱한 호칭. 싫다! 정말 미쳤나 보다. 어른스럽단 말만 들어온 남태양이 이상해져 버렸다. 조그만 녀석 하나가 자꾸만 통로도 없는 제 가슴 속을 들었다 나갔다 하며 진을 빼는 바람에, 하루가 숭숭 구멍 뚫린 양말처럼 쓸모없이 지나간다. 그래서 미친놈처럼 대답이 불가능한 다그침만 해대고 만 것이다. 사실은 재인도 아직 어린 녀석이다. 너무도 순수하고, 혼란 따위는 겪어 본 적조차 없어 보이는 맑은 녀석. 그를 향해 품고 있는 자신의 감정과 욕심이 너무 과해서, 너무 더러워 보여서, 떼를 쓰는 못난이처럼, 억지를 부르는 괘씸한 아이처럼 굴고 있음을 알아서, 태양은 어찌할 줄 모르고 자신과 그를 비난하고만 있는 것이다. 서툴기 짝이 없는 실력으로 잘 떠왔던 자수그림을 망치고 있는 기분. 바늘로 이 곳 저 곳을 찔러대는 초보의 허둥거림은 꼭 한 번 피를 내는 법이다. 태양은 힘없이 교실로 돌아가는 재인의 등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솔직하자니, 과묵해지더라> 진심이라는 놈, 겹겹이 감싸고 뭉치어 한 구석에 쌓아두기를 거듭하였더니, 마음이 좁아져 버렸다. 꺼내지도, 숨기지도 못하는 옹졸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12. 비극은 되도록 피해 왔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었다. 가슴 가득 짓누르는 슬픔은 자신에게 이미 충분했다. 옆길로 새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양은 앨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가 본 적이 없었다. 토끼가 사라진 구멍 앞에서 태양은 곧장 책을 덮어 버리곤 했으니까. 마찬가지다. 파도가 칠 때마다 일어나는 포말이,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란 것도 모른다. 니나를 구하러 간 폴의 요요가 딱부리로 변신하는 것도 못 봤었고, 파트라슈와 네로가 마지막에 그토록 소원하던 루벤스의 그림을 보았다는 것도 모른다. 앨리스는 어리석을 만큼 호기심이 많은 소녀였고, 인어공주는 죽도록 미련했다. 폴은 기가 막히도록 무모했고, 파트라슈와 네로는 불쌍해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키가 높은 책장 맨 꼭대기에 소설책을 꽂아 넣으며 태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아무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슬픈 동화책처럼 중간에 탁 하고 덮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안 된다. 재인에 대한 생각을 덮어 버리지도, 그를 놓아 버리지도 못하겠다. 게다가 이 답답한 분위기. 시험기간이라고 해서 공부를 더 해 본 적은 없었다. 대화가 사라진 삭막함이 슬픈 책처럼 기분을 가라앉게 한다. 갈수록 교실은 숨이 막혔고, 학교 안의 불 켜진 이 곳 도서실은 더했다. 구석구석에 책을 끌어안고 신경이 바짝 곤두선 녀석들뿐이다. 태양은 흘끗 프랑스문학 코너 너머의 간이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마에 하얀 띠를 두르고 볼펜을 씹으며 중얼거리고 있는 녀석이 있다. 등받이도 없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허리를 바짝 책상에 붙인 자세다. 종이에 구멍 나겠네. 어찌나 동그라미를 치고 줄을 그어대는지 원. 오승진. 늘 농땡이만 치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숨어서 노력하는 타입이었나? [화학 범위 바꼈다. 아냐?] 뒤에서 팔짱을 끼고 나직하게 물었더니, 흠칫 경직되는 녀석의 어깨가 보인다. 태양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거다. 서로 안다고 할 순 않지만, 무시하기는 힘든 사이니까. [상관 말고 꺼져.]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신이야 마음을 다스리러 왔다지만, 승진은 멀쩡한 교실 놔두고 왜 여기 있을까? 태양은 손에 잡히는 아무 책이나 근처에서 뽑아들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그를 향해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진다. [혹시 숨어 있는 거냐?] [아, 씹! 꺼지라니까!] [네 꼬봉들은 다 어딨냐? 아! 퇴근시켰구나?] 낮게 속삭이며 물으니, 꽤나 친근한 어조로 들린다. 조용한 도서실 안이라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무는 승진. 책 뚫어지겠다. 눈에서 빔이 뿜어져 나올 듯 힘이 막 들어가 있는 걸? 무시할 건가 보다. 꼬봉들도 없겠다, 공부도 해야겠다, 뭐 그런가 보다. 승진은 책을 그러모아 태양의 반대쪽으로 밀더니 획 몸을 돌려 버린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보다가, 태양은 정말 궁금해서 또 묻는다. [너는 공부하는 게 부끄럽냐?] [씨발!] 낮게 죽인 욕설이 승진에게서 흘러나온다. 천연덕스럽게 제멋대로 해석하며 고갤 끄덕이는 태양. [그렇다고?] [아니!] [그런데 왜 여기서 해?] 결국 반응을 얻어내고는 싱긋 웃었다가 다시 질문하는 태양. 승진은 흘끗 뒤돌아보더니 이번엔 제가 툭 질문을 던진다. [너 심심하냐?] [조금.] [그래 보이네. 이씨! 날 이길 거라고 확신하나 보지?] [흠. 그건 잘 모르겠는데.] 태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하자, 승진은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눈썹을 넷째손가락으로 삭 훑는다. 저건 지난번에도 봤다. 아마도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인 듯 하다. [좋아하는 새끼 하나 얻으려고 이렇게 용 써야 하는 게 쪽팔린다. 됐냐!] [……!] [누구는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뽀르르 잘도 달려가더만. 아씨! 저리 가, 적군! 백 번을 물어 봐라. 니가 내 심정 알게 되나.] 빠르게 쏘아붙이곤 태양을 쫙 째려본다.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태양은 말없이 그 시선을 마주보며 가슴이 제멋대로 울렁거리는 걸 느낀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묘한 충족감이랄까?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달까? 이런 게…… 상대적인 우월감 같은 건가? 작은 별로 인해 별 감정들을 다 느껴보는 자신이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곧 씁쓸하게 입 꼬리가 올라가는 태양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작은 별이 먼저 다가와 주던……. 응, 그런 날이 있었어. 게다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욕심 한 번 잘 못 부렸더니, 곧장 날아가 버리더라. 그는 내 손을 들어준 게 아니라 날 잡은 제 손을 든 것뿐이었어. 내 손에 들어오기에 나는 그가 날 의지하는 거라고 믿었는데, 착각이었지. 너 역시 그 기분은 천 번을 물어도 모를 거다, 적군아. 셋은 각자 다른 목표를 갖고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 같다. 승진은 재인을 얻기 위해서, 재인은 그런 승진을 뿌리치기 위해서, 태양은 그런 재인에게 반지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태양은 들고 있던 책으로 승진의 어깨를 툭 쳐주곤 일어났다. 모른 척 반응이 없자, 괜히 녀석의 뒷머리를 거꾸로 쓸어올려 버린다. 지금쯤은 교실도 텅 비어가고 않겠지. 나도 이만 책가방 싸서 집에 가야겠다. 구름만 없으면 별 하나 주워서 눈에 넣고 가도 좋겠다. 교실은 불까지 꺼진 채 텅 비어 있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던 재인 때문인지 오늘따라 제법 많은 녀석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가 가자마자 줄줄이 일어나 사라지는 모습이 그린 것처럼 눈에 선하다. 태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문단속을 하고 어두운 복도로 걸어나왔다. 다른 교실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 시야를 눅눅하게 밝혀준다. 현관을 나와 막 교문 가까이 다다랐을 때였다. 툭. 무언가가 떨어졌다. 태양은 고개를 들었다. 후드득. 무거운 빗방울이 이마에 떨어진다. 하늘이 비를 뿌리려는 거다. 젠장! 태양은 험악해지는 자신의 표정을 느끼며 우뚝 섰다. 역시 교문을 벗어나고 있던 다른 녀석들도 우기를 느꼈는지 뛰기 시작한다. 태양의 뒤에서도 몇 놈들이 교복 상의를 덮어쓰고 그를 앞질러 뛰어갔다. 쏴아아아아아. 상하로 그어 내리듯이 금세 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어김없이 깨어나 태양의 뇌를 움켜쥐었다. '이대로 저 자식 묻어 버리면 어떨까? 그럼 영감도 딴 맘 못 먹을 거잖아.' '그랬다가 그 계집이 양도문서 찢어 버리면? 씨발아, 머리는 땅에 묻고 발로 씨부리냐?' '이씨. 잘 났다, 박경식. 그리고 욕 좀 안 하면 안 되냐? 너는 고모한테 계집이 뭐야?' '지랄이 염병 업고 자빠졌네! 그래! 지 사촌 새끼 땅에 묻자는 놈은 욕질 안 해서 고상하고?' 그 일이 일어난 것은 태양이 아홉 살 때였다. 납치라는 걸 처음 당했던 그 날, 외사촌들 간에 오고간 대화는 소름이 끼쳤고, 그 만큼 뼛속 깊이 새겨졌다. 태양은 자신보다, 멀리 있는 엄마에 대한 걱정으로 미칠 것 같은 밤을 보내야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엄마는 그들의 감시로부터 마냥 자유롭진 못했다. 그걸 짐작하셨기 때문에 미국에 가겠다는 태양을 오히려 말리지 못하셨을 거다. 어쩌면 이 곳, 외조부님들 곁이 차라리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여겼을 테니까. 태양의 친부는 사업에 실패한 후 투신자살을 했단다. 평생을 벌어도 갚기 힘들 만큼 엄청난 빚은 고스란히 엄마와 태양에게 물려졌는데, 당시 보증을 섰던 큰외삼촌들까지 줄줄이 그 빚잔치에 엮이게 된 것이다. 태양과 함께 상속포기를 하고 파산신고도 해버린 엄마는 얼마 뒤 재혼을 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녀를 믿지 않았다. 어딘가 숨겨놓은 재산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끊임없이 감시를 붙이고, 주저 없이 상처를 들쑤시며, 모든 것을 앗아갔다. 외조부모가 장차 남겨줄 태양과 엄마 몫의 유산까지도 노렸던 그들이니까. 태양은 다른 것보다 엄마가 느낄 고통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꼭 강해지고 싶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그 날 밤, 집에서도 한참 먼 Devils pond 근처 벤치에 묶여 있어야 했던 어린 태양은, 지키고 싶은 이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었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주저 없이 포기한 수천만 원짜리 첼로도 꼭 되찾아 드리겠다고. 단 하나 숨겨 놓은 소중한 그것을 내놓아야 했던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아팠다. 세상은 미쳤다. 적어도 태양이 속해 있던 세상은 살짝 미쳐 있었다. 차가운 빗물 때문에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가 고통스럽고, 그 때문에 속절없이 떨고 있는 유약한 자신이 너무도 싫었던 기억. 털썩. 태양은 가방을 놓아 버렸다. 그다지 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들면서 몸이 떨렸다. 이래서 비 같은 건 맞지 않으려고 늘 신경 써왔는데.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차가운 빗물이 옷을 적시고, 피부에 닿는다. 갑자기 이렇게, 그것도 하필이면 한밤중에 길 위에서 비를 맞게 되다니……. [태양?] 빗소리에 섞여 듣는 환청이라도 고마웠다. 갑자기 하얀 빛이 캄캄한 가슴 속을 뚫고 들어와 비추어주는 기분. 찰박이며 빗물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소리. 정수와 같이 우산을 쓴 그가 앞에 설 때까지 태양은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진짜 작은 별이네. [너…….] 그리고는 재인이 입술을 다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올려다보는 표정에 걱정이 서려 있다. 태양은 흠뻑 젖은 자신에게 주저 없이 한 발짝 다가서는 재인을 본다. [그래. 나…….] [……?] [……너 기다렸다.] [으응?] 지난번에 교실에서 네가 물었잖아. 널 기다렸냐고. 나는 너 올 줄 몰랐다고 대답했지만……. 아니었어. 나는 너를 기다린 거 맞다. 아주 오래, 엄청 많이 기다린 거다. [나는 너……. 올 줄 몰랐지만, 그래도. 많이…… 기다렸다.] 널 알지 못하던 그 순간에도,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왠지 그런 확신이 든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너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단 하나의 빛이다. 담임선생님도 잘 보라고 하셨는데. 현재 내가 누리는 어떤 것. ……그게 너였나 보다. 태양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차갑게 식어있던 피부에 열이 오르고 빗물이 더 이상 불쾌하지 않다. 터덜터덜. 한 걸음. 두 걸음. 성큼성큼.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태양은 그 한 가지 생각에 빠져 마냥 앞으로 걷는다. [태양아!] 재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거센 빗줄기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달려온다. 돌아보자, 정수에게 우산을 넘기고 땅에 떨어진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드는 재인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섰다가, 한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 [나랑 같이 가!] 이건 비밀인데…….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재인이 달려오고 있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 말갛게 웃는 눈동자가 예쁘게 젖어 있다. 나는 말이다, 그 말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작은 별이 해주는 그 말이. 재킷 상의를 벗어 재인의 머리 위에 차양처럼 둘러주고, 우산을 홀로 들고 멍 하니 뒤에 쳐진 정수를 등 뒤에 둔 채 걷는다. 눈 속에 주워가고 싶던 별은 자신의 팔 아래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 태양은 재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체온과 귤향에 가슴이 떨린다. [비 맞아서 너 또 아플라.] 자신도 모르게 불쑥 걱정을 내어놓고 만다. 무뚝뚝한 말투가 꼭, '아프면 재미없어.' 라는 경고 같다. 재인은 씩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아픈지 얼마 안 됐으니 괜찮을 거야.] [어디가…… 아픈데?] [남들보다 면역력이 좀 없대. 그렇다고 무슨 병이 있는 건 아니고.] 면역력이 없다는 건, 외부의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없다는 얘기다. 그건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는데? 무얼 먹으면 그런 힘이 생기는데? 수술을 해서 낫는 것도 아니고, 약을 먹어 치료하는 게 아니면……. 되게 억울하겠다. 꽤나 잔인한 병이다. 참, 너는 병이 아니랬지. [힘들겠다.]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재인이 언제나처럼 검지를 세운 채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다른 사람들은 상관 않고 그냥 놓아두는 녀석들이 나만 봤다 하면 꼭 기다렸다는 듯이 괴롭히려고 막 떼로 달려드는 거지. 지네들한테 맞서 싸울 힘이 나한테는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런데…….] 작은 별이 말하다 말고 입술을 꼭 깨문다. 결연한 표정. 치사하지만 참는다는 듯한 표정. [그런데?] [그거 아니거든.] [뭐가?] 태양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재인을 마주본다. 금세 가늘어지던 비는 어느 새 멈춰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두르고 있던 상의를 내려 어깨에 걸쳤다. 재인은 가만히 서서 그런 태양을 지켜보더니, 곧 팔짱을 꼈다. [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절대 항복하지 않아. 이길 때까지 싸울 거야.] 그러면서 부르르 어깨를 떤다. 추운가 보다. 태양은 가만히 그를 당겨 한 쪽 품에 넣는다. 결연한 말투와 달리 재인은 맞춘 듯 태양의 품에 쏙 들어온다. 다시 걷기 시작하며 태양이 물었다. [꼭 사람하고 싸우는 것처럼 말한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 질 수 없지. 내가 마음을 준 사람이 아니니까. 지면 억울하잖아. 싸워 보지도 않고 막 져주면 그건 포기하는 것과 같아. 아프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지금 아프다고 영원히 아픈 것도 아니고.] 강적. 태양은 속으로 생각한다. 나의 아름다운 강적! 반짝 반짝 작은 별. [넌 어디가 아파?] 문득 재인이 묻는다. '나?' 하고 되물으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 태양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왜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는데?] [아파 보이니까.] [내가?] [응. 처음 너 봤을 때, 굉장히 참고 있는 것처럼 힘들어 보였거든.] [힘들어 보였다고?] 힘주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니까. 말해 봐. 태양이 너는 어디가 아픈데?] 빤히 올려다보는 눈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다. 태양은 곤란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다가 결국 바닥을 내려다본다. 난 어디가 아프냐면……. 음. 나는……. [여기.]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댄 채 태양이 낮게 말했다. [여기?] 재인이 똑같이 태양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묻는다. [응.] [나쁜 사람!] [뭐?] [거길 아프게 하는 건 사람이니까.] [그렇구나.] 중얼거리듯 낮게 내뱉으면, 재인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도 그것 역시 병은 아니야.] 자신의 손 밑에 있던 태양의 손을 치우더니, 재인은 그 가슴 위에 손바닥을 꼭 붙여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순간 가느다란 깃털이 훑고 지나는 듯한 간지러움이 속에서 올라온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코나 목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곧장 아랫배 쪽으로 사라졌다. 나란히 걷기 시작한 재인에게 그 느낌을 들킬까 두려워, 태양은 반걸음 정도 뒤로 쳐진다. 태양의 어깨 아래로 둘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그래서 솜털 보송한 재인의 순결한 귀와 하얀 목덜미를 실컷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병이 아니라면, 낫지도 않는 거 아냐?] 태양이 묻자, 재인은 고개를 젓는다. [낫지 않아도 되는 거야. 병이 아니니까.] [……!] [그래도 모르지. 괜찮아질 때까지 버텨 보자. 너도, 나도.] 아파도 포기하지 않는 작은 별은 참 씩씩하다. 그가, 병이 아니기 때문에 죽지는 않을 테니 버티란다. 함박 웃으며 참 오랜만에 밝은 얼굴로, 함께 이겨 보잔다. 태양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은 꼭 자신이 엄살 부린 것만 같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런 거야? 가방까지 떨어뜨리고.] [그냥. 손에서 미끄러졌어. 그러는 넌 교실에 없더니 어떻게 내 뒤에서 와?] [불 끄고 옆 반이랑 합반했었어. 몇 명 안 남았으니까 전기 아끼라던데?] [그랬구나.] [응.] […….] […….]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사라졌다. 어색한 침묵. 뭐라 하지, 둘이서 제각각 고민에 빠졌다. [저기…….] [너…….] 그러다 동시에 입을 연다. 꼭 삼류영화의 한 장면 같다. 풋. 재인이 웃음을 터뜨리면, 태양도 먼 데 쳐다보며 괜히 눈썹을 모은다. 그 틈을 타서 재인이 빠르게 먼저 말을 내놓는다. [태양인 뭐가 되고 싶어?] 새삼스럽고도 엉뚱한 질문이다. 눈썹을 살짝 올리며 재인을 쳐다본 태양은, 제법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여재인. 혹시 아냐? 그런 걸 물어준 사람, 네가 처음이다. 그래서 나도 지금껏 대답해 본 적 없는데……. [나는 꼭 뭐가 되고 싶다기보다, 그냥 강해지고 싶다.]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우와아하! 우와! 우와!] 대답이 신기한지 재인이 이상한 감탄사를 막 낸다. 그는 팔짝 뛰어 두어 발 앞서 나가더니 뒤돌아서 태양을 마주한다. 그 상태로 여유있게 뒷걸음질치며 놀리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굉장하잖아!] 뭐가 굉장한지 모르겠지만, 태양은 불편함에 화제를 돌리고 싶다. 그래서 불쑥 전혀 다른 질문을 내밀어 놓고, 재인의 뒤쪽을 살핀다. 저러다 넘어질라. [넌 오승진 싫지 않냐? 널 귀찮게 굴고 괴롭힌 지 꽤 오래 됐다며?] [음…….] 생각을 해보는 척 하더니 곧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싱긋 웃고는 다시 몸을 돌려 태양의 곁에 나란히 선다. [싫지 않아.] [왜?] [왜냐면…… 그게 다 추억이니까.] 말도 안 된다. 태양은 수긍할 수 없는 표정이다. 그런 게 어떻게 추억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원치 않는 걸 강요하는 녀석의 행동 하나까지도 다 소중하다고? 왜? [그 기억도 다 내 일부잖아. 그와의 일들도 차곡차곡 쌓여 내 과거가 될 거고. 결국은 과거가 사람을 만들어. 그 모든 과거들이 '현재의 나'를 대변하기도 하니까. 그러니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아. 자칫 아프게 떠올리는 과오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아.]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왜 너는 모든 과거가 다 소중한 것처럼 말하는 걸까? 그건 꼭 과거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같잖아. 얼마나 걸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문득 재인이 걸음을 멈추며 활짝 웃는다. 이제 갈림길에 왔나 보다. 태양은 그 미소를 가져가고 싶다는 듯 주먹을 꼭 쥐어 주머니에 넣는다. [태양아, 너…… 나 안 좋아한다 그랬지?] [응.] [날 기다리긴 했지만, 좋아하는 건 아닌 거야?] [……그래.] 조금의 망설임을 만회하려는 듯 힘주어 대답한다. 그러자 재인은 다시 활짝 웃었다. 그게 왠지 아릿하다. [화났어?] 도리도리. 화 안 났단다. [또 나 피할 거냐?] 피식. 이번엔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태양은 성큼 재인에게 한 발 다가섰다. [무섭다, 태양. 너 이렇게 눈썹 사이를 좁힐 때마다 여기가 막 시려.] 자신의 목 근처를 가리키며, 어깨를 움츠려 보이는 작은 별. 그래도 태양은 물러섬이 없다. 질문에 대답, 꼭 듣고 말 태세다. [날 피할 거냐고 물었다.] [아아니! 니가 그랬잖아. 너 피하지 말라고. 내가 거리를 두는 것 같으니까 너 거슬린다고. 생각해 봤는데, 응, 나 정말 많이 고민했거든? 그런데 그걸로 괜찮은 것 같아. 아직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안 피한다니 다행이다. 자신이 좀 이상해진 건 진작 알았다. 재인이 곁에 있으면 심장에 무리한 힘이 들어갔다. 그가 곁에 없으면 심장 주변이 우리한 통증을 앓았다. 그래도 그를 몰랐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이것이 참 미스터리다. 이런 느낌을 그에게 물어 볼 수도 없다. 설명하기 좋아하는 재인이 뭐라 할지가 제일 두렵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재인의 다짐으로 태양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럼 나도 뽀뽀 안 해.] 지난번의 약속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태양이다. 너 떠나지만 않으면, 나 피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참을게. [대신에 넌 내 옆에 붙어 있어.] 저를 올려다보는 재인이 웃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태양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 위의 가로등이 비춘 길바닥만 노려본다. 왜 대답을 안 하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재인을 똑바로 보며 채근하듯 그의 볼을 꼬집는다. [응?] [응.] 겨우 받아낸 대답에 또 안심하는 자신이 우습다. 우습지만 어쩔 수 없다고 태양은 긴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숨 쉬기 힘들 만큼 심장이 무리를 하며 미쳐 날뛰더라도, 그를 보지 못할 때마다 찾아오는 우리한 통증은 더 견디기 힘드니까. 입천장을 데이고 나서도 뜨거운 칼국수를 말아먹는 사람처럼, 두 번, 세 번 상처 난 자신의 생채기에 해악을 끼치게 되더라도 끝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태양은 어렴풋이 배운다. 그게 왜 그토록 절실한지, 이유는 나중에 따지게 되더라도. <눈 깜짝할 새 일어날 수 있다> '물에 담그면 24시간 내 100배로 커지는 장난감' 을 입구가 좁은 통에 물을 채우고 넣어두는 바람에 꺼내지를 못하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너무 커져 버렸다. 꼭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앉은 누구 같다. 13. [계속 뜸하더니?] [시험 기간이었어요.] 지난 번 갑자기 헤어진 후로 요양원은 처음이다. 햇살이 눈부시도록 밝은 일요일 오후의 정원은 산책하기 그만이었다. 시험 기간이었다, 하는데도 잘 보았냐고 묻지 않는 엄마. 태양도 그 후 아무 말이 없다.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엄마의 정수리를 내려다본다. [흰 머리 있어요.] [뽑지 마.] [왜요?] [그것도 내 몸의 일부잖니.] 부드럽지만 단호한 엄마의 음성에 누군가의 대답이 겹쳐진다. '싫지 않아. 왜냐면…… 그게 다 추억이니까. 그 기억도 다 내 일부잖아.' 태양은 문득 숨을 낮게 쉬며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러고 보니 닮았다. 아픈 모습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을 좌지우지 할 힘을 가진 것이나. 엄마와 재인은 부드럽지만 결코 약하지 않고, 다정하지만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생각하니 절로 코끝이 저린다. 힘든 거 내색하지 않고 잘 감추고 있다 생각했는데 매번 그들에게 들키고, 그들이 원하는 것조차 알지 못해 헤매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이다. 그러고도 내가, 나보다 강한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나는 나무가 되길 바라는 어리석은 잡초였을까? 마치 코미디 배우가 된 기분이다. 나는 줄곧 모르고 있었는데, 이미 다 알고 지켜보는 이들 앞에 선 것처럼. 뒤늦게 깨닫는 순간 바보처럼 놀라서 뒤로 넘어가는 내 우스꽝스런 모습에 와 하고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관객들이 그려진다. [왜 그러니?] 그저 가만히 서 있는 태양이 이상했는지, 조용히 물어오는 음성. [알고 싶어요.] [뭐가?] [아버지, 왜 자살하신 거에요?] 지금껏 한 번도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안 그래도 힘든 엄마의 상처를 꾹 찌르는 아이의 무모함이 태양에겐 없었던 거다. 그렇다고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궁금해서 내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마치 다 이해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네 아버지라면. 한 번도 내가 이해하지 못할 언행을 보이신 적이 없으니까.] [엄마 인생, 제 인생 완전히 엉망인 된 채로 버려두고 가셨는데도요?] [사정이 있었을 거야.] 세상에……! [그 사정이 뭔지 엄마조차 모르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저절로 비꼬아지는 말투. 태양은 나중에 후회하게 될 비난을 쏟아낼 것만 같다. [태양아.] [……네.] [내가 누누히 말했지만 아무 것도 믿지 마.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비정해. 많은 걸 감추고 있단다. 그렇다고 그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야. 몰라도 되는 건 모른 채로 가라.] 늘 이런 식이었다. 전화로 묻는 질문들도 이런 식으로 거부되곤 했다. '믿지 마라, 알려고 하지 마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덮어 두거라…….' 대체 왜 자신이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지금껏 그대로 살아왔다. 왜 당해야 하는지, 왜 그게 나였는지도 이해하려 애쓰지 말라고. '세상은 원래 그런 거란다.'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냥 수긍하기엔 억울한 것이 너무도 많다. [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엄마.] [……!] [지금까지 줄곧 버리면서 살아왔어요. 좋아하는 거, 지키고 싶은 것들 다 포기하면서. 그랬는데, 이제 다시 갖고 싶은 게 생겼어요.] [그게……?] [사람이에요. 같은 반 친구. 어떤 녀석이냐고 묻지 않으실 테지만요, 별을 닮았어요.] 한 동안 말이 없는 엄마. 태양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위험해. 알잖니? 그 애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다시 포기하라는 거다. 잊으라, 하시려는 거다. 태양은 지금껏 자신이 버려온 것들을 떠올렸다. 매일 꼬박꼬박 쓰던 일기도, 비밀을 털어놓을 친구도 포기했었다. 특정하게 좋아하는 음식도, 3년 이상 간직하는 물건도 없어야 했다. 가까운 이들에게 노출된 자신은 아무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데 길들여져 왔다. 힘들었지만 어느 새 익숙해졌고, 가슴이 쓰릴 뿐 아프진 않았다. 그런데 다르다. 이번은 결코 같지 않다. [그런 협박, 스스로 다 해봤어요. 그런데 안 돼요. 포기. 못하겠어요.] [남태양!] [엄마!] 화가 난 듯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난 엄마를 향해 태양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정원 곳곳에서 산보 중이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대결구도로 마주 선 두 사람은 주먹을 꼭 쥔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바위처럼 고집스런 얼굴로, 걱정과 분노로 하얗게 질린 엄마의 얼굴을 본다. 이렇게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의 엄마와는 특히. 태양은 애써 낮게 소리를 죽여 말했다. [그 애를 위해서 다 버릴 준비가 됐어요. 할아버지가 무얼 남기셨든 저는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뭔가를 갖고 싶었던 적 지금까지 없었어요. 왜냐고도 묻지 마세요. 저도 모르니까.] [……!] [엄마가 그러셨죠. 엄마도 믿지 말라고. 어떻게 사람이 딱 저 자신 하나만 믿고 살아요? 그거 너무 힘들어요.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외롭고 쓸쓸하고 때론 무섭기까지 하다고요! 그 기분 아십니까? 엄만 저 믿죠? 그런데 난 엄말 믿으면 안 된다면서요. 왜죠? 원래 세상이 그렇다고요? 정말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 줄 알고 다 포기해 왔다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란 걸 그 애가 알려줬어요.] [……태양아!] [엄마. 다 꺼져 버리고 캄캄해져도 좋아요! 제 하늘엔 이제 별 하나만 남길 거예요!] 소리를 잔뜩 죽였음에도 격렬하게 울리는 태양의 외침에 엄마는 한 동안 말을 잃고 서 계시다가 휠체어 등잡이를 돌려 잡았다. 힘이 빠지는 건지, 충격에 다리가 풀린 건지 엄마는 곧 다시 내려앉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꼿꼿하게 선 태양은 미동도 없다. 한참을 그렇게 그림처럼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엄마였다. [이해가 안 돼.] [이해하려 애쓰지 마세요. 어차피 실패할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주세요. 아빠를 이해하셨던 것처럼.] [단단히 박혔구나.] 힘 없는 중얼거림이 마치 그 느낌을 알고 있다는 말투다. 태양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네. 전…… 이제 그것만 보고 살려고요.] 복도에 왁자지끌하게 모여든 아이들의 뒤통수가 온통 까맣다. 교무실 앞은 이미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달려온 아이들로 북적이고, 그 와중에도 시끄럽다고 녀석들의 머리를 출석부로 내리치는 학주의 모습이 보인다. 태양은 가만히 복도 벽에 기대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전교등수 앞부분이 게시된 쪽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나더니 곧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여재인이 오승진을 다시 눌렀어!] [우어, 정말?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거야 모르지. 재도전을 할지, 완전 넉다운 되어 버릴지.] ['재도전한다' 쪽에 오천원 건다.] [나도 재도전!] [뭐? 그럼 내기가 안 되잖아!] 저희들은 쑥덕인다고 여겼을지 모르나, 복도를 울린 마지막 코멘트로 인해 둘은 학주에게 귀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태양은 팔짱을 풀고 그들이 서 있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 게시판 앞에 선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이름들 중에 '여재인' 이라는 세 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교 5등. 그렇게 많이 아팠던 녀석이……. 독종은 독종인가 보다. 감탄하는 심정으로 태양은 천천히 눈을 내렸다. 한참 내려가도 보이지 않던 승진의 이름을 열일곱 번째 칸에서 발견한다. 숨어서 그렇게 공부하더니 지난 번보다 결과가 좋지 않아 좀 의외다. 재인의 '고액 과외' 발언에 충격을 먹은 건지 이번엔 혼자 하는 것 같더니만. 그나저나 태양은 그런 승진의 성적에도 못 미쳤나 보다. 30번째 칸까지 훑어 내려갔다가 태양은 그냥 돌아섰다. 어차피 승진을 이기지 못했다면 더 볼 것도 없다. 태양은 교실로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 조금 쓴 입안을 헹구듯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민감하게 느끼고 등을 굳힌다. [다들 너보고 괴물이래.] 무슨 소린가 싶다. 태양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재인을 돌아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얼굴은 조금 분해 보인다. [넌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단 말이야.] [무슨 말이야?]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굴지 마. 기뻐하는 표정쯤은 내비쳐도 되잖아.] 입술을 쑥 내밀고 삐죽 삐죽. 이런 재인의 모습은 처음이다. 태양은 한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훑으며 그런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자 조금 허탈한 듯 어깨의 힘을 쭉 빼며 중얼거렸다. [잘 났어, 남태양.] [……?] [아무튼 축하하려고 막 달려 왔는데, 이렇게 담담하다니. 김 새.] [뭘 축하하는데?] [모른 척 하는 거야? 너 방금 교무실 다녀온 거 아니었어? 전교 1등, 남태양 씨.] [……!] 진정 놀라고 말았다. 재인의 이름 위로는 쳐다보지 않은 거다. 눈썹을 들어올리는 태양을 이상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재인. 태양의 어깨와 소매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스윽 문질러 닦아주곤 먼저 나가 버린다. 혼자 남은 태양은 잠시 후 피식 웃는다. 이거 좀 재미있다. 숫자일 뿐인 성적이지만, 그것으로 게임을 한다는 거. 그리고…… 이긴다는 거! 태양은 곧장 교실을 지나쳐 옆반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뒷문을 열고 익숙한 모습들을 찾는다. 지난 번보다 더 살이 올라있는 칼자국 녀석이 저쪽에 눈에 띈다. 그리로 가는 동안 책상 위에 걸터 앉아있는 한 녀석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온다. 흘끗 쳐다보자 역시 눈이 쪽 찢어져 올라붙은 오승진 패거리 중의 한 명이다. 대체 오승진은 어디 간 걸까? [남의 반엔 왜 함부로 기어 들어오냐?]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마치 외부 침입에 기분 나빠하는 집주인처럼 행세하는 이 녀석. 키는 크지만 몸이 엄청 말랐다. 태양의 기억 속에 승진의 꼬봉3으로 기억되는 놈이다. [오승진. 어디 있냐?] [알아 뭣 하게?] [반지 돌려 받으러 왔다.] 태양의 대답에 바짝 붙어서 있던 마른 놈이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슬슬 다가온 칼자국과 찢어진 눈이 태양의 뒤에 서자, 세 놈에게 둘러싸인 형상이다. 곧 교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면서, 대치 양상으로 우뚝 선 네 사람의 눈치를 본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태양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조용히 내뱉었다. [나갈까?] [폼 잡지 마라, 남태양.]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말하는 건 처음 본다. 잔뜩 쉰 목소리로 경고를 해온, 눈이 심하게 작은 녀석.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드는지 그는 얼굴을 팍 찡그린다. 정말 더러운 인상이다. 싸움하러 가면 얼굴만으로도 반은 무찌르고 시작하겠다. 그 생각에 또 싱거운 웃음이 난다. [미안. 폼 나는 줄 몰랐다.] [아, 진짜 싫은 새끼!] 태양의 농담에 저도 모르게 웃을 뻔한 칼자국 녀석이 제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오히려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때 쾅! 발로 뒷문을 차면서 오승진 녀석이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꼬봉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태양을 발견하곤 인상을 팍 구긴다. [아아, 씹탱구리! 망할!] 제 뒷머리를 미친듯이 비비고 털고 난리도 아니더니, 척척 태양의 앞으로 걸어와 의외로 쿨하게 한 손을 턱 내민다. [받아라, 개새끼야.] [고맙다, 베트맨.] 태양의 손바닥 위에 턱 얹힌 승진의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몰래 숨어서 공부한 자신을 은근히 비꼰 그 호칭이 분한지 손가락을 쉽게 펼치지 못한다. 태양은 친절하게 다른 손으로 승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주며 그 안의 반지를 받았다. [씨발! 남태양!] 격려차 상쾌하게 웃어주고 돌아서는데, 승진이 부른다. 돌아보자 어느 새 병풍처럼 승진의 뒤에 둘러선 세 놈이 보인다. 재미있는 놈들이다. 태양은 눈썹을 들어올린 채 승진의 다음 말을 듣는다. [완전히 준 거 아니야. 다시 찾을 거다!] 반지를 말하는 게 아님을 태양은 안다. 그래도 역시 반지를 말하는 것임을 또 안다. 승진이 가질 수 있는 건 여재인이 될 수 없으니까. [이번 방식은 내가 정할 거다.] [좋을 대로.] 다 받아주마. 태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도전을 해와도 지거나 양보할 자신이 없으므로. 그 만큼의 절실함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기 때문에. 태양은 반지를 꼭 쥔 손을 주머니에 넣고 뒷문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학교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는 희한한 생각도 했다. 몰랐는데 이번 주는 그가 주번이었나 보다. 파란색 쓰레기통을 들고 소각장 쪽에서 혼자 나오고 있다. 늦은 오후의 햇살 받아 더욱 밝은 갈색으로 보이는 짝의 머리가 보인다. [서인학! 같이 들자.] 천천히 다가가 텅 빈 쓰레기통 한 쪽을 나눠드는 태양. 그런 그를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인학이 도로 뺏으면서 묻는다. [뭐 하는 거야?] [원래 이렇게 드는 거라던데.] [……여재인이 그래?] [응.] 흠. 아니면 말고. 처음부터 그 말 믿지도 않았다. 태양이 웃는 걸 보고 인학이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다. [주번이 너 혼자야?] [다른 놈은 일지 적고 있겠지. 쓰레기 하나 비우는데 둘이나 갈 거 뭐 있어.] [그런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는다. 첫 날 재인이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혼자 가기 싫었던 것이든, 자신에게 소각장 위치를 알려주려 한 것이든. [1등 했다며?] 묻는 인학의 음성이 차분하다. 태양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흘끗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한 인학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거다. 노력한 만큼 얻지 못했던 건 사람에게서밖에 겪어 보지 못한 태양이니까. 그 때 인학이 놀랍게도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모를 줄 알았다.] [뭘?] [나 4등 했어. 여재인보다 잘 했다고.] 마치 그 사실이 중요한 것처럼 말한다. 태양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따라서 멈추며 인학이 약간 빈정거리듯 중얼거린다. [담임이 좋아하겠지? 한 반에서 전교 10등 안에 세 명이나 나왔으니까.] [그런 걸 담임선생님이 좋아하시냐?] 묻는 태양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인학. 다음 순간 고개를 젓는다. 왠지 씁쓸한 얼굴이다. [가늠이 잘 안 돼. 너 여기 생활 얼마 만큼 알고 또 얼마만큼 이해하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성적 나오는 거, 선생님 대하는 거, 자주 하늘 보는 거, 가끔 웃기도 하는 거. 다 모르겠어.] [그걸 왜 다 알아야 하는데?] [너니까.] 태양은 미간을 찌푸린다. 왜, 네가 좋아하는 여재인과 친하니까? 하지만 그런 질문으로 그를 자극하고 싶진 않다. [내가 니 짝이니까?] [아니.] 단호한 대답. 그리고 조금 성급한 어조로 이어지는 말. [좋아하는 놈이니까.] 갑자기 쓰레기통을 놓아 버린 인학이 태양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되새길 틈도 없이 가슴 쪽이 턱 막혀 버리는 느낌.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가만 노려보자, 놀랍게도 그의 입술이 빠르게 다가왔다. 피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잔뜩 서두른 모양이다. 서툴게 태양의 치아에 부딪힌 그의 입술이 긴장을 했는지 움직일 줄 모른다. 그대로 굳은 모양으로 태양의 하얀 교복 셔츠 앞섶을 움켜쥐고 있는 녀석. 태양은 놀랍고 당황스럽던 마음이 일시에 가시고, 기분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건 자신이 재인을 잃을 뻔했던 그 순간의 실수와 닮았다. 밀어부치듯 상대를 제압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 떼를 쓰는 모양과 같다. 강하게 밀쳐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태양은 자신의 옷을 꼭 쥔 인학의 손을 풀려고 애썼다. 고개를 뒤로 젖힐수록, 자신보다 조금 작은 그가 발꿈치를 들어올리는 게 느껴진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작은 별도……? 그 때였다. [그만 해!]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두 사람 다 흠칫 놀라고 만다. 하얗게 질린 채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재인이 저만치 서 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보고 다가왔는지도. [남태양. 너 정말……!] 말을 잘 잇지 못한다. 그 정도로 기가 질린 표정이다. 작은 주먹을 꼭 쥐고서 금방이라도 때리고 싶다는 듯 태양을 노려본다. 그제야 인학을 탁 밀쳐내고 재인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하지만, [너 정말 싫어!] 예상치 못했던 말을 던지고 뛰어가 버리는 재인이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사납게 뛰기 시작하는 게 느껴진다. 태양은 자신의 팔을 잡아오는 인학의 손을 탁 쳐냈다. [방금 일은 없던 걸로 하자.] 차가운 말투. 인학 쪽은 보지도 않은 채다. 멀어지는 작은 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쫓으려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인학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너는 그러기가 쉽냐?] [쉬웠던 적은 없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아.] [너, 여재인 좋아해?] [……!] [왜 대답 못 해?] 태양은 가슴 속을 꽉 짓누르는 답답함을 느끼며 인학을 돌아보았다. 아까 재인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인학의 얼굴 위로 갈색 머리가 흘러내려와,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날 정도로 꼭 깨물고 있는 입술 밖에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어차피 내 인생에 네가 개입될 여지는 없을 거다. 안 그래도 복잡해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삶이다. 줄곧 쳐내왔는데, 앞으로는 더 많이 쳐내야 하는데, 그런 내가 이제는 너까지 쳐내야겠냐? [서인학. 나 좋아하지 마라. 나라는 놈, 네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아. 코끼리의 코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코끼리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냐?] 그 말을 끝으로 막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태양의 등에 꽂아넣는 인학의 말이 꽤 날카롭다. [그 말, 재인이한테도 해 줬니?] [……!] [내가 보지 못하는 너의 부분들, 여재인한테는 다 보여줬어?] 그러나 태양은 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내딛였다. 바닥을 뒹구는 쓰레기통과 함께 남은 인학은 그의 머리 속에서 이미 지웠다. 오직 한 사람, 여재인과, 오직 한 마디, 자신이 싫다던 그 말에만 집중했다. 코너를 막 돌아 사라졌던 재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면서 태양은 생각했다. 무엇으로 네가 다시 날 좋아하게 만들까? 어떻게 해야 내가 너를 상처내지 않고 오래 누릴 수 있을까? 참으로 내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혼자 있을 때 말을 거는 것. 같이 좋아하던 물건을 양보하는 것. 뜨끈하게 데운 손으로 아픈 배를 만지는 것. 지친 걸음이 도착할 곳에 미리 가 있는 것. 입술이 허전하지 않게 키스하는 것. 이런 것들, 다 내가 할게. 너에게는…… 그냥 내가 할게. 14. 불러야 하는데 어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뭐라고 불러야 멈춰서서 돌아봐 주고,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려줄지 모르겠다. 이름 하나 부르는 것도 이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이제까지의 자신과는. 태양은 그저 재인처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 뿐이다. 계단이나 오르막이 있으면 더 잘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왜 본관 반대쪽으로 뛰고 있는지. 조그만 녀석이 빠르기도 하다. 강당 건물을 돌아 수풀이 마구 솟아난 외길로 들어선 후에야 겨우 그를 잡을 수 있었다. [놔!] 화가 난 듯 소리치는 재인의 팔을 태양은 쉬이 놓지 못한다. 하지만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아귀에 힘을 풀고 만다. 풀썩.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재인의 몸이 뒤로 빠르게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으, 아파. 무슨 짓이야!] [놓으라며.] [니가 무슨 터미네이터야? 존 코너가 놓으란다고 바로 놓는 놈처럼!] 주저앉아 투덜거리는 재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강당 건물 외벽을 바라보고 앉은 그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결국 태양도 그 옆에 털썩 앉아 버린다. 그러고 둘은 말이 없다. 멀리서 무리지어 하교하는 사내녀석들의 걸걸한 소음이 밀려왔다. 푹신하게 자란 풀들 사이로 빨간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날아가는 중이다. 재인은 태양을 흘끗 보는 것 같더니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터미네이터가 뭔 줄은 아나?] [모른다.] 즉각 대답하자, 좀 심하다는 표정으로 태양을 곁눈질하더니 한숨을 폭 내쉰다. [있어. 영화 속에 나오는 멍청한 사이보그.] 어찌나 짤막한 설명인지. 평소처럼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리지도 않는다. 태양은 재인답지 않은 그 대답에 호기심이 생긴다. [뭐가 그렇게 멍청한데?] [사람 마음은 요만큼도 몰라.]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하고 다시 혼잣말처럼 종알종알. [존이 얼마나 애가 탔을까? 바보 같은 그 빙구머신 때문에!] 점점 모를 소리만 한다. 태양은 아까의 재인처럼 한숨을 푹 내쉬며 가만히 외벽만 쳐다본다. 아직도 분이 안 풀린 걸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곁에서 들려오고 있다. 잠시 후 태양에게서 갑자기 쿡 웃음이 새어나온다. 작은 별의 숨소리 너머로 몰래 풀 뜯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화를 삭이고 있는 건지, 어색함을 물리칠 적당한 말을 고르고 있는 건지. 태양은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하늘이 왜 파란 줄 아냐?] 지난 번 재인이 승진에게 던진 질문을 태양이 반복한다. 무슨 말이든 하다보면 그의 분도 풀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색색거리면서도 곁에 앉아 대답은 다 해주고 있는 재인이니까. [멍든 거잖아, 바보야! 천둥, 번개한테 하도 두들겨 맞아서 온통 시퍼렇게 터진 거잖아!] 주먹을 꼭 쥐고 자신을 흘겨보며 바락 외치는 작은 별. 태양은 더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당겨 와락 안아 버렸다. 귀엽다. 화내는 것도 정말 귀여워서 못 살겠다! [놔! 놓으라고, 이 사이보그야!] [난 안 멍청해.] [니가 안 멍청하면 누가 멍청해? 바보! 이거 안 놔?] 바르작거리며 벗어나려는 재인. 두 팔을 그의 옆구리에 꼭 붙여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태양은 자신의 품에 넣은 그의 몸을 마지막 보루인 양 절대 놓치지 않고 버텼다. 한참을 버둥거리다 작은 별은 힘이 다 빠져 탈진한 사람처럼 축 몸을 늘어뜨린다. 태양은 얌전해진 그의 팔을 자신의 허리에 두르며 마른 등을 통통 두드려준다. 그러자 원망스럽다는 듯 태양의 어깨를 재인이 제 이마로 툭 친다. 뜨거운 숨을 후우 내쉰 작은 별은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첫키스였어. 바보야. 나한테는 니가 첫키스였다고!] 습기가 밴 그 말이 고스란히 예민한 피부를 타고 심장 쪽으로 달려갔다. 쿵. 쿵. 재인에게도 들릴 정도로 커다란 박동소리가 거기서 나기 시작한다. 태양은 등 두드려주던 손을 멈추고 재인을 안은 팔을 있는 힘껏 꽉 조였다. [그러지 마. 아까처럼 너…… 그러는 거 싫어. 나빠.] 태양의 품에 묻혀 웅얼거리듯 들려오는 재인의 엄한 꾸지람. 가슴이 기분 좋게 간지러워서 태양은 몰래 미소지으며 묻는다. [키스하는 게 나빠?] [너 인학이한테 그러는 거, 그거 나한테는 나쁜 거야.] [왜?] [꼭 해야겠으면 나랑 해. 멍청아, 나랑만 해.] 정말일까? 태양은 문득 재인의 그 말에 팔을 풀고 그의 어깨를 밀었다.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그의 표정을 살피자, 재인이 시선을 피한다. 왜 피하지? 진심이 아니라서? 그럼 그냥 해본 소린가? 혹 농담……이었을까? 꼭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당장 견딜 수가 없어서, 태양은 고개를 숙여 곧장 재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기억하는 것보다도 엄청 보드랍다. 열이 나는 것처럼 조금 뜨겁기도 하다. 반응이 하도 잠잠해서 눈을 살짝 뜨자, 작은 별이 눈을 꼬옥 감고 있다. 숨도 멈추고 어깨도 잔뜩 움츠린 채 굳어있는 모습이 태양의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싫어하면서! [이래도 좋아?] 입술을 떼고 조금 화난 듯 묻는다. 대답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재인. 어깨를 확 당겨 다시 녀석의 입술을 잘근 깨물자, '아!' 하며 신음한다. 벌려진 입에 혀를 넣어 자꾸만 피하는 그의 혀를 끈질기게 따라 잡는다. 또 다시 재인은 눈을 감아 버렸다. 눈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꼭. 봐! 너 이렇게 참고 있으면서! [이래도 너랑만 해?] 태양이 왈칵 재인을 밀어내면서 외쳤다. 붉은 입술 사이로 힘겨운 숨을 내쉬던 재인이 태양을 빤히 본다. 도리어 저가 화를 낼 건 뭔가, 싶은가 보다. 그 순수해 보이는 얼굴로 고민의 흔적도 없이 또박또박 내뱉는 대답. [나랑만 해.] 아무튼 고집도! 태양은 미간을 모은 채 재인의 얼굴을 샅샅이 살핀다. 주저함이나 후회 같은 게 조금이라도 보이면 때릴 것처럼 심각한 표정이다. 재인이 살짝 고개를 돌리자, 곧장 그의 볼을 잡아 자신 쪽으로 도로 돌려놓는다. 햇살이 엷어지는 것 같더니 어느 새 발개지고 있었다. 석양의 덩어리진 빛이 그들의 머리 위에 곱게 발라진다. 태양은 손 안에 쥔 재인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 […….] 다른 손을 재인의 왼쪽 가슴에 얹고, 그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아주 낮게 속삭인다. [너를 보고 있으면 여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분다. 심장이 미친 것 같고, 코끝이 아려오고, 피부가 따끔따끔해.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아. 꼭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기분이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머리는 맑아져. 그게 싫지 않아.] 들릴 듯 말 듯한 태양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재인의 머릿결이 날린다. 따스한 미풍의 그림자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비밀을 속삭이고 떨어지려는 태양의 손을 재인은 꼭 붙들어 다시 제 가슴에 붙인다. 그리고 좀전의 태양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여 조그맣게, 아주 조그맣게 속삭인다. [나는 태양이 네가 나를 보는지 안 보는지 다 안다. 뒤에서건 옆에서건 네가 보고 있으면 여기가 막 간질간질해.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한 거 있지. 나는 네가 웃는 것만 봐도 그래. 이상하게 여기가 움찔거려. 너 노래하는 거 듣다가 저번에 소름 돋았다는 말 기억해? 있지, 그럴 땐 꼭 가슴 속에 머리카락이 들어간 기분이야.] 빨간 무당벌레가 돌아왔다. 어깨 높이까지 자란 풀들이 잠잠해졌다. 재인의 심장이 속삭인 듯한 말을 고스란히 흡수한 태양의 손이 가만히 떨어지더니 다시 재인의 어깨에 얹힌다. [나 피하지 마.] [응.] [내 곁에 있어.] [그럴게.] [나도 너랑만 할게. 너만 보고, 너하고만 손잡을게.] 끄덕끄덕. 목이 막히는지 대답 없이 고개만 빠르게 끄덕인다. 태양은 몸을 기울여 다시 재인의 입술로 입술을 내렸다. 서로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 키스는 참으로 조심스럽고 수줍기만 했다. 코끝이 닿아, 서로의 숨이 예민한 피부의 솜털로 느껴진다. 따사롭고 촉촉하며 그 감질나는 키스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잠시 떼었다 다시 붙이고, 맞닿았다 떨어져 몇 번을 더 스치는 키스로 두 사람의 입술은 더할 수 없이 붉어져, 자꾸만 자꾸만 더 탐이 났다. 이대로 밤을 샐 수도 있겠다 싶을 즈음, 재인이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해가 물러가니 추운가 보다. 어둑한 주변이 그제야 겨우 눈에 들어온다. 태양은 먼저 일어나 재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다. 교실에 덩그라니 남아 있을 두 사람의 책과 가방을 떠올리며 씩 웃는다. 그게 우스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막 웃음이 제멋대로 새어나온다. 자신의 손 안에 따스하게 채워져 있는 작은 별의 손. 태양은 재빨리 재인의 뺨에 키스한다. 아쉬운지 이쪽 뺨에도 다시 쪽! 순간 놀랍고 익숙지 않아 움칠 하는 기색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곧바로 태양은 서로 맞물려 있는 두 손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이게 뭐야?] [키스 값.] 우뚝. 갑자기 멈춰선 재인 때문에 태양도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돌아보자 어둑한 공기 속에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래? 묻고 싶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다. 반지는 여전히 두 사람의 손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태양은, 천천히 손을 풀고 반지를 들여다보는 재인을 바라본다. [할머니 반지네.] [응.] […….] 완전히 풀어지지 않은 채로 어정쩡하게 반지를 품고 얽힌 두 손. 재인은 태양과 맞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더니 그의 손등에 살짝 입술을 맞췄다. 뜻밖의 고마움, 소중하고 깊은 안도감, 찰박찰박 차오르는 기쁨의 키스. 혹은 사…….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그 뜨끈하고 깊은 감촉은 태양의 가슴에 화상처럼 새겨진다. 그래서였나 보다. 저도 모르게 내뱉는 비명처럼, 낮게 고백하고 말았다. [나도……. 실은 나도 네가 첫키스였다.] 그러자, 부끄러워진 재인도 교환하듯 고백을 해온다. [실은 터미네이터도 멍청하지 않아. 아는 것도 굉장히 많고 똑똑해. 단지 사람한테 좀 서툴러서 그렇지. 잘 생기고 멋있어. 음, 음, 약간 섹시하기도 하고.] 미풍이 살랑거리는 5교시의 나른함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반 녀석들 절반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졸기 직전이다. 아무도 믿지 못할 테지만, 전자에는 태양도 섞여 있었다. 간밤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지난 번 대화로 줄곧 걱정하고 계셨던 거다. 직접 재인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태양이 대답이 없자 그녀는 낮게 웃으며 이해한다고 말했다. 아니. 그녀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아, 아니다.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데려가야 하는데, 재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샜다. 툭. 태양의 팔꿈치에 딱딱한 것이 와 부딪쳤다. 실눈을 뜨고 내려다보니 인학의 연필 끝이 이쪽을 보고 있다. 고개를 들자, 국사선생님이 태양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신다. 아까까지만 해도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한창 역설하고 계셨는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 말을 남기신 분 말이다. 설마 남태양. 미국에 살았다고 한국 위인전도 안 읽은 건 아니겠지?] 다시 한 번 반복하듯 말씀하신 뒤, 태양의 답을 기다리신다. 꽤 몇 권 읽긴 했지만, 다 어렸을 때였고 세세히 기억하고 있지도 못하다. 가슴 부근을 한 손으로 꾹 누른 채 다른 팔을 들어올려 숨 넘어갈 듯 재연하는 모습.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선생님의 저 연극적인 모습이 어딘지 익숙하다. 태양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집중하듯 기억을 되새겼다. 알 듯 모를 듯. 비장하고, 절박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는……. 아! 그렇다면……? [혹시 우성이 형 말씀입니까?] 까르르르! 왁자하게 발을 구르며 웃음을 터뜨리는 반 녀석들 탓에,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탁자를 집고 비틀거리는 선생님의 모습은 다소 희극적으로 보였다. 의도한 바가 아닌데 태양은 괜히 죄송스럽다. 난감함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재인이 뒤돌아앉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다행히 그 때 종이 울렸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선생님이 재빨리 출석부를 챙겨 나가시자, 아이들이 우르르 태양의 주변에 몰려와 소란스럽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진짜 재밌다!] [남태양. 이름부터 난 알아봤지. 암! 우성이 형님도 아시면 널 좋아하실 거다.] [이 얼굴로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진지한 농담을 하다니! 쉽지 않지, 쉽지 않아.] 떠들썩한 아이들 틈으로 정수와 함께 교실을 나서는 작은 별이 보인다. 어디 가는 걸까? 갑자기 달려든 수다 군단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지도 않고. 태양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보았다. 인학은 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문제집을 꺼내 풀고 있다. 마치 그의 주변에 소음방지막이 둘러쳐진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 내려온 앞머리 속에 총명해 보이는 갈색 눈이 숨어 있다. 그가 고백을 해 왔던 날 이후, 아직 둘은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있다. 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재인이 사라진 쪽과 인학을 곁눈질 했다. 이런 분위기 익숙지가 않다. 집단적 적의가 아닌 집단적 호의 같은 거. 그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여재인이 널 왜 좋아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 한 녀석이 부주의하게 내뱉은 한 마디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말을 한 놈도 놀랐는지 가만히 제 입술을 깨물고, 곁에 선 녀석은 그의 옆구리를 쿡 찍는다. 갑자기 침울해진 표정의 녀석들. 어색해하며 뒤돌아 제 자리로 가 버리는 다른 한 녀석. 주춤 주춤 다들 그렇게 흩어지고 있다. 가슴 아린 표정의 덩치가 태양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고 간다. 아프다. 그래도 뭐라 말 못하겠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만 받았을 것 같은 여재인은, 인생이 얼마나 만만할까?] 비아냥거리는 듯한 인학의 중얼거림이 태양의 귀에 예리하게 꽂혔다. 글쎄……. 태양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인학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역시 똑같이 낮고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사랑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 그걸 다 지불하려면, 얼마나 숨이 찰까?] 연필을 쥔 인학의 손마디가 하얗다. 사람은 무어든 그냥 주는 법이 없다. 지금 인학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태양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실 뒷문을 열고 나오자, 화장실에서 막 나오는 정수가 보인다. '재인이는?' 태양이 묻자, 정수는 젖은 손을 털며 도서실에 갔다고 말해주었다.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하는데……. 태양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곧장 걸음을 옮겼다. 도서실의 슬라이딩 도어를 밀고 들어가 일렬로 늘어선 책꽂이 사이를 지나쳤다. 그러다 문득, 높은 곳에 꽂힌 책을 꺼내려고 발돋움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태양은 그리로 다가가 별 어려움 없이 재인의 손이 닿은 책을 꺼내들었다. 내밀어주자, 고개를 저으며 태양 쪽으로 다시 내민다. 읽으라는 모양이다. '이순신 장군.' 제목을 내려다보며 태양은 아까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이미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 꽤 슬플 것 같다. 난 비극에 약한데. [이것으로 우성이 형은 잊어. 내가 잘못했어, 태양.] 태양이 선생님 앞에서 곤란을 겪는 게 반복되자 정정할 필요를 느꼈나 보다. 두 손을 합장하듯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재인의 어깨를 가만 책꽂이 쪽으로 민다. 주변을 살피는 재인의 목을 감싸 고개를 숙이자, 조용히 눈을 감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촉 나는 바람에 작은 별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자.] 태양이 바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내민다. 재인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말 없이 받아 쥔다. 그리고 말했다. [지난 번에 준 껌도 아직 있는데.] '이게 뭐야?' 라고 이젠 묻지 않는다. '키스 값.' 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걸 아는 거다. [있잖아.] 재인이 태양을 올려다보며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나 어렸을 때 강아지를 키웠는데, 이름이 '칠성'이었어. 형들이 내 강아지라고 내 별명을 막 붙여서 부른 거야. 난 싫어했지만 형들은 그런 데 개의치 않아.] [칠성?] [응. 좀 촌스럽지? 우리 엄마가 아들만 일곱 명 낳았어.] '일곱 번째 별'이라. 그와 딱 어울린다. 여섯 명의 짓궂은 형들이라니. 형제가 많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럼 넌 막내겠구나.] [응. 그런데 있잖아…….]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은데, 서두가 좀 길다. 침을 꼴깍 삼키며 재인이 맞은 편 책꽂이 어느 지점을 바라본다. 시선을 좀더 내려뜨리면 아래쪽에서 검지를 편 재인의 손이 보인다. 설명할 때마다 나오는 그의 귀여운 버릇. 태양은 몰래 미소를 깨문다. [칠성이는 코가 정말 까맣고 촉촉했어. 나는 그 코에다가 입술을 막 부비는 걸 좋아했거든. 그런데 내가 녀석 양쪽 귀를 잡고 그걸 시도할 때마다 칠성이는 막 싫다고 고개를 저어대는 거야. 꼭 날 싫어하는 것처럼. 한 동안 그래서 나 밥도 안 먹고, 무척 상심했었는데…….] […….] [이제 알 것 같아. 그 녀석은…… 부끄러웠던 거야. 내가 다가갈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딴 데 쳐다봤던 것도.] 태양은 말 없이 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말을 마친 재인은 이야기 속의 칠성이처럼 시선을 내려뜨리고 있다. 그러니까…… 키스하는 거 싫지 않다는 얘긴가 보다. 참 희한하고 엉뚱한 비유다. 그걸 똑똑한 재인도 태양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참 예쁜 녀석이 아닌가!' 싶다. 두터운 콩까풀이 확 씌였나 보다. [태양아.] [음.] [안 줘도 돼. 이런 거 매번 안 줘도 된다고.] [……!] [나 괜찮아. 아니 좋아. 그러니까…….] 태양은, 무척 고심하며 말을 고르는 재인의 입술에 다시 키스한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되어 안도하는 작은 별이 느껴진다. 그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어주며, 태양은 마음 속으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알아들었다, 작은 별. 네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다, 오바. <봉인된 그를 깨워 정체를 밝히리라> 깊은 곳의 심장을 열어 낮은 소리로, 그의 일어남을 누구도 모르게 할 것이다. 그는 내 안에서 깨어날 것이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을 펴고 또한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며, 더욱 깊은 갈망으로 나의 입을 벌리고 손을 넣어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킬 것이다. 15.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습기를 머금은 구름이 낮게 흐르는 주말이었다. 재인과 함께 요양원을 찾은 태양은 미간을 모으며 창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직도 말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는 두 사람. 엄마와 재인. 좀전까지도 대화를 이어보려고 혼자 억지로 떠들었던 태양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올지도 몰라서 모두들 로비나 카페테리아 안에 들어차 있다. 그나마 그 곳이 조용하지 않아서 어색함은 덜했지만, 그래도 좀 심하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아니 엄마가 먼저 말씀을 해주시면 좋으련만. 태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태양과 시선이 얽히자마자 곧장 고개를 돌렸다. 자연히 태양의 눈이 가늘어진다. 수상한 낌새를 찾으려고 눈빛도 날카로워진다. [이 년들아, 나 똥 쌌다! 씻기든지, 새 옷 입히든지, 네 년들 땡기는 대로 해!] 갑자기 휠체어 바퀴를 밀어 저쪽으로 가더니 욕을 해댄다. [어머! 할머니 웬일이에요? 만날 몸에 손도 못대게 하면서?] 언제나 상냥한 간호사들이 할머니를 향해 다가간다.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 찾아왔을 때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저 치매 노인은 찾아오는 보호자도 없나 보다. 매번 혼자였던 것 같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도 혼자 덩그러니 앉아 남들의 가족상봉이나 구경하고 있지. 조금 안쓰럽지만 뭐, 자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다. [태양아, 재인이 좀 빌릴까?] 문득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다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태양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엄마의 눈을 보다가, 다시 담담해 보이는 재인의 눈과 마주쳤다. 재인이 자신에게 소중하다는 걸 이해하고 계시니, 심한 말씀은 안 하시겠지. 그를 쫓으려고 보자는 게 아니라고 여러 번 다짐하셨으니까, 비켜 드려도 되겠지. 태양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실내의 반대편 TV 앞으로 걸어갔다. 가다가 흘끗 뒤돌아보면, 여전히 말 없이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있다. 하지만, [재인, 정체가 뭐니?] 태양이 가자마자 떨어지는 조용한 물음. 재인은 앞에 마주한 단아한 인상의 여성을 향해 방긋 웃었다. [왜요? 제가 사람 같아서요?] '외계인 같아서요?' 도 아니고. 엉터리 대답에 그녀가 웃는다. 어쩌면 그녀는 재인에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물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종종 들어왔던 질문이니까. 재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했다. [전 그다지 위험인물은 못 되요.] 아쉽다는 그 말투에 태양의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위험해. 더 없이 위험하지.]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부축을 요구한다. 재인은 재게 일어나 그녀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허리를 안았다. 말랐지만 키와 골격이 큰 그녀가 휘청이며 다리에 힘을 풀자, 재인이 민첩하게 자신에게로 체중을 싣게 만들고는 단단히 선다. 무겁진 않지만 가볍지도 않다. 마치 일부러 힘을 주고 있는 것처럼. 훗. 갑자기 그녀가 웃자, 재인은 빤히 그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도로 휠체어에 앉혀 드리고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건강하시면서.] [보기보다 강단 있네. 게다가 똑똑하고.] 시험 당하는 거 유쾌하지 않지만, 좋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넘어간다. [이해하렴. 태양이 친구는 처음 만나는 거라서.] 그녀는, 동그래지는 재인의 눈을 날카롭게 주시한다. 마치 영혼을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직선적이고 솔직한 관찰이다. [예쁘구나.] [어머니는 짓궂으세요.] [너도 만만치 않잖아.] 헉. 혹시 우성이 형 얘기를 태양이 통해 들으신 걸까? 켕기는 게 있는 재인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물었다. [그래서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나요?] [아니. 그래서 마음에 든다. 태양이 너 줄게.] 재인의 눈이 또 동그래진다. 동공이 참 맑은 눈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투명한 홍채가 신비롭긴 하지만 동시에 신뢰가 가는 눈이다. [고맙습니다!] 벌떡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왠지 이 아이에게는 농담이 하고 싶어진다. 그게 왠지 잘 통할 것 같다. [니가 흘리거나 버려도, 난 다시 안 주울 거니까 알아서 해.] [흘릴 리도 없지만, 버릴 리는 더 없어요.] [고장 나도 갖고 있어. 갖고만 있어줘.] 왠지 강조하는 듯한 어조다. 그 말처럼 그녀의 눈도 재인을 똑바로 쳐다본다. 다방면에 너무 완벽한 것은 쉽게 고장 난단다. 지금껏 내가 만든 최고의 걸작이긴 하지만, 태양이의 반듯함과 꼿꼿함이 늘 안쓰럽고 불안했거든. 명품이지만, 그 만큼 까다로워. [고쳐 쓸 거예요! 태양이, 제가 골동품 만들 거예요.] 그래주면 고맙지. 태양의 엄마는 속으로 재인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다. 내 아들의 가치를 아는 네가, 정말…… 그래주면 고맙겠다. 하지만 아마도 힘들 거야. 그래. 힘들 거다. 너처럼 맑고 투명한 아이는 그만큼 쉽게 물들어 버리겠지. 힘들고, 아프고, 두려운 거, 하나도 제대로 숨기지 못 할 거고. 그럼 또 태양이가 먼저 포기할 거야. 널 위해서. 제 가슴 속에 남은 마지막 별이라도 버리려고 애쓸 거야. 그 아이는 그처럼 강하니까. 그 만큼 약하니까. 그리고 그 땐…… 태양이에게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테지. [작은 별.] [……?] [태양이가 널 그렇게 부르던데. 몰랐니?]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재인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줄곧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태양에게 오라고 손짓 한다. [나는 태양도 좋고, 별도 좋아. 그런데 어쩌지?] 안타깝고 슬픈 미소가 그려진다. 그녀는 재인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며 마지막으로 낮게 속삭였다. [……태양과 별은 같은 하늘에 뜰 수 없으니 말이야.] 결국, 어찌 할 줄 모르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환대나 축복도, 떠나라는 매정한 충고도 그녀의 몫은 아니었다. 모든 건 어차피, 반듯하고 투명한 두 아이가 견뎌내야 할 몫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위에, 드디어 하늘이 비를 뿌렸다. 버스 안에 나란히 앉은 태양과 재인은 창문을 때리는 비를 보고 있다. 문득 태양의 어깨에 편하게 기대 있던 머리를 바로 하고 재인이 묻는다. [태양이 넌 뭐 좋아해?] 궁금하다는 눈빛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하는 태양. '좋아하는 거 없어?' 다시 물으면, 창밖의 빗물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스트라디바리.] [응? 그게 뭐야? 바이올린?] [우리 엄마가 처녀 때부터 갖고 있던 첼로.] [우와! 그거 되게 되게 비싼 거잖아! 책에서 읽은 적 있어. 그 상표 각자 고유명사도 다 있는 것 같던데? 와, 엄청나구나!] 재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설명하기'도 잊은 듯 연신 감탄을 쏟아낸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다음에 그 첼로 나도 구경시켜 줄 수 있어?] 눈에 총총 별을 박아놓고 의욕적으로 묻는다. 하지만 태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댔다. [아니.] [왜?] [지금은 없어.] [팔았어?] […….] 대답이 없는 태양. 감은 눈은 떠질 줄 모른다.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재인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대신 그의 한 쪽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두른 뒤 똑같이 눈을 감았다. 토닥토닥. 제 가슴 앞으로 늘어뜨린 태양의 팔을 끌어안고 두드린다. 사정은 모르지만, 느낄 수는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재인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태양의 따스한 체취를 흡수하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다. 어떤 대화를 되새기는 건지, 내일 해갈 숙제를 떠올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 버스 바퀴에 물이 튀는 소리. 태양의 신음 같은 나직한 한숨 소리. 어느 새 그 위를 포근히 덮는 재인의 허밍 소리가 들린다. 음정, 박자 하나도 맞지 않는, 작고 부드러운 노래 소리. Twinkle, twinkle little star. How wonder what you are. Up above the world so high. 작은 별이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르고 있다. Like a diamond in the sky. Twinkle, twinkle little star. How wonder what y……. 노래가 끝날 즈음, 태양이 눈을 감을 채로 나직하게 물었다. [터미네이터라는 영화 말이다. 그거 해피 엔딩인가?] 재인은 눈을 들어 태양의 얼굴을 쳐다본다. 곧장 대답이 들리지 않자, 태양도 눈을 뜨고 재인을 바라본다. [해피 엔딩이야?] 어딘지 절박해 보이는 눈빛이다. 무언가 확신이 필요한 듯 재차 묻는 얼굴이 왠지 애잔하다. 재인에게 안겨 있던 팔을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쥐는 모습마저도. 그런 표정으로 묻는데 상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딱 한 가지뿐이란 걸 태양은 모르나 보다. [응.] 재인은 태양의 이마로 내려온 머리칼을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피 엔딩이야.] 인생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드라마도, 영화도, 소설도 마찬가지다. 보고, 느끼고, 읽는 사람마다 결말이나 감상은 각양각색이다. 같을 수가 없는 거다. 그리고 다르기 때문에, 결국은 각자 살아 봐야 알 수 있다. [언젠가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어.] 재인의 대답에 용기가 났는지 태양이 엷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박이 마구 쏟아지는 날, 크게 소리 내서 울어 보고 싶다고. 아무도 듣지 못하겠지만, 커다랗게 밖으로 울음소리를 한 번쯤 내 보고 싶다고. 넌?] 이 시린 미소는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것임을 재인도 안다. 그래서 자신도 태양에게만 할 수 있는 얘기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다. [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파 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었어.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자 마음껏 신음소리도 내고 대굴대굴 구르면 어떨까, 하고.]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는 얘기다. 소리 내어 울고 싶고, 소리 내어 아파하고 싶다는 말. 하지만 둘은 이제 한 가지씩 비밀을 교환한 사람처럼 씨익 웃는다. 마치 그 소원을 벌써 이룬 것 마냥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모양이다. 태양이 다시 눈을 내려감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마도 재인의 투명하도록 맑은 미소였을 것이다. 캄캄한 밤, 쏟아붓는 빗속을 달리는 버스에서도 그토록 깊고 편안한 잠 속에 빠질 수 있었던 걸 보면. 가슴 속에 굳은살이 박힌 단단한 어른이 되려면, 아프지만 치열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쳐야 한다. 그 날, 그래도 아프지 말라며 자신을 꼭 끌어안는 태양에게 재인이 그랬었다. '괜찮아. 지금 아프다는 건 내가 그만큼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아픈 건 강해지는 과정이다. 힘들다는 건 튼튼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미 그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벌써 포기했거나 졌다면 더 이상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을 테니까. 재인이 일깨워준 그 사실로 인해, 조금 더 강해진 자신을 느끼던 열여덟의 태양이…… 그 날 분명 있었다. 비록, 먼 훗날 그 말을 그대로 다시 재인에게 들려주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서툰 질문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둑어둑해지자 의문에 의문에 빠졌다. 한참을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입 안에서 맴돌고 맴돌던 이름에게 물었더니, 대답도 머리 속에서 도망갈 채비를 한다. 머리를 감싸쥐고 현관 앞에 주저앉아, 나는 또 다시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16. "그래서, 방세 대신 넌 뭘 주는데? 몸 대주냐?" "……." "무슨 뜻인지 몰라? 아아! 혹시 넌 너어어어무 고상해서 이런 표현은 상상력이나 이해력으로도 커버가 안 된다는, 같잖은 어필 중이시냐?" 그렇다. 정확히 짚었다. 나도 쑥맥이 아닌 이상, 지효 입에서 나온 저 '몸 대준다'는 표현이 뭘 의미하는지 안다. 하지만 안다는 티는 절대 안 낼 거다. 절대! 저 기집애,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얼굴 붉힐 때까지 난 끝까지 순수 연기를 고수할 거다. "하이고, 여재인! 숫총각도 아니면서 내숭은! 알았다, 그래!" 경악한 내 표정을 보고는 금세 수그러든다. 뭐 완전히는 아니고. "미안하지만, 난 소설가라서 표현이 좀 직설적이야." 저럴 때마저도 소설가 운운하다니. 갖다붙여도 너무 안 맞다. 진짜 소설가라면 표현력이나 구사 언어가 더 다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째 나오는 말마다……. "저속한 거겠지." "통속 소설가거든." 한 마디도 안 지는 건 나랑 닮았다. 성지효. 내 재수학원 친구이자, 대학동창이다. 오늘 억만 년만에 전화를 걸어와서는 자기 집에 놀러 오라 했다. 내가 연결해준 황 감독과 곧장 대본 작업에 들어가느라 그 동안 좀 바빴다면서. 지금 그녀는, 소파에 앉은 내 발밑에 제멋대로 엎드리고 누워서는 손끝에 침을 묻혀가며 성의 없이 잡지를 넘기고 있다. "뭐하는 작자냐?" 지나가듯 툭 던지는 질문. 하지만 나는 안다. 지효는 지금 꽤 진지하다. 궁금해서 몸이 달아 있지만, 꾹 참고 있는 거다. 그래서 보지도 않는 잡지를 넘기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거다. 왜 안 그렇겠는가? 며칠 전만 해도 애인한테 배신당하고 다 죽어가던 친구가, 같은 집에서 완전히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는데. 당장 내게 전화해서 이것 저것 물어대지 않은 건, 황 감독과의 작업이 꽤 호흡을 맞출 가치가 있었다는 얘기다. "운전한대." "버스? 택시?" "말고 비행기." "그럼 운전사가 아니라 조종사네." "뭐가 다르냐?" "다르지. 연봉이 많이 착하지. 그나저나 파일럿이면, 바람둥이겠다." 편견쟁이 소설가 같으니. 저러니 맨날 출판 거절을 당하지. "그거야 나랑 상관 없고." "지랄! 여재인, 재수 없어!" 담담하게 대답했더니, 지효는 갑자기 나를 쪽 흘겨보며 외친다. "뭐가?" "믿을 구석도 없으면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너의 그 자신감." "너야말로 지랄." "왜 남의 욕 표절해?" 지랄이 지꺼야? 표절 좋아하시네. "내 경우는 자신감이 아니라 무관심이겠지. 그 녀석하고는 사귈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남태양이 바람둥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는 뜻이었어. 이 바보야." "너! 내가 그 욕 하지 말랬지? 아우, 씨. 바보가 소설 쓰는 거 봤냐? 어! 니가 봤어!" 지효가 발끈하는 걸 볼 때마다 느낀다. 내가 바보란 욕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 '똑똑한 형제들이 바글거리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재수한 막내'. 이건 지효와 내가 공동으로 거머쥔 불운의 타이틀이다. 지효의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이 단순한 단어의 효과는 언제나 만점이다. 벌떡 일어나 앉은 지효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혼자서 진정하느라 심호흡을 두어 번 하더니 다시 물어온다. 역시 되게 되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왜 안 사귀는데? 못 생겼어?" "인간 같지도 않아. 완전 조각품 같아." 더 정확하게는 사이보그지. '인조인간 로보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럼 왜 손을 안 대겠다는 건데? 키가 작아? 뚱뚱해? 아니지 파일럿이면 건강하겠다, 신체도 평균 이상으로 어여쁠 테고. 혹시 잘 안 씻고 더러워? 너 그거 질색하잖아. 아니면 성격이 완전 지랄이야? 너 끈적끈적한 타입엔 멀미하니까." "잘 씻어. 깨끗해. 신체 잘 나셨고, 성격도 완전 쿨해. 쿨하다 못해 동상 걸릴 정도야." "그런데 왜에에에에?" 꼭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에이, 자존심 상하게. "우선!" "그건 좀 내리고 말하지." 손가락 하나를 나도 모르게 들어올린 모양이다. 지효가 눈을 빛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내 손을 가리킨다. 나도 지효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가 머쓱해져서 소파와 허벅지 사이에 손을 묻었다. "내가 필요할 때 곁에 있을 확률이 낮아. 한달 중에 반은 우리나라에 없을 테고. 와도 시차 때문에 잠만 잘 테고. 그럼 난 그가 집에 있는 동안에 숨 죽여가며 조용조용 걸어야 할 테고. 매번 떠나는 뒷모습에다 억지로 손을 흔들며 바이바이 해야 할 텐데. 으으으, 싫어. 난 금방 말라죽을 거야." "대신 그 사람 없는 동안 마음껏 네 일을 할 수 있잖아. 대신 침대 속에서 하루 종일 같이 뒹굴 수도 있잖아. 대신에 공항에 마중나가서 매번 영화 찍으면서 포옹할 수도 있잖아. 시끄러운 것 질색하는 애가 지금 집안에서 살살 걸을 걸 걱정하니? 너 머리로 연애해?" 우리 지효, 답답한가 보다. 저 표정 지을 때마다 이마에 살짝 주름이 가곤 하지만, 지금은 앞머리가 덮수룩하게 내려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끌어안고 있던 커다란 쿠션 위에 턱을 얹으며 대답했다. "연애 안 해." "왜 안 해?" 지효의 가느다란 눈이 나를 예리하게 쳐다본다. 알면서 물었을 게다. 그녀가 알고 있단 걸 내가 안다는 것마저도. 그렇다 해도 나는 우리 둘 다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듯 또박또박 대답한다. "또 쓰러지면, 일어나지 못할까 봐." "……!" "또 버림 받으면, 살고 싶지 않을까 봐." 상처가 용기를 앗아갔다. 한 번 쓰러져 바닥을 짚어본 사람은 무릎으로 스며든 그 딱딱한 냉기의 감촉을 잊지 못하는 법이다. 비록 무너진 자존심과 가슴에 맺힌 모멸감은 언젠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그게 결심대로 되는 거면, 나도 너도 이렇게 안 살지." 지효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을 때,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재인아." "응?" "……." 지효가 무슨 말인가를 입안에 넣고, 뱉기를 망설이는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쿠션에 뺨을 기댄 후에야 가만히 눈을 떴다. 시선을 피하고 있어도, 지효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건 의식한다. "너 고3 때 머리 뚜껑 열렸었다는 거 그치도 아냐?" 뇌수술을 말하나 보다. 아주 길고 추웠던 그 해 가을을 얘기하나 보다. "아니." 내 짧은 대답에 지효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나는 걱정 돼. 혹시라도 그 사람이 무슨 의도를 갖고 너한테 접근한 건 아닐까 하고." "같이 살자고 먼저 빌붙은 건 나야. 잊었어?" "아무튼! 니가 좀, 뭐 아주 조금 귀엽긴 하잖아. 그래서 널 내내 노리고 있다가 그 집에 이사온 게 아닐지. 스토커 같은 거 말이야. 상우도 혹시 그 사람한테 납치된 건가 싶고. 갑자기 사라지다니, 뭔가 이상하잖아. 그렇지 않냐?" 지효는 상상력 풍부한 소설가다. 그러나 현실과 논리를 배제하지 않는 소설을 쓴다. 때문에 필력은 좋은데, 대중에겐 참 인기가 없는 소설가다. 현실 직시를 강요하는 소설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요즘 꽤 드무니까. "성지효." "아, 왜 무섭게 성까지 붙여 부르고 난리야?" 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낮게 이름을 부르자, 바닥에 깔고 앉은 러그 귀퉁이를 확 비틀며 지효가 투덜댔다. 나는 쿠션을 소파 구석에 던져 버리고 그 위에 사뿐히 엎드리며 말했다. "내가 제일 이상한 건……." "……?" 상우보다도, 태양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왜 남태양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딱 이거야." 아무리 뇌를 갈아 엎었다 해도, 이건 좀 이상하잖아.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중엔 생생한 것도 많아. 날 모른다는 놈들을 내가 먼저 기억하기도 하는 걸. 그런데 유독 길고 어두운 터널처럼 바로 여기에, 뇌 말고 이 심장 근처에 구멍이 뚫려 있어. 남태양이라는. 그 곳에 바람이 들면 가슴 한 구석이 못 견디게 막 시려 와. 이가 딱딱 부딪치고,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더 할 수 없을 만큼 춥고 아파. 그를 만난 후로, 내 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그 터널의 입구가 열려 버린 것처럼 말이야. "자고 가." 신발장으로 나서는 나에게, 지효가 팔짱을 끼고 서서 말했다. 낮엔 쨍 하고 해가 들더니 어느 새 흐리고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듯 하늘 뒤바뀌는 건 금방이다. 때론 세상 변하는 것도 그렇게 느낀다. 한때 나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사람 변하는 게 제일 더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잘 모르겠다. "신세 지는 건 한 사람한테만 할래." "그게 왜 하필 그치냐?" "……글쎄." 왜 태양일까? 기억도 나지 않는 동창인데. 지효 말대로 그가 스토커일지, 거짓말쟁이일지 그건 아직 모른다. 낯설고 무뚝뚝한 그에겐 그 흔하디 흔한 친근함마저 가지기 힘들다. 대체 왜일까? 내가 그를 의지하는 이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단지 그가 현재 내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그냥 어느 새 믿게 됐다. 아무도 그를 믿으라 강요하거나 보증한 적 없는데, 스스로 믿었다. 역시 이상한 건,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지효는 고집스럽게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당부를 잊지 않는다. "졸업앨범이라도 뒤져 봐. 남태양이라는 인물이 정말 있었는지." "응. 좋은 생각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래도 뭔가 미진했던지 녀석은 자꾸만 말을 덧붙인다. "황 감독 시나리오 완성되면 내가 한 턱 쏠게." "겨우?" 내가 짐짓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면, 지효가 씨익 웃는다. "네 일자리는 벌써부터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거거든. 비즈니스 빚은 비즈니스로 갚아야지." 씩씩하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쌀쌀한 기운에 헐렁한 청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얇은 티셔츠 한 장이 서러운지 어깨는 자꾸만 움츠러든다. 그러고 보니, 어둑해진 거리를 걸어보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상우를 잃고 태양에게 업혀갔던 그 날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아마도 그럴 거다. 삑, 삑, 삑, 삑, 삑. 삐리릭. 덜그덕, 덜그덕. 이게 벌써 몇 번째 시도인지 모르겠다. 집 현관 앞에 서서 무수한 많은 숫자들을 눌러보고 손잡이를 잡아 흔들어대다, 결국 열만 잔뜩 오르고 지쳐 버렸다. 나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먹통. 말미잘. 바보. 나는 어리석은 자신을 향해서 욕을 해대기 시작한다. 애꿎은 태양도 그 비난을 빗겨갈 수 없다. 무심한 놈! 내가 현관 비밀번호를 묻지 않으면 자기가 먼저 알려줬어야지. 문득, '내가 왜?' 하고 되물는 태양이 상상이 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이고, 머리야.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고 만다. 처음이다. 그가 없을 때 외출을 하고, 그가 없을 때 집에 돌아온 일.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이 집에 들어오기 위해 내가 직접 번호를 눌러야 했던 적이 없다. 열쇠를 공유하듯이 현관의 비밀번호를 물어본다는 생각은 미처 못한 거다. 아까 집을 나설 때는, '어. 자동으로 잠기네.' 하며 신기해하긴 했지만. 어후! 이 왕 바보! 나는 무릎에 팔을 얹고 그 위에 이마를 대며 다시 한 번 욕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지효네 집에서 자고 올 걸! 그렇게 잘 난 척 단칼에 자르며 뿌리치지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를 잠시 했다가, 밤새 대본 쓸 지효에게 방해 될 게 뻔하다는 생각에 다시 그 후회를 철회했다. 그랬다가, '괜히 보자고 날 불러내서는 이 고생이야!' 이젠 지효까지도 원망스럽다. 같이 살기 시작한 지난 열흘 동안 태양이 집에 머문 시간은 겨우 나흘에 불과하다. 파리로 간다며 떠난 게 지난 주말이니까 그가 언제 올지 나로서는 감도 안 잡힌다. 아아, 생각해 보니까 돌아올 땐 홍콩도 들렀다 온다고 했던 것 같다. 젠장! '졸업앨범이라도 뒤져 봐. 남태양이라는 인물이 정말 있었는지.' 문득 지효의 말이 생각났다. 아까는 무심히 들었던 그 말이 좋은 빌미가 되어주지 않을까? 내 고등학교 졸업앨범이 있는 곳. 지난 3년 동안 가지 못한 곳. 나는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나 부모님 댁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내가 스물네 살까지 살았던, 너무나 익숙한 그 동네로 말이다. 초인종 버튼이 하얗게 닳은 부분에 가만히 검지 끝을 갖다댄다. 캄캄한 어둠이 내린 골목에는 가로등이 희미한 불빛을 힘겹게 뿜고 있다. 낡은 초인종 버튼만큼이나 익숙한, 근처에 딱 하나 있는 전봇대 위에 달린 등이다. 나는 손끝이 제멋대로 떨리는 걸 바라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꾹. 일부러 힘 주어 누른 다음, 집 안쪽에 울려댈 벨소리를 떠올린다.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이 자리에 내가 서 있었던 기억이 아득하다. 심장이 응석을 부리듯 쿵 쿵 가슴 안벽에 제 머리를 박고 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다녀가라 하셨잖아. 이젠 자주 오라 하셨으니까……. 스스로를 위로하듯 낮게 중얼거리는 순간, 철컥 하고 대문이 열렸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열어준 사람은 분명 해인이 형일 거다. 그리고 형은 지금 오토메이션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을 거다. 집을 나올 때 유일하게 내 뺨을 후려쳤던 형은 단 한 번 큰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그 어떠한 말이나 몸짓으로도 말리지 않았었다. 해인이 형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것은 오직 그 한 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난 3년 동안 다른 형들처럼 가끔 용돈을 쥐어주러 찾아오거나 밥이나 술을 같이 한 적도 없다. 네 결정은 네가 책임질 일이지만,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아. 아마도 그 뜻이었을 것이다. 내 눈을 행해 형의 눈이 그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서로 가장 잘 이해하는 형제였다. 끼익.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넓지 않은 앞마당으로 비뚤비뚤하게 놓여진 돌들이 현관까지 이어져 있다. 문을 열면 환한 거실 불빛을 등지고 해인이 형이 바로 앞에 서 있다. "형. 나 왔어." "알아. 보고 있잖아." 바보 같은 내 말에 한심하다는 듯 대답한 형의 얼굴이 가까이 있다. 까만 뿔테가 걸쳐진 콧등이 찌푸려진다 싶더니, 슬쩍 비켜 서 준다. 조용한 집안으로 걸어들어가는 내 걸음이 어색하기 그지 없다. "다들 이성이 형 출판기념회에 몰려 갔어." 가족들의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게 형이 짧게 알려준다. 이성이 형은 우리 집 둘째로 본명은 태인이다. 여태인. 돈도 안 되는 그림 그릴 거라고 나보다 3개월 먼저 가출했던 형이기도 하다. 착하고 여린 형에게서 그런 뚝심과 고집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는데, 지금은 어엿하게 삽화가로 성공해 책도 내고, 가족들에게서 인정도 받나 보다. 부럽냐고 물으면, 그냥 기쁘고 슬프다고 말하겠다. 태인이 형이 잘 되서 기쁘고,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라 슬프다고. "밥은 먹었냐?" "아니. 뭐 좀 찾아볼 게 있어서 왔어." 내 대답에 해인이 형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금세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슬리퍼를 끌고 부엌으로 향하며, 내 방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 쓰던 그대로다. 들어가 봐." "응. 저기, 형……." 망설이듯 부른 내 음성에 해인이 형은 몸을 돌려 날 바라봐 준다. 그 무표정한 눈빛이 누군가를 닮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 "……미안해." 못난 동생 때문에 형 많이 속상했다는 거 알아. 어렸을 적부터 아프고 힘들 때마다 내 곁을 지켜준 형인데, 나는 언제나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서 미안해. 내색 안 하는 형 심정 다 알면서 모른 척 해 버려서 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라서 미안. 여전히 행복하지 않아서…… 정말 정말 미안. "불쌍한 자식!" 움찔. 나는 형이 뱉어낸 그 단어에 놀랐다. 눈을 들자 주먹을 꼭 쥐고서 날 노려 보는 형의 입술이 아주 꽉 다물려 있다. 형의 까맣고 유난히 부드러운 뺨 위로, 웃을 때마다 생기곤 하던 보조개가 보인다. 하지만 형은 지금 웃고 있는 게 아니다. "아니야." "뭐가 아니냐, 이 자식아!" "불쌍하지 않아, 형. 난 강해지고 있는 거야." "……!" 며칠 전 태양이 내게 말했었다. 심술궂게도 내가 맵고 쏘는 것만 모아 만든 쌈을 내밀자, 그걸 받아 꼭꼭 씹어 넘기며 그는 충혈된 눈으로 날 바라봤었다. 전혀 불쌍하지 않다고. 지금은 강해지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힘겨운 이 순간만 잘 넘기면, 그 시간들을 양분 삼아 더 꼿꼿이 설 수 있다 했다. 해인이 형은 한 동안 나를 뚫어질 듯 쳐다보더니, 척척 걸어왔다. 그리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 강해져라, 여칠성. 너는 임마, 예전부터 심하게 강했어! 옆에서 보고 있으면 신경질 날 정도로!" "……!" "알겠냐?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강해져도 된다. 제발 좀!" 먼지 하나 없는 책장에서 두꺼운 졸업앨범을 꺼내 펼쳤다. 흑백과 칼라가 적절히 조화된 고급스런 양장을 쓰다듬으며 이 앨범 한 권이 얼마나 비쌌는지 떠올린다. 하지만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이제는, 같이 투덜댔던 친구들 얼굴마저도 희미하다. 3학년 때 나는 6반이었다. 때문에 앨범의 중간 부분부터 펼쳐 가만 들여다본다. 심술궂은 표정의 승진이, 어색하게 앞머리를 옆으로 넘긴 선민이, 웃을 듯 말 듯한 재훈이, 학구적인 사각 안경을 쓴 무표정한 인학이……. 더러 보이는 얼굴 중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 녀석들도 꽤 있다. 그런데 남태양이란 이름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나는 앨범을 들고 침대 위에 털썩 내려앉았다. 그리고 첫 장부터 차근차근 넘기기 시작했다. 혹 그가 착각해서 나와 같은 반이라고 우긴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분명 고2, 고3 때 나와 같은 반이라고 했는데, 나는 다른 반 녀석들과도 서먹하게 지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 바지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으로 앨범을 잡고 다른 손으로 폴더를 펼쳤다. "여보세요?" "칠성이냐? 지금 어디야? 집이라며!" 다급한 음성의 일성이 형이 다짜고짜 내게 소리친다. 집인 줄 알면서 어디냐고 묻기는 왜 물을까? 당황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싸가지 여해인이 방금 전화했더라. 너 집에 왔다고. 저녁은 일단 싸가지 오성이랑 둘이 먹고 있어. 우리도 금방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 참! 오늘 자고 갈 꺼지?" 옆에서 당연한 걸 왜 묻냐고 소리지르는 태인이 형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대답 안 해? 재인아! 형 말 들려? ……아씨, 넌 좀 가만 있어 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괜히 시덥잖은 책 낸다 지랄을 해가지고 막내가 집에 왔는데, 나는 여기서 다 시든 초밥 껍질만 벗겨 먹고 있고! 새끼야, 저리 가 좀! ……여보세요? 막내야!" "형, 귀청 떨어지겠어." 태인이 형이 구박받는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서 나는 되려 첫째 형에게 투덜거렸다. 보지 않아도 일성이 형 근처에 몰려와 딱 붙어 있을 가족들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가 아프다거나, 넘어지거나, 고민할 때마다 항상 그랬다. 내 신음 이상으로 끙끙 앓아대는 호들갑 패밀리. 갑자기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내가 무엇을 잃었었는지 새삼 가슴에 와박혀서 마음 속엔 죄스러움만 가득 찬다. 전화를 끊고 다시 앨범을 뒤적이던 나는 한참 후, 해인이 형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저녁 먹자는 말은 안 해도 아까부터 찌개 냄새가 솔솔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탁. 앨범을 덮고 일어난 나는, 맞은 편 거울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가 없다. 남태양은 우리 학교 졸업생이 아닌 게 분명하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너무 오랜만이라 내 방, 내 침대지만 잠을 설치고 말았다. 새벽까지 부모님과 형들이 벌인 술자리에 앉아 버티다가, '쟤 넘어간다.' 라는 해인이 형의 짧은 한 마디에 부랴부랴 내 방으로 밀어넣어졌다. 그 동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가족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생각에 많이 긴장했던지, 피로가 무겁게 머리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푹 휴식을 취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나는 여전한데, 가족들은 그걸 모른 체 했다. 모른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가족들의 조마조마한 시선이 없는 곳으로. 무작정 옷을 갈아입은 나는 오래 전의 내 방을 나왔다. 그리고 점점 밝아오는 미명에 의지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쪽지라도 남기기 위해 문갑을 열어 펜과 종이를 찾았다.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익어서인지 둘 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화장대 서랍을 닫다가 통장 뭉치를 발견하고, 여전히 저축을 많이 하시는구나 생각했다. 엄마의 알뜰함은,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일곱 아들 모두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키우는데 단단히 기여했다. 고맙고 죄송한 마음에 나는 한참을 잠든 두 분의 얼굴을 들어다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흰 종이 위에서 망설이는 펜 끝에 집중했다. 메모지는 볼펜 똥같은 점들만 꾹 꾹 찍혀 시간이 지날수록 지저분해지고 있었다. 결국 내가 쓰고 나온 것은 그 무수한 점들보다도 못한 문장이었다. - 저 갑니다. 또 올게요. 재인. 단지 하룻밤을 비웠을 뿐인데,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가속이 붙는다. 비밀번호를 몰라도, 그 문 앞에 주저앉아 있어야 한다 해도 그 쪽이 속은 편했다. 로비를 통과할 때 놀란 눈으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는 경비 아저씨를 만났다. 나도 모르게 덩달아 기분 좋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네." 날 학생으로 깜빡 착각하셨나 보다. 양복 차림일 때는 저렇게 반말하신 적이 없는데. 나는 새삼스런 눈으로 내 차림을 내려다본다. 청바지에 얇은 티셔츠 한 장. 파란색 스니커즈. 꼭 돈 없고, 시간 많고, 할 일 없는 여름방학 중의 대학생 같다고 쓰게 인정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802호 현관 앞에 선 나는 조금 놀랐다. 지지대가 내려진 현관문이 약간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오늘 돌아왔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건가? 설마 도둑은 아니겠지? 도둑이 간도 크게 문을 열어놓진 않을 테니까. 나는 천천히 문을 잡아 열고 지지대를 올렸다. 등 뒤로 문을 닫자, 자동으로 잠기는 전자음이 조용한 공간에 울린다. 문 앞에서 하염없이 태양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엄청 다행스러워야 하는데, 좀 이상하다. 이건 마치 불온한 정적 같다. 나는 어지럽게 죄다 열린 욕실과 방문들을 돌아보며 내 방 쪽으로 걸어간다. 흘끗 쳐다 본 식탁 위에는 와인 두 병이 깨끗이 비워져 있다. 흐릿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방문을 급히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깜짝, 정말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도로 깜짝 놀라고 만다. "남태양! 일어나!" 내 외침에 아랑곳 없이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그가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온통 사납게 휘저어진 내 옷장과 책상 위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여기서 그는 무슨 짓을 한 걸까?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나직하게 신음하는 태양을 내려다보았다. 거무스름하게 돋아난 수염이 왠지 위험스럽게 보여서 깨울 엄두를 못내고 있다. 그래도……. "남태양! 이 사기꾼! 스토커 자식! 당장 안 일어나!" 팔을 잡고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집주인이면 다야? 동창도 아닌 게 동창이라고 속이고!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나쁜 놈! 내가 뭘 어쨌다고 남의 방을 이렇게 휘저어 놔!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와중에도,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자고 있는 그가 너무 무섭다. 이런 일을 처음 겪어 보는 나로서는 갑자기 그가 너무 낯설다. 원래부터 낯설었는데, 그보다 더욱 더 낯설어졌다. 눈가가 뻘개지는 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올라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이 아프다. 정말로 화가 나서 그렇다. 서러움이 밀려왔다거나 절망스러워서 그런 거 아니다. 그를 어리석게 믿었다는 게 억울해서 이러는 것도 절대 아니다! 거칠게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그를 흘겨보자, 어느 새 가늘게 눈을 뜨고서 그도 나를 노려보고 있다. 태양의 얼굴에서 서서히 잠이 달아나는 기색이 보이자, 나는 있는 힘껏 그의 뺨을 철썩 내리쳤다. "헉!" 바로 다음 순간 터진 건 그의 비명이 아니다. 내 것이다. 생각보다 세게 손이 나가는 바람에 엄청 아프게 때려 버렸다. 내 손바닥이 다 얼얼할 정도니까 태양으로선 돌아오던 정신도 달아났을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는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남태양은 나를 뚫을 듯 보기만 한다. 마치 어제 가족들이 간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시선과 비슷하다. 내가 함께 있다는 거, 바로 여기에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다는 눈빛. "방금…… 뭐라고 했지?" 낮게 쉰 음성이 내게 묻는다.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다. 그는 턱 주변으로 나 있는 수염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다가, 그 손을 그대로 들어올려 이마를 짚고, 다시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그러한 움직임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나는 재차 묻는 그를 화들짝 쳐다본다. "방금…… 머, 뭐?" "날 뭐라고 불렀냐고 물었다." "사, 사기꾼?" "그리고." "스, 스, 스, 스토커?" 잠든 척 하면서 들을 건 다 들었나 보다. 젠장! 다음엔 절대 속지 말아야지. 비겁한 놈! "진심인가?" 여전히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어오는 바람에, 나는 아무리 진심이었다 해도 인정할 용기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보일 듯 말 듯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나는 약삭빠르게 말을 돌려 버린다. "그런데 지금 내 방에서 뭐 해?" "……." 그는 입술을 꾹 다문다. 대답하기 싫다는 뜻인가? 나는 새삼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옷장을 흘끗 눈짓했다. 그의 시선을 그리로 유도해 죄책감이든 변명이든 갈구어낼 의도로. 하지만 그는 마치 못 박아 놓은 것처럼 시선을 내게 단단히 고정한 채 다시 물었다. "어제 어디서 잤냐?" 평범한 질문 같은데, 팍 쉰 음성의 무게 때문에 힐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나, 남이사." 자존심 상하게 또 더듬고 말았다. 한심하다, 여재인. 태양은 아주 깊은 한숨을 푹 내쉰 후 긴 침묵을 유지하다가, 내가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불편해졌을 때에야 툭 말을 던졌다. "다음에 또 외박할 때는 메모라도 남겨." "왜?" "……!" 나의 질문이 예상 외였나 보다. 어어, 요거 봐라. 놀랍게도 그가 시선을 피한다. 서로 사생활 침해하지 말고, 되도록 상관하지도 말자 한 건 그였다. 말똥말똥 쳐다보는 내 얼굴이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 버린 태양은, 이어서 믿을 수 없는 말을 술술 잘도 뱉어냈다. "내 돈 떼어 먹고 도망간 줄 알았잖아." "뭐어! 너……! 너, 날 어떻게 보고!" 하얗게 질려서 벌떡 일어난 내가 숨 넘어갈 듯 소리를 지르자, 그도 따라 일어나서 나를 찍어누를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 본다. 제기랄! 이 놈의 방은 너무 좁고, 그는 너무 크다. 당연히 내가 밀린다. 그냥 앉아 있을 걸. 후회막심이다. 태양은 비웃듯이 입술을 한 쪽만 밉게 올리며 차갑게 물었다. "너 나 모른다며? 그런데 나는 왜 너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나는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해. 정직한 사람이야. 갚는다면 갚는다고!" "그래? 그렇게 장담한다면야 믿어 주지. 더 인심 써서,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도 믿어 주겠어. 하지만 앞으로 메모는 꼭 남겨. 안 그럼 곧장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저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잘도 뱉어낸다. 동창이라고 내내 주장한 주제에 매정하기가 이를 데 없다. 나쁜 놈! 뭐 이런 놈이 다……! "남태양. 그러는 넌 왜 거짓말 했어?" 지친 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나는 분을 억누른 채 물었다. 흘끗 돌아보는 눈길이 너무나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착 깐다. 다음 말을 기다리며 서 있는 태양 쪽을 쳐다보지 못하고,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꼭 누르면서 따지듯 말했다. "너 내 동창 아니잖아. 졸업 앨범 어디에도 너는 없었어." "뭐……!" "다시 말하자면, 남태양 너는 내 추억 속의 인물이 아닌 걸로 판명이 났다는 얘기야." <읽고, 새기고, 버리다> 네 모습. 내 마음 속에 적어두고 편지 읽듯 조심스레 꺼내어 읽고, 또 꺼내어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어느새 다 헤진 내 마음 너덜너덜해져 버리면, 이 미련도 그만 사라져줄까? 17.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지금 이 순간만큼 뱉은 말을 도로 물리고 싶었던 적이 없다. 물론 간간히 말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떻게든 수습하고 무마할 수 있는 정도에서 그쳤었다. 그런데…… 방금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납빛으로 파랗게 질리는 태양의 표정 아래에서, 붉은 핏기가 싸악 가시며 하얗게 질리는 그의 입술 앞에서, 나는 심장이 뚝 멈춘 듯한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머리 속에 석회질이 잔뜩 낀 것처럼 선명하지 못하다. 남태양. 너는 졸업앨범에 없었다. 현재 내 기억 속에도 없다. 그러니 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네가 내 추억 속의 인물일 리 없다. 아마 그렇게 말했을 거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데 태양은 왜 이리 금방 무너질 것처럼 나를 보며 서 있을까? 거짓말이 탄로나서? 아니면 혹 내가 너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건가? 하긴 우린 중학교 동창인지도 모르지. 초등학교일수도 있고. 유치원도 가능해. "다시 한 번 말해 봐." 좀전까지도 쉬어 있던 그의 음성이 이젠 음산할 정도로 낮고 느리게 흘러나왔다. 결국 팔을 타고 기어이 소름이 올라온다. 아니 그보다 나는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리고 싶다. "널 찾을 수가 없었어." 내 목소리도 입술을 타고 낮게 흘렀다. 하지만 태양의 것보다 훨씬 가늘고 힘이 부족하다.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 번도 넘게 꼭 꼭 짚어 봤는데, 네가 없었다고."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닐 텐데, 가슴 한 구석이 저리고 손에 땀이 맺힌다. 태양은 나가려던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완전히 얼어버린 것 같다. 털썩. 결국 나는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만큼의 긴장감을 견딜 만큼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입맛을 잃은지도 오래고, 잠을 자지도 못해 요즘 자주 어지럽다. 그제야 그도 흘끗 시선을 내려 나를 내려다봤을 것이다. 가차 없는 눈길이 상처 입은 사자처럼 제어되지 않는 분노를 품고 내게 떨어진다. "네가 머리 속에서 이미 지워 버린 나를, 고작 그 몇 장의 종이묶음으로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나?" "……!" "여전히 착각 속에 사는구나, 여재인. 거기에 내가 있으면, 뭐가 달라지지?" "남태양……." "그래! 그게 내 이름이지! 그런데 너는 내 이름은 알아도 날 기억하지는 못해! 졸업앨범 속에서 내 사진을 봤다고, 과연 너의 그 똑똑한 머리가 날 기억해냈겠어? 어림도 없을 걸! 고작 내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겠지. 안 그래?"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음성 앞에, 나는 내 밑의 땅이 흔들리는 기분을 느낀다. 틀린 것 없는 그의 말이 내 가슴 속 터널을 사포로 문지르듯 거칠게 통과한다. "뭘 증명하고 싶은 거냐, 여재인! 너는 날 까맣게 지웠으면서, 너를 기억하는 나를 탓하는 건가?" "아니야……." "물론 아니겠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겠지! 지금 너는 날 이용해야 하니까! 이대로 내 도움을 받는 게 안전한 건지 체크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런……!" "그런데, 뭐야? 졸업 앨범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사기꾼이 된 건가? 니가 그렇게 매력이 넘쳐 나?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스토커가 붙을 정도야!" 태양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아프게 살갗을 파고들던 그의 비난이 단번에 내 심장을 꿰뚫는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잠시 후 허탈해진 듯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군말 없이 받아주니 내가 수상했나 보군. 하! 내가 널 좋아한다고 착각해 버렸어! 안 그래, 여재인?"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절대로 아니야! 내 얼굴에서도 그의 얼굴 못지 않게 핏기가 사라진지 오래다. 썰물처럼 싸하게 물러가는 바람에 버석하게 갈라지기 시작한 가슴이 탄다. 그의 시선 아래 있다는 건 마치 강한 햇빛에 붙들려 강제로 말려지고 소독되는 기분이다. 죽도록 따갑고, 못 견디게 수치스럽다. 흐흑!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아니 맞을 거야. 어떤 이유였든지 간에 결국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무뚝뚝하지만 소리 없이 배려해주는 네 도움이 내게 절실한 만큼…… 불안했을 거야. 어느 새 네가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는 확인이 필요했을 거야. 난 믿고 싶었으니까. 이미 널 믿고 있는 내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확신 말이야.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배신도 한 사람이 두 번 당하지 않는다는 믿음 같은 거. 그래서 또 한 번 상처 입는 일은 없을 거라고, 지금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를 설득해야 했으니까. 뭐가 달라지냐고? 달라지는 건 없어. 네가 내 동창이든 아니든, 지금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미안해." 아까부터 빨갛게 충혈돼 있던 눈에서 툭 툭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주저 앉아 고개를 숙인 내 손등으로 소리까지 요란한 눈물이 내리고 있다. "남태양. 미안해." 그렇게 상처 입은 표정 짓지 마. 이렇게 사과할 테니까. 나는 그저 너를……. "기억하고 싶어. 나도……." 알고 싶다. 내 가슴 속에서 입구를 열어 버린 긴 터널이 왜 생겼는지. 네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어. 알았으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내 추억 속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 그저 신랄하게 부정될 줄 알았나 봐. 남태양 네가 그래주기를 내내 바라고 있었나 봐. 나도 모르게. 참 어리석게도. "믿어 줘. 흑. 흐흑. 웁.." 말을 뱉어내는 순간 울음이 저 혼자 댐을 넘는다. 왜 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 이리도 서러운 걸까? 울고 있다는 게 부끄러워서 재빨리 손으로 입술을 눌렀다. 말하다가 숨 멈추기를 계속 반복했더니 이젠 딸꾹질까지 나온다. "나는 궁금해서……. 흐읍! 너, 어떤 모습이었는지……." "……!" "지금하고 어떻게 달랐는지. 아니면 똑같았는지……. 그 시절의 나를 너는 안다는데 나는 너를 모르니까…… 알고 싶어서……. 흐흐흑!" 그런데 도저히, 그 앨범에 태양이 없어서 섭섭했다는 말까지는 할 수가 없다. 나는 겨우 겨우 울음을 누르고 있었고, 태양은 그런 날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아아, 비참해. 정말 바보 같다. 세상에 둘도 없는 천치가 바로 나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주제에, 더 잃어 버릴 건 없나 찾는 놈처럼, 분수도 모른 채 그를 할퀴고, 이기적이게도 이젠 또 그 앞에서 혼자 울고 있다. 무작정 용서하라고 떼를 쓰는 꼴이다. 세상이 흔들린 것 같은 기분이 너무도 아찔하여,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가 정도도 되짚지 못한다. 그가 왜 화를 내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따위는 벌써 희미해지고 나는 그저 태양이 나를 용서하기를, 내가 그에게 용서받기을 바라고만 있었다. "미안해. 끅, 끅. 남태양, 난 그냥……. 흐흑. 나는……." 울음은 쉬이 그쳐질 것 같지 않다. 줄곧 누르고 눌렀던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올라와 아우성을 친다. 병목 현상이 일어난 목구멍 쪽이 터질 듯이 아프고 뻐근하다. 이건, 삼키려는 나와 분출하려는 울음사이의 소리 없는 전쟁이다. 후우우. 그 때, 낮지만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지만, 줄곧 나를 노려보던 그가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것이다. 눈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내 양쪽 뺨을 잡고 위로 들어올린다. 억지로 마주보게 된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다 게워내지 못한 분노는 아마 저 뒤에 가려져 있을 거다. 나는 새롭게 치받기 시작하는 울음의 파도를 느꼈다. 내 몸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라, 나는 벌써 쓰러질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 낌새를 먼저 눈치 챈 태양이 놀랍게도 내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온 몸이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더 꼬집힌 곳이 아팠다. 눈썹을 모으고 그를 보는데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 또 그래서인지 울컥 치솟던 것이 어느 새 무시되고 정신이 좀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울면 더 못 생겨지는 여재인." 나쁘다, 남태양. 끝까지 못 됐다. 너 매력 없다, 대단치도 않다, 그렇게 소리 지른 걸로도 아직 분이 덜 풀렸나 보다. 그는 지금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난 데다 눈까지 빨개서 굉장한 위험인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태양에게서 나는 목소리라고 하기엔 이상하도록 말투는 조용하고 단정했다. 축축하게 젖어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자, 입술을 가까이 가져오는 그가 보인다. 조금은 얼이 빠진 것처럼 원망스런 눈빛만 가득 담고서 나는 그를 쳐다보고 있다. 속삭임에 가까운 태양의 음성이 소금기 어린 눈물에 흠뻑 젖은 내 얼굴을 스친다. "일이일이 공일일공" 갑작스런 외계어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으, 응?" "따라 해. 1212 0110." "일이일……." 그, 그게 뭔데? 굳어버린 머리로는 거기까지밖에 못 읊겠다. 태양은 오늘 처음으로 피식 웃음을 풀어 놓는다. 조금 멍한 나는 그 웃음에라도 매달릴 채비를 한다. 뒷부분을 이어서 다시 반복해주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애잔하다. "내 집 현관 비밀번호다. 하루살이 기억력이라도 이건 외울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고 태양은 날 놓고 일어섰다. 키가 커서인지 갑자기 그가 까마득하게 멀어진 기분이다. 나는 입만 벙긋거리며 목이 꺾이도록 그를 간절하게 쳐다본다. 태양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정말로 방을 나가 버렸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가슴 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뭐지? 아까는 어지럽다고 느껴졌던 내 방이 오히려 단정해보일 지경이다. 나는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용서받은 건가? 순간이지만 웃기도 했으니, 그가 날 용서한 건가? 그렇겠지? 마음 속에서 아주 작게 '응.' 이란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만든 소리일지라로 지금은 그 대답에만 반응하고 싶다. 왠지 마음이 이제 살 것 같다고 외치는 소리인 것만 같아서. 좀 적어주지. 그렇게 긴 숫자를 이 상태에서 외우란 말인가? 나중에 핀잔을 듣더라도 다시 물어봐야겠다. 일단 나는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 지친 몸을 엎드렸다. 지난 며칠 동안 외출했던 잠이 한꺼번에 귀가한 느낌이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 과부하에 걸린 게 분명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그 때, 아주 중요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이 외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한 현관의 비밀번호는 나의 음력, 양력 생일을 붙여놓은 숫자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둘이 싸웠냐?" "……." "……." "애 새끼들도 아니고. 잘도 씨발한다." 동사, 명사, 형용사 할 것 없이 몇 가지 욕으로 쉽게 대체되는 문장들. 그걸 듣기 싫지 않게 말하는 강호 형이 신기하고, 또 다 알아듣는 내가 신기하다. 쯧, 혀를 차던 강호 형은 식탁의 대리석 상판 위에 후라이팬을 요란하게 내려 놓았다. 그 소리에 움찔 하며 놀라는 나와 다르게, 태양은 계속 보던 신문을 놓지 않고 있다. 강호 형의 저런 박력에는 이미 익숙한가 보다. 사실 나는 이 차가운 감촉의 식탁조차 익숙하지 못한데.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고는, 차마 거부할 용기가 없어 강호형이 접시 위에 던지듯 놓아준 토스트를 두 손으로 집었다. "앗! 뜨거!" 나는 정말 바보처럼 벌떡 일어서며 토스트를 놓치고 말았다. 김이 오르는 걸 뻔히 보면서도 맨손으로 짚다니. 손보다 얼굴이 더 화끈거린다. 신문에 몰두한 태양 쪽이 신경 쓰여 흘끗 쳐다보는데, 강호 형이 즉시 내게로 날아왔다. 바람처럼 탁자를 우아하게 스치는 몸놀림이 예사롭지가 않다. 참! 강호형은 의사라고 했었다. 환자들의 침상 사이로 흰 가운을 날리며 바람처럼 휙 휙 날으는 형의 모습이 쉽게 그려진다. 하지만 내가 그 얘기를 해줄 새도 없이 강호 형은 내 손목을 잡고 곧장 부엌 개수대로 뛰었다. 졸지에 헉 소리 나도록 끌려간 나는, 지금 차가운 물줄기 아래 벌써 두 손을 넣고 서 있다. 역시 빨라. "진짜 애 새끼지, 너? 알고 보니 손이 많이 가는 놈이었어." 얼음을 꺼내다가 툭 던지는 강호 형의 말에 나는 귓볼까지 빨개졌다. 속으로 날 비웃으면서 코방귀를 끼고 있을 태양을 생각하자 속이 마구 상한다. "그만 물 잠그고, 이리 와."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손을 대충 털고 아까의 내 자리로 가 앉았다. 얼음 두 개를 수건에 각각 싸서 건네주는 강호형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자 아까 그 토스트처럼 쥐고 있으라며 친절하게도 직접 시범을 보여준다. "내가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절대 놓으면 안 돼." 의사다운 잔소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음을 양 손에 쥐고 난 직후, 나는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강호 형이 내 볼을 양 손으로 붙잡고 마구 비벼댔기 때문이다. "어우, 어우, 요 귀여운 새끼! 재인아, '아' 해 봐. 형이 특별히 너만 먹여줄게."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나는 아랑곳 않고서 강호 형은 다시 냉장고로 달려가서 재빨리 무언가를 꺼내 왔다. 억! 저것은! 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체리다! 앉은 자리에서 접시가 빌 때까지 절대 일어나지 못하는 바로 그 체리다!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순간 헬렌 켈러가 되고 마는 바로 바로 그 체리다!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비싸서 사 먹을 엄두도 못내던 그, 그 체리란 말이다! 백수인 나에게는 꿈의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다음 순간 나는, 착한 강호 형이 날 위해 사왔구나, 라는 생각에 뭉클해졌다. "자, 얼른 '아' 해." "아아." 감동한 나는 순순히 입을 벌린다. "아이고, 미치겠다. 요거 봐라, 요거!" 체리 한 알 받아먹고 열심히 우물거리고 있는 내 볼을 콕콕 찌르면서 강호 형이 껄껄 웃는다. 달다. 즙도 많고 향도 엄청나다. 행복해서 씨익 웃자, 형이 알아서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그 위에 톡 하고 씨를 뱉어내자, 형은 계속 체리를 내밀어 내 입 속에 쏙 밀어넣어준다. 방긋, 방긋. 내 수줍은 미소와 강호 형의 흐뭇한 미소가 만나 아기자기한 행복을 자아내고 있다. 바로 그 때 요란하게 신문 접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태양이 벌떡 일어나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내가 행복한 게 싫은가? 나는 그의 등을 빤히 쳐다보다가 금세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체리에 집중할 때다. 새콤달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이 맛을 음미하기도 바쁘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방에서 척척 걸어나온 태양은 보란 듯이 수첩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잉? 뭐하는 거지? "너 뭐하냐?" "형, 체리 500g에 얼마지?" 강호형도 궁금했는지 내게 건네주려던 체리를 손에 들고 태양을 쳐다본다. 하지만 그는 볼펜 끝을 수첩에 딱딱 부딪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묻기만 한다. "12,000원." 헉!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강호 형과 쓱 받아적는 태양. 서, 설마 내가 지금 먹는 걸 달아놓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이, 이 비싼 걸? 아니라고 믿고는 싶지만, 그게 아니면 남태양이 뭐 하러 수첩 같은 걸 들고 나왔겠는가? 저 사이보그로 말씀드리자면, 쓸데 없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위인인데. "500g 이라니? 나 이거 다 안 먹었어!" 나의 외침에 태양과 강호 형이 동시에 날 바라본다. 입가에 살짝 묻은 체리즙을 핥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먹을란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된다. 저 비싼 걸, 어우, 내가 미쳤지! "이쁜아, 어디 가냐? 내가 아직 그만이란 말도 안 했는데?" "그만 먹을래요." 재미난 놀이 중에 상대가 판을 깬 것처럼 강호 형이 원망스레 외친다. 하지만 나는 조금 힘 없이 중얼거리며 내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런 내 등 뒤에서 바쁘게 눈짓과 손짓을 교환하는 두 사람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 알 바 아니다. 체리도 먹었으니 잠이나 더 자고 싶다. 아침부터 쳐들어와 간만에 깊은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운 강호 형 덕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럴 땐 좀더 자는 게 최고다.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눕히고 이불을 턱밑까지 덮는 순간, 밖에서 역정이 난 듯한 태양의 음성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형은 의사잖아!" "씨발! 의사는 뭐 척 보고 인간의 오장육부를 다 꿰는 줄 아냐?" 이제는 둘이 싸우나 보다. 남태양, 알고 보면 은근히 옆 사람 갈구는 재주가 있나 보네. 다행히 순순히 찾아오는 잠기운을 반기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푹 자고 일어나면 제발 쌩쌩한 인간으로 변신해 있었으면 좋겠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린 뒤였다. 무엇이 나를 깨웠는지 떠올릴 새도 없이 머리 맡에 놓인 핸드폰 소리가 들렸다. 전화가 온 게 아니다. 저녁 7시. 평일 저녁 공연 30분 전으로 맞춰놓은 알람이 울린 것이다. 대기실에 있는 배우들의 상태와 극장 안전 관리 등을 최종 확인하는 시간. 이제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 되었으니 알람을 해제시켜야 하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 아직도 이 시간에 울리는 핸드폰 소리를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백수라는 걸 상기시켜서 좋을 것도 없는데. 사람이란 참 묘한 동물이다. 과거의 끈을 스스로 놓아야 할 때는 이토록 손에 땀이 차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너무 많이 잤나 보다. 허리가 아프고, 골이 울린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일단 세수부터 하고 머리를 빗었다. 집안이 조용하다 싶어 태양의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그도 자고 있다. 강호 형은 갔나 보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울리고 있는 집안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어둑한 방 안으로 커다란 침대 위에 이불도 덮지 않은 태양의 긴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발치에 떨어져 있는 얇은 이불을 그의 몸 위에 덮어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평온하게 잠들어있는 태양의 얼굴은 좀 순한 느낌이다.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던 평소의 날카로운 빈정거림과 긴장이 사라진 얼굴. 자세히 보니 진짜 조각 같은 생김새다. 오늘 아침처럼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도 어느 한 구석 못난 데 없이 길씀하게 잘 빠졌다. 남태양은 좋겠다. 돈도 많고, 키도 크고,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건강한 데다 애인한테 배신당하거나 휘둘리지도 않을 만큼 똑똑할 테니까. 나는 허리를 숙여 들여다보고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이러다가 혹 그가 깬다면 무슨 심란한 소리를 들을지 모르는 거다. 저 잘 땐 깨우지 말라는 게 그의 동거 조건 중의 하나였으니까. 나는 소리 죽여 그의 방을 걸어나왔다. 태양콘이 떨어져서 다시 사러 나가야겠다. 입맛이 없어 내내 강냉이만 먹었더니 힘이 없긴 하지만, 다른 음식을 넘길 만큼 식욕이 돌아온 것도 아니다. 물론 체리는 예외지만. 문득 냉장고 쪽을 살펴봤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가 개수를 세어놓진 않았겠지만, 아무리 좋아해도 몰래 먹을 정도는 아니다.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챙긴다. 내가 정신이 나간 사이에 퇴직금마저 예전 월급 통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그 통장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상우가 떠난 바로 그 날부터! 젠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난 주에 태양이 내게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라고 말했을 때는 뒤로 넘어갈 만큼 놀랐다. 나의 바보스러움을 모두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모멸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 자리에서 수첩을 꺼내, 마치 시장에서 일수 놓는 아줌마처럼 보란 듯이 통장의 금액을 기입하는 태양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고맙다며 받았다. 갚겠다는 말도, 살가운 웃음도 건네지 못했지만, 그러려고 마음 먹었다 해도 미처 그럴 틈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태양이, 연이자 3%라고 수첩에 적어넣으며 계산기를 찾아 자기 방으로 곧장 들어가 버렸으니까. 그는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그를 방해하지 않고, 돈을 떼어먹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만 않으면 평생 내가 옆에서 같이 살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묵묵히 제 할 일만 했다. 아침의 그 경비 아저씨와 눈인사를 하고 나는 오피스텔을 나왔다. 두 번을 꺾으면 나오는 익숙한 골목들 사이로 산책하듯 느리게 걷는다. 달이 뜨려면 아직 멀었을까? 검푸르게 멍든 하늘도 보고, 비를 안고 다가오는 먹구름도 본다. 이렇게 느긋하게 걷고 있을 때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빨리 걷고 싶어도 힘이 없다. 내일부턴 꼭 세 끼 다 밥을 챙겨 먹어야지. 모퉁이를 하나 더 돌면 전에 태양과 함께 갔던 수퍼가 나온다. 다음 순간 나는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고개를 뒤로 획 돌렸다. 무언가가 빠르게 어느 집 현관 벽 뒤로 사라진다. 기분이 안 좋다. 스토커는 따로 있었나? 별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 수퍼에 들어가 태양콘 두 봉지를 샀다. 많이 사고 싶지만 오늘은 집까지 다 끌어안고 갈 자신이 없다. 상냥하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오는데, 아까와 비슷한 감각이 뒤통수를 쭉 그어내린다. 나는 더욱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늦추었다.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보는 척 하면서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남자의 발걸음이 주춤 하는가 싶더니, 어느 새 확 뒤돌아서 저만치 달려가 버린다. 그 달아나는 뒷모습에, 내 심장이 뛴다. 달리는 건 그 사람인데, 내 호흡이 더 벅차진다. 곧이어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숨도 쉬지 않고 무작정 뒤따랐다. 퇴근 무렵 인파에 파묻힌 남자의 뒤통수는 여전히 언듯 언듯 보이고 있지만, 질주하는 내 시야는 흐릿하게, 비 내리는 창문 밖 풍경만큼이나 흐릿하게 변하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미친듯이 뛰는 내 심장 소리가 아찔하다고 느낀 순간, 나는 무엇엔가 걸려 사정 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비죽 솟아오른 보도블럭이 쓰러진 내 발치에서 날 비웃고 있다. 나는 남자가 사라진 쪽으로 상체만 돌린 채 간절한 눈길을 던졌다. 내가 넘어지는 걸 보지 못했는지, 남자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봤다면 분명 달려왔을 텐데……. 상우 너, 도로 내게 뛰어와 날 일으켜 줬을 텐데……. 형편 없이 까지고 피가 흐르는 내 무릎을 보면서 나는 바보처럼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어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눈 앞에서 달아나던 사랑이 너무나 서러워서, 코 앞에서 놓친 상우의 그림자가 미치도록 아까워서, 내 손을 떠난 강냉이 두 봉지가 어디쯤에서 굴러다니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했다. 먼 발치 건물 벽 뒤에 숨어, 그런 나를 보면서 똑같이 울고 있는 상우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치 잘 짜여진 연극의 한 장면처럼, 하늘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듯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암흑의 세계 속에 혼자 내던져진 사람이 느낄 법한 아득한 절망이, 쓰라린 상처를 입고 회복 능력마저 상실한 벌건 가슴 속에 차올랐다. 내 깨져 버린 턱에서부터 보도블럭 위로 흘러내리는 핏물이, 마치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어느 마을 희생양의 그것처럼 서러워 보였다. 만약 그 때 상우가 계속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다가와서 결코 안아주지 않았던 그를 포기하기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 날 나는 그 길바닥 위에서 죽지 않았다. 마음 착한 행인 하나가 나를 일으켜 집이 어디냐고 물었고, 흠뻑 젖은 상태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정신을 잃어가고 있던 나는 본능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성원 오피스텔 802호'를 읊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태양의 집 현관 앞에 섰을 때는, 벨을 누르려던 그를 말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보낼 수 있었다. 아침에 태양이 두 번 불러준 번호는 금세 잊어버렸지만, 그렇다고 벨을 눌러 태양을 깨우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차갑게 굳어버린 내 머리는 그냥 기다리라고 내게 명령했다. 너 같은 애 때문에 태양의 깊은 잠이 방해받을 순 없잖아. 그랬다가 여기서마저 쫓겨나면 어쩌려고 그래? 달리 갈 데도 없으면서. 쓰러지듯 주저앉아 벽에 기댄 나는 힘 없이 눈을 감았다. 까지고 찢어진 상처의 쓰라림 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가슴 한 구석이 죽을 듯이 발작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곧 있을 그 쪽 마음의 사망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깨끗한 오피스텔 바닥에 피가 묻지 않도록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턱이 위로 향하도록 들었다. 찌릿한 아픔이 뇌를 관통하듯이 달려 들었지만, 그마저도 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비틀 비틀 일어나 벨을 눌렀다. 그리고…… 그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해 쓰러지려는 찰나, 엄청난 속도로 벌컥 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태양을 만난다. 따뜻한 집 안 공기를 한움큼 몰고 나온 그는 이름만큼이나 눈부신 빛을 등지고 내 앞에 단단하게 서 있다. 완전히 탈진해 버린 나의 착각일 테지만, 그의 품 안으로 무너지는 나를 그가 으스러지도록 당겨 안아주었던 같다. <불안은 첩경을 넘었다> 매미가 울어재낀다. 나무가 너무 초록이다. 개미가 길을 잃었다. 어제는 무거운 비가 내리더니, 머리를 두어 대 때리고는, 짧은 소매를 붙잡고 늘어진다. 가지 말라고. 그렇게 오늘은 긴 팔이 되었다. 가을 문턱에서. 18. 이 집에는 비밀이 있다. 집주인인 태양도 알지 못하는 비밀. 여기 큰 방 침대 상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벽지에 새겨진, 'J♡S'가 그것이다. 부엌의 커다란 냉장고 뒤쪽에도 비슷한 마크가 낙서되어 있다. 처음 이 집에 이사오던 날, 상우가 나 몰래 써놓고는 '행복 부적'라 외쳤었다. 늘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 지울 수 없는 곳에 새겨진 우리 둘만의 행복 부적. 그것으로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얼마나 바보같고 순진한 믿음이었는지……. "정신이 들어?" 눈은 아까부터 뜨고 있었다. 천정의 기하학무늬를 따라가며 무수히 연결되는 선들에 아찔해하는 중이다. 병원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크게 안도하는 나를 누군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어떻게 넘어졌길래 턱을 다치냐?" 침대 곁에 놓인 의자가 바싹 다가오며 붕대로 감싸인 내 턱끝을 살짝 만진다. "강호 형 다녀갔다. 뼈를 다친 건 아닐 거라더군. 그래도 너 정신 들면 엑스레이라도 찍어보……." "괜찮……아." 즉시 그의 말을 막았다. 병원은 싫다. 정말 싫다. 절대로 안 갈 거다. 엄청나게 쉬어버린 내 음성에, 태양이 눈을 가늘게 뜬다. 나도 안다. 누가 내 머리를 잡고 억지로 턱을 바닥에 찧은 게 아니라면, 사람이 넘어지면서 두 손부터 바닥을 짚는 게 본능이고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걸. 하지만 아까 그 순간에는 나도 경황이 없었다. 날 돌볼 반사신경 따위……. "무슨 일이야?" 툭 던지듯 물어온 태양이 침대 가장자리를 노려보고 있다. 팔짱을 끼고 가려진 손끝이 꽉 주먹을 쥐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질문한 어조는 가볍지만, 궁금함의 무게는 어쩔 수 없이 전해지고 만다. "상우를… 봤어." "……!" "집앞에서 날 따라왔는데, 내가 돌아보니까…… 도망쳐 버렸어." 창백해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태양. 침대 머리 맡의 스탠드 불빛만으로는 그의 표정을 다 살필 수가 없다. 담담하게 들려주듯 흘러나온 내 음성은 그러나 희안할 정도로 낮은 속삭임의 형태다. 하지만 잘 참고 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울음 따위 꾹 밀쳐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중력을 따라 흐르는 눈물이야 막을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울음은 아니다. 눈물일 뿐이다. "그래서 뒤쫓아갔냐?" 꽉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태양의 주먹이 이제는 터질 듯 버거운 크기의 힘을 먹고 부르르 떤다. 단지 내 생각일 뿐이지만, 태양은 지금 화가 나 있다. 그런데 왜 그가 화를 내지? 이러는 내가 답답해서? 아니면 도망친 상우가 제 3자인 그가 봐도 너무 비겁해서? "잡지도 못할 놈을 왜 쫓아가?" 질문이 아닐 거다. 태양의 저 말은, 쫓아가지 말지, 라는 의미 같다. 응. 쫓아가지 말 걸 그랬어. 그런 의미로 나는 조용히 눈물을 닦는다. 진통제를 맞았는지 자꾸만 눈이 감기지만, 우리한 아픔이 느껴지는 턱과 무릎이 너무 실감나서 깊이 잠들 것 같진 않다. 이렇게 따뜻하고 안락한 태양의 침대에서 그를 몰아내고 또 다시 누워있다니.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자꾸만 더 폐를 끼치게 되어 마음이 아프다. 불쌍해. 갚을 것이 늘어날수록 무능력해지는 내 자신도, 아무 말 없이 내게 다 양보하고 지켜봐주는 태양도……. 억울해. "좀 더 자. 두고 봐서 내일도 계속 아프면 그 때 병원가든지." "남태양." 일어나서 나가려는 그를 불렀다. 돌아서던 몸을 다시 틀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태양. 그는 어디서 자려는 걸까? 내 침대? 아님 소파? 그보다, 나는 두렵다. 혼자 있고 싶지 않다. 아플 때마다 혼자 앓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곤 했는데, 이상하게 그가 나가려는 순간 선득한 두려움이 닥쳐왔다.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 돼?" 내 말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는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린지 내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다. 선선히 부탁을 들어주는 그가 고맙다. 한편으로는 동정의 빛이 없나 무의식적으로 찾게 된다. 하지만 태양은 내 팔에 꽂힌 닝겔주사의 속도를 다시 한 번 조절할 뿐이다. '고마워.' 그가 보지 않을 때 그를 향해 소리 없는 입모양을 만들어본다. "미련한 여재인." "……!" 나직하게 그 말을 뱉은 태양이 나를 다시 내려다본다. 낮고 엄하지만 부드러운 그 음성에 나도 그를 올려다본다. "자기가 속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바보." 상우에게 배신당하고 아파하는 나를 대신 꾸짖어주는 태양. 어떤 생각이나 비난도 할 여력이 없는 나를 그가 대신해서 흔들어주고 있다. "아직도 사랑이라고 믿고 싶겠지? 사랑하니까 돌아오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사연이 있으면 들어주고, 이해를 구하면 이해해줘야지, 그러면서 아직도 마음 넓은 척 그 놈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자기가 속은 것도 모르고." 낮게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이 쏙 쏙 귀에 들어온다. 이상하다. 감각이 사라졌던 내 몸이, 내 정신이 그의 말을 달게 받아먹고 있다. 나…… 그런 것 같아? 정말 나는 지금도 상우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아, 얼마나 바보 같아! 남태양. 니가 보기에 내가 정말 그러고 있어? 답답한 녀석이라는 꾸짖음을 달게 받으면서도 그런 내 자신을 직시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버거운 현실의 무게를 알고도 버틸 만큼 강하지 않다. 무겁지만 어떻게든 이고 가던 짐이 몇 킬로인지 안 후에는 깜짝 놀라 더 들기 힘들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평생 속지 않고 사는 법 아니?" 내가 조용히 묻는다. 태양은 기다린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던진 질문이라는 걸 알 만큼, 그는 눈치가 빠르다. "그건 속았다는 걸 끝까지 알지 않는 거야." "알지 못하는 거겠지." 비웃듯 대꾸하는 태양을 향해 나는 다시 한 번 말한다. "아니. 알지 않는 거야." "……." "속은 걸 모르면, 난 아직 속지 않은 거니까. 속았다고 분개할 필요도 없고, 그에게 따져 물을 필요도 없어.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돼. 혹 그가 속였어도, 나는 속은 게 아니니까." "……지독하군."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태양이 나직하게 던진 말. '지독하다' 라……. 그래. 어쩌면 난 정말 지독한 사람인지도 몰라. 속은 걸 알지 않으면, 결국 그를 용서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내가 용서를 하지 않으니, 그는 이제 용서받을 길이 없는 거야. 그 마음의 짐을 끝내 벗지 못하겠지. 아마도……. 나는 그렇게 복수를 하려는 건지도 몰라. 남태양. 나는 지독해. 지금 난 아주 지독해졌어.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잃어서 정신이 없을 뿐이지, 장님은 아니거든. 모르고 살아가고 싶은 게 많았을 뿐이지, 정말 모르는 건 아니었거든. 상우는 속였지만, 난 속은 게 아니야. 그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그는 계속 죄책감을 혼자 감당해야 해. 난 도와주지 않아. 아무 원망이나 비난도 안 해.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잘못을 탕감해주지 않을 거야. 이게…… 내 최선이야. "그냥 놓아 버릴 순 없어? 잊으면 안 돼?" '나는 잊었으면서. 깨끗이 지웠으면서.' 태양의 질문에는 그런 원망이 섞인 듯 하다. 백지만큼이나 창백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허탈하게 웃는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입술을 깨문다. "왜 그렇게 그 자식한테 연연해?" 들릴 듯 말 듯한 그의 숨죽인 물음에, 결국 나는 아프게 눈을 감는다. "당연한 거잖아. 상우는 내 첫사랑이니까." 나는 하나의 알에서 시작되었다. 얇은 껍질 속은 온전한 세계를 이루었고, 그 또한 아늑한 둥지 안에 잠들어 있어 모든 것이 의심 없이 평온했다. 나는 곧 종종종종 뛰어가는 병아리가 될 참이었다. 귀여운 아기다람쥐들이 내 서툰 걸음마를 구경하며 배를 잡고 웃어도, 나는 진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 섞일 용기와 무지함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알 안에서 완벽했다. 작은 둥지 안에서는 최고로 아름다웠다. 내 둥지로 찾아와, 내 알을 깨고, 날 깨운 자는 분명 내 주인일 것이다. 그가 나를 더 완벽하게 감싸주고 더 아름답게 보아줄 거라 나는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난 혼자였다. 지금부터 내가 풀어야 할 문제는, '그가 어디 있느냐?' 가 아니다. '그가 누구인가?' 이다. 답을 찾으면,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가 내 진짜 주인이라면, 내가 찾을 수 있는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후로 3일을 꼬박 앓았다. 턱은 이제 붕대 대신 반창고를 붙였고, 무릎은 거의 다 아물었다. 가벼운 쇼크와 탈진이 겹쳤던 거다. 앓는 동안에는 정신을 잃고 내내 잠만 잤다. 그 사이 간간히 주사를 갈아주는 강호 형의 손길은 느꼈지만, 지난 번처럼 곁에 앉아 지켜봐주고 있는 태양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다시 비행을 떠났을 거라고 짐작했다. 집안은 적막했지만, 그래서 더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더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늦게 눈을 떴을 때, 시계초침 소리만 들리는 집안의 고요가 무료하게 느껴졌고 드디어 내가 이제 다 나았다는 걸 조용히 깨달았다. 새 시트가 깨끗하게 깔려 있는 태양의 넓고 편안한 침대는 지난 3일 동안 줄곧 내가 점령하고 있었다. 번번히 미안하다. 그를 만나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내 방으로 건너갔다. 기운이 좀 없을 뿐 머리는 맑았다. 가슴 안쪽이 우리할 뿐 견딜만 했다. 나는 다시 살아났고,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거란 생각이 들어 피식 웃는다. 꺼진 핸드폰의 전원을 켜고 그 동안 걸려온 전화와 문자를 확인했다. 대부분 엄마와 형들 전화번호가 찍혀 있지만 사이사이 현진의 번호도 있었다. 퇴사할 때 제대로 인사도 못 건네고 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꾹 통화 버튼을 눌러 그녀가 전화 받기를 기다린다. 달력을 보니 오늘은 월요일이다. 극장이 쉬는 날이라 바쁘진 않겠다. 몇 번의 신호음 후 그녀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라 나도 반가웠다. 재직 당시엔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게 한 번 만나달라고 말했다. 곧장 가까운 시내로 약속이 잡혔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곧장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옛 직장 동료를 만나는 거라,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좀더 생기 있는 얼굴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몸살이었다 하면 이해하겠지. 알러지테스트를 거친 무향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빗는다. 이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는 어렸을 때부터 나의 컴플렉스였다. 해인이 형의 까맣고 부드러운 고수머리가 나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체념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한 나는 면바지와 옥스포드 셔츠를 찾았다. 양복이 아닌 이런 평상복 차림이 내 외모를 더 어려 보이게 한다는 건 알지만, 이제 굳이 그녀의 상사로 위엄을 갖출 필요는 없으니 신발도 스니커즈를 꺼냈다. 집을 나서다 문득 생각 나서 태양에게 메모를 남겼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아무래도 남겨두는 게 좋겠다. 잠깐 외출해. 도망 아냐. 확인 필요하면 전화하고. 참, 내 번호 모르지? 010-2304-XXXX. 재인. 전화기 옆 협탁 위에 메모를 놓았다. 현관을 막 나서려다 손잡이 근처에 붙어있는 뭔가를 발견한다. <1212 0110> 아! 현관 비밀번호를 적어놓은 포스트잇이다. 의외의 세심함에 가슴 한 구석이 꼭 햇곡식을 거둔 곡간이 된 것 같다. 무뚝뚝한 그의 성격만큼이나 간단한 메모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깨물며 포스트잇을 떼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매니저님! 여기에요!" 현진은 늘 말끔하게 올리고 있던 머리를 늘어뜨리고 밝은 카페의 창가에 앉아 있다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입구에서부터 맡아지던 고소한 계피 향이 기분을 솔솔 달래주는 것 같다. '우와!' 현진은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그렇게, 자신의 앞에 선 내게 인사했다. 캐주얼한 차림이 처음이라 놀랐나 보다. 그러고보니 현진의 캐릭터 티셔츠도 만만치 않다. "새로운 모습!" 내 간략한 답인사에 그녀가 활짝 웃는다. 나도 환하게 웃으며 맞은편에 않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위해 선선히 맞잡아오는 현진의 손은 따스했다. "계속 아프셨어요? 더 마르고 초췌해지셨네." "그 무슨 섭한 말씀! 내가 오늘 얼마나 신경 쓰고 나왔는데." "아, 그래요? 어쩐지. 실은 너무 멋진 모습에 심장이 떨려서 반대로 말한 건데." 헤헤 웃는 현진의 모습이 새롭다. 나 이상으로 사무적이고 딱딱한 부하직원이었는데. 물론 불만 없다. 예전보다 친근해진 그녀가 마음에 든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에 대해 느긋하게 주고 받았다. 곧 새 일자리를 알아볼 거란 내 말에 현진이 처음으로 얼굴을 흐렸다. "매니저님 나가시고 나서 극장이 엉망이에요. 매일 매일 한 가지씩 일이 꼭 터지거든요. 아직 사소한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매니저님처럼 세세히 점검하는 사람이 없으니 조만간 크게 터지지 싶어요. 새 사람이 충원되고 나서도 박실장님은 내내 소리를 질러대요. 저처럼 불안하신가 봐요." 어찌 들어도 씁쓸한 얘기다. 나 나가고 극장이 잘 굴러간단 얘기도 섭섭할 테지만, 억지로 사람 내쫓아 보내놓고 그렇게 헤맨다는 얘기 또한 기쁘진 않다. 조금은 고소해해도 될 텐데, 내가 그 동안 피땀을 바친 결과가 나타날 즈음이라 그저 허탈하기만 하다. "하우스 매니저는 극장의 안방마님이잖아요. 당연한 말이지만 여매니저님 빈 자리가 너무 커요. 모두들 매니저님을 얼마나 그리워하는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그들 중 누구도 내가 떠나기로 결심을 굳히던 날,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어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슬금 슬금 내 쪽에 눈길만 던져댔을 뿐이다. "진짜예요." "……." "가끔 사담할 때 여매니저님 얘기도 나오는데, 모두 칭찬뿐이에요." 듣기 나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한 번 상처를 받았다. 내가 떠나는 이유는 명백했고, 그들 중 누구도 내 퇴사를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다. 되도록 급히 서둘러 그만 두고 나온 이유도 그래서다. 내가 아꼈던 동료들이기에 그들에게 상처받는 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뜨거운 레몬티를 한 모금 마시면서 카페 안에 울리는 음악을 음미했다. 새콤한 레몬의 맛을 희석시키는 Myrra의 느릿한 음성이, 'How Insensitive'를 부르고 있다. 울적하지만 담담한 내 심정과 노래의 가사가 자꾸만 맞물린다. 카페 주인의 선곡 센스에 감탄하며 나는 카운터 쪽에 서 있는 그에게 눈인사를 했다. 보사노바는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런 날, 이런 기분에는 Myrra가 안전했다. 그 노래 위로 간간히 이어지는 현진의 얘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전 처음 매니저님 뵌 날,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쑥스러운 얘기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감탄했었거든요." "아부는……." "진짜예요! 계속 눈을 못 떼고 쳐다보는데 갑자기 매니저님이 제게 눈을 딱 마주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신입사원 환영회식 자리였잖아요, 왜. 제 맞은편에 앉아계시다가 갑자기 상체룰 쑥 내미시며, '현진 씨, 앞으로 십 분 동안 내 얼굴에서 눈 떼면 혼날 줄 알아요.' 그러셨어요. 얼마나 놀랐던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데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못했어요. 안 그래도 들켜 놓고, 그 후로 십 분이고 이십분이고 계속 매니저님만 봤어요." "기합이 단단히 들었었나 보군." 내가 새삼스러운 옛날 이야기에 쿡쿡 웃으며 대답하자, 현진은 볼이 발개진 상태에서도 고개를 진지하게 저었다. "아뇨. 혼날까 봐 본 게 아니라, 보지 않을 수 없어서 봤어요. 그건 저뿐만이 아니었을 거에요. 잘 웃으시고, 신입들 편하게 해주시느라 농담도 건네주시는 모습 보고, 상사라기보다는 선배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언제나 자상하고 너그러우실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진의 새삼스러운 지난 얘기에 나도 옛 생각이 났다. 내게도 신입사원이던 시절이 있었고, 사고도 무수히 많이 저질렀다. 다행히 일을 빨리 배운 덕에 승진도 빨랐지만, 추락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살면서 그건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곳곳에 도사린 함정. 빠져나오기 힘든 우물. '그런데'로 잠시 말을 멈췄던 현진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얘기를 이어간다. "일 시작하면서는 갑자기 돌변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굉장히 엄격하고 단호한데다 꼼꼼하셔서 쫓아가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매니저님, 멋졌어요. 저도 매니저님처럼 되고 싶어서 온갖 궂은 일 다 참고 힘들어도 견뎠는 걸요. 화장실에 몰래 숨어서 울 때도 많았는데, 그거 모르셨죠? 그런데 매니저님 나가시고 나서 요즘 더 자주 그래요. 제가 일을 하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데도……. 저 정말 웃기죠?" 갑자기 현진의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난감한 순간이다. 나는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을 달래는 재주가 없다. 하지만 꼿꼿하고 강한 그녀답게 금세 피식 웃으며 혼자 수습한다.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매니저님, 꼭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한 번도 칭찬 같은 거 직접 해주신 적 없지만, 덕분에 저 많이 배우고 컸다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현진은 맞은편에 앉은 내게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며, 또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아주 많이 좋아했습니다." 나는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급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동시에 각 차선에서 두 대가 몰려오다가 서로 부딪칠 뻔했다. 내 바로 앞에서 내려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택시기사들을 두고 나는 뒤에 새로 다가온 택시 위에 몸을 실었다. 중간에서 그들을 중재하고 말릴 여유가 내겐 없었다. 당장 부모님 댁에 가야 했으니까. 헤어지기 전, 망설이다가 결국 현진에게 묻고 말았다. 나를 찾아 극장에 온 상우를 만났었냐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애인이 왔다는 말에 굳이 나가서 그 사람과 눈인사를 했노라고. 괜찮더냐고, 그는 건강해 보이더냐고 묻자 현진은 이상하다는 듯 날 보았다.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기억 나는 건 짧게 자른 붉은 머리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선명한 머리칼 색상이 하도 인상적이라 다른 건 눈여겨 보지 못했다고. 짧게 자른 붉은 머리. 다음 몇 초가 흐른 뒤,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상우는 더벅머리였다. 며칠 전 만났던 상우의 머리는 여전히 평범한 밤색이었다. 이상했다. 아니, 설마 싶었다. 설마……!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나는 집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어내려 곧장 벨을 눌렀다. "육성이 형 어딨어? 강인이 형 어딨냐고!" 누군가 받는 기색이 느껴지자마자 다짜고짜 외쳤다. 이무런 대답 없이 대문이 열리는 걸로 봐서 해인이 형이 또 집에 있나 보다. 나는 정신 없이 현관까지 달렸다. 아니, 마음은 달렸지만 몸은 빨리 걷는 게 고작이었다. 어둡고 돌들이 일정하지 않게 깔린 마당에서 넘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문을 열자 부모님과 해인이 형, 태인이 형이 나와서 나를 맞이한다. "어, 막내 왔냐?" 히죽 웃으며 반기는 태인이 형 곁에서 부모님도 반가운 눈빛으로 날 보신다. 순간 가슴 속이 턱 막혔다. 어머니는 내 예상치 못한 방문이 너무 기뻐 벅차보이기까지 한다. 그 모습에 나는 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제발……! 제발 아니기를! "엄마, 죄송해요." 그 말만 던지고 나는 곧장 안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주저 없이 아니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엄마의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지난 새벽에 보았던 통장 묶음. 그것들을 꺼내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펼쳤다. 여재인. 여재인. 여재인. 모두가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다. 아니, 내 통장이다. 상우와 함께 잃어버렸던 바로 그 통장들이다! 그리고 집 매매 계약서까지!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엄마는 이런 걸 아무 서랍이나 두지 않으신다. 장롱 어딘가 혹은 도둑도 찾을 수 없도록 기가 막히게 외진 데 보관하신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게 여기에 고스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 걸까? 그 새벽에 한 번쯤은 의심해 보았어야 했다! 이건 상우가 갖고 떠났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래야 말이 되는데. 아니! 아니, 어떤 것도 말이 안 된다. 상우가 떠난 것도 너무 비정상적이니까. "재인아!" 나를 뒤따라 달려온 네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신 엄마는 금방이라도 쓰러지실 것 같다. 그때 현관 쪽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 "대문이 열려 있네." 막 신발을 벗고 있는 남자의 걸걸한 음성. 나는 붙잡는 태인이 형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 강인이 형 앞에 섰다. 형의 빨간 고슴도치 머리가 내 눈에 가장 먼저 달려 들어온다. "형, 우리 극장에 왔었어?" "칠성이 왔냐? 헉……!" 아무렇지도 않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씨익 웃던 형은 그제야 내 질문을 이해했는지 표정이 기묘하게 굳어진다. "대답해! 그거 형이었어?" 물러날 기색이 없는 내 단단한 물음에 형은 내 어깨 너머로 가족들과 눈을 마주친다. 참기 힘든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 넓지 않은 집안에 여섯 사람이나 있는데도 고요하다. 그리고 그 침묵의 의미를 예민하게 깨달은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아찔함을 느꼈다. 어쩐지……! 돌이켜 보면, 그 날도 마땅히 이상하다고 여겼어야 했다. 상우가 떠난 직후, 갑자기 3년 만에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를 의심해 봤어야 했다. 직장까지 찾아온 연인의 비열함을 탓하기보다, 그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생각했어야 했다. 나는 꽤나 똑똑한 척 자신을 믿고 살아왔지만, 아니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속고 있었다. "누구예요?" 부모님을 향해 돌아서면서,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냈더니 거칠기 짝이 없다. "상우를 만나 날 떠나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구죠?" "재인아……!" "감쪽같이 속죠? 저라는 놈, 꽤 속이기 쉽죠?" "입 다물어, 여재인. 후회할 말 할 거면 그냥 가." 엄하게 날 제지하는 해인이 형. 그 무표정한 얼굴을 가만 바라본다. 형도 내 강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어쩌면, 해인이 형은 공범이 아닐 수도 있겠다.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거짓말 하는 거, 체질적으로 형하고는 안 맞을 테니까. 그럼……, 그럼 대체 누구냐고! "나 남자 좋아해요. 아빠! 엄마! 저 여전히 그래요!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요!" "아가……! 흐흐흑!" "울지 마요, 엄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온 가족들한테 속아서 억울한 게 지금 누군데!" "미안해. 미안하다, 재인아." "아니요.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사과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아요. 돌려놔요. 다시 한달 전하고 똑같이! 그럼 잊을 게요. 제발 돌려놓기만 해요!" 나는 덜덜 떨리는 손끝을 모아 주먹을 쥐었다. 잔인한 손이 가슴을 뚫고 들어와 심장을 뜯어간 느낌이다. "돈 줬어요?" 어지러운 침묵 속에서 내가 묻는다. 가족들의 얼굴이 나로 인해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깊고 잔혹하게 베이고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상우가 뭐래요? 돈 주니까 받아요? 모자르다고는 안 해요? 그 자식 나 많이 사랑했는데, 그렇게 떠날 정도면 엄청 많이 줬겠네. 우리 집 부자도 아닌데 어쩌나? 아니면 형들이 보탰어?" "여재인!" 태인이 형이 내 팔을 다시 잡으려 하자, 나는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선다. 내가 아무리 모진 말을 해도 그들 중 아무도 날 때리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날도 그랬다. 3년 전 내가 떠나던 날도, 온갖 말로 협박은 해도 날 때리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번 내 뺨을 때린 해인이 형 빼고. 끝내 현관문을 잡는 날 돌려세우고 후려친 그 한 대 빼고. 그 날 이후 줄곧 식구들에게서 해인이 형이 '싸가지'라는 호칭을 듣고 산다는 것도 안다. 나는 그들의 막내였다. 항상 골골하고,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유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늘 내가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 앞에 그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상우 새끼 잡아야겠다. 아무도 말 안해주니, 그 새끼 잡아다 얼마 쳐먹었냐고 물어 봐야겠다." "그만해. 이미 과했어. 더 하면 나중에 니가 괴로워." "너나 그만해, 여해인! 어차피 관심 없잖아. 지난 3년 동안 나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는 했냐? 네 동생 길바닥에 나앉아 있게 됐을 때도 전화 한 번 해봤냐? 무슨 상관이야! 내가 후회하든 말든 여기서 나가면, 너도 나 끝이잖아!" 내 과격한 외침에 해인이 형이 입술을 꾹 터지도록 깨문다. 핏기가 사라져 창백한 사람들 여기에 천지다. 게다가 폭탄은 바로 나다. "아버지. 그 날 나한테 처음 전화하고 기분 어떠셨어요? 집도 다 뺏긴 놈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니까 되게 웃겼겠네요. 그죠? 부모님이 집에 온다 하는데도 끝까지 말리질 않으니까 되게 궁금했겠다. 그죠? 웬 놈이 떡 버티고 있는 집에 내가 같이 산다고 하니까 놀라기도 했겠다. 그죠? 그죠?" "재인아, 이눔아!" "혹시 태양도 만났어요? 나한테서 떨어지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뭐래요? 자기는 게이가 아니니까 염려 말라고 해요? 그래서 안심하셨어요? 아니면 또 다시 만나 설득할 생각이세요?" 나는 가슴 부근의 셔츠를 움켜지고 절박하게 외쳤다.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시는 엄마를 태인이 형이 끌어안는다. "이제 그러지 마세요. 제발 좀 그러지들 마세요! 나 다 뺏겨도 할 수 없어요. 안 변해요! 안 변하니까 바꾸려고 하지 마요! 난 지금도 3년 전에 가족들한테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난 그 새끼 그대로란 말이에요!" 강인이 형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 듯이 형마저 가슴을 들썩이며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보인다. 내가 보려던 건, 내가 곧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가족들과 내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언젠가는 태인이 형처럼 멋있게 혼자 힘으로 성공해서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 나도! 나도 엄마, 아버지, 형들 앞에 당당하고 행복하게 설 자신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그걸 다 망쳐요? 왜 조금 더 기다려주지 못하셨어요! 왜!" 그렇게 외치고서야 나는 내 얼굴에서 미친듯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저앉게 되기 전에, 나는 24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고, 지난 3년 간 그리워했던 집을 뛰쳐나왔다. 내가 태어난 둥지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 불타 버렸다. 다시 술을 마셨다. 취하자 세상이 우스워졌다. 좀 만만해진 것 같아서 살 것 같았다. 뭐가 그리 대단해서 내 가슴이 녹아내렸는지 모르겠다. 뭐가 그리 힘이 세서 내 마음을 갈갈이 찢어놨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하는 평범한 사람. 이 세상에는 평범하지 않은 치장을 한 평범한 사람도 살고, 평범하지 않은 성격을 가진 평범한 사람도 살고 있다. 나만 특이한 게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만 아플까? 차라리 다들 아픈데 나 아픈 것만 내 눈에 보이는 거라면 좋겠다. 나만 이렇게 죽도록 힘든 거면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 정말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 나는 지금 체온이 필요하다. 날 따스하게 안아줄 두 팔이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 밤은 누구라도 잡고 안아달라고 부탁하게 될 것만 같다. 아무나 걸려라. 아무나 걸려라. 나는 주문을 왼다. 고개를 드니 어느 새 태양의 집 앞이다. 덜커덕 아무렇게나 손잡이를 잡아 흔들었다가, 바지에 손을 넣어 태양이 붙여뒀던 포스트잇을 꺼낸다. 일이일이 공일……. 이거 누르기 되게 쉽다. 번호 잘 넣었네. 나는 실 없이 웃는다. 다 빼앗기고 버려진 뒤 아무 것에나 허허 웃는 사람처럼. 경쾌하게 소리를 내며 잠금해제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까 나갈 때와 똑같은 집안. 태양은 오늘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다. 지금쯤 어느 나라 상공 위를 날고 있을지 모르지만, 떨어지지 말고 무사히 이 집으로 돌아오기만 해라. 내 돈 훔쳐간 범인들을 잡았으니 네가 빌려준 거 다 갚는다. 덤으로 맛있는 밥도 사고, 체리도 내가 먹은 거 고대로 채워준다. 그러니까 오기만 해라. 남태양…… 어서 와라. 보고 싶다! "침대에 안 누워 있고 뭐해? 어디 나갔다 왔나? 그 새를 못 참고 또……." 눈을 뜨니 시야 한 가득 태양이 들어온다. 캄캄한 실내에 불을 켜고서, 커다란 남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는 깜빡 깜빡 눈꺼풀로 눈을 닦아내고 다시 본다. 진짜 남태양인가 보다. "안 씻을 거냐?" 저렇게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는 걸 보면. 천장의 하얀 불빛이 눈부셔서 미간을 찌푸린다. 갑자기 온몸으로 스며드는 이 안도감은 무엇일까? 거실 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상체를 겨우 떼어 앉았다. "나랑 잘래?" 그리고 나도 모르게 저 말을 툭 던진다. 셔츠 단추를 풀며 제 방쪽으로 걸어가던 태양이 멈칫 그 자리에 선다.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눈길 위로 정적이 흐르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 '응? 나랑 안 잘래?' 하고 다시 물을 뿐이다. 태양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내 턱을 들어올려 불빛에 얼굴을 자세히 비추며 살핀다. 울다가 자서 엉망으로 부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비껴 버린다. 나를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태양의 입술이 붉다. 입술만 붉은 게 아니라 입가 한 쪽이 터져서 빨갛다. 그러고보니 한쪽 무릎에 얹힌 손등이 붕대로 칭칭 감싸져 있다. 어디서 누구랑 된통 싸운 사람 마냥 거칠고 화가 나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또 왠지…… 섹시하다. "왜?" 한참 동안 그 상태로 서로 노려보다가, 결국 시비 걸듯 태양이 먼저 묻는다. "그러고 싶으니까." "술 마셨나?" "응." 내 대답에 태양은 기가 찬 모양이다. 그리고는 아주 냉정하게 손끝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묻는다. "지금 나보고 주정뱅이랑 섹스를 하라는 말이냐?" "싫음 말고." "싫다." "알았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포기하기엔 너무 절박하다. "그럼 그냥 안고만 있어." "여. 재. 인!" 마치 내 이름 석자를 부러뜨리고 말겠다는 듯 태양이 힘 주어 부른다. 나 정말 어떻게 됐나 보다. 저렇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다. 화가 난 그의 까만 동공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 나 오늘 정상 아니다. 자신 쪽으로 쓰러질 듯 다가가는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끝의 감촉이 너무 달콤하다. "너 지금! 내가 아니라도 상관 없는 거잖아!" "응. 상관 없어. " 솔직한 내 대답에 급속도로 창백해지는 태양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축 늘어진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마주잡았다. 그는 내 어깨를 밀듯이 잡고, 나는 그의 어깨를 당기듯이 잡고 있다. 바르르 내 손끝이 떨고 있는 것도 못 느낀 채 나는 그 상태에서 간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라서 부탁해. 이 말 꺼낼 용기 너한테밖에 없어. 이젠 왜냐고 묻지 마. 그냥 그래. 나도 몰라. 안아줄 거면 빨리 안고, 싫으면 얼른 니 방으로 꺼져. 내가 무작정 엉겨붙어 버리기 전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다. 태양이 한숨을 내쉬며 내 등을 끌어안아 준 것은. 이제 보니 그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내가 불쌍한 건 사실이니까. 그가 아무리 아니라고 위로해도, 난 바보가 아니다. 하지만 계속 불쌍하진 않을 거다. 바보 아니니까, 곧 그만 불쌍해질 날을 찾을 거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오늘 이렇게 날 보듬어 안아준 그를 기억할 것이다. 태양은 푹신하고 포근한 자신의 침대 위에 나를 눕혀 주었다. 잠시 후 파자마로 갈아입고 온 그에게서는 로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 때는 그게 로션 알러지가 있는 나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맞닿아오는 그의 체온과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감촉에 충분히 감사했다.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내 몸을 꼭 끌어안아 가슴을 맞대준다. 어둡고 조용한 방 안, 두 개의 심장이 가까이에서 함께 뛰고 있다. 내 심장이 그의 심장에게 묻는다. '넌 어디에서 왔니?' 그의 심장은 대답 없이 힘차게 뛰기만 했다. 마치, '이렇게 뛰는 거야.' 라고 내게 말해주듯이. 이불 밑에서 우리의 다리가 어색하게 닿는다. 그러자 태양이 한 쪽 다리로 내 다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당겨준다. 부드러운 옷감을 사이에 두고 얽힌 긴 다리의 무게가 안정감을 주었다. 이게 내가 원했던 거다. 살아있는 사람의 따스한 체온. 나를 감싸고 자신의 품안에 온전히 넣어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만들어주는. 태양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는다. 내일 아침까지 술이 깨지 않으면 좋겠다. 이렇게 무작정 기대고 안길 수 있는 용기가 내게서 영영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흘러내린 내 갈색머리를 이마에서 넘겨주던 태양은 문득 그 위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재인. 내 첫사랑 얘기 해줄까?" "……!" "네 첫사랑보다 더 기막히고 지독한데……, 들어 볼래?" 내 집에 사는 남자 1부 下 <목 차> 19. 죽을 만큼 사랑해도 죽지 않아 20. 이것은 한밤중에 할 일이다 21. 침묵은 익숙해지기 쉽다 22. 바닥에 누우면 하늘이 더 잘 보인다 23. 숲이 되고 싶다 24. 네 전화 없이도 결국엔 잠들겠지만 25. 안다, 알고 있다 26. 따뜻한 이별을 원하는 너에게 27. 오늘도 자는 척하다 28. 오래지 않아 추억이 바닥 나거든 <죽을 만큼 사랑해도 죽지 않아> 19. 잠 못 드는 밤. 뒤척뒤척 하다 겨우 잠들다. 개운찮은 눈 비비며 일어나 전화를 걸어, '하도 네가 보고파서 잠을 못 잤다.' 투정이다. 연애라는 범죄는 공사가 다망하시다. 추위가 유독 맹위를 떨치던 2월이었다. 고3이 되면서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바로 반 배정이었다. 놀랍게도 여재인과 남태양, 오승진과 그의 무리들이 다 같은 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근'이 체육 선생님으로서는 처음으로 고3 담임이 되었다는 것보다 놀라웠고, 3학년 교실이 운동부족을 이유로 최고층인 5층으로 이동 지정되었다는 것보다 경악스러웠다. 그 즈음, 학교에서 오승진 무리와 남태양, 여재인의 삼각 구도를 모르는 녀석들은 드물었다.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그 동안 오승진이 여재인을 이겨본 건 딱 두 번이었지만, 남태양은 그 와중에도 언제나 부동의 1등을 고수해왔다. 그건 승진이 재인의 반지를 한 번도 움켜쥘 수 없었다는 뜻이다. 울분을 감추지 못하는 승진과 여유롭게 위로하는 태양의 모습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또 그 소문이 퍼지면서 태양은 어느 새 아이들에게 '반지의 제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좀 인간미가 없긴 하지만 재인이나 승진을 대하는 모습도 지켜본 바, 아이들은 '남태양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는 인식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지나가다 태양에게 말 걸어오는 녀석들이 솔솔찮게 늘어났다. 나희웅. 왕선민. 백재훈. 그러니까 오승진의 그 꼬봉 무리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남태양! 어디 가냐?] [복도.] [여기가 복돈데?] [2층 복도.] 대답 한 번 친절하다. '그러니까 무슨 2층 복도?' 이렇게 물었다가는 '여기 본관 2층 복도.'라고 대답할 것 같아서 희웅은 제 눈밑의 조그만 칼자국 흉터를 문지르며 한숨을 쉰다. [너 이제 우리들이랑 같은 반 된 건 아냐?] [당연히 모른다.] 소식통 느린 건 알겠는데, 뭐가 저렇게 당당하냐?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은 태양의 대답이 참으로 어이 없는 세 사람이다. 목이 항상 팍 쉬어 허스키의 절정을 보여주는 선민이 놈이 팔짱을 끼고 앞으로 나서며, 툭 던지듯이 말한다. [이젠 알아라. 그리고 각오해.] 피식. 태양이 웃는다. 어어, 저 반응의 의미는 뭐냐? 나름대로는 무게 잡고 한 말인데 저런 웃음은 곤란한 것이다. 선민은 대놓고 기분이 나빠지려는 중이다. 남태양은 늘 저렇다. 특별히 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여유가 그 곁에서 떠나지 않는 느낌. 선민의 찢어져 올라붙은 눈이 더욱 가늘어질 무렵, 태양은 '그래, 그래. 어디 말해 봐.' 라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뭘 각오할까?] 쳇. 폼 잡는 건 여전하다. [1년 내내 널 괴롭혀주마. 우리가 책임 지고.] 씨익 웃는 남태양. 선민은 저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열어 보고 싶다. 으르렁거리는 저희 세 사람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 오승진과 여재인에 이어 녀석이 세 번째다. 그 때 태양이 참으로 의외의 충고를 던진다. [책임은 권리를 얻을 때 따르는 거다. 너희한테는 무슨 권리가 있지?] 어버버. 아마도 그런 표정일 것이다. 희웅, 선민, 재훈, 이들 셋이 동시에 입을 허 벌린다. 겉 껍데기만 봐도 멀미나는 정치, 윤리 교과서처럼 읊어대는 남태양. [오승진 꼬봉 짓거리에 책임감을 발휘하기 전에, 너희의 권리부터 찾아.] 그리고는 척 등을 돌려 멀어진다. 뭐라는 거냐? 굉장히 쓸데 없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저거 바보 아냐?' 나직하게 묻는 날씬한 재훈을 올려다보며, 살찐 칼자국 희웅이 '야, 입 좀 다물고 말해. 니가 더 바보 같잖아.' 한다. '입 다물고 어떻게 말해!' 성질을 부리는 재훈에게, 여전히 태양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 선민이 낮게 지껄인다. [그러니까 희웅이 말은, 음…… 속으로 말하라는 뜻 아닐까?] 바보 삼형제가 따로 없다. 미술실 문을 열자, 마른 물감 냄새가 희미하게 맡아졌다. 태양은 가만히 문틀에 기대서서 미술실 안 풍경을 지켜본다. 채광이 좋은 창가에 앉아서 정수 녀석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리다 만 아크릴화가 아직 다 마르지 않아서 그의 앞머리에 쓸릴 위기에 놓여 있다. 갑자기 하얀 손 하나가 정수의 어깨로 가 얹히더니 그를 가만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놓는다. 깨우는 대신 정수의 그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하얀 손의 주인이 쿡 웃는다. 그리고는 물통에 빠져 있던 커다란 붓을 들어 살짝 헝겊에 닦더니 물감을 푹 덜어내어 캔버스 위에 착 놓아 버렸다. 이런! 아무리 장난이 심해도 그렇지, 친구의 작품 위에다 저러는 건 좀 지나치다 싶다. 다 지켜보면서도 말리지 못한 태양까지 마음 한구석이 캥길 정도니, 이거 원. 슬쩍 다가가려는데, 붓을 든 녀석이 살랑 살랑 창가로 가서 팔을 밖으로 쭉 뻗는다. 그리고 2층까지 커다랗게 자란 복자기단풍나무의 잎을 똑 따내 팔랑 팔랑 털며 돌아온다. 씨익. 혼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더니 아까의 그 물감 위에 폭 하고 눌러얹어 버린다. [아앗!] 언제 깼는지 정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자신의 작품에 닥친 최대 위기를 느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태양이 그 모습에 낮게 혀를 차는데, 믿을 수 없게도 정수의 이미가 환해진다. [굉장해! 이거 내 꺼야?] [응! 맘에 들어?] [미완성의 마지막 잎새……. 완벽해, 재인아!] 정수는 완전히 감격한 표정이다. 재인은 뿌듯해 못살겠다는 얼굴이다. 태양은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간다. [소설 속의 마지막 잎새는 갈색이었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빨갛잖아.] [소설의 재해석이지. 빨간 건 붉은 피의 생명력을 의미하거든. 그렇지, 정수야?] 동의를 구하며 재인이 돌아보자, 정수란 놈은 금세 얼굴이 발그작작해져서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네 놈들한테 뭘 바라겠냐? 그런 심정이 들어 속으로 혀를 차는 태양이다. 그런 그를 돌아보며 '거 봐.' 하는 표정으로 방긋 웃는 재인이다. 채광이 좋은 미술실은 재인을 위한 맞춤 공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포근하고 아른하게 그의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를 감싸고 있다. 태양은 동의도 반대도 아닌 미소를 지으며 작은 별의 뺨을 가만히 잡는다. '키스 하고 싶어?' 태양을 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젖힌 재인이 눈으로 물어온다. 둘만의 암묵적인 코드가 되어버린 몇 가지 행동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재인의 한 쪽 뺨을 살짝 꼬집는 것이다. [정수야, 교실에 먼저 갈래? 뒷정리는 태양이한테 부탁하자.] 재인이 웃으며 말하자,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소지품을 챙겼다. 단짝에서 밀려난 섭섭함을 다 감추진 못하지만, 결국 그도 인정하는 것이다. 오승진에게서 당당히 반지를 찾아준 태양에게 스스로 견줄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그렇다고 재인이 저에게 이전보다 소홀히 대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살짝 입술을 깨물며 사라지는 정수의 뒷모습을, 한 소년은 서서, 다른 한 소년은 앉아서 나란히 바라본다. [이 많은 뒷정리를 나보고 다 하라고?] 태양은 널려 있는 물통과 붓, 마르지 않은 캔버스들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묻는다. 아무도 없는 미술실. 먼지가 부유하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한 공간에 그의 음성이 퍼진다. 재인은 대답 없이 방긋 웃으며 두 팔을 위로 들어올린다. 안아달라는 듯한 그 포즈를 고개를 갸웃한 채 내려다보던 태양은,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몸을 숙여 재인을 자신의 품으로 안아올린다. 태양의 목 뒤로 팔을 감고 매달린 재인이 숨을 들이쉬는 느낌이 꼭 어린 새 같아서 웃음이 난다. 유난히 노래를 못하는 작고 어린 새. [어리광쟁이.] 태양이 짓궂게 말하자, 재인이 그의 피부를 꾹 누르며 묻는다. [태양, 너 목 뒤에 점 있다. 그거 알아?] [당연히…….] [모른다고? 푸훗.] 태양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재인이 가로챈다. [왜 웃어?] [그러게 너는 왜 항상 모른다는 말 앞에 '당연히'를 붙여?] 창틀 위에 재인을 내려놓고 그 곁에 태양도 엉덩이를 살짝 걸터 앉는다. 긴 다리가 교차해 바닥까지 쭉 뻗은 그 모습을 재인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내가 모른다면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 몰라도 된다거나,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다거나.] [굉장히 오만하게 느껴지는 답이네.] [그래?] [응. 마치 꼭 알아야 할 것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투잖아.] […….] 그게 싫은가? 문득 태양은 재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오만하게 느껴져 싫은 건가? 자신이 그러지 말기를 바라는가? 하지만 재인은 그런 태양을 보지 않은 채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긴 그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태양을 보면 자신을 너무 내몰고 있는 것 같아.] [내몰고 있다?] [모르면 더 편해질 수 있는 것들도 굳이 알려고 하고, 알게 된 것들이 아무리 감당 못하게 힘들어도 그냥 쓴 약 삼키는 사람처럼 눈 한 번 질끈 감고 말잖아. 알아야 하는 걸 아는 것도 좋지만, 알고 싶은 걸 아는 건 더 좋지. 뭐든 잘 하는 건 좋지만, 나는 그걸 즐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네가 우선 좋아야지. 잘 해야 하는 거라서 잘 하는 건 뭔가 부족하지 않니? 잘 하고 싶어서 잘 하는 것과 그건 엄연히 다르니까.] 그게 달라? 태양은 놀란 심정으로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재인을 돌아본다. [어떻게 다르지?] [예를 들면, 너는 하늘을 날고 싶어해. 그런데 축구 시합이 있는 거야. 그럼 너는 하늘을 나는 법을 연구하기보다 당연히 축구 연습을 하겠지. '당연히' 해야 할 것은 축구니까. '당연히' 하늘은 날 수 없는 거고.] [……!] [그래서 넌 결국 하늘을 나는 법을 당연히 모를 거야, 앞으로도 쭉.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은 그렇게 네 인생에서 배제되어 갈지도 모르지.] 안타까운 음성. 옆에서 바라보는 재인의 눈가가 아래로 내려와 조금 슬퍼 보인다. [꼭 잘 하는 것만 해야 돼? 못하는 것에 열중하면 안 되는 거야? 왜? 성공은 그렇게 얻을 수 없나? 좋아하는 걸 하면 절대 강해질 수 없는 걸까?] […….] 태양의 심장이 뛴다. 뇌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다. 가끔 이렇게 정곡을 찔러 말할 때의 재인은 반박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햇살을 등지고 태양열을 충전하는 사람처럼 재인은 가만히 어깨에 기대왔다. 낮은 한숨. 꼭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태양은 재인의 깊은 숨에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낀다. [나 그거 하면…….] 그래서 더 참지 못하고 꽉 잠긴 음성을 추스려 입을 연다. [으응?] [나……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면…….] […….] [성공할 수 없더라도 노력하고 있으면, 너 내 옆에서 평생 살래?] [……!] [좋아하는 거 하면서…… 잘은 못 해도 당연하지 않게 그렇게 살면, 너 죽을 때까지 내 곁에 있을래?] 어느 새 태양은 주먹을 꼭 쥐고 있다. 태어나 처음 던진 질문. 자신이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물음이다. 누군가를, 아니 세상이 가진 무엇에 대해 이처럼 간절했던 적이 있었을까? 놓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이미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이 아플 정도라니. 돌아보는 재인의 눈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투명한 반짝임. 빛가루가 고스란히 묻은 속눈썹을 털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미소를, 그래서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해 보인다. 미세한 분처럼 날리는 귀여운 웃음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곧 이어 사분하게 이어진 작은 별의 속삭임이 태양의 입술에 안착한다. [어리광쟁이.] [음.] 살짝 맞닿은 입술을 떼고 태양의 코를 쥐며 재인이 웃는다. [그래도 태양은 말 잘 듣는 착한 어리광쟁이야.] 재인의 장난스런 손을 피하며 태양이 그의 어깨를 유리창에 밀어붙인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갇혀 버린 작은 별의 얼굴을 두 손에 가득 잡고 태양은 만족스레 웃는다. 이 순간만은……. 혼자 진수성찬을 앞에 둔 사람처럼 여유롭고 황홀한 기쁨이, 늘 무표정하던 소년의 온 몸에 차오르고 있음이 유독 선명하던 오후였다. 남태양이 말했다. 책임은 권리를 얻을 때 따라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희웅 무리에게 오승진으로부터 권리를 먼저 찾으라고 충고를 했다. 아마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세 사람이 오승진 때문에 태양 자신을 견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렇다. 희웅을 비롯한 세 사람은 오승진과 '함께' 남태양을 어찌해 버리고 싶어한다.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재인.' 요거 하나다. 처음부터 그랬었다. 눈이 작은 선민과 말라깽이 재훈은 희웅의 불알친구들이다.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면서 적당히 궁상 맞을 정도로 가난하고, 누구에게도 기대를 안 받을 만큼 충분히 공부를 못했다. 사실 그것 외엔 서로 공통점이 없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셋은 불량스런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비로소 누가 봐도 기가 막힌 한 세트로 인정 받으며 자라온 인물들이다. 그런 그들의 전공 분야 중 하나였던 일명 '삥 뜯기'에서 최대 난관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중3 때 일어나고 말았었다. [돈 좀 있냐?] [당연하지.] [그럼 좀 내놔 봐.] [뭐 하러?] 패싸움에 잘못 휘말려 목에 주먹을 맞는 바람에 성대가 파열된 적이 있는 선민이 그 거슬리는 음성으로 음산하게 요구했을 때, 상대 녀석이 저렇게 반문한 것이다. '뭐 하러?' 라고. 꼭 우연히 만난 친구가 물어온 것처럼 스스럼 없는 말투다. '돈 없는데요.'도 아니고, '한 번만 봐주세요.'는 더더욱 아니다. 저게 곧, '제발 때려주세요.' 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 씹! 잔말 말고 내놔.] [그니까 내가 돈 주면 뭐에 쓸 건데?] 전혀 겁을 먹지 않은 것도 아닌데,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어오던 녀석. 머리를 삐죽삐죽하게 잘라세운 게 여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게 아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한 발을 척 재훈의 보폭 사이로 디밀고 서 있다. [걸레가 되도록 맞고 뺏길래, 지금 그냥 얌전히 내놓을래?] [때리고 나서는 어디다 쓸 건지 얘기해주냐?] 어찌 보면 정말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 사람으로서는 그가 자신들을 놀리고 있다는 자각 외엔 아무런 해석을 불러올 수 없었다. [이 미친 쉑! 일단 죽여! 죽이자고!] 제일 날렵한 재훈의 주먹이 당돌한 녀석의 옆구리로 날아갔다. 억 소리 한 번 못지르고 허리를 꺾은 놈의 뒤통수를 다시 한 번 팔꿈치로 갈긴다. 금방 주저앉은 녀석은 아예 드러누워 버리더니 있는 대로 인상을 팍 쓰고서 물어왔다. [내 이름 뭐게? 너희 셋 중에 알아맞추는 놈한테 내 돈 다 준다!] 어이 없다는 듯 마주보는 희웅과 선민. 그리고 이미 발을 치켜올려 찍어내릴 준비가 된 재훈. 하지만 녀석은 피할 생각도 없이 희죽 웃으며 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자못 궁금해 죽겠다는 듯. 자, 누가누가 맞출 것인가! 기대가 된다는 듯. 어차피 놈의 이름을 알려면 공책이든 지갑이든 뭐든 꺼내 봐야 한다. 그런데 책가방조차 들지 않은 놈의 몸을 더듬으려니 영 찝찝할 수밖에. 결국 그 날, 밟혀 죽은 바퀴벌레처럼 납작하게 당한 녀석을 향해 텁텁한 침까지 뱉어주고 셋은 씩씩대며 돌아섰다. 다신 저런 새끼 상대도 하지 말자고 쇠된 다짐을 해대면서. 멀리서라도 보이면 싹 씹고 모른 척 돌아가자고도 떠들었다. 다음 날 오후 교문 앞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주 쉽게 지켜질 약속이라 굳게 믿었다. [청소도 안 하는 것들이 뭐 하느라 이제 나오냐? 빠닥빠닥 못 다녀?] 깨칠하게 씨부렁거리는 놈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시퍼런 멍은 둘째 치고라도 엄청난 붓기로 인해, 제법 날카롭게 솟아있던 코도 다 묻혔다. 으슥한 밤에 홀로 만나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기에 충분할 상을 하고 당당히 서 있는 녀석. 희웅은 기겁을 해서 한 발 뒤로 재빨리 물러서며 외쳤다. [너 뭐야!] 재훈도 선민도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굳힌다. 주섬주섬 상의 안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는 놈 때문에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다. 혹시 복수하러 온 게 아닐까? 지금 속에서 꺼내려는 건 서, 설마 총? 그 때였다. 기괴한 얼굴을 들고 씨익 미소로 추정되는 움직임을 보인 그가 세 사람을 향해 척 척 걸어오더니 팔을 쭉 뻗으며 외쳤다. [나, 오승진!] 그가 내민 것은 지갑에 얌전히 꽂혀 있는 자신의 학생증이었다. 나름대로는 해맑게 웃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 날 승진은 또 다시 세 사람에게 질질 끌려가 안 그래도 부어오른 살이 터지도록 맞는다. 제 돈은 안 받는다고 거부하는 세 사람에게 끊임 없이 이유를 물어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이없게시리 승진은 아프다고 신경질을 내면서도 그만 때리라거나 반격을 해오지도 않았다. 질리게 만드는 승진의 괴짜스러움은, 단순한 성격의 중학생 셋이 겁을 집어먹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승진은, 고지식하고 숨막히는 집안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일시적으로 살짝 돈 척하고 되도록 막 살아 보기 위해 가출을 했던 놈이었다. 판사, 의사, 검사, 정치가 등등 없는 게 없는 집안에서 사는 게 얼마나 큰 고행인가를 시도 때도 없이 역설하는 것 외에는 어울려 다니기에 그리 나쁜 놈은 아니었다. 잘난 배경도 그다지 부러울 게 없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심어준, 썩 쓸만한 친구이기도 했다. 희웅은 돈과 명예를 우습게 보는 승진의 태도가 신선했고, 선민은 자신보다 더 재수 없는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재훈은 언듯 언듯 드러나는 승진의 어린애 같은 무식한 열정을 높이 샀다. 그들 사이의 불문율 중 하나는, '절대 승진에게 돈을 쓰게 하지 않는다.' 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우정 때문이었는데, 만약 승진이 그들과 함께 다니면서 쉽게 돈을 쓰게 된다면 아슬아슬하게 엮인 자신들의 관계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데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삥 뜯다 만난 인연이 삥 뜯는 관계로 쭉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렵사리 고안해낸, 그들 나름대로의 우정방정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생각을 하든 승진과 희웅, 선민, 재훈은 동등했다. 누가 누구의 꼬봉일 리 없다. 의리와 각출. 이것만은 자신 있으니까. 그러니 태양은 잘 못 생각한 것이다. 태양을 괴롭힐 책임은 오승진에게서 받은 게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다정하고, 귀여운 존재를 독점하려는 그에 대한 전쟁 선포! 사실 좀 유치하고 쪽팔리고 어이 없긴 하지만, 이들 네 사람이 가장 돈독해진 시기가 바로 여재인이 나타난 그 해부터였던 것이다. 집단 스토킹이 피곤했던 재인은 결국 성적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그 도전에 그나마 가장 근접하게 응할 수 있는 녀석이 바로 오승진이었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들이 여지껏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들 중 누구도 재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아무튼 그렇다 해도 태양이 곱게 봐질 리는 없다. 굴러온 호박이 가운데 떨어진 동전을 깔고 앉은 형상이 아닌가? 재인의 곁에는 어느 새 매순간 태양이 감싸듯 붙어다녔으니까. [태양아! 같이 가!] 고3의 봄이 오고 나서도, 저렇게 소리치며 달려가는 재인의 모습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정수인가 하는 놈이 미대 진학상담 받는데 저도 기다려준다고, 먼저 가라 했다다니. 그나저나 교문까지의 내리막길을 달려오는 재인이 좀 위태로워서 희웅은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태양도 자신과 같은 염려를 한 건지 돌아보는 즉시 재인 쪽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젠장이다! 하필이면 중간 쯤에 서 있는 자신 앞에서 둘이 만날 건 또 뭐람. 쒸! [힘들게 왜 올라와? 내가 내려갈 텐데.] 헉헉대는 숨을 가다듬으며 재인이 묻는다. [너 넘어질까 봐.] 태양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내가 넘어지면 같이 다니기 부끄럽니?] [아프잖아.] [그거야…… 내가 아프지.] [그게 더 싫다.] 무뚝뚝하게 내뱉은 태양이 돌아서자, 재인이 수첩을 꺼내 뭔가를 빠르게 적는다. 요즘 자주 저러더라. 뭔가 묻고 태양이 답하면 끄적끄적. 꼭 설문조사 하는 사람처럼. 재인은 벌어진 거리를 재빨리 좁히며 다가가 태양의 손에 자신의 손을 넣는다. 그러면 저 태양인지 뭔지 하는 놈은 그 손을 당겨 재인을 지 곁에 꼭 붙이고 걷는 거다. 수십번 목격한 그 움직임이 어김 없이 자연스러워서 희웅은 부러움과 감탄을 동시에 흘린다. 그나저나, 여재인이 아픈 게 자기가 아픈 것보다 더 싫다니. 으윽! 남태양. 대놓고 강적이기도 하지만 은근히 강적이기도 하다. 쳇! [어제 꿈을 꿨는데 뭔지 몰라도 굉장히 끔찍해서 중간에 깼어.] 걷다 보니 어느 새 재인의 집 앞까지 다 와 있었다. 해는 져서 골목은 이미 어둑어둑한 밤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간간히 지나는 사람들도 귀가를 서두르느라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다. 태양은 잡고 있는 재인의 손을 놓지 않는다. 초인종을 누를 생각은 않고서 재인도 문득 저런 말을 꺼낸다. [깜깜한 방 안에서 눈을 뜨고 혼자 누워 있는데 나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알고 싶다.] '당연히 모른다.'란 대답이 아니다. 태양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재인이 싱긋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듣고 나서 웃으면 안 돼.] [안 웃을게.] [진짜야. 웃으면 나 상처 입을 거야.] [알았어. 안 웃는다고.]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럴까? 그가 했다는 생각이 진짜 우스워서 내가 참지 못하면 어쩌지? 슬쩍 고민이 되기 시작할 무렵, 재인이 입을 연다. [조용한데다 어둡고 조금 무섭고 그랬거든. 그런데, 갑자기 니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깜빡 깜빡. 재인이 그렇게 말해놓고는 태양의 반응을 유심히 쳐다보며 살핀다. 조용한데다 어둡고 조금 불안한 상태. 바로 앞에 있는 태양의 침묵을 올려다본다. 설마 웃으려는 건 아니겠지? [여재인.] [응?] [하나도 안 우습잖아.] 태양은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재인을 내려다보고 있다. 잡고 있는 손을 놓고서 어깨를 감싸듯 잡으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그걸 네가 웃으면서 말했다면, 내가 상처 입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화를 하지. 바보야, 전화는 뒀다 뭐에 써?] […….] [필요하면,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는 전화하면 되잖아.] 조금 화난다는 듯 강조해서 말하는 태양.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재인. 끄덕끄덕. 그리고 묻는다. [너도 밤에 자다가 내 생각 한 적 있어?] 태양은 마치 너무 쉬운 문제를 받은 사람처럼 허탈하게 웃는다. 바보. 그렇게 작게 읊조리고는 재인 대신 뒤에 있는 초인종을 누른다. 그런 반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재인이 태양의 가슴을 밀치며 말했다. [맛있는 거 먹다가 나 떠올린 적 있어?] […….] [너 길 가다가 문득 나 뭐 하나 궁금했던 적은 있어? 공부하다가 내 생각 나서 책 덮은 적도 없지?] […….] 태양은 대답이 없다. 그 침묵이 재인을 화나게 하나 보다. 되게 억울한가 보다. 그러고 보니 재인은 태양 때문에 자주 그러기도 하나 보다. [너,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내 뒤통수 찾아 두리번거린 적 있냐? 수업 중에 내 옆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필기하던 거 멈춘 적은 있어? 음악 듣다가 꼭 나랑 니 얘기 같아서 두 번, 세 번 돌려 들은 적도 없어?] […….] [……나쁜 놈!] [내가 왜 나쁜 놈이야?]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돌아서는 재인의 어깨를 꽉 잡고 태양이 획 돌린다. 어느 새 눈물이 글썽한 재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탄식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녀석을 좋아한다는 게 그로선 쉽지 않나 보다. 눈을 꼭 감아 버린 재인의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들자, 속상한 듯 손끝으로 그 물기를 찍어내며 태양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바보야! 난 밤마다 니 생각 하느라 잠을 못 자!] [……!] [난 말이다! 니 생각에 정신 파느라 음식 맛도 모르겠고, 조금이라도 너 빨리 보려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등교한다! 무슨 노래를 들어도 네 음정 안 맞는 메기보다 시시하고, 수업 중엔 네 뒤통수를 너무 많이 봐서 선생님께 죄송한 적도 많아! 이래도 내가 나쁜 놈이냐? 나쁜 놈이야?] 저도 모르게 격하게 뱉어진 말들. 그걸 다시 주워담을 길은 없어 보인다. 난감함에 재인의 얼굴만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역시 놀란 듯 굳어진 작은 별. 하지만 곧 제 어깨를 붙잡은 태양의 손을 풀더니 재인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든다. [뭐 하는 거냐?] [다시 한 번 천천히 불러 줄래?] 볼펜 끝을 톡톡 수첩에 두드리며 재인이 요구한다. 태양이 인상을 쓰며 입을 꾹 다물자, 그제야 싱긋 재인이 웃는다. 젖은 눈꼬리가 순하게 휘어지는 모습이 참……. [너, 아무래도 나 좋아하는 것 같다.] [……!] [너도 나도, 우리 서로 좋아하는 게 분명해.] 그러면서 앞으로 내밀어지는 재인의 수첩. 태양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걸 받아들고 읽어내리기 시작한다. + 태양은 내가 웃으면 항상 따라 웃는다. + 태양은 내 손을 한 번 잡으면 먼저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 태양은 내가 그 날 화장실에 몇 번 갔는지 다 안다. + 태양은 내가 밥과 반찬을 남겼는지 꼭 확인한다. + ........................................................ + 태양은 자신보다 내가 아픈 걸 더 싫어한다. = 태양은 날 좋아한다. 탕! 탕! 탕! 이건……! 많이 속상했던 걸까? '좋아하지 않는다.'는 태양의 말에 상처 입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씩 또박또박 쓰여진 문장들이 곱게 정렬되어 있는 수첩. 그 동안 재인이 기록해온, 아니 무언가 증명하고 싶은 마음을 새겨놓은……. 태양은 말 없이 그 수첩을 재인에게 돌려준다. 실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래도 나 안 좋아해? 라고 묻는 듯한 야무진 글씨들이 너무도 재인다워서. 말문이 막힌다. 반박할 수도 없고, 웃어 넘길 수도 없다. 곧이어 다시 입을 연 재인은 그런 태양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조용히 달랜다. [태양아, 나도 그거 알아. 좋아하는 게 생긴다는 건, 약점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거잖아. 내가 좋아하는 걸 누가 깔보듯이 말하기만 해도 막 미칠 것처럼 화나고, 그 좋아하는 대상이 흔들리면 같이 파도에 휩쓸리고 온통 난장판이 되잖아. 마음도 약해지고, 세상도 두려워지지. 그래도, 그걸 다 알고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약점이 아닌 게 아닐까? 너 좋아하는 사람 지켜주고 싶다며.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약점이 될 수는 없잖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두려워하고 숨기는 게 진짜 약점일 거야. 나는 있잖아, 태양이 네가 좋아. 그걸 막거나 멈추고 싶지 않아. 난 아무 것도 두렵지가 않아. 어젯밤 생각한 것처럼 너만 옆에 있으면 말이야. 나…… 되게 강한가 봐. 그렇지?] [……그래.] 속삭이듯 뱉어진 태양의 대답. 맞다. 나도 안다. 넌 강한 사람이다. 알면 알수록,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잘 알겠더라. 너의 숨겨진 강함이 바로 너의 알 수 없는 특별함이라는 걸. 그 반짝임들은 바로 너의 그 강한 성정이 자아낸 빛이었다는 걸. [나는 그래도, 니가 날 지켜줬으면 좋겠어. 너에게 소중한 사람 되고 싶어.] 그 말을 하고선 고개를 푹 숙인다. 부끄러운가 보다. 그 모습이 미치게 사랑스럽다. 태양은 가슴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재인을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2월의 차가운 바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꼭꼭 감싼 채, 여전히 귓가가 발개져 있는, 작지만 따스하고 총명한 별에게 낮게 속삭인다. [그럼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내가 널 지켜줄 수 있게.] 한참동안이나 둘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그 자리에 서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조차 알지 못한 채, 재인은 태양의 품에 얼굴을 묻고, 태양은 재인의 정수리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하나의 약점이지만, 그 좋아하는 대상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약점이 될 수 없다, 한다. 어쩌면 재인의 그 말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태양은 지금 이 순간처럼 자신이 강하게 느껴진 적이 없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둘은 아쉬운 듯 천천히 포옹을 풀고 떨어졌다. 그리고 살짝 밀어본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당혹스러움에 재인이 한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새어나온다.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어준 사람이 누군지는 알만 했다. [해인이 형…….] [응?] 재인의 중얼거림에 태양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러면 재인이 인사 대신, 씁쓸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던진다. [이제 난, 내가 겪는 모든 것들이 네가 지켜줄 수 있는 일이길 기도해야겠다.] <이것은 한밤중에 할 일이다> 우선 불을 모두 끄고 방 가운데 앉아 온 정신을 두 귀에 모으고 숨을 죽인다. 그럼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심장의 주인을 믿으면 된다. 이것이 전부이다. 들리지 않는다면, 죽은 토끼의 두 귀라도 빌릴 일이다. 20. [검사 받자.] [다음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팔짱을 끼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해인이 다가오며 불쑥 말을 던졌다. 또 그 얘긴가 싶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재인의 팔을 잡아 돌려세우며 해인이 낮게 묻는다. [너 요즘 먹는 거 하루에 몇 번 게워내냐?] [……!]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너 치약 냄새 나더라. 아침에 일어나서 안 쓰러지고 방에서 나온 적도 까마득하지? 밥알보다 알약을 더 수북이 삼키는 거 내가 다 봤는데……!] 잔소리쟁이, 여해인. 재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하고 싶은 말 다 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나? 아, 오늘은 좀 피곤한데. [검사 안 받는단 말 아냐. 받아. 받을 거야.] [그러니까 언제!] [다음에!] 다그치는 해인에게 재인도 소리를 치고 말았다. 하얀 낯빛으로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고르며 다시 말한다. [형, 잊었나 본데 나 고3이야.] [여재인, 잊었나 본데 너 환자야.] [환자 아냐! 그냥 면역력이…….] [그것도 과도하게 약하면 환자야! 착각하지 말라고. 너 정상 아냐!] 눈을 뜨고 바로 앞에서 엄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해인을 마주본다. 오늘따라 왜 이리 집요하게 구는 걸까,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형, 정말 싫어.] [재인아.] [진짜 못됐어!] 있는 힘껏 해인의 팔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막 방의 문고리를 잡아 여는데 뒤에서 차분해진 해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혹시 대문 앞에 같이 있던 그 놈 때문이냐?] [무슨 말이야?] […….] 말도 안 되는 억지인 줄 둘 다 안다. 재인과 해인은 팽팽하게 서로 노려보며 서 있다. [제발 나한테서 신경 좀 꺼. 나 괜찮아. 가만 내버려두면 백 살까지도 살 거라고.] [그럼 네 방 휴지통 속에 들어있던 빈 진통제 세 통은 뭐냐?] [……!] [고3 스트레스 운운하지 마. 너 공부 좋아하는 놈인 거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 없어.] [형!] [꼬리 달지 마. 너 무조건 이번 주 안에 검사 받게 한다. 그거 외엔 내 스케줄 다 뺐으니까 알아서 해.] 저래서일 거다. 자신에게 저처럼 완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해인이 형밖에 없어서, 가족들 모두 숨어버린 텅 빈 집안에 그만 혼자 남아 마음 모질게 먹고 재인이 검사를 받도록 관철시키는 일을 떠맡은 것이다. 도망가면 잡아다 묶어놓고 검사실에 집어넣을 사람이다. 모두들 모른 척 했지만 알고 있었나 보다. 평소와 다른 통증들이 자신의 몸을 지배해가고 있는 사실을 말이다.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서 눈 돌리는 사람처럼, 재인은 그런 아픔들이 마치 딴 사람의 일인 양 안간힘을 써서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처럼 통증으로 혼자 깨어날 때면 비로소 무시할 수 없는 공포가 찾아왔다. 때때로 눈이 빠질 것처럼 쑤시고 구토증이 일었다. 귀가 멍할 때마다 머리 속에 징이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호들갑 패밀리를 너무 우습게 봤다. 그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재인의 표정에서 가장 먼저 병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었다. 재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 위에 털썩 눕는다.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미안함과 아픔들로부터 멀리. 태양의 크고 따스한 손을 잡고서 배를 타고 아주 먼 바다로 나가도 좋겠다 싶다. 그 무렵 재인은, 하나의 통증이 익숙해질 무렵엔 새로운 통증이 찾아와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전교 조례가 있을 거라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5층, 3학년 교실이다. 게다가 모의고사를 치는 월요일 아침이다. 3학년은 좀 빼주지, 라는 누군가의 한숨을 들으며 태양은 일어섰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라 재인이 자켓 속에 옷을 두둑히 입었나 확인부터 할 요량으로 그답지 않게 서두른 것이다. 그 때, 척 하고 자신의 앞에 빠르게 놓여지는 다리를 발견한다. 우뚝 걸음을 멈춘 태양은 자리에 앉은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날 더러 걸려 넘어져 달라는 뜻이냐? 아니면 걷어차 달라는 뜻?] [씨발.] 선민이 슬쩍 다리를 거두어가며 태양을 쫙 흘겨본다. 그 눈매가 제법 매서워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빠르게 교실을 나선다. [애쓴다.] 유치하지만 나름 귀엽다 싶어 태양이 말하며 지나치려 하자, 그것에 더 열 받은 표정을 선민이 벌떡 일어나 그의 소매를 확 붙잡았다. 활활 타오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지만 그보다 말투가 더 매섭다. [계속 그렇게 건방 떨어라, 남태양. 언젠가 한꺼번에 뭉개줄 테니.] [안 그래도 기대하고 있다. 기다리기 좀 지루하긴 하지만.] 태양은 선민의 손을 강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팔을 뿌리친다. 이번엔 웃지 않는다. 그런 표정은 처음이라 선민은 내심 당황하는 중이다. 기선 제압을 하려다 괜히 건드린 꼴은 아닌가 싶어 기분이 급속도로 저하된다. 태양은 마지막으로 무표정한 시선을 선민에게 던진 뒤, 곧장 재인에게 다가갔다. [머플러라도 둘러. 오늘 바람도 좀 불더라.] 저 부드러운 말투라니. 좀전의 그 차가운 대꾸와 같은 입에서 나왔다는 게 안 믿어진다. 재인의 옷깃을 잡아당겨 슬쩍 여며주는 손길까지도 지켜보는 사람의 어깨가 떨릴 만큼 다정하고 살갑기 그지없다. [혼자 두르고 나가면 튈 텐데.] 걱정스런 재인의 말에, [그럼 나도 두를까?] 한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춘 3월에 저 키의 남태양이 머플러를 두르고 나가면 참 볼 만 하겠다. 눈을 빛내며 관심 깊게 지켜보는데, 재인이 피식 웃으며 '관둬.' 한다. 왜, 재밌을 것 같은데. 그냥 두지. 하지만 지켜보던 선민보다 더 실망한 듯한 태양의 표정이 짧게 스쳐 지나간다. 저들을 커플이라 부르긴 싫지만 아무튼 참 구경하기에 지루하지 않는 놈들이다. 희웅과 승진이 불러 급히 교실을 빠져나와야 했던 선민은, 체온을 미리 나눠 주겠다며 재인을 꼭 끌어안던 태양은 미처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신입생 중에서 몇 놈이 학교 앞에서 사고를 쳤나 보다. 조례라기보다는 훈계로 이어지는 긴 시간을 운동장에 서서 버텨야 했다. 재인은, 몰려오는 두통과 멍멍해지는 귀로 인해 교장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목에 단단히 두른 머플러는 갑갑하고, 차갑게 식은 손끝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뒤에 서 있던 녀석이 재인의 흔들리는 상체를 보고 놀라 작게 괜찮냐고 묻는 것 같다. 하지만 재인은 대답할 수가 없다. 돌아보는 순간 현기증으로 쓰러질 게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다. 머리 속이 터질 것처럼 아파서 움직였다간 구토증을 일으킬 거다. 어떡해……. 어떡하지……. 재인은 더 이상 자신이 버티지 못할 거라는 공포감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쓰러지고 싶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는데. 말을 할 수도 없는데. 교실까지 어떻게 가지? 진통제! 맞다, 내가 약을 챙겨 왔던가? 아닌가? 잊을까 봐 가방과 코트 호주머니 여기 저기에 넣었으니 있긴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약을 먹고나서 다 올려 버리면 아무 소용 없는데. 그냥 이대로 따듯하고 푹신한 침대에 눕고만 싶다. 아니면 태양, 크고 따스한 태양이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재인은, 키가 커서 저 맨 뒤쪽에 서 있을 태양을 떠올린다. 아무 표정 없이 교단을 올라다보고 있을 그 조각처럼 잘 생긴 얼굴을. 움직이지 않는 바른 자태와 넓고 단단한 가슴을. 그리고 정직하고 곧은 시선을. 그 와중에도 교장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연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재인에겐 온갖 소리가 뭉쳐져 내는 끔찍한 화음만 들려올 뿐이다. 실은 이렇게까지 아팠던 적은 없었다. 요즘 그래서 더 무섭고 힘들었다. 아프다는 걸 인정하면 덜컥 큰 병명이 자신에게 명찰처럼 붙을까 봐, 아니 주위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상처 입고 힘겨워 할까봐 말할 수가 없다. 어릴 적 의사는 재인에게, 병은 환자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말했다. 그러니 병을 미워만 하지 말고, 자연스레 물러가게 하라 했다. 지금껏 잘 버텨왔는데……. 그건 정말 뿌듯하게 말할 수 있다.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면서, 애써 밝게 웃고, 꿋꿋하게 이겨왔는지 모른다. 몸 속의 유약한 자신을 꾸짖고, 아픔을 타이르고 때론 쓰다듬으면서 지금껏 잘 살아왔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이만큼의 고통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벌을 받는 기분이다. 억울해. 입술을 너무 꼭 깨물었는지 피맛이 느껴진다. 그 쇠 냄새에 욱 하고 비어있는 속이 울컥 짜부라들고 만다. 상체를 급히 접고 쭈그리고 앉았다. 뒤에 있는 녀석이 뭐라고 떠든다. 머리 속에 뭉쳐진 소리들이 더 복잡하게 엉키며, 주파수를 맞추지 않은 라디오 볼륨을 높인 것처럼 시끄러워진다. 제발……! 차가운 땅을 짚고서도 손이 시린 줄 모르겠다. 윙윙 거리며 돌던 바닥이 드디어 자신의 얼굴을 덮쳤다. 재인은 수백 명의 사람들 속에서 혼자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분주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희미한 대화 소리. 커튼 치는 소리. 선명한 소독약 냄새, 선득한 공기, 까슬한 이불, 딱딱한 침대. 눈을 뜨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 병원이구나, 알게 해주는 것들. 재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예상했던 대로 역시 응급실이다. 힘 없이 눈을 다시 감았다가 뜨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이 보인다. 결국 쓰러졌구나. 운동장 한 가운데서, 그 많은 녀석들 앞에서 볼썽사납게 고꾸라졌겠구나. 그 자각이 드는 순간 견디기 힘든 자괴감이 들었다. 태양이 걱정했을 텐데. 가족들 얼굴은 또 어떻게 보나? 다들 몰려와 정신 없이 굴었을 게 분명한데. 어쩐다……. [막내야, 정신이 드냐?] [뭐? 칠성이가 눈을 떴어? 비켜 봐! 아, 쫌 비켜 봐!] 일성이 형을 밀치고 나타난 강인이 형이 자신의 손을 붙들고 덜덜 떤다. [얼마나 아팠어, 그래. 아무데서나 안 쓰러지는 놈이 얼마나 참았냐고, 글쎄.] 계속 중얼거리며 재인의 머리를 쓸고, 뺨을 만지고, 자기 눈가에 눈물을 훔치고 한다. 미치겠다. 재인은 뒤에서 팔짱을 딱 끼고 말 없이 내려다보는 해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재인이 별의 별 검사 다 받고 나서야 여길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못 살아! 끙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의 얼굴에 핏기가 전혀 없다는 게 느껴졌다. 다시 싸해지는 뺨의 감각이 지금 얼마나 창백할지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 같다. [재인아!] [엄마…….] 바닷물 갈라지듯 형들이 양쪽으로 흩어지더니 자그만 체구의 엄마가 나타나셨다. 재인의 손을 덥썩 잡고 눈물을 반은 삼키고 반은 흘리고 계시다. 아빠는 벌써 돌아서 계신다. 어쩌지…….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미안해요.] [또 그런다. 아픈 게 어디 네 탓이냐?] [울지 마세요, 엄마. 제발……. 나 괜찮아. 울지 마요. 응?] 어쩔 수 없이 간절한 눈길로 해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재인이다. 자신 때문에 울고 계신 부모님을 보는 것만큼 속터지는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걸 이해하는지 해인도 입술을 꾹 다물더니 엄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하세요. 재인이도 울겠어요.] [에휴,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예쁜 새끼.] [그 새끼 지금 자야 하니까 일단 모두 나가자고요.] 형의 단호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목소리에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시며 재인의 손을 겨우 놓으신다. [네가 아프니 살 맛이 안난다. 어여 나아라, 막내야.] 기어이 저 말을 던지고 가는 일성이 형. 재인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주먹을 쥐어 본다. 혼자 있고 싶어.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슴 속에 차오른 슬픔을 누르기 위해서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이럴 때마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자신이 미워졌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쓸모 없는 비난을 하지 않기 위해서 아플 때마다, 아파질 걸 예상할 때마다 재인은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정이 넘치는 내 가족들. 그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비참했다. 겨우 혼자 남게 되자, 눈가에 비로소 눈물이 도록 흘러내린다. 베개가 젖어도 할 수 없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죽도록 피곤하다. 눈을 천천히 감는데, 머리맡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아, 태양……. 재인은 재빨리 폴더를 열고 숨차게 말한다. [나야.] [알아. 내가 걸었잖아.] [응.] […….] [지금 어디야?] […….] 전화를 걸어놓고는 줄곧 태양은 말이 없다. 하지만 재인은 알 것 같다. 말로 할 수 없어도 느끼고 있다. [미안. 걱정 많이 했지?] [누가?] [화 났어, 태양?] […….] 화났구나. 네 숨소리가 안 들리잖아. [화내지 마.] […….] [나 아픈데 너까지 화 내면…….] 아까부터 젖어있던 음성이 금세 목구멍 안에 갖히고 만다. 곧이어 귓가에 닿는 낮지만 깊은 한숨소리. 태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렇게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교실에 나랑 같이 남을 수도 있었잖아.] […….] [설마 날 더러 구경하라고 그런 건 아니지?] 이번엔 재인이 말이 없다. [내가 운동장에서도 옆에 서라 그랬잖아. 굳이 앞에 가 서더니 그런 꼴이나 보이고. 진짜 한심하다. 응?] […….] [난 뭐야? 너 그러고 있는 동안 난 뭐하라고 그렇게 멀리 서 있었던 거야? 지켜달라며? 지켜줄 테니까 내가 곁에 딱 붙어 있으라 그랬잖아!] […….] [밥 제대로 먹으라 해도 말 안 듣고, 피곤한 놈들 일일이 상대하지 말라 해도 무시하고. 왜 반항해! 너 뭐가 모자라서 그 쉬운 것들 중에 하나도 제대로 못 해!] […….] 역시 신선해, 태양. 나 이렇게 아플 때 소리 치고 화를 내준 사람, 네가 처음이다. 내가 해야 할 거 딱 딱 짚어 설명해주고, 말 잘 들으라고 꾸짖어주는 것도. 마치 곧 떠날 지도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라 하지도 않고, '하지 마라, 가지 마라.' 참견도 해주고, 아픈 거 숨기느라 멀찍이 떨어져 숨으면 한심하다며 가차 없이 비웃어주는 네가…… 진짜 좋다! 그런데 정말 나는 왜 그 쉬운 것들이 이토록 버거운 걸까? [영양실조라고 하지? 그래서 너 빈혈로 쓰러진 거라 그러지?] 놀리는 듯한 태양의 물음에 재인은 피식 웃고 만다. 분명 혼수상태였다. 병원에 실려오는 내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쓰러지기 직전 팔다리의 경련도 느껴졌는데, 이후의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빈혈 이상의 병명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 당연하게 물어오는 그의 고집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가 봐.] 재인은 나직하게 대답한다. 진짜로 그냥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태양이 흐뭇해하는 모습 마주보면서 맛있게 밥만 잘 먹으면 낫는 병이라면……. [그러게 내가 음식 남기지 말랬잖아. 꼭꼭 씹어먹으면 체하지도 않을 거랬잖아.] [응.] [노래도 못하는 게 왜 만날 아파?] 속상한 듯 소리치는 태양. 억지를 부리는 그의 답답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하지만 재인은 짐짓 억울한 듯 작게 항의한다. [태양, 그러지 마. 나 노래시험 A 받았어!] [그거야 열심히 부르는 게 가상해서 선생님이 그냥 주신 거지.] [그래도…… A는 A야.] 그렇잖아. A는 A지. B나 C보다는 잘 한 거라고. 중요한 건 그거잖아. 열심히만 하면, 좀 못해도 A라는 거. [태양. 나…….] [말해.] [진짜 열심히 살고 있어.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세 배 참고 노력도 해.] […….] [쉽게 끝내지 않을 거야. 내가 얼마나 질긴데. 끝까지 이 열혈 모드로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을 거야. 그래서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도 나한테 A를 주시도록, 나 이겨낼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나 때문에 걱정 같은 거 하지 마.] [……바보 여재인!]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너 같으면 걱정 안 하겠냐? 그렇게 속으로 외쳐대는 태양의 침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재인이다. '바보 여재인!' 그 속에 채워진 태양의 따끈따끈한 마음들을……. [좋아해, 태양.] [나는 너 싫어. 아픈 여재인은 싫어. 그러니까 얼른 나아. 알았어?] 그제야 내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솟는다. 그 축축하고 다정한 '알았어?'란 물음에 가슴이 반응한다. '응.' 목이 메여 제대로 내지 못한 소리가 가슴 속에 꽉 맺혀 있다. 그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도 차마 지금은 자신을 보여줄 수 없어서 재인은 속이 탄다. 말 없이 잡아주는 그 손이 말도 못하게 간절하지만, 오란 말을 못하겠어서 눈물이 난다. 좋아해. 좋아해, 태양. 보고 싶어. 네가 보고 싶어서 나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아! 폴더를 접으며 재인은 팔로 눈을 덮었다. 왈칵 왈칵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소매로 스며든다. 이제 무섭지 않다. 무섭진 않지만 너무 간절해서, 그 때문에 점점 더 서러워져서 흔들리는 울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침대 발치에 서서 지켜 보는 해인의 눈가도 어느 새 잔뜩 붉어져 있었다. 태양은 병원 입구를 나서며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부에 닿는 습한 공기로 보아 먹구름이 잔뜩 몰려온 듯하다. 그래서 하늘엔 달도, 별도 없다. 가로등만이 홀로 버겁게 어둠과 싸우고 있다. 오늘따라 유독 조례 내내 차가운 공기가 신경이 쓰였었다. 목덜미를 선득하게 식히는 바람이 간간히 불어, 부르르 떠는 녀석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 때마다 저 너머에 서 있는 재인을 생각했다. 괜찮을까? 아까 보니 손이 꽤 차갑던데. 태양은 미동도 없이 선 채, 머리로는 창백하던 재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요즘 재인은 이전보다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잦아졌다. 물을 마시다가 슬쩍 뒷문을 열고 사라지기 일쑤였는데, 왜 꼭 그 생수병을 들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한 번은 뒤따라 갔더니 그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생수병을 가지고. 혹 저 안에서 약이라도 먹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아픈 걸 내보이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처럼 자주 약을 먹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 아무리 약한 약이라도 서너 시간의 텀은 두어야 하는데. 요즘은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도 고개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재인은 그냥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섭섭했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싫은 걸 강요하고 싶진 않으니까. 아무도 없을 때는 잘도 품에 들어와 안기면서 키스는 별로다 하니, 태양 자신이 싫어서 그러는 것 같지도 않다. 교장의 연설이 길어진다 싶을 무렵, 갑자기 앞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단을 향하고 있던 눈을 내려 무심히 바라본 곳에 쓰러져 있는 한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갈색머리가 운동장 모래 위로 힘 없이 툭 내려앉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태양의 눈 속에 와 박힌 것이다. 혈관 한 곳이 투둑 터진 것처럼 미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곧장 달려가 그를 둘러싼 아이들을 제치고 재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주르륵. 재인의 하얀 얼굴에서 코피가 쏟아지고 있다. 붉은 선혈이 그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렀다. 재빨리 소매를 끌어다 닦아보지만 멈추질 않았다. 뚝, 뚝 차가운 땅 위에 재인의 붉은 흔적들이 떨어졌다. 태양은, 놀라서 달려오는 담임과 아이들에게 구급차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자켓을 벗어 재인의 머리 밑에 깔고 그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승진도 어느 새 달려왔는지 태양과 재인을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꿇고 곁에 앉았다. [얘 왜 이렇게 하얘?] 승진은 그 답지 않게 이를 악 물고 내뱉었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걱정으로 흐려져 있었다. 두 세 명의 아이들이 또 앞으로 나와 재인의 다리와 팔을 주무르는 동안, 희웅과 선민 그리고 재훈도 자신들의 교복 상의를 벗어 재인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자, 하나, 둘…… 놀랍게도 반 아이들이 차례로 재인을 위해 자켓을 벗기 시작했다. 잔인한 꽃샘추위 속에서도 얇고 하얀 셔츠 한 벌 차림이 다인 3학년 6반 녀석들이 늘어났다. 교감의 지시로 전교생이 교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그들은 재인을 감싸고 서 있었다. 어린 소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부터 그렇게 아픈 친구를 가려 주었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말한 적은 없지만, 다들 진심으로 그처럼 행동했다. 조용하게 비어진 운동장에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담임이 재인을 실어간 후에도, 다른 선생님들이 나와 등을 떠밀기까지 그들 모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춥다, 귀찮다.' 운동장 조례에 분노하던 녀석들도, 돌려받은 자신의 상의를 손에 든 채 재인을 태운 차가 떠난 교문 쪽을 망연히 바라봤을 뿐이다. 태양은 자신의 옷에 묻은 재인의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따라가지 못하게 자신을 밀며 고개를 젓던 담임의 눈빛을 거역하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신음을 흘리던 재인의 모습이 태양은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응급실 창밖에 서서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창백한 재인의 옆모습을 지켜볼 때도 그랬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의 의연하고 따뜻한 음성이, 방금 전 핸드폰의 송화구멍을 타고 가슴 속에 흘러와 먹물처럼 퍼져나갈 때도 역시……. [늦었네. 병원에서 오는 길이야?] 집 앞까지 거의 다 왔을 무렵,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태양은 정면을 응시했다. 까만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은 놀랍게도 인학이다. 자신의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태양은 우뚝 멈춰서서 그의 등장을 의아해하고 있다. 걸을 때마다 가슴 속에서 찰랑거리던 아픔이, 인학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사방에 튀어오르고 넘쳐흐르는 느낌이다. 태양은 간신히 잠긴 목과 바닥에 늘러붙은 심장을 다독여 목소리를 내본다. [무슨 일?] [아무 일도. 학원 마치고 집에 가다 들렀어.] [왜?] 태양의 대꾸가 섭섭했던지 인학이 살짝 이마를 찌푸린다. 인학도 같은 반이 되긴 했지만, 이젠 짝이 아니라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두 사람 다 굳이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이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거다. 그러므로 정말 오늘 같은 그의 방문은 새삼스러움을 넘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지난 번 인학의 고백 이후로 둘 사이가 편한 것만도 아닌데. [꼭 이유가 필요하냐? 그냥 보고 싶길래.] [아직도 그 얘기냐?] 태양의 시무룩한 대꾸에 인학의 얼굴이 얼어붙는다. 용기를 내어 찾아온 그에게 좀 심한 말일수도 있겠지만, 지금 태양으로서는 마음의 여유 따위 찾아볼 수가 없다. 인학의 심정과 사정을 봐줘 가며 말할 힘 따위도 없다. 온 종일 가슴 태우며 한 녀석 걱정에 정신을 쏟느라, 태양은 지금 극도로 피곤하고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우리 고3이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시간을 쪼개가며 찾아올 정도라는 건, 널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는 걸 의미해. 이해할 수 있겠냐? 혼자 좋아하는 감정도 감정이야.] [그런 이해까지 내 몫으로 떠밀지 마라.] 한숨과 함께 뱉어내는 무심한 대답. 인학의 눈빛에 상처가 스며드는 게 보이자 태양은 고개를 돌린다. [너……! 진짜 잔인하구나, 남태양.] [그렇게 보여도 할 수 없어.] 할 수 없다. 지금은 특히 더. 보고 싶었다 하는 말도 버겁다. 부담스럽고 무겁다. 그러지 말라고 뿌리칠 힘도 없으니까 그냥 가주면 좋겠다. 하얗게 질려가는 인학의 얼굴이 재인의 창백한 뺨을 상기시켜서 마음이 더 불편하다. 뚜벅거리며 가까이 다가온 밝은 갈색 눈이 태양 앞에 멈춰섰다. 인학의 잔잔한 표정은 뜨겁게 일렁이는 그 눈동자로 인해 다소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그 열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온전히 깊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태양을 응시하며 인학이 나직하게 말했다. [피곤한 모양이다. 눈이 빨갛네. 얼굴 봤으니 됐다. 나 간다.] […….]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했는데,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뭐 좀 챙겨 먹고 자라.]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 가 버린다. 인학의 발소리가 등 뒤로 멀어질 무렵, 태양은 비로소 뒤를 돌아본다. 길고 가느다란 실루엣이나 알맞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무척 서인학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인학이 재인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걸. 태양은 양 손을 모아 입가에 댄 채 다급히 외쳤다. [재인이 무사하다! 금방 멀쩡하게 학교 나올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인학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태양은 꼭 그에게 들려줘야 하는 중요한 사실인 것처럼 그렇게 전했다. 그 큰 소리에 뒤돌아 서는 인학.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피식 웃는 게 보인다. [재미 없다, 남태양!] 그리고 마주 소리쳐 온다. 조용한 밤공기를 그들의 음성이 차례로 가른다. [먼저 말 걸어준 건 고마운데! 여재인에 관한 말이라면 사양할게!] [너, 걱정하지 말라고!] 태양이 덧붙이면, 인학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외친다. [걱정 안 한다! 나 하나쯤 빠진다고 여재인이 기도가 모자라는 녀석이냐?] [마음대로! 그럼 네 몫까지 내가 하지. 됐냐?] 짐짓 무게를 잡고 말하는 인학의 속내가 결국은 질투라는 걸 안다. 그래서 태양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저렇게 묻고는 서서히 뒷걸음질 친다. 화난 듯 대꾸 없이 획 돌아서 걸어가 버리던 인학이 도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곧 다시 몇 걸음만에 우뚝 서더니, 뒷걸음으로 멀어지는 태양을 향해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킨다. 그리고 소리쳤다. [여재인을 위한 내 몫은 없어! 있다 해도 내가 해! 너, 남태양! 나 대신 여재인 어쩌구 한 번만 더 해. 죽여 버린다!] 엄청 열 받았나 보다. 늘 냉정하고 찹찹하던 녀석이 뜨겁게 열을 내고 달려가 버린 것이다. 은근히 단순하다, 서인학. 역시 알고 보면 재미있는 놈이다. 태양은 하얀 입김을 길게 내뱉으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작은 별이 미치게 보고 싶다! 보들보들한 뺨을 만지고, 익숙하게 파고드는 그의 몸을 품고 싶다! 밤새 노래를 불러주고, 그의 엉뚱하고 착한 설명에 귀 기울이고 싶다! 심장을 씻어주는 맑은 눈빛과 정신을 일깨우는 솔직한 입술을 만나고 싶다! 여재인, 말 좀 해 봐라.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이냐? 이 갈증과 불안정한 마음을 두고도 내 약점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아픈데도 네가 했던 말이나 미소를 떠올리면 나는 또 금세 웃을 수 있다. 미쳤나 보다. 나는 완전히 미쳐 버린 것 같다. 이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냐? 응? 아무래도 난…… 이미 널 사랑하는 것 같다. 헤어날 수 없도록 지독하게! 그런데 억울하지가 않아. 너로 인해 아픈데도 억울하다거나 후회되지도 않는다. 태양은 지친 걸음으로 어두운 집안으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풀썩 쓰러진다. 이미 누웠기에, 난 오늘 밤도 다리는 두고 심장만 너를 향해 뛴다. 잘 자, 여재인. 내가 곁에 없으니 꿈 꾸지 말고 밤중에 깨지도 말고, 푹 자도록! <침묵은 익숙해지기 쉽다> 이미 '봄'이었음에도 차고 큰 바람이 불었다. 바람 하나가 날 스치고, 이어 또 하나가 날 스치고, 하여 큰 바람과 큰 바람 사이에 깊은 골이 만들어지더니 사랑한다는 고백을 얼린다. 이 마음 녹여 너에게 담아낼 틈을 주지 않는다. 21. 교실이 텅 빈 느낌이다. 가운데 비어있는 한 자리가 문풍지의 바람 드는 구멍처럼 에인다. 비어있는 재인의 책상과 의자. 그곳을 보거나 지나칠 때마다 음울한 기분이 울컥 솟는다. 아이들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고, 큰 소리를 내는 녀석도 없었다. 태양은 한 손에 턱을 괸 채 재인의 빈 자리를 노려보고 있다.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재인의 전화를 아침에 받았다. 무슨 검사가 하루 종일 걸리냐는 물음을 차마 내뱉지 못했던 그다. 지금도 아프냐고 묻지도 못했고, 언제 얼굴을 볼 수 있냐는 질문도 던지지 못했다. 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가느다란 음성에 억지로 끌어낸 밝은 미소가 느껴져서였다. '응.' '그래.' '알겠다.' 이 세 마디가 전부였다. 그 대답만으로도 만족한 듯 재인은 미련 없이 끊어 버렸다. 짧은 통화를 끝내고 대신에 더 긴 아쉬움과 그리움에 시달릴 하루를 맞이한다. [이 반에 남태양이라고 있나?] 수업에 들어온 물리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이 태양을 돌아본다. 천천히 일어나자, 지금 바로 교무실로 내려가 보라 하신다. 의아해하는 아이들 표정과는 별도로 태양의 얼굴이 빠르게 굳는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하면서, 혹시라도 재인에게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부터 든다. 곧장 교실 뒷문을 열고 날으듯이 교무실로 달려내려 갔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서 새로 담임이 되신 영어선생님께 전혀 뜻밖의 말을 듣는다. [태양아. 일단 앉아.] [선생님, 혹시……?]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태양의 흐트러진 모습을 발견하고는 어두운 얼굴로 낮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이신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단다. 계신 곳으로 당장 가 봐야겠어.] [네?] 재인의 얘기가 아니다. 어머니가 어째서? 그것도 갑자기……! 한 동안 찾아뵙지 못했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으로 짙게 가라앉는 태양의 얼굴을 본 담임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어머니가 아프셨다는 건 몰랐구나. 기록부에 하나도 안 적혀 있어서. 되도록 빨리 와달라고 방금 전화가 왔어. 조퇴증 끊어줄 테니 바로 가도록 해.] [……!] [태양아. 괜찮니? 혼자 갈 수 있겠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리서 들린다. 팔을 지그시 잡는 선생님의 손길도 너무 무디게 느껴진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뚫고 밖으로도 울리는 것 같다. 그 후 태양은 어떻게 학교를 빠져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시 외곽의 요양원 이름을 댔다. 너무 멀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했지만, 자신을 태워줄 택시가 나타날 때까지 기계처럼 그 행위을 반복했다. 엄마……. 마지막 뵌 모습은 분명 건강하게 웃고 계셨는데……. 그러니 위독하시다는 건 결국 무슨 일을 당하신 거란 말이다. 태양은 아찔해지는 생각들을 고개를 흔들어 떨치며 자꾸 마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양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은 예의 그 치매 할머니였다. 오후의 봄햇살을 쪼이며 꾸벅 꾸벅 졸다가 막 들어서는 태양과 눈이 마주치자, 노인은 화들짝 시선을 피한다. 그 모습이 다소 걸리지만 태양은 그냥 지나친다. 조용한 건물을 향해 걷는 내내 등 뒤로 그녀의 관심어린 시선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알고 저러는 걸까? 그 정도로 엄마가 위독하신 거란 뜻일까? 태양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아직 차가운 바깥 공기와 다르게 온기가 도는 실내를 둘러보다, 반갑게 눈인사를 건네오는 관리인을 만났다. 그는 평일 오후에 나타난 태양의 출현을 놀라워하는 것 같다. 엄마가 묵고계신 2층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면서도, 멈추지 않는 자신의 심장박동과 이 곳의 고요한 분위기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닫혀 있지 않은 엄마의 방. 천천히 다가가 그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침대였다. 그런데 비어 있다! 태양은 놀라서 문을 획 열어젖히고 뛰어들어간다. 그리고는 금세 허탈한 숨을 후 내쉬고 만다. [태양, 역시 빨리 오는구나. 놀라워. 세 시간도 안 걸렸네?]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엄마. 오히려 복숭아빛 화색이 뺨에 돌 정도로 건강해 보인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의 세 시간이 자신에겐 3년보다 길었다는 걸 아실까? 엄마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차를 마시던 요양사가 싱긋 웃으며 자리를 양보해준다. 방을 닫고 나가면서 잊지 않고 던지는 말. [아들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전화하셨나 보네. 짓궂으셔, 암튼.] 나른하게 미소 짓는 엄마를 태양은 숨 죽인 채 노려 보고 있다. [재인이한테 푹 빠져서 이 엄마는 잊었나 했지.] 입술 끝을 살짝 비틀며 건네는 엄마의 음성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 태양은 한숨을 푹 내쉬며 팔짱을 끼고 빈 침대 위에 기대 선다. [무슨 말씀이 그래요? 이제 고3이라…….] [공부는 잘 돼가?] 태양의 변명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엄마는 태양의 말을 끊으며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 어느 때보다 공부가 안 된다는 말을 하기는 좀 그러니까. [어차피 입시를 여기서 치를 건 아니니까 너무 파고들지 않아도 돼.] [엄마…….] [너 조만간 떠나야겠다.] [……엄마!] [외할머니 위독하시대.] 차분하고 냉정하게 들리는 충고. 그리고 뜻밖의 소식. 태양이 놀란 듯 눈썹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엄마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할아버지의 두 번째 유언장이 공개될 거야.] [관심 없어요.] [그런 말 마라. 너도 잘 알잖니?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야. 너희 아버지 누명을 벗기고, 네가 더 이상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아도 돼는.] [이미 익숙해져서 별로 불편하지 않아요.] 태양의 대답에 엄마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감정 표현을 잘 숨기는 분이기에 저 정도의 반응으로도 태양은 긴장한다. [바보 같은 소리! 권력과 재력은 남자에겐 운명과도 같아. 그 맛을 모르면 네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데도 한참이 걸릴 거다.] [전 정말 필요 없어요.] [필요해.]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답답하다는 듯 빠르게 팔짱을 풀면서 묻는 태양. 그런 그에게 엄마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천천히 내뱉는다. [너한테는…… 지켜주고 싶은 게 있잖니.] [……!] 지켜주고 싶은 것.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사람. 지난 방문 때 자신이 직접 했던 말이다. 늘 포기하고 놓고 잊으면서 살아왔는데, 이젠 그럴 수 없는 게 생겼다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 하나만 남겨도 자신은 살 수 있다고. 주먹을 꼭 쥐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했었다. 바뀔 수 있는 생각이 아닌, 변할 수 없는 마음으로 토로했었다. [갖고 싶은 것, 지키고 싶은 것을 잃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해. 네 아버지도 그랬다. 태양아, 그렇게 가신 네 아버지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거야.] [아버지는 무책임했어요.] [아니! 그렇지 않다! 네 아버지는……!] [제가 믿는 건 하나에요! 가르쳐 주신대로 전 제 눈과 제 귀와 제 심장소리만 믿을 겁니다.] 고집이 강하게 묻어나는 태양의 대답이 단단한 벽을 세우고 엄마의 타이름을 저지한다. 더 이상 넘을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잠시 침묵. 그러나 이미 닮은 고집. [그렇게 가르친 걸 후회해.] [늦었어요.] [태양아!] [전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네 아버지의 유언이래도?] [……!] 화가 난다. 저런 말 믿지도 않는다. 자신과 엄마를 버려두고 떠난 자가 무슨 유언 따위를 남겼단 말인가. 남겼다 해도 그걸 지킬 의무가 자신에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하게 태양을 노려보는 엄마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첼로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는 건 빼앗긴 스트라디바디 때문이 아니야.] 조금 낮게 쉰 듯 흘러나오는 엄마의 음성. 태양은 그 날처럼 다시 심장이 부르르 떠는 걸 느낀다. 온몸을 휘감던 강한 추위와 뼛속까지 스미던 소름을 기억한다. 차가운 빗물을 밤새 맞으며 두려움에 몸을 떨던 꼬마가 떠오른다. 그런 자신을 걱정하며 목숨처럼 아끼던 첼로를 내놓아야 했던 여인이 생각난다. 엄마는 자신이 무엇에 반응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신 모양이다. […….] [추억과 함께 첼로에 대한 마음도 빼앗겼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더 이상 즐겁지 않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끼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건 그것 자체보다 더 많은 걸 잃는다는 의미야. 그래서 그걸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만큼 그걸 지켜내기 위한 힘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거란다.] 엄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첼로와 첼로에 대한 마음을 잃으셨다. 태양도 안다. 그 첼로에 대한 엄마의 열정과 사랑을. 그래서 더 괴로웠다. 보상해드릴 수 있길 간절해 원했다. 하지만 결국 그건 뒤늦은 보상일 수밖에 없다. 잃기 전에 지켜드렸어야 했는데 자신에겐 아무런 힘이 없었다. [너는 소중한 걸 빼앗기는 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잘 아는 아이지. 하지만 이제 그걸 잃지 않기 위해 대신 내놓을 다른 무언가를 가져야 할 때다. 그래서 태양이 네가, 네 것을 지키는 느낌이 어떤 건지도 느끼길 바란다. 그래야 덜 억울하지 않겠니? 이 엄마의 말, 이해하지?] 아버지의 유언. 그리고 엄마의 마지막 행복이었던 스트라디바디. 태양의 가장 깊은 내면을 건드리며 엄마는 최선을 다해 설득하고 있었다. 그토록 절실히 기다려온 기회의 타이밍인 것이다. [생각해 보거라. 하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마라. 그 분, 얼마 못 버티실 것 같으니까.] [어쩌면 그렇게 냉정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엄마의 엄마이시잖아요.] [글쎄. 피는 안 섞였어도 그 분의 냉정함을 닮긴 닮았지, 내가.] 잊고 있었다. 지금의 외할머니가 자신과 피가 섞이지 않은 분이라는 걸. 너무 오래 언급을 피했더니 사실이 아닌 것처럼. 태양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외할아버지가 재혼하셨고, 지금의 외할머니가 그렉이란 아들과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했단다. 그렉은 혼혈인으로 엄마의 세째 오빠이자 태양의 외삼촌의 이름이다. 그는, 태양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굳이 한국에 들어와 회사에 함께 몸담았었다. 또한 스트라디바디를 빼앗아간 경식과 두진, 그 잔인한 사촌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촌이라 해도 남남이나 다름 없는 사이. 어렸을 땐 몰랐었다. 자신에게 남도 아닌 사촌들이 어쩌면 그토록 가혹할 수 있냐며 괴로워 했었다. 아무리 이해하려 애써도 상식으론 납득할 수 없었던 그들의 증오의 이유. 하지만 그래도 역시,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늘 부족했다. [제가 모르는 게 뭐가 있죠?] [많지. 하지만 차차 알게 될 거야. 조급해하지 마라. 너를 위해 준비된 게 많아. 하나씩 줄 테니 실수 없이 받기만 해. 네 힘들었던 유년에 대한 보상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게다.] 내 힘들었던 유년에 대한 보상. 태양은 속으로 그 말을 되풀이해본다. 그리고 입가로 흐르는 조소를 참지 못했다. 유년에 대한 보상은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시는 걸까? 엄마의 첼로에 대한 마음을 지켜드리기엔 이미 늦은 것처럼. 이미 흘러간 그 시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어린 시절의 그 상처와 깊은 고독은 자라는 내내 뼛속까지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 지금까지도 순간순간 가시가 되고, 송곳이 되고, 망치가 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 때의 상처가 곧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보상도 소용이 없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가장 원하는 건 그러한 보상이 아니다. 태양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창틀에 기대어 섰다. 버티기로 마음 먹은 자신과 설득을 포기하지 않는 엄마. 왠지 서글프다. 햇살은 가볍고 투명하게 초봄을 영유하고 있었다. 창으로 스며드는 따사로움은 방안의 정적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하다. 시선을 마당으로 내린 태양은 문득 이쪽 창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까 그 노인을 발견한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 휠체어를 움직인다. 찌푸려지는 미간. 태양은 뒤로 돌아서서 엄마를 쳐다본다. [왜 그러니?] [자꾸 눈이 마주치는 할머니가 있어요. 혹시…….] [……!] [아무래도 조사해 봐야겠어요.] [그만 두거라.] 태양이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는데, 엄마가 뒤에서 낮게 명령해왔다.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면 엄마는 망설이는 빛을 내보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그게 무엇이든, 듣고 움직여야겠기에 태양은 엄마의 바로 앞에 앉아 빤히 응시한다. 설명을 기다리는 태양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시던 엄마가 결국 긴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우리 쪽 사람이야.] [확실해요?] [확실해.] [내통하는 사람들 없나 다 조사해 본 거에요?] [철저히. 그러니까 넌 모른 척 해.]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입술을 꾹 다무시는 엄마. 태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달리 꼬투리를 잡을 만한 구석도 없다. 엄마가 조사를 해보셨다면 자신이 걸고 넘어질 선은 이미 넘었다는 얘기다. [그럼 시선 단속 좀 잘 하라고 충고하세요.] [……그러마.] 조금 늦은 대답이긴 하지만 태양은 개의치 않고 일어섰다. 아무리 먼 거리를 달려왔다 해도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다. [너도 조심하거라. 요즘 쥐들이 잠잠한 게 더 불안해지네.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아. 외할머니 소식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거거든.] [네.] 나가기 위해 문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태양은 열지 않고 잠시 서 있다.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천천히 엄마를 돌아본다. 새삼스러운 눈길. 엄마가 말 없이 왜 그러냐고 묻는 표정을 지으신다. 그제야 태양은 작은 다짐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로 조용하게 말한다. [엄마가 위독하지 않아서, 건강한 모습이시라서…… 다행이에요.] [……!]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말. 들을 거라 예상하지도 못했던 고백. 태양이 문을 열고 나간 뒤에도 그녀는 움직이지 못한다. 저 아이…… 변했다. 마음은 커녕 스치는 감정조차 내비치지 않던 소년이, 방금 묻지도 않은 뜻밖의 표현을 진지하게 건넨 것이다. 그녀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작은 별, 너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나조차도 닿지 못했던 저 애의 속을 너는 무엇으로 채워놨길래……! 태양의 아버지는 예민한 눈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배다른 형제가 한 명 있을 뿐 부모님이 안 계시지만 최고 학벌에 벤처 창업까지 스스로 일으킨 사람으로, 서글서글한 성격에 인기도 많고 신뢰 어린 인간 관계도 다분한 편이었다. 첼리스트였던 엄마와 결혼을 하던 당시, 아버지는 이미 앞날이 창창하고 잘 나가는 벤처 사업가였단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회사는 개발과 판매, 유통을 모두 하나로 잡고 있어, 중소기업답지 않게 자체 생산 제품이 시장에 대해 독점이나 다름 없는 호황을 누렸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 개발한 탄소발열품의 특허 출원으로 어마어마한 이윤 창출이 점쳐지고 있었다. 그러다 사업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태양이 겨우 한 살 때였다. 기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급속도로 악화일로를 걸었으니까. 벤처 기업이 다 그렇듯 결국은 자금 압박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연구원 한 명과 아버지, 둘이서만 극비리에 진행하던 신제품 개발이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고 그에 따라 직원들 사이의 신뢰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돈을 챙겨 나가고, 주식은 하락하고, 직원들은 퇴직금을 요구하며 회사를 떠났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젊은 사장은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몇 가지 의심되는 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주아주 뼈아프고 슬픈 사실들을. 그 중, 일 년 전부터 친척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며 귀국한 그렉 삼촌에 대한 것이었다. 그렉은 화술에 능하고 이미 영업에 있어 특출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입사 초기에 수많은 거래처를 뚫으며 승승장구해온 그는 7개월 만에 이사로 등극했다. 혼혈인 얼굴은 신비로운 매력을 풍겼고 능숙한 한국어 구사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심심찮게 가족이란 말을 사용하던 그렉은, 특허권의 지분에 대한 요구를 해왔고 그 때마다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 후 그렉이 직원들 사이를 이간질시켜 선동하고, 투자자들을 따로 만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낸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거래처 장부를 압수하고 당분간 근신하라 했단다. 젊은 사장은 자신보다 나이든 이사에게 가족과 사업 관계는 별개라고 못박았고, 나이든 이사는 젊은 사장에게 두고 보자고 이를 갈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울 수는 없을 거라고 잔인하게 경고하며 회사를 나간 것이다. 며칠 후 아버지는 집 앞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검은 차에 치어 죽을 뻔 했다. 느즈막한 시간에 협박 전화가 집으로 걸려와 온 가족이 하얗게 질리기도 했고, 얼마 못가서 아버지는 엄마와 갓난 태양을 집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괴롭고 험한 시기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행방불명. 투신자살이라는 이름으로 기사화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무수한 경제신문들은 일제히 악의적인 기사를 싣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잘 나가던 벤처기업 사장의 돌연한 죽음', 'CEO의 무책임한 자살이 부른 파급효과', '유서 없다, 유족도 발뺌.' 등등의 소제목을 남발했다. 빚쟁이들이 몰려드는 집 거실에서, 엄마는 한살박이 태양을 안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부서지는 살림살이와 딱지가 붙기 시작하는 물건들 속에 침묵하며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인적 드문 바닷가의 모래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고요했고 잠잠했단다. 있는 대로 뜯겨 나간 상태라 제대로된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그나마도 빈정거리며 나타난 그렉의 빚 독촉에 아찔한 분노를 느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렉이 회사에 투자한 돈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특수채권사나 깡패들보다 더 집요하고 악랄한 그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목숨처럼 아껴 왔던 엄마의 첼로를 빼앗아간 후로 뜸해지긴 했지만, 엄마는 그들의 침묵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노리는 건 태양과 엄마의 웃음과 행복이었으니까. 유독 막내딸을 아꼈던 외할아버지의 지원이 그들 몰래 이루어졌지만, 그마저도 당당하게 쓸 수 없는 엄마의 처지를 태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힘이 없었던 그녀에게는 거칠고 간악한 세상으로부터의 바람막이가 필요했다. 그리 하여 아버지가 유일하게 믿었던 동료 연구원과 재혼을 하셨었다. 그 쪽 가족들 등살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이혼을 하고 대신 정신병원을 택하게 되었지만. 고독한 삶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로 엄마와 태양은 서로의 미소를 보지 못한 채 십여 년을 살아야 했다. 복수를 꿈 꾸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태양에겐 평생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엄마는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지만, 태양은 이미 복수를 잊어가고 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밝고 건강한 모습의 남자. 태양은 그가 그립지 않았다. 조금도 그립지 않았다. 엄마의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온 태양은 마치 기다린 것처럼 계단 밑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까의 그 노인을 다시 만난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의 몸은 담요로 돌돌 말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서 태양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다. 시선 단속, 참 못하는군. 속으로 혀를 차면서 지나쳐 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그 노인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부탁한다. [저희 어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깡 마른 손등을 바르르 떤다. 얇게 다문 입술에 힘을 준 노인은 다음 순간 휠체어를 획 돌려버렸다. 다소 사납지만, 한편 서두른 것 같은 기색도 엿보인다. 하지만 멀리 가 버릴 줄 알았던 그녀는 그 상태로 가만 있다. 신분이 드러난 게 분해서 그런가? 여러모로 아마추어군. 태양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펴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 때 들릴 듯 말 듯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는 대답이 들려왔다. [지랄! 지나 잘 할 것이지!] 피식. 태양은 인정하듯 웃으며 그곳을 걸어나왔다. <바닥에 누우면 하늘이 더 잘 보인다> 캄캄한 밤. 벽에 기대어 앉아 나즈막히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은 어둠을 타고 흘러 흘러 공기도 되고 구름도 되고 눈물이 되고 웃음도 되어 무얼 부르든 네 이름이다. 무얼 보든 네 모습이다. 22.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어두컴컴한 아파트 단지 입구. 태양은 전화기가 들어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걷고 있었다. 재인이 검사를 잘 받았는지, 내일은 학교에 올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섣불리 전화하지 못한다. 이유는 딱 하나다. 혹 그가 잠들었거나 겨우 쉬고 있을 때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걸어올 재인을. 혹 무서운 꿈을 꾸면 자신을 떠올리고 걸어줄 그의 전화를. 만지작 만지작 바지 속에 든 핸드폰을 꼭 쥐고서. 재잘재잘 혹은 속닥속닥 들려주는 재인의 지난 하루 일과를 기대하며. [어, 저기 온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저쪽에 서 있던 시커먼 무리가 자신을 발견하고 외치는 소리.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며 잔뜩 몸을 굳히는 태양. 하지만 터벅터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그들의 실체를 알아보고는 금세 긴장을 늦춘다. [수업 다 까고 튀니까 좋더냐?] 제 볼록한 배를 스윽스윽 문지르며 물어오는 희웅. [전교 1등 모범생도 어쩔 수 없구만. 책가방도 없이 어딜 다녀오실까?] 얇은 입술을 이죽거리며 빈정대는 재훈. 그의 어깨 근처에 닿은 손끝에는 태양의 책가방이 걸려 있다. 재훈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인 선민이 마지막으로 분통을 터뜨린다. [그러게! 다들 저 새끼한테 속고 있다니까? 어후!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와 벌써 한바탕 했는지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은 세 녀석이 한 마디씩 시비를 걸어온다. 흙먼지가 묻은 바지며 터진 입술, 까진 손등이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노닥노닥 여유충만이다. 태양은 제 집 앞에서 이 늦은 시각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이 하도 의외여서 말을 아낀다. 그에게서 대답이 없자, 희웅은 애써 분위기를 쉽고 가볍게 하려고 던진 자신의 말이 머쓱해진 모양이다. 머리를 긁적이는 모양새가 그래 보인다. [여재인은?] 태양이 그의 병원에서 오는 길인 줄 이해했나 보다. 선민은 그리 질문을 던져놓고 태양의 표정을 날카롭게 살핀다. 말이 없고 침울해 보이는 것이 혹 재인의 상태가 나빠서가 아닌가 점치는 중인 듯. 한편 태양은 선민의 물음에 다시 핸드폰을 꼭 쥔다. 오늘이 가기 전에 전화 올 거야. 그러니까 곧 알 게 돼. 조급해 하는 자신을 다독이며 태양은 선민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아서 해석하라는 제스츄어였지만, 요란스레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묻혀버린다. 손에 든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투덜투덜 소리를 질러대는 녀석은 다름아닌 승진이다. [야, 이 동네 되게 꼬져! 무슨 편의점도 하나 없냐? 여기 사람들은 시장도 안 보나? 차 없으면 굶어 죽겠다! 아, 씹! 나 택시 타고 마트까지 갔다 왔잖아! 믿어지냐, 새끼들아?] 태양을 향해서는 '어, 왔냐?' 한 번 말을 건네고 끝이다. 활짝 펼쳐 보여주는 커다란 봉지 안에는 없는 게 없어 보인다. 빵이며 음료수며 김밥에 족발, 떡볶이 그리고 햄버거까지. [잔돈은?] [씨발. 되게 챙겨요.] [야야, 영수증도 받아. 저 새끼 지난 번에 730원 삥 쳤어.] [진짜? 와아, 있는 것들이 더 무섭다더만! 빌어먹을 오승진!] [씹쌔들! 삥은 무슨! 잔돈 받기 귀찮아서 놔두라 그런 거였어.] [미쳤냐? 네 돈도 아닌데 팁을 막 남발하고 지랄이냐! 앞으로 다 챙겨 와. 알았어?] 딱콩. 희웅이 엄하게 나무라며 승진의 이마를 막대사탕으로 때린다. 쓰으, 존나 아퍼. 투덜대면서도 제 머리를 빠르게 문지를 뿐 그 이상 덧말은 안 한다. 태양에겐 낯선 상황. 그렇다면 이들 셋은 꼬봉과 물주의 관계가 아니란 얘긴데……. 아무튼 희한한 놈들. 제멋대로 남의 집 앞에 찾아와서는 저희들끼리 떠들고 있다. 지루하지 않은 그들의 대화를 뒤로 한 채 태양은 조용히 아파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당연하다는 듯 뒤를 따르는 녀석들을 느끼고 있지만 굳이 저지하지 않는다. 왠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수다라도 있어야 밤이 수월하게 넘어갈 것 같다. 혼자라면 또 전화기를 붙들고 재인을 떠올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자신이 뻔하다. [혼자 사냐?] [우어, 좋겠다. 왜 이렇게 너는 내가 못 가진 걸 많이 가진 거냐! 갑자기 기분 나빠질라 그러네.] [그럴 거 뭐 있냐? 이제부터 여기, 우리 아지트 하면 되지.] 누구 맘대로! 태양은 어림 없다는 눈빛을 쏘아주면서도 속으로 피식 웃는다. 그들의 경계선 없는 말들이 그다지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말을 안 했을 뿐, 어차피 오늘 그들을 이 집에 들인 건 자신의 결정이다. 그들도 저희들이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는 아니란 걸 어렴풋이 느낀 게다. [잡것들! 존나 쪽팔려.] 인상을 팍 찌푸리며 소파에 털썩 앉아 버린 승진의 혼잣말.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희웅과 재훈 그리고 선민은 아랑곳 않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이거 겁나게 비싸 보여. 얼마 짜리냐?] [갖고 싶으면 가져.] 성의 없는 태양의 말에, 뜨거운 걸 만진 사람 마냥 선민이 화들짝 장식품을 놓는다. [미친! 내가 거지냐!] [응! 너 방금 거지 같앴어.] 선민의 표독스런 외침에, 미간을 좁히고 귀를 파던 승진이 대신 대꾸한다. 그들이 한참을 투닥이며 소란스레 구는 동안 태양은 식탁 위에 비닐봉지를 놓았다. 그리고 제 방으로 들어와 교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로 한다. 가만히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너는 언제쯤 전화를 걸어줄까? 태양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올렸다. 나는 이렇게 보고 싶은데. 시시각각 너의 매분 매초가 궁금한데. 나의 하루가 너는 궁금하지도 않냐? 작은 별, 너 어디 더 아픈 거냐? 오늘 말이다, 나는…… 전학 와서 처음으로 학교도 일찍 조퇴해 봤다. 엄마 찾아 뵙고 나올 때 처음 해보는 속의 말도 꺼내 봤고, 이상하게 신경 쓰이던 할머니도 다행히 적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 알았다. 그 뿐인 줄 아냐? 너는 들어와보지도 못한 이 집에 마치 제 집인 양 휘젓고 다니는 네 놈들이 밖에서 놀고 있다. 여재인. 재인아……. 너 나 안 보고 싶냐? 내 안부 안 궁금하냐?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도 다시 핸드폰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따져야겠다. 너한테. 더는 못 참아. 하루 종일 나 없이 넌 어땠냐고 따져 물어야겠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숫자 두세 개를 눌렀을 뿐인데, 갑자기 액정에 통화시간이 뜬다. 어, 전화 왔나 보네. [여보세요?] [혹시 이거, 되게되게 무심하고 잘나신 남태양 번호 맞나요?] 재인이다! 또박또박 지적하듯이 물어오는 질문이 그 특유의 감성적인 음성을 타고 귀속을 파고들었다. 드디어 재인이 전화를 걸어준 거다! 쿵쾅쿵쾅. 심장이 뛴다. 태양은 입가로 스미는 미소를 느끼며 낮게 대답했다. [맞는데요.] 성대가 덜 여문 소년의 맑은 음색이 뾰로통하게 세워진 채 다시 물어온다. [혹시 지금 받으신 분은 엄청엄청 손가락이 짧아서 전화기에 있는 숫자도 못 누르는 남태양이 맞으신가요?] 태양은 웃음을 꾹 누르고 짐짓 점잖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만.] [아, 맞군요! 알겠습니다. 살아계신지 확인 차 전화해 봤어요. 밤늦게 실례 많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끊으려는 모양이다. 갑자기 다급해진 태양이 잠깐 기다리라고 외치려는데, 뚝 그 새 끊어져 버렸다. 허탈한 얼굴. 태양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응시한다. 전화기를 든 채 멍. 참 꼴 좋다, 태양. 재인이 기분 하나 못 맞추는 병신. 다시 꾹 꾹 아까 누르던 번호를 찍는다. 신호가 가면 기다린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팔딱거린다. 드디어 멈춘 신호음. 그리고 다짜고짜 다다다 달려드는 재인의 목소리. [너 나 하나도 안 보고 싶지?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안 하고! 내가 지금 집에 있니? 나 아파서 죽든지 말든지 넌 상관 없어? 나쁜 놈아! 나 환자잖아. 바보 남태양! 진짜 속상해! 억울해! 아플 때조차 내가 먼저 널 찾아야 해? 이 무심한 터미네이터!] 듣고 보니 자신이 정말 잘 못한 것 같다. 늘 그렇듯 화가 난 재인 앞에서는 주눅이 드는 태양. 미안해. 내가 나빴어. 안타까운 음성으로 사과를 뱉어내는 그다. 밖에서 떠들고 있는 놈들이 들었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모습이다. 진심이 가득 묻어있는 태양의 음성을 한참이나 듣고 나서야 재인의 색색대던 숨소리가 점차 낮아진다. 거의 다 용서해가고 있나 보다. [검사는 잘 받았어?] 한풀 꺾인 재인의 반응에 태양이 궁금했던 것 하나를 먼저 던져본다. [하루 종일 여기 저기 끌려다니면서 검사만 했는 걸.] [피곤하겠다. 밥은 꼭꼭 씹어서 잘 넘겼고?] [내가 애야?] [환자라서 묻는 거야.] [잘 먹었지 그럼. 영양실조가 밥 안 먹으면 어떡해.] 태양이 붙여준 병명을 장난스레 거론하는 재인. 아침보다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느껴져서 좋다. [보고 싶다!] [외계인이?] 태양의 고백에 딴청을 피우는 재인. 오늘은 기어코 듣고 말 심산인 게다. [맞아. 외계인이.]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태양이다. 웃음기 어린 그 음성이 걸어오는 명백한 장난에 재인이 응수한다. [외계인은 지구인들 별로 안 좋아해.] [그걸 어떻게 알아?] [안 찾아오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인사 한 번 안 했잖아. 다 지구인의 짝사랑인 거지.] [……보고 싶어 죽겠다. 너. 지금 당장!] 재인의 궤변에 한 동안 숨을 멈췄던 태양이 더는 못참겠다는 듯 뜨거운 숨과 함께 내뱉었다. [응.] [무슨 대답이 그래? 너는?] [음……, 앗! 엄마 오셨다. 또 전화할게, 태양. 끊어.] 뚝. 통화가 정말 끊어졌다. 하필 그 순간에 엄마가 오시다니, 말이 되는 건가? 기막히고 속상한 타이밍. 아아, 아니다. 작은 별이 핑계를 댄 것 같다. 오늘은 듣고만 싶어서. 말하기보다, 듣고 싶어서인가 보다. 태양은 애타는 그리움이 가슴 속에 질긴 불꽃이 되어 타닥타닥 타는 걸 느낀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먼 발치에서 얼굴이라도 보고 올까? 탕탕! 망설이는 중에 밖에서 힘차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태양! 뭐 해, 자냐? 손님들 불러놓고 그건 예의가 아니지! 빨랑 나와!] 손님은 무슨……. 아니, 손님은 손님이지. 태양은 핸드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온다. 그리고,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식탁을 바라보며 우뚝 선다. [남태양, 앉아! 우리 다 배 고파 돌아가시겠다. 빨랑!] 희웅이 큰 덩치를 식탁 옆에 세운 채 재촉한다. 좀전에 무지비하게 방문을 두드린 게 저 녀석인가 보다. 또 옆에서 선민은 되게 띠껍다는 표정으로 재훈에게 투덜거린다. [저 봐. 꼭 폼을 한 번씩 잡고 나서 움직이지? 내가 발견한 남태양 공식 중 하나라니까.] [수학 공부를 그래 열심히 해 봐라. 내가 면상팔려서 너희들하고 친구하는 게 괴롭잖냐.] 재훈이 말할 차례에 끼어들어 아낌 없이 핀잔을 주는 승진. 이렇게 네 사람이 접시며 그릇들을 찬장에서 꺼내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지금쯤 다 먹어 없앴을 거라 생각했던 음식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먼저들 안 먹고…….] [아, 저 새끼가 진짜 우릴 뭘로 보고! 잉간에겐 예의가 있지! 특히 먹는 거 앞일수록 예의와 도리가 요구되는 법이거던! 안 그러냐?] [그렇지. 그렇지.] 태양은 자신을 위한 자리인 듯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소탈한 음식들. 꾸밈 없는 식욕들. 사납지만 친근함이 묻어나는 대화들. 그 속에 앉아 점점 편안하게 녹아드는 자신이 생소하지만 재미있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이다! 부르르르르. 호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재빨리 꺼내 폴더를 열어젖힌다. 또 전화한다더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쿵 쿵. 다시 뛰는 심장. 태양의 다급한 움직임에 정신 없이 먹던 네 녀석들은 일제히 동작그만이다. [밥 먹고 있어.] 온기가 활활 타오르는 태양의 상냥한 음성. 코앞에서 지켜보는 네 사람의 표정에 각기 비슷한 놀람이 스쳐간다. 혹시 여재인? 뭐 그런 눈빛들이다. 남태양이 저런 말투를 쓰게 만드는 유일한 인종. [응? 승진이랑, 이 자식의 꼬봉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희웅이, 선민이, 재훈이.] 기쁘게도 저희들 이름까지 선선히 대화에 끼워넣어준다. [참, 너 좋아하는 떡볶이도 있다. 올래?] 쫑긋해지는 네 사람의 귀. 수화기 너머로 깔깔거리며 웃는 재인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와도 돼. 니 몫 남겨 놓을게.] 다급한 동작으로 승진이 떡볶이 그릇에 뚜껑을 덮는다. 하지만……. [알아, 알아. 약 그만 올릴게. 내일은 학교 오는 거지?] 다시 쫑긋. 쉿. 내일이면 재인을 볼 수 있는가를 들어야 하니까. [그래. 다행이다. 아프지 말고, 이상한 꿈 꾸지 말고, 잘 자. 베개 옆에 핸드폰 두고 잘 테니까 무서우면 전화하고. 알겠지? 응. 착하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까 안에 옷 많이 껴입고 와.] 별의 별 참견을 다 한다. 엄마도 아닌 주제에. 태양이 재인과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입술을 삐죽이는 승진. 하지만 되게 부러운 모양이다. 끊는 순간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리고, 새삼 의식 되기 시작하는 침묵. 어느 새 네 녀석들은 태양의 가까이로 바짝 당겨 앉거나 뒤에 서서, 그의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별의 목소리 하나라도 더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바싹 붙어 앉은 사내놈들이라니. 이 모습이야말로 재인에 대한 넘쳐 나는 애정공세와 인기의 현주소 아닌가, 태양은 씁쓸히 생각했다. [하나만 묻자.] 배부르게 먹고, 봉지 맨 아래 숨겨져 있던 아이스크림 통까지 비웠다. 소파를 알뜰히 나눠 차지한 희웅과 선민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품을 소리내어 뱉으며 거실에 드러누워 버린 승진과 재훈. 그 중에 승진이 불쑥 소파에 기대 앉은 태양에게 저렇게 물었다. 흘끗 쳐다보니 재훈은 어디서 찾았는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뭔가를 듣고 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오고가던 농담처럼 가볍지도, 스스럼 없이 날리던 핀잔처럼 간단하지도 않은 질문. 승진은, 베란다 문을 닫고 그 유리에 기대앉은 태양을 빤히 노려 보고 있다. 달빛이 그늘을 드리운 얼굴은 모든 표정을 숨기고 담담한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너 뭐 하는 놈이냐고?] [대답이 듣고 싶으면 질문을 바꿔.] 태양은 낮은 목소리에 승진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는다. [대체 너 뭐 하는 놈이길래 집앞에 순 깡패같은 놈들이 얼쩡거리냐!] [뭐라고?] 더욱 낮게 가라앉아 버린 태양의 음성. 잔뜩 억눌려진 숨이 느껴진다. 승진은 덩달아 긴장이 되는 것 같아,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물론 너 오기 전에 다 돌려 보냈지만.]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는 말. 승진은 신경질적으로 잔뜩 찌푸린 눈썹을 네번째 손가락으로 싹 훑는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숨기지 않는 그만의 버릇. 승진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렇다. 우선 학교에서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내려간 태양이 돌아오지 않자, 아이들은 무슨 일인지 다들 어리둥절해 했다. 본의 아니게 머리 속에 세트로 자리잡은 재인과 태양이 동시에 없으니 교실은 더 휑하니 빈 듯한 침울함이 감돌았고, 급기야 승진 무리들이 태양의 책가방을 대충 싸 어깨에 둘러 매고 학교를 나왔단다. 물론 나오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학교 수위 아저씨나 선생님들 눈을 피하는 데는 도가 트인 네 사람이었지만, 갑자기 태양의 가방을 사수하려 나선 서인학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몇 대 밟아주느라 그 동안 아낀 주먹을 휘두르긴 했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나와서 딱히 무얼 하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어느 새 네 사람은 의견조회도 없이 나란히 전에 알아둔 태양의 집앞에 도착했다. 오후 네 시부터 시작된 기다림. 사실 재인의 병원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인이 자신들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괜히 얼굴 비쳤다가 아픈 놈 경기라도 일으킬까 두려웠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대할 때마다 설레는 재인보다는 마주할 때마다 주먹이 쥐어지는 태양이 더 편하기도 했다. 조금 길어진 해가 저녁 7시쯤 물러가고 어둑해질 무렵, 그들이 나타났다. 온통 까맣게 칠한 승용차를 몰고 소리도 없이 아파트 입구로 들어와 세운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지날 때까지도. 태양을 기다리며, 재훈이 발밑에 쌓아둔 담배꽁초만 수북이 쌓여갔다. - 남태양 이 새끼, 왜 안 오는 걸까? - 혹시 여재인 병원서 자고 오는 거 아냐? - 씹, 그럼 우린 뭐냐? - 아, 씨발! 존나 씨끄럽네! 딱콩. - 오승진, 새끼야. 니 목소리가 젤 커. - 켁! 목 뿌러져! 그리고 이마는 건드리지 마! 그나마 내 얼굴에서 봐줄만 한 데구만. 그렇게 넷이서 매우 사이 나쁘게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철컥. 탁! 검은 차문이 열리고 키가 크고 다소 야비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내렸다. 자신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까딱까딱 손짓을 하는 폼이 어찌나 재수 없던지. 물론 그들 중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씹힌 게 열받는지 남자는 제 일행까지 다 내리게 하고는 승진 무리에게 다가왔다. [조금 전에…… 여재인 병원이라고 했나?] 그리고 다짜고짜 물어온 것이다. 까만 옷에 까만 장갑, 까만 선글라스로 온통 먹칠을 한 어른들 앞에 네 사람은 적대적이고 딱딱한 눈빛으로 응수했다. [남태양 친구들인가?] [누가! 우리가?] 기가 차다는 듯한 녀석들의 대답에 남자는 오히려 의심스런 눈이 된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씹어뱉었다. 하긴 남태양 따위에게 친구가 있을리 없지, 라고. 그 말을 들은 네 사람의 얼굴이 일시에 굳는다. 친구는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자가 더 싫어진다. '남태양 따위'라니. 그럼 그 놈에게 만날 당하는 자신들은 뭐란 말인가! [너희는 누구냐?] [그러는 당신은?] [박경식. 남태양의 외사촌이다.] 의외로 선선히 신분을 밝히는 남자다. 거칠 것 없다는 뜻으로 똑같이 맞반응하기로 한다. [오승진. 남태양과 성적을 놓고 다투는 사이다.] [나는 나희웅. 현재 남태양의 짝이다.] [백재훈. 남태양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넌?] 혼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 선민을 쳐다보며 남자가 묻는다. 그들의 대답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입가가 사무치게 얄밉다. 선민은 그래서 일부러 더 느리게 입을 연다. [왕선민.] 갓 내린 어둠으로 빠르게 스며드는 그 음산한 음성에 남자와 그의 무리들이 순간 눈에 띄게 흠칫 한다.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바람을 가르는 칼처림 매서운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처음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인간은 지금껏 남태양 뿐이다. [나는 남태양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늘어지자, 다시 공격력을 회복한 남자가 비아냥거리듯 툭 던진다. [시다바리냐?] 상대를 자극하고자 던진 게 분명한 물음. 하지만 아마추어인 선민은 여유를 잃고 얼굴이 빠르게 굳어 버린다. 아직 승진의 꼬봉이냐던 태양의 말에 입은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건만! 피가 거꾸로 도는 느낌에 선민은 하얗게 질린 입술로 외쳤다. [씹! 연적이다! 어쩔래?] 선민의 그 한 마디에 나머지 세 명이 탄식 어린 표정으로 하늘을 본다. 반면 남자가 느릿하게 내뱉는 음성엔 비열해 보이는 회심의 미소가 서려 있다. [오호, 남태양에게 애인이 있으셨어?] 하얗게 질리는 선민의 표정이 대변해주는 답은 하나다. 남자는 뒤쪽에 선 이들에게 고갯짓을 하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남태양 오면 전해.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저 새끼가!] [무슨 사촌이 저 따위야!] 기가 막히다는 듯 선민과 희웅이 소리친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재훈이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며 승진을 바라본다.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지?] [어쩔 건데?] [오승진. 너 먹을 것 좀 사와라.] 승진의 물음에 저런 대답이 나온다는 건 곧 싸움이 시작될 거라는 의미다. [나도 낀다.] 승진이 눈을 빛내며 선언해 보지만, 말도 안 된다는 듯 세 녀석이 그의 손에 각자 돈을 쥐어준다. [오래 서 있었더니 배 고프다. 될 수 있으면 양 많은 걸로, 이 돈 되는 대로 다 사.] [이씨! 낀다니까!] [빨리 꺼져! 이러다 저 새끼들 놓치면 너도 재미 없어!] 재훈의 협박에 승진은 할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 막 아파트 입구로 달려갈 때쯤 등 뒤에서 남자를 불러세우는 선민의 음성이 들렸다. 저 세 녀석들이 작정하고 임한 싸움에서 지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상대는 어른들이었다. 여기저기 헉헉 뛰어다니며 먹을 걸 사 모으면서도 승진의 심장은 계속 뛰었다. 싸움은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식해도 의리를 중시하는 녀석들은 좋았다. 돌아왔을 때 약간의 생채기만 보인 채 태양과 얘기 중인 세 녀석들을 보고 안도했다. 하지만 아까 태양이 옷갈아 입으러 방에 들어간 사이에 그 불안의 근원을 보고 말았다. 세 녀석이 일제히 옷을 들춰 서로 보여주고 살피던 멍자국들은 제법 깊고 넓었던 것이다. 강골들이지만 아직은 자라고 있는 소년들이다. 자신들끼리는 끙끙대면서도 태양 앞에선 또 아닌 척 하는 게 신기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무언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남태양. 어두운 배경이든 힘든 과거든 그를 옥죄는 무언가가 녀석들은 불안한 모양이다. 이렇게도 동정심이 많은 녀석들이다. 친구 삼기에 참으로 괜찮은 놈들이다. 예전에 자신을 대하는 세 놈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승진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로서도 해준 게 없다. [네가 뭐 하는 놈이든 간에, 너 오늘 저 자식들한테 빚 졌다는 거 잊지 마라.] 겨우 이렇게 편 아닌 편을 들어주는 것이 고작이다. 태양은 잠시 침묵한 후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나도 뭐 하나 묻자.] [……?] [저 녀석들 진짜 네 꼬봉 아니냐?] 태양의 질문에 승진은 대답 대신, 자신의 배 위에 올려진 희웅의 두꺼운 다리를 가리킨다. 그러면 태양은 알겠다는 듯 금세 질문을 바꾼다. [오늘 여기 왜 온 거냐?] [걱정 돼서 들른 건 아니다.] [그래?] [그냥 뭐랄까……, 궁금했지. 갑자기 사라져서 너 혼자 어디 좋은 데 가 있나.] [내 가방까지 챙겨올 정도로?] [뭐…… 재인의 소식하고 교환할 용도로다가.] 끝내 본심을 드러내, 다른 본심을 부인하는 승진이다. 구멍난 양말이 들킬까 두려워 신발을 벗지 못하는 사람처럼, 더욱 무뚝뚝하게 꾸민 표정과 말투를 벗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편하게 느껴져 태양은 또 싱긋 웃고 말았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다. 엄마도 그래서 오늘 급히 태양을 불렀던 것일 게다. 한 동안 조용하던 그들이 나타났다는 건 시일이 급박해졌다는 의미다. 할아버지의 두 번째 유언장 공개. 그것은 할머니의 장례식 직후에 있을 예정이었다. 가장 중요한 회사 지분과 어마어마한 부동산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아무 것도 팔 수 없도록 묶여 있던 것이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 그 권리를 행사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고인에겐 안 됐지만, 그 권리 행사권에 모든 친척일가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태양도 사촌들도 미국으로 불러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의 지시대로 수동적인 운명에 각자 처해질 것이다. 그들이 유언장에 대해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상속거부권 밖에 없었다. 유달리 막내딸을 아꼈던 할아버지. 그러나 새 와이프의 기세에 눌려 그 마음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했던 비겁함. 저도 느꼈었다. 어릴 땐 그저 외할머니가 좀더 차갑고 엄격하시다고만 느꼈었는데, 그 후 외할아버지가 자신과 단둘만 있을 때 외에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태양은 말을 하고 싶을 때 음악을 들었다. 호소하듯 내뿜는 가수의 입을 통해 가슴 속의 수많은 말들을 삼켰다. 그래서 절실한 말일수록 내뱉지 못하는 훈련을 받아온 것 같다. 그는 언제나 차갑게 감정을 식히고 이성으로만 말했다. 지금 태양은 이 상황을 벗어나겠다는 결정에 충실할 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지키겠다는 결심이다. 신호음이 울린지 한참만에, 지겨울 정도로 느리게 내뱉는 박경식의 음성이 들린다.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준다는 게 죽도록 싫지만,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난 미국에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바라는 거 없어.] [뭐? 남태양! 개새끼, 지금 무슨 수작이야!] [이걸로 다 끝내자.] 뚝.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진심이 전해졌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정말 끝이길, 태양은 질끈 감은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기도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하지만 전 작은 별을 떠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말도 안 되는 고집이란 거 알아요. 기가 막힐 정도로 어리석어 보이리란 것도 알아요. 힘을 가지라 하셨지만, 전 그 힘을 가지기 위해 희생될 제 마음이 보여요. 한 번 잃으면 다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크고 소중한 제 마음 말입니다. 우리가 겪은 지난 세월이 얼마나 서럽고 아프고 고독했는지 잊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잊지 못할 테지만, 전 살 수 있어요. 웃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만약 지금 누리고 있는 걸 잃는다면, 다시는 웃지 못할 것 같아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제겐 처음으로 기꺼운 의무가 생겼어요. 꼭 지키고 싶은 의무 말입니다. 정신이 나간 거냐고 호통치셔도, 생명을 건 협박을 받아도, 전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겁니다. 더 이상 어둠이 절 가두고 조종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지금처럼 행복해질 자신이…… 제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저는 마지막 남은 용기까지 모두 짜낼 겁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금 제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고 포기하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숲이 되고 싶다> 멋드러진 소나무도 있고 키 큰 참나무도 있고 플라타너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광합성을 하는 그런……. 네가 푸른 냇물에 발 담그면 초록으로 답하여 주는. 거닐 때에는 길가의 돌들이 들키지 않고 길을 내어주는. 오래 전부터 지켜져 왔으며 앞으로도 변함 없는 너만의 숲이 되고 싶다. 23. '언제나 맑음'표 입술이 돌아왔다. '비 개인 오후'표 눈동자가 장난스레 구르며 아이들을 하나 하나 스쳐 지나간다. 괜찮냐는 물음에 재인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구름 걷힌 하늘'표 이마가 하얗게 빛났다. 3학년이 된 이후로 늘 조용했던 아침자율학습 시간이 흥분과 반가움으로 들썩이고 있다. 어느 새 다른 반에도 소문이 퍼졌는지, 높은 복도 쪽 창문에 주렁주렁 매달린 얼굴들이 보인다. [여재인, 곧 중간고사 있는 거 아냐?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다!] 승진의 건들거리는 시비에 재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뜬금 없이 과장된 그의 어조가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이 나쁘지 않다. 승진은 지금 재인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그를 차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변함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다. 그가 비운 사이 모든 게 다 제자리였다는 걸. 재인은 그걸 느낀다. 그래서 예전과 똑같이 응수해준다. 곧장 태양이 있는 쪽을 믿음직스럽다는 듯 돌아보는 눈길 말이다. 짐짓 승진은 그 시선에 마음이 상해 버린 듯 같은 곳을 흘겨보며 중얼거린다. [저 자식, 어디 전학 좀 안 가나?] [전에 태양이 집에서 떡볶이 먹었다고?] 승진의 투덜거림 위로 재인이 나직하게 묻는다. 끄덕. 의외의 질문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승진이다. 그러면 재인이 그의 귀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와 더욱 낮게 속삭인다. [태양이 매운 거 못 먹는단 말이야. 다음엔 샌드위치나 볶음밥으로 사 가.] 가까이 다가온 재인의 얼굴에 벌렁거리던 심장이 뚝 멈추는 기분이다. 승진은 재인을 가만 노려보다가 팩 하고 고개를 돌려 저쪽으로 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마는데, 어디선가 찰칵 하며 플래시가 터졌다. 어, 하고 돌아 보니 웬 녀석이 복도 창문 너머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다. 재훈이 벌떡 일어나 뒷문을 열고 그를 끌어내리는데, 쉽게 말을 듣지 않나 보다.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려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 복도 쪽을 내다보기 시작한다. 그 틈에서 재인이 오히려 기쁜 듯 말했다. [잘 됐다! 우리 다 같이 사진 찍어달라면 안 될까?] 카메라를 들고 있는 다른 반 녀석도, 빼앗으려고 인상을 쓴 재훈도, 구경을 하던 아이들도 하나 같이 동작을 멈춘 채 재인을 쳐다본다. 그 속을 헤치고 재인이 비어있는 교탁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러자 우르르 금세 그의 주변으로 앞다투어 뛰어나가는 녀석들. 어느 새 자리에 대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재훈은 카메라 주인을 끌고 교실로 들어와 제대로 찍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모두가 앞에 자리를 잡고서 되도록 희한하고 최대한 튀는 포즈를 연구하는데, 단 두 사람만이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야, 남태양! 일로 와! 또 혼자 폼 잡냐? 서인학! 넌 이 순간에도 문제집이 풀리냐?] 선민이 흥분했는지 잘 내지 않는 큰 소리로 부른다. 태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걸어나가며 앉아있는 인학의 어깨를 툭 쳤다. 따라 나오라는 그 제스처에 한숨을 푹 내쉰 인학도 맨 가로 붙어 선다. 이미 재인의 옆자리엔 벌떼같은 녀석들이 들러붙어 태양이 설 자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희웅이 태양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당기더니 척 팔을 올려놓는다. [찌, 찍는다.] [똑바로 찍어라, 아그야. 한 놈도 빠짐 없이! 혹시라도 재인이 얼굴만 동동 뜨게 찍었다간, 아예 네 목을 도끼로 찍어 버릴 테다!] 재훈의 사나운 경고에 카메라소년의 얼굴이 허옇게 뜬다. 자세히 보니 손도 떠는 것 같다. 플래시가 터지고 나서도 영 못미덥다. 선민이 '한 번 더!'를 외치며, 도망가려는 녀석을 붙잡았다. 서너 번의 카메라 셔터가 눌려진 다음에야 만족한 표정으로 승진이 나섰다. [자, 필름은 내놓고 가야지?] 그 말에 다른 반 녀석은 완전히 울상이 된다. 하지만 말 없이 카메라를 빼앗아 필름을 감아버리는 희웅에게 반항하진 못한다. 다시 필름을 두고 시작되는 실랑이. 보기보다 고집이 센 놈인가 보다. 그러는 와중에 태양은 재인의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재인도 태양을 올려다본다. 마주한 두 눈길이 닿은 지점이 너무도 선명하다. 야윈 얼굴이 활짝 웃는 순간, 그 입가를 태양의 손이 빠르게 만졌다 떨어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기를 스치듯 일어난 일이지만, 재인의 볼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왼쪽으로 완전히 기울여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재인. 키스하고 싶다는 태양의 신호에 이렇게 보고 싶었다는 암호로 답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돌아서는 두 사람.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도 뛰는 심장이 멈추지 않는다. 보고 있지 않아도 서로를 느낀다. 심장이 이토록 힘차게 뛴다는 건 그들이 한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증거니까. 비로소 행복이 완전히 녹아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오후 수업이 모두 끝났다. 하지만 곧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될 시간이다. 어둑한 하늘에는 검은 구름 조각들이 어느 새 몰려와 단단히 박혀 있다. 쉬이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비가 내릴 것이다. 태양은 무거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낡은 감상이 또 헐거운 상념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지 시종 낯빛이 어둡다. [난 그저 한번쯤은 이유없이 걸려온 네 전화를 받아보고 싶어.] 재인이 다가온 줄도 몰랐는지, 화들짝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본다. 하루 종일 재인의 주위로 몰려 드는 녀석들 탓에 둘은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대부분이 매점에 간 시간, 교실엔 아이들 몇몇만 남아 저녁 도시락을 먹고 있다. [할 말이 없어도 그냥 걸어주는 태양의 전화 말이야.] [……욕심 한 번 소박하네.] [그런가?] [나는 더 바라는 게 많은데. 너한테는 끝도 없이 조를지도 모르는데.] 태양이 그렇게 낮게 중얼거릴 때쯤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옆 교실에서 급히 움직이는 발소리와 창문을 끼긱거리며 닫는 소리가 들려온다. 교실 한구석에서 우산 안 가져왔다고 투덜대는 녀석들의 말소리도 들린다. [태양, 나가자.] [어딜?] [일어나.] 비 때문에 우울해하는 태양을 아는지 갑자기 재인이 조른다. 기분 전환을 하자는 의도겠지만, 태양은 내켜하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재인이 그의 손을 잡고 가만 흔들자 마지못한 듯 일어난다. [우산 없잖아.] 본관 건물의 현관을 막 나서려는 재인을 붙들며 태양이 말한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이미 캄캄했고, 운동장 역시 어두웠다. [괜찮아.] [비 맞자고? 싫은데.] [나 믿어.] 하여간 고집도. 태양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재인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운동장 한 켠으로 이끈다. 그리고 낮은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팔짝 팔짝 뛰어가더니, 무릎을 접고 앉았다. 덩달아 곁에 앉아 버린 태양이 물끄러미 바라보면, [분수야.] 라고 속삭이는 작은 별. 정수리가 까맣게 비에 젖어 있다. 빗방울이 앞머리로 흘러내린다. 곧 이어 이마와 콧등으로도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등으로 훔친다. 그리고 재인은 다시 태양을 향해 이것 보라는 듯이 웅덩이를 가리켰다. [봐! 분수라니까.] 쭈그리고 앉아서 결국 태양도 웅덩이에 내리는 비를 본다. 얕게 고인 물 위로 내린 빗방울이 쉴새 없이 도로 튀어오르고 있다. 마치 작은 분수처럼. 떨어졌다 솟아오르고, 다시 내려갔다 튀어오른다. [비가 오면 왜 우울해지는 줄 알아?] [왜 그런데?] [비가 아래로만 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같이 쳐지는 거지.] […… !] [하지만 봐. 비는 분수처럼 솟기도 해. 춤 추는 것처럼. 귀 기울여 보면 그럴 때 노래도 불러.] 고개를 들어 태양을 바라보는 재인. 기다란 속눈썹도 젖어 있다. 투명한 뺨이 물을 가득 먹고 촉촉하다. 우울해하지 말라는 거다. 비가 와도 우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있다. 태양은 아무 말 하지 않았어도, 재인은 다 지켜 보고 있었던 걸까? 가슴이 아프다던 그에게 나쁜 사람들 때문이라고 대신 속상해하던 그 날처럼. 재인을 통해 바라본 세상에서는 비도 분수가 된다. 바라보고 있으면 작은 탄성이 나올 만큼 가슴 설레게 예쁜 분수. 태양은 두 손을 모으고 거기에 비를 받는다. 모인 빗물 속에 빗방울이 다시 더해져 작은 분수가 만들어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재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착한 태양.] [아는 것도 많은 여재인.] 칭찬릴레이인가 보다. [뭐든지 1등인 태양.] [비 맞아도 반짝이는 작은 별.] [노래도 잘 하고 목소리도 좋은 우리 태양.] [절대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 내 별.] 태양의 말에 재인의 눈빛이 흔들린다. 눈에 흘러들어간 빗물을 닦아내듯 눈밑이 빨개지도록 비벼댄다. 그 손을 살며시 붙잡아 멈추며 태양이 말한다. [너 왜 이렇게 말랐냐?] [인신공격은 하지 말기야.] [속상해서 그러잖아.] [나보다 더할까.] [너보다 더해.] [우기긴?] [재인아.] 태양은 그를 가만히 당겨 안는다. 품에 쏙 들어와 안기는 작은 별의 높은 체온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창백한 이마에 입술을 대고 가만가만 속삭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만 볼까 봐. 그래도 되냐?] [……!]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만 할까 봐.] [태양아.] [그럼 잘못 되는 일 없을 것 같다. 잘못되더라도 난 괜찮을 것 같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너 없이는, 이제 숨 쉬지 말까 봐. 너 말고는, 누구 말도 듣지 않을까 봐. 나 그래도 되겠냐?]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다. 이렇게 기대어오는 건 좋지만, 그가 무엇에 떠밀리고 있는지 몰라 불안하다. [아직은 없어. 살다가 혹시, 만약에 말이다. 무슨 일 생기더라도 말이야.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일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럴 때 난 너만 보겠다고. 네가 대장 해라. 난 부하 할게.] [갑자기 왜? 너 왜 그러는 건데? 응?] [네가 너무 심각하게 예뻐서 그렇다. 네가 날 바보 만들어서. 너를 너무 좋아하게 만들어서.] [그러니까 다 나 때문이라고?] 끄덕. [나, 책임져라.] [……!] [날 줄 테니, 네가 다 가져라.] [그래도 돼?] 웃는다. 재인의 물음에 태양이 웃어 버린다. [그건 내가 좀전에 너한테 물은 거잖아.] [그렇구나. 너무 얼떨떨해서.] [싫어?] [아니. 아니야. 좋아! 내가 책임질게. 내가 너 다 가질게. 걱정 마! 이제부터 내가 대장이야.] [응.] 작은 손을 당당히 내미는 재인. [자!] 그 손을 단단히 감싸쥐는 태양. [다섯 걸음 걸을 때마다 '재인아, 좋아해.' 한 번씩 말하기. 실시!] 비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분수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귀 기울이면 들리는 노랫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 사이사이 마치 객원가수의 피쳐링인 양 태양의 웃음소리도 커진다. [자, 잠깐. 읍! 태양! 아압! 헙! 으읍! 그러니까, 후우! 떨어져 봐봐. 다섯 걸음에 그 말 한 번이라니까. 한 걸음에 키스 다섯 번이 아니란 말이야!] 핀잔도 소용이 없다. 구박을 해도 막무가내다. 태양은 재인을 꽉 끌어안은 채 입술을 꼭 붙이고, 비맛이 섞인 재인의 혀와 입술을 실컷 음미했다. [밝히는 남태양 군.] [빼는 여재인은 매력 없어.] [으응? 아, 이게, 읍! 아닌데……!] 봄비의 촉촉함에 서로 젖어들기 시작하는 키스가 달다. 설탕물에 재어놓은 과즙처럼 맛있게 음미하는 태양의 신음소리가 솨아아아 내리는 빗소리에 얽혀 묘하게 섹시하다. 작고 여리지만 의젓한 소년이, 크고 단단하지만 잘 생긴 소년을 꾸짖는다. [진짜 말 안 듣는 부하다.] [대장이 너무 예쁘잖아. 눈이 멀어서 그래.] [못 말리는 태양!] [말리고 싶으면, 명령을 해. 대장!] 작은 별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태양은 궁금하다. 재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처음 만났을 때의 재인은, 인형 같이 신비로운 얼굴에 사랑받는 데 무척 익숙해 보이는 전형적인 인기인이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의 특별함은 은근하지만 무시 못할 무게로 다가왔다. 여린 듯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이 그랬다. 맑고 순한 듯 하지만 똑부러지는 현명함이 그랬고, 져주는 듯 하지만 결국 제가 옳았음을 증명해내는 의지가 그랬다. 엄살도 부릴 줄 모르고, 귀찮아도 싫지 않다 말하고, 부끄러워도 숨지 않았다. 재인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솔직했다. 내일이면 헤어질 친구 대하듯,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대했다. 지금도 누군가 그를 필요로 해 부르면 달려갈 것이다. 재인 앞에서는 누구나 특별해진다. 그가 특별한 만큼. 독점할 수 없는 연인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태양은 재인을 품에 안고서도 계속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아득하게 깊은 재인의 저 가슴 속 밑바닥에 자리한 생각에 대해서. 깊은 우물일수록 태양이 바닥을 비추는 시간은 짧다. 재인의 속은 항상 너무 깊었다. 그리고 헤어져 있는 동안 더욱 깊어져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리 지켜 보아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칠 수가 없다. '재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라는 물음을 말이다. [해인아! 어디 가?] 친구의 부름에 해인은 대학 도서관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막 학교를 나서려던 길이었다. 종일 시계를 보다 겨우 시간 맞춰 일어난 참이다. 해가 지기도 전에 책가방을 매고 일어나는 해인의 모습이 친구의 눈엔 의외일지도 모르겠다. [저녁 먹고 가지. 나 같이 먹을 사람 없는데.] [지금 좀 급한데. 재인이 학교 마칠 시간 다 돼 가거든.] 해인의 설명에 그는 소리 없이 입만 '아!' 하더니, 선선히 손을 흔들어준다. 자신의 시간 관리에 있어서는 철통같은 수비망을 자랑하는 여해인이라도 집안 일, 특히 막내동생 일이라면 알아서 눕는다. 그 사실을,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한 명인 국문과 송가을이 모를 리가 없다. 해인은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제발 막내가 교문 앞에 얌전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길 바라면서. 해인은 재인을 생각하는 순간 가슴 속을 징 하고 관통하는 아픔을 느꼈다. 바로 어제, 태어나 처음으로 녀석의 눈물을 보았다. 참 독하게도 울 줄 모른다고 생각해왔던 막내가 자신 앞에서 통곡을 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시작은, 재인이 늘 놀려대던 호들갑 패밀리였다. 막내가 쓰러졌던 날, 아예 입원실을 붙잡아 놓고 정식으로 검사를 받게 했다. 진통제만 몰래 삼켜온 재인을 벌하기라도 하듯, 온갖 필요한 검사를 다 받게 했더니 많이 힘들어 했다. 금방 지쳐 버리는 것도 걱정스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식은땀을 흘리고 덜덜 떨며 진통제를 찾은 재인이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 동안 그가 혼자 얼마나 아팠는지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또 한 번의 상처가 되었다.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뇌종양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한 번에 믿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재인은 막내였지만 가족의 중심이자 웃음의 핵이나 다름 없는 아이였다. 아파도 웃음을 잃지 않는 녀석이었기에 아무도 그의 아픔을 다 알진 못했지만, 늘 의연하게 버텨주고 매번 다시 살아나는 그를 보며 가족 모두가 힘을 얻었다. 그들 부모와 형제들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였다.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퇴원을 미루자, 병명을 모르는 재인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종양의 크기가 워낙 커서 양성이라 해도 위험한 상태이며, 빠른 수술과 절대 안정이 요구된다고 의사는 여러 번 반복해서 경고했다. 하지만 가족 중의 누구도 나서서 재인에게 입원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떨지 않고 침착하게, 눈물 없이, 재인의 충격까지 감싸줄 냉정함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 거다. [여해인. 너 밖에 없다.] [또 난가?] 맏형의 선언에 얼굴을 굳히면서도 해인은 결국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재인을 두 번 아프게 하지 않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살살 말해. 막내 강한 척 해도 여린 거 너 알지?] [그 반대 아닌가?] 해인의 대답에 기가 차다는 듯 태인이 외쳤다. [정말 얘 밖에 없어?] 정말이지 그건, 여해인 자신도 궁금한 질문이었다. [해인아, 네가 재인이 좀 잘 타일러다오. 어릴 때부터 병원 힘들어했잖니. 뇌종양이면 입원기간이 제법 길 텐데, 재인이가 충격을 많이 받을 거야. 저는 지금껏 아무리 아파도 병이 아니라는 것 하나로 견디던 아이인데…….] 엄마는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라 말을 맺지 못하셨다. 가슴이 답답했다. 가족들 못지 않게 해인도 숨이 막힐 정도로 두려웠다. [걱정 마세요. 재인이 안 죽어요. 이번에도 멀쩡하게 살아남을 겁니다. 두고 보세요.] 일부러 더 냉정함을 유지한 채 대답하고 휴게실을 나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입구에 서 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재인과 부딪쳤다. 뒤로 쓰러질 것처럼 넘어가는 그의 몸을 잡아 안은 해인은 아찔함을 느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아드레날린이 솟는다. 그러나 자신 못지 않게 뛰고 있는 재인의 심장박동이 가슴을 통해 전해져 온다. 이 자식! 다 들었구나! 순간 해인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형……!] 다리가 후들거리는 듯 휘청거리는 재인을 무작정 끌고 병실로 들어갔다. [나…… 뭐라고?] [들었으면 알 거 아니야.] [못 들었어!] [재인아.] [또박또박 천천히 아주 분명하게 내 눈 보고 말해 줘.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다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돌려 말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재인이다. [뇌종양이래.] [……!] [덩어리가 좀 커서 되도록 빨리 수술해야 한대.] 해인은 이렇게밖에 말할 줄 모르는 자신의 입을 저주하고 싶다. [수술……?] [응. 암은 아닐 거야. 우리 가족력에 암은 없어. 알지?] 순간 말을 뱉고는 아차 싶었다. 해인은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재인의 낯빛을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 할아버지처럼 되는 거야?]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 목이 아픈지 재인이 손을 올려 제 목을 감싸쥔다.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랑 넌 달라!] [뭐가 달라? 할아버지도 뇌 수술하고 얼마 안 지나 돌아가셨잖아. 우리 하나도 기억 못하시고, 말도 못하시고, 되게 아파하시다 가셨잖아! 종양이 너무 커서 떼어내다 실패해서 신경까지 잘못 건드려 더 악화되시고, 그래서 밥도 한 술도 못 뜨시고, 그리고……, 그리고……. 흐흐흑!] [재인아!] 그는 스스륵 쓰러지듯 차가운 병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형……, 나 어떡해. 나 어떡해……!] 할 말을 잃은 해인은 달려가, 부들부들 떠는 재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슬픔으로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재인을 당겨, 있는 힘껏 꼭 안아준다. 어린 동생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팔딱임이 낯설다. [우리 막내, 착하지.] [형, 그거 모르지? 나 요즘 앞이 잘 안 보여. 가끔이지만 소리도 잘 안 들려. 누가 나한테 와서 말을 거는데 그게 누군지 모를 때도 있어. 안 보이고, 안 들려서. 어떨 때는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그래. 형이 아무 것도 몰라 미안해. 우리 재인이 이렇게 아픈데, 형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먹고 싶지 않는데, 아프지 않으려고 요즘 나 억지로 먹거든. 잘 먹으면 안 아플 거라고 말해주는 애가 있어서 진짜 힘들지만 열심히 먹거든. 그런데 소용이 없어. 아무리 꼭꼭 씹어 삼켜도 속에서 받아주질 않아. 자꾸 구역질이 나서 배도 아프고 식도도 쓰리고 머리도 터질 것 같아. 억울해! 형, 그거 모를 거야. 나 얼마나 잘 참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내가 얼마나 잘 하는지.] [몰랐어. 그래 형은 아무 것도 몰랐다, 재인아! 내 동생이 얼마나 잘 참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휴지통 뒤지면서 너 혼이나 내고. 이렇게 착하고 잘 견디는 너한테 나는 참 못났다. 못난 형이다!] 해인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뜨거운 눈물에 덮힌지 오래다. [그러지 마. 형, 그러지 마. 형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병신 같은 동생 안 만났으면, 매번 악역 같은 건 맡지 않아도 될 텐데. 흐흐흑! 형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품에 안긴 채 재인이 제 팔을 해인의 등에 둘러 마주 안아온다.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이 애틋하고 뜨겁고 그 만큼 서럽다. [있지, 형. 학교에서 아이들이 뛰면 나도 막 뛰어 싶어져. 서로 툭닥거리면서 싸우고 서로 엎치락 뒤치락 장난 치고 그럴 때도, 그 친구들 사이에 막 끼고 싶어져. 나 바보 같지? 진짜 바보지?] [아니.] [이거 비밀인데, 작년에 나도 한 친구 잡으러 갈 거라고 뛴 적 있었다? 오래 뛰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거야. 알고 보니까 나 그거 처음이었어. 도망가는 친구 잡으러 가고, 장난으로 넘어뜨리고, 그러는 거. 나 진짜 처음이었던 거야.] [그랬구나. 우리 재인이 그랬구나.] [나 아파도 그냥 살래. 아픈 거 익숙해져서 괜찮아. 괜히 수술해서 말도 못하고 기억도 잃고 또, 또…… 죽고 싶지 않아. 형, 나 알지? 나 얼마나 강한지 형은 알고 있지? 그치?]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말을 하는 재인이다. 그래도 나무랄 수 없을 만큼, 이 녀석이 가여워 죽겠다. [나 무지 어렸을 때였지만, 할아버지 보면서 많이 울었어. 너무 불쌍해서, 우리 할아버지 너무 안 돼서 울었던 거 아냐. 무서워서 그랬어. 나 많이 이뻐해 주셨는데, 이젠 못알아 보시잖아. 마치 딴 사람 같아서, 말도 없으시고 퀭한 얼굴로 쳐다만 보시는 게 무서워서. 나 할아버지 가까이에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않고, 그 분 앞에 서서 매일 매일 울었다? 그렇게 떠나실 때까지 한 번 꼭 안아 드리지도 못 했어. 얼마나 후회했는데. 그 후로 내내 얼마나 마음 아팠는데. 나 진짜 나쁜 애지? 그래서 벌 받았나 봐.] [그런 말 하면 못 써!] [형, 나 싫어. 수술 싫어! 기억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매일 나 잊어 먹지 않게 내 얼굴 보여줘야 하는 녀석도 있어. 아직 말 못한 것도 많고, 가 보지 못한 곳도 많단 말이야!] [너 죽으려고 수술하는 거 아니야. 여재인! 너 살려고 수술 받는 거야!] [할아버지도 그랬잖아! 할아버지도 그거 믿다 수술 받고 돌아가셨잖아! 아악! 안 돼! 하악, 하악! 아으……! 나, 난…… 약! 혀어……!] 말을 하던 재인이 갑자기 머리를 잡고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다. 고통이 심한지 약을 달라는 말조차 제대로 뱉지 못하고 제 머리를 바닥에 찧어댄다. 해인은 재빨리 탁자 서랍에 든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재인의 입에 넣어준다. 주사 맞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재인아! 정신 차려! 약 삼켜야지!] [아파…….] [내 동생! 우리 재인이! 괜찮아! 형이 있잖아. 엄마, 아빠 계시잖아. 다른 형들도 있잖아. 너 혼자 아니야. 우리 막내가 누군데. 우리가 누군데. 걱정하지 마. 쉬이. 무서워하지 마. 고운 우리 재인이, 형보다 더 오래 살게 만들 거야. 아프지 않고 오래 오래! 떨지 마라, 내 동생. 다 괜찮아. 너 괜찮을 거야. 그냥 가게 안 둬. 너 그냥 무너지게 안 해!] 침대에 눕히고 다시 어깨를 안아 이마와 뺨을 쓸어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아 겨우 안도할 때였다. 재인이 신음처럼 흘린 말에 해인은 깊고 먹먹한 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형……. 미안해……!] 천사 같은 녀석이 말도 못하게 가슴을 에이게 했다. 다행히 재인의 조직검사 결과는 양성으로 나왔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의 두개강내의 압력이 점점 높아져 수술이 급하다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두통이 상당했을 텐데, 여지껏 참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잦은 현기증과 구역증이 뇌압 상승의 증상들 중 하나였다. 심해지면 이번처럼 혼수상태까지 올 수 있단다. 그 땐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가족들은 당장 새 병실과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성화였다. 하지만 해인은 그들에게, 막내가 병명을 안다는 사실을 아직 말하지 못했다. 재인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는 대신 얼마 간의 시간을 주기로. 해인이 알기로 재인은 섬세하고 예민한 녀석이었다. 그가 정리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마땅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어나 지금까지 많이 아프고 그럼에도 잘 견뎌온 재인이기에 그 정도는 누려야 했다. 학교에 다시 가겠다고 했을 때도, 펄쩍 뛰는 가족들을 해인이 막아주었다. 대신 큰 형의 차로 자신이 재인의 등하교를 시키고, 비상 연락도 항시 취하기로. 수술이 두려운 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끝까지 반대하시진 못했다. [형!] 허겁지겁 교문에 다다랐을 때, 동생은 웬 커다란 녀석과 함께 서 있었다. '미안, 나 때문에 많이 귀찮지?' 묻는 녀석을 한 번 흘겨주고, 옆의 놈을 쳐다본다. 안면이 익다. 재인이 요즘 꽤 친하게 지내는 놈인듯 하다. [태양아, 인사 드려. 우리 해인이 형.] [처음 뵙겠습니다. 남태양이라고 합니다.] 고등학생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인사를 해오는 그를 대꾸 없이 바라본다. '대답 안 해?' 불만스레 묻는 재인이에게서 다시 태양이 놈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꼭 잡고 있는 둘의 손도 뚫어지게 한 번 봐준다. 머쓱한 듯 그 손을 뒤로 감추는 태양의 얼굴에 또 한 번. 놓지 않고 감추다니. 조금 괘씸한 심정으로 해인이 묻는다. [비 맞았니?] [조금.] 손끝을 들어 '요만큼'을 표시해 보이는 재인이다. 태양에게서 동생의 가방을 받아들자, 아쉬운 듯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드는 동생이 보인다. 꾸벅. 다시 자신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다른 녀석들 틈에 섞여 하교하는 남태양. 키가 하도 커서 한 동안 지켜보고 있으면 저 멀리까지 가서도 그의 뒤통수가 보인다. 정신을 차려 보면, 재인도 자신처럼 태양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서 있다. 조금 선득해보이는 칼라와 재킷 단추를 잠궈주며 잠시 잊었던 대화를 상기시킨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형, 방금 걔 진짜 멋있게 생겼지?] 딴 소리 하는 여칠성이다. 반짝반짝, 한 동안 보지 못했던 생기 어린 눈동자. 억세게 운 나쁜 놈이지만, 너무 맑고 어여쁜 제 동생이다. [그래 봤자 사내놈이지.] 해인의 담담한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재인이다. 뭘 잘못 말했나 싶어 잠시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는 해인이다. 잠시 후, 그는 목석처럼 서 있는 재인을 재촉해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천천히 몰게. 어지러우면 말해.] [더 밟아도 돼, 형.] 집으로 향하는 내내 재인은 눈을 감고 시트에 기대 있었다. 파리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있을 때보다는 나아 보인다. 해인은 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너를 천천히 돌면서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흘끗 본다. 힘겨워 보이는데. 내쉬는 숨 하나, 삼키는 물 한 모금도 버거워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는 얼마 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할까? 설마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려는 건 아니겠지? 이미 한계가 가까웠다. 아니, 어쩌면 넘었는지도 모른다. 문 손잡이 위에 놓인 재인의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보인다. 해인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몸을 돌려 가만히 동생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준다. 그 손길에 겨우 눈을 뜨더니 재인은 가방 속에서 알약을 꺼내 입에 물었다. 해인이 미리 준비해둔 물병에 빨대를 꽂아 그의 입에 물려준다. 그리고 다시 약이 잘 내려가도록 작고 마른 재인의 등을 쓸어준다. [형 손은 길고 매끄러워서 차가워 보이는데, 되게 따뜻해.]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눈을 감고 숨만 쉬던 재인이 낮게 중얼거린다. 해인은 먼저 내려 차를 돌아 재인이 탄 보조석 문을 열었다. 부축해 주려는데 작은 몸짓으로 거부하며 재인이 혼자 내렸다. [어!] 그리고 대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 한 노파를 보고 작은 탄성을 내뱉는다. 해인은 재인에게 신경쓰느라 미처 보지 못한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노파는 재인만 똑바로 바라보고 서 있다. 그때, 꾸벅 인사하는 재인. [아는 분이야?] [조금. 형 먼저 들어가. 나 저 분이랑 얘기 좀 하고 들어갈게.] [하지만 너 지금…….]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 거야.] 재인이 안심시키려는 듯 해인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준다. 쉬게 해야 하는데. 걱정과 불만이 담긴 눈빛이 노파를 향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인은 대문을 살짝 열어놓고 집으로 먼저 들어와 버렸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정직하고 선한 눈매가 누군가 아는 사람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 식사를 위해 차려진 음식냄새가 집안을 채울 때까지도 재인은 들어오지 않았다. 식구들 모두가 해인을 볼 때마다 한 번씩 막내는 뭐 하냐고 물어댔다. 강인이 마지막으로 물어왔을 때 해인은 더 기다리지 않고 슬리퍼 바람으로 대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미처 기척을 내기도 전에, 떨리는 음성으로 묻고 있는 재인과 낮지만 부드럽게 대답하는 노파의 대화를 들었다. [그럼…… 태양인 언제 떠나요?] [아마도 곧.] 재인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씻고 싶어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으며 해인은 줄곧 창백한 재인의 안색을 살핀다. 분명 약을 먹으면 한 동안은 내색 않고 잘 견뎠는데, 이번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비틀거리며 욕실 문을 여는 재인이 못미더워 따라 들어갔다. [등 밀어줄게.] 거절할 힘도 없는지 재인은 그저 말 없이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가 앉는다. [재인아.] [형.] 몹시도 여위었다. 이렇게 동생이 마르는 동안 자신은 뭘 할 걸까? 속상하고 화나고 가슴이 저려오는 해인이다. 그 때 재인이 힘 없이 묻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떠나야 한다면 보내 줘야겠지?] [……!] 남태양 녀석이 어디 멀리 가나 보다. 아까의 대화는 해인이 들은 거기서 끝이 났었다. 재인을 데리고 들어올 때 부축을 하는데도 자신을 뿌리치지 않았다. [나는 참 이기적인가 봐, 형. 그게…… 싫은 거 있지.]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말투. 재인은 눈을 감고 욕조 안쪽 벽에 머리를 기댔다. [좋아하는 사람 보내주는 데 기꺼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런가?] 해인의 대답에 담담히 반문하더니, [그래도 보내주는 게 옳겠지?] 다시 저렇게 묻는다. 하지만 해인은 대답하지 못한다. '옳고, 그르고.'는 헤어짐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해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 둘의 솔직한 합의라고. 누가 누구를 위한다는 식의 결정은 실수를 낳기 마련이니까. 세상 누구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알 수는 없다. [보내기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 [그럼 안 갈 텐데? 안 가면, 희생이 너무 크다는데? 그 애가 잃어야 하는 게 너무 많을 지도 모르는데?] […….] [아니, 아니다. 만약에 그래도 가 버리면? 가지 마라 하는데도 뿌리치고 가 버리면…… 난 어떡해?] 당사자끼리의 솔직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잡고 싶은 욕심. 원하는 마음. 거절에 대한 공포. 누를 수 없는 기대. 엇갈린 화살표. 이 모든 것들. 어려운 문제다. 자신이 해답을 줄 수 없는 문제에 빠진 재인이 속상하다. 해인은 할 수 없이 화제를 돌린다. 가장 궁금했던 것. 여태 내내 걱정했던 질문. [재인아, 시간 많이 필요해?] […….] [수술, 언제 할 거냐?] [……곧.] 파리하게 웃으며 재인이 짧게 답했다. [아마도 곧이래, 형. 그럼 나도 곧…… 할게.] 꺼질 듯 사그라드는 숨소리처럼 혼잣말을 뱉는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너 나보고 대장을 하라는 거였구나…….] <네 전화 없이도 결국엔 잠들겠지만> 너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봄날은 한창인데, 왜냐고 묻지를 못했다. 봄날은 한창인데, 말이 목구멍을 넘질 못했다. 봄날은 한창인데, 끝내 너를 붙잡겠다 하지 못했다. 봄날은 한창인데……. 24. 깊은 밤이 되자, 전화벨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 두 번만 울리고 툭 끊기더니, 그 다음엔 세 번, 다시 두 번 울리고 끊긴다. 엄마이거나 엄마 쪽 고용인일 거다. 하지만 태양은 그들과 통화를 하고 싶지 않다. 자신을 끈질기게 설득하려 할 게 분명하니까. 이미 굳힌 마음을 갖은 방법으로 들쑤시려 할 테니까. 깊은 한숨.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통화 요청 신호를 무시하면 다음엔 이 정도의 소통마저 힘들어질 수 있다. 태양은 어둑한 거실에 스탠드 불만 켜고 전화기를 들었다. [귓구멍에 쇠심을 박았냐? 어여 문이나 따, 싸가지야!] […… !] 아는 목소리다. 아니, 굉장히 독특해서 잊을 수 없는 이의 목소리다. 요양원의 치매 걸린 할머니! 걸죽하면서도 제법 앙칼진 말투가 수화기를 통해 낮게 울렸다. 태양은 놀란 얼굴로 현관 쪽을 쳐다본다. 톡. 톡. 무언가가 작게 부딪치는 소리. 여기 와 계시단 말인가? 전화를 끊고 현관 쪽 화면을 켜지만 온통 캄캄해서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문을 열자, 노인은 재빨리 그를 밀치며 거침 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힘이 장난 아니다. 태양은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낀 채 돌아섰다. 그리고 깜짝 놀라 그 상태로 굳어버린다. 천천히 이마 쪽을 문지르던 그녀가 잿빛의 단정한 머리를 벗은 것이다. 가발이었나! 그리고 다시, 얼굴에서 주름 가득한 피부가 떨어져 나간다. 한 번에 영화처럼 떨어지지 않고 부분 부분 조심스레, 천천히 드러나는 얼굴은……! 이럴 수가! 태양은 이토록 철저하게 숨이 막히고, 가슴 답답해지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 부린다던데.] 걸걸하게 쉰 노파의 음성이 아니다. 중저음의 굵직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 변하지 않은 건 그의 예리한 눈빛 뿐이다. 굽었던 등이 펴지고, 거실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선다. 태양은 그제야 눈을 깜빡이고 팔을 풀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망이 아니면 남은 가족들의 상속포기각서가 성립되지 않는다더군.] [……!] 태양은 자꾸만 속에서 신물처럼 올라오는 신음을 삼켰다. 믿어지지 않는 심정으로, 눈을 마구 비비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다. 참담하게 속았던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겨우 이 순간을 버티는 중이다. [이제 잃어버린 내 주민등록번호를 찾고 싶구나.] 털썩. 태양은 결국 무너지듯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양쪽 눈가가 미세하게 붉어져 있다. [태양이 네가 도와주겠느냐?] [……아버지!] 사진으로만 봐 왔던 남자의 얼굴은 많이 변해있었지만, 완전히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살이 빠져 홀쭉해진 뺨을 제외하면. 무엇보다 저 무표정한 뺨과 입매가 자신과 닮았다. 말할 때 그림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습 역시. 부인과 갓난 아들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주민등록을 말소시킨 남자. 18년을 그 두 사람 못지 않게 고독하고 힘겹게 기다려온 자신의 아버지! 태양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가슴을 움켜 쥐었다. 창백하게 굳어져가는 자신의 얼굴이 스스로도 느껴진다. 그 느낌이 낯설어서 주먹을 꼭 쥐고, 눈도 질끈 감아 버린다. 잠시 후 자신에게 달려오는 남자의 기척을 느꼈지만 태양은 미동조차 없이 그대로 굳어진 채 쓰러져 눕는다. 치명적인 스트레스가 순간적으로 무방비 상태의 태양을 덮친 거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반응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태양아! 숨 쉬어! 어서! 이 녀석! 숨을 쉬라고!] 제 가슴을 쳐대는 남자의 주먹이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남자의 음성도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그 순간 태양은 저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모두 부정할 작정이었다. 잃어가는 의식 중에도 태양이 애타게 찾은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 홀로 뜬 작은 별 하나였다. - 저랑 태양이 서로 많이 좋아해요. 아세요? - 음. 자기 인생엔 이제 별 하나만 남길 거라고 말했다더군. - 그래요? 나 하나로도 족할 만큼, 내가 그렇게 좋대요? 슬픈 듯이 묻는 재인에게 그녀는, 아니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릴 적에 잃었다던 태양의 아버지.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 다 알진 못해도, 재인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다 이해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태양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혼자서도 완벽했던 그가 자신에게 의지해 왔을 때부터.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걸 바라면 탈이 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다고.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이해했다고. 하지만 가슴이 아팠다. 머리 아픈 것보다 더, 가슴 속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잠시 헤어지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재인은 믿지 않았다. 그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병을 믿지도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었다. 끝없이 자신을 잃지 않도록 상기시켜줄 그가 필요했다. 비가 오면 힘들어하는 그를, 꾹꾹 숨을 눌러 쉬는 그를 웃게 만든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금방 돌아가 버릴 것이다. 어느 새 또 웃지도, 울지도, 표현하지도 않는 태양이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사내 녀석이지.' 해인이 형은 그리 말했지만, 재인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어떤 것도 방해로 여기지 않을 만큼 절실했다. 그래서 놓아야 하는 지금이 더 힘든 건지도 모른다. 툭. 손등으로 떨어진 눈물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재인은 눈을 꼭 감았다. 불안하다, 태양!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이 나는 싫어. 억울해 죽겠어! 충분히 아팠는데, 우리 아주 잘 견뎌 왔는데……. 불쌍해서 어떡해. 너하고 나, 바라는 게 많지도 않은 너하고 나, 이제 어떡해? 어떡할까? 태양아, 나는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다시 깨어나서 너에게 무서웠다 투정도 부리고, '전화하지 그랬어, 바보야.' 이렇게 혼내주는 네 말도 들었으면 좋겠어! 나…… 정말 지금은 널 잃고 싶지 않아! 너 또 나 없이 아픈 숨 쉬며 예전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어김 없이 새벽에 눈을 떴다. 태양은 묵직한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둡고 정적이 흐르는 집에는 오늘도 저 혼자다. 간밤에 쓰러진 자신을 보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란 사람의 존재를 실감하는 순간이었지만, 어색함과 분노가 가슴을 채웠을 뿐 반가움이나 다정함 같은 건 없었다. 서러운 해후였다. 그들 중 누구도 안전함이나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는 이들처럼 딱딱하게 긴장돼 있었던 것이다. 그 분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재생되었을 우리의 재회도 이랬을까? 태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러한 질문을 머리 속에서 털어버렸다. 엄마의 마지막 카드는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자신더러 떠나라고 말씀하셨다는 건, 이번 패에 태양이 당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셨다는 의미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듯 마지막일 패를 드러내 흔드실 리가 없다. 아무도 믿지 마라 하지 않으셨던가! 엄마도, 강호 형도, 세상도,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건 모르셨나 보다. 믿지 않는다고 해서 덜 아픈 건 아니라는 것. 애써 신뢰를 쌓아두지 않았다고 해서 배신감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태양은 베란다 창을 열고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후우 뱉고 나니 조금 살 것 같다. 작은 별을 만나면 이제 웃는 것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태양은 진통제를 찾는 사람처럼 급히 돌아서 학교갈 채비를 서두른다. 보고 싶다, 재인아. 너의 냄새를 맡고, 널 안고 싶다! 네 곁에서만…… 정말이지 네 곁에서만 나는 살고 싶다! [대장보다 늦게 오는 부하가 어딨냐?] 열린 창문을 타고 안개가 넘어왔나 보다. 드라이아이스처럼 복도에 깔린 뽀얀 아침 안개를 밟으며 교실 문을 열었을 때, 하나만 열어놓은 창문 앞에 혼자 서 있던 재인이 자신을 돌아보며 물어왔다. [전화하지.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책망하는 태양. 그러면 재인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거다. [텔레파시를 보냈는데. 자느라 못 받았나 보네.] 밝아오는 아침해를 받아 발그레하게 물든 재인의 뺨이 보인다. 부드러운 갈색 고수머리가 하얀 이마를 귀엽게 감싸고 있다. 눈부실 정도로 흰 셔츠의 카라가 단정한 블레이저 속에서 빛이 난다. 완벽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붉은 입술. 가냘프지만 당당한 선을 가진 어깨. 작은 별이다. 자신이 푹 빠져 버린 깊은 우물이다. [굶고서 보내는 텔레파시는 약해서 오다가 사그라질 걸.] [뭐야, 그거. 억울하게시리.] [다음부턴 전화기 써. 왜 힘들게 텔레파시를 보내?] [전화 되게 좋아하는 남태양.] [텔레파시 되게 못 보내는 여재인.]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양 뺨을 살포시 쥔다. 내려 감기는 재인의 속눈썹이 기막히게 휘어져 있는 모습을 감상한다. 아름다운 사람. 따뜻하고, 부드럽고, 천진하고, 순수한 내 사람. 태양은 가슴이 온통 저릿저릿해서 못 살겠다. 그래서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린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재인의 향기. 신선하고 달콤한 귤 냄새가 가까워지고 있다. 촉. 닿았다 떨어지는 보드라운 입술. 눈을 뜨면, 상체를 제게 기울여와 고개를 들고 있는 재인의 얼굴이 보인다. 온전히 기대올 수 있게 그의 등을 감싸 당기면, 천천히 서로의 입술이 닿는다. 그 상태에서 태양이 먼저 혀를 내밀었다. 따뜻한 입술 사이로 들어간 혀가 촉촉하게 재인의 입안을 적신다. '아!' 하는 낮은 탄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다. 예민한 입안 점막과 혀와 입천장을 어루만지며 유혹하고 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를 혀가 들어갔다 나왔다, 떨어졌다 닿았다 하며 애를 태운다. 촙! 부끄러움에 오무려 버린 재인의 입술 덕에 떨어지는 순간 마찰음이 들린다. 발개진 재인의 뺨 만큼이나 태양의 얼굴도 붉어져 있다. 뜨거운 피가 빠르게 돈다. 그래서 이제 수줍음도 소용 없다. 반들반들한 입술의 유혹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다시 고개를 내려 재인의 부풀어오른 입술을 머금어본다. 상큼한 귤냄새와 보드라운 살의 탄력이 아찔하다. 입술 주름도 셀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럽고 섬세하지만, 굉장히 끈적한 키스다. 어느 새 태양은 재인의 몸을 완전히 자신의 가슴에 끌어당겼다. 그럼 태양의 팔을 붙들고 있는 재인의 손에도 힘이 꼭 들어간다. 그걸 바라 보는 순간, [사랑해, 재인아!]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가슴 속에 가득 찬지 오래. 다시 목구멍까지 올라온지도 오래. 그렇게 겨우 참아왔는데, 격한 심장의 치받음으로 들썩이더니, 쏟아지듯 흘러 넘친 그 말이 재인의 귓가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무래도 나, 너 사랑하는 것 같다.] [……!] 재인은 많이 놀랐나 보다. 젖은 입술을 벌린 채, 동그래진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태양을 쳐다보고 있다. 두근두근. 심장이 다른 레이스를 질주하기 시작한다. 재인의 반응을 긴장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태양도 움직이지 못한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제발 무슨 말이든지 해보아라, 작은 별.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쿵. 심장이 가슴 안벽에 제 머리를 박았나 보다. 콸콸 피가 흐르는 느낌이 후끈대는 통증과 함께 찾아왔다. 재인은 자신을 감싼 태양의 팔을 풀어내고 그 품에서 빠져나온다. 조금 비틀거리긴 해도 척척 제 자리로 걸어가 가방을 들어 올린다. 숨을 가다듬으려는 듯 제 심장 근처를 손으로 누르는 모습이 보인다. [얼른 나가야지.] [어딜?] 태양이 물었지만, 재인은 급하게 서두르는 모양으로 교실 뒷문을 향해 걷는다. [재인아!] 큰 소리로 불러도 그는 흘끗 돌아볼 뿐, 다시 드르륵 문을 연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장난기를 발견해 내는 태양이다. [땡땡이 치자.] [뭐?] [나 그거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거든. 따라 와, 태양!] 남은 지금 고백하고 나서 심장이 뛰어 죽겠구만, 저는 고작 땡떙이 칠 거니까 어서 동조나 하라고 외친다. 뭐 저런 작은 별이 다 있나 싶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이미 사랑에 폭 빠진 남태양 군은 근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제 가방을 든다. [OK!] 이미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는 작은 별의 등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리며. [대장의 명령이시라면!] 모두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왔는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투명한 봄햇살이 두 소년의 정수리 위에서 따사롭게 노니는 오후였다. 재인은 마치 대단한 모험을 할 것처럼 태양을 데리고 학교를 벗어나 놓고는, 막상 무얼 해야겠다는 개념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했다. 손을 꼭 마주잡은 채, 한 명이 뛰면 끌려가고, 다른 한 명이 멈추면 덩달아 서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귀했다. 둘 모두에게, 그 날은 그랬다. [어, 체리다!] 하염 없이 걷다가, 문득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재인이 반색을 하며 멈춰서서, 붉고 윤기나는 체리를 바라본다. 올해는 꽤 일찍 나왔다. 그래도 표면이 검붉은 게 아주 잘 익은 것 같다. [저거 좋아해?] [엄청!] [사줄까?] 태양의 물음에 재인은 눈을 깜빡이며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본다. '왜?'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도리도리 고개까지 저어댄다. '엄청 좋아한다면서?'하고 물으면, '엄청, 엄청 좋아하지.'하고 중얼거린다. [아줌마, 이거 주세요.] 태양이 과일가게 주인을 향해 말한다. 그러자 재인은 그의 입을 막을 듯 손을 들었다가, 천천히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주인아주머니를 향해 손사레를 친다. [됐어요! 아줌마, 죄송해요. 다음에 살게요.] 그리고는 고집스레 서 있는 태양을 끌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 도로 가서 사고 싶어하는 태양과 뒤에서 그의 등을 밀며 끙끙대는 재인. 햇살 좋은 오후에 괜한 실랑이가 소리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저거라도 먹어라, 여재인! 너 아까 점심도 죄다 남겼잖아.] '너 좋아하는 거 사주고 싶다! 더 많이 웃고, 너 더 많이 기뻐하는 모습 보고 싶다!' 하는 진심을 이리 뱉는 태양이 있다.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 저거 금방 짓물러져. 다음에 사주면 되잖아!]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도 충분히 행복해. 눈물 나게 감사해. 만약에 여기서 더 욕심내면 나 진짜 벌 받을 것 같단 말이야!' 하는 마음을 저리 전하는 재인이 있다. [피곤해라. 이만 집에 가자.] 재인이 선언하자, 태양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걱정과 아쉬움이 그림자처럼 얼굴 전체에 퍼진다. [곧 어두워지잖아. 집에 가. 응?] […….] [태양이 집, 나도 한 번 가 보자!] 결국 재인 덧붙인 한 마디에, 길어질 것 같던 실랑이는 끝이 난다. 대장은 대장인가 보다. 태양은 충성 어린 미소와 함께 앞장선다. 대장을 소중히 모시고 친절히 안내하려는 모양이다. 재인의 손을 찾아 힘주어 잡고, 제 가슴팍에 꼭 붙여 걷는 걸 보면. [나 왜 사랑해?] 태양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였다. 재인은, 열쇠를 찾아 가방을 뒤지는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복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마치, '읽고 있는 책 왜 재미있어?' 라고 묻는 것처럼 평이한 호기심이 깃든 말투다. 그래서 태양 역시 같은 어조로 대답한다. [지금은 말 못해.] 마치, '다 읽고 나서 얘기해줄게.' 하는 것처럼. [언제부터 사랑했니?] 역시나 책에 대해 묻는 대화처럼 담담하게. '어디서부터가 재미있었는데?' 라고 묻는 것처럼. [몰라.] [그럼 언제 식을지도 모르겠구나?] '다 읽고 나면 그 책, 버릴 거야?' 이런 질문에나 더 어울릴 표정으로.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 답지 않게 질문과 답이 오간다. [아니.] […….] [식지 않아. 절대로.] 안 버릴 거야. 평생 간직하면서 두고두고 꺼내 볼 거야. [어떻게 확신해?] 집에 불이날지도 모르고, 누가 빌려갔다가 돌려주지 않을 지도 모르고,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올지도 모르는데. '평생'이란 말은 좀 믿기 그렇잖아.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널 사랑한단 말도 하지 않았을 거야.] 넌 꼭 믿지 않아도 돼. 그냥 지켜 봐. 계속 보고만 있어줘. [……!] 태양의 대답에 재인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질문도 그만 두고 그저 곰곰히 생각에 잠긴 사람 마냥 복도 벽을 쳐다본다. 실은, 나도…… 알아. 이미 나도 그거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 알아. 아는데, 알지만, 그냥 물어 봤어. 너도 나랑 같은가 하고. 나처럼 너도 똑같은 곳에서 웃고, 똑같은 부분에서 우는가 하고. [나도 사랑해.] 드디어 입을 연 재인의 고백. 그와 동시에 태양의 손에서 열쇠가 떨어진다. 몸을 숙여 그 열쇠를 주워든 재인이 태양을 살짝 밀어내고 대신 문을 연다. [사랑하자, 태양!] [응?] [우리 오늘 한 번 죽도록 사랑해 보자. 그리고, 어떻게 되나 보자.] 저 여린 입술에서 어찌 저리도 비장한 말이 나오는가. 태양은 미칠 듯 뛰기 시작하는 두근거림 위로 우리한 통증을 느낀다. 세상에! 죽도록 사랑하자니……! 태양은 집안으로 먼저 들어서는 재인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거 아니, 재인아? 나도, 백만 번 동감이다! <안다, 알고 있다> 못 살기 위해서, 실패하기 위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 모두가 그 순간 순간에 자신의 안간힘을 다해 살고 있는 거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그거잖아. 이 순간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것과, 미래에 내가 꼭 얻고 싶은 어떤 것. 그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는 게 어디 쉽나? 그래서 힘이 들어도 견디고, 아파도 참는다. 죽지 않을 만큼 앓아도 보고, 포기하지 않을 만큼 불평도 하고, 미워하지 않을 만큼 미련도 갖는다. 우선은 그것 뿐이다. 25.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하지만 태양은 받지 않는다. 대신 자신과 재인의 가방을 거실 소파에 던져놓는다. 그리고 재인의 팔을 붙잡아 당기며 침실로 빠르게 걷는다. [흐읍!] 재인의 재킷 카라를 잡고 급하게 끌어당겨 키스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몸을 굳히며 재인이 눈을 꼭 감는다. 하지만 입을 벌려 삼킬 듯 자신의 입술을 탐미하는 태양에게 지지 않으려는지, 금세 태양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기울인다. 그 덕에 완벽한 각도가 만들어진다. 둘 다 키스가 늘었다. 해 본 건 키스가 다지만, 그래서 키스 만은 완벽했다. [일단 받아 봐.] 태양의 입술이 재인의 목선을 타고 내려가자 재인이 말한다. 끊임 없이 울리는 벨 소리가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한다. 태양은 잠시 재인을 놓아주고 몇 발짝 걸어가더니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대신 방문을 탁 닫아 버렸다. [사랑만 하자며.] 자켓을 빠르게 벗어던지고 셔츠 단추를 풀며 태양이 다가온다. 재인은 그 모습에 마른 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상의를 벗었다. 팔을 채 다 빼기도 전에 태양이 재인의 팔을 뒤로 모아 잡고 가슴을 부딪혀온다. [아앗!] 깊게 내려앉는 입술의 무게에 짓눌려, 재인의 허리가 뒤로 한껏 휘어진다.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다른 팔로 허리를 받쳐안은 태양이 하얗게 드러난 재인의 목덜미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팔딱이는 혈맥을 찾아 혀로 정성스레 핥는다. 그러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박동이 느껴진다. 앞섶을 벌려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등을 쓸자, 재인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구도 지나지 않은 하얀 눈밭을 걷는 기분이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마저 경이롭다. 태양은 재인의 팔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대신 그의 허리를 양손으로 안듯이 잡았다. 순면으로 된 속옷을 가슴에서 헤치자 뽀얀 살결 위로 도드라진 작은 유두가 보인다. 본능적으로 그 위로 입술을 강하게 내린다. 흠칫 하며 놀란 재인이 태양의 어깨를 밀어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새로운 처녀지를 발견한 탐험가처럼 거침없다. [읏! 아파…….] 태양이 자신도 모르게 이로 그의 가슴을 깨물었나 보다. 재인이 낮게 신음하는 소리에 정신이 조금 든다. [침대에 눕혀 줄게.] [싫어. 같이……!] 재인의 무릎 밑에 손을 넣어 번쩍 든 태양이 조심조심 그를 침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재인이 그의 옷깃을 잡아끌며 말을 맺기도 전에, 태양도 재인의 곁에 올라와 눕는다. 두 사람이 눕기에 공간이 충분해도 꼭 붙는다. 비로소 안도하는 재인의 희고 사랑스런 얼굴을 한 없이 다정하게 바라본다. [알고 보면 굉장히 민감한 재인.] [이제 보니 엄청 위험한 태양.] 쿡쿡.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는다. 빙그레 미소 짓는 재인의 뺨을 가만히 꼬집으며 태양이 속삭인다. [혹시 꿈 아니냐?] [글쎄. 하나도 안 아픈데?]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태양은 재인의 담담한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다시 안았다. 그의 가느다란 머리칼에서 하루 온 종일 받은 따끈한 햇살 내음이 느껴진다. 천천히 재인의 어깨 위로 옷을 모두 벗겨낸다. 부드럽고 두툼한 이불을 그 위에 덮어주며 태양은 그 밑으로 들어간다. 재인의 바지버클을 풀고 속옷과 함께 한꺼번에 잡고 빠르게 내려 버렸다. 아앗! 재인은 놀랍고 당황스러운 듯 탄성을 지르다,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이불로는 얼굴을 가린다. 태양도 자신의 옷을 급한 손길로 벗어 내던진다. 거대한 이불 속에서 일어나는 생소한 경험. 태양이 옷가지들을 모두 침대 밖으로 밀어내고 재인을 감싸듯 그의 위에 누웠다. 벌거벗겨진 부드러운 살결이 서로 맞닿는다. 바라보기도 민망한 부분까지 다 닿아 버렸다. 어찌할 줄 모르는 재인을, 역시 붉어진 얼굴의 태양이 무작정 끌어안아 입술을 부빈다. 부러졌던 조각이 다시 맞추어지듯 꼭 맞물리는 서로의 아늑한 품이 기적 같기만 하다. [어떻게 하는 줄 알아?] [대충.] [제대로 알아야지, 대충 알면 어떡해. 자고로 옛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어.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부끄럽다면서 따질 건 다 따지는 재인이다. 설명을 할 때마다 삐죽이 올라가는 그의 검지를 자연스럽게 잡아 내린다. [괜찮아, 재인아.] 태양은 어느 새 허스키해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코 앞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재인의 눈에 짧게 키스한 뒤 속삭인다. [사랑은 본능이야.] 따지지 말고, 어느 누구의 가르침에도 흔들리지 말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서로 원하는 대로 하다 보면, 어찌 될 거야. 우리……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본능에 충실하자.] 오늘은 그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거야! 해보고 싶었던 거, 꼭 해주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하는 거다! 도대체 몇 번을 쏟아냈는지 모른다. 촉촉하게 젖은 재인의 머리를 이마에서 쓸어올려주면서 태양도 숨찬 호흡을 골랐다. 하악, 하악 힘겹게 숨을 쉬는 재인의 몸은 축 늘어진 채, 태양의 가슴 위에 얹혀 있다.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섹스였다. 어른들이 보면 꼬맹이들 소꿉놀이처럼 귀엽게 보아줄지도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들에겐 처음 만져지고, 처음 느끼는 감각들이라 모든 게 놀랍기만 했다. 부풀어오른 가슴 돌기의 예민함도, 뜨거운 손끝의 마술 같은 느낌도, 서로를 향해 힘차게 뻗은 남성의 간절함도, 입술과 혀가 전해줄 수 있는 감각의 향연도 두 사람에겐 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내 잠옷 입어.] 샤워를 하고 나온 재인의 울긋불긋한 몸이 다시 태양을 자극하고 설레게 했다. 침대 위에 올려둔 새 속옷과 파자마를 가리키며 급히 그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태양은 혼자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거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가슴 한쪽에도 희미하게 자리한 멍자국이 보인다. 아까 재인이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를 물어왔지만, 태양은 대답하지 못했다. 간밤에 쓰러져 버린 자신을 숨쉬게 하려고 아버지가 몇 번이고 제 가슴을 쳤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어 버린다. 지금은 작은 별만 생각해도 심장에는 충분히 무리다. 샤워기를 틀었다. 물줄기를 가장 세게 조절하고 그 아래 섰다. 예민해진 피부 위로 쏟아지는 물이 따끔따끔하면서도 시원하다. 눈을 감자, 곧장 재인의 귀엽고 따뜻한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 전 자신에게 안겨 있던 사랑스런 모습 말이다. 그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닿는 곳마다, 만지는 곳마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팔짝 뛰어오를 듯하면 태양이 꽉 눌러잡곤 했다. 도망칠 듯해도 매번 자신에게 붙들렸다. 그러면 다시 바들바들 떠는 재인의 몸이 자신에게도 참을 수 없는 전율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쁘고 따뜻하고 강한 존재다. 감히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깊고 맑은 우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작고 신비한 우물. 태양은 그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지갑을 떨어뜨린 기분이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며 아무리 울고 불고 해도 이제 절대 건져낼 수 없다는 걸 안다. 두레박을 타고 내려갈 수도 없다. 자신은 너무 무겁고 또 초라한 존재니까. 그래서 태양은 지갑 같은 건 잊었다. 차라리 우물을 가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우물만은 자신이 이 세상으로부터 지켜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태양이 준비해둔 잠옷을 입고, 재인은 부엌으로 갔다. 그를 위한 저녁을 차려주고 싶었다. 꽤 오래 힘을 썼으니 배가 고플 것이다. 따끈한 밥과 국이 있는 밥상을 앞에 놓고 푹푹 떠 먹는 태양의 모습이 보고 싶다. 아주머니가 다녀가셨나 보다. 냉장고에는 밑반찬이 가득하고, 보온밥솥에는 새 밥이 들어있다. 자신은 그저, 아주머니가 정성스레 끓여놓으신 국만 데우면 될 것 같다. 우선 태양이 나오기 전에 처방받은 진통제를 미리 삼킨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놀랍게도 오늘은 통증이 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랑의 힘인가 보다. 그 생각에 혼자 입을 가리고 웃는 재인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욕실에서 들려오자 재인의 뺨에 홍조가 피어오른다. 진짜 대단한 태양이다. 길고 단단해 보이는 몸, 건강해 보이는 피부가 너무 멋져서,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저 아깝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여재인이라고 핀잔을 들으면서도, 태양의 넓은 어깨와 깊게 패인 쇄골과 매끈한 팔 근육을 만지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그의 뜨거운 체온과 집요한 손길이었다. 미칠 것 같은 감각을 전해주는 섬세한 태양의 손을 참을 수 없어, 벗어나려 할 때마다 놓아주지 않고 더욱 옥죄는 고집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심장에 안 좋아. 재인의 불평에, 태양은 억눌린 신음을 뱉으며 외쳤었다. 내 심장은 여기 없어. 죽도록 사랑하려면 심장 같은 건 미리 떼어놓고 시작해야지. 그렇게 말하던 태양의 입술이 장난스레 허벅지를 깨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힘이 빠져 버린 재인이 거부할 새도 없이 페니스를 빠르게 핥기 시작했다. 그 충격적인 행위에 열심히 태양의 완강한 어깨를 밀어내던 자신의 헛손질이 떠오른다. [아아, 몰라! 미쳤어, 미쳤어!]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워진 재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식탁 닦던 손을 멈췄다. 그만 생각하라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데 아플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속만 끓인다. [혼자 중얼거리는 건 보기 흉해.] [어! 찬물에 샤워했어?] 어느 새 다가와 재인의 뺨을 감싸는 태양의 손이 차다. 품에 끌어안는 바람에 닿은 목덜미랑 가슴도 모두 서늘하다. [이러고 조금만 있으면 금방 따뜻해질 거야.] [배 안 고파?] [고파.]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자꾸만 말을 시키는 재인이다. [그럼 밥 먹어.] [밥보다 이게 더 좋아.] [아앗! 부어서 아파.] [헐렁한 잠옷 둘둘 걷어 입고 있으면서, 이뻐해주면 고마워라 해야지.] [느끼해, 태양.] [그러게. 나 왜 이러지?] 재인은 문득 아까 태양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침대 속에서 어디 도망갈 데도 없고 되게 괴로웠었는데……. [나보고 예쁜 감자라느니, 윤기나는 오징어라느니, 그래서 기름에 퐁당 빠뜨려 튀기고 싶다느니 그런 말 또 하지 마.] [벌써 외웠네?] [잊고 싶을 뿐이야.] [머리도 좋아.] [태양의 말이니까.] 잠시 내려앉는 침묵. 재인의 말을 음미할 시간의 간격. 태양의 말이니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고. 무엇이든 깊숙이 와서 제멋대로 박히니까, 베어내려 해도 베어낼 수 없다고. [그럼 너도, 나보고 때깔 좋은 고구마라느니, 거대한 새우라느니, 그래서 통통 썰어 계란반죽에 푹 담궜다 구워 버릴 거란 말도 하지 마.] [그거야 네가 먼저 시작……!] 재인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너도 다 외웠네?] [나 머리 좋거든.] [피. 내가 해준 말이니까 그렇지.] 짐짓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중얼거리는 재인. 그 모습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그를 번쩍 안아 올리는 태양. [으앗!] 놀라서 지르는 재인의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식탁 위에 사뿐히 그를 앉힌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앞의 의자에 앉아, 재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숨을 들이쉰다. 깨끗한 면 섬유의 포근한 향기가 연인의 살내음과 섞여 콧속으로 빨려들어온다. [이런 게 행복인 거냐?] 순진한 소년들이 한 거라고는 만지고, 안고, 키스하고, 부비댄 것밖에 없다. 그 18세 청춘들이 피끓는 열정으로 서로를 향해 달리다, 철 없이 주고받은 농담들. 태양의 질문은 비단 그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닐 거다. [어떤 거?] 모른 척 되물어오는 재인은 태양의 머리를 안고 다정하게 쓸어준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재인의 배에 뜨거운 입김이 전해져 살짝 떨린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겠다는 기분.] [……!] [평생 너와 이렇게 살지 못할 거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 [태양아!] 억지로 그의 얼굴을 떼어 내려다본다. 재인은 놀랍고, 당황스럽고, 슬픈 눈으로 태양의 눈을 마주한다. 그럼 안 돼. 너 곧 떠나야 하잖아. 난 곧 수술을 받아야 하고. 알잖아. 너 부정해도 결국 우린 잠시 이별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야. 아직 나이가 어려 '잠시'란 말의 의미를 나는 잘 몰라. 하지만 너 그런 말, 못 써. 아주 나빠. 울고 싶어졌잖아. 너 때문에 나, 잘 참아야 하는 나까지 울고 싶잖아, 이제. 너만 사랑하니? 나도 너 사랑해! 너만 행복하고 너만 아픈 거 아냐. 나도 미칠 것 같아. 이 순간이 너무 완벽해서 더 힘들어. 그래도 니가 대장 시켰잖아. 난 대장이니까 지금 참고 있단 말이야. [왜?] […….] [왜 대답 안해, 재인아?] […….] [너는 아니야? ] 불안한 듯, 아니 조금 화난 음성으로 태양이 묻는다. 재인은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푼다. 아니 풀려고 애는 쓰지만 워낙 강해서 풀어지지 않는다. 그럴수록 아프도록 꼭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않는다. [아프다, 태양.] 기어이 그 말을 내놓고서야 손아귀에 힘을 빼는 태양이다. 식탁에서 내려와 서려는 재인을, 하지만 또 금세 낚아채 자신의 무릎에 앉힌다. 재인의 다리를 벌려 마주 앉듯이 제 앞에 놓고 뚫을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파자마의 단추를 풀어헤치고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키스를 퍼붓기 시작한다. 미치도록 부드러운 피부가 뜨거운 입술에 예민하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자극적이다. 이대로라면 그를 식탁에 눕힐 수도 있을 것 같다. 태양은 간절히 그러고 싶어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바짝 당겨 안아 온 등을 쓸어대며 재인의 목덜미를 물자, 희미하게 억눌린 신음이 작은 별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미칠 것 같다! 아니 자신은 이미 미쳤다! 태양은 자신의 남성이 재인의 다리 사이에서 힘있게 솟는 감각에 눈을 감았다. 서서히 부풀어오르는 재인의 것도 자신의 배를 눌러오기 시작한다. 아찔하다. 이대로 터져 버리고 싶다. 그를 터뜨리고 싶다. 재인과 함께, 둘이서만 꽁꽁 숨어 오래도록 탐닉하고만 싶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갈망이 죽도록 강렬해서 무서울 정도다. 재인의 가느다란 목을 뒤로 넘기고 드러난 목젖을 입안에 가득 물었다. 힘들어하며 찡그린 그의 얼굴이 묘한 쾌감을 일으킨다. 태양은 재인의 잠옷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그의 것을 잡았다. 입술을 꼭 깨물고 신음을 참는 모습이 더욱 색정적으로 자신을 자극한다. 급한 마음에 옷 위로 마주한 자신의 것과 나란히 잡고 마찰하기 시작한다. 재인의 손이 태양의 어깨로 올라와 있는 힘껏 꼭 쥐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다. 고통스러울 만치 심장을 할퀴는 쾌락이 그를 덮쳤다. 또 다시 축축하게 젖어버린 두 사람의 옷 때문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밀착되어 버린 몸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태양은, 늘 침착하고 다정한 어린 연인의 살냄새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축 늘어진 채 기대어온 재인의 낮은 속삭임을 듣는다. [죽는 건 싫어.] [……!] [끝까지…… 우리 이렇게 살자.] [……응!] [변하지 말고, 사랑만 하면서 오래오래 살아.] [그래.] 목이 메여와 태양은 그렇게밖에 대답하지 못한다.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지친 재인의 음성에 눈물이 난다.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도 한 없이 다정해서 가슴이 아프다. 아프도록 사랑한다! [대신…….] 망설이는 듯한 재인의 음성. [너 미국 갔다온 다음에.] 흠칫! 몸이 굳어 버렸다. 심장이 뚝 멈춰 버린 느낌이다. [뭐……라고?] 재인의 마지막 말에 태양의 낯빛이 극도로 창백해졌다. 급히 재인의 어깨를 잡아 밀쳐내며 얼굴을 마주한다. 그러나 재인은 눈을 감고 있다. 이미 속눈썹도 젖어 있다. 질끈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다 보인다. 그런데……. 뭐야, 여재인! 너 지금 뭐라는 거야! [그 모든 건…… 우선 네가 미국 갔다 온 다음에…….] [싫어!] 싫다! 미쳤구나! 나도 미쳤지만, 너도 미쳤어! 마구 흔들어 본다. 눈을 떠! 뜨란 말이야! 내 눈 보고 말해. 사람 똑바로 쳐다보고 다시 말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재인은 태양의 손길에 여지 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절대 눈을 뜨지 않는다. 그를 떨쳐낼 힘도 없어 보이는 창백하고 여린 몸. 간신히 입을 열어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싫어도…… 그렇게 하자.] [여재인!] [명령이다.] [……!] 그 말과 함께 재인이 눈을 떴다. 시선이 부딪친다. 피하지 않는 재인의 눈빛을 이번엔 태양이 피해 버린다. 여전히 꼭 맞닿아있는 서로의 몸이 서러워, 재인이 일어나려 애쓴다. 하지만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그 때마다 도로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자 태양이 다시 그를 와락 안아 버린다. [하지 마, 재인아!] [바보, 남태양.] [싫다! 이러지 마라, 여재인!] [잊었어? 너,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겠다 그랬잖아.] 재인은 힘 없이 그의 품에 끌려들어간 채로 아프게 상기시킨다. 내 말만 따르겠다고 너 그랬잖아. 그러다 잘못돼도 다 괜찮을 것 같다 했잖아. 네가 나한테 알려준 거야. 원하는 게 있으면 명령을 하라고. 나는 네가 알려준 방법대로 하는 거야. 너 알고 있었잖아.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우리는 아직도 자라는 중이라 다 여물지 못해 약해. 세상이 얼마나 똑똑한데. 우리가 아무리 영악해도 이 세상만 할까? 이기지 못할 거야. 고집은 고집일 뿐이란 거,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그래서 그런 말 했던 거잖아. 사랑한다고.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명령이다, 남태양. 내가 정말 그걸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장으로서, 너의 유일한 대장으로서 내 하나 뿐인 사랑에게 지금 명하노니……. [더 지체하지 말고 떠나, 태양.] 그리고…… 꼭 다시 돌아오는 거다! 제발! 재인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늘 믿어왔던 것처럼 자신의 건강이 그리고 자신의 미래가 점점 나아지는 게 아니라면, 지금 누릴 수 있는 걸 누리고 현재를 낭비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는 건 우스운 일 아닌가? 어차피 미래가 현재 자신이 한 만큼의 결과를 정직하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과거에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지금 현재가 거부하듯이 미래도 그렇다면, 그냥 '현재'만 바라보고 '지금'을 실껏 누리며 후회없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도 자신을 다독이고, 미안해하고, 한숨 쉬고, 용서했다. 살기 싫지 않았다. 재인은 항상 잘 살고 싶었다. 능숙하게는 못 살더라도, 기쁘게 살아있고 싶었다. 매 순간순간 감사하며 기억하고 싶은 그런 진심으로. 최선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곧은 의지로. 꼭 오늘 그에게 주절거려야 했던, 준비된 거짓말만큼. 이제껏 잘 버텨 왔으니, 조금만 더 참아 볼 생각이었다. 이 순간만 견디고 나면 어떤 결과든 옳게 내려질 것 같았다. 결국, 미래가 점점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버리는 건, 삶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이다. <따뜻한 이별을 원하는 너에게> 눈물은 차마 보일 수가 없다. 나는 이미 날 위한 나는 버렸다. 손이 내 손이 아니다. 머리가 내 머리가 아니다.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니다. 하는 말마다 내 말이 아니고, 드는 생각마다 내 생각이 아니다. 웃어도 내 웃음이 아니다. 하여 울고 싶어도 그 눈물을 믿을 수가 없다. 26. 또다! 또 둘이 동시에 학교에 오지 않았다. 승진은 비어있는 태양과 재인의 자리를 흘끗대며 하루 종일 친구 놈들에게 신경질을 부려댔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변덕을 부린 건지 알 수가 없다. 모르겠으니 불안하고, 화가 날 만큼 걱정도 되고, 또 그러고 있는 자신에게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저 새끼, 진짜 못 봐주겠다.] [완전 드라마야.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데, 탤런트가 따로 없어.] [저 성질머리 잠잠해지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냐?] 희웅, 재훈, 선민은 저희들끼리 쑥덕이면서 승진의 흉을 본다. 그리고 눈짓만으로도 뜻을 모았는지 책가방을 싸기 시작한다. [새끼들아! 뭐 하는 짓이야?] 앙칼지게 소리를 질려대지만, [잔말 말고 따라 와. 쫌팽아.] 희웅이 승진의 가방까지 챙겨들자마자, 재훈은 승진의 팔을 질질 끌며 교실을 빠져나온다. 그 광경에 술렁이는 교실을 조용히 시키는 것은 자신의 임무로 삼는 선민이다. [태양이 새끼 집에 갈 거냐?] 내키지 않는 건지, 엄청 내키는 걸 숨기는 건지, 묘한 어투로 승진이 묻는다. 교문을 막 벗어난 중생들이 주머니에서 담배부터 꺼내 입에 물던 타이밍이었다. 역시 이 방법이 제대로였나? 의미 있는 시선을 주고 받는 재훈과 희웅. [솔직히 말해 봐. 너어…… 남태양 좋아하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저리 묻고 마는 선민. [지랄! 내가 머리에 총 맞았냐? 변기에 대가리 박았어? 남태양을 누가! 씹! 아, 살다살다 별! 개가 달나라 가서 똥침했단 소린 들어봤어도! 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저 미친……! 어후, 짜증 나! 왕선민 개새……! 아, 날 뭘로 보고!] 말마다 끝을 제대로 맺지도 못하면서, 말려주질 않으니 끝이 없다. 피곤한 얼굴로 희웅이 피우던 담배의 끝을 손끝으로 잘라 바닥에 버린다. 그리고 나머지를 곧장 승진의 입에 팍 쑤셔넣었다. [푸풉! 퉷! 야, 미쳤어? 내 입이 재떨이야? 뭐 이런 씨발 놈의……!] [시끄럽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렇게 된 이야기였다.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태양의 집에 바로 오지 못하고, 식당에, 노래방에, 공터를 전전하다 승진의 분이 거진 풀렸을 때쯤, 그러니까 깊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이 곳에 도착하게 된 사연 말이다. 태양은 전화해도 받지 않고, 근처엔 어슬렁거리는 놈들도 하나 없다. 전날과 다름 없는 무료한 기다림의 시작. 그리고 또 다시 그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승진을 보내줄 시간도, 주먹을 쓸 때마다 끼는 장갑을 꺼낼 여유도 없었다. 무작정 검은 차를 밀고 들어와, 다 때려 죽일 듯 무작정 덤비는 무리들과 맞서야 했다. [남태양, 개새끼! 오늘 너 기필코 죽여 버리겠어!] 지난 번에 만났던 그의 사촌이란 자가 잔뜩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뭉둥이를 휘두르는 사내들 틈으로 술에 취한 놈 마냥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가에 물고 있는 비릿한 미소도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살기를 띄고 있었다. [감히 거짓말을 해? 이 박경식이를 뭘로 보고! 씨발! 개새끼! 뭐? 미국에 안 가겠다고? 바라는 거 없다고? 하! 어디서 개수작이야! 비행기표 다 끊어놓고 구라 치면 내가 속을 줄 알고? 얼씨구나, 춤 추면서 뒈진 영감탱이 돈 다 채가는 거 구경해줄까 봐? 그래! 한국에서 꽁무니 감추며 달아나는 네 새끼 등 뒤에서 손 흔들 뻔 했지. 암, 그건 인정해. 씨발! 그래서 너 오늘 죽었어! 완전히 씨발, 다 밟아주겠다고, 내가!] 어찌나 독하게 뱉어대는지, 목청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다 들린다. 그 와중에도 건장한 사내들의 매질이 가차 없이 자신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러저리 최대한 피해 보면서 상대의 급소를 노리다, 저희들끼리 주절대는 네 사람. [저 인간 뭐래냐?] [어째 오승진보다 더 하다? 누가 좀 말려 봐!] [씹! 내가 뭘? 얻다 비교를 해? 게다가 저런 노땅하고!] [그런데 저 새끼 방금, 태양이가 미국 간다 하지 않았냐?] [……!] 헉. 소리를 내며 재훈이 어깨를 맞고 쓰러졌다. 선민이 뱉은 말에 놀란 나머지 왼쪽에서 공격한 남자를 보지 못한 거다. 어릴 적부터 싸움터에서 굵어온 이마가 핏줄이 설 만큼 긴장된 땀으로 젖어든다. 어찌됐든 그들은 어른이다. 그것도 꽤나 단련된 전적이 물씬 느껴지는. 조용한 주택가에서 벌어지는 몸싸움답지 않게 꽤나 살벌했다. 분명 어느 집에서건 소란을 듣고 경찰에 신고했음직도 한데, 줄곧 잠잠하다. 사이렌 대신 오히려 주차장 아스팔트 위로 쇠파이프 구르는 소리가 더 요란하다. [흐윽! 씨발!] 결국 희웅도 다리를 맞았는지 주저앉아서는 일어나질 못한다. 4 대 6. 그래봤자 승진은 일찌감치 얼굴이 온통 터져서 쓰러진지 오래다. 피를 보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피가 목적이 아니었다. 어느 새 검은가죽 차림의 남자들은 아파트로 들어가려 했고, 승진 무리가 어떻게든 그건 막아보려 애쓰는 모양새로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패배하다시피한 싸움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박경식이 아파트로 쳐들어올라가는 건 시간 문제라는 판단이 설 때였다. 스르르. 자동문이 열리고, 아파트 로비 안쪽에서 재인이 걸어나왔다. 이미 잔뜩 부어올라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승진이 그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낮은 신음을 뱉었다. 안돼……! 하필이면 지금 그가 나타날 건 뭐란 말인가! 가슴 속에서 아찔하고 날카로운 칼바람이 지나갔다. 안 그래도 창백하게 질려있는 재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이젠 선명히 보인다. 힘 없이 걸어나오다 이쪽의 난장판을 발견하고는 부르르 몸을 떠는 것도 느껴진다. 그리고 그 고운 눈가를 스쳐지나가는 걱정. 어쩌면 태양을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승진은 엉금엉금 기어서 재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먼저 그 앞에 닿은 것은 승진이 아닌 박경식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 비틀린 웃음으로 재인을 내려다보는 남자. 대답이 없는 재인의 어깨 위에 툭 얄미운 손을 내려놓은 채 앞뒤로 흔든다. [이거이거, 사진보다 훨씬 예쁜데? 하긴 우리 쪽 탐정이 사진을 좀 못 찍어.] [아저씨는 누군데, 내 친구들 때려요?] [친구? 방금 친구라고 했냐? 쪼마난 호모 새끼한테도 친구가 있어?] 빌어먹을 새끼의 말에 재인의 뺨이 백지장처럼 굳었다. 승진은 신음소리를 참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일어나 앉았다. 어떻게든 저 씨발 놈의 손을 재인의 어깨에서 떼어내야 하는데……. [일이 좀 수월해졌군. 널 없애면, 남태양 새끼가 더 괴로워할 테니까.]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느라 싸움을 멈췄던 이들이 박경식의 말에 하나 같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승진도 무리하게 움직였더니 깨진 팔꿈치에 미칠 것 같은 통증이 짜르르 흘렀다. 아, 씨발! 빌어먹을! [아저씨 바보네.] [뭐! 이 좇만한 새끼가!] 남자가 재인의 목을 움켜잡고 조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남자의 눈을 서늘하게 마주보는 재인. 파랗게 질려가는 얼굴이 괴로워 보이는데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다. 그 비장하고 거친 슬픔의 무게에 오히려 박경식이 질려 버린 모양이다. 재인을 떨치듯 놓는다. 차가운 벽에 탁 밀쳐진 재인이 고통을 참는 듯 입술을 꼭 깨문다. 보는 이의 심장이 떨릴 정도로 위태로운 모습이다. 저 녀석, 되게 아파 보인다. 이미 아픈 중이었던 게 분명하다. 세상에! [아저씨는 나 못 죽여.] 신음하듯 낮게 흐르는 음성이지만, 또렷하다. 죽일 듯 노려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재인이 설명한다. [보아하니 태양이 사촌 형 같은데, 적을 잘못 골랐어. 나 태양이 미국 보내기 싫어. 아저씨도 그렇잖아? 아닌가? 태양이가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해야 할아버지 유언 받들 수 있다며? 그럼 아저씨 한 푼도 못 건지겠다. 그치? 그런데 머리 좀 써 봐. 태양이를 여기 한국에 붙들어놓을 수 있는 게 누굴 것 같아? 나 밖에 더 있니? 아저씨 적은 내가 아니야. 나랑 손 잡아야, 아저씨도 거지를 면하지.] 승진 무리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재인이 힘겹게 뱉어내는 말을 듣고 있다. 언뜻 이해가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상황이 조금 뚜렷해지는 것도 같은 것이……. 아니, 그런데 왜 재인이 저런 말을 하고 있지? [선택해. 나랑 같이 태양이 붙잡을 건지, 아니면 놓칠 건지. 아저씨네 무능한 탐정이 알려줬는지 모르겠지만, 나…… 곧 죽어. 머리 속에 눈깔사탕만한 종양이 들어있어서 얼마 못 산대. 그래서 나 이기적이지만 태양이 잡을 거야. 죽는 마당에 남의 사정 못 봐줘. 그런데 만약에 아저씨가 나 없애면, 훗, 어떻게 될까? 나야 조금 덜 사는 거지만, 아저씬 그야말로 인생 접는 거지 뭐. 내 친구들까지 다 죽일 거 아니면, 방금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 없앤다 그랬…….] [닥쳐!] 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박경식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독기 서린 눈으로 죽일 듯이 재인을 노려보는 표정에도 광기는 사라지고 없다. 건방지게 선택을 강요하는 조그만 녀석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온 몸을 떨면서, 주먹을 쥐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말 똑똑히 들어.] [닥치라고 했잖아!] 철썩! 남자의 우악스런 손이 재인의 뺨으로 날아갔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재인의 얼굴에 선명한 손자국이 생긴다. 거칠고 차가운 땅을 짚어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재인의 손을 구둣발로 꽉 밟고 짓이기며 남자가 다시 한 번, '닥쳐.' 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재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이들 틈에서 혼자 침착하게 말을 맺어 버렸다. [태양이 탑승 날짜 알지? 그 날 나 태양이 데리고 여행 갈 거야. 아저씨는 우리 뒤를 따라와서 혹시라도 중간에 마음이 바뀐 태양이가 공항 간다 그러면 못 가게 막아 줘. 보다시피 난 힘이 없어서 그 애 못 붙잡거든.] [……!] [피곤하네. 난 이만 집에 갈래. 아저씨도 생각 잘 정리하고 와. 괜히 지금 태양이 건드려서 일 그르치지 말고. 그럼 내가 용서 안 해.] 망설임이나 거침이 전혀 없는 재인의 이야기에 모두가 설득된 것 같다. 박경식의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검은 사내들이 모두 차에 올라탔다. [거짓말이면 너 내 손에 진짜 죽어! 네 눈 앞에서 남태양도 갈아마셔 버린다!] 손끝을 단단히 재인에게 고정한 채 외치고는 그도 사라졌다. 어두컴컴한 단지 안 주차장엔 이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승진 무리만 남았다. 그리고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그제서야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는 재인. 좀전까지 또박또박 뱉어낸 말들이 놀라운 사실들 뿐이어서 승진에겐 지금 그가 너무도 낯설다. 하지만 재인을 향해 기어가다 멈추었던 승진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여재인. 괜찮냐?] 승진의 물음에 겨우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억지로 웃음을 짓는 재인이다.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오더니, 흰색 차에 기대 앉아있는 희웅과 어깨가 빠졌는지 고통스레 오른 쪽을 움켜쥐고 있는 재훈을 차례로 살핀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선민이 재인의 등을 망설이듯 두드리며 묻는다. [얼굴 좀 보자. 아까 맞은 데…….] [너희들에 비하면 난 아무 것도 아냐. 그나저나 오승진, 피 많이 흘렸네. 옷도 엉망이고.] 재인이 선민을 향해 차분하게 대답하면서도 쉬지 않고 그들의 상처를 돌본다. 그런 재인을 도와주고 싶은가 보다. 일부러 가볍게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승진. [아, 그러게! 집에 가면 엄마한테 죽었다!] [선민아, 미안한데 너 움직일만 하면 소주 좀 사올래?] 어찌나 조용하게 말하는지, 나머지 넷은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본다. 선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승진이 그에게 좀 멀리 있는 수퍼의 위치를 알려준다. [남태양은…….] [얘들아, 부탁 하나만 할게.] 선민이 달려가고, 사방이 조용해지자 희웅이 먼저 태양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재인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정중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일, 태양이는 모르게 해줘.] [……!] [궁금한 거 많을 거야. 이해해. 하지만 너희도 이제 봐서 알겠다. 태양이, 어릴 적부터 집안 일로 많이 힘들었나 봐.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겠지. 그런 태양이 불쌍히 여겨서라도 너희들, 아니 우리, 그 녀석 고이 보내주자.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방금 일은 없었던 일로 치자.] […….] [너희…… 태양이 친구잖아.] 재인의 말에 대답을 못하는 세 사람이다. 늘 그의 친구냐는 말에 발끈해 왔었다. 좋아한다는 말에도 불끈 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태양은 자신들의 관심 대상 안에 항상 존재해왔다. 그의 웃음을 보면 화를 내면서도 싱거운 사람처럼 속으론 기분이 좋아지고, 타박을 해도 꿋꿋이 들려주는 그의 농담이 혼자 있을 때 가끔 생각나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자신들에게 태양은, 재인의 말대로 친구였던 모양이다. 학교에 말도 없이 안 오면 궁금해 집까지 찾아오고, 그에게 적대적인 놈들도 그냥 보내기 싫은, 그런 우정이었나 보다. [그럼 넌?] 재훈이 묻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도 냉정하게 버티고 있는 재인에게. 작고 야무지게 말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가슴에 아프도록 파고들어 숨 쉬기가 힘들다. [죽는다는 말 뭐야? 거짓말이지?] [응.] [진짜지? 진짜 다 뻥이지?] [내가 왜 죽어? 안 죽어. 비리비리 해도 얼마나 질긴지 너희가 더 잘 알잖아.] […….] 끄덕.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진짜 더 잘 알아서가 아니라, 아는 척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다. 그것이 재인의 마음을 덜 괴롭히는 길인 듯 싶어서다. 그 후 선민이 소주 세 병을 들고 나타날 때까지 그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침묵은 무겁다기보다 묵직했다. 염려와 믿음, 우정과 감사가 함께 해서 그랬나 보다. [많이도 샀네.] 재인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선민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람 수에 맞게 사려다 돈이 모자라 그냥 세 병만 산 거였다. 헌데 마실 게 아니었나 보다. 재인은 승진에게서 손수건을 빌려 그 위에 소주를 부었다. 적셔진 수건으로 그들의 얼굴과 상처 부위를 닦아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소독을 하는 거다. 피부를 다 닦고 나서는 피가 묻은 옷도 닦아준다. 소주가 닿기만 했는데도 피얼룩이 쉽게 사라진다. 신기하기도 하다. 재인은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렸을 때 코피를 하도 자주 흘려서 옷이 남아나질 않았거든. 식구들 몰래 그때 그때 지우려면 집에 항상 있는 소주가 최고더라고. 내 나름대로 역사가 오랜 민간요법이야.] 자분자분 설명해주는 재인. 끄덕끄덕 감탄하며 듣는 희웅, 재훈, 선민. 그 때 승진이 고개를 갸웃 하며 묻는다. [코피 흘리는 게 네 탓이야? 왜 식구들 몰래 지워?] [그야……! 헉! 지금 몇 시지?] 대답을 하려다 말고 재인이 급히 시간을 묻는다. 지금쯤 호들갑 패밀리를 잠재우고 혼자 이를 갈고 있을 해인이 떠오른 것이다. [음.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 [안 돼! 해인이 형이랑 약속한 시간 넘기겠다!] 안 그래도 붙잡는 태양을 떼어내고 몰래 나오느라 눈물 콧물 다 빼고, 있는 진 없는 진 다 소진했는데! 중얼거리며 일어서려다 비틀거리는 재인을 재빨리 선민이 부축한다. 절뚝이며 일어선 희웅도, 어깨를 잡고 팔을 살살 돌려보는 재훈도 재인의 곁에 붙는다. [우리가 데려다줄게.]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그니까 그 택시를, 우리가 같이 타고, 니네 집 대문까지 모셔다 준다고.] [맞아. 그 정도는 해야 친구지. 안 그래? 남태양 친구면 여재인 친구도 되는 거 아냐?] 신나게 억지를 부리는 녀석들 뒤에서 승진이 남은 소주를 들고 한 모금 마시며 비웃듯이 외쳤다. [니네 택시비 있어?] 아까 저녁 내기에서 진 놈들이 지갑을 탈탈 터는 걸 지켜봤었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친구들 모습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는 승진. 곧 이어 그가, 재수 없다고 야유하는 녀석들 틈에서 목청 높여 외친다. [나한테 붙어, 여재인! 나 택시비 많다!] ……말하자면 그렇게 된 이야기였다. 소주가 피를 녹이는 작용이 탁월하단 사실을 아는 재인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굳이 따지지 않고 함구해줄 의리맨들이 함께한 밤. 신데렐라의 바쁜 귀가처럼 우르르 다 같이 몰려간 재인의 집앞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땡땡이를 쳐 본 소감을 정감 있게 들려주는 재인이 있었다.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친구로 둔갑한 것이 기분 좋아 보이는 네 명의 소년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서자마자, 잠들고서도 저의 손을 놓지 않던 태양의 얼굴이 떠올라 소리 없이 서러운 눈물만 뚝 뚝 흘리던 작은 별이 있었다. [여재인. 거기 서!]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일찍 학교로 달려왔다. 분명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먼저 잠이 든 재인이었는데, 눈을 뜨니 사라지고 없었다. 희미한 여명 속에서 발견한 거라곤 작은 쪽지가 다였다. - 명령에 불복하는 부하랑은 말 안 할 거야. 겨우 그 한 문장이 다였다. 메모지 가쪽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한참 쥐고 있었을 텐데, 적혀 있는 글이라고는 애정어린 인사 한 마디 없이 매정한 경고 뿐이다. 태양은 자꾸만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삼켜대며 학교에 왔다. 평소처럼 느즈막히 등교한 재인은 아무리 노려봐도 이 쪽을 쳐다봐주지 않는다. 이젠 화장실에 갈 때마다 오승진을 데려간다. 교실을 옮길 때도 희웅 무리 안에 섞여있다. 적응하기 힘든 변화가 하룻밤 사이에 재인과 자신을 갈라놓았다. 태양은 허탈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더 이상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을 서먹하게 대하는 재인이나 차갑게 돌아서는 재인은 너무 아팠다. 탁! 전날 무단 결석으로 나란히 교무실에 불려가는 중이었다. 태양이 재인의 팔을 낚아채 획 돌려세우며 묻는다. [너 어디 아프냐? 나 모르는 사람이야? 대체 왜 그래?] [메모 남겼잖아. 그거 봤으면 왜 이러는지 알 거 아냐.] 고집스레 눈을 피하며 대답하는 재인. 태양은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한다. [네가 뭐라 해도 난 안 가.] [그럼 나도 너 모르는 사람이야.] [그게 말이 돼? 우리 어제, 서로 뭐 했는지 잊었어? 너하고 나……!] 태양의 말을 가로막으며 재인이 외친다. [잊을 거야! 너도 네가 한 말 다 지키지 않는데, 나도 잊어 버릴 거야.] [그럴 수 있어? 너 정말 그럴 수 있어?] […….] [재인아! 제발, 제발 이러지 말자!] 눈시울이 붉다. 분명 작은 별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태양은 답답해져오는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속을 태운다. 나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진짜야. 그거 진심이다. 재인이 너만 있으면 난 웃는다. 너도 알지 않아? 그냥 만들어 웃는 게 아니라, 저절로 막 웃어진다. 그런 날 버릴 거냐? 너 정말 이대로 나 밀어낼 거냐? [미국에 가.] [싫다! 싫어. 안 가! 죽어도 안 가!] [그럼, 난 두고두고 너 만난 거 후회할지도 몰라.] 믿을 수 없는 말을 차갑게 던지고 재인이 가 버린다. 놀라서 힘이 빠진 저의 손을 떨쳐내고 빠르게 걸어가 버린다.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승진이 달려와 재인의 곁에 선다. 태양은 속을 깊게 베인 사람 마냥 가슴을 움켜쥔 채 서 있다. 그리고 다정하게 재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승진을 본다. 다독이는 손끝에 묻은 걱정과 위로 따위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태양은 그저 자신의 작은 별에 닿는 녀석의 손만 노려보았다. 재인이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태양은 절대 그를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와 떨어져 살고 싶은 마음 따위, 추호도 가져 본 적 없다. 재인을 만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그를 마음에서 떼어놓고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태양은 뛰었다. 또 다시 재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획 잡아 돌렸다. [그럼 같이 가!] 버럭 외치는 순간, 재인의 뺨이 젖어있는 것을 본다. 굵게 방울지어 툭 툭 떨어지는 투명한 것이…… 눈물인 것 같다. 왜? 대체 너 왜……! [그렇게 날 보내야겠으면, 너도 나하고 같이 가면 되잖아!] [태양아…….] [안 돼? 그것도 싫어?] 숨을 삼킨다. 이미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는 숨을 억지로 삼키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러면서도 작은 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떼더니, 단단하게 뭉친 말을 내뱉는다. [네가 따라야 하는 명령은 하나야. 그 외에는 있을 수 없어.] [여재인!] [갔다가 돌아와. 그럼 되는 거잖아. 뭐가 문젠데? 내가 어디 도망가니? 학교가 사라져? 얘들이 변할 것 같아?] 재인이 가까이 서 있는 승진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다시 태양을 빤히 쳐다보며 조금 더 낮게 묻는다. [아니면, 네가 변할 것 같아서 그래?] 거칠게 아무렇게나 제 뺨을 손바닥으로 닦아낸 재인은, 더 차분해진 음성으로 어느 새 타이르듯 태양에게 말했다. [모든 건 제자리에 놓여 있어야 빛이 나는 법이랬어. 네 자리가 여기라면 분명히 다시 돌아올 거야. 난 믿어.] 어린 연인은 홀로 훌쩍 커 버린 느낌이다. 지난 밤에는 그토록 달게 살냄새를 맡게 해주던 작은 별이 하룻밤 새 저 혼자 자라서 태양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원래부터 저렇게 자라 있었는지도 모른다. 잘 감추고, 잘 덧입혀서 또래들 마냥 어리게 보였던 건지도 모른다. 태양은 그 낯선 느낌이 참을 수 없어 몸을 획 돌렸다. 그대로 재인으로부터 물러나왔다. 무작정 멀리 걸을 셈이었다. 그 모습에 무릎을 꺾고 주저앉아 버린 연인을 보지 못한 채, 태양은 재인이 서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벗어날 뿐이었다. <오늘도 자는 척하다> 깊은 밤, 멀리 있는 너에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반항. 27. 전화도 받지 않는다. 수술 날짜 잡아 달라고 말하고서는 제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려 학교는 가겠단다. 요즘의 재인은 너무 위태로웠다. 겉으로 보기엔 이렇다 할 변화를 짚어낼 수 없지만, 순간순간 내보이는 표정이나 눈빛이 그답지 않게 텅 비어있을 때가 많았다. 늘 총명하고 밝은 아이였던 재인의 이런 모습은 가족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다들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들을 재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해줄 수 없는 것도 알았다. 이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무리였다. 그 날, 혼자 교무실로 내려간 재인은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태양의 부모님. 그의 학부모로서 찾아온 두 사람을 동시에 마주했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할머니로 분장한 채였지만, 당당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께 걱정을 듣고 나오는 재인을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인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들과 함께 승진이 자주 불러내곤 했던 밤나무 숲으로 갔다. [박경식이라는 남자 만났어요. 말씀하신 대로 얘기했습니다.] 재인이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모습을 한 아버지가 낮게 대답했다. [알아. 다 지켜보고 있었다.] […….] 미안하고 고맙구나. 그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 재인은 한참 동안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표정 없는 재인의 얼굴이 말갛게 개인 겨울 하늘처럼 푸른 한숨을 내쉰다. [기억해요?] […….] [어머니 저한테 태양이 주겠다고 하신 거 기억해요?] 재인이 눈을 들어 태양의 어머니를 고요하게 바라본다. 슬프고 안타까운 빛이 그녀의 안색을 파리하게 덮고 있다. 그러나 힘들게 침을 삼키고 대답하는 음성만은 담담하다. [기억해.] [그 약속 지켜요.] [……!] [나 태양이 놓는 거 아니에요. 꼭 돌려줘요.] 재인이 똑부러지게 말한다. 하얗게 되도록 주먹까지 꼭 쥐고 있다. 태양의 부모는 그런 소년의 모습을 두 눈에 고스란히 담는다. [나 지금은 태양이 지켜줄 힘이 없어서 그런 거에요. 튼튼해지면, 나 좀 더 강해지고 나면 절대 안 보내요. 두 번은 안 보내요. 잠시도 안 떨어질 거에요. 태양이……. 우리 태양이 제 꺼에요. 잊지 말아요, 아줌마. 흡! 흐흑! 다시…… 나한테 다시 돌려주는 거 잊으면 안 돼요. 네?] 결국 울음을 내어놓고 만다. 손으로 입을 막고 밀려나오는 울음을 막아 보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몸 속에 가득 채워진 억울함과 서러움이 홍수가 난 것처럼 눈물을 밖으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재인아…….] [응, 아줌마. 나 재인이에요. 잊지 마세요. 엉엉. 너무 아파요. 여기가 너무 딱딱해져서 힘들어요.] 가슴을 손 끝으로 꾹꾹 두르며 재인이 주저 앉는다. 그런 작은 별을 품에 안고 톡 톡 등을 두드려주는 어머니다. 진짜 아픔을 아는 사람들은 위로가 얼마나 하찮은 건지 안다. 그래도 그마저 없으면 견디기 힘들다는 것도 안다. [어리다는 게 너무 억울해요. 어엉! 힘이 없다는 게 너무 서러워요. 아프다는 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몸이 이렇다는 게 서러워 죽겠어요! 아줌마. 나 살아있을게! 어떻게든 살 거에요. 흐흐흑! 그러니까 다시 줘요! 네? 태양이 꼭 돌려 줘요!] 터진 댐을 뚫고, 여태 가두었던 거대한 물폭풍이 일어나는 것 같다. 온몸으로 울어대는 재인 때문에, 그를 안은 여인의 몸도 들썩이며 계속 흔들리고 있다. [안 주면 안 돼! 안 주면 안 돼! 태양이 있어야 돼! 흐흑! 나 그래야 오래 살아! 흐어엉! 나 그래야 살아도 살아요!] [그래. 재인아. 꼭 살아남아. 수술 잘 받고 어떻게든 살아있어. 아줌마가 태양이 데려다 줄게. 너는 잊어도 내가 잊지 않고 챙겨줄게. 그러니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아가. 이리 섧게 울지 말아. 이러다 너 쓰러질라. 너 잘못 될까 아줌마는 더 두렵다. 울지 마, 재인. 착하고 가여운 우리 작은 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눈물은 전이가 빠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순간, 아버지는 그들에게서 돌아선다. 보여줄 수 있는 눈물도 있지만 보여줄 수 없는 눈물도 있는 거다. '이유가 뭐래요? 대체 그렇게 태양한테 잔인하게 구는 이유가 뭔데요?' 재인이 물었을 때, 아버지는 태양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털어놓았었다. 그렉이, 태양의 외삼촌인 그가 오랫동안 태양의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치정 싸움이 가장 더럽다지만, 그건 일방적인 욕심이고 집착이었단다. 사랑은 그토록 잔인하고 무섭다. 한 가족이 붕괴되고, 죄 없는 세 사람의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희생을 해온 사람이라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시 희생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 재인에게 자신들이 그랬다. 어린 그에게 몹쓸 짓을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리니까. 태양도, 재인도 겨우 열여덟이니까 잘 이겨낼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아파도 결국 잊을 거고, 빠르게 흔적 없이 아물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숲을 걸어나오기 전, 어머니를 향해 재인이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네가……!] [비행기 타면, 그 때 태양이 주세요.] 그리고 말했다. [그 날 아저씨들 따돌리는 일 제가 직접 할게요.] [그건…… 안 돼!] [제가 해야 성공해요.] 단호한 말투다. 사실이긴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 게다가 재인은 환자였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태양의 아버지는 재인의 차분하고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을 보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을 했다. 이 아이, 참으로 강하구나! [대신!] 보다 더 단단해진 재인의 음성. 두 사람의 귀가 재인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바짝 긴장한다. [앞으로 절대 태양이 혼자 두지 마세요.] [……!] 외로움 많이 타는 아이에요. 아닌 것 같아도, 오랜 고독이 박혀서 눈이 밤처럼 까매요. 항상 곁에 있어주지 못하면 전화라도 자주 하세요. 태양이 전화 좋아해요. 목소리 듣는 것도 좋아해요. 그러니까…… 이제는 절대 혼자 아파하게 만들지 마세요. [만약에 태양이 혼자 두면, 내가 절대 용서 안 할 거에요.] 시간은 사포로 문지르듯 거칠게 지나갔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 시간에 아파하던 자신은 분명 부드럽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가 떠나기로 한 날, 그러니까 비행기 티켓에 찍힌 날짜가 오늘이 될 때까지도 태양은 재인과 말을 섞지 않았다. 눈이 마주쳐도 웃지 않고, 부딪쳐도 잡아주지 않았다. '고집쟁이 남태양.' 작게 쏘아붙이고 지나가면, 그런 저의 뒤통수에다 '고집불통 여재인.' 이라고 되쏘았다. 그런 시간들이 아까워도 재인은 태양을 더 설득하지 못했다. 더 이상 가라고 독촉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태양아, 나 집 앞인데. 잠깐 내려 올래?]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승진 무리에게 태양이 탈 비행기 시간을 알려주고, 자신은 아침 일찍 태양에게로 왔다. 푸른색 점퍼에 가벼운 베이지색 배낭을 매고 있다. 여행을 갈 거니까. 그와 단둘이 행복한 밀월을 떠나는 것처럼. 재인의 말에 이어진 것은 그리 긴 침묵이 아니었다. [금방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내려오라 한 사람은 저인데, 되려 조급히 말한 건 태양이다. 재인은 보이지도 않을 대답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폴더를 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여행가방을 든 녀석이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재인과 그가 나란히 올라타자 곧장 출발한다. 그리고 그 뒤를 미리 주차되어 있던 검은 차가 뒤따른다. 부르르르. 진동으로 설정되어 있던 재인의 전화가 울린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옆에 앉은 남자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재인! 너 지금 어디야!] [태양아.] [아악, 이거 놔! 재인아! 여재인! 너 괜찮니?]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태양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린다. 재인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괜찮아! 난 괜찮아, 태양아! 너는 왜 그래? 어디 아파? 누가 아프게 해?] [너 어디니? 꼼짝 말고 거기 있으라 했더니 너 어디 갔어?] 이를 악물고 던진 태양의 물음에 재인은 뒤를 돌아본다. 위협적으로 택시를 바짝 뒤쫓아 오는 검은 차가 보인다. 태양과 꼭 닮은 체격의 남자는 모자를 푹 내려쓴 채 옆에 앉아 있다. [난……. 나는…….] [재인아, 상관 없어! 너 지금 어디 있든 괜찮으니까, 그냥 나한테로 와! 지금 와!] [안돼. 흐윽! 안돼, 태양아, 나 갈 수 없어.] 기어이 울음이 또 터지려 한다.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어떻게든 가슴 안에 가두어보려 안간힘을 쓴다. [그 사람들 따라 가! 태양아, 공항 가면 승진이랑 애들 있을 거야.] [미쳤니? 여재인, 너 끝까지 제 정신이 아니구나!] [난 배웅 못하지만, 걔들이 있으니까……. 인사 잘 하고…….] [무슨 말이야! 하나도 이해 안 돼! 너 재인이 아니지? 재인이면 그런 말 할 리가 없어!] […….] [작은 별 바꿔! 우리 재인이 바꾸란 말이야!] 태양의 절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서 재인은 고개를 숙여 무릎에 댄다. 그 때 택시가 급히 왼쪽으로 진로를 꺾었다. 쿵! 차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치며 그 충격으로 전화기를 손에서 놓치고 만다. 택시 기사를 가장한 남자도, 태양으로 변장한 남자도 모두 긴장된 얼굴로 밖을 살핀다.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자마자 바짝 거리를 좁혀온 검은 차가 위험하게 옆에 붙은 것이다. [괜찮니?] 곁에 앉은 남자가 걱정스럽게 재인을 일으키려 한다. 하지만 재인은 완강하게 버티며 어딘가에 떨어진 핸드폰을 찾기 위해 바닥을 더듬는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입술이 퍼렇게 질려 있는데도, 버티는 힘이 가볍지만은 않다. 다시 전화기를 찾아 간신히 귀에 대며, 소리치는 태양에게 대답을 한다. [재인아! 재인아!] [나…… 여기 있어.] [너 대체 어디야? 위험한 데 있니? 옆에 누가 있어? 나한테 와! 너 내 옆에 있어! 지금 당장 내 곁으로 와!] [태양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 아까 제법 호되게 부딪쳤는지 이마 옆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남자는 숨이 막히는 기분으로 생명처럼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본다. [……사랑해.] 툭.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놓자, 고개가 힘 없이 떨구어진다. 의식을 잃은 모양이다. 이마를 짚자 깜짝 놀랄 정도로 뜨겁다. 사람의 피부가 견딜 수 있을 만한 열이 아닌 것 같다. 남자는 닫히지 않은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대 보았다. [사랑해! 나도 너 사랑해. 재인아, 너 밖에 없어! 너만 사랑해! 너 날 사랑해서 그런 건데, 내가 계속 못되게 굴었지? 알아. 니 맘 알아. 미안해! 나 원망했지? 속좁고 바보같은 남태양이라고 욕 많이 했지? 미안하다, 재인아! 그리고 내가 더 사랑해! 죽을 만큼 너 사랑해! 제발……! 응? 그러니까 너 제발……!] 탁. 남자는 폴더를 닫아 버렸다. 다음 순간, 검은 차가 쏜살같이 택시를 향해 달려와 위험천만하게 들이받았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소년을 감싸고 엎드린다. 서너 번의 거센 충격이 연이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반복된 충돌을 이기지 못한 운전자는 전속력으로 달리던 차의 핸들을 놓쳐버리고 순식간에 가드레일을 받아 버렸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엄청난 충격! 하지만 이미 차 안에서 의식을 잃은 소년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국제공항은 어디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줄 알았다. 처음 와보는 인천공항 출국장 근처에서 희웅과 선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가 이렇게 넓고, 훤하며, 조용한 거냐? 대체 남태양은 어디 있고? 재인이 비행기 시간보다 일찍 가라 해서 너무 일찍 왔나 보다. [남태양 진짜 가나 보네.] 재훈이 낮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재인이는 안 오려나?] [야! 너 옛날에 그 말 못 들었냐? 남태양은 바늘이고, 자기는 실이라매! 당근 오겠지.] 승진이 팍 짜증을 내며 소리친다. 그런 녀석의 뒤통수에 쏱뚜껑만한 손을 턱 얹으며 희웅이 말린다. [웬 신경질이냐? 남태양 전학가길 바라던 놈, 너 아니었냐?] [씨발! 그래! 아주 속 시원해서 문드러지겠다! 됐냐?] 승진이 희웅을 팔을 확 뿌리치며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기어이 철 없는 말을 덧붙인다. [재인이 그 날 얼마나 아팠는지 다 불어 버릴까 보다!] [뭐 하러?] [남태양 새끼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못 가게 만들라 그런다. 그 꼴 한 번 상상해 봐라! 너 같으면 안 고소하겠냐?] 승진의 억지에 허어 웃어 버리는 희웅이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서로 말이 없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이별 장면에 익숙치 못한 녀석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서 있다. 그렇게 대략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제복을 정하게 차려입은 경찰 두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차례로 신분을 확인하더니, 놀랍게도 경찰서로 동행하기를 요청한다. 며칠 전 있었던 폭행 사건의 비디오가 입수 됐는데, 그들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건 처음이다. 놀란 얼굴로 서로 마주보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따라가는 그들이다. 마치 미리 짜여진 극본처럼, 차근차근 태양이 떠날 준비는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항공기는 후진이 불가능하다. 지상에서도 바퀴에 동력이 직접 전달되는 게 아니라, 비행기는 오직 엔진의 분사로 인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뒤로 나는 비행기가 없듯이 그래서 뒤로 가는 비행기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끌어주는 견인차량이 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항공기 견인차량이 끌어주지 않으면 비행기는 항공기 쉼터인 이글루에도 들어갈 수 없다. 태양은 이미 재인을 향해 오직 전진만 가능한 비행기였다. 그러나 재인의 갑작스런 명령 이후, 혼자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철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거…….] 바로 어제였다. 자신의 자리를 지나쳤던 재인이 다시 되돌아와 손을 내밀었었다. 그리고 태양의 손 위에 반지를 올려주었다. 그가 내내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 반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한테 마지막으로 선물하신 반지야.] [……!]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걸 손에서 한 번도 빼지 않으셨어. 그런데 내가 그게 너무 탐이 나서, '이 반지만 있으면 나 안 아플 것 같아.' 라고 말했더니, 할머니가 정말 내 손에 그 반지를 쥐어주시는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 '이제부터 할아버지가 널 돌봐주실 거야.'라고 하셨어.] […….] [그 후 얼마 뒤에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그럼……!] [우리 할아버지가 이제 널 지켜주실 거야.] 서로 말도 하지 않는데, 저렇게 길게 설명까지 해주었었다. [나한텐 이게 있으니까, 그건 너한테 줄게.] 둘이 함께 했던 첫날 밤, 재인이 먼저 잠들었을 때 태양이 목에 걸어준 작은 거북이 모양의 옥을 만지작거리는 듯 가슴을 더듬으며 재인이 말했다. 만수무강을 상징하는 동물. 언젠가 태양이, 멀리 있는 엄마에게서 소포로 전해 받은 생일 선물이었다. 귀한 이의 영원한 행복을 비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는 목걸이라 했다. [오랫동안 내 텔레파시가 오지 않으면 그 반지로라도 날 떠올려줘.] 그렇게 말하고 멀어져가는 재인의 뒷모습에 너무 화가 나서 태양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었다. [전화 해! 여재인! 빌어먹을 텔레파시 말고 전화를 하라고!] 태양은 왜 재인이 이제 전화를 할 수 없는지 알지 못했다. 어째서 자꾸 텔레파시 얘기만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계속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리라는 건 분명히 알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그 종이는 절대적으로 불투명해서 그 위에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아무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풍부한 감성으로 얼마든지 그 종이를 뚫을 수 있는 거였다. 세상은 자신의 간절함으로 인해, 더 탐나는 대상이 되고 더 알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걸 이젠 알았다. 그걸 작은 별이 가르쳐주었다. 재인은 처음부터 태양을 의지하기 위해서 손을 잡아온 게 아니었다. 오직 태양의 손을 높이 들어주기 위해서 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믿고 진심으로 웃을 때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끊겨 버린 전화기를 내려다보면서, 태양은 굳게 닫아 버렸던 마음을 열어 새로운 결심을 받아들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래, 네가 이토록 단호하다면 그대로 따라주겠다! 유언을 받드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새로운 전쟁 선포나 같고, 오랫 동안 비뚫어져 있던 과거를 바로잡는 작업의 시작이다. 아마도 오래 걸릴 거야.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 포기할 생각이었다. 거대한 미래가 나를 삼키는 것보다도, 그로 인해 너를 잃을까 봐 더 두려웠었다. 하지만 이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꼭 돌아올게! 반드시 너를 다시 찾을 거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제로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우리에겐 더 많은 날들과 더 많은 추억이 있을 테니 괜찮을 거다. 대신에, 잊지만 말자. 재인아……! 우리 만나 처음 사랑했던 그 날만은…… 절대로 잊지 말자! <오래지 않아 추억이 바닥 나거든> 새로이 지어서라도 다시 들려주었으면 해. 언제라도 나를 지나친다면, 늦게라도 말해 주길 바라. 그 날, 나는 살아 걷고, 무언가를 보며, 끊임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 날, 너도 살아 웃고, 누군가를 바라보며, 끊임 없이 그와 사랑을 했었다고. 28.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병원으로 달려오면서 내내 승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표정은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답지 않게 침묵을 고수하며 굳게 닫힌 입술도. 경찰서를 나오면서 들은 건 재인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경찰서에서 들은 또 엄청난 태양의 가정사. 17년 동안 계속 된 한 가족에 대한 협박과 끊임 없는 감시.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치밀한 조사로 밝혀진, 숨막히는 복수에 대한 이야기. 치밀하게 수집된 증거로 나열된 그들의 죄목은 끝이 없었다. 회사 공금 횡령과 특허출원 기술에 대한 도둑행위로 시작해서, 뺑소니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미수, 납치와 협박, 고의적 음해, 불법도청과 감시카메라 설치, 스토킹과 폭력 그리고 오늘의 교통사고까지…….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죽어나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니. 태양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다. 그런데 또 그게 아니라 한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승진이 이해하기에는 그 모든 게 다 영화나 소설같기만 했다. 박경식이라는 남자가 찾아왔던 그 날 밤, 왜 경찰이 오지 않나 궁금했었다. 주택가에서 그 정도의 싸움이라면 신고가 들어갔을 거고, 누군가 나타났어야 했다. 그런데 또 알고 보니, 그들의 모습을 그 '누군가'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도 알고 있었단다. 생각해 보니 화가 나기 시작한다. 자신들과 재인은 화를 내야 마땅하다. 이유 없이, 잘못한 것도 없이 감시를 당했다는 건 미치게 짜증나는 일이다. 그런데…… 남태양은 그걸 평생 당하고 살았다니! 속이 상한다. 더 화가 난다. 세상이 뭐 이런가 싶다.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데 세상이 못미더워서 이제 어찌 살아갈까 싶다. 병원 정문 앞에 택시가 완전히 서기도 전에 성질 급한 희웅이 차문을 열였다. 끼이익 서는 바퀴의 마찰음이 주변의 사람들 시선을 끌었지만, 그들은 상관 없이 뛰어들어 간다. 응급실! 응급실에 있을 거다. 맞나? 저기 있나? 병원은 정신 없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교통사고가 꽤 크게 있었나 보다. 그 속에서 재인을 찾는 것이 여의치 않다. [빌어먹을! 여재인,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승진이 소리치며 발을 탁 구르는데,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이 친구들인가?] 돌아보자,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칼이 하얀 얼굴에 단정하게 내려앉은 남자가 보인다. 웃지도 않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도 까맣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왠지 닮은 느낌. [해인 선배…님?] 가끔 재인을 데리러 학교로 찾아오곤 했기 때문에 그들에겐 낯설지 않았다. 재훈의 물음에 해인은 고개를 끄덕해주고는 그들을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재인이 지금 수술 중이다.] [예에?] [많이 다쳤어요? 저기 멀쩡한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 재인이가!] 안타까운 듯 반문하는 그들의 표정을 지켜보던 해인이 고개를 젓는다. 무겁고 낮은 목소리. 철저히 가리고 있지만 내면에 가득찬 걱정과 슬픔. 네 사람은 모두 느끼고 있다. 재인이, 위독한 거구나! [외상은 크지 않아. 단지…….] 힘겹게 마른 침을 삼킨다. 해인의 그 모습에 걱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네 친구들. [지금 뇌수술 받고 있어. 갑자기 뇌압이 상승해서 의식을 잃었거든.] [세상에……!] 의사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위험한 상태의 환자를 왜 진작 입원시키지 않았냐고 한탄했다.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저들끼리 바삐 주고받는 말도 들었다. 수술실 앞은 재인의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붐빈다는 표현이 맞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형들과 부모님. 그들 중 한 사람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도 같이 기도해줄래?] [네. 그럼요!] 저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로도 부족할 만큼, 재인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얘기다. 다시 그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아찔한 자각이 네 사람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차례로 벽에 붙어 서서 그들은 나란히 눈을 감고, 익숙하진 않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아름답고, 따뜻한 친구. 하나같이 좋아했던 여재인을 위해서. 이륙 전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시트에 앉아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는 태양이다. 심장 한 쪽이 내려앉은 것 같이 아프다. 그래서 피도 반만 도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건 차라리 쉬웠다. 포기마저 안 되는데 뒤돌아서야 한다는 건 그게 '잠시'라 하더라도 못견디게 아팠다. [벨트, 매주시겠습니까?] 태양에게 다가온 스튜어디스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녀가 또 무언가를 내밀어준다. 받으면서 의이하게 쳐다보면, [아까 입구에서 어떤 승객분이 전해달라고 하시던데요.] 라고 설명한다. 태양은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뚜껑을 연다.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여진 윗부분을 조심스레 걷으면……! [말도 안 돼!] 눈 앞에 드러난 조그만 옥 목걸이를 보고 일시에 얼굴이 굳는다. 같이 들어있던 곱게 접힌 종이를 들어 떨리는 손으로 펼친다. <사랑하는 나의 태양, 지금부터 행운은 너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더 읽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이지…… 말이 안 돼, 여재인! 꼭 쥔 주먹 속에는, 자신이 그에게 주었던 거북이 목걸이가 들어있다. 갤리를 지나 닫히기 직전인 출구로 거의 다 왔을 때, 놀라서 달려온 승무원 두 명이 태양을 막아 섰다. [손님! 자리로 가 앉아주세요. 곧 이륙합니다.] [내릴 겁니다.] [안 돼요. 지금 이러시면 곤란해요.] [비켜요!] [손님! 진정하시고……!] 태양이 막무가내로 그들을 밀치자, 다른 승무원들도 달려와 그를 붙들었다. 그에게 목걸이 상자를 전해주었던 스튜어디스도 달려와 어쩔 줄 몰라하며 그를 말린다. 급작스런 몸싸움. 어느 새 소란스러워진 앞쪽으로 사람들의 눈길이 모아진다. 결국 태양만큼은 아니지만 건장한 스튜어드와 한 남자 승객이 그를 양쪽에서 붙잡는다. [놔요!] 아는 사람인지 태양은 남자 승객을 밀치며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이건 정말 아니다. 이건 아니야, 재인아! 왜 이래……. 대체 너 왜 끝까지……! [놔! 안 가겠다는 게 아니라고! 줘야 할 게 있어! 이것만 주고 올게.] 태양의 외침에 남자가 그의 손끝에 걸린 목걸이를 쳐다본다. 난감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피다 누군가의 눈짓을 받았는지 다시 태양을 본다. [내가 전해주지.] [아니. 내가 준다. 내가 확실하게 직접 걸어주고 올 거다.] [넌 이 비행기에서 못 내려. 내가 내려서 주겠다. 다른 방법은 없어.]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인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스튜어디스가 태양을 향해 '손님.' 하고 간절하게 불렀다. 결국 태양은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손에 목걸이를 넘겨주었다. 부르르 떠는 그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잠시 눈으로 주시한 남자가, '걱정 마. 꼭 전할 테니.' 라고 말한 뒤 돌아섰다. 객실장과 잠시 갤리 뒤편에서 대화를 하던 남자는 곧장 비행기에서 내렸다. 태양은 금직하게 내려앉은 심장의 반쪽이 딱딱하게 굳어 폐를 누르는 것 같은 느낌에 비틀거리며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창문으로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눈을 감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느껴지는 다른 승객들의 시선. 그 중에 엄마도 있을 것이다. 혼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움을 느끼는 태양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태양, 지금부터 행운은 너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이렇게 시작하는 재인의 편지를 다시 펼친다. 반듯하고 그러면서도 조금 둥근 느낌의 필체. 모나지 않은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태양의 가슴이 사무치는 그리움에 흐느끼며 떨린다. 눈이, 뺨이 그리움에 젖는다. <사랑하는 나의 태양, 지금부터 행운은 너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부디 화내지 말고 받아 줘. 그리고 읽어 줘.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있잖아. 나는 좀 많이 아팠어. 전학을 온 아이가 나를 본 첫인상이 아픈 모습인 건 싫잖아. 그래서 네 눈에 안 띄려고 내내 엎드려 있었는데. 넌 아마 몰랐을 거야. 신기하게도 넌 아무도 보질 않더라. 무진장 친해지기 힘든 남태양이었어. 우리 서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며칠이 흘렀는데, 어느 날 체육 시간인가 그랬어. 난 혼자 텅 빈 교실에 남아 창가 쪽에 붙어 있었지. 그 때 신기한 걸 보았어. 너의 머리 위에는 유독 더 많은 햇살이 앉았다 가는 거야. 운동장에서 함께 뛰는 다른 아이들 속에서 너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거든. 너무 눈이 부셔서 한참 동안 손으로 눈을 비벼댔던 것 같아. 아마도 그 날, 내가 너한테 반한 거겠지? 나는 말이야. 태양이 너한테 참 고마운 게 많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감동과 위로도 받았어. 너를 만나기 전의 나는, 하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 파란 게 너무 아파 보여서. 늘 뭔가 참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축축한 비와 차가운 눈만 뿌리는 그런 하늘인 줄만 알았거든. 그런데……. 너와 함께 바라보던 하늘엔 달도 있고, 천둥도 있고, 구름도 있고, 해도 있더라. 번개도 치고, 바람도 불고, 별똥별도 떨어지고, 심지어는 새도 날더라. 정말 그 모든 게 다 있었어. 하늘은 그렇다는 걸 나한테 보여 주었어. 태양이 네가. 이상하게 너와 함께 있으면 사는 게 즐거웠던 것 같아. 내가 항상 잘난 척 하면서 너한테 설명을 하려고 애쓰긴 했지만, 실은 나 참 바보라서 가끔 내 가족들을 위해 살아주는 거라고 여긴 적도 있었어. 엄마, 아빠 가슴에 묻히지 않는 자식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며 사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네가 알게 해주었어. 나는 있잖아, 태양. 네 옆에서는 정말 나를 위해 살아 있었어. 아파도 좋고, 쓰라려도 재미있고, 힘들어도 웃음이 났어.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산다는 게 얼마나 값진 선물인지 알게 됐어. 그래서 나는 너한테 참 고맙다. 너를 누렸던 내가 참 기특해. 태양아. 우리 다시 만날 거지? 너 꼭 다시 돌아올 거지? 먼 길 다녀와 나를 찾을 너한테 나는 줄 게 아무 것도 없더라. 그래서 속상했어. 나 정말 많이 속상해. 그러니까 화 내지 말고 받아 줘. 너 귀하게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날 위해서 주는 거다. 날 위해서 너 아프지 말라고, 꼭 돌아와 달라고 너 다 주는 거야. 나도 밥 많이 먹을게. 네 말처럼 꼭꼭 씹어 먹을게. 그리고 밥 먹을 때마다 네 생각 할게. 언젠가 우리 또 만나면 그 땐 아픈 사랑은 하지 말자. 헤어지는 사랑도 하지 말고, 휘둘리는 사랑도 하지 말자.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면, 다시 만나더라도 사랑만은 하지 말자. 멋진 나의 태양! 우리 처음 만난 그 시절, 네 머리 위에 쏟아지던 오후의 햇살만큼 사랑해. 하지만 이 사랑, 지금은 단단한 땅 속에 묻어 놓을게. 튼튼한 뿌리를 내려서 어떤 일이 닥쳐도 뽑히지 않도록, 따뜻한 흙과 함께 편안한 잠 속에 우선은 재워 놓을게. 돌아와서 네가 꺼내줄 때까지.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너, 너는 나… 절대 아프게 기억하지 않기다. 자, 약속! - 1부 끝 - [퍼옴장편/은세] 내 집에 사는 남자 2부 上 망고탱고 수정/삭제 + 스크랩하기 (HIT: 3232/VOTE: 88) [허락메일] -------------------------------------------------------------------------------- '내 집에 사는 남자' 2부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1부는 ayuda님께서 퍼오셨더군요. 혹시나 해서 자꾸 독촉을 드렸었는데, 은세님께서 메일 확인하시고 곧장 보내주셨습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2부 목차> 01. 나의 주인을 찾습니다 02. 길을 잃고, 그 덕에 기연을 만나다 03. 술에 취하면 세상의 중심이 바뀐다 04. 널 보고 돌아오는 길엔 05. 남은 게 별로 없다 06. 그대, 쉼 없이 나를 구원해주시오 07. 해 보면 다 안다 08. 사랑아, 너에게 묻는다 09. 추억도 언제나 목마르다 10. 의미의 조합은 때로 기가 막힌다 11. 그래서 지워 버렸나? 12. 마음이 고장 나면 <나의 주인을 찾습니다>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나질 않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벽에 '쿵쿵' 부딪쳐도 보았습니다. 그대를 앞에 두고 힘겹게 기억을 더듬고서도 몰랐습니다. 내 모든 추억이 그대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1. '여재인.' 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나를 이렇게 불렀다. 말투도 딱딱하고. 어감도 차갑기 이를 데 없다. 가끔 날 부르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무언가 식지 않은 듯한 묘한 여운이다. 마치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있는 말랑하고 축축한 속을 연상시키는. 정말 그건 뭘까? '여재인.' 이 세 글자 속에 담긴 그의 억눌린 메시지. 나는 배우고 있다. 스물일곱이나 먹고서도 배우는 걸 멈추지 못한다. 딱 그 나이대마다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다 따로 있나 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영원히 사랑하게 만들 순 없다는 것.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니까. 더불어 나는 또 하나 배웠다. 사랑을 넘치게 가슴 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 모르는 사람도 있음을. 남태양이 그렇다. 밤새 들러주었던 그의 간절한 첫사랑 이야기에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차갑고 단정하기만 한 표정 어디에 그런 열정과 깊은 상처가 숨어 있었을까? 또 하나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은,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멈춰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 샤를 드 푸코가 한 말이다. 살아간다는 건 곧 배우는 것이라고.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아프다는 건, 그리고 슬픔을 느낀다는 건,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증거라고 야무지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많이 배운 사람이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듯이, 많이 아팠으면 더 강하게 세상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거라고. 태양이 얼마 전 내게, '지금은 강해지고 있는 거다.' 라고 말한 것처럼. 하지만…… 현재로선 잘 모르겠다. 내가 강한 존재인지, 약한 존재인지. 다만, 세상이 있다면 나도 있다. 세상이 달린다면, 나도 달릴 것이다. "아는 사람?" 곁에 다가온 가을 형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는 가을 형이 얼마 전에 오픈한 카페의 바에 홀로 앉아 있다. 그리고 중요한 전화인지 밖에서 받겠다고 나가는 태양의 뒷모습을 쳐다본다. "저 사람이 날 알아." 내 설명에 가을 형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들어올린다. 그는 해인이 형의 오랜 친구다. 형과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두 같이 나왔다. 이젠 어엿한 사장님인 가을 형은 대학 때부터 자기 아버지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벌써 이렇게 세련되고 멋진 곳의 사장님이라니. 부럽다. "너는 모르는 사람이고?" "모르는 건 아니고. 단지……." 내가 말을 길게 늘이자, 형은 신중해진 표정으로 기다려준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잊혀진 사람이라……." 나의 대답에 가을이 형이 한숨처럼 저 말을 뱉으면서 유리문 너머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어…, 글쎄." 미처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를 잊었을 뿐이지만, 덕분에 그는 잊혀져 버린 사람이 되었다는 것. 섭섭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새삼 가슴 한구석이 휑해지는 것이 기분이 영 안 좋다. 어쩌면 내 상상보다 더 기분 나쁜 경험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지고 잊혀진다는 거. "잊기 힘든 타입 같은데." 멀어지는 가을 형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가만히 물을 마셨다. 내가 알 수 없는 점도 바로 그거다. 태양은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기 힘든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 독특한 저음의 목소리나 딱딱하긴 하지만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말투도 그렇고, 웃지 않아도 기분이 좋을 때 풍기는 부드러움도 모두 뇌리에 생생한 자국을 남긴다. 바에 등을 기대고 앉자, 훤한 유리창 너머로 진지하게 통화하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커다란 키에 보기 좋은 넓이의 어깨. 그리고 긴 다리를 감싸 흐르는 정장 바지. 반듯한 자태. 멋지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몇 번은 그에게 닿았다 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딸랑. 그 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까만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 까만 머리에 까만 스웨터까지 걸친 그는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입구 쪽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테이블 위에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읽기 시작한다. 의아한 눈으로 계속 쳐다보고 있자, 흘끗 이쪽을 살피던 남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까맣게 윤이 나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날 쏘아본다. 깜짝 놀라 얼결에 눈인사를 하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휴우. 저 자식." 그때 나직하게 내뱉는 가을이 형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사람인가 보다. 바쁘게 무언가를 만드는데, 에스프레소인 것 같다. 굉장히 조그만 잔에 사약처럼 까만 커피가 아슬아슬하게 담긴다. 딸랑. 다시 문이 열리고 태양이 들어왔다.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걸음이 무척 남자답고 당당하다. "통화가 좀 길어졌어. 난 이만 가봐야겠는데." 내 곁에 서자마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아직 아무 것도 못 먹었잖아." "시간이 촉박해." "아, 잠깐만." 나는 손님에게 가 있는 가을 형을 향해 외쳤다. "형! 얼른 부탁해. 샌드위치!" "됐어. 가서 사먹을 거다." "아냐, 안 돼. 저 형이 만든 클럽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있는데." 내가 고집을 부리자, 할 수 없다는 듯 태양이 옆 자리에 앉았다. 급히 바 안쪽으로 돌아온 가을 형이 바쁘게 손을 놀리며 샌드위치를 만든다. 그 능숙한 손놀림을 감탄하며 지켜보는데, 태양이 곁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여재인." "응?" "왜 그래?" "뭐가?" 시치미 떼고 되물었다. 태양의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고 있다. 그래도 순간 뺨으로 열기가 몰리는 것 같아서 그를 마주볼 수가 없다. "내 아침을 갑자기 챙기는 이유. 납득시켜 봐." "수백 명 승객의 생명을 책임지고 비행하는 사람이 밥을 굶고 출발한다는 게 더 말이 안 되잖아." "……." "신세 지는 입장에서 너 출근하는 날 아침 정도는 차려 줘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오늘 늦잠 잤잖아. 때마침 가을이 형이 전화해서 우릴 불렀고. 형이 샌드위치 만들어준다 했고. 그럼 먹고 가는 게 당연하지. 안 그래?" "……." "이해 안 돼? 그럼 먹지 마. 너 그냥 가. 그만 따지고 가." 결국 귀까지 열이 번진다. 다행히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 귀를 조금이나마 덮고 있다. 왜 이렇게 얼굴에서 열이 날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 날 밤, 그의 침대 위에 같이 누워서 아낌없이 그가 내게 나누어준 따뜻한 체온 때문일 것이다. 정말이지 달콤하게 잘 잤다고 어디다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악몽도 꾸지 않고, 중간에 깨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럴 수 없을 만큼 편안했고, 더할 수 없을 만큼 안전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온통 찬양 일색이던 남태양의 첫사랑. 전학가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픈 이별의 추억. 어찌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사연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 자신은 왜 그렇게도 같이 속상해하고, 그가 말을 멈출 때마다 덩달아 숨을 멈추었을까? 그의 처음을 가졌던 작은 별이란 녀석이 왠지 싫어지기까지 했다. "혹시……." "응?" "여재인, 나 동정하냐?" "설마!" 경악한 나의 대답과 동시에, 가을이 형이 샌드위치 접시를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태양도 나도 그걸 쳐다보거나 고맙다 말하지 못하고 단단히 굳어 있다. 날 쏘아보는 그의 눈빛이 꼬챙이처럼 내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고정시키고 있는 기분이다. "너의 첫사랑 이야기는 내가 이러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 진짜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도둑이 제 발 저렸다. 나무라는 듯한 시선이 견딜 수 없어서 무슨 말이든 해야 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공짜니까 꼭 먹고 가라, 단지 그 뜻이라고?" 말 한 번 희한하게 한다. 내 말을 어떻게 저렇게 요악하냐? 태양이 가로채듯 한 말을 들었는지, 가을이 형이 저쪽에서 풋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몰라. 마음대로 해. "안 먹으려면 말지, 거 되게 유난스럽게 구네. 참 별꼴이다." "별 우습게 보지 마라." "하!" 태양의 느릿한 대꾸에 나는 기가 찬 듯 비웃어준다. 그가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놀랍다기보다 그냥 뭐랄까, 가슴 한 구석이 꼬이는 느낌이다.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비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별하고 태양. 너무 안 어울려. 밤과 낮처럼." 클럽 샌드위치를 신중하게 베어 무는 그를 몰래 흘겨본다. 내 말을 들었을 텐데도 싹 무시하고는, 가을이 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맛있다는 표시인 듯. 가을 형도 태양을 향해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싱가폴 갔다가 모레 돌아올 거야. 그 사이에 아무것도 깨지 말길 바란다." 손을 털고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태양이 일어나며 내게 한 말이다. 입을 딱 벌리고 마는 내 표정을 흘끗 바라보더니 미련 없이 돌아선다. 척척 카페를 걸어나가는 뒷모습이 다가올 때처럼 빠르게 멀어졌다. 알고 있었구나. 강호형이 집에 왔던 날, 아파서 물 한 모금 마시려다 깨버린 크리스탈 잔이 생각난다. 그 동안 다 알면서 모른 척 했던 거구나. 제대로 펀치를 뻗을 타이밍을 노리면서. 약았어, 남태양. "여기서는 식사 안 된다면서?" 뒤쪽에서 들려온 불평의 음성에 나도 모르게 돌아본다. 아까의 그 까만 뿔테 남자가 책을 탁 덮고서 가을이 형에게 따지고 있다. 내가 형을 곤란하게 만든 건가? "안 돼." "그럼 저 자식들은 뭐야?" "쟤들 앞에 놓인 건 샌드위치야. 넌 그걸로 식사 안 하잖아." "……." "샌드위치는 돼. 하지만 볶음밥이나 덮밥은 안 돼. 알겠니?" 단호한 가을 형의 말에 남자는 아무 말도 없다. 그저 화난 시선으로, 자신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형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 획 돌아서서 내 쪽으로 걸어온 가을이 형에게 내가 사과했다. "형, 혹시 우리 때문에 곤란한 거야?" "아니. 쟨 그냥 시비 거는 게 낙이야. 네가 신경 쓸 사람은 못 돼."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굉장히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눈길. 숨이 턱 막힐 정도다. "그런데 오늘 나 왜 불렀어?" 내가 묻자, 막 설거지를 시작하던 가을이 형이 심각하게 날 쳐다본다. 말이 대신 보내오는 그 눈빛을 나는 찬찬히 읽어 내린다. 역시, 그랬구나. "해인이 형이 부탁했어?" "나 원망하지 마라, 재인. 나 해인이 못 이겨. 알지?" "알지."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형이 마찬가지로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활짝 웃으며 문득 형에게 부탁을 했다. "형, 나 설거지하는 법 가르쳐 줘." 내 말에 가을 형이 놀랍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올린다. 아직 설거지도 안 해본 외계인이 생존해 있다니. 뭐 그런 눈빛이다. 사실 대학 시절에 가을 형을 도와 서빙은 몇 번 해 봤지만, 설거지는 그릇 깰까 봐 아무도 시켜주지 않았으므로 한 번도 못해 봤었다. 생긋. 내가 최대한 애교스럽게 웃어보이자, 형은 허 웃으며 들어오라고 고갯짓을 해주었다. 넓은 개수대에 물을 가득 받고, 고무장갑을 꼈다. 가을 형이 알려준 대로 접시와 찻잔을 씻는데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가려웠다. 고개를 흔들자, 형이 다가와 내 앞머리를 잡고 옆으로 올리더니 뭔가로 고정시킨다. 시원해진 이마. 가렵지 않아서 좋긴 한데, 이거 설마 머리핀은 아니겠지?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가을 형이 내 시선을 피한다. 입가에 묻은 웃음기가 내 눈에도 다 보인다는 걸 모르는 걸까? 나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설거지에 집중한다. 어차피 알아 볼 사람도 없는데 상관없다 싶다. "형." 개수대 마개를 뽑아 물을 내리며 내가 가을 형을 불렀다. 햇살이 노곤하게 내리쬐는 초가을 오전, 이 곳은 아직 한가했다. 손님이라곤 저쪽 창가에 한 테이블. 그리고 까만 뿔테 남자 한 테이블. 이게 다다. "한 남자가 있는데……." 운을 조심스레 떼자, 가을 형이 곁에 다가와 바에 몸을 기댄다. 가을 형은 눈치가 참 빠르다. 무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 그 때가 언제든 상관없이 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기꺼이 다 담아줄 만큼 속이 넓고 깊은 사람. "첫사랑을 굉장히 심하게 앓았대." "그건 곧 아주 힘들게 이별했다는 말이구나." 역시 가을이 형이다. 문장해석 능력도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다. "음. 고등학교 때 만났다 헤어진 첫사랑인데, 아직도 기다리나 봐." 나는 일부러 찬물을 틀어 잔을 헹군다. 손동작은 느려지고, 찻잔에 닿은 물은 튀어 옷이 조금씩 젖고 있다. "정말 많이 사랑해서,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작정인가 봐. 한국 사람인데 국적은 미국이야. 미국에서 자라고 학교도 거기서 나왔대. 그 남자가 지금 다시 한국에 온 건 다 첫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는데……. 벌써 8년이나 흘렀잖아. 그 첫사랑이 뭐하고 있을 줄 알고. 그 사람 참 무모하지?" "이미 세상에서 멸종한 줄만 알았던 로맨티스트구만." "그런가?" "그럼 아니야?" "모르겠어." 나는 결국 잔을 놓아 버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 서 있자, 가을 형이 팔을 뻗어 물을 잠근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내 옷에 맺힌 물방울을 가만 닦아준다. "모르겠어, 형. 만약에 그가 첫사랑을 찾지 못하면? 그럼 어떻게 되지? 또 찾았는데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그건 비극 아닌가?" "왜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음, 왜냐하면……."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안 될 거라는 생각부터 한다면 우린 아무 것도 시도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상처 받을 텐데." "누가? 그가 첫사랑을 찾거나 사랑에 빠질지 말지로 누가 상처를 입는데?" "……." "혹시 네가? 재인아. 너는 그 남자가 첫사랑을 찾지 않길 바라는 거야?" 가을 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급히 들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런 뜻으로 고개를 젓는다. 나는 다만 지금 이대로도 괜찮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응. 맞아. 그 뜻이었어. 굳이 첫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바빠 보이고, 나도 첫사랑을 되살리려 애쓰지 않음으로써 과거를 잊고 새 출발 하려 한다. 그는 외로워 보이지도 않고, 사랑에 목말라 보이지도 않는다. 솔직히 그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이 상태 이대로 잠시나마 살아줬으면 좋겠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천천히 숨을 가누며 일단 살았으면 한다. 요즘처럼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의 첫사랑이 떡 하고 나타난다면, 자신은 당장 거처부터 어찌 해야 할지 모를 거다. 그럼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결국은…… 나를 위해서 그가 시도조차 하지 말길 바라는 건가? "변화가 싫어. 그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변화들." "……." "나 많이 이기적이지? 알아. 형 분명히 실망했을 거야." "사람은 다 이기적이야. 이기적이지 않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냐." 형은 내 머리에 잠시 손을 얹었다가 등을 가만히 토닥여준다. 그 남자가 누구냐고 형은 묻지 않는다. 이래서 나는 가을 형이 좋다. 아마도 그 남자가 누군지 형은 알아챘을 거다. 그리고 형이 알지도 모른다는 걸 나 역시 짐작하지만 괜찮다. 가을 형이 어딜 가서 이런 얘길 가십거리로 삼지는 않을 테니까. 해인이 형에게조차도 입을 열지 않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으니까. 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고, 브라운 셔츠와 스웨터를 겹쳐 입은 해인 형이 들어왔다. 가을 느낌이 물씬 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와 마주친 표정만은 찬 겨울이다. 해인이 형이 몰고 온 바람이 얼어붙을 것처럼 싸하게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털썩. 내 바로 앞자리에 앉는 형을 가만히 바라본다. 형도 내 얼굴을 마주 본다. 가을 형이 내 머리에서 아까 꽂은 핀을 빼고 슬쩍 밀어내자, 나는 카운터를 돌아 형의 옆자리에 거리를 두고 앉는다. "아침은?" 해인 형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눈은 내가 아닌 가을 형을 향해 있다. 불러놓고 무시하기 작전인가? 나는 원망스런 눈으로 형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그렇게 집을 뛰쳐나오고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거칠거칠하다.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가을 형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후 내쉬고 대답했다. "좀전에 샌드위치 먹였어. 넌?" "이거 마시지 뭐." 해인이 형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태양이 마시다 간 찻잔에 남은 홍차 티팟을 기울였다. 내가 마시던 건 줄 알았나 보다. 식었을 텐데. 그렇게 내가 속으로 막 중얼거릴 때였다. 새 잔을 부랴부랴 해인이 형 앞에 놓아주며 가을 형이 좀 기다리라 손짓한다. 물을 끓이고 얼그레이를 새 걸름망에 담으면서 가을 형이 날 향해 보일듯 말듯 웃어주었다. 까다로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놀라우리만치 털털한 성격의 해인이 형은 가끔 저렇게 가을 형의 손길을 더욱 분주하게 만들었다. "오늘 무조건 집에 들어가 부모님께 비는 거다." "……!" 뜨겁게 우려낸 차에 식은 차를 섞어 한 모금 마신 해인이 형. 그는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려 할 때마다 꼭 저렇게 본론부터 꺼내곤 한다. "아무리 가족이 밉고 큰 잘못을 했어도, 그렇게 집 나가는 거 아니야." "교과서 읽니?" 나는 차갑게 대꾸한다. 스물일곱이나 먹었어도 형의 눈에 나는 아직 집안의 막내다. 함부로 굴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집안의 최저계급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가족들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과서가 왜 교과서인데? 그대로만 따르면 문제가 없기 때문이야." "문제가 없다고?" "말꼬리 잡지 마. 너답지 않게……." "형!" 조용한 카페 안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잔뜩 목소리를 죽였다. 해인이 형도 애써 목청 낮춰 말을 하다가, 어느 새 주먹을 꼭 쥔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내가 잘못한 거 인정해. 하지만 문제는 그 잘못을 나만 인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아." "……." "나답다거나 나답지 않다는 말도 하지 말아줘. 불편해. 알잖아. 그 때 수술 이후로 나 지금까지, 변했다는 말 무수히 들어왔어. 이전의 내가 어땠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나 그 말 듣는 거, 정말 싫거든?"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뇌 중앙부에 있던 종양이 경계가 모호해서 많이 잘라냈다며? 그래서 기억도 잃고, 성격도 변했어. 나는 잘 모르지만 다들 그러잖아. 예전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힘들겠지만, 나도 쉬운 거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단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는 거, 그거 하나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가족들이 나의 불행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지금은 그냥 내버려뒀으면 해." "재인아. 지금은 너만 생각할 때가 아니야." "내가 아는 건, 지금은 나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거야!" 나는 바를 작게 내리치며 외쳤다. 천천히 주먹을 풀고 높은 스툴에서 일어섰다. 해인이 형이 망연하게 그런 내 동작을 지켜보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형이 원하는 것처럼 당장 집으로 찾아가 무릎 꿇고 사과할 마음 따윈 없으니까. "오늘처럼 가을이 형 통해서 나 불러내는 짓 하지 마. 또 응하지도 않을 테지만, 그 덕에 가을이 형까지 잃고 싶진 않아. 그리고…… 형은 어차피 나 같은 놈 걱정 돼서 만나자 할 사람도 아니잖아?" 마지막으로 뱉은 내 차가운 말에 해인이 형의 어깨가 움칠한다. 유감스럽게도 가을 형도 들었는지, 곧장 달려와 내 팔을 붙잡았다. "왜 그렇게 모질게 말을 해? 해인이가 네 걱정 얼마나 많이 하는데." "걱정?" "그래! 너 집 나가 있는 동안 저 자식 내내 네 걱정했었어. 너희 집 앞에도 자주 가고, 극장에도 들러서 너 잘 있는지……." "내가 몰랐을까 봐?"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가을 형의 말을 끊었다. 해인이 형이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얗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알고 있었니?" 그 질문에, 가슴 한 구석 오래 묵은 상처 하나가 또 터지고 만다. 잊어버리자, 묻어두자, 다짐하며 구겨넣었던 감정이 흉하게 펼쳐졌다. "모르는 건 형이지. 항상 모르는 건 형이야! 형은 형 그림자가 얼마나 긴지 알아? 그래서 매번 내 눈에 얼마나 잘 띄었는지 알아? 정작 아무 것도 몰랐던 건 내가 아니라 형이겠지!" "……!" "그렇게 무수히 찾아오면서, 형은 한 번도 아는 척을 안 하더라? 그 많은 날들 중에 단 한 번도 나를 불러세운 적이 없었어. 알고 있니? 제일 좋아했던 형이 그런 식으로 날 훔쳐보고 가 버린다는 게 어떤 느낌이겠어? 오늘일까, 오늘은 형이 날 불러서 말을 걸어줄까, 조마조마하면서 걸었는데! 그렇게 바보처럼 혹시나 기대하면서 평소보다 더 천천히 걷기도 했는데! 형은 한 번도 날 부르지 않았어. 그럴 때마다 내 등이 얼마나 따가웠는지 알아? '부모, 형제 버리고 나가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구나. 나쁜 새끼!' 이러고 날 욕하는 것만 같아서 얼마나 내가 아팠었는지 형이 아냐고!" 가을 형에게 붙잡힌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다. 가만히 어깨를 둘러주는 가을 형 팔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떨림은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수 없이 기도했는지 형은 모를 거야. 오늘은 제발 집 앞 가로등 밑에 아무도 없기를! 극장 근처 아이스크림 간판 뒤에 형이 서 있지 않기를! 제발 저 빌어먹을 여해인의 그림자가 오늘은 내 눈에 띄지 않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는지 형이 알기나 해!" "그거 아니잖아! 너 정말……!" "이젠 싫다, 형! 더는 정말 싫어! 나도 견디기 힘들어." 상처 입은 해인 형의 눈동자를 피해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고 나는 이미 형과 똑같이 하얗게 질렸을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울음을 잔뜩 삼킨 목으로 축축하게 말했다. "나 좀 봐주라. 응? 내가 내 모습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둬 줘. 지금 내가 내 가족들에게 바라는 건 그거 하나 뿐이야. 제발!" <길을 잃고, 그 덕에 기연을 만나다> 혹시 난 길을 잃었었나? 숨이 차서 미칠 것 같더니만. 숨 따위야 나중에 몰아서 한꺼번에 쉬어도 되는 거면 얼마나 좋아. 오늘은 다시 반쯤 시작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역시 반이 되기엔 어수선한 날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밟을 거다. 바로 이 '조금씩'에 밑줄을 그으면서. 2. 그건 다 내가 못나서 스스로 받은 상처들이었다. 형이 준 게 아니라 형을 핑계로 내가 나에게 준 상처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 상처를 해인이 형에게 되돌려주고 말았다. 그걸 또 너무나 잘 알아서, 그곳을 뛰어나오면서 내내 가슴으로 울었다. 하지만 밖으로 눈물을 쏟아내진 않았다. 이젠 그렇게 쉽게 울지 않을 거다. 자고로 길 잃은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라 했다. 하루 빨리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마냥 서두르는 짓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조급함에 재촉해댄 걸음이 서툴게 꼬이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준비를 오늘부터 할 생각이다. 말하자면 일상의 재정비랄까, 인생의 뉴 포맷이랄까. 우선 지효가 조심스레 알려준 극장에 면접부터 보러 갔다. 예전에 내가 몸담았던 곳보다 훨씬 작고 이름도 없는 곳이었지만, 어차피 이제 시작이니까 무조건 크고 멋질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직원 수가 많지 않고, 내 경력에 비해 열악한 조건이었기에 면접을 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취직이 결정되었다. 유난히 섬세한 가을햇살이 땅에 닿는 오후였다. 나는 새 직장이 된 극장을 나오면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공연을 잡지 못해 듬성듬성 스케줄이 비어있는 극장의 이번 달 프로그램을 가볍게 손에 쥐고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어대면서 곧 친숙해질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극단을 찾아다니면서 영업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작고 낡은 곳이긴 하지만, 나의 첫 발을 무리 없이 통과시켜준 곳이기에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지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이 꺼져 있다. 황 감독과의 작업이 잘 안 풀리는 건가 걱정이 된다. 어제 통화에서도 지효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나는 이해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황 감독과 일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들 것이다. 소설가인 지효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시도일 테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가로수 밑에 우뚝 섰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와 내 몸에 닿는 느낌이 따뜻했다. 그 상태로 가만히 눈을 감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바닥을 짚어본다. 본의 아니게 들뜬 감정 덕에 그 사이 공간이 생겨 버렸다. 어떤 것으로도 당장 채워지지 않는. 그러니까 이건 음……, 외로움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길 위에 선 채, 내 작지만 꿋꿋한 시작에 대해 이야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실감하고 있었다. 현관을 열고 가만히 서 있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집안을 복도에서 지켜본다. 아무도 없고, 아무런 온기도 없는 그냥 텅 빈 집. 한 발을 들여놓으면 자동으로 켜지는 센서 등이 있을 뿐이다. 후우. 저절로 뱉어지는 무거운 한숨. 조용한 집안에서 내가 내는 소음을 들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읽다 만 책을 펼쳐든다. 하지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제멋대로 흩어져 버린다. 결국 기우뚱 몸에 힘을 빼고 푹신한 소파에 길게 누웠다. 바로 그 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벌떡 일어나 덮치듯 집 전화 수화기를 들고 외쳤다. 갑자기 날아온 맹렬한 반응에 놀랐는지 상대방은 아무런 말이 없다. "여재인 집입니다. 아, 그리고 남태양 집이기도 합니다. 아니 실은, 남태양 집인데 여재인도 살고 있고 그러니까 두 사람이 같이……." "뭐 하고 있었어?" 장황해지려는 내 말을 툭 끊으며 저쪽에서 물어온다. 남태양? 나는 의심스런 기분으로 귀에서 수화기를 떼고 잠시 쳐다본다. 웬일일까? 내 옛날 번호로 걸려온 전화라 당연히 내 전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내 핸드폰 번호도 알면서 자기 집에 전화를 하다니. 아무튼 반갑다, 야. "아, 책 읽고 있었는데. 넌?" "전화하고 있지." "으응. 왜 전화했어?" "……시간이 좀 남기도 하고, 사고는 안 쳤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 안부가 아니라, 지 살림살이가 무사한지 궁금하다는 거야? 나는 섭섭한 심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에겐 내 숨소리가 꽤 거칠게 전달될 것이다. "정말 별 일 없어?" "있어!" 그가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묻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냥 해 본 질문에 내가 너무 빠릿하게 반응한 건 아닌가 좀 걸리긴 하지만. "나 취직했어." "어디에?" "그냥…… 작은 극장에." "마음에 들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다. 새 직장이 내 마음에 드냐고? 글쎄. 정작 그것에 대해서는 나조차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직 잘 모르겠어. 다녀 보면서 정을 붙이려고." "흠." "그다지 멀지도 않고, 직원 수도 적어서 가족적이야." 이 말은 지어낸 거다. 직원수가 적긴 하지만 그 곳 분위기는 아직 모르니까. 태양의 반응을 기다리며 나는 두 손으로 수화기를 꼭 붙들었다. "언제부터 출근이야?" "다음 주." "그럼 축하주 같이 할 시간은 있겠군." "응?" 이것 역시 예상 못한 반응이다. 뭉쳐 있던 근육이 어루만져진 것처럼 시원해졌다. 나는 괜히 눈 밑이 시큰거려서, '응! 맞아!' 라고 외쳤다. 그러자 또 낮게 웃는 태양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와?" "거기 시간으로 내일 저녁쯤 도착할 거야." "그럼 내가 술이랑 안주 미리 사놓을까?" 갑자기 수화기 저쪽에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좀 오바했나? 하긴 이러는 내가 좀 웃기긴 할 것 같다. 그래도 뭐. "……그러든지." 다시 돌아온 태양이 조금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이만 끊어야겠는데." "응. 응. 내일 어디 새지 말고 빨리 와야 해, 태양." "알았어." "좋은 꿈 꿔. 비행기 운전 조심하고." "여재인" 문득 숨을 멈추는 듯 하던 태양이 내 이름을 부른다. 무언가 다른 느낌.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것 같다. 살갑게 구는 내 태도가 어색한 걸까? 혹 거슬렸을까? 나는 잔뜩 예민해진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응?" "아니다. 끊자." 낮게 소리 죽인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막 입을 열고 마지막 인사를 하려던 찰나, "아, 그리고 술은 내가 준비해갈게." 그 말을 끝으로 태양이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나는 끊긴 수화기를 든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나는 고마웠나 보다. 전화를 걸어준 그가. 혼자 있을 내게 말을 시켜준 태양이. 살다 보면 전혀 뜻밖의 상황이나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곤 한다. 조금 어렵고, 그러나 가장 편하고, 그러면서도 종종 눈치가 보이던 그였는데. 내 동거인은 가끔 이렇게 사소한 행위들로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누군가 내게 아직도 외롭냐고 지금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처음 동거를 시작하던 날 내가 태양에게 물었었다. '지금 내겐 애인 연기를 해줄 사람이 필요해. 해줄 거야, 말 거야?' 라고. 그때 그는 아주 냉철한 눈빛으로 내게 이렇게 되물었었다. '그보다는, 부모님이 지금의 너에게 바라는 게 뭔지 그것부터 아는 게 먼저 아닌가?' 맞다. 그가 백퍼센트 옳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내가 증명하고 싶었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가장 먼저야.'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 날 부모님은 내가 누군가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기대하며 찾아오신 게 아니었다. 오히려 불행하고 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당신들이 나타나면 그 품에 안기길 원했던 거였다. 날 상처 입히는 줄도 모르고 그게 최선이라 믿고, 날 위해서 나를 변화시키려고만 하셨다. 그건 결국 아직도 그 분들이 나를 잘 모르고 계신다는 말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서로를 아는 것 자체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제대로 이해하실 수 있도록 나를 허심탄회하게 펼쳐 보여드린 적이 없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움츠리고 숨겼던 부분들. 그것이 오해를 낳고, 두려움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부모님도 나도 각자 서로 고집만 부리고 있다. 두 분은 보고 싶은 것만 보여달라 하시고, 나는 보여드리고 싶은 것만 보시라 하면서. 어쩌면 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이 옳은 건 아니라고. 가장 좋은 가족은 바로, 제 앞가림 잘 하며 스스로 잘 살아주는 사람이다. 가족을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람보다, 제 욕심 차려가며 앞길을 잘 닦아서 이 세상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가족이 힘들 때, 등 두드려주는 손길보다 멀리 있더라도 가슴 깊은 곳에서 마지막 순간 붙들 수 있는 희망이 되어주는 사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당장은 좀 소원하더라도, 결국엔 가족의 굴레를 완전히 벗지 못할, 이 세상 속에서 당당히 성공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족을 견인해나갈 수 있을 만큼의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꿋꿋한 의지와 성실함으로 뿌듯한 자부심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꿈은 여전히 살아있다. 짓밟히고 뭉개지고 진흙탕 세례를 받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다시 출발선에 와 있다 해도, 다 똑같은 시작이 아니다. 이미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나는 백전노장 선수나 다름 없는 기분이다. 연륜과 경험, 그걸 가졌으므로 내겐 그 만큼의 여유가 더 있는 거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청소를 했다. 상우와 살 때는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음식만들기나 설거지는 잘 못하지만, 청소는 자신 있다. 먼지털이나 진공청소기 정도는 사용할 줄 아니까. 온 집안의 미세한 먼지를 다 빨아들일듯이 맹렬하게 청소하다, 조금 뿌옇게 보이는 유리창도 뽀득뽀득 닦았다. 선반 구석구석, 가전제품 하나하나 마른 수건으로 정성껏 문질렀다. 온 집안에 광채가 나자 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걸레와 수건을 들고 세탁실로 향했다. 그리고 우연히 들여다본 건조기에서 빨래를 발견하고 꺼내었다. 좀 어설프긴 하지만 개어놓은 셔츠 두 벌과 바지를 태양의 방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라 맨 윗 칸부터 옷장 서랍을 차례로 열어 보았다. 속옷과 면티가 차곡차곡 들어차 있기에 그 곳을 닫고 다시 두 번째 칸을 연다. 니트와 셔츠가 얌전히 들어있는 걸 보고, 손에 든 셔츠를 그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서랍을 열고 바지를 넣은 다음 닫았다. 방안에는 희미하게 태양의 체취가 남아 있다. 진하진 않지만 신경을 자극하는 그 향에 금세 물들어 버릴 것 같다. 아릇하게 심장 한 구석을 쿡쿡 찌르는 듯한 감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통증도 아니고, 얼얼함도 아니고, 간지러움은 더더욱 아니다. 그 기분은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묘한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마치 태양을 감지하고 그에게 반응하는 세포의 숙주가 되는 느낌. 주인도 없는 조용한 방에 오래 머물기도 그래서, 나는 재빨리 거실로 나왔다. 내가 2년 동안 살았던 방이지만, 전혀 다른 감각의 낯설음이 분명 존재했다. 마트에 가서 치즈와 연어 그리고 케이퍼와 올리브를 샀다. 초밥과 롤을 좀 사고, 망설이다가 1회용 초도 몇 개 골랐다. 취직도 하고 통장도 되찾았으니 이제 안심하고 카드를 쓸 수 있게 됐다. 잠시 상우를 떠올렸으나, 우울함을 떨치듯 나는 이내 고개를 저어 버렸다. 오늘 태양이 돌아오면 함께 축하를 할 거다. 내 새로운 시작을 기리는 날이다. 집에 돌아와 장 본 것들을 대충 정리한 다음 목욕도구를 챙겨 집 앞 사우나탕에 갔다. 땀을 흘리고 온 몸 구석구석 목욕을 한 다음 심신이 개운해져 나와서 생수를 마셨다. 볼이 발갛게 익은 채 젖은 머리를 빗는데, 거울 속에서 나와 마주본 녀석이 씩 웃는다. 기분이 좋아, 여재인? 내가 속으로 묻자, 그는 얼굴을 끄덕인다. 피부빛은 하얗지만, 밤새 드라큐라한테 피빨린 사람 같진 않다. 스토커가 붙을 정도는 아닐지라도, 의기소침할 정도의 이목구비도 아니다. 좋아. 그 표정 마음에 들어. 오늘따라 왠지 더 잘 생겨 보이잖아. 용기를 주듯 그렇게 되내며 얼굴에 무향 스킨로션을 정성껏 두드려 발랐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고 한다. 어딘가 하나쯤은 어긋나 있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살아갈 맛이 나고, 그래서 생에 더 연연하게 되는 거란다. 아쉬움과 미련이 없다면, 수백 번 읽은 동화처럼 삶도 시시해지는 법이다. "완벽해." 하지만 나는 저녁 식탁 앞에 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손에는 태양이 건네준 샴페인 잔이 들려 있고, 입술은 달콤한 술에 젖어 있다.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입술이 닿을 때마다 입안으로 흘러드는 향긋함이 행복했다. 그 행복을 조절하듯이 홀짝 홀짝 조금씩 넘기는 맛도 일품이다. "기운이 좀 나?" "엄청." "이젠 아프지 않아?" "전혀." 나의 회복력에 놀란 듯 태양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의 앞에서 쓰러지고 엉겨 붙었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금세 밝게 웃는 내가 이상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는 내색하지 않는다. 단지……. "혹시 또 다 잊어 버린 거냐?" 삐딱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아무리 녹아들 듯 취한 머릿속이라 해도 텅 빈 건 아니다. 목적어가 빠진 문장이지만 나는 금세 그 빈 괄호를 채울 수 있었다. 상우에 대해서 물은 거다. 그를 잊었느냐고. 태양 자신을 잊어버린 것처럼. 사랑이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까맣게 또 그의 존재를 머리에서 지운 거냐고 묻는 거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다시 묻지 않는다. 태양은 조금도 피곤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예상보다 조금 빠른 시간에, 헤어질 때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도착했다. 그는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한 집안을 둘러보다가 내 얼굴을 흘끗 보고는 어색하게 서 있는 내게 술병을 건네주었다. 얌전하고 무난한 와인이 아니라, 톡 쏘는 야한 맛의 샴페인이다. 그는 정말로 나의 독립을 축하해줄 마음이었던 것이다. 괜히 뭉클해져서 나는 라벨을 읽는 척 뚫어지게 그것만 쳐다보았다. 그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분주하게 식탁을 꾸몄다. 일회용 초에 불을 붙이자 생각보다 훨씬 더 은은한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왠지 낯 간지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축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태양이라는 점을 계속 상기시켰다. 오바하는 여재인. 그런 타이틀을 쓴다고 해도 상관 없다. 놀랍기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내가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러기도 하는구나, 하고. 방에서 나온 태양은 곱게 세팅된 테이블과 양초를 보고 잠시 그 자리에 섰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내가 손짓하는 자리에 앉아 주었다. 그리고 샴페인을 땄다. "잘 먹고, 잘 살자!" 잔을 마주들자, 괜히 쑥스러워져서 내가 먼저 큰 소리로 말했다. 챙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잔을 갖다 부딪치자 태양이 피식 웃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태양이 준비해준 샴페인은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초가 투명하게 녹아가는 동안, 나와 태양은 말 없이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술을 마셨다. 어느 새 한 병이 금세 비워졌고, 두 번째 병을 땄다. 잔이 기우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나 보다. 어색해야 마땅한데, 어색하지가 않다. 불편해야 정상인데, 전혀 불편하지가 않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은근한 친숙함이 반듯하던 자세를 허물고 있었다. 어쩌면 벌써 취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너한테 빌렸던 거 다 이 통장계좌로 넣어줄게." "……." "이자도 붙여 준다! 말만 해. 너 계산기 잘 두드리잖아." 비스듬히 턱을 괸 채, 그의 앞에 통장을 밀어주며 내가 말했다. 지난 주까지도 무일푼이던 내게 그가 호의로 대여해준 그의 통장이다.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던 태양은 통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젓는다. "기간은 말 한 적 없어. 지금은 받지 않는다. 이자도 내 식대로 받을 거다. 넣어." "그건 또 웬 고집이야? 다음엔 안 줄지도 몰라."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듯 그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역시 꽤 취하긴 했나 보다. 웅웅거리는 머릿속 때문에 그의 거절에 맞설 힘이 없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혼자 중얼거리고 만다. "지금 받는 게 나을 텐데. " 태양은 크리스탈 잔을 들어 쭉 샴페인을 들이킬 뿐이다.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피식 웃으며 술병을 들어 그의 잔에 기울인다. "그거 알아, 남태양?" "……?"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강한 놈일지도 몰라." 태양은 내 말을 들으며, 내가 부어준 술을 천천히 마신다. 말을 하는 내 혀가 둔해진 느낌이 들지만 괜찮을 거다. 눈앞의 그도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으니까. "나 이제 멋있게 살 거야." 뜬금없어서일까? 태양이 흘끗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본다. 나는 다짐하듯 풀린 혀끝에 최대한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한다. "사랑에 휘둘리지도 않을 거고, 주저앉아 우는 짓도 그만 둘 거야. 혼자 설 거야." "넌 지금도……." "아니. 아니야, 태양. 나 지금까지는 사랑을 참 많이 의지했었어.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봉처럼 완전히 중심을 얹고 살았어. 하지만 달라질 거야. 새로 시작한 이상, 나 이젠 안 그래. 지팡이 없이 설 거야." "왜……." "응?" "왜 지금 그런 결심은 하냐고. 하필 왜……?" 글쎄. 왜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 결심을 한 데에는 너도 영향을 주었을 거야. 내가 썩 괜찮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 그 중에 너 추가되었는 걸. 속으로 말한 거지만 나도 모르게 쑥스러운 웃음이 배어나온다. 가장 힘들 때 묵묵히 곁을 지켜준, 잘 모르지만 믿음이 가는 그를 앞에 두고 나는 혼자 웃고 있다. 눈을 내리깐 채 일렁이는 촛불의 심지를 바라보며. 가만히 촛농을 향해 손끝을 가져가는데, 문득 태양이 내 볼을 꼬집었다. 아니 꼬집었다기보다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다. 발갛게 익어버린 뺨에 그의 손끝이 닿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이건……, 뭐지? 내 상체가 기울고 있나 보다. 해변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스르르 발밑의 모래가 빠져나가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동하는 느낌처럼. 천천히, 천천히 주홍빛 어둠이 날 통과한다 싶을 즈음 기가 막히게 부드러운 무언가에 입술에 닿았다. 따스하고, 조금 단단하며, 향기로우면서 촉촉한……! "아, 뜨거!" 다음 순간, 손끝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눈을 번쩍 떠 버렸다. 시선을 내리자 심지 근처의 투명한 촛물에 푹 담궈 버린 내 어리석은 손가락이 보인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촛농 안에서 화끈거리는 피부가 느껴지지만, 그보다도 방금 내 입술이 닿았던 곳을 다시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꿈뻑꿈뻑. 눈도 여러 번 감았다 떠 본다. 그러니까 내, 내가, 방금, 태양에게, 그…… 키스를 한 건가? 정신을 차리자,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아리도록 느껴진다. "미, 미안해." 술이 확 달아난 느낌이다. 태양 역시도 그런가 보다. "뭐가?" 꽉 잠긴 음성으로 그가 묻는다. 미동도 없이 반듯하게 앉아서 나를 쏘아보고 있다. 알면서! 꼭 짚어가며 설명한 뒤에 사과를 해야겠냐?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수니까 안심해. 나 노말은 안 건드려." "여재인." 단단히 화났나 보다. 내 이름 석자가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불린다. "응."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의 대답. 얼굴이 죽도록 화끈거려서 그 앞에 앉아 있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어진 태양의 대답이 나를 기절할 듯이 놀라게 만들었다. "내가 노말이라고 누가 그래?" 그러니까……. 음……, 그게 그러니까……! 나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새 또 잊었나? 내 첫사랑, 같은 학교 다니던 녀석이라고 말했는데." 맞다. 그랬었다.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나 정말 많이 취했나 보다. "방금 그건 네가 사과할 거 없어. 너하고 나, 같이 한 거야." "그럼……." "의미 같은 거 따지면서 시간 낭비 하지 말자. 단둘이 마주 앉아서, 게다가 이런 무드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가벼운 접촉사고 아니야?" 태양은 멍해져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말했다. "굳이 뜻이 필요하면, 너의 시작을 축하하는 인사였다고 생각해." 그리고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나는 눈을 내리고 천천히 손가락에 묻은 촛농을 벗겨낸다. 그러면서 아직도 얼얼한 입술을 움직여 나직하게 묻는다. "축하하는 의미였어?" 우뚝. 방문 손잡이를 잡고 서 버리는 태양. 집 안엔 어느 때보다 예민한 침묵이 흐른다. 달칵. 그의 방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직전에 한숨처럼 뱉어낸 태양의 대답을 들은 것 같다. "아니."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지만, 혹 그 완벽함이 찾아온다고 해도 결국 '순간'에 불과하다는 걸. <술에 취하면 세상의 중심이 바뀐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술이다. 나는 너의 주위를 공전하기 시작하고, 세상은 그런 날 품고 자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느낌은, 깊은 산 속 암자에서 들리는 풍경 소리 같은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고 우기는 그런 것. 혹은 나만 알고 있지만, 나조차 모른다고 시치미 떼는 그런 것. 3. "그럼 확인해 봐야지." 나는 손끝에 묻은 촛농을 다 벗기고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걸어가 그의 방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사실 그의 방이 조금만 멀었어도 중간에 한 번 넘어졌을 거다. 깜짝 놀란 것처럼 돌아보는 태양을 응시하며 나는 씩 웃는다. "축하의 의미로 발생한 접촉사고가 아니잖아, 남태양. 내 생각에 그건……." 탁.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키스라고 하는 거야. " 빙그르르 벽이 도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잠시 문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그를 바라본다. 태양이 서 있는 곳 바로 뒤에 크고 푹신한 침대가 있다. 저기에 눕고 싶은데. 편안하게 누워서 그의 팔을 내 등에 두르고……. "방을 잘못 찾았어." "아무려면 어때." 두 사람이 자기에 그리 모자르지도 않은 침대잖아.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선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 태양을 올려다본다. 검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나를 뚫을 듯이 내려다본다. 톡. 내가 힘없이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면, 굳어지는 그의 몸이 느껴진다. 단단하지만 따뜻한 심장 소리를 들려주는 가슴이다. 그 곳에 이마를 댄 채 가쁜 숨을 가누며 나는 속삭였다. "우린 좀 전에 키스를 한 거야."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 "왜?" "……." 소주는 피를 녹인다. 어릴 때부터 코피를 닦기 위해서 썼던 알코올은 향이 강하고 독해서 그다지 몸속에 넣고 싶지 않았다. 술은 피를 묽게 하고, 묽어진 피가 정신을 헤이하게 만든다. 나는 힘겹게 숨을 내쉬며 셔츠 단추를 푼다. 그리고 태양의 목에 한 팔을 감았다. "내 방에서 키스하고 싶은 거야?" 그의 얼굴이 강제로 내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끌려 내려와 있다. 오늘따라 유독 달콤하게 느껴지는 태양의 체취를 가득 들이마셨다. 뻣뻣하게 서 있는 그의 뺨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그의 눈을 본다. 그리고 짧게, 아주 짧게 그의 입술을 훔친다. 쪽! 갑자기 정신이 든 것처럼, 태양은 내 어깨를 잡고 확 떼어내며 으르렁거린다. "자꾸 까불면 맞는다, 여재인." 이를 악물고 내뱉은 그의 말. 너무도 빠른 그의 반응에 잠시 놀랐지만……. 피식. 갑자기 모든 게 우스워졌다. 저렇게 무뚝뚝한 남태양의 입술을 훔쳤는데, 겨우 '까불면 맞는다'는 경고만 하나 달랑 돌아왔다. 어쩌면 죽도록 얻어맞을 지도 모른다고 각오했었는데. 그런데 왜 나는 굳이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 욕구불만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 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까불지 마라, 여재인.' 다음 순간, 나는 정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지잉 귀가 울린다. 형들이 그렇게 말했을까? 날 꾸짖을 때 가끔 했던 말인가? 하지만 저 톤은? 목소리는? 그리고 그걸 들었을 때의 내 감정은? 어지럽게 뒤섞이는 머릿속이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를 붙잡힌 채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애썼다. 도무지 닿지 않는 그의 부드러운 면 티셔츠에 얼굴을 묻으려고 버티면서. 결국 한참 동안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눈만 꼭 감은 채 두통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그는 나의 어깨를, 나는 그의 허리를 꽉 붙잡고 있다. 이번에도 그는 나를 '밀어내듯이'이고, 어김없이 나는 그를 '당겨 안듯이'이다. "나쁜 버릇이 생긴 거냐?" 후. 깊은 한숨. 드디어 항복인가 보다. 태양이 손에 힘을 탁 빼고 내 어깨를 놓아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와락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내 눈가를 비집고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게 무언지, 무엇 때문인지 지금 확인할 수는 없다. 어지러움과 두통, 그리고 어느 새 익숙해진 태양의 체취만 느낀다. 넉넉한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처럼 그의 품에 잠기기 바쁘다. 과거와의 버거운 이별과, 미래와의 낯선 만남. 억지스러운 감도 없지 않은 새 출발에 대한 부담. 혼자 감당하겠다고 꼿꼿이 선 자세의 불편함과 고단함. 나는 무너지지 않더라도, 잠깐 기대어 쉴 그늘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나를 품은 채 태양이 자신의 침대에 주저앉자,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몸에서 힘을 빼고 있던 태양은 내 무게에 밀려 털썩 뒤로 넘어가 버린다. 기가 막히는지, 누운 채로 뱉어내는 그의 웃음소리가 공허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 "너 이제 술 마시지 마라." 잔뜩 쉰 그의 음성이 가슴을 통해 전해진다. 천천히 태양의 팔을 더듬어 잡자, 그가 허전한 내 등에 팔을 둘러준다. 이렇게 또 우리는 나란히 누워 버렸다. 나는 눈을 감고 속으로 인사한다. 따뜻한 체온, 고맙다. 남태양. 내키지 않아도 베풀어주는 배려, 잊지 않을게. 이거야말로 내가 제일 필요로 했던 깊은 위로다. "이건…… 나쁜 버릇이다, 여재인." 나직하게 탄식하는 태양의 말을 끝으로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꿈을 꾸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떠나가는 꿈.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손끝만 스칠 뿐, 잡히지 않는 대상을 향해 나는 목을 놓아 울었다. 아무리 자주 꾸어왔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악몽. 검은 배경이 나를 덮칠 듯 밀려오자, 나는 그것을 피해 보려고 몸부림쳤다. '쉬이.' 그 때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당겨주었다. 이런 적 없었는데. 나는 매번 벗어나지 못했고, 어김없이 어둠에 삼켜졌었다. 이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차례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순서는 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검은 무리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나를 지켜보고만 있다. '오지 마! 싫어! 더 이상 날 어찌 하지 말고 가 버려!'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대신 나를 품어준 이의 팔에 더욱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다. '괜찮아. 쉬이. 다 괜찮아, 여재인. 진정해.'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나의 떨림을 흡수하려는듯 꼭 붙어 있다. 나직한 음성이 지친 내 영혼을 달래며 가만 가만 귓속을 파고든다. 울타리처럼 쳐진 이 존재의 영역 밖에서 나를 노리듯 도사리고 있던 어둠의 기운. 그들이 서서히 멀어진다. 문득 부드러운 감촉이 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젖은 속눈썹 위에도 잠시 내려 앉았다. 너무도 조심스럽고 은밀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재촉하듯 다가간다. 실망시키지 않고 다시 다가오는 촉감은 조금 전보다 길고 대담하다. '으응.' 누군가가 뱉어낸 소리. 가까이서 들리는 걸 보니 내 것인가 보다. 이마에서 미간을 타고 내려오는 감각이 애가 탈 만큼 느리고 가볍다. 코 끝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물흐르듯 입가에 안착한다. 결코 입술에는 닿지 않고 주변을 맴도는 따뜻한 기운이 조바심을 일으킨다. 꿈은 언제나 이렇다. 완전히 만족스런 기쁨을 배풀지 않는다. 달콤함은 환상일 뿐이다. 나는 반항하듯 입가에 아슬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온기를 찾아 턱을 들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자 실망스럽게도 모든 감각이 일시에 떨어져 나간다. 잔향처럼 피부에 남은 감촉마저 허무하게 스러져갈 뿐이다. 무엇이었을까? 확인하고 싶은데 눈을 뜰 수가 없다. 나는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 속으로 흡수된다. 검은 그림자도, 달콤한 온기도 없는 그냥 잠 말이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남태양이라도 좋지 못한 버릇은 갖고 있다. 지폐나 동전을 아무 데나 구겨넣거나 던져놓는 버릇, 받아든 거스름돈을 절대 세어 보지 않는 버릇이 그것이다. 하긴 그 버릇 덕에 두 번째 그를 만났을 때 택시비를 지불할 수 있었다. 지갑도 챙겨나오지 않은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꼬깃한 만원짜리가 박혀 있었으니까. 그의 방이나 세탁기 주변에 굴러다니는 돈만 주워 모아도 집 장만 10 년 장기계획이 7 년으로 줄겠더라. 얼씨구나, 챙길 위인이 못 되는 나는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해낸 것이 바로 플라스틱 돼지 저금통이다. 그가 흘린 돈을 발견하는 즉시 돼지의 등에 가차없이 내리꽂는 것이다. 굳이 왜 그런 짓을 하느냐, 태양의 방 한 켠에 그 돈을 모아두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다. 어젯밤 태양의 방으로 베개를 들고 들어갔다가 아주 처참하게 내쫓기고 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현재 그와 나는 딱히 친구도 애인도 아닌 어정쩡한 사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미 아무 일 없이 동침을 했던 전적이 있는 만큼 또 한 번 같이 잔다고 해서 무리가 있을 리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좀 했었다. 아니 그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푹신하고 넓은 침대가 좋았다. 그에게서 맡아지는 은근한 살 냄새와 희미한 솔 향도 머리를 개운하게 해주었다. 그는 몸부림도 치지 않고 얌전히 자는데다가, 코를 골지도 않았다. 이유를 대라면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태양은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당장 나가라는 듯 팔을 쭉 뻗어 방문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 '밤새 죽도록 나랑 섹스할 생각이 아니라면, 내 침대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아무래도 몇 번이나 같이 자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게 그의 성적 매력에 대한 자부심에 강한 흠집을 냈나 보다. 그래도 그의 침대를 빌려 같이 자는 일을 포기하기란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나보다 체온이 높아 곁에 누우면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내가 악몽을 꿀 때마다 옆에서 중얼거려주는 태양의 잠꼬대도 좋았다. 그는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면서도 내가 깨지 않게 조심하는 배려도 있었다. 아, 딱 한 번을 제외하면. 어제 아침은 그도 나도 평소보다 늦잠을 자 버렸다. 그저껫밤에 그가 먼저 잠이 들고, 나는 밤늦도록 혼자 잠이 오지 않아 결국 그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던 것이다. 남의 침상에 침범해 들어간 주제에 내가 몸부림을 좀 친 것 같다. 불평하는 그의 신음소리를 간간히 들은 기억이 나니까. 그는 그 날따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이지색 면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파자마 중에서 감촉이 가장 부드럽고 헐렁한 잠옷 말이다. 게다가 바싹 붙어 누우면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옷감이 얇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좀 부비부비 했을 거다. 어렴풋이 날 떨쳐 내려는 그의 손길을 반복적으로 무시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 사소하지만 끝 없는 실랑이 덕에 우린 둘다 피곤해졌는지, 내가 번쩍 눈을 떴을 때는 벽시계가 놀랍게도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어나, 남태양! 너 오늘 스케줄 없어? 비행기 띄워야 하지 않아?" 깜짝 놀라서, 눈을 감고 있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눕던 그가 문득, 이불을 걷으려던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놀라서 빤히 쳐다보는 내 눈길을 피한다. 그리고 잔뜩 쉰 목소리로 급히 외쳤다. "나가!" "알았으니까 좀 비켜 봐." 내가 벽 쪽에 있으니까 나가려면 태양을 타고 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머리 밑의 베개를 들어 단단히 끌어안고는 다시 신음하듯 소리쳤다. "그냥…… 나가!" 결국 나는, 그의 몸과 높은 베개의 벽을 동시에 타고 넘어야 했다. 등 뒤로 'Damn!'이라는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방문도 꼭 닫아주었다. 아무튼 그러저러한 이유로 돼지 저금통을 그의 방에 둘 수가 없다. 노숙하는 돈을 발견 즉시 저금통에 넣는 건 나지만 내 돈은 아니므로 내 방도 좀 그렇다. 그래서 대리석 식탁 위 후추통 옆에 올려두고, 오며 가며 돼지의 통통한 배를 살뜰히 불렸다. 그 후, 어느 새 채우는 맛에 재미가 들어 버려서 가끔 내 주머니도 털어 넣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모른 척 지켜 보는 태양의 시선은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새 극장에 정식 출근하기 전, 나도 태양도 아무 계획 없는 하루를 맞았다. 태양은 아침 식사로 베이컨을 굽고, 나는 이미 식탁에 앉아 강냉이를 씹고 있다. 하얗고 바삭한 태양콘을 가득 담은 원목 재질의 커다란 볼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그 모습이 뭐 특별할 게 있다고, 태양은 입가에 힘을 꾹 준 채 웃음을 참는 듯 하다. 나는 차가운 우유를 마시고 강냉이를 차분히 하나씩 입에 넣으면서 그를 모른 척 한다. "그걸로 식사가 돼?" "설거지할 필요도 없고 간편하잖아." "맛은? 심심하니, 먹으면 더 배고플 것 같은데." "내 취향이야." "그래. 니 취향이지." 태양은 내 맞은편에 자신의 접시를 내 놓았다. 김이 올라오는 스크램블 에그에 베이컨, 그리고 버터와 쨈을 곁들인 와플과 토스트. 갓 내린 커피와 자몽 주스. 마지막으로 커다란 사과 한 개. 저건 아마 껍질 째 먹으려는 모양이다. 엄청난 칼로리는 계산하기도 벅차다. 저렇게 먹는데도 살이 안 찌다니 신기하네. "난 됐다니까." "예의 상." 내 앞에 포크와 버터나이프를 놓아주는 태양. 필요 없다고 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저 모양이다. 누가 사이보그 아니랄까 봐. "그럼 성의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의 식량을 축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포크를 들었다. 베이컨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는데, 으음……, 와아……, 오오……! 의외로 담백하고 고소하다. 오물오물 신중하게 씹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시선이 내 쪽에 좀 길게 머문다 싶은 거다.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묻자, 그가 모양 좋은 손으로 토스트를 찢으며 고개를 저었다. "먹는 모습이 참……." "참, 뭐?" "토끼 같다." 무슨 의미지? 툭 뱉어낸 대답에, 나는 수상쩍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 본다. 포크로 계란을 찍어올려 입에 넣던 태양이 내 표정을 보고 설명을 한다.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이 풀 먹는 토끼처럼 진지해 보여서." "안 그러면 체하잖아." "변명할 필요 없어. 칭찬이었으니까." 능력도 좋아. 애매하게 칭찬하기 대회에 나가면 1등 하겠다. 나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먹는 모양이 풀 뜯는 토끼 같다는 게 어떻게 칭찬이야? 그는 자신의 접시를 식탁 가운데로 밀더니 나 보고 또 먹으라고 손짓한다. 역시 혼자 먹기는 양이 너무 많았던 거다. 보아 하니 2.5인분은 족히 만든 것 같다. 나는 포크를 드는 대신 태양콘 하나를 집어 그에게 쑥 내밀었다. "입 벌려." "……?" "네 식사 하나에 내 식사 하나, 이렇게 바꿔 먹기야." "됐어. 그 건조한 걸 무슨 맛으로……." 강냉이는 건조한 게 아니라 바삭한 건데. "그럼 나도 니 꺼 안 먹어." "먹지 마." 그가 어찌나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지 꽤 허무해져 버렸다. 머쓱함을 숨기려고 애쓰며 나는 허공에 잠시 멈췄던 손을 되물린다. 거절당한 비운의 태양콘을 내 입에 넣으려는 찰나, 그가 내 팔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확 당겨 내 태양콘을 자기 입에 쏙 넣어 버린다. 어찌나 빠른지, 내 손가락을 안 문게 다행이다. 하지만 손끝에 닿은 그의 입술 감촉은 생생하게 남아 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 속의 강냉이를 씹으며 다시 포크를 드는 태양.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자몽 주스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갈증이 났다. 왠지 모르지만 그의 순간적인 행동에 심장도 두근 뛰었던 것 같다. 아마도 갑작스러워서 그랬던 걸 거다. 당연하지. 그 갑작스러움에 조금 놀라서……. 아차 싶어 주스를 목구멍으로 삼키기 전에, 내 우유컵을 내밀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유 알러지 있어." 어, 그럼 어쩌지? 난 이미 그의 주스를 입에 넣어 버렸는데. 난감함에 그를 쳐다보고 있자, 태양은 일어나 상체를 내게 기울인다. "할 수 없지. 돌려 받아야겠다." 마치 내 입 안의 주스를 빨아마실 듯이 쑤욱 밀고들어오는 태양. 그 덕에 깜짝 놀란 나는 주스를 급하게 삼키려다 사레가 들고 말았다. 콜록 콜록. 얼굴이 빨개지도록 괴롭게 기침을 한다. 그 동안 그는 도로 의자에 앉아서 혀를 찬다. 게다가 저것은, 대놓고 한심하다는 눈빛 아닌가! "장난이었는데. 진짜 센스 없는 여재인." 애매한 칭찬까지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농담은 물론이고 장난까지 이상하게 하는 저 녀석이 하필 내 동거인이라니! 기침이 생각보다 오래 가자, 마지못해 물어온다. "등 두드려줘야 하나?" "괜차……, 콜록! 콜록!" 에이, 부었나 보다. 목 안 쪽이 화끈거리고 열까지 난다. "어우, 목 따가워." "어디 봐." "됐어. 기침 때문인걸 뭐." 정말로 내 목을 감싸 쥐려는 것처럼 손을 뻗어온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피해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고작 주스 한 모금에 이런 요란을 떨다니. 정말 추해, 여재인. 눈살을 찌푸리는 태양의 표정이 뭔가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식탁 위에 흩어진 내 태양콘들을 하나씩 주워 모았다. 가끔씩은 좀 이상했다. 그는 순간 순간 태도의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어느 때는 다정했다가도, 다음 순간 차갑게 돌변하기도 하고, 무뚝뚝함의 화신이었다가 돌연 눈치 빠르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때로 그의 침묵은 나에 대한 배려 같았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태도 변화에 따라 나도 갈팡질팡하게 되니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과 감정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깜빡 졸았나 보다. 나는 조용한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볼륨이 낮게 조정되어 있는 TV는 혼자 켜져 있고, 태양은 밝은 베란다 티테이블에서 아직도 신문을 읽고 있다. 그의 옆에 산처럼 쌓인 신문들은 대부분 영자로 된 경제 신문들이었다. 비행 다녀오면 늘 저렇게 지난 신문들까지 꼼꼼히 챙겨 보곤 한다. 재테크 정보를 찾는 걸까? 재산이 얼마나 되길래 저걸 다 읽어야 할 정돈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방해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나는 심심해서 TV 볼륨을 조금 올렸다. 그러자 태양이 흘끗 눈만 들어 내 쪽을 쳐다본다. "소리 줄일까?" 내가 낮게 물었다. 자다 일어난 바람에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다. 고개를 저어 보이던 그는 마지막 신문을 접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참 길기도 하지. 나는 조금 부러운 눈빛으로 그의 쭉 뻗은 팔다리를 훔쳐 보았다. 나도 나름대로는 균형 잡힌 몸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콤플렉스가 있을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키는 좀 컸으면 좋겠다. 185cm는 되어 보이는 태양만큼도 안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며 또 털썩 소파 위에 누워 버렸다. "재미있어?" 가까이 걸어와 소파 밑에 내려앉으며 태양이 묻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화면을 주시했다. 처음 보는 쇼 프로다. "저 사람들 중에 진짜 연인인 한 쌍을 알아맞히는 거래." 화면 속에는 여러 커플들이 나와 온갖 닭살 돋는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패널로 나온 사람들이 이런 저런 요구를 할수록 그들의 애정 무드는 고조되어 갔다. 하지만 나는 바로 곁에서 소파에 기대 앉은 태양을 의식하느라 거기에 몰입하지 못한다. 손을 들면 바로 만져질 위치에 태양의 검은 머리칼이 있다. 조금만 뒤척여도 그의 단단한 몸에 내 몸이 닿을 것이다. 희미한 비누 냄새. 그리고 머릿속을 청결하게 씻어주는 듯한 솔향.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태양은 미동도 없이 앉아서 열심히 TV를 시청하고 있다. "난 3번 커플 같은데." 놀랍게도 태양이 내게 건넨 말이다. 그에겐 좀 시시한 프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억지로 연기하는 게 티가 나잖아. 카메라 앞에 서기 직전에 둘이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하며, 뒤에 누워 있는 나를 흘끗 돌아본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화면으로 돌리면서, '그런가?' 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3번 커플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 "어……!" 내가 저 감탄사만을 뱉어놓고 말이 없자, 그가 돌아본다. "저 사람." "누구?" "네가 말한 3번 커플의 남자. 아무래도……." 내 말에 태양의 눈이 가늘어진다. "희웅이 같아. 고등학교 동창 녀석인데……." 여기까지 설명했다가, 나는 태양이 TV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말을 흐리는 동안에도 내 얼굴만 뚫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해 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태양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다. "나희웅은 기억한단 말이지? 결국 여재인이 까맣게 지운 건 딱 한 사람이라는 얘긴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나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상실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평화롭던 분위기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속상해서 한숨을 깊게 내쉬어 보지만, 뭐가 꽉 들어찬 듯한 답답한 속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알고 싶어."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상처 입은 듯 예민하게 굳어 있는 그의 어깨 위에 용기를 내어 한 손을 얹었다. "우리 말이야……." 태양은 내 간절한 눈빛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하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둔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니?" 나의 물음에 태양의 옆모습이 더 창백해졌다. 그에 따라 내 가슴에도 묵은 상흔이 재발하듯 열을 낸다. "있어." 태양이 대답했다. 이를 악무는지 턱 근육이 실룩 움직인다. "우리가 마주친 적, 물론 있었지." 굉장히 아픈 느낌의 자조적인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지는 것을 나는 숨죽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기 해주면 안 돼?" "안 돼." 딱 잘라 거절당한다. "자존심 상하는 얘기라, 떠올리고 싶지 않다." <널 보고 돌아오는 길엔…….> 가슴 속 한 쪽이 싸해지면서, 마치 은단을 통째로 깨문 것처럼 서늘해졌다. 까맣게 화상을 입은 심장도 절뚝거리며 뛰었다. 이를 테면, '뻔한 인과율에 의한 후유증 발생!'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해석하기 힘든 기이함이란 바로, '잊으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생각남!' 4. 그와의 첫 키스에서는 귤 향기가 났었다. 흡입하고 음미할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그 향기에 취해 태양은 그 첫 키스의 대상이 제 세상의 전부가 되어주길 바랐다. 잡히지 않을 듯 하면서도 어느 새 제 곁에 와 있던 그를 품을 때마다 굉장히 향긋하고, 진저리쳐지도록 달콤하고, 미치도록 아련하며, 죽도록 애틋했다. 아무리 강하다고 말해도, 그는 늘 부서지기 쉬워 보였다. 웃을 때마다 눈가로 사르르 번지는 빛 가루가 눈부시긴 했지만, 간신히 생을 버티고 있는 듯한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와, 가쁘게 내쉬며 세상과 소통하는 힘든 숨소리가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지켜주고 싶었다. 그가 기대 쉴 수 있는 단단한 벽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가 지키고 싶어하는 당당함을 받쳐주는 디딤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 별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양에게,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하라고 명령했으니까. 순수함과 깨끗함은 더렵혀지기 쉽다고들 말하지만, 그는 조금 달랐다. 투명하도록 맑아서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아무도 그 속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그가 가진 건, 무지에 의한 순수가 아니었다. 무경험에 의한 깨끗함도 아니었다. 현명한 눈과 사려깊은 심장을 가진 그는 늘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사랑하지만 결코 닿거나 따올 수 없는 하늘 위의 작은 별처럼. 그에게 잠시라도 닿을 수 있었던 건 태양에게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맞다. 그는 하나의 기적이었다. 미국에 돌아가서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빨리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루 빨리 모든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니까. 다른 선택은 이미 한국을 떠날 때 모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를 만나는 길은,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건 재인의 뜻이었으니까. 태양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로 했다. 장례식에서 발표된 할아버지의 유언은 태양의 부모가 했던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상속에 대한 단서 자체가 태양의 장례식 참석이었으므로, 태양이 받을 지분은 상당한 양이었다. 거기다 관리 지분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한 사업체와 부동산이 그의 책임과 권한으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유언의 법적 유효성과 정당함에 대해 소송을 건 친척들과의 싸움이었다. 소송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아직 어리지만 굳건한 뒷받침을 받고 있는 태양의 상대가 못되었다. 평생을 준비해온 태양 일가의 반격을 막을 만한 치밀함이 없었던 것이다. 신부가 되신 큰외삼촌과 스무 살에 교통사고로 죽은 둘째 외삼촌을 제외하고, 할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핏줄은 태양과 태양의 엄마, 두 사람이기도 했다. 그렉과 그의 아들들의 몫은 장례식 불참으로 인해 상속 대상에서 밀려났다. 그들은 당시 수많은 증거자료들에 의한 제보로 인해, 한국에서 경찰 조사를 받으며 출국금지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태양의 외할아버지는 사업밖에 모르던 분이었다.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랑이 가족과 섞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차갑고 이성적이며 무엇보다 원리 원칙을 중시했던 분.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태양에게 살가운 말을 건넨 적이 없으면서도, 대부분의 사업체를 물려줄 만큼 그의 능력과 가능성을 지켜보았다는 얘기다. 태양은 이제 늘 엄마와 함께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한국에서와 달리 그를 방치하지 않았다. 로드아일랜드의 저택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지냈다. 매일의 힘든 스케줄을 알려주고, 유능한 팀을 이뤄 사업 전반에 대해 상의를 하고,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렉과 그의 아들들의 재판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침, 점심, 저녁의 식사 메뉴에 대해서도 태양의 의견을 물었고, 쇼핑을 하거나, 손님 접대를 하거나, 여행을 떠날 때도 꼭 그를 동반했다. 말하자면 태양이 혼자 재인을 생각할 시간은 잠자리에 들었을 때뿐이라는 얘기다. 하루는 한 시간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한 달은 일 년처럼 많은 일과들로 채워졌다. [재인이…….] 저녁 식탁 앞에서 이렇게 운을 떼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화제를 바꿨다. [운수 쪽은 조만간 매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수익이…….] [곧 졸업하겠네요. 대학은 정해졌으려나?] 하지만 태양은 오늘따라 고집스레 재인의 안부를 거론한다. 이야기를 하면 못 견디게 그립고 아플까 봐 피해오던 화제였건만. 얼마나 힘들게 꾹 누르고 견디고 있는지 태양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다시 사업 얘기를 꺼내려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인이 이번에 졸업하면, 재수할 건가 보더라.] 대번에 태양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재인의 성적이라면 무리 없이 원하던 곳에 갈 수 있었을 텐데.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생각은 딱 하나다. 혹시, 혹시……? [그 아이…….] 엄마는 말을 멈추고 힘겹게 물을 마신다. [그 동안 좀 아팠단다.] [어디가요? 얼마나요! 왜요!] 태양은 눈을 꾹 감았다 뜬다. 그리고 테이블 가를 꽉 쥐면서 물었다. 칼에 베인 듯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엄마의 눈빛도 착 가라앉았다. [몸이 약한 아이였잖니. 널 많이 좋아했고, 충격도 받았을 거야.] [과거형으로 말하지 말아요! 좋아했다는 말, 그런 거……!] [태양아.] [하아! 충격 받았대요? 날 보낸 게 누군데! 누구 마음대로 막 아프대! 지금은 괜찮아요? 아니, 아니다. 괜찮을 리가 없지! 재인이 봐야겠어요. 당장이라도 그 녀석 무사한지 보러 가야겠어요!] 태양이 핏기가 사라진 채 굳게 선언하자, 엄마는 다시 냉정해진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너 이럴까 봐 얘기 안 하려고 했다.] [그러지 마세요, 엄마. 내가 이럴 걸 아셨으면, 왜 이러는지도 아실 거 아닙니까? 내 심정이 어떨지 다 알면서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우리 재인이 아플 동안, 난……!]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재인이 지금 괜찮다. 졸업도 잘 할 거고, 재수해서 좋은 대학 갈 거야. 지금 네가 가서 어쩔 거냐? 다시 공부하려는 애 방해나 하려고? 재인이 흔들어서 삼수 하게 만들려고? 제발 못나게 굴지 마라, 아들. 지금 가면, 재인이가 좋아할 것 같니?] [……!] [그리고 아직 너는 상속자로서 완전히 인정 받은 거 아니야. 떳떳하게 재인이 앞에 서려면, 그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 거리고 믿는다.] 그녀는 냅킨을 접어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재인이 씩씩하게 잘 지내니까 너도 정신 차려. 내 아들이 바보처럼 구는 거 난 보고 싶지 않다.] [……그 말씀 안 믿습니다.] [뭐?] 못지 않게 차가운 음성으로 태양이 내뱉었다. 일어나려던 그녀가 획 돌아보며 긴장된 눈빛으로 아들을 본다. [나 엄마 못 믿어요. 아무도 못 믿게 키우지 않으셨습니까? 증거를 갖다주세요. 재인이가 무사하다는 증거를 저에게 주세요.] [태양아!] [오래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의자를 뒤로 밀고 태양이 먼저 일어섰다. 식탁을 돌아 나오면서 등 뒤에 닿는 엄마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감정에 치우쳐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태양의 책상 위에 재인의 사진 몇 장이 놓여졌다. 환하게 웃으며 졸업식에 참석한 작은 별의 모습이 태양의 눈에 맺혔다. 변함 없는 미소. 따스한 눈빛. 그러나 너무 말랐다. 더 작아진 것 같다. 속상하게시리 뺨도 홀쭉해졌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왠지 슬퍼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가슴이 아파서 그래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고 태양은 생각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재인의 사진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번으로 뜨는 재인의 번호로 수 없이 전화를 걸어댔다. 방문 밖에서 초조하게 오가는 엄마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시리지만 그리운 재인의 미소와 하루를 보내는 사치 정도는 누려야 했다. 그래야 태양도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면 끝까지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걸 아시기에 엄마도 태양의 방문 앞에서 노크 한 번 못하신 걸 게다. 재인아. 작은 별. 너 얼굴이 많이 삭았다. 아냐? 되게 못 생겨졌어. 네 사진 괜히 봤다. 사진 보니 좋긴 한데, 견디기가 더 힘들다. 너 왜 자꾸 마르냐? 널 애 먹이는 내가 없으니까 포동포동 찔 만도 한데. 승진이 자식이 괴롭히냐? 내가 돌아가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 잘 하고 있어? 목걸이는 받았니? 나 많이 화났었다. 지금도 다 안 풀렸다. 그러니까 우리 다시 만나면 너 이쁜 짓 많이 해야 할 거다. 다음 달에 한국에서 재판이 있어. 잠시 들어갈지도 몰라. 나도 증인으로 서야 하는데 별로 서고 싶지 않은 자리다. 너 아버지한테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눈 딱 감고 이해해줘. 부끄러운 집안사지만, 그래서 더욱 나는 우리 부모님 지켜 드려야 해. 하지만 알지?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 누군지 알지? 잊지 않았지? 그 때…… 나 들어가면 너 볼 수 있을까? 요즘은 할아버지 회사에 다니는데, 거기 집무실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 집에서는 잠만 자. 어릴 때 내가 자란 곳이긴 해도 집보다는 회사가 편하더라. 어리다고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은 아직 없어. 곁에 항상 엄마가 계시거든. 너도 알 거다. 엄마가 어떤 분인지. 요즘은 더해. 꼭 수렴청정하는 태후처럼 굉장히 엄격하고 날카로우셔. 아마 재판이 끝나고 아버지가 주민번호를 되찾으실 때까진 그러실 것 같아. 너 아팠다는 말 들었다. 또 어디가 아팠던 거야? 병은 아니라면서, 너는 왜 자꾸 아픈 거야? 꼭 아파야겠거든, 한 번은 앓아야 하는 거라면, 제발 내가 없을 때 그러지 마. 아직은 아프면 안 돼. 내가 떠나온 거, 너 지켜줄 힘을 가지려는 거니까. 지금은 아프지 마. 난 말이다. 여기로 날 보내 버린 너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워 한다. 네 목소리, 네 미소, 네 손, 네 입술, 네 모든 게 그리울 때마다 나는 마구 네 욕을 한다. 귀 안 간지럽냐? 그럴 때마다 너도 내 생각 조금은 하길 바란다. 재인아. 진짜 보고 싶다! 반짝 반짝 우리 작은 별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 너의 태양은 햇살 아래만 서면 어딘가에서 네가 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덕분에 까맣게 탔어. 이제 네가 날 못 알아보면 어쩌지? 알고 있냐, 여재인? 나는…… 아직도 너뿐이다! 가슴 시려도 어쩔 수 없이 웃게 만드는 사람, 너뿐이다! ……오직 우리 작은 별 뿐이다! 기억 속에 있던 노을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여섯 살 때 떠나, 열여덟에 다시 찾아왔던 한국. 열아홉에 떠밀리듯 다시 떠나, 스무 살이 된 지금 다시 돌아왔다. 비록 잠시일 뿐이지만. 태양은 재인과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모두 생생했다. 굉장히 많이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했다. 이젠 낡아 버린 테입처럼 진짜와 덧댄 생각들이 뒤엉켜 너덜거릴 정도다. 그러나 우선은 집안의 원수를 마주한 채 법정에서 증언을 해야 했다. 돌아온 첫 날, 태양은 묵고 있던 시내의 호텔에서 나와 재인의 집으로 향했다. 함께 온 엄마에겐 말을 하지 않았다. 검사와 얘기를 나누시는 중에 자신만 빠져나왔다. 아버지와 셋이 처음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 그 전에는 돌아올 것이다. 자신을 보면 재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말부터 꺼낼까? 키는 조금 자랐을까? 얼굴은? 목소리는? 전화기는 왜 없앴는지 물어봐야지. 요즘 나쁜 꿈은 안 꾸는지도. 텔레파시는 소용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얘기해주어야겠다. 하지만 결국 태양은 그 중 아무 것도 시도하지 못했다. 호텔 로비 앞을 지키고 있는 장정들에게 붙들려 방으로 되돌아와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의 단호한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재인이 만나겠다는 생각,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어느 때보다 엄한 눈빛으로 엄마가 태양을 바라보았다. [시기가 좋지 않아. 증인 보호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함부로 단독행동 하지 마라.] 턱을 쓰다듬으며 신중한 눈길을 보내오는 아버지의 시선도 불편했다. [내 별 보러 가는 것뿐입니다. 대단한 건 아니라고요.] [아직도 어리구나.] 꾸짖듯 태양을 향해 고개를 젓는 엄마의 음성. 태양은 입술 한 쪽만 슬쩍 들어올리며 쓰며 웃었다. 소중한 대상에 목말라 하는 것이 어린 사람만 하는 행동이라면, 맞아요. 전 어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이 어리다고 하는 거라면, 네, 그래요. 전 어려요. 처음이니까요. 처음이니까 어리기만 한 게 아니라 무지하고 어찌할 줄 모르면서 애닲아 하죠. 전 이런 감정 앞에 신생아나 마찬가집니다. '아직도' 어리다고요? 아니요. '당연히' 어린 겁니다. [네 감정 하나로 움직이지 말거라. 위험하고 무모해. 너뿐만 아니라 재인이도 다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 태양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다시' 라고 하셨나? 재인이 위험했었다는 말인가? 태양의 눈빛이 예민하게 일어나 펄떡이는 걸 보고, 아버지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너는 몰랐겠지. 박경식이가 재인이 존재를 알더라. 네가 좋아하는 대상들을 지금껏 그들이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할 거다. 그 밑의 사람들이 재인이 사진까지도 찍어 바쳤나 보던데. 다행히 네가 서둘러 떠나자마자 그들이 붙잡히는 바람에 큰 문제는 없었다만…….] 여기까지 말하고 두 분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마른 침을 삼킨 후 아버지의 말을 이어받은 분은 엄마였다.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 태양.]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태양의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다. 하얗게 질린 마디마디가, 그의 손바닥 안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했다. 엄마는 그에게 다가와 손가락을 하나씩 억지로 풀어주었다. 역시 예상대로 손 끝에 꽉 짓눌린 손바닥에 붉은 피가 맺혀 있다. 손톱이 이미 깊게 박혀서 펼치자마자 벌건 핏물이 배어나온다. 엄마는 급히 약상자를 가져와 지혈을 하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하지만 태양은 얼굴까지 굳어서 창백한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목이 꽉 잠겨있음에도 불구하고 헛기침 한 번 못하고 물어온다. [재인이…… 정말 아무 문제없었던 거 맞아요?] […….] 태양의 갑작스런 물음에 두 분 다 대답을 못하신다. 초조함에 벌떡 일어나 붕대를 다 감지 않은 손마저 뿌리쳤다. [재인이 봐야겠어요!] [남태양!] [만나진 않을 게요. 그냥 무사한지만! 그것만 보고 올게요!]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요. 나때문에 혹시라도 그 애가 해를 입거나 괴롭힘을 당한다면, 전 살 수 없어요! 재인이가 아픈 것도 죽도록 속상한데, 그 애가 무슨 일을 당한다면 저도 죽어요! 제발! 태양의 간절한 시선을 느낀 부모님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다 함께 가자꾸나.] 재인의 집 앞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희미한 등을 달고 있는 전봇대 하나. 무심한 표정으로 바삐 오가는 사람들. 아담하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의 아치형 대문. 저 앞에서 재인과 포옹을 했었다. 그의 눈물 어린 다그침에 낯이 화끈거리는 고백도 했었다. 태양은 멀찌기 주차한 차 안에서 부모님과 함께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태양이 탄 승용차를 지나쳐 걸어가는 세 남자가 보였다. 태양의 심장이 묵직한 진동을 일으키며 쿵쿵 뛰기 시작했다. 재인과 그의 형들이다.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사이로 애틋한 눈길이 그에게 닿아있다. 그렇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태양의 손이 문 손잡이를 더듬어 찾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그 모습을 눈치 챈 엄마가 태양의 손을 잡아 내렸다.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재인을 만나러 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으니까. 잊으면 안 된다. 그저 그가 무사하다는 걸 보러 온 것일 뿐이다. 자신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가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태양의 가슴을 까맣게 태웠다. 숨막힐 듯이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도로롱. 도로롱. 그때 웬 강아지 한 마리가 목에 방울을 단 채 세 사람의 뒤를 따랐다. 신경 쓰지 않는 형들과 달리, 돌아볼 듯 멈칫 하고 서는 재인의 발걸음이 보인다. 하지만 붉은 머리를 한 그의 형이 재인을 재촉하자 마지 못해 다시 집쪽으로 걸어가 버린다. 아무리 간절해도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태양은, 동네 길 잃은 강아지만도 못한 자신의 처지에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재인아.]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려 본다. 열이 나는 입김 때문인지 차창 유리에 뿌연 김이 서린다. 우산을 재인에게 양보한 그의 형들이 먼저 집안으로 뛰어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재인도 대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슴이 짓이겨진 듯 아팠다.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운데 동시에 숨을 쉬기도 싫어졌다. 작은 별을 당장 불러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도로롱. 도로롱. 강아지도 태양과 같은 기분인지 대문 앞을 서성이며 재인이 사라진 곳을 지켜보고 서 있다. 비에 흠뻑 젖은 강아지의 뒷모습은 처량하고 볼품 없었다. 목에 매달린 방울소리도 구슬펐다. 그런데, 그 때 기적처럼 재인이 다시 나타났다. 조용히 대문을 열고 빼꼼히 밖을 내다본 것이다. 여전히 지키고 선 강아지를 발견하고는 한숨을 폭 내쉰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 나와 강아지 앞에 푹 주저앉았다. 그리 크지 않은 재인의 우산 안에 강아지도 들어가 선다. 뭔가 훈계하듯이 강아지에게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재인의 모습. 태양은 더 참지 못하고, 부모님이 말릴 새도 없이 차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재인이 강아지를 품에 끌어안고 일어나서 대문을 열었다. 태양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왔는데도 그를 보지 못했나 보다. 태양은 흠뻑 젖은 채로 뛰어가 재인의 팔을 잡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작은 별의 얼굴. 숨막히게 그리웠던 아름다운 눈이 자신을 향한다. 쿵! 쿵! 까맣게 타고 있던 심장이 또 살아나 뛰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저도 말을 못하고 있으면서 태양은 속으로 외친다. 목이 꽉 잠기고 호흡이 힘들어서 저는 지금 말을 못한다, 핑계를 대면서. [아!] 짧은 감탄사. 팔을 붙잡힌 채 고개를 돌린 재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작은 반응에 태양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다시 만난 연인에게 활짝 웃는다. 그런데……. [죄송해요.] 뭐? 재인이 엉뚱하게 중얼거린다. 태양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이 강아지 주인이에요?] [……!] [자꾸 따라오길래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막 데리고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나긋하게 설명을 한다. 그 따위 개는 관심 없어, 재인아. 나야. 태양이야! 너 왜 그렇게 낯설게 쳐다봐? [농담하지 마. 재미없어.] 태양이 낮게 경고하자, 재인의 이마가 흐려진다. 혼란스러운 듯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투명한 눈동자. 갈색 속눈썹에 빗방울이 튀었는지 촉촉하게 젖어 있다. 안고 싶어. 너 한 번 안아보자. 그런 무시무시한 농담은 집어치우고, 우리……! [거기 누구야?] 낯선 음성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태양이 재인의 양쪽 어깨를 세게 잡고 막 끌어당기려 할 때였다. [이성이 형! 곧 들어갈게. 강아지 주인 찾았어!] 어깨 너머로 재인이 남자에게 외쳤다. 태양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떠넘기듯이 축축하고 지저분한 강아지를 안겨주는 그를 노려본다. [농담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에요. 나쁜 마음 먹고 이 녀석 훔친 것도 아니고요.] [……!] [그럼, 안녕히 가세요.] 태양이 움직이지 않자, 뒷걸음으로 물러서며 그의 팔을 겨우 제 어깨에서 떼어내고는 대문을 닫으려 한다. 그래도 완강하게 버티는 태양을 약간 두려운 듯 올려다보는 재인. 믿을 수가 없다. 태양은 견딜 수가 없다. 하염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눈을 뜨기도 힘든 상태에서 그를 아프게 바라보다……, 털썩!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안. 가지 마!] 재인과 포옹했던 그 자리에서 태양은 고개를 숙인다. 그 갑작스런 행동에 많이 놀란 재인이 급히 소리친다. [어어! 옷 젖잖아요!] [나한테 화 났니?] [뭐 하는 거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나한테 화나서 이러는 거라면……. 아니, 맞아. 화 났을 거야.] 화나면 너 나한테 존댓말 하잖아. 그렇지? 너 화났지? 그래서 이러는 거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말해. 무슨 말이든 해! 욕을 해도 좋고, 때려도 좋고, 걷어차도 좋으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만 마!] 마치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이, 나를 모른다는 눈으로 낯설게 밀어내지만 마. 제발! [내가……?] 무언가를 물을 듯 하던 재인이 입술을 꾹 다물어 버린다. 그리고는 놀란 눈빛을 애써 감추고 타이르듯 태양을 내려다본다. 간절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곧게 응시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러지 말고요. 음…….] 결국 어쩔 줄 몰라 하며 재인이 탄식한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그를 내려다본다. 태양을 일으키려다 꿈쩍도 하지 않자, 난감한 표정으로 연신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긴다. 그럼에도 조금 쌀쌀맞다. 태양을 향해 내려오는 재인의 시선에는 차가운 경계가 둘러져 있다. 정말 날 묻어 버린 거니, 여재인? 그렇게 날 잊은 척 하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걸 시위하는 거야? 차라리 그런 거라면, 너 지금 혹 숨어서 볼지도 모르는 누군가 때문에 연극을 하는 거라면, 그 동안 그 만큼 시달렸을지도 모를 너에게 미안하고 몹시 속상하지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날 모르는 타인 보듯 공허한 네 눈빛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이유라면, 그게 뭐든 나는 다 환영할 거다. 겨우 9개월이다. 일년도 안 됐다! 우리 헤어진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안 됐는데 날 잊을 만큼 너 바보 아니잖아! 태양은 고개를 들어 재인을 올려다본다. 무릎 꿇은 자신을 혼란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는 눈가가 빨갛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수분이 재인의 얼굴을 흠뻑 적시고 있다. 지금 내가 널 힘들게 하는 거니? 대답해 봐, 재인아. 내가 이러지 말았어야 했어? 이렇게 가까이 널 두고도 안지 못하는 내가 불쌍해서 우니? [이제 그만 나오너라.] 어느 새 재인의 집 대문까지 우산을 받쳐 쓰고 걸어온 엄마가 말했다. 재인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냥 어른이라 그러는 건지, 아는 체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몸짓. 태양은 뚫어지게 그런 재인만 쳐다보고 있다. [그만하면 됐다. 어서!] 엄하게 재촉하는 엄마의 음성에 태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자신을 바라보는 재인의 투명한 눈동자만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리고 몇 걸음 물러섰다. 엄마의 우산이 태양의 머리 위로 즉시 옮겨 왔다. 천천히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저…….] 기다렸다는 듯 획 빠르게 뒤돌아선다. 그러면 그 갑작스런 몸짓에 놀라 멈칫 굳어 버리는 재인이 보인다.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밀다만 것 같은 모습이다. 태양은 다시 성큼 그를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이번엔 아까보다 단호하고 빠른 동작으로 태양의 품에 강아지를 넘겨주며 말했다. [비 맞아서 그런지 열이 나는 것 같아요. 데려가서 얼른 말려주세요.] 그리고는 주저 없이 돌아서서 집 안으로 쏙 사라져 버린다. 퉁 닫혀 버린 대문을 바라보며, 태양은 비 비린내 나는 강아지를 안고 서 있다. 그 상태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다시 또 불러주지 않을까 기다리는 사람처럼. 비는 하염없이 내렸고, 재인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역시 비 오는 날은 절대 좋아할 수 없노라고 태양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떨고 있는 강아지의 높은 체온과 달리 태양의 체온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태양은 호텔로 돌아온 후 그 날 밤, 의식을 잃을 만큼 밤새 앓았다. 그의 곁을 지키던 부모님의 얼굴에도 창백한 걱정이 드러나 있었다. 이토록 아팠던 적이 없었다. 태양은 늘 건강했고, 또 각별히 건강에 더 신경을 쓰도록 가르쳤다. 어릴 적 공원에서 밤새 비를 맞은 이후로는 한 번도 스스로를 이렇게 놓아본 적이 없었던 아이였다. 그의 하늘에 떠 있던 유일한 별을 만나고 온 날, 저렇게 아파하는 모습까지는 예상치 못했었다. 태양도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아이였다. 그런 그가 쉽고 가벼운 사랑을 할 리가 없었다. 혈통이 그랬다. 이십년의 세월 동안 갖은 고난 속에서도 고집스레 서로의 사랑을 지켜온 부모를 둔 아이였다. 태양 모친의 재혼은 말그대로 거친 세상으로부터의 방패막이였을 뿐이다. 그녀의 재혼 대상은 태양 부친의 동료 연구원으로 신의가 두터운 팀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어차피 독신주의였고 그와의 법에 국한된 재혼도 부친이 부탁했던 것이다. 태양의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그였다. 열이 내리지 않는 아들을 보면서, 태양의 부모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지금껏 어떤 어려움도 다 헤쳐왔지만 이번만큼은 진정으로 두려웠다. 태양이 재인의 뇌수술과 기억상실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재인이 겪어야 했던 사고와 그가 어떤 상태에서 자신을 보냈는지 알게 된다면……? 생각만으로 아찔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태양은 아파하고 결국 견디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버텨야 하니까. 재인은 그를 도와주지 못할 테니까. 이미 그 아이는 혼자 힘으로 제 인생을 살아가기에도 벅차 보였다. 아무리 성정이 강하고 꿋꿋하다 해도 기억상실은 한창인 나이에 겪기에 너무 가혹하다. 갈수록 말라가고 빛을 잃어가는 작은 별.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태양의 부모는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재인이 가장 필요로 할 때 그가 제일 사랑했던 태양을 주지 못했다. 태양의 부모는 그래서 태양의 작은 별에게 가장 미안했다. 후회조차 하지 못해서 더욱 미안하고 고마웠다. 아마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나중에 재인에게 했던 모진 요구 때문에 자신들이 벌을 받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이 알았을 때 받을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도 아찔했다. 다시 한 번 큰 죄를 짓는 기분으로, 두 사람은 태양이 절대 재인의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하자고 다짐했다. 그러한 부모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며칠 후 눈을 뜬 태양은 재판이 끝난 후 곧장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바싹 말라 거칠거칠해진 입술로, 돌아가면 시험을 쳐서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사업을 완전히 파악하고 업무진이 안정 될 때까지는 진학을 미루기로 했었지만, 태양의 갑작스런 선언에 부모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그게 재인에 관한 것만 아니라면. 그 후 태양은 창틀에 기대에 앉아 몇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지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스러져가는 겨울의 햇살이 길게 한강 위로 드러누울 때쯤에야 겨우 생각을 마친 듯, 태양은 천천히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입을 열어 조용히 말했다. [하늘을 날려면 어느 학교로 가야 하는지 알아봐 주세요.] 조만간 운명을 바꾸려는 사람처럼 비장한 음성이었다. <남은 게 별로 없다> 쉽게 비참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놓지 못한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 그걸 의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지금 되새겨야 할 것은, 내가 가진 것이 가지지 못한 것보다 몇 만 배 더 크고 귀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 되새김 후엔 단 하나, 내가 무얼 가졌는지 아는 일만 남을 것이다. 5. 하늘이 파랗다. 기나긴 여름이 물러가고 버석한 가을이 왔다. 깨끗하게 다려진 교복을 입고 재인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고3의 봄, 갑작스런 뇌수술 후 처음으로 등교하는 2학기 첫 날이었다. 새로이 입학하던 날보다 더 떨리는 심정으로 재인은 교실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이는 세 명의 무리가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치뜬다. 조금 두근대는 심정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을 자리를 찾는다. [여재인?] [재인아, 너!] [드디어 복학하는 거냐? 어?] 일제히 쏟아지는 그들의 강한 반응에 재인의 어깨가 움칠 떨린다. 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그들이 더 가까이 다가와 버렸다. [얼굴이 창백한데?] 목소리가 굉장히 쉬어서 말을 알아듣기 힘든 녀석이 중얼거린다. 아마도 왕선민일 거다. 여름방학 동안 사진을 보고 익혔던 이름을 상기시킨다. [여재인!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인사도 안 하기냐?] 눈가를 잔뜩 찌푸리며 묻는 이 호리호리한 녀석은 백재훈. 대답이 없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게 쳐다보는 저 녀석은 나희웅. 재인은 그들의 이름을 속으로 되내며, 소리 없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안녕! 반겨줘서 고마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세 사람의 눈이 커진다. 뭐가 잘못된 걸까? 불편한 심정으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 좀 지나가도 될까?] 역시 어색하지만 야무지게 내뱉은 재인의 말에 그들이 일시에 굳는다. 그 때, 창가 쪽에 앉아있던 인학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재인아! 왔어? 교실 찾다가 헤매지 않았냐?] 인학이 먼저 재인에게 다가왔다. 그를 발견한 재인의 표정이 일시에 밝아진다. [당연하지. 나 치매 아니야.] 생긋 웃으며 인학에게로 성큼 다가가는 재인. 아까보다 더 놀란 심정으로 그 두 사람을 쳐다보는 희웅, 재훈, 선민. 두 녀석이 친했던가?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그런 기억이 없다. 인학은 누구와도 살갑게 말을 나누는 타입이 아니었다. 서인학. 그가 누군가? 늘 몰두한 얼굴로 책만 파던 녀석 아닌가? 아무래도 인학이 그 동안 재인이네 집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나 보다. 저리 친해진 걸 보니 여름 방학 동안에도 쉬지 않고 병문안을 갔나 보다. 재수 없는 기회주의자 같으니! 재인이도 그렇다. 해인 선배 말만 듣고 아무래 땡겨도 병문안을 자제했을 뿐인데, 그런 고도의 인내력을 발휘한 자신들한테만 저리 서먹하게 대할 건 뭔가? [에이, 더럽게 아프네. 존나 재수 없어!] 그 때, 승진이 나타났다. 붕대로 칭칭 감은 팔을 휘저으며 교실 앞문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재인을 발견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딱 벌린다. 반면 재인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슬쩍 피해 버린다. 반가움에 다가가다 그 외면을 당하고는 자리에 우뚝 서 버린 승진. 갑자기 재인 더러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제 저 빈 책상에 튀어나온 못 있잖냐. 그 못 대가리가 내 살을 케잌에 묻은 생크림처럼 푹 덜어냈거든? 누가 호 해주거나 소주를 들이부으면 요 생지랄하는 통증이 싹 토낄 것 같은데…….] 재인의 눈치를 힐끔힐끔 봐가며 말하던 승진은, 크게 팔을 휘두르며 저 쪽에서 신호를 보내는 희웅 무리를 발견한다. 입 모양으로 '왜?' 라고 묻지만 돌아오는 답은 어깨의 으쓱거림뿐이다. 이유는 그들도 모른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타난 재인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단호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들을 대했다. 나중에서야 재인이 수술 후 기억상실 증후를 보인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예전에 자신들을 오해하고 미워할 때의 기억만 남았나 보다. 억울했지만, 따질 수도 없는 일로 서로 힘들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희웅 무리는 모든 것에 낯설어할 재인을 위해 시간을 주려고 노력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 끝내 그의 미소를 얻는 데 성공했다. 뭐 그렇다고 태양이 있을 때만큼 친근하게 굴진 못했지만. 희웅과 선민, 재훈은 되도록 재인을 조심스레 대했다. 하지만 승진은 아니었다. 예전처럼 서슴치 않고 그를 찝적거렸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무모함은 세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의 승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재인, 칼 하고 자 있냐?] [바로 돌려줘. 지난번처럼 가져가 버리면 곤란해.] [지난 번, 뭐?] 승진이 묻자,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는지 재인이 '응?' 하고 고개를 든다. 이마를 약간 찌푸리는 표정에 승진이 서둘러, '반지?' 하고 되묻자 대답이 없다. 그렇게 잠시 멍해졌다가, '으응.' 하고 대답하는 재인. 승진은 그 모습에 왠지 숨이 탁 막힌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혹 잃어버린 물건을 찾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를 때랑 비슷할까?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걸 혼자 모를 때, 마 약이 오르는 것하고는 어떻게 다를까? [야, 그거 내가 돌려줬잖아!] [그랬나?]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재인. 그렇다면 혹시 태양도, 남태양도 잊은 걸까? [그럼! 내가 네 바늘한테 줬는데! 네가 못 받았으면 그건 니네 바늘 책임이다. 난 분명히 줬어.] 잔인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다. 왠지 화가 난다. 재인도 밉고, 태양도 밉다. 그 중에서도 이러는 제 자신이 제일 밉다. '우씨, 왕 재수 없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인의 자를 들고 막 자리를 뜨는데, 불쑥 다가온 재인의 손이 자신의 소매를 꼭 붙든다. [승진아.] 하얗게 마디가 드러난 손이 보인다. 이름이 불린 승진은 흔들리는 재인의 눈을 들여다본다. 투명하지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다. 그건 여전하네, 여재인. 깊은 우물.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아니다.] 이윽고 그가,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승진의 소매를 놓는다. 천천히 돌아 앉는 재인의 등이 너무 가늘어서 승진은 새삼 또 화가 난다. 빌어먹을! 물어야 할 거 아냐! 니네 바늘이 누구냐고 나한테 되물어야 할 거 아냐! 언제 주었냐고도 묻고, 왜 그 자식한테 준 거냐고도 물어야지! 너 지금 하나도 모르는 눈인데, 그러면 물어서라도 기억해내야 할 거 아냐! 뭐가 무서워서 묻지도 못해? 너 여재인 맞냐? 응? 호기심만 생기면 눈이 반짝반짝해지던 그 여재인은 더 이상 아닌 거냐? 생기있는 입술로 종알종알 지식을 읊어대고, 능숙하게 정보를 캐내던 그 여재인이 아니잖아, 지금! [씨발! 니 꺼 안 써! 딴 놈 꺼 훔쳐 쓰더라도, 니 꺼는 절대 안 써!] 떨치듯 재인의 책상에 자를 던지고 승진은 교실을 나와 버렸다. 언젠가 재인과 태양을 동시에 맞이했던 밤나무숲으로 씩씩대며 달려가 괜한 발길질을 했다. 허공을 향해 마구 질러대는 발악은 허무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 험하게 변해 버렸다. 가장 중요한 부속품이 빠진 시계처럼 그들의 추억은 지난 봄에서 멈췄다. 아니, 그 봄을 잃어버린 재인의 기억과 함께 시계는 형편없이 망가져 버렸다.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컷 배워놓고도 그것을 다 잊어버리게 되면 그땐 무얼 해야 하는가? 당시 재인은 얼마든지 억울해하는 걸 그만 두고 다시 배울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가슴 속의 구멍만은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은 아직도 군데군데 채워넣지 못한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뇌의 종양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헐거움 때문인지도 모르고. 재인은 하교 후 자신과 함께 병원에 들른 인학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나 정말 승진이랑 걔네들 싫어했어?] [널 많이 괴롭혔으니까.] 인학은 재인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큰 대학병원의 신경정신과 안에서도 따로 분리되어 있는 기억연구소. 그곳의 소장이자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서덕은 박사가 바로 인학의 어머니였다. 재인의 신경외과 담당의의 추천으로 들르게 된 그 곳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마주쳤다. 인학이 재인을 알아보고 기막힌 우연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 박사는 인학이 재인의 기억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며 반가워했다. 2년 연속 같은 반을 한 인학이 재인의 학교 생활이나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 사진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기억 연상법도 이용되었지만, 최근 2, 3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재인에게 가장 큰 효과를 보인 것은 역시 최면 요법이었다. 무의식에 남은 기억조각들을 되살려 시점에 맞게 재정비시켜주는 작업. 인학은 그 과정에서 재인의 교우관계와 학교생활을 사실만을 골라 구술해주는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빈 공간 채워 넣기'나 마찬가지 원리였다. [그래? 나 괴로워했었니?] [그래 보였는데.] [……그렇구나.] 일주일에 두 번 들르는 최면실이 어느 새 익숙해진 두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능숙하게 침대와 소파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인학아.] 그 때, 침대에 누운 재인이 다시 그를 불렀다. [너 혹시 내 바늘이 누군지 아니?] [……몰라.] [짐작 가는 사람도 없어?] [없어.] […….] 조금 성급하게 느껴지는 인학의 대답.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불쑥 뱉은 그 답이 재인의 마음 속에 걸린다. [준비 됐으면 선생님 부를까?] [응.] 인학의 발소리가 문 쪽을 향한다. 재인은 다시 한 번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서인학.] [왜, 또?] 숨기지 못하는 짜증스러움이 묻어나는 대꾸. 재인은 고3인 인학의 아까운 시간을 뺏는 것이 못내 미안하다. 그는 제 어머니의 명령과 어른들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고마워.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재인의 말에 인학은 반응이 없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직하게 읊조렸을 뿐이다. [난 아는 것만 말할 뿐이야.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만. 고마워할 필요 없어. 절대 그러지 마라, 여재인. 불편하다.] […….] [후우……. 우린 친구잖아.] 조금 누그러진 듯한 인학의 말에 재인은 눈을 감고 조용히, '그래.' 한다.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어렵게 얻은 교훈도 순식간에 잊어버리듯이, 친구와 함께 나누었던 감정들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릴 수 있는 거라면……. 인학아, 이거 참 허무하지 않니? 실컷 되찾아 놓고도, 다시 또 잃는 건 아닐까? 머릿속을 맴도는 물음들은 어떻게 하면 그칠 수 있을까? 있잖아. 요새 나는 조금 두렵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아주 조금 그래.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시선도 아프고, 무언가를 기억해내길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들도 숨막히고, 아주 가끔 아무도 모르게 나를 노려보는 너의 눈길도 지금의 내겐 좀 버겁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어하는 내 자신이 제일 두려워. 도대체…… 내가 잃은 게 뭐니?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걸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 그런데도 그게 무언지도 모르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신경이 바짝바짝 말라. 사는 게 피곤해서 요즘의 나는 정말이지 순간 순간 미쳐 버릴 것 같다. [막내야, 옷 다 입었냐? 졸업식 시작이 몇 시랬지?] [오지 마. 형들 다 오지 마. 고등학교 졸업식에 어느 집이 그렇게 우르르 단체로 몰려온대?] [우리 칠성이 졸업식에 나더러 가지 말라고? 차라리 일주일 동안 화장실을 참으라고 해!] [형들 제발 그 '칠성'이란 호칭 좀 참아 줘. 정 와야겠거든 강인이 형 모자라도 좀 씌우고.] 호들갑 패밀리의 선봉에 있는 일성이 고집스레 눈을 부라리자, 재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 어린 한숨을 푹 내쉬며 당부했다. 유독히 지난했던 고교생 시절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날 아침. 모두가 권했던 휴학을 마다하고 고집스레 출석일수를 채웠던 재인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쉴새 없이 축하를 받고 축복의 말을 나누었다. [여칠……, 아니다! 여재인, 여기 좀 봐라.] [그만 좀 찍어. 졸업하는 거 처음 봐?] 타박하는 재인의 말에 더욱 눈에 힘을 주고 부라리는 일성이 형. [이 교복 너한테 참 잘 어울렸는데, 이젠 못 본다니 좀 아까운 걸.] [형한테 더 잘 맞았잖아. 난 넥타이 체질은 아닌가 봐. 답답해.] 살짝 투덜거리는 재인의 목 부근을 가볍게 만져주는 해인이 형. [우와, 쟤네들 되게 특이하게 생겼다. 저 중에 누가 짱이냐?] [그런 거 없어. 다 똑같은 친구지 뭐.] 재인의 말을 못믿겠다는 듯, '흠.' 하고 턱을 감싸쥐는 강인이 형. 억지로 씌운 베레모 밑으로 빨간 머리가 삐죽삐죽 흘러나와 있다. 그런 형의 시선이 닿아있던 저쪽에서, 희웅 무리가 재인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여재인. 너는 나 안 봐서 후련할지 몰라도, 난 너 보고 싶을 거다.] [덕분에 얌전히 졸업한다. 그거 아냐? 내가 너 좀 그리워 할 것 같아.] [어! 그건 내가 먼저 한 말이잖냐, 백재훈!] 자기를 따라했다는 이유로 옆에 선 친구의 목을 쥐고 흔드는 선민이. [졸업하니 좋으냐?] [넌?] [씹. 내가 먼저 물었다!] 끝까지 꼬장을 부려대는 승진이가 있다. 딱콩! 그런 그의 뒤통수에다 시원한 알밤을 먹이는 희웅이도 있다. [재인아! 여기 뒤에 싸인 좀 해줄래?] [어디? 여기?] 졸업앨범을 들고 뛰어와 뒷면에 추억을 새기려는 정수도 여전하다. [인학아, 졸업 축하해.] [너도. 그 동안 수고 많았다.] 멀찌감치 혼자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재인의 인사를 받고 싱긋 웃는 인학이도. 모두가 한 장소에 있었다. 그런데도 재인은 계속 두리번거리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이만 갈까?] 태인이 다가와 재인에게 묻자, 그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이 끝나고 각종 꽃다발로 화려해진 사람들의 행렬이 학교를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재인의 주변에서는 여전히 부산하게 플래시가 터져대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잃어 버린 채 내쫓기는 사람 마냥 망연히 뒤돌아 봤다. 2월의 매서운 바람에도 활짝 열려 있는 교실 창문과 오늘은 커튼이 굳게 쳐져 있는 미술실과 양호실. 길게 일자로 뻗어 있는 회색 빛 복도와 소각장으로 이어지는 한적하고 좁은 오솔길. 그보다 더 인적 드물었던 강당 뒤편과 밤나무 숲. 지금 가로질러 걷고 있는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 잊을 뻔 했던 저 옥상 옆 음악실. 그리고 또…… 저기 철봉 아래 웅덩이. 눈길 닿는 곳마다 아련한 향수가 형체도 없이 밀려왔다. 가족들의 재촉을 받고 교문을 나서던 그 날의 재인은 내내 웃고 있었다. 그 모든 장소에 웃음을 나누어주고 싶었다.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웃음을 심어두면 혹 다시 찾았을 때 그들이 자신을 반겨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은 그에게 여전히 씁쓸했고, 제법 후련했으며, 몹시 서운했다. 비는 끝도 없이 내렸다. 하늘은 사흘 밤낮을 고집스레 비만 뿌렸다. 재인은 제 방 침대에 기대 앉아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정신이 멍해질 만큼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세상은 흠뻑 젖어 색이 바래간다. 주인 잃은 강아지는 귀찮은 듯 몸을 두어번 털고 자기 집으로 삼은 박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재인은 '빗물이 개미집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거지?' 라는 허튼 생각으로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아니, 결국은 추스르지 못했다. '미안. 가지 마!' 그렇게 외치던 그는 절박해 보였다. 자신을 붙잡았던 건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표정이었다. 잔뜩 억누른 힘에 잔인하게 찧여 붉은 즙을 내듯 축축했던 음성도. 그래서 움직일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오는 그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재인은 지난 여름과 가을에 걸쳐 이미 기억재생 프로그램을 마친 상태였다. 수술 후 캄캄해진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탈출하려 노력했고 차츰차츰 성공했다. 미세한 빛줄기 같은 기억단서들을 하나씩 찾아 붙들며 열심히 접붙이기를 했다. 완벽하진 못하지만 부족한 기억은 인학의 설명과 유추를 통해서 매꿔왔다. 가족과 어릴 적 지인들 외에는 거의 알아보지 못하던 재인이었지만 곧 특유의 열혈 근성과 낙천성으로 다시 주변 사람들을 매료시켜갔다. 서먹해진 친구들 얼굴과 이름도 열심히 외웠고, 잊지 않으려고 틈틈이 메모도 했다.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말도 많이 걸고,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더 많이 웃었다. 재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 혼자 고군분투하며 어느 때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다. 형들과 함께 재수학원을 등록하고 오던 날, 까만 머리가 흠뻑 젖은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무릎 꿇던 그 순간까지도 재인은 살아남기 위해 숨가쁘게 노력하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 이후 심장이 자꾸 아프게 뛰었다. 조금 놀랐을 뿐인데 심장은 그게 아니라는 듯 끊임없이 가슴 내벽에 제 몸을 찧어댔다. 그 날은 저도 모르게 제 방에 뛰어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을 울었다. 왠지는 몰라도 그의 아픈 표정에 할퀴어진 것처럼 가슴이 온통 에이고 따가웠다. 분명 무언가 있어 보였다. 그 사연을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그의 절박함이 자신을 향한 게 맞다면 조만간 다시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재인도 서서히 포기하고 잊어갔다. <그대, 쉼 없이 나를 구원해주시오> '아아. 수신상태가 좋지 않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지금 E102 지점에서 사라진 한 명을 제하고는 모두 안전하다. 작은 별 1호! 그 쪽 상황은 어떤가? 속히 응답하라! 응답하라!' '나는 지금 9호 구름에서의 아찔한 점프로 성층권에 있소. 구조를 기다리고 있으니 빠른 조치 바라오.' 6. [갈레튼 브레튼이에요.] 진열장 건너편에서 들려온 음성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르바이트생처럼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전까지도 그가 바라보고 있던 두툼한 쿠키를 가리켜 보였다. [프랑스 사람들이 커피나 우유와 함께 즐겨 먹는 쿠키요. 맛이 달지 않고 부드러운데, 전 조금 쓰게 우린 홍차랑 같이 먹는 걸 좋아해요. 워낙 비싸서 시식은 어렵지만, 자신 있게 권해드릴 수 있는 맛입니다. 하나 드셔 보시겠어요?] 차분하게 물어오는 아르바이트생의 음성을 들으며 시선을 내리다가, 문득 그의 검지가 살짝 위로 세워져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할 때마다 나오는 저 아르바이트생의 버릇인가 보다. [그럼, 이것하고 얼 그레이로 주세요.] [네. 앉아계시면 제가 자리로 가져다 드릴게요.] 방긋 웃는 미소는 보지 말 걸 그랬다. 자신이 받았던 최초의 경고를 생각하며 상우는 낮게 한숨을 내쉰다. 저 남자는 하얀 피부와 투명한 눈동자가 순수한 소년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대학교 앞 여느 찻집과 별 다를 것 없는 이 곳이 갑자기 유명해진 이유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출중한 외모 때문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야, 진상우! 임마, 너 지각이라도 오늘 수업은 꼭 들어오라 그랬지! 강 교수님이 너 다음에도 결석하면 기필코 권총 채워 주신다고 친히 선언하셨다. 정 시간 맞추기 힘들면 문자로 대출 부탁하는 성의라도 보이던가! 친구 한 놈이 전화를 걸어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사실 상우도 오늘은 꼭 1교시 수업에 들어가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서 버린 이 남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여재인. 벚꽃 지는 4월의 봄을 갓 넘긴 햇살만큼이나 투명하고, 환한 사람. 원래는 그도 수업을 듣고 있어야 정상인 시간이었다. 교문 근처의 이 카페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곧 재인의 앞에 '가을이 형'이라고 불린 굉장히 섬세한 외모의 남자가 나타났다. 하루 대신 일해주기로 한 재인에게 연신 고맙다며, 그 송가을이란 남자가 이것 저것 일러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 몇 달 동안 재인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상우는 오늘 그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먼저 자연스럽게 다가와준 것이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는데, 그가 다시 다가왔다. [화이트 아망드 쿠키도 같이 드셔 보세요. 여기서 파는 것 중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오늘 제 첫 손님이라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쿠키접시를 먼저 놓고, 달그락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리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테이블에 놓는 순서가 반대 아닌가? 한눈에도 꽤 서툴러 보인다. [고마워요.] [으아아앗! 앗! 아, 뜨거! 어, 어, 잠시만요!] 아니나 다를까, 초짜 티 팍팍 나는 아르바이트생 재인이 찻잔을 놓쳐 버렸다. 뜨거운 홍차가 자신의 손등과 상우의 옷에 쏟아지자 재인이 저렇게 외치고 냉큼 사라진다. 다시 돌아온 재인의 손에는 차가운 물수건과 얼음 그리고 얇게 저민 생감자가 들려 있었다. 침착하게 상우에게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주고 팔뚝에는 얼음찜질 후 감자를 붙여준다. 그리고 자신은 열심히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화상 입었을 때는 생감자를 붙이는 게 최고에요. 물집도 생기지 않고요, 화끈거림도 제일 빨리 가라앉거든요. 갈아서 붙이면 즙이 더 많아 좋겠지만, 지금은 급해서 그냥 얇게 썰었어요. 어, 떼지 마세요. 아직도 좀 화끈거리죠? 그거 마를 때까지, 어, 어어……!] 상우는 자신의 팔뚝에 붙은 감자를 과감하게 떼어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큰 쪽을 내밀어 재인의 손등에 착 붙여주고, 싱긋 웃는다. [같이 붙여요. 그 쪽 피부가 더 약해 보이는 걸요.] 상우가 붙여준 못생긴 감자 조각을 잠시 쳐다보던 재인이 풋 하고 웃는다. 결국 그를 말리는 대신 반대편 손으로 열심히 테이블 위의 홍차 자국을 닦아냈다.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재인의 귀를 연한 살구빛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상우는 분주한 재인의 손길과 대비되는 굳은 자세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고운 선과 모양이 그의 얼굴 곳곳에 가득했다. 한여름 태양의 키스를 실컷 받은 가을의 사과처럼 발그레한 뺨이 사랑스럽다. 그 순간 상우는 속으로 계속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이 남자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고. 그는 결코 자신이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다. 그저 지켜야 하는 사람일 뿐이다. [정말 죄송해요. 실은 제가 이 일이 처음인데, 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어요.] [괜찮습니다. 전 이런 경험이 처음도 아니고, 큰 피해를 입지도 않았어요.] 상우는 서글서글하게 대꾸하면서도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재인의 얼굴을 마주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이처럼 당황하리란 것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삐빅. 그 때 상우가 올려둔 핸드폰에서 문자수신음이 들렸다. 곧장 액정을 확인하는 그의 미간이 살짝 가운데로 모아진다. [서비스로 주신 쿠키는 싸주시면 고맙게 먹겠습니다. 실은 제가 곧 수업이 있어서 자취방 들러 옷 갈아입고 가려면 지금 일어나야 하거든요.] 상우의 말에 재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 작게 말했다. [수업 끝나고 시간 괜찮으면 또 오세요. 제가 홍차 다시 끓여 드릴게요.] [또 엎으려고요?] 상우의 농담에 재인이 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땐 처음이 아니니까 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웃느라 움츠려졌던 그의 어깨가, 가늘지만 당당한 모양으로 다시 펴지는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상우는 어른도 되기 전에 그런 의문을 가져 보곤 했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였던가? 혹은 과연 언제가 될까?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신이 품었던 희망은 보답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언젠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생에서 누릴 것은 이미 다 누린 것만 같은 김 새는 기분. 중학교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친척 집에 얹혀 살았다. 당시에 상우는 자신이 누리는 게 모두 남의 것이란 생각에 늘 불편했다. 평생 한 편이 되어줄 것만 같던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 난 뒤, 상우는 결국 나를 가장 잘 알고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오직 저 자신 하나 뿐이란 사실을 어린 가슴에 깊이 새겼던 것 같다. 그거 하나 잊지 않고 사람을 대하고 또 사랑하면, 계산 같은 거 미리 하지 않아도 상처는 한결 줄거란 믿음도. 그래서 이 세상에 '나 자신 하나' 뿐이라는데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똑같으니까. 모두가 혼자인 거다. 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 세상은 '나 자신' 플러스 '사람들' 인 것이다. 그들은 다 덤이고, 그래서 굳이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아도 기운이 난다. 유도를 했던 상우는 체육특기생으로 대학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방을 구해 혼자 나왔을 때 먹고 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이상의 돈벌이를 물색했다. 그 때 우연히 얻게 된 일이 바로 보디가드였다. 밤낮 없이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적성에도 맞았고, 몸 쓰는 일 치고 벌이도 좋았으며, 방학 때만 한시적으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받게 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 남학생의 안위를 책임지고 보호하는 임무였다. 그 대가로 엄청난 월급과 미래의 탄탄한 직장까지 보장해준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맞은편에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바로 저 여성에게서. [상우 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 줄래요?] 말투는 부드럽지만 눈빛만은 단호하고 매섭다. 허튼 짓이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철저함이 느껴지는 분위기. 굉장히 선이 반듯한 느낌의 얼굴이다. 예쁘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그녀가 오늘, 재인과 대화를 한 상우에게 그 의도를 묻고 있다. [결국, 상우 군도 넘어간 건가?]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져 있다. 무슨 뜻인지 안다. 상우 이전에 재인의 비밀경호를 맡았던 이들이 이 일을 그만 둬야 했던 이유. 시작한지 겨우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상우도 재인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 것이다. [좋아요!] 대답이 없자, 그녀는 상우를 주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길고 늘씬한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더니 그 위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괸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한다. [재인과 친해지세요.] [네?] [그와 친해지고 바로 곁에서 지켜주는 것, 어때요?] [그래도 됩니까?] [생각해 보니 안 될 것 없겠어요. 재인도 당신이 싫지 않은 것 같으니까.]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굴까?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업가라면서, 어째서 한국에 있는 일개 대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이 만큼의 인력과 돈을 쏟아붓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재인의 안위를 지키라고 고용한 자신을 감시하는 누군가가 또 있었다니! [대신…….] 그녀는 길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마주 앉은 자리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핸드백을 들고 일어서기 전, 그 세련된 느낌의 중년 여성은 단단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상우에게서 거부하기 힘든 다짐을 받아낸다. [처음에 경고했던 것만 반드시 지켜줘요.]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전임자들에게도 똑같이 전달되었던 단 하나의 수칙. 하지만 번번히 지켜지기 힘들었던 그 명백한 경고의 말. '여재인을 사랑하지 말 것. 그리고 여재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말 것.' 상우는 그것이 자신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전제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혼자였고,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늘 곁에는 '나' 하나일 것이고, '사람들'은 그저 덤으로 얻어지는 존재일 뿐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 날 오후, 상우가 다시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재인은 그를 향해 에스프레소 위에서 사르르 녹는 생크림처럼 하얗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상우는 자신이 결코 그 에스프레소가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명심하고 되새겼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고 재인의 생활 반경에 내에 있을 법한 또래라는 잇점으로 인해 자신이 재인의 경호인으로 채택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 모르게 그 사람의 안위를 책임진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중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바로 재인의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처음엔 그들의 인상착의와 버릇, 재인과의 관계 등을 익히는 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회사로부터 받은 데이터에는 재인의 하루 패턴이 나와 있었지만, 그것만 참고로 삼으면서 재인을 보호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상우는 열심히 그를 놓치지 않고 따라 붙으면서도, 한 번도 그에게 들키지 않고 철저히 경호를 해내고 있었다. 가끔 밤길에 그의 걸음을 방해하는 취객을 몰래 물리치기도 했고, 재인이 깜빡 하고 도서관에 두고 온 노트를 챙겨 그의 가방에 살짝 넣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진짜 위험한 대상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재인을 왜 상시 보호하라고 하는지 가끔은 의아하기도 했다. 그는 적을 만들 타입 같지도 않았고, 인기가 많을 뿐이지 스토커가 붙을 만큼 유명인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차츰 상우는 저도 모르게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의뢰인은 여재인이란 남자의 신변보호 뿐 아니라, 그가 다른 누구와 깊게 사귀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상실 이전에 사귀었다던 첫사랑을 만나기 전에는 그가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못하게 알아서 막아야 한다는 것을. 참으로 철저하고 비인간적인 블로킹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에 상우는 그러한 생각으로 재인을 위해 진정 분노했더랬다. 물론 속으로만. [상우야, 나 팔 떨어질 것 같아. 이것 좀 받아 줘.] 알고 보니 동갑이고, 알고 보니 말이 잘 통해서 그들은 친구로 시작했다. 대학 4학년 졸업반일 때 처음 만난 것 치고 그들은 굉장히 빨리 가까워졌다.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진짜 우정을 만들기 힘들다고들 하는데,그것도 옛말이 되었나 보다. 외로움이 짙어진 현대인들은 인연을 만드는데 시와 때가 따로 없다. 오히려 학창시절이 더 자주 우리들을 외톨이로 만들곤 하지 않았던가. 쿠키와 홍차로 시작된 그들의 우정은 종종 같은 장소에서 리플레이하듯 해후했다. 그 후로 상우는 아침부터 밤까지 더 이상 숨지 않고 재인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꼬박꼬박 재인의 집앞에서 만나 그 앞에서 헤어짐으로써. [오늘도 가을이 형 못 나온대?] 재인이 들고 있는 쟁반 위에는 아이스티와 레모네이드, 팥빙수 등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얼른 일어나 그 쟁반을 받아들자 재인이 그 중에서 상우 몫의 커피잔을 들어 테이블에 놓는다. 그리고는 상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 아주 작게 소곤거린다. [해인이 형한테는 비밀인데, 가을이 형 또 바람 들었어.] [그 형은 그렇게 안 생겨 갖고 사람 놀라게 하고 사라지는 재주 있더라. 이번엔 어딜까?] [모르지, 뭐. 난 가끔 이러는 가을이 형 보면 진짜 부럽고 멋있어.] [그런데 해인 형한텐 왜 비밀이야?] [해인이 형이 가을이 형 사라지는 거 되게 질색하잖아. 이유는 몰라. 아무튼 가을이 형이 말하지 말랬어.] [음. 그나저나 그 덕에 네 서빙 실력은 일취월장 하겠구나.] 흘러내린 재인의 베이지 색 앞치마 어깨끈을 올려주며 상우가 싱긋 웃었다. 재인은 똑같도 웃음을 돌려주며 쟁반을 다시 받아들고 다른 테이블로 바삐 사라진다. 연한 갈색 머리가 부드러운 윤기를 발하며 그의 하얀 얼굴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주문을 받고, 손님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련의 행동들이 다른 사람이 하면 평범한 그런 일상적인 모습들인데 그가 하면 다 특별해 보였다. 그건 좀 이상한 일 아닌가? 나만 그런가? 상우는 문득 문득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하긴 바 안에서 나오지 않는 다른 고참 서버도 종종 재인을 보고 웃는다. 상우는 턱을 괴고 나른한 손짓으로 책장을 넘기며 간간히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정작 눈은 계속 재인을 쫓고 있었다. 손목 시계도 간간히 들여다 본다. 대타로 뛰는 서빙 일이 끝나면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중이다. 그 때 갑자기 저 쪽 테이블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상우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재인이 서 있는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재인의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남자의 턱에 가차 없이 주먹을 날렸다. 풀려난 재인을 자신의 뒤에 두려고 애쓰는데, 갑자기 자신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진상우. 무슨 짓이야! 손님께 사과 들려, 얼른!] 어이없다는 듯 맞은 턱을 손으로 감싼 남자를 상우는 그제야 제대로 쳐다본다. 방금 전 아이스티를 엎지른 재인의 실수 덕에 축축한 얼룩과 얼음을 뒤집어쓴 그의 상태도. 사과를 하며 닦으려는 재인을 남자는 괜찮다고 완강하게 말리려 했을 뿐이었단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달려든 것이다. 마치, 마치 재인을 어찌해 보려고 달려드는 치한을 대하듯. 반면에 자신은 그를 무찌르는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아니, 자신은 비공식 여재인 보드가드니까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건 정말 엄청난 실수다. [죄송합니다.] [이 자식들이 진짜! 아, 미치겠네.] 충분히 억울할 만 했다. 무슨 욕을 해도 달게 들을 각오였다. 상우는 자신이 왜 그렇게 바보처럼 단순하게 반응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재인이 곤란해지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다. 그래서 일행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남자 앞에서……. [미안합니다. 가지 마세요!]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상우의 완전한 읍소에 화가 난 손님은 흠칫 놀란 것 같았다. 커다란 남자가 머리를 숙이자 차마 무시하고 뿌리치기가 힘들었는지, 다행히 그 손님은 주위를 둘러보며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도 상우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손님이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휴우! 겨우 기분이 풀린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핏기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인을 발견한다. [재인아, 왜 그래?] [방금…….] [응?] 인상을 굳히고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본다. 문득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내려다보던 재인이 눈을 꼭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아랫입술이 하얀 앞니에 꼭 깨물린다. 그 모습이 지금 그가 겪고 있는 머릿속의 혼란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이윽고 재인은 다시 눈을 떠 상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상우야, 혹시 우리 예전부터 알던 사이니?] 그 순간 상우는 깨달았다. 지금 재인이 묻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의 진짜 주인이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비겁하게 재인의 인생을 감시하고 주무르는 대상을 향해서.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상우는 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저은 것과 재인이 다른 손님의 부름에 돌아선 것은 거의 동시였다. 영화관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건 재인도 상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고 싶은 영화를 보러 왔다는 기대감으로 마음은 즐거웠다. [그거 아냐, 재인아? 여기에 남자끼리 영화 보러 온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 [야한 장면도 있다던데. 그거 노리고 다들 연인끼리 왔나 보다.] 상우의 말에 재인이 붉게 터진 석류처럼 발간 혀를 살짝 내밀어 깨문다.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두리번거리는 투명한 눈동자가 어느 순간 반짝 하더니, 귓속말을 진하게 나누고 있는 연인을 가리키며 소리내어 웃었다. 거 보라는 듯 씨익 악동처럼 미소짓는 상우. 재인은 손을 들어 그의 뺨에서 무언가를 살짝 털어준다. 부드러운 손끝의 감촉이 깃털처럼 닿았다 떨어지자, 그 감각이 아쉬워 상우는 저도 모르게 열이 나는 한숨을 내쉰다. 어찌 보면 재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발견한 가장 큰 '덤'이 아닌가 싶다. 일로 만났지만, 어느 새 생활이 되어 버린 그와의 만남은 하루하루가 다 신선했다. 24시간 죽지 않는 생기와, 삶에 대한 진지한 관조와, 묘하게 시선을 끄는 열혈 모드. 사랑스런 '덤'이 아닐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아름다운 '덤'이다. 처음엔 가볍게 코웃음 쳤던 그 사랑하지 말라던 경고가 이젠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김이 필요할 정도다. 극장에 들어가 나란히 앉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편안히 기대 앉는 그가 느껴졌다. 그리고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방법은 여러가지라고 하지만, 상우는 하필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현상을 겪고 말았다. '마치 머리에 둔기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지다!' 라는. 아아,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경험한다는 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자신은 무모하게도 '덤'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아까 남자 손님에게 무턱대고 범했던 자신의 결례도 그렇고, 조금만 그에게 가까이 고개를 기울여도 빨리지는 심장박동도 그렇다. 늦잠 자던 버릇은 재인을 보기 위해 번쩍 떠지는 눈꺼풀이 가볍게 무찔렀고, 졸업 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이사이에 재인과의 이별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속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미 재인 없이는 편하게 숨조차 쉴 수 없어진 걸까? 상우는 순간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 때 재인이 자신의 손등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머리를 기울여왔고, 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더 바짝 당겨 길고 진한 키스를 퍼붓고 말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그를 붙잡고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상우는 재인이 잠잠해졌을 때에야 서서히 입술을 떼고 놓아주었고, 영화 상영 내내 거친 숨소리를 삭히지 못하던 재인은 불이 들어오자마자 영화관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날, 상우는 어김 없이 의뢰인의 호출을 받았다. 생각보다 밝은 호텔방 안에는 Antonio Carlos Jobim의 연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어딘지 익숙하지만, 자유로운 영혼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가볍고 서정적인 멜로디였다. 보사노바 특유의 낙천적인 리듬이 왠지 자신과는 섞이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앉아요. 상우 군. 난 어제서야 겨우 한국에 들어왔는데, 오늘 이렇게 흥미로운 보고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짐을 다 풀지 않은 듯 커다란 가방 몇 개가 협탁 옆에 놓여있었다. 간이 바 근처에 놓인 오디오 시스템에서 붉은 불빛이 깜빡이고, 그 옆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선 여성이 막 문을 닫고 들어서는 상우를 바라보았다. 세 번째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역시 알 수 없는 긴장이 그의 등을 타고 흘렀다. 빈틈 없는 시선이 자신을 샅샅이 살피고 있다는 건 밝은 조명이 아니라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자신에게 던진 말에 쉽게 자극되어 버리고 만다. 그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재인의 삶을 감시하고 좌지우지하려 드는 걸까? [대체 당신들이 재인이한테 바라는 게 뭐죠?] 상우의 저돌적인 질문에 그녀는 천정의 간접 조명 아래에서 벗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비웃듯 그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고는 상우를 스쳐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는 상우 군은 왜 이 일을 지금까지 그만두지 않았죠? 경고를 어기면 미래에 대한 보장은 없었던 약속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차갑다. 답을 바라는 질문 같지는 않지만, 상우는 용기를 내어 뒤돌아 그녀의 앞에 섰다. [제가 그만 뒀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또 그 자리를 채웠겠죠.] [물론. 하지만 그랬다면 재인이가 지금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는 누군가에게 정을 주진 않았겠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는 상우의 약점을 정곡으로 찔렀다. 마치 상우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눈을 이해를 담고 있지만 입술은 단호한 충고을 뱉는다. [무모한 고집이에요. 어차피 상우 군은 그와의 이별은 피할 수 없어.] [단언하지 마십시오. 인연이라는 건 신이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무슨 권리로 재인과 자신의 헤어짐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는가! 그들로 인해 재인을 알게 되고 그들을 위해 일을 했다고 해서, 재인과의 관계마저 그들을 위해 포기하고 망쳐 버릴 생각은 없었다. 재인에게 다가간 것은 순수한 자신의 의지였으니까! 그녀의 허락 때문이 아니었다. [상우 군, 재인이 친구로 남을 수 있나요? 지금까지 재인을 속였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고수한 채 그의 곁에 남을 생각이에요? 정직한 얼굴로 그의 사랑을 축복하고 지켜봐줄 자신, 있어요?] [……!] [글쎄. 그럴 수 없을 걸요. 상우 군은 이미 미로 속에 들어간 거예요. 재인이에게 솔직하거나, 그를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그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니까. 출발을 했지만, 종료지점에 닿을 순 없을 거예요. 왜냐, 이건 길이 없는 미로거든요.] [왜, 왜 나는 아니라는 겁니까?] [재인이를 아니까. 그는 고집이 세요, 상우 군. 자기 자신이 한 번 선택한 것에 있어서는 포기를 모르죠. 지금까지 지켜봐오면서 난 그가 크게 후회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 만큼 신중하고 현명한 사람이거든. 아무도 그를 꺾지 못해요.] 그녀는 어느 새 슬퍼 보였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음성에도 그 슬픔이 묻어났다. 화를 내야 하는데 그 모습에 왠지 힘이 빠져 상우는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앉아 버렸다. [재인이가 날 선택하면요? 그렇게 고집 센 재인이가 날 사랑하게 만들면요?] 절박한 상우의 말에 그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린다. 측은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각보다 어리석군요. 아니지, 그 만큼 빠졌단 얘기겠네. 후우, 이해해요. 참 놀랍죠, 우리 재인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예쁘고 멋진 존재죠. 탐낼 만 해요.] […….] [이건 분명히 해둘게요. 처음부터 내가 했던 건 경고일 뿐이지 강요가 아니었어요.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상우 군이 그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걸 말릴 힘이 내겐 없어요. 재인이에게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상우 군이 고집해도, 난 말리지 않아요.] [왜요?] [그럴 권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난 재인이 선택을 존중해요.] 이해할 수 없는 말들. 앞뒤 뒤죽박죽으로 상우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고 있는 경고일 뿐인 말들. 오히려 그런 강요가 아닌 말들이 더 상우의 마음속을 지배하려 든다는 걸 그녀는 알까? [하지만 상우 군이 걱정되는군요. 재인이가 아니라 상우 군이.] [그렇게 쉽고 값싼 동정으로 날 겁주려고 하지 말아요!] 더 참지 못하고 상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잠시 그런 그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고개를 돌린다. [당신은 닮았어요.] [그건 또 무슨……!] [그도 그랬었죠. 아직 어린 열여덟의 소년이 내게 찾아와서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답니다.] 아련한 추억에 잠겨 있던 그녀는, '뭐라고 했는데요?' 라는 상우의 물음에 다시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기만 한다. 웃고 있는데도 전혀 기쁘게 보이진 않는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그 때가 그립네요. 지금처럼 딱딱하게 변해 버린 그를 보고 있으면.] 눈가에 맺힌 수분이 그녀의 손끝에 빠르게 찍혀 나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재인이 사랑하지 말아요. 이미 사랑한다면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해 봐요. 그래도 안 된다면……, 그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착각만이라도 버려요. 그래야 상우 군 마음도 덜 다칠 테니까. 내 말 가볍게 듣지 말고.] 문득 충고하는 그녀의 음성이 다정하게 들렸다. [상우 군은 눈이 너무 정직해서 탈이야. 어쩌면 그래서 우리 똑똑한 재인이 발을 묶을 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재인이를 잘 알면서 왜 그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겁니까?] [좌지우지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 뭐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쭉 감시하는 게 옳은 일인가요?] 그녀는 좀더 빨리 던졌어야 했을 청년의 뒤늦은 질문에 그를 가만히 응시한다. 나이를 먹다 보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사람이 보이고, 상황이 보이고, 흐름이 보인다. 일종의 공식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인과응보 현상 같은 것 말이다. 쉽지 않았던 20대 이후의 삶을 살면서 무수한 거짓말을 해왔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자기 자신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나 누구 앞에서도 쉽게 동화되어 진심으로 울거나 웃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녀의 남편이나 아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렇게 점점 감정 표현이 메말라갈수록 벽이 생겨가고 있었다. 텅 비어가는 가슴 속에는, 방치되어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만이 늘어났다. 바로 그 때 나타나 꼴을 베고 물을 주며 따뜻하게 지켜준 한 사람이 있었다. 기적처럼 푸른 생기를 뿜어내기 시작하는 아들을 그녀에게 돌려준 그 한 사람. [난 재인과 약속을 했어요.] 비난하는 상우의 말을 다 이해한다는 듯 쓰게 웃었지만, 정작 입술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재인의 주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비록 지금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래서 내게 더 울면서 졸랐을 거야. 자기는 잊어도 나는 잊지 말라고. 그래서 그렇게… 꼭 돌려받아야 하는 사람 이름을 서럽게 부르며 부탁했을 거야.]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죠?]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오랜 대화를 해보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개의치 않는 듯 상우의 질문에 대답을 해준다. [하늘에.] 창가로 걸어간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아련하게 말했다. [재인이에게 완전히 돌아오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강해지고 있어요.] <해 보면 다 안다> 집을 지어 보면 목수 일을 알게 되고, 음식을 먹어 보면 제 입맛을 알게 되고, 노래를 불러 보면 음정 맞추는 법을 알게 된다. 참아 보면 절제하는 미덕을 알게 되고, 머리를 써 보면 몸이 편해진다는 걸 알게 되고, 사람을 만나 보면 그의 버릇과 일상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을 해 보면, 그것이 우리 인생을 얼만큼 지배하는가도 알게 된다. 7. 왠지 팔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재인이에게 완전히 돌아오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강해지고 있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가 상우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때문에 다시 화가 났다. 싸워보지도 않고 힘이 빠지려는 자신에게. [그도 이 모든 걸 아나요? 그 동안 고용된 사람들. 끊임 없이 누군가로부터 재인이 지켜져 봐온 일들.] 상우의 질문에 갑자기 그녀의 눈이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돌멩이처럼 단단해진다. [절대 알아선 안 되죠. 세상에 단 두 사람, 재인이와 내 아들만은.] 아마도 재인은 불 같이 화를 낼 것이다. 아니 그 강직함이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지도 모른다. 상우도 애써 이 사실을 재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처지도 못 되고. 지금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전 재인이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오늘 불렀어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상우를 향해 돌아섰다. [진상우 군. 당신을 해고합니다.] [……!] 막바지로 흐르던 오디오의 음악마저 멈추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세한 현기증을 느끼며 상우는 돌아서서 호텔방을 걸어나왔다. 하지만 그 전에 내내 참았던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방금 그 노래 제목이 뭐였죠?] ['Insensatez.' 마음에 들어요?] [어쩐지 익숙해서.] 보사노바는 재인이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언젠가 그가 이어폰을 통해 들려준 노래들이 이처럼 자유로웠다. 제멋대로 세상에 떨어져 노니는 빗소리처럼 잡히지 않는 아련함에 조금 슬펐던 기억. 이 노래는 그들에게 어울렸다. 자신이 아니라. 문고리를 잡고 선 채 상우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후에 다른 경호인을 그에게 다시 붙이실 겁니까?] [아뇨. 이제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상우 군이 재인의 곁을 지킬 거고, 또…….] 잠시 말을 멈추고 상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한다. 입가에 살짝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눈가엔 이미 흥분이 번져 있다. 그 묘한 표정만큼이나 고요함을 가장한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머지않아 곧 내 아들이 돌아올 테니까.] 극장에서 뛰어나간 이후로 재인은 상우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 앞에서 기다리는 상우를 보고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갔다. 불러도 쳐다보지 않고, 학교 안에서 마주쳐도 멀리 돌아가 버렸다. 하루아침에 버림받은 것처럼 암담했지만, 상우는 그를 포기하지 못했다. 받지 않는 전화를 하고, 답신 받지 못할 문자를 넣고, 매일 집으로 찾아갔다. 어둑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가져간 책을 읽기도 했고, 자신의 수업을 빠지고 재인의 수업에 들어가 그만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여지없이 외면과 무시를 당했지만, 상우는 그럴수록 재인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재인의 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덤이 아니었다. 더 이상은…… 아니었다. [진상우. 일어나.]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을 넘었고, 이제 겨울로 향하고 있었다. 일교차가 심해진 하루의 끝에 그 날도 상우는 재인의 집 앞 전봇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고개 들어. 너 취했니? 나 좀 봐, 상우야.] 얼마 만일까? 혹시 꿈은 아닐까? 눈을 뜨자, 재인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가만히 흔들고 있었다. 철저하긴 해도 냉정하진 않다. 냉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철저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재인은 그런 사람이다. 따뜻함이 식지 않는 보온병 같은 존재. 그를 안으려 하면 차갑지만, 막상 속을 알면 온기가 훈훈했다. [얼어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당장 일어나. 집으로 가, 그만.] 보고 싶었다, 여재인. 내 이름을 불러주는 네 입술이. 내 눈을 마주쳐주는 네 눈동자가. [어어? 너 진짜 술 마셨어?] 초조한 듯 미간을 찌푸린 재인은 하얗고 폭신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꼭 눈사람 같다. 밤이 물러가고 해가 뜨면 사르르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눈사람. [나는…… 혼자다, 재인아.] [뭐?] 기다리다 추워서 소주를 한 병 사와서 마셨을 뿐인데, 취한 걸까? 혀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상우는 재인의 눈에 자신이 한심하게 비칠 것 같아 고개를 숙인다. 축 늘어진 팔을 가만히 무릎 위에 얹고 땅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뱉어낸다. [난 원래 혼자고…… 너는 덤이었지. 내 예쁜 덤.] [상우야, 안 추워?] 재인이 나직하게 물어온다. 그의 입에서 하긴 김이 새어나온다. 추운가 보다. 자신은 재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 미치겠는데, 그는 아닌가 보다. 고개를 젓자, 재인은 할 수 없다는 듯 털썩 자신 앞에 주저 앉아 버린다. 그리고 똑같은 자세로 무릎을 모아 안고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는 거다. [네가 처음 나한테 서비스로 준 그 하얀 색 과자처럼.] [아망드 쿠키?] [그래. 아망드 쿠키. 되게 잘 부서지더라. 그래도 나 다 먹었다. 네가 싸준 거라고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 먹었었다. 아까워서. 바닥에 떨어진 것도 손에 침 묻혀서 찍어 먹고, 옷에 묻은 것도 다 핥아 먹었다.] [잘 했어.] 차분하게 돌아오는 칭찬. 마음에 '호' 해주는 듯한. [재인아, 나는…….] [그래, 너는?] [나는 말이다…….] 시작도 안 했는데, 찝찔한 눈물이 눈을 시큰거리게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 차암 소박한 편이었거든? 다른 놈들은 대통령이다… 박사다… 뭐다… 잘도 지껄이는데,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내가 사랑하면 그 사람도 날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고 적었었어. 그 땐 어린아이답지 않게 꿈이 참 귀엽다고 담임선생님이 칭찬해주셨는데, 하아! 멍청했던 진상우. 그게 제일 건방지고 야무진 꿈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더라고.] […….] [흣. 또 인상 찌푸린다. 그러지 마라, 여재인. 나 쫌 취했다고 그렇게 노려보고 하지 마라. 혹시 웃냐? 그것도 하지 마. 너는 그게 왜 제일 이루기 힘든 꿈인지도 모르잖냐. 안 그래? 굳이 원하지 않아도 사랑을 실컷 받고, 사랑 받는 게 굉장히 당연하고 익숙한 너 같은 사람은 절대 알 리가 없지. 그런 주제에 남의 꿈을 그렇게 비웃으면 안되지.] [그래. 나는 잘 몰라. 이상하겠지만.] 차분한 재인의 대답에 상우는 짧게 콧김을 내뿜는다. [흥! 안다면 그게 더 이상해.] [그런데 진상우. 너는 내 꿈 뭐였는지 아냐? 이루기 힘든 꿈 같은 거, 너만 있었던 거 아니다.] [……!] [나는 어릴 때부터…… 뭔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꼭 병이 났어. 원하는 마음을 감당할 능력도 없는지 금세 아프곤 했거든. 운동회가 그랬고, 수학여행이 그랬고, 친구들과의 외박 계획이 그랬다. 잔뜩 기대하다가 그 일을 목전에 놓고는 그냥 시름시름 앓게 되거든. 그 공식이 너무 빤해서, 나중에는 얼마나 지겨웠는지 아냐? 날 때부터 건강했고, 언제든 내킬 때면 자유롭게 뛰고 구를 수 있는 너같은 사람은 결코 모를 거다. 알 리가 없지. 맞아. 알면 더 이상한 거야.] 상우는 말을 잃었다. 재인이 속의 얘기를 들려준 건 처음이었다. 한 자라도 놓칠까 봐 신경을 바싹 모아 듣는다. 인간은 꿈만 꾸어도 행복하다고 한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꿈만 간직하고 있으면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지만 꿈을 가질 때마다 아파 버리는 사람의 얘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런데 제일 웃긴 게 뭔지 아냐? 내가 원하면 원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더 많이 아팠다는 거야. 운동회는 그러려니 했으니까 반나절만 누워 있어도 금세 회복이 됐는데, 수학여행은 3박 4일을 꼬박 앓았잖냐. 그래서 우리 형이 나한테 그랬었다. '재인이, 여행 정말 많이 가고 싶었구나.' 하고.] [수학여행 별 거 없어.] [맞아.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 하지만 그런 말도, 가 본 사람들이나 할 수 있잖아.] 먹먹해진다. 상우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재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다. 정말 못살겠다. 술을 핑계로 그에게 투정부린 자신이 부끄러워 못살겠다. [재인아…….] […….] [너 언제 제일 아팠냐?] 어쩌면 요즘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서로 냉전 중인 요즘 상우 자신이 그랬듯이, 그에게도 가장 힘든 건 바로 최근이었다고. 하지만……. [……고3 때 봄. 다들 그 때 내가 죽는 줄 알았대.] 세상에는 기이한 동물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재미로 그 기이한 동물들을 흉내 내기도 한다. 기이한 음식을 소개하고, 그 음식을 먹어 보기도 하고, 기이한 언어를 배우거나 기이한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무엇을 흉내 내고 있을까? 상우는 분명 기이한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작해서는 안 되는 감정에 기꺼이 몸을 던져 자신을 괴롭히다니. 출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중단하길 거부하며 미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 두 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견디기 힘든 간격으로 찾아오는 통증이 잠을 깨운 것이다. 마치 골을 죄다 녹이려는 듯 깊게 욱신거리며 찔러왔다. 그건 거대한 공포였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지만 얼음은 없다. 이 잔인한 통증을 가라앉힐 만한 차가운 건 닥치는 대로 꺼내 턱 쪽에 대본다. 망할 놈의 사랑니! 신경을 갉아먹고 뇌를 다 파먹고도 시원찮을 듯한 아픔. 사랑니의 고통이 맹렬한 기세로 상우의 머리를 덮쳤지만, 사실 몽롱하고 우리하게 아픈 가슴 쪽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적어도 사랑니로 인한 통증은 간격이라는 미덕을 아는 놈들이니까. 그래서 재인에게 SOS를 칠 여력도 남겨준다 이 말이다. [상우야, 많이 아파? 진통제 같은 건 미리미리 사 놓지.] 약국 문이 다 닫혔을 시간, 끙끙거리다 참지 못하고 상우는 재인에게 전화를 했다. 한밤중에 찾아온 재인은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의 비상약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온 몸 팔다리 다 쑤신다기에 작용하는 신경계 종류 별로 다 가져 왔어. 일단 두 알 먹어.] 차가운 물컵을 손에 건네주는 재인에게 입을 아 벌렸더니, 색상과 크기가 다른 조그만 알약 두 개를 혀 위에 올려준다. 부스스하게 치솟은 머리를 가만 보다가, '많이 아픈가 보네.' 한다. 재인은 이불 밑에 손을 넣어 보고는 보일러 온도를 조금 높인 다음, 얼음통에 생수를 부어 냉동실에 넣어둔다. [아침 일찍 꼭 치과 가.] [재인아.] 물기 어린 재인의 손을 잡아다 부어오른 뺨에 얹자 시원했다. 상우가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면, 재인도 말 없이 그를 응시해온다. [고맙다.] 재인은 분명 상우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극장에서 강제로 입술 뺏기 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눈을 들 때마다 마주치는 상우의 눈에 사분하게 웃어줄 때 느꼈었다. 재인은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먼저 말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너 아니었으면 나는 오늘 죽어 버려서 아침 해도 보지 못했을 거다.] [엄살 같은 거 못 떠는 줄 알았더니.] [진짜 아팠어. 귀찮게 해서 미안. 그래도 네가 와줘서 나 행복하다.] 저는 세상에서 혼자라고, 그렇게 징징댄 효과를 보는 것일 게다. 차마 아프다는데 혼자 두지 못해서 착한 재인이 두 손을 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재인이 저 때문에 달려와줬다는 건 역시 기뻤다. [사랑니는 죽을 병 아니야.] [죽을 것처럼 아팠어. 지금도.] 상우를 자리에 눕히고 재인은 그 곁에 앉는다. [바보. 사랑니는 말이야, 영어로 'wisdom teeth'라고도 해. 지혜를 가진 어른들에게만 아픔을 주니까. 그런데 너는 웬 어리광이야?] 재인은 상우의 이마를 가만히 쓸어올려주면서 말을 이었다. [사랑니는 진화론적으로 보면 퇴화 과정에 있어. 사람들 턱이 갸름해지면서 치아 개수도 그 만큼 줄어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비뚤하고 기형적으로 자란 거거든. 아마도 어느 세대부터는 사랑니로 고생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지겠지? 너한텐 좀 억울한 일이겠지만, 원래 과도기에 있다 보면 혼란은 피할 수 없어. 왜 곧 없어질 것 때문에 이토록 아파야 하는가! 이런 생각도 불필요해.] [넌 왜 모르는 게 없냐? 아무튼 잘난 척할 기회는 절대 안 놓치더라.] 투덜거리는 상우를 보면서 재인은 훗 웃어버린다. 잔뜩 찡그린 상우의 콧등을 꼬집으며 그가 작게 말했다. [살만 한가 보구나, 진상우. 약효 빠르네.] 네가 와서 그래, 재인아. 다른 무엇보다도 나한텐 네가 제일 강력한 진통제니까. [알고 보니 더 빌어먹을 사랑니다! 나는 아프기만 하고 보람은 없잖아.] [보람이 왜 없어? 너의 아픔을 딛고 다음 세대가 평화를 얻을 텐데.] 그건 살신성인들에게나 쓰는 말이잖아. 재인아, 나는 중간이 되고 싶지 않다. 시작도 끝도 되지 못해 끙끙 앓는 나에게 너는 보람을 느끼라고 말하지만, 나는 과도기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특히 너에게만은……! [지난번에는 미안했다.] [응?] [극장에서. 너무 늦었지만 사과는 해야지.] 상우는 아무 말 없는 바라보는 재인의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 쑥스럽지만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부탁한다. [다신 그런 짓 안 할게. 그러니까 너, 내 옆에 꼭 있어줘.] 대답이 두려워 돌아누워 버린 상우는, 그 상태로 움직임을 멈춘 재인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 재인이 느릿하게 건넨 말의 뜻을 제대로 짚지도 못했다. [너는 가끔, 언젠가 본 듯한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 같은 걸 말하곤 해.] 침묵 속에서 몇 분이 흘렀다. 재인은 어느 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다시 낮게 묻는다. [참 이상하다, 상우야. 네가 그럴 때마다 심장이 하도 가슴을 두드려서 여기 안 쪽에 멍이 드는 것 같아. 대체 이건 뭘까? 무슨 뜻일까? 혹시 너는 아니?] 대답이 없자 재인은 몸을 일으켜 상우의 잠든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까지 이불을 당겨 여며준다. 불을 끈 재인은 캄캄해진 어둠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상우 곁에서 소리 없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내쉬어 본다. 자신의 심장소리에 상우가 깰까 봐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가만히 덮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은 길가에 버려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세상의 많고 많은 돌조각들 중에 그것을 집으로 주워온 미켈란젤로가 때때로 그 돌에게 물었단다. '거기 돌 안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고. 모세가 그에게 대답을 했는지, 아니면 미켈란젤로가 알아서 그를 발견해냈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상우는 그 얘기를 항상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재인도 흔하디흔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주워주길 바랐다. 시간이 날 때마다 '너는 누구니?' 이렇게 궁금해하고 물어주길 원했다. 속에 숨겨진 자신을 발견해주고 당당히 끄집어내줄 수 있는 이가 재인이길 기도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그저 그런 돌조각으로 남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미켈란젤로가 그 대리석으로 모세가 아닌 다른 인물을 끄집어내려고 했다면 그 돌 안의 모세가 반항을 하여 돌부스러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은 그런 모세를 닮았다. 그러나 모세는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욱 하찮은 돌부스러기가 될지도 모르는 운명.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분명 여기에 있다. [뽑지 말고, 그냥 치료만 해주세요.] 치과 진료실의 체어에 누워 고집스레 말한다. 마스크를 쓴 의사는 아파서 퉁퉁 부어 있는 상우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대기실엔 환자가 열 명도 넘게 밀려 있는데, 의사는 그를 보는데 십 초나 허비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뽑아야 할 겁니다. 지금은 일단 어금니 신경 치료만 할 테니, 통증이 재발하면 또 오세요.] 의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을 땐 자신이 이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상우의 뇌리에 더 깊숙하게 송곳같은 협박을 찔러넣었다. '언젠가는 뽑아야 할 겁니다.' 아무리 미련해 보여도,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지금은 재인을 놓을 수 없다. 재인은 돌멩이를 주어다 놓고 아직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그 안에서 해방시켜줄지도 모른단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극악한 확률의 불씨만 보여도 사랑은 꺼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열을 내며 발버둥친다. <사랑아, 너에게 묻는다> 이슬로 세수하던 꽃잎 마냥 네 눈물로 길을 닦아 고이 떠난 임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별이 너무 아득하여 너도 이 품속의 날개처럼 잠이 들었구나. 그의 등에 대고 다짐했던 말은 사라지고, 화석처럼 남은 네가 나는 왜 이리도 낯설까? 8. 오랜 만에 재수할 때 친구인 지효를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재인은 먼저 가라며 인문관 앞에서 상우의 등을 떠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사라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 [여재인! 이 비싼 인간! 잘 살았냐?] 시원시원하게 내질러진 소리가 날아왔다. 어느 새 가까이 선 지효가 재인의 어깨에 팔을 올린다.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재인의 환한 얼굴. 반가움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에서 물처럼 넘친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손 한 번 흔들어줘라. 우리 과 후배, 고은영. 네가 좋단다.] 거침없는 지효의 소개에 얼굴이 발개지는 여학생이 보인다. [자, 가자! 오늘은 재인이가 쏘는 날! 은영이 너도 따라 붙으려면 요령껏 재인이한테 잘 보여 봐.] [우린 술은 안 마시니까 밥만이라도 괜찮다면 같이 가요.] 재인이 예의바르게 권한다. [야! 벌써 너는 쟤가 여자로 보이냐? 후배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닭살 돋게 웬 존대야?] [오랜만에 네 닭살 구경하려고 그랬지. 팔 한번 쭉 걷어 봐라, 성지효!] [흠. 비위가 많이 강해졌다 이거지? 에잇! 내가 진짜 이건 아무도 안 보여줄라 그랬는데, 눈 딱 감고 공개하겠다. 준비 됐느냐, 여재인? 이 미모의 여성이 직접 걷어 보여주는 숨겨진 속살! 다리 쪽 피부가 훨씬 더 예술적이니까, 각선미와 닭살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을 거다.] [어맛! 언니, 하지 마요. 여기서! 아아, 제발 그러지 마요!] 사람 많은 인문관 앞 대로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짓궂은 선배를 말리는 여자 후배 고은영과 깔깔대고 웃으며 허리를 휘는 여재인. 그리고 후배의 팔을 뿌리치는 척하면서 재인의 웃음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성지효. 그들은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발랄한 대학생의 모습으로 정문을 나섰다. [요즘도 나쁜 꿈 꾸냐?] 은영을 집에 먼저 보내고, 얘기나 하자면서 친숙한 카페에 들어왔을 때였다. 가을이 끓여준 커피를 홀짝이며 지효가 지나가듯이 다른 얘기 사이에 물어왔다. 재인은 테이블 가운데 놓인 딱딱한 비스코티를 만지작거리다가 오히려 되묻는다. [너는? 요즘도 꿈같은 거 안 꾸냐?] [대답하기 싫으냐?] [꿈은 꾸어도 된다, 지효야. 어차피 깨어날 텐데, 한 번씩 쫌 꿔주면 어때?] 서로 다른 말을 한다. 각자 자기 얘긴 빼고 상대의 얘기만 한다. [재인아, 나 졸업하면 내년에 집 나올 거다.] [기어이 결심했니?] 재인의 물음에 지효가 갑자기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친다. 이 쪽을 돌아보는 가을의 시선에 애교스런 웃음을 쏴대며 무마하긴 했지만. [그 집에서는 꿈이 안 꿔져서 그렇잖냐! 내 친구 재인이가 꿈 좀 꾸라는데, 거기서는 도무지 희망이 보이질 않아서!] [아직도 다시 법대 가라고 하셔? 너 말발이 세긴 하지만 논리는 없는 편인데.] 재인의 말에 지효가 발끈한다. [왜 이러셔! 논리의 지존 앞에서. 내가 그것 때문에 변호사 못하겠다는 건 줄 아냐?] [넌 말보다 글이잖아. 글로 사람 죽이고 패고 희롱하면서 분풀이, 화풀이 다 하는 녀석이잖아.] [야야,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내가 언어폭력배인 줄 알겠다. 쉿! 제발 쉬잇, 여재인!] 고개를 숙이고 재인이 키득거린다. 그런 그의 이마를 지효가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눌러 얼굴을 들게 한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지효의 질문. [그래서, 악몽은 쫑인 거야?] 이번엔 대답을 피할 수 없겠다. [너 신춘문예 당선 되면 부상으로 줄려고 안 버리고 매일 꾼다.] [에이휴! 뭐가 그렇냐?] 재인의 대답에 실망한 듯 지효가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쉰다. [거짓말이야. 매일은 무슨. 그것도 주기가 있지. 요즘은 서 박사님이 시킨 대로 자가훈련 중인데 그러려면 꿈을 꿔야 해. 꿈 속에서 주머니를 찾아 그 안에서 기억조각들을 꺼내는 거야. 일종의 마인드콘트롤 법이지.] [뭐? 그 딴 게 도움이 된다는 거야?] [글쎄. 아직은 모르겠어.] [아아, 바닥이다! 뭐, 너는 고3 때 종양 덜어내고 몸무게라도 줄었겠지만, 나는 그 때부터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가 내 어깨에 올라타고 앉아 있잖아. 덕분에 비행 청소년 되고 지금까지도 싸가지로 찍혀서, 숨통이 졸려 돌아가시겠다.] [윽. 상상하니까 되게 무섭다.] [끔찍하지? 나도 그래. 자유로운 내 영혼을 잠식하는 도깨비가족들로부터 하루 빨리 독립해야지. 오늘부터 그게 바로 내 꿈이다! 하하! 목표가 생기니까 기운도 난다. 젠장!] 정말 기운이 나는지 목청 높여 큰 소리로 외치는 지효. 재인은 그런 친구를 안타까운 눈으로 가만히 지켜 본다. 조금 전 그녀가 재인에게 던졌던 것과 비슷한 눈이다. 눈이 마주치자 그 눈빛을 들키지 않으려고 재인이 급히 말을 받는다. [나도 우리 호들갑패밀리한테서 독립이나 할까?] [미쳤냐? 그렇게 따뜻하고 정상적인 가족들이 어디 흔하냐?] [내가 정상이 아니니까 그렇지.] [하긴, 너는 비정상적으로 인기가 많지.] 쓴 입맛을 다시며 지효는, 재인의 손에 여태 쥐어져 있는 비스코티를 가로채 입에 물었다. 오드득. 씹히는 소리도 요란하게 과자는 계피 향을 풍기며 지효의 입속에서 산산조각 났다. [지효야.] [……?] 재인이 이름을 부르면, 지효가 긴장한다. 아무리 어두워도 친구의 표정이 그릴 수도 있을 만큼 잘 보인다. 지효는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기다린다. 그리고……. [나 남자가 좋은가 보다.] 재인이 들려준 짧은 문장을 소화하기 위해, 입안에 가득찬 비스코티를 천천히 씹기 시작한다. 낮게 잠긴 침묵 속에서 커피를 꿀꺽 마셔 넘긴 그녀가 드디어 신중해진 눈으로 재인에게 물었다. [네가 게이라는 말이냐?] [그건 잘 모르겠고,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람이 남자다.] [그게 그거 아냐?] [그게 그거야?] [그게 그거 아니면 뭔데?] [그럼 그거가 맞나 보다.] 재인의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까 그 은영이 한 번 만나 볼래? 착한 애야.] [지효야.] 재인이 한숨과 함께 이름을 부르자, 지효의 말이 다소 빨라진다. [나처럼 억세지도 않고, 말도 논리적으로 잘하고 무엇보다 예쁘잖아. 개강총회 때 걔 술 먹은 거 봤는데, 복숭아처럼 볼이 발개지더라. 그 뒤로 우리 과 남자 동기들과 선배들 은영이 어쩌지 못해 난리야. 결론은 섹시하기도 하다는 건데! 어때? 만나 볼래? 걔 안 땡기면 다른 애라도…….] [지효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내가 알아 듣고는 있는데…….] [젠장! 빌어먹을! 지랄! 부호! 씨뎅! 아호!] [너 뭐 하냐?] [시끄러! 나는 지금 온갖 신들의 똥꼬에 똥침을 날려도 시원찮다!] [그러다 벼락 맞아 죽으려고.] [벼락은 이미 맞았고, 안 죽은 거 보니까 한 번 더 맞으려나 보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효의 주먹이 부르르 떨고 있다. 재인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묻는다. [나…… 괜찮을까?] [……그럼!] […….] [괜찮지 않고! 여재인이 게이건 아니건 간에 누가 감히 널 미워하겠냐?] 어둑한 실내 조명을 한 뼘 정도 밝히듯 지효가 환하게 웃어준다. 재인은 살짝 입술을 움직여 웃으려다 말고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도 괜찮을까?] [누구? 진상우?] [어, 어떻게 알았어?] [그 자식 몇 달 전부터 너 보는 눈빛 심상치 않았어. 내가 바보냐? 이래봬도 이 몸이 요즘 오금이 저리는 연애소설을 집필 중이시다.] […….] [걱정 마라. 그 자식도 괜찮을 거야. 왜냐하면…….] 지효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입술을 살짝 안으로 당겨 물었다. [진상우는 이미 고민 끝냈을 거거든.] '끝내주는 대박 연애소설가'라는 꿈이 생겨버린 지효는 얼마 전에 우연히 보았던 진상우의 표정을 기억해 냈다. 학교 내 서점에서 인사하려고 다가가다 문득 자신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장면. 재인이 책을 하나 골라 펼쳐 들고 서 있는 등 뒤에서 상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도 채워지지 못한 허기와 짙어질 대로 짙어져서 검게 타들어간 갈망이 숨막히게 채워져 있던 눈빛. 지효는 놀란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그대로 뒤돌아 나왔었다.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재인의 뜻이었다. 그가 진상우를 받아들인다면, 지효도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앨 사랑해?] 몇 번의 호흡을 한 번에 뭉쳐서 불쑥 지효가 묻는다. 닭살 어쩌구 하면서 소설에조차 잘 넣지 못하는 단어를 뱉는 그녀다. 재인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신중하게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 보려고.]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며 답을 찾는 그의 작업이 지효의 눈에도 투명하게 보이는 듯 했다. 겨울의 초입이었다. '온정'이란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12월, 베풀든 나누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건 늘 당연했다. 그것은 아직 친구도 연인도 아닌, 당시의 재인과 상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치 못했던 어느 날의 사건에서부터 급전된다. [어이, 거기! 여기서 뭐 해?] 체육학과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재인은 체육관 내 스탠드에 앉아있었다. 문득 이쪽을 향해 커다랗게 질러오는 목소리에 그는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거인처럼 크고 둔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차림을 보니 수위는 아닌 것 같다. 아니. 어딘가 낯이 익다. 얼마 전부터 종종 눈에 띄던 남자. 혹시 뒤따라온 걸까? 체격을 보니 체육학과 학생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저렇게 자신을 노려 보고 있는가? 이 체육관이 체육학과 소속이라 캠퍼스 내에서도 좀 외진 체대 근처에 있긴 하지만 엄연히 학교 소유였다. 그건 곧 이 대학 학생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일 텐데. 거칠게 문을 쾅 닫고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재인은 가만히 책을 덮었다. [혼잔가?] [친구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이 상우의 종강 날이었다. 재인은 이미 종강을 했고, 둘다 4학년이니 이제 졸업만 남았다.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수업을 받은 기념으로 생전 처음 술을 마셔보자 했었다. 재인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책을 펼쳤다. 상우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이 넓은 공간에 혼자일 때보다도 불안해졌다. 남자는 거대한 덩치를 하필이면 재인의 바로 옆자리에 떡 걸치고 앉았다. 위험한 기운이 스멀스멀 팔을 타고 전해진다. [저한테 무슨 볼 일 있으십니까?] 고개를 돌려 천천히 물었다. 남자는 깍지를 낀 손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다가, 웃음기 없는 재인의 질문을 받고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볼 일이라…….] 아무래도 안 되겠다. 길게 빼는 발음이 심히 불쾌했다. 재인은 책을 가방 안에 넣고 재빨리 일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도망치듯 멀어지는 재인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입구에 도착해서야 재인은 그가 들어오면서 문을 잠갔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린다. 재인은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체육관에 문은 여러 개다. 곧장 다른 문으로 가기 위해 뒤로 돌았다. 하지만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어느 새 다가왔는지 남자가 바로 앞에서 재인의 향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너처럼 꼴리게 생긴 놈은 처음이다. 그런 말 많이 듣지 않냐?] 저열한 말을 툭, 툭 뱉으며 재인의 턱을 확 움켜잡는다. 벗어나려고 몸을 트는데 그의 두터운 팔이 재인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렇게 단둘이 조용하게 있으니까 너도 흥분 되냐? 볼이 빨갛잖아, 미소년.] [놓으세요!] [오랜 만에 학교 온 보람이 있었어. 너 되게 눈에 띄더라. 그렇다고 부끄러워 할 건 없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보내주세요!] [나도 너하는 싸우기 싫어. 흐응, 요것 봐라. 목에 힘줄이 파랗게 돋았네.] 남자의 손이 갑자기 재인의 목을 더듬어 내리며 곧장 옷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그 차갑고 생소한 감촉에 화들짝 놀라 떨면서 재인은 더욱 단단히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곧 있으면 상우가 올 거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버티면 될 거다. 갑자기 남자가 재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뒤로 확 꺾었다. [흐읏!] [음, 그 소리 마음에 드는데?] 다가오는 남자의 입술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하얗게 바래지는 머리를 마구 흔들어 탁한 분을 털어냈다. 그리고 주먹에 온 힘을 모아 죽을 각오로 그의 턱을 때렸다. 소리는 꽤 컸는데,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거대한 손이 인정사정 없이 재인을 후려쳤다. 순간 얼얼해진 얼굴과 마구 뒤엉킨 머릿속에서 마비된 듯한 통증이 찌르르 흘렀다. 쓰러지려는 재인을 남자는 다시 휘어잡고 끌어당겨 차갑고 역한 입술을 밀어붙였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재인은 마구 몸부림치며 입속을 파고드는 그의 혀를 꼭 깨물어 버렸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타격을 받았는지 일시에 남자가 떨어져 나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힘껏 밀친 뒤 재인은 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만에 다시 뒷덜미를 확 붙들리고 말았다. [이 새끼, 어딜 튀어! 맛만 좀 보자는데!] 갑자기 험악해진 욕설과 함께 거대한 주먹이 다시 재인의 얼굴로 날아왔다. 기절할 것처럼 지독한 아픔을 제대로 느껴볼 사이도 없이 다시 배가 걷어차였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코에서 뜨끈하게 흘러내리는 건 너무도 익숙한 피냄새다. 다시 한 번 날아오는 남자의 주먹을 잔뜩 몸을 낮춰 간신히 피했다. 재인은 그대로 기듯이 위치를 이동해 반대쪽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괴성을 지르며 남자가 쫓아오는 것 같았지만, 이미 재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직 달려야 한다는 생각 뿐. 코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 셔츠를 적셨다. 가방은 아까 그 자리에서 뒹굴고 있을 테지만 재인은 출구만 보고 뛰었다. 간절한 기도 대로 기적이 일어난 걸까? 자신이 닿기도 전에 그 문이 활짝 열린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의 품에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재인아!] 익숙하게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음성을 듣자마자, 재인은 깜빡거리던 불을 끄듯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그것은 상우의 해고 이후로 재인에게서 경호가 사라진 직후의 일이었다. 그 날 밤, 유치장에서 나온 상우를 기다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경관이 다가와 그에게 하얀 봉투를 쥐어주며 낮게 충고해줬을 뿐이다. 아무리 화가 나는 상황이라도 주먹은 상대가 알아들을 정신이 있을 때만 쓰는 거라고. 같은 학교 학생이자 체육학과 선배라는 남자. 그를 찾아갔었다. 텅빈 놀이터로 불러내 의식을 잃은 후까지도 피가 흐르는 주먹을 쉬지 않았더니, 누군가가 신고를 했나 보다. 상우는 자신에게도 그런 광기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경관이 건넨 봉투를 열자, 작은 메모와 함께 반듯하게 접힌 수표가 나왔다. 누가 준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필체였다. 이렇게 빨리 자신을 빼낼 수 있는 정보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 놀랍게도 그건 기대하지도 않았던 퇴직금이었다. 상우는 이해할 수 없는 심정으로 수십 번이나 전 의뢰인의 메모를 읽었다. <그를 사랑하고 싶다면 더 당당해져 봐요. 재인은 보기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호의였다. 퇴직금이라 하기에도 과한 액수였다. 자신의 아들이 곧 올 거라면서, 상우와 재인에게 되레 커밍아웃을 하라는 건 무슨 의도인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어 상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수표를 낡은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되면 그 때 꼭 돌려주리라 다짐하면서. 그녀가 다시는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란 생각을 미처 못했던 상우였다. 다음 날 재인은 일어나자마자 상우를 불러냈다. 얼굴 군데 군데 붉은 멍이 들었지만 집에서 마냥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호들갑패밀리를 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걱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너 설마 그 사람 다시 찾아간 거 아니지?] [그건 왜?] 불퉁하게 되묻는 상우를 재인은 신중한 눈으로 살핀다. 멀쩡해보여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다칠까 봐 그러지. 그냥 현상 유지하는 게 난 좋아. 너 괜한 치기심에 불타서 달려가고 그러지 마. 난 괜찮으니까.] [정말 괜찮아?] [뭐 그 정도 갖고 무너지겠냐. 어제는 좀 당황하고 놀라긴 했지만, 별 거 아니었어.] 그게 별 거 아닌 인생이라니, 그거야말로 참 별로다. 상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제 그 남자 무슨 격투기 선수 같던데. 주먹 맛이 꽤 찐했어.] 자신의 멍든 턱을 쓰다듬고 있는 재인을 바라보다가, 상우는 문득 어제 자신의 어깨를 내리치던 그의 주먹을 떠올렸다. 아프긴 했지만 생각보다 무뎠고, 휘두르는 공격의 정확도도 떨어졌던 것 같다. 혹시……! 상우는 순간적으로 흘러든 생각으로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자신의 옛 의뢰인은 이미 짐작했던 걸까? 상우가 그 남자를 찾아가리란 걸? 그래서 미리 남자에게 약 같은 거라도 먹여 조치를 취해 두었던 건 아닐까? 정상적으로 붙었다면 싸움은 더 길어졌을 테고, 반대로 상우가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두려워진다. 상우조차 그걸 모르게 할 만큼 철저한 사람들이라니! 상우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느끼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재인은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평범한 거리의 모습을 내다보고 있다. 하얀 옆모습이 참 곱다. 세상을 지켜보는 눈은 사려 깊고 선선한 이해를 품고 있지만, 세상의 때는 감히 닿지 못한 순결한 아름다움이 그에게는 있었다. 의뢰를 받고 처음으로 그를 보았을 때부터 줄곧 눈을 떼지 못했던 이유다. 상우는 진심으로 재인을 숭배했다. [이제부턴 내가 너 지켜주면 안 돼?]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내지른 질문. 하지만 어느 때보다 묵직한 무게를 실고 재인 앞에 내려놓는다. 상우를 돌아보는 재인의 눈에 순간적으로 아련함 같은 게 비쳤다. 정말 순식간에 사라졌기에 착각인 듯도 하지만. 재인은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상우를 바라볼 뿐이다. [어떻게 지켜줄 건데?]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할게. 네가 바라는 건 다 해줄게. 나 대학원 가서 공부 더 하고 교수 되기까지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 동안 무슨 일이든 다 할 거야. 돈도 최대한 빨리 모을 수 있어.] [정말이니?] [고생도 안 시키고, 손에 물도 안 묻게 하고, 궂은 일은 내가 다 할게.] [상우야.] [너 나더러 떠나라 그러면 그 땐 정말 군말 않고 떠나줄게.] [진상우!] [너 아플 때마다 네가 세상 다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도울게.] [뭐야, 진상우. 꼭 청혼하는 것 같잖아.] [별로 다르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 내내 간직해온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얇은 백금으로 된 줄에 조그만 큐빅이 반짝이는 팬던트가 달려있는 목걸이. 남성용이라 심플하지만 우아한 이 디자인을 보는 순간 재인이 떠올랐었다. [별 모양이네.] 상우가 열어 보여준 목걸이를 들여다보며 재인이 낮게 말한다. 그러면서 손은 자신의 목에 오래 전부터 걸려 있는 목걸이를 가만 쓰다듬고 있다. 저 작은 거북이 모양 팬던트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종종 보아 왔었다. 빼놓는 걸 본 적이 없기에 재인이 목걸이를 좋아하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다. 자신이 건넨 목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재인을 보고서야 이해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저 목걸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앞으로도 절대 빼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그래서 지금 그가 이 선물에 아주 난감해하고 있다는 것도. 왜 그랬을까? 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상자를 닫고 밀어주며 내뱉었다. [걸지는 말고, 그냥 갖고 있어.] 참으로 어이 없는 말이다. 선물을 하면서 걸지 말라니. 그제야 재인은 눈을 들어 상우를 향해 가만히 미소지었다.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 그래서 조금 두렵다. 재인은 조용히 상자를 받으며 고맙다고 했다.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며 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좀전의 그 공약 중에서 세 번째 껀 빼.]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재인이 불쑥 말했다. [안 돼.] [빼자, 상우야. 그게 뭐야? 떠나라면 떠난다니.] [널 위해서 아니야. 날 위해서야. 날 위해서 그 조항은 꼭 필요해.] 상우는 웃는 얼굴로 말하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떠나야 하는 순간에, 그걸 알면서도 주저앉아 스스로 비참해지지 않도록. 한참 동안 재인은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을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무작정 조르고 보는 상우다. [응? 내가 너 지킬게. 그냥 날 니 옆에 있게만 해줘.] [나 사랑하니?] [미친 놈처럼 사랑해.] 널 사랑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니까. [왜 사랑해?]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나도 모르니까. 너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버텼던 나한테서 나올 답이 아니잖아. 빤히 상우를 쳐다보는 재인.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눈빛이 다시금 아련하다. [그래. 그러자. 네가 날 지켜줘. 대신에 나는 상우 너를 지켜줄게.] 자길 믿으라는 듯 확고한 의지의 빛을 담아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재인에게는, 사랑을 받으며 곱게 큰 막내들에게서 보이는 의존적인 유약함이나 세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인생보험에 든 것 마냥 치열함이 부족했다. 그런데 재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민과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외부의 어떤 것도 그에게는 치명적인 자극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욱 상우는 재인이 자신에게 온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동정이든 호기심이든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오기 위해 그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지효의 예상은 빗나갔다. 누가 감히 여재인을 미워할 수 있겠느냐던 그녀의 장담이 무색하게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두 가지가 없었다. 망설임과 예의. 어느 샌가 세상과 재인 사이에 차갑고 두꺼운 빙벽이 생긴 것만 같았다. 결코 다가갈 수 없게 하는 어색한 시선과 참을 수 없는 경멸의 침묵. 강의실 앞 복도에 서서 재인은 욕설이 난무하는 포스트잇을 자신의 캐비닛에서 떼어냈다. 마지막으로 전공책과 노트를 챙겨 사물함을 비우며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이제 더 이상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미 취직이 된 극장에서 졸업식 전부터 일하게 될 것이다. 학점이 높고 교수님 추천서가 있어서 제법 큰 극장에 취직이 되었다. 방학 때 사회문화원에서 주최한 하우스 매니지먼트 과정을 들어둔 것도 도움이 되었다. 모든 게 시작이었다. 그러니 조금 더 힘을 내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학교 후문으로 내려갔다. 커밍아웃 이후 재인과 상우는 사람 많은 정문보다는 한적한 후문을 주로 이용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게 더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또야?] 후문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상우는, 불쑥 던진 재인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반가운 미소를 짓다가 찢어진 눈가의 상처가 벌어지자 멈칫 하고 만다. [이번엔 몇 명이었어?] [열두 명.] [한꺼번에 덤볐어?] [내가 그러라고 했거든.] [갈수록 허풍이 느네, 진상우?] [그러는 너는, 이제 호 안 해주는 거야?] 지난 번 상우에게 당한 그 선배의 패거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무작정 나타나서 패고 지나가는 비겁한 적들이 이제 매순간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왜 나한테는 그런 일이 안 생기지? 항상 너만 당하잖아.] 재인은 정말 모르는 걸까? 뒤에서, 앞에서, 옆에서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수호천사가 존재한다는 걸? 신은 늘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시는 게 맞는 것 같다. 재인은 재인대로, 상우는 상우대로 그들을 힘들게 하는 상황이 서로 다른 걸 보면. 상우는 잠시 재인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을 계속했다. [난 인기가 꽤 많았거든. 그래서 배신감을 심하게 느낀 놈들이 많을 뿐이야.] [이제 어쩔 거야? 그 많은 사람들 마음, 너 어떻게 달래줄래?] [잘 살면 되지. 우리 둘다 행복하게 잘 사는 걸로 갚자.] [그래.] 상우가 긁힌 손등의 피를 청바지에 대충 닦고 내밀자, 재인이 그 손을 조심조심 잡는다. 마지막 관문이 남은 거다. 바로 재인의 가족들. 그들에게 말하고 인정받기 위해 출발한다. [나 중학교 유도부 코치 자리 얻었다, 재인아. 그리고 대학원은 다른 대학 쪽을 알아봐야겠다.] [응.] [절대 후회 안 해. 요즘이 난 제일 행복하다.] [당연하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상우가 재인을 본다. 분명 재인도 그의 눈빛 속에서 '너는?' 이라고 되묻는 물음을 읽었을 거다. 대답 대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재인의 긴 속눈썹이 지는 햇살 속에서 반짝인다. [키스하고 싶다.] 어느 새 쉬어 버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상우. [그래도 참을 거다.] 재인이 네가 내 곁에 있어줄 테니까. 그래, 뭐든 다 참을 수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맞잡은 손을 재인이 앞뒤로 가만히 흔드는 게 느껴졌다. 황혼으로 여울지는 태양 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두 사람은 잔잔한 미소를 나누었다. 그 날이 바로, 우성이 형을 닮은 유도인 진상우와 하늘의 별을 닮은 외계인 여재인이 세상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었다. 늘 생각해왔던 거다. 보는 행위가 주는 만족에 대해서. 그러나 보이는 것에 무심해지는 순간, 세상은 한 없이 건조해진다. 재인은 스스로 되물었다. 오늘 무엇을 보았던가. 아침에 바나나를 먹다가 잘 익는 껍질에 생긴 저승꽃의 개수를 세었다. 오전에는 책장에서 앞에서, 레오넬리 비치로 간 세발자전거 이야기를 읽었다. 대문을 나서다 우연히, 힘겹게 낑낑대며 부스러기를 챙겨가는 검은 개미를 보았다. 또 학교 복도의 먼지 낀 유리창에 기대어 세상의 냉정한 일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나 힘든 사랑을 하고 있는 이나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이 주로 하게 되는 '내면을 향한 관조'는 없었다. 갈등은 이미 끝난 뒤였다. '인생의 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고통을 직시함.' 한 영화감독은 이것을 '성장'이라 불렀다. 재인은 그것을 다름아닌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것은 어쨌든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니까. 있는 길을 따라 가든, 새 길을 닦으며 나아가든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고통을 외면해도 고통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좀 그랬다. 안타까운 진공 상태. 보는 것에서 아무 것도 느끼질 못하니, 반응할 것도 없다. 무엇을 보아도 건조하기만 한 세상. 자신의 손을 잡고 위로를 얻는 상우를 바라보며, 간간히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만이 재인이 느끼는 전부였다. 뜨거워지길 기다리는 것, 이거 과연 옳은 일인가? 뭐니뭐니해도, 가족에게서 받는 비난이 가장 고통스럽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완강하고 거센 반대와 다툼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불화의 씨가 재인의 집에 뿌려진 것이다. 그것이 자크의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올라 하늘을 찌를 때, 재인은 집을 뛰쳐나왔다.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생각했던 상우가 가족에게 받는 수모가 가슴 아팠다. 더 이상의 상처를 만들지 않는 길은 여백을 두는 방법 밖에 없어 보였다. 가족과 자신 사이, 상우와 가족 사이에. 그리고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에도. 재인의 가족은 재인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고, 자꾸 부딪치면 골은 깊어지기만 할 테니까. 재인은 가족을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무리 더 사랑해도 죽는 날까지 그들의 사랑을 다 갚지 못할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재인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랑은 옳지 않았다. 어디선가 또 심한 상처를 입고 나타난 상우를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행복하다 말하는 그를 사랑하기로 다짐했었다. 그렇게 집을 나온 재인을,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면서 상우는 내내 미안해했다. [조만간 내 방 빼고 대출 받아서 집 구하자. 8할쯤 월세로 돌리면 좋은 데 구할 수 있어.] [불편해도 당분간 그냥 지내다가 빨리 돈 모아서 전세로 사야지.] [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재인아. 내가 다 알아서 해.] [물론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나도 같이 살 집이니까 반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내 월급이 더 많잖아. 넌 공부가 더 급하니까, 일단 해보고 힘들면 코치 그만 둬.] [말도 안 돼. 누가 누굴 뒷바라지 한다고? 난 내가 한 약속 지킬 거야.] [지켜. 안 말려. 누가 내 손에 물 묻힌대?] 거리엔 상점들과 노점에서 내뿜는 불빛들로 환했다. 분주하게 거니는 사람들 틈에서 티격태격 걷는 동안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래도 상우에 대한 미안함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태인이 형이 날린 주먹을 잘못 맞더니 아까부터 자꾸만 눈을 깜빡거리는 거다. [어디 봐. 찢어진 건 아닌데, 혹시 시신경 다친 거 아니야?] [괜찮아. 약간 시큰거릴 뿐인데, 자고 나면 멀쩡해질 거야.] [어후! 미련하게! 그러게 잘 좀 피하지 그랬어.] [피하면 더 화나셨을 거야. 소리치시는 형님 표정 보니 못 피하겠더라.] 속상해하는 재인을 기분 좋게 내려다보며 상우가 웃는다. [그렇게 무서웠어?] [조금. 그런데 형님이 호랑이 같지 않고 꼭 원숭이 같더라. 우스웠다는 얘기가 아니라, 왜 모성애가 제일 강한 동물이 원숭이라잖아. 무섭긴 한데 그게 다 너를 향한 애정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뭉클하잖아. 별 수 있냐? 얌전히 맞아야지. 그게 우리 몫일 거다, 재인아. 너 설마 그 분들 원망하는 거 아니지?] […….] [혹시 원망했냐? 에이, 속 좁은 놈! 매력 없게시리. 나도 그렇게 화 내줄 형님들이나 부모님이 계셨으면 좋겠다.] 상우는 말과 달리 재인의 어깨를 감싸 힘껏 당겼다. 그는 외모 뿐만 아니라 성품도 영화 속 우성이 형을 닮은 것 같다. 목이 콱 막혀서 재인은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린다. 리어카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괜히 딴소리다. [우리 귤 먹자, 상우야.] [귤 먹고 싶어?] [아니. 그냥 갈증이 나서.] [그럼 물 마시지. 저기 편의점도 있는데. 금방 뛰어가서 사올게. 기다려.] 상우는 재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재인은 가만히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리어카 옆이라 지나가는 사람들 발길에 채일 염려는 없었다. [이봐, 학생. 여기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사지도 않으면서 떠나지 않는 그가 거슬렸는지 귤장수가 투덜거린다. 그런데 그 때였다. [귤 주세요.]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곧장 손님에게로 귤장수의 관심이 돌려진다. 덕분에 재인은 조금 전 떠나온 가족들 생각으로 따끔거리는 가슴을 겨우 쓸어내릴 시간을 번다. 자신 때문에 중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빌던 상우의 모습도 아팠다. 재인에게는 타이르고 소리만 치면서도 상우에게만 날아가던 손찌검이 화가 났다. 마지막에 해인이 형이 자신을 때리긴 했지만, 이미 마음은 돌아선 뒤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만나고부터 늘 상우만 다쳤던 것 같다. 저는 멀쩡한데 상우는 요즘 계속 상처를 달고 산다. 그래도 그는 시종일관 괜찮다며 웃었다. 네 옆자리를 차지하는데 이 정도는 신고식으로 치뤄야 나도 양심이 덜 괴롭지, 라면서. 미안하다, 상우야. 정말 미안해. 대신에 내가 잘해 줄게. 세상이 다 너에게서 등을 돌려도 나만은 네 편이 되어줄게. [성냥팔이 소년이 설정인 거야?] 까맣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구두가 다가와 말했다. 재인은 제 앞에 선 그 구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귤 먹을래?] 고개를 저었다.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흥분된 음성이 자꾸만 저에게 묻는다. 그런데 올려다볼 수가 없다. 이 정도 비싼 구두를 사 신는 사람의 저 태도도 마음에 안 든다. 주눅이 들 것 같아서 재인은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차들을 쳐다보았다. 더구나 자신을 무슨 거지쯤으로 보고 말을 거는 이의 얼굴을 볼 기분이 아니다. 날 언제 봤다고 대뜸 반말일까. 그런데……. [일어나. 나 좀 봐.]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 안에 담긴 벅찬 무언가가 재인을 끌어당겼다. 저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멈춘다. 좀 전까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간판의 불빛이 구두 주인의 머리 뒤로 눈부셨다. 놀라서인지 숨이 가빠오고 피가 더워진다. 심장도 두근두근 소리내어 뛰기 시작한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린 후에야 젖은 시야가 겨우 안정을 찾았다. 바로 눈 앞에서 굉장히 잘 생긴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여재인.] <추억도 언제나 목마르다> 그리움의 축적은 의지를 낳고, 의지의 방해는 집착을 낳고, 집착의 발현은 떨림을 낳는다. 너에게 온전히 닿지 못할까 두려운 나는 지금의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지금의 나는 너의 무엇이긴 한 걸까? 9. 두렵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도 안다. 마지막 재인의 집앞에서 만났던 날 자신을 모른 척 하던 그의 행동이 어떠했든, 태양은 자신이 그대로라면 재인도 그대로일 거라 믿었다. 그것이 아무리 어리석은 믿음이라 해도 그것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 왔다. 하지만…… 이렇듯 낯선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인은 상상하지 못했다. [오랜만이다, 여재인.] 태양이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뒤에서 한 녀석이 달려왔다. 태양을 스치듯 지나 곧장 재인의 앞에 마주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리 아파서 앉아있는 거야? 물 마셔, 재인아.] 굉장히 다정한 말투다. [업어줄까?] 둘 사이를 가로막아 버린 남자가 생수병을 받아든 재인의 머리를 가만히 넘겨주며 묻는다.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는 태양이 신경 쓰이는 듯 흘끗 올려다보는 재인과 눈이 마주쳤다. [가자.] [귤도 좀 사갈래?] 재인이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일어서자, 앞의 녀석이 묻는다. 하지만 재인은 머리를 흔들며 몇 걸음을 떼어 태양을 스쳐지나가 버렸다. 툭. 데구르르. 태양의 손에서 귤 봉지가 떨어졌다. 안에 있던 귤들이 사방으로 굴러간다.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너, 또 다시 내게……! 획. 재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힘 주어 돌려세웠다. [아앗!]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재인의 몸이 빠르게 몸이 회전하며, 다른 손에 들려있던 생수병을 놓친다. 퉁 하고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손목을 잡은 채 팔을 뒤로 뻗었다. 덕분에 재인의 몸이 가까이 당겨와 바로 앞에 섰다.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태양의 꿇을 듯한 눈빛을 마주한 채. [사람이 인사를 했으면 받아줘야 할 거 아냐.] 혼란스럽게 일렁이던 재인의 눈이 태양의 말에 딱 얼어붙는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로 위에 있는 태양의 눈을 빤히 마주보고 있다. 올려다보느라 한껏 뒤로 젖힌 고개가 아플 텐데도 물러섬이 없다. [당신 뭡니까? 그 손 놓으세요!] 탁. 상우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재인의 손목을 움켜진 태양의 손목을 잡는다. 아랑곳없이 재인만 노려보는 태양이다. 이 순간 재인도 태양만 쳐다보고 있다. 점점 서늘하게 굳어지는 재인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싶어 상우가 살피듯 묻는다. [재인아!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재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곧장 내려다보고 있던 태양의 입술이 비틀린다. [대답을 해보지 그래. 나도 듣고 싶으니까.] 재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조금 더 낯설어진 눈빛. 태양을 보며 오히려 묻는다. [우리…… 아는 사입니까?] 믿을 수 없게도 질문이 되돌아온다. [죄송합니다. 무시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에요. 사과할게요.] [너……!] [오늘은 저희한테 좀 힘든 날이었습니다. 이만 놓아주세요.] 재인은 그 말과 함께 손목을 비틀어 빼내간다. 생각보다 쉽게 빠져나오자 놀랐는지 태양을 흘끔 올려다본다. [상우야, 가자.] 돌아서서 먼저 성큼 걸어가기 시작하는 재인. 상우라고 불린 녀석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재인이 자신에게 도리어 질문을 던지다니! '우리…… 아는 사입니까?' 그럼 모르는 사이란 말이냐? 너 정말로 나를 잊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까맣게 다 지워버릴 수 있어! 다시 한 번 봐! 재인아, 너 내 얼굴 다시 똑똑히 보고 확인해! 태양은 황급히 달려가 이미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재인을 붙들었다. 그의 두 팔을 단단히 잡고 가로등 앞으로 끌어와서 다급하게 외친다. [정말 날 몰라?] [……!] [재인아! 나 모르겠어? 나 오늘 들어왔다! 너 보려고 들어오자마자 곧장 달려온 거란 말이야!] [정말 왜 이러세요!] [다시 봐. 불빛이 어두워서 그래? 더 밝은 데로 갈까? 내 얼굴 봐! 똑똑히 봐봐, 좀!] 정말이다. 여긴 너무 어둡다. 가로등 밑이라 오히려 더 어두운 것 같다. 얼굴이 잘 안 보여서 그러는 게 분명하다! 재인의 팔을 붙들고 답답한 마음에 마구 흔들었다. 흥분한 태양의 손에 재인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비틀거린다. 그 때 재인의 곁에 서 있던 녀석이 태양의 팔을 완강하게 붙들고 말했다. [떨어지세요! 대체 왜 이럽니까!] [놔!] [당신이나 놔!] 재인을 잡고 있던 태양의 팔을 비틀며 남자가 소리쳤다. 일반인에게 유도기술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그도 많이 흥분한 것이다. 아이러니다. 태양이 누군지 정작 이 남자는 눈치챈 것처럼 보이니까. 강하게 태양의 어깨를 꺾으며 바닥으로 메다꽂기 위해 상체를 숙이는 남자. 태양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오히려 그의 팔을 단단히 꺾어 밀쳐냈다. 운동을 한 것처럼 단단한 체격에 비해 급소를 눌린 것도 아닌데 빠르게 무너진다. 왜일까? 태양은 순간적으로 의아해하면서도 곧장 재인을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재빠르게 물러서며 재인이 피한다. 공중에서 허무하게 손이 굳어 버린 태양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 심장에 박힌 독이 핏줄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가는 기분이다. 머리가 생각을 멈추고, 숨이 턱 막혀서 온몸을 굳힌다. 그 새를 놓치지 않고 쓰러졌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태양을 덮쳤다. 만만치 않은 주먹이 거세게 태양의 턱을 치고 코뼈를 부러뜨릴 듯이 머리를 받았다. 그 덕에 가슴 속의 아찔함이 정신을 찢고 현실을 일깨운 것 같다. 태양도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자신을 올라탄 남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재인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은 이 자가 아니라 태양 자신이었다. 재인에게 다가가는 걸 막을 권리가 이 자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피가 입안에 흥건히 고이고, 귀가 찢어진 것 같다. 남자는 갈비뼈가 아픈지 계속 배를 감싸고 가쁜 숨을 쉰다. 아까 쓰러질 때 턱밑이 갈린 남자의 얼굴에서 연신 피가 떨어지고 있다. 흘끗 돌아본 태양은 하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재인을 발견한다. 가슴이 금직하게 내려앉는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이런 모습을 기대한 적 없었는데. [상우야!] 그 때 재인이 비명처럼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방심했던 태양을 향해 남자가 몸을 날리는 게 순간적으로 눈에 띄었다. 그의 공격을 막거나 치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태양은 몸을 최대한 피했다. 그리고 균형감각을 완전히 잃고 무작정 몸으로 받아오던 남자는 태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차도까지 달려가 고꾸라졌다. 빵빵거리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차들. 믿을 수 없게도 재인이 그를 향해 달려가 남자의 몸을 감싼다. 그 순간 태양은 심장이 토해내는 피냄새가 코끝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데, 시야에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잡혔다. 밤이라 어두워 그들이 보이지 않을 테고, 가로등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사고는 멈추고, 본능만이 그를 움직였다. 곧장 달려가 재인을 밀어 인도 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상우의 상체를 단단히 끌어안고 몸을 굴렸다. 간발의 차이로 자동차는 그들이 쓰러져 있던 도로 위를 밟고 지나갔다. 헉, 헉, 숨을 고르는 상우의 숨소리가 거칠게 귓속을 파고 들었다. 더 이상 때릴 힘도, 맞을 힘도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싸움의 의미를 잃었다. 그리고…… 몇 발짝 떨어져서 주저앉아 있는 재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져 있다. 사시나무 떨듯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자, 태양은 죽도록 화가 난다. [이 자식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셈이야!] [……!] [거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가 앉아있는 거야! 죽을 수도 있었잖아!] 소리를 치던 태양의 몸도 떨리기 시작한다. 그 때 비틀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재인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가만히 떨고 있는 재인의 어깨를 도닥이는 모습이 깨진 유리처럼 아프게 태양의 가슴을 파고든다. 왜……? 왜 내가 아닌 거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거 알아.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다시 헤어지지 않으려고 조금씩 더 참고 미뤘던 거 뿐이야. 기다리기 힘들었니?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서 날 미워하기로 한 거야? 그래서 잊은 척 하는 거니? 아니면, 지금 저 자식 때문에 그래? 이러지 마, 재인아. 너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구해주신 거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가늘게 흘러나온 재인의 말에, 그를 안고 있던 남자의 몸도 확연히 굳어진다. [상우, 오늘 그렇게 가 버렸다면 평생 가슴 아팠을 거예요. 이대로 가면 안 되는 녀석이에요. 내가 갚아야 할 게 많으니까. 늘 나 때문에 혼자 다치고, 오랜 시간 가슴앓이도 했거든요. 이젠 내가 지켜줄 거예요. 오늘이 그 첫날인데 또 이런 일이……!] 고개 숙여 인사하다가 그 끝에 탄식하는 재인의 정수리가 보인다. 태양은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캄캄한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시큰거려서 아무리 작은 불빛도 지금은 마주볼 수가 없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정신이 좀 없어요. 하아. 괘씸할 테지만, 부디 다음에 밝을 때 다시 뵙길 바랍니다.] […….] [그 때 말해주세요. 우리가 아는 사이였다면, 기억하도록 노력할게요.] 가슴 속에 더 큰 절망이 쌓이고 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바보야, 그런 말은 적어도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보면서 해야 하는 거야. 태양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인을 역시 외면한 채로 일어섰다. 가슴 속에 일고 있는 거센 태풍이 어디로 향할지 자신도 두려우니까. 미친놈처럼 당장에라도 그를 납치해 어딘가에 가둬두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하다. 그래서 일부러 낮게 중얼거리고 돌아선다. [됐어. 운이 좋다면, 나도 널 잊을 수 있겠지.] 되도록 빠르게 걸었다. 광폭한 충동이 피를 검게 물들이며 급속도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 정말 빨리 멀어져야겠다.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잡아 끌지 않기 위해서. 실은 그 때문에……. [가슴이 아파, 상우야. 심장이 죽을 것처럼 뛰어.] 재인의 곁에 남아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는 상우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세상이 다 자신들의 적이 된 것 같아 죽도록 아프고 두려웠던 오늘의 마지막이……. [나 어떡하면 좋으냐? 내가 정말 날 어쩌면 좋을까? 머리 속 한가운데가 텅 비어 버린 후부터 점점 더 날 좋아할 수가 없으니.] 무섭게 뛰는 심장을 손을 누르고 가늘게 뱉어내는 재인의 젖은 중얼거림도…… 정작 태양은 듣지 못했다. 강호의 아파트는 한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태양은 그 곳의 베란다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술잔을 흔들다가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는 난간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다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 여기 16층이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강호가 당연한 걸 묻는다. [산산조각 나서 깨지겠지.] 씁쓸하게 웃으며 유리의 파편이 튀는 장면을 상상한다. 원래 모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박살이 나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흩어져 사방에 널리겠지. 그래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는다. 상상만 해서 그런가? 그냥 아래로 던져 버릴까? 태양은 난간 위의 유리잔을 손끝으로 톡 건드린다. [사람 죽이는 거다, 새끼야! 밑에 지나가던 사람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떨어졌을 때, 가속도가 붙은 그 유리잔의 무게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냐? 깨지는 건 유리만이 아냐.]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시끄럽게 굴지 마.] [짜식이 형한테 말 한 번 이쁘게 한다! 확 쫓아내 버릴까 보다. 쯧! 그럼 대체 일어난 일은 뭔데? 뭣 때문에 넌 귀국하자마자 죽상이냐?] […….] [그래 가지고 그 녀석 만나러 가겠냐? 인상 좀 펴, 임마. 내가 왜 내 집에서 네 새끼 눈치보면서 화장실도 발끝으로 다녀야 하는 거냐?] [그냥 편하게 지내. 난 무시하고.] [야, 그게 되냐? 내 마음대로 그게 돼? 너 며칠 째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처먹고, 밤새 거기 버티고 서서 지랄하는데, 내 입에 들어온 밥이 달게 넘어가겠냐? 너 때문에 나 변비 생겼다, 새끼야! 책임져!] 강호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댄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태양이 입가를 당겨 웃는다. 눈은 바깥을 향한 채지만, 귀는 강호에게 열려있는 것 같다. 휴우. 이것만도 큰 발전 아닌가? 며칠 전 귀국한 첫 날, 제 어머니댁으로 가지 않고 곧장 강호를 찾아왔었다.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은데 잔뜩 취한 사람 마냥 넋이 나가서는 웃지도 않았다. 말도 하지 않고, 씻고 드러누워 버린 태양은 다음 날 아침부터 내내 저 자세다. 베란다에서 하염없이 정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오래도록 잠겨 있는 것이다. [강이나 바다는 그렇게 오래 보고 있는 거 아니다. 물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지. 이제 그만 들어 와.] 타이르듯 조용히 말하자, 태양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강호를 쳐다보았다. 시선 한 번 마주치는 것도 비싸게 굴던 녀석이 강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형.] [고맙다, 불러줘서. 말해.] [엑스레이에는 가슴에 든 멍 같은 건 안 찍히나?] [왜? 깡패 새끼들처럼 싸우다 맞은 데가 아직도 아프냐? 셔츠 올려 봐. 내가 보고 심하면 빨간 약이라도 발라주마. 깡패 새끼한테는 빨간 약이 제일 어울리니까.] 태양은 그 날 입술이 터지고 귀밑이 찢어져 웃옷이 흥건할 정도로 피에 젖어 들어왔었다. 그 날의 상태를 두고두고 상기시키는 것은 강호의 고집일 것이다. 그냥 넘어가주지 않는 것도 강호만의 꾸짖음이다. 태양의 남다른 성장과정을 대충 알기 때문에 혹 뒤늦게라도 엇나가지 않기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아온 그였으니까. [보이지 않게 이 속에서 빠르게 피멍이 번져 나가는 것 같아.] [그러니까 어디?] 답답한 듯한 강호의 물음에 태양은 몸을 돌려 그를 완전히 마주본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태양은 심장 근처를 검지로 가리키고 다시 관자놀이 부근을 가리킨다. [성한 데 없이 다 퍼졌나 봐.] [무슨 소리냐, 남태양?] [안 아픈 데 없이 다 아프단 소리.] [뭐?] [처음엔 그냥 그런 척 하는 줄 알았어.] [누가?] [그런데 아닌가 봐. 정말로 날 잊었나 봐. 이미 다른 놈을 옆에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렇게 물어놓고는 금세 허탈하게 웃어 버린다. [아니다. 내가 생각해왔던 건 그냥 다 환상이었나? 내 멋대로 덧붙이고 짜깁기한 상상 말이야. 우리가 정말 사랑하긴 했던 걸까?] [너…… 벌써 그 녀석 만난 거야?] [그런 생각들이 내 속을 자꾸 쳐대고 있다, 형. 벌써 멍이 들고, 피가 터지고, 진물이 나고 있는데도 사정없이 계속 돼. 우리가 나눈 건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그칠 수가 없어. 이젠 아무 것도 모르겠어. 작은 별이 더 이상 날 모른다고 하는 것처럼. 그 눈을 보고 있으면 내 머릿속까지도 하얘져 버리는 것 같아.] 하아. 태양이 뱉어내는 뜨거운 숨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난…… 꿈을 꾼 건가?] 무거워진 눈으로 강호는 태양을 바라본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까맣게 젖어있다. 습기 어린 눈 밑이 발갛게 젖어 창백한 피부를 강조하고 있다. 그가 여기까지 무엇으로 견뎌왔는지 강호도 조금은 안다. 누구 때문에 태양이 가차 없이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그것도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인지 침묵인지, 그건 모르겠다. [꿈속에서 한 사랑 때문에 너처럼 인내하는 사람은 없어.] […….] [사랑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러니 어렵지. 쉬우면 사랑이 아니야.] [강호 형…….] [고민 더 할 거면 해. 거기 서 있는 게 아픔을 참는 데 도움이 된다면 며칠 더 있어. 대신 유리잔만 떨어뜨리지 마라. 네 고민 때문에 다른 사람의 행복과 목숨은 걸지 말란 말이다.] 강호가 단단하게 이른다. 옆모습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는 태양의 눈빛이 흔들린다. [지금…….] 말을 하려고 벌린 태양의 입술도 미세하게 떨린다. [나더러 그 녀석을 놓아주란 뜻이야?] [네 감정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인생도 중요하단 뜻이다.] [빌어먹을!] 결국 입 속으로 숨을 삼키듯 탄식하는 태양이 보인다. [물론 나는 다른 누구의 감정 따위에 관심 없어. 네가 걱정될 뿐이지. 억지로 되는 건 사랑이 아니다. 그러다 결국 상처 받는 건 너라는 뜻이야. 최선을 다하되, 강요는 하지 마. 네 작은 별에게도 이유가 있겠지. 구애하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각자의 자유고 선택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 [함께했던 과거가 지금 그 사람에 대한 권리를 주진 않는다는 말이다.] 태양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해내는 녀석이다. 한번도 그가 마음먹어서 이루지 못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것이 태양에게 함정이 될지도 모른다고 강호는 생각했다. 어느 순간 예전보다 더 차갑게 변해 버린 그를 보면서, 어쩌면 다시 만난 그의 사랑이 태양을 녹여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얼굴 모르는 작은 별까지 걱정이 되는 거다. 사랑은 고집과 의지로 보답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물며 그는 이미 태양을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데……. [넌 새끼야, 너무 잘난 놈이라서 쉽게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 세로로 길게 디자인된 분수대를 지나자 다시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이 나왔다. 부모님의 집은 로드아일랜드의 저택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었다. 교외에 위치한 그 곳은, 크기만 작을 뿐 고풍스러움이 대문에서부터 물씬 느껴진다.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 대신 푸근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겨움도 묻어났다. 아마도 대문 양쪽 기둥 위에 얹힌 사자 상의 앙증맞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의 유머가 느껴진달까. 그에 맞춰주려는 아버지의 장난스런 행동력도. 태양은 대문 안 쪽에 있는 널찍한 차고에 차를 넣었다. 조용한 정적을 음미하며 잔디가 파릇한 마당을 지났다. 문을 열자 거실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부모님이 보였다. 이미 차 소리를 들어 알고 계실 텐데도 어머니는 새삼 반가운 미소를 건네 오신다. [태양! 어서 와. 오오, 언제 봐도 제복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그럼! 누구 아들인데.] 오바하시는 것 같다. 태양은 속으로 쓰게 웃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이렇게 화사하게 웃어주시는 것은 좋지만, 왠지 자신이 있을 땐 더 애쓰시는 것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재결합하신 이후로 종종 태양 앞에서 부러 더 크게 웃으시곤 한다. 화목한 가정. 겉으로 보기엔 더할나위 없이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태양은 자신의 등 뒤에서 눈빛을 주고 받는 부모님을 알고 있다. 늘 부자연스러울 만치 다정하시고 행복해하시는 걸 느낀다. 아니. 어쩌면 이건 태양 혼자만의 뒤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니 다른 이들도 그럴 것만 같다는. 그래서 그들의 웃음이 가슴으로부터 믿어지지 않는 건지도. [오후에 비행이 있어서 곧장 공항으로 가야 해서요.] [이번엔 어디로 가니?] [제주도 두 번 돌고 올 겁니다.] [그럼 저녁은?] [밤늦게 올 거예요. 기다리지 마시고 주무세요.] [태양아. 잠깐.] 방 쪽으로 돌아서는 그의 팔을 어머니가 살짝 잡으려 했다. 그 순간 곧장 돌아서서 그 손길을 피한 태양은 일부러 빙 돌아 소파로 걸어갔다. [아,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죠? 네. 앉을게요.] 또 다시 시선을 주고받는 부모님. 태양은 무표정하게 앉아 그들이 말을 시작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조각상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고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낮은 한숨을 내쉰다. 아버지가 가만히 어머니의 팔을 두드리며 함께 자리에 앉았다. [네가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이미…….] [알아. 얘기 끝났다고 할 참이지? 하지만 그건 안 된다, 아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수익성 없는 사업체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있어. 무엇을 언제 쳐내야 할지도 네가 결정해야 할 문제지만 급하게 몰아붙이지 않으마. 네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서로 이해하니까.] […….] 잠시 말을 멈췄지만 태양은 재촉조차 하지 않는다. [너에게 5년을 주었지. 벌써 그 중에 3년이 흘렀다. 서른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 그 동안은 우리가 어떻게든 경영에 관여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해 나가겠다. 하지만 알다시피 네 아버지도 예전 사업을 다시 일으키고 계시느라 바쁘단다. 그리고 넌 중간중간 회사에 관련된 보고도 받아야 해. 완전히 떠나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 말 알겠니? 네 외할아버지가 일으킨 기업의 핵심 중추는 누가 뭐래도 너야.] [어차피 보고는 지금도 받고 있어요. 시간을 얻은 것도 실감나지 않을 만큼 매주 전화통에 불이 나고 있습니다. 한 비서가 보기보다 꽉 막혀서 아예 시간을 정해놓고 연락하더군요.]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어머니의 말에 태양은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그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서로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요즘 누군가를 믿으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그에게 말이다. [그럼. 쉬겠습니다.] 태양은 그 말을 끝으로 일어섰다.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방을 향해 걸어가는 그에게 아버지가 묵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도 재인이 보고 왔니?] 우뚝. 멈춰선 태양은 대답하지 않는다. 두 분은 이미 다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한국에 온 이후 특히 더 태양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고 계시니까. [얼마 전에 극장에서 승진했다고 하더구나.] […….] [겉에서 보기보다 힘든 곳일 텐데,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원래도 똑똑한 아이였지만, 이번 건은 유례없는 승진이었다고…….] [대체 왜!] 어머니의 말을 끊으며 태양이 소리쳤다. [왜 그 이름을 내 앞에서 말하는 거죠?] [재인이 저 대로 둘 테냐?] [그걸 왜 저에게 묻습니까? 잘 지내고 있다면서요! 지각 한 번 안 하고, 인기도 여전히 많은 여재인이라면서요! 다른 자식이랑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놈 이름을 왜 자꾸 나한테 들먹여요! 왜!]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러 버렸다. 있는 힘껏 주먹으로 소파 등받이를 내리쳤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재미있나 보죠?] [태양!]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 자식 이름, 내 앞에서 꺼내지 마세요.] [하지만 재인이는……!] [착각하시나 본데, 여재인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제 것이었던 적도 없습니다. 다시 찾아주겠다는 생각을 혹시 하신다면 그만 두세요. 그가 알면 웃겠군요.] 조소를 금치 못하는 건 오히려 태양이다. 차갑게 비웃으며 성큼 걸음을 다시 옮긴다. 그 때, 참았던 무엇을 터뜨리듯 어머니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넌 왜 숙소로 들어가지 않니?] [……!] [너희 회사에서 외국인 조종사들에게 제공하는 아파트가 있는데, 너는 왜 공항에서 멀기만 한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강호 집에서 지내는 거야?] 태양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부모님이 누구던가? 쉽게 물러설 분들이 아니다. 그건 태양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이러는 건 정말이지 우습다. 재인을 떠나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더러 어쩌라고. 멀리서 간간히 그를 지켜보며 간신히 숨통만 넓히고 있는 자신더러 뭘 어쩌라고. [재인이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 내놓았더라. 그 집 우리가 계약했어. 원하면 너에게 줄 수도 있다.] [재밌군요.] [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에게 주려고 계약하신 거잖습니까.] 태양은 뒤로 흘끗 돌아보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필요 없으니까 도로 파세요.] 어차피 재인도 없을 텐데, 이젠 아예 그 동네를 떠나야겠다. 그런데 차갑게 돌아선 태양의 등에 어머니의 말이 날카롭게 꽂혔다. [재인인 자기 집이 나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던데. 그래도 필요 없니?] 우뚝. 그 자리에 서 버린 태양은 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퍽! 방금 것은 분명히 멍이 들 것이다. 보도블록 위에 입차 금지용으로 세워놓은 간판에 호되게 부딪치는 그가 보였다. 태양은 강호가 기다리라고 말한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 비우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를 발견했다. 기억력 나쁘고 바람까지 난 자신의 옛 사랑, 여재인. 넋 나간 척 하지 마, 여재인. 안 어울려. 다시 한 번 행인과 어깨를 부딪친 그를 보며 태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살던 집에 입주를 하기 전 둘러볼 때의 심정이 떠오른다. 전망이 나쁘지 않은 테라스와 거실, 창이 넓은 큰 방과 작은 방. 쓸모 있는 부엌. 그리고 곳곳에 쓰여 있던 'J♡S'. 몇 번이고 주먹으로 쥐어 박았다. 분에 차지 않아 한참 노려보다가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S' 뒤에 'un'를 써넣었다. 'Sun'은 태양의 미국 이름이다. 'Son'으로 놀림받기 딱 좋아 애착을 가질 수 없었던 이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엌, 작은 방, 큰 방 등 곳곳에 적힌 흔적을 따라다니며 썼던 것이다. 'J♡Sun'. 자신이 그려놓은 자국을 한참 노려보다가 참을 수 없을 만큼 한심해졌다. 당장 전화를 해서 벽지를 뜯어내고 새로 도배를 시키고 인테리어를 다시 했다. 그 집에 입주를 하고 최대한 다른 느낌으로 바꾼 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과거에 단단히 묶여서 혼자 미련하게 구는 자신에 대해 화가 나고, 깨끗하게 자신을 배제한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 재인에게도 화가 났다. 이 상태로 산다는 건 옳지 않다. 한국에 들어온지 벌써 3년째. 앞으로 남은 건 2년여의 시간이다. 결론을 내려야 했다. 이제부터 그를 갖든지 철저하게 버리든지 할 것이다. 태양은, 더 이상 목걸이를 걸고 있지 않을 게 분명한 재인처럼 자신도 반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십새끼, 이거 어디서 굴러먹던 뼉따구야!] 골이 잔뜩 나서 소리치는 익숙한 음성에 소주잔을 채우던 태양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서서히 돌리자, 멍해져 버린 재인의 어깨를 쥐고 마구 흔드는 강호가 보인다. 술병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를 다시 마주하려던 건 오늘이 아니었는데. 후우. 어쩔 수 없는 한숨을 내쉬고, 계산을 한 뒤 그들에게 다가간다. 재인은…… 울고 있었다. [취했나 본데.] 술도 마실 줄 아냐, 여재인? 입술 끝이 절로 비틀리는 걸 느낀다. 그렇게 괴로워할 정도로 그 자식을 좋아한 거냐? 강호 대신 자신이 재인을 잡고 마구 흔들어주고 싶다. 그런 강렬한 충동이 솟자 태양은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넣었다. 여기 계속 서서 그를 보고 있다가는 결국 그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형. 안 가고 뭐해?] 차갑게 내뱉고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외면하듯 돌리던 시선의 끝에, 몸의 힘을 빼고 축 늘어뜨리는 그가 걸렸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눈을 감아 버리는 여재인의 모습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남태양, 건조한 새끼야! 여기 이 놈 자빠져 누운 꼴 안 보여?] [보인다.] 보인다. 많이 놀라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게 다 보인다. 심장이 거친 발길질을 당하는 것처럼 아프다. 터질 듯이 딱딱하게 부풀어오른 감정이 바늘처럼 가슴을 쿡쿡 찌른다. 여재인, 너 정말! [나쁘다, 정말.] 태양은 강호가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이기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완강한 눈빛으로 등을 갖다대라는 그의 명령에 군말 없이 주저 앉았다. 잔뜩 긴장해서 움츠린 신경들이 등에 부드럽게 닿아오는 재인의 몸에 비명을 질러댔다. 자그마치 3년 만이다. 재인을 이처럼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그와 닿게 된 것이. 팔이 떨렸다. 꾹 눌러 참았지만 다리도 떨렸을 거다. 넘어질까 봐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강호 형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않아 재인이 저렇게 중얼거린 거다. 꼭 태양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의아한 듯 돌아보는 강호가 빨리 오라고 저쪽에서 손짓하고 있다. 술 안 마셨네. 전혀 알코올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흐느적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 거야? 이 정도로 타격을 받을 만큼 그 자식을 좋아했냐, 여재인? 걸음을 다시 옮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업고 가는 이 상황이 현실 같지가 않아서 숨쉬기가 버겁다. 그 때, [사랑한단 말이야…….] 예민해진 목에 얼굴을 부비며 재인의 팔이 태양을 감쌌다. 심장이 뚝 멈춘 느낌이다. 다시 그 자리에 서 버렸다. 하지만 곧 찝찔하게 문질러오는 재인의 눈물을 느낀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다. 같이 살던 그 자식을 사랑한단 소리다. 하아. 너 정말! 태양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모진 다짐을 했다. 만약 재인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고 해도, 다시 찾아온 이유를 물었을 때 해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재인이 남태양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게 견딜 수 없어서라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자신이 여재인을 본 시간만큼은 그도 자신을 봐야 했다. 너, 이렇게 배신이나 당하려고 날 지운 거냐? 태양은 재인을 업고 걸으면서 내내 그 생각이었다. 아무리 사랑했어도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나한테 보이지 마라. 예의가 아니잖냐? 우리의 추억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날 꼬시던 그 생기 가득한 눈빛은 어디 갔어? 여재인. 부디 씩씩해라. 궁상 떨지말고 꼭 팔팔해져. 그래야 내가 너에게 화도 내고 못 되게 굴 수도 있지 않겠냐? 너 이제부터 각오해야 돼. 어떻게든 네가 먼저 날 사랑하게 만들 거니까! <의미의 조합은 때로 기가 막힌다> 그는 내가 아는 너를 모르고, 나는 그가 아는 너를 모르니, 차라리 나를 택해라. 그게 맞다. 그가 아는 너는 네가 알지만, 내가 아는 너는 너도 모를 테니, 우리가 함께 있어야 네가 다 있는 거다. 10. "이쁜아! 커피 마셔라!" 거실에서 부르는 강호의 우렁찬 외침에도 재인은 돌아보지 않는다. 손을 씻고 욕실을 나오던 태양은 흘끗 식탁 앞에 앉아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뚱이가 뭘 잘못 먹었나 봐." 곁으로 다가가, '왜 그래?' 묻는 태양에게 재인이 중얼거렸다. 뚱이는 재인이 얼마 전부터 식탁 위에 가져다놓은 돼지저금통 이름이다. "이렇게 흔들어도 소리가 잘 안 나." 뚱이의 통통한 배 부분을 움켜쥐고 흔들어 보이는 재인이다. 차랑차랑. 이렇게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출근 안 할 거야? 재인이 너 30분에 나간다며? 커피 마실 시간 5분 밖에 없어!" 강호가 재촉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태양은 재인의 손에서 뚱이를 받아들고 제자리에 도로 놓았다. 그리고 일어나라며 등을 두드리다 말고 문득 자신의 허리를 깊게 숙인다. 심각한 표정을 풀고 막 고개를 들던 재인이, 가까이 다가온 태양과 눈이 마주친다. "뭐, 뭐야?" "이거……." 태양이 긴 손가락으로 살짝 재인의 입가를 스친다. 그리고는 손끝에 묻은 딸기쨈을 재인의 눈높이로 들어 보여준다. "알고 보면 칠칠맞은 여재인." "겨우 그런 걸로 잘난 척하지 마." "이거 어쩔 거야? 나 방금 손 씻고 나왔는데." "그러게, 그걸 누가 네 손으로 문지르래?" "문지른 게 아니라 닦아준 거지. 말은 바로 하자." 칫.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재인은 강호에게 가 버린다. 툭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빤히 지켜보던 강호가 다가온 재인에게 커피잔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조심조심 받아드는 재인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으앗! 형!" 쏟을 뻔했다고 투덜거리는 재인을 향해 빙그레 웃다가 강호는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의미심장한 미소. "왜?" 자신을 향한 강호의 짓궂은 눈짓에 태양이 물으면, 이내 고개를 흔들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딴청을 피운다. 태양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잠시 고민하던 그가 딸기쨈이 묻은 손가락을 입에 넣은 것이다. 뭐 강호로선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 태양. 이걸로 닦아." 재인이 내민 티슈를 잠시 바라보던 태양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제야 깨달았나? 재인도 눈을 크게 뜨고 커피잔을 쥔 태양의 손을 보고 있다. "칠칠맞긴." 기회를 잡았다는 듯 혀를 소리나게 차며 재인이 태양에게서 커피잔을 뺏는다. 그리고는 요리조리 돌려보며 딸기쨈의 흔적을 찾는다. '어, 없네?' 이어지는 푸념. 곧 이어 저의 커피를 쭉 마시고 재인이 벌떡 일어났다. 출근 시간이 빠듯할 게다. "강호 형, 아침 식사 고마워요.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나야 영광이지." 욕실로 달려가 치약을 짜다가 문득 머리를 내밀고 재인이 외친다. "태양, 설거지 네가 해! 강호 형 시키지 말고. 대신 저녁 설거지 내가 할게." 다시 쏙 안으로 사라지는 갈색 머리. 그릇 두어 개는 꼭 깨먹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 그 생각에 피식 웃으며 태양은 다시 느릿하게 일어나서 부엌을 향한다. 그런 태양을 재빨리 붙잡아 도로 앉힌 강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본다. "형, 뭐해?" "너 수상해, 남태양." "실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것 좀 놔." 재인이 가기 전에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건지 서두른다. 강호는 어쩔 수 없이 팔을 놓아주면서도 부엌으로 어슬렁 사라지는 태양의 등을 지켜본다. 분명 변했다. 무엇보다 남태양, 좀전처럼 혼자서 웃은 게 오늘 아침에만 벌써 세 번째다. "고무장갑 껴. 온수도 틀고." "내가 알아서 해." "오늘 비행 있어?" "없어." 설거지를 하겠다고 서 있는 태양에게 욕실에서 나온 재인이 곧장 다가가 말을 건다. 조분조분 들려오는 일상의 대화가 강호의 입가에도 미소를 피운다. "나 갔다 올게." "차 조심해. 자전거도 잘 보고. 자전거는 보험도 안 돼. 지난 번처럼……." "그 잔소리 말인데, 태양. 영어로 세 번, 한국어로 일곱 번째야." "열 번 채울 셈이었거든." 또다. 저 녀석 입가에 슬쩍 퍼지는 미소. "목표 달성 했네. 축하한다." 후, 한숨을 내쉬며 부엌을 나온 재인을 강호가 배웅해준다. 그가 구두를 신는 동안 강호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그 모습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진작 했어야 하는 질문을 새삼 던진다. "참, 새로운 데는 일할 만 해?" 허리를 펴고 강호를 바라보는 재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려 있다. "적응기간은 어디나 다 그렇잖아요. 정신 없고, 능률 없고. 곧 나아지겠죠." 재인은 머릿속 생각과 좀 다르게 말한다. 과연 나아질까? 이런 회의적인 마음이 문득 들곤 했다. 어제 퇴근길에 내쉬었던 한숨의 양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무리하지 마라, 이쁜아. 네 몸 상태 재깍 재깍 알아주는 놈, 씨발, 너밖에 더 있냐?" "형, 오늘 오프면 가지 말고 저녁도 같이 해요. 퇴근길에 형 좋아하는 떡갈비 사올게요." "오냐." 재인이 싱긋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감색 정장이 하얀 얼굴과 대비되어 선명하고 산뜻한 느낌이다. 캐쥬얼을 입으면 대학생 같지만, 저렇게 정장을 차려입으면 준수한 느낌이 물씬 난다. 언제 봐도 이쁜 놈. 강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신문을 챙겨 들고 거실로 갔다. "커피 다 식어 자빠졌다, 남태양! 설거지 하는 척 그만 하고 나와!" "곧 끝나. 바람난 과부 마냥 보채기는." "어쭈. 한국말 많이 늘었다, 너? 그런 말은 어느 새끼한테 배운 거냐?" "프로비던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어느 날라리 인턴이 그러더라고. 찢어진 손 소독하고 꿰매는데 어찌나 느린지, 빨리 좀 하라 했더니……." 흘끗 강호를 쳐다본다. 시선이 동시에 부딪쳤다. "바람난 과부 마냥 보채기는." "바람난 과부 마냥 보채기는. 새끼!" 둘이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누가 남강호 아니랄까 봐 끝에 꼭 욕을 하나 더 붙였지만. 그러면서 당시 다쳤던 태양의 손을 턱 잡아 당겼다. 이리 저리 뒤집어보고는 만족스레 웃는다. "거 누구 솜씬지, 흉터 하나 없이 잘 꿰맸구만." 강호에게 붙잡힌 손을 바라보다 태양도 결국 씁쓸하게 웃는다. 한국에서 박경식과 그렉의 재판에 증인으로 서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파일럿 훈련 과정에서 어처구니 없는 다툼을 벌여 얻은 상처였다. 성적이 톱을 달리면서도 차갑고 냉소적인 태양의 태도에 평소 반감을 품고 있던 동급생들과 수업 중에 큰 몸싸움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양에게서 웃음이 사라진 건 아마도 그 해부터였을 거다. 두 팔 벌려 따스하게 맞아줄 줄 알았던 재인이 마치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게 대했던 기억. 모질다, 모질다. 섭섭하다, 섭섭하다. 원망만 잔뜩 했지, 정말로 그가 태양 자신을 잊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비록 전화도 받지 않고 편지에 답장도 없는 재인이었지만, 매 순간 자신이 돌아오길 그가 기다리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태양은 고개를 힘껏 저으며 옛 생각을 털어 버렸다. 강호가 들고 온 신문들을 모아 테라스로 나가는데, 그런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강호가 지나가듯 질문을 던진다. "이제 괜찮은 거냐?" 태양이 말 없이 강호를 쳐다본다. 무표정한 눈빛에서는 도무지 속을 읽을 수 없다. 재인이 나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내듯 철컥 내려지는 높고 두꺼운 장벽.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강호는 미세한 변화를 분명 감지했다. 대체 저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얼마 전에 우연히 만화를 봤는데, 꽤 골 때리는 녀석을 하나 발견했다."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으로 강호가 다른 화제를 꺼낸다. 태양은 시선을 다시 내리며 신문을 펼쳤다. 대신 귀는 열어뒀을 거다. 테라스 문을 사이에 두고 강호가 자신의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꼭 똥깡아지처럼 생긴 짱구란 놈인데, 하루는 말이다. 그 똥깡아지의 엄마가 짱구 자식한테 말했어. '짱구야아, 왜 흰둥이 밥 안 줬니! 흰둥이 밥은 짱구가 주기로 했었지? 짱구는 흰둥이를 사랑하지 않아?' 라고." 성우라도 된 것 마냥 강호가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를 낸다. "그러자 나불대는 똥깡아지 반응이 예술이야. 벽에 팔꿈치를 짚고 기대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지. '사랑해.'라고.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여기까지 말한 강호는 태양이 쳐다볼 때까지 침묵을 고수한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태양이 고개를 들었을 때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아.'" 이제 태양은 강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사랑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 탁. 태양이 보던 신문을 접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강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다가 비웃듯이 짧게 웃으며 거실 소파로 와 앉았다. "걱정 마. 난 강아지를 키울 생각은 없으니까." "너, 재인이는……." "그 녀석은 강아지가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여재인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강호의 말을 가로막으며 태양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럼, 왜 같이 사냐? 설마 너……." 잔뜩 굳어진 어조로 말을 꺼내보지만, "복수 같은 걸 생각할 정도로 내가 한가해 보이나?" 금방 눈치 챈 태양에 의해 다시 말을 맺지 못한다. "설명이 필요해? 어째서? 3년 전에 이미 형은 그 녀석한테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새삼 여재인을 보니까 마음이 바뀌었어? 왜지?" "너야말로 무슨 소리냐?" "이쁜이, 이쁜이! 그딴 호칭으로 잘도 부르더군! 예전엔 오프만 되면 어디론가 휭 사라지던 사람이 잘도 아침부터 찾아와 밥상 차린다고 부산을 떨어대고! 그렇게 그 자식이 이쁘면 처음부터 형이 데려가 살던가 했어야지!" 버럭 언성을 높이는 태양을 강호도 노려본다. 하지만 곧 눈에서 힘을 풀고 소리내어 웃어 버린다. 태양으로선 강호의 그 웃음이 더 기분 나쁘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눈빛도 거슬린다.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에 얼굴에서 열이 났다. 조금 붉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곧 이어 길게 내어 쉬는 한숨. "난 단지 여재인을 알기 위해서 같이 사는 거야, 형. 그에 대해서 알고 나면 나도 그 녀석처럼 잊기가 쉬울 테니까.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더니 실제의 그와 내 머리 속에서 만든 여재인이 잔뜩 엉켜서 풀어지질 않더라고." 그는 꽤나 지쳐 보인다. 혼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해왔는지 알겠다. 하지만 강호는 좀더 단호하게 표정을 정돈했다. 아니, 그보다 태양의 설명이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찌푸린다. "네 새끼가 사랑했던 작은 별이 결국 네 속에서 만든 환상일 거라는 얘기냐?" "그럴지도 모르기 때문에 확인을 해보려는 거야." 강호는, 조금 전 재인의 입가에 묻은 딸기쨈을 거리낌 없이 제 입으로 가져가던 태양을 떠올렸다. "넌 조금도 자라지 않았구나. 다섯 살짜리 짱구보다 못한 새끼야." 강호의 말에 태양은 시선을 내린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결국은 참지 못한 강호가 그의 셔츠 가슴팍을 세게 틀어쥐었다. "너, 재인이가 탐은 나냐?"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들어 마주하는 태양의 눈에도 노기가 어린다. "갖고는 싶은데 책임은 지기 싫고, 도망갈 구석이나 만들어놓고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어." 눈빛으로 그만 하라는 경고를 던지고 있지만, 그것에 굴할 강호가 아니다. "정신차려, 남태양! 결국은 같이 살고 싶어서 아냐! 재인이가 좋으면 똥깡아지처럼 솔직하기라도 하라고! 그 자식 생각 하면서 어두운 데서 혼자 니 몸 니가 쓸어대지 말고!" 강호는 진정 화가 난 것처럼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고는 벌떡 일어섰다. "뭐? 재인이의 실체를 확인한다고? 미친 놈! 이대로라면 넌 재인이 발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평생 모를 거다!" 그리고 재인이 기다리라 한 것도 잊었는지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부서질듯한 굉음이 사그라지고 다시 집안에는 정적이 차곡하게 들어찬다. 저건 좀…… 과한 반응이다. 태양은 강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사람 홀리는 기술 한 번 대단해, 여재인. 이번에는 또 강호 형이냐? 정말이지 지겹다! 당장 너를 보지 않고 살 자신도 없지만, 평생 네 옆에서 주위 사람들을 질투하며 살 자신도 없어. 그래서 훈련 중이다. 내가 너를 포기할 수 있도록. 지금은 단지 널 직시하고, 날 훈련시키는 과정일 뿐이다. 내가 너에 대해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 건지, 그것도 차차 알아가면서. 토요일인 내일은 미주 행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주말에 시간을 비우기 위해 태양은 오후쯤 회사에 들러 조정 요청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극장으로 핸들을 돌렸다. 아동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 모양인지 매표소 앞에는 꼬마들이 몇 명 눈에 띄었다. 인솔 교사나 부모들은 표를 사고 있고, 입구에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서 있다. "여재인 매니저를 찾아 왔습니다." "아, 매니저 형 지금 외근 중인데요." 태양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눈길이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예의는 없지만 악의도 없어 보인다. 그저 솔직하고 어린 관심일 뿐. 극장의 하우스 매니저가 외근도 하나 보다.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기 위해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태양은 흘끗 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표를 받고 있던 청년이 태양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인다. 태양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극장을 걸어 나왔다. '문화예술의 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예술관과 극장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지만, 재인의 극장은 그 중에서도 다소 외진 곳에 떨어져 있어서 주차장까지 좀 걸어야 했다. 비교적 넓은 골목으로 나오자, 좀 전과는 다른 활기가 물결친다. 몸을 던진 연극배우들의 거리 홍보부터 맛보기 연주와 토막 공연까지. 팔딱거리는 젊음의 생기와 삶에 대한 진지한 시선들이 공존하고 있다. 절대 식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열정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은 붙들었다. 태양은 그곳을 통과하면서 재인도 이 분위기에 매일 합류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의 넘치는 활기와 독특한 분위기는 당연히 자신보다는 그와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알 수 없는 소외감. 태양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져 걸으며 자신을 비웃었다. 여기 왜 온 거냐, 남태양? 널 보고 여재인이 반가워할 줄 알고? 그가 너 때문에 퇴근을 서둘러 집에 같이 갈 거라 기대했나? 아직도 멀었다. 정말 그를 벗어날 수 있기는 한 걸까? 전자음이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곧장 문이 열렸다. 재인이 들어오면서 한 움큼 몰고 온 바람이 태양의 등을 스친다. 재인은 구두를 벗으면서, 돌아보는 태양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다.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완연한데 미소만큼은 꽤 밝다. "태양! 현관 비밀 번호 말인데, 되게 쉬워." "당연하지. 누구 생년월일인데." 태양은 무뚝뚝하게 대꾸하면서 식탁 위에 수저를 놓는다. 이제는 그런 말투에 익숙한지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 들어간다. 하지만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놀란 어조로 물었다. "태양 생일도 그 날이야? 우와, 나랑 같네!" "바보냐? 자기 생일을 현관 비밀번호로 쓰는 사람이 어딨다고." "하긴, 그렇다. 그럼 누구?" "……." 태양의 침묵이 길어지자, 재인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씻으러 간다. 자꾸만 무뚝뚝하게 구는 자신이 한심해서 태양은 주먹을 꽉 쥐었다 편다. 그럼에도 재인을 보면 양가적인 감정이 매순간 치열하게 싸우는 걸 어쩌지 못한다. 곧장 방으로 끌고 가 침대 위에 눕히고 싶은 마음과 차갑게 그를 무시해 버리고 싶은 마음. 하얀 수건을 목에 걸고 나온 재인의 앞머리가 젖어 있다. "떡갈비 사온다더니?" "깜빡 했어. 그런데 강호 형은?" "……." 태양은 대답 없이 된장국을 두 군데 떠서 식탁 위에 놓았다. 더 묻지 않고 재인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차례로 밥을 푸고, 밑반찬을 놓고, 태양이 볶아놓은 감자를 그릇에 담는다. 서로 말 없이 착착 식사 준비를 마친 다음 마주 앉았다. 마치 오래 된 일상 같은 느낌이다. 실은 이렇게 제대로 된 저녁을 그것도 집에서 둘이서만 먹는 건 그 날 이후 처음이다. 재인의 새 출발을 축하하던 날.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그 날 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태양이 집에 있으니까 좋다." 문득 재인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뜻이야?" 태양은 경계 어린 눈으로 재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확대 해석하지 않으려고 섣불리 뛰는 심장을 꾸짖으며. 헌데 지나치게 딱딱했나 보다. 재인의 미소가 금세 사라진다. "응? 아니. 내 말은……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으니까. 사실 태양이 비행 가 버리고 혼자 있을 때는 가끔 밥 먹는 게 시시했거든." 그럼 그렇지. "혼자라고 식사 거르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건 그렇지만." "정 심심하면 TV 앞에 가서 먹던가." "……." 짜증이 묻어나는 태양의 충고에 재인은 말이 없다. "왜 대답 안 해?" "했어." 시무룩한 대답. 그러나 태양은 물러서지 않는다. "언제?" "방금. 마음속으로 '응.' 했단 말이야." "억지도 잘 부리는 여재인." "잔소리나 잘 하는 남태양." 불평 릴레인가 보다. "여기 막 묻히고 먹는 여재인." "어어, 그걸 왜 입에 넣어?" "뭘?" 멈칫. 자기도 모르게 재인의 입가에 붙은 밥풀을 떼어 제 입에 넣어 버린 거다. 어이 없게도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버린 태양은 현재 동작 그만 상태다. 놀란 재인의 표정보다 더 놀란 태양의 눈빛이 곤혹스런 빛으로 짙게 물든다. "괜찮아, 태양. 그거 돌려 달라고 안 할게." "……." "대신 새로 네 밥풀 내가 가져간다. 됐지?" 태양의 밥그릇에서 밥을 조금 덜어 입에 넣는 재인. 이 어색한 상황을 어찌 잘 넘겨 보려 애 쓰는 티가 역력하다. 사실 그깟 밥풀 하나에 이렇게 놀라 굳어 버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왠지 태양은 웃지 못한다. 또, 웃지 못하는 자신이 당혹스럽다. "세 개잖아." "뭐?" "내가 떼먹은 건 한 갠데, 넌 세 개 가져 갔어. 두 개 도로 내 놔." 겨우 수습한다는 소리가 이 따위다. 재인은 태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풋 웃어 버린다. 그제야 태양의 꽉 막혔던 숨통이 툭 터지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입에 문다. "진짜 쪼잔한 남태양." "하! 응큼하고 욕심 많은 여재인." 한 번 시작된 불평 릴레이는 끝도 없다. 재인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결국 설거지는 태양이 했다. 좁은 부엌에서 능률적으로 서로 부딪치지 않는 것도 기술이 필요한 건가 보다. 조금만 뭐가 필요해 움직일라 치면 금세 재인과 여기 저기 닿고 마는 것이다. 태양은 소리 없는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오전에 오승진에게서 전화 왔었다." "그래? 굉장히 오랜만이네. 뭐라는데?" "내일 고등학교 동창들 몇몇 모인다고 얼굴 보자더라." "……." "설마 안 갈 거야?" "글쎄." "나 갈 거다. 그러니까 너도 가야 해."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모이는 거란다. 태양은 엄밀히 말해 졸업생은 아니지만 초대를 받았다. 중간에 전학을 갔으니 재인이 없으면 꽤 서먹할 게다. "너 내일 LA 간다 그러지 않았어?" "스케줄 취소했어." 재인의 눈이 커진다. 태양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물이 다 끓은 주전자를 들었다. 이후 말이 없어진 재인이 한참 후에야 다시 물어왔다. "왜 모이는 거래?" "희웅이 결혼하나 봐. 그 때 TV에서 봤던 진짜 커플이 그 녀석이 맞았던 건지. " 결혼 축하도 겸해서 모이는 자리일 것이다. "그럼……." 거실에 앉아 국화차를 나누어 마시며 재인이 다시 운을 뗀다. 시선을 하얀 도자기 잔으로 내린 채 신중한 어조로 질문을 던지는 거다. "거기 가면 태양이 너, 첫사랑 만날지도 모르겠구나?" "……." 이번엔 태양에게서 대답이 없다. "그 작은 별 찾으면 뭐 할 거야? 할 말은 생각해 놨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을 굳힌 듯 재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또 침묵이 흐르자, 머뭇머뭇 눈을 들어 태양을 바라본다. 태양은 재인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다가 시선이 부딪치자, 찻잔을 꼭 감싸쥐고 있는 재인의 손으로 눈을 내렸다. "찾았어." "응?" 짧게 내뱉은 태양의 말에 재인의 손에 힘이 꼭 들어간다. 아직도 김이 오르는 국화차 때문에 잔이 꽤 뜨거울 텐데. 태양은 팔을 뻗어 재인의 손에서 찻잔을 빼냈다. 다시 잡을 수 없도록 멀찍이 잔을 내려놓고도 시선을 들지 않는다. 그런 채로 태양이 다시 한 번 낮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첫사랑, 찾았다고." <그래서 지워 버렸나?> 가슴은 쉬지 않고 뛰지만 기쁨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머물지 않고 스쳐가 버리는 건 기쁨이지 사랑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기쁘지 않을 때, 사랑도 예외 없이 버려지는 것이다. 11. 토요일 낮 공연이 있기 전, 나는 오전 일찍 병원에 들렀다. 고3 때 기억재생훈련을 다 마치고 대학 때는 정기 검진만 받다가, 졸업 후에는 큰 불편도 없고 사는 게 바빠 그 동안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 오랜 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곳을 떠올리고 진작 찾아오지 않았던가 잠시 의아했다. 태양을 만난 이후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기억 연구소는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예약했던 시간에 맞춰 들어가면서 나는 조금 긴장했다. 힘들었던 시절,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낯설어서 혼란을 겪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수술 직후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던 혼자만의 치열했던 전쟁도. 때마침 회진을 끝내고 돌아온 서박사님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날 맞아주셨다. "이게 얼마만이야? 그 동안 잘 지냈어?" 친근하게 안부를 묻는 그녀에게 나도 빙긋 웃어 보였다. 서 박사님은 이 곳의 초대 소장으로 외모는 좀 깐깐해 보이신다. 하지만 은근히 뭔가를 잘 잃어버리는 건망증을 갖고 계시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내가 기억을 잃고 괴로워하던 시절, 자신의 그런 버릇을 이야기하며 털털하게 웃으셨다. "박사님은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그럴 리가 있나. 재인이랑 인학이도 이젠 완전히 성인인데." "인학이 잘 지내죠?" 나는 학구파였던 친구를 떠올렸다. 의사가 되었다고 하던데, 자신의 어머니를 점점 더 닮아가는 게 아닐까? "음. 나는 걔가 나와 같은 과로 올 줄 알았는데, 외과에서 요즘 고군분투 하나 봐." 서 박사님은 씁쓸하게 웃으며 코를 찡긋했다. 나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섭섭해하는 그녀의 심정을 가만 헤아려본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성을 받아 자란 인학은 모든 면에 조용한 노력파였던 것 같다. 그런 만큼 고집도 셀 것이다. "요즘 어때? 새로운 사람 만나고 생활하는 데 별 지장 없지?" "저, 박사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꼭 묻고 싶었다. "제 기억, 다시 살릴 수는 없나요?" "……?" "보통 잃었던 기억을 찾는 사람도 있잖아요.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계기로 되살리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아주 작은 단서로 봇물 터지듯 다 돌아오기도 하고." "재인아. 너 무슨 일 있니?" "아뇨. 그냥.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데, 꼭 알고 싶어서 좀 힘들거든요." 서 박사님은 말을 하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요인들로 고통 받는지 오래도록 봐와서 잘 알아. 그 중에서도 너처럼 자아가 튼튼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가슴 속에 크게 자리잡은 사람들은 더 많은 혼란과 죄책감에 시달린단다. 물론 내가 다 안다고는 말 안 해.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운 고통일 테니까." 서 박사님은 안타까움이 짙게 배인 한숨을 내쉬었다. "8년 전에 어렸던 재인이가 찾아와서 기억훈련을 할 때를 난 잊을 수가 없단다. 너 만큼 열심히 진지하고 끈기있게 치료를 받았던 환자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거든. 게다가 재인이 너의 경우는……."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차트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박사님, 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는 진지하게 물어오는 나를 다시 한참 동안 바라본다. 그리고는 잠겨 있던 생각에서 벗어난 듯 팔을 뻗어 침대를 가리켰다. 한 때 최면요법을 하면서 재인이 자주 누웠던 바로 그 침대였다. 시간이 이 만큼 흘렀으니 최종 진단을 내릴 때도 되었을 것이다. 기억연구소를 나와 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당시에 수술 받고 입원했던 신경외과에 들러 인사하고 갈 생각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긴 복도로 들어섰다. 외래 환자들이 몰리는 시간인지 병동 안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잠시 서서 고민하다 다들 바빠 보이기에 그냥 돌아섰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사람을. "여재인?" 눈을 가늘게 뜨면서 놀라움을 감추던 인학이 성큼 다가왔다. "너 여긴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그리고 그런 인학을 제치고 내 팔부터 잡는 남태양. 이렇게 두 사람. 나는 고개를 들어 바로 곁의 태양과 앞에 선 인학을 번갈아 보았다. 인학이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태양이 근무 중인 그를 찾아온 것 같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어제 태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첫사랑, 찾았다고.' 그럼……! 안 그래도 창백하게 굳어있던 재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친다. 태양의 첫사랑이 인학이었던 걸까? 투명한 갈색 눈동자. 가늘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 심장이 뛴다. 느리게 억지로 뛴다. 무거운 추를 단 것 마냥 내려앉는 가슴팍이 아프다. "여재인!" 갑자기 밀려든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눈을 천천히 깜빡인다. 입술을 꽉 다문 태양이 눈썹을 찌푸린 채 날 부축하고 있다. 그리고 인학은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보고 서 있다. 정말인가 보다. 정말 인학이 태양의 첫사랑인가 보다. 아아. 바보처럼 지금 뭐 하는 거야, 여재인? 더 추해지면 안 돼. 고개를 조금 흔들어 보고, 숨도 깊게 쉬었다. "인학아, 오랜만이다. 그렇지?" "음. 저녁에 너도 온다고 태양이 말하던데, 더 빨리 만나게 됐구나." 인학의 대답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은 내가 이제 괜찮아 보였는지 놓아주고 팔짱을 꼈다. "극장은?" "이제 들어가 봐야 해. 잠시 뵐 분이 있어서 들렀어." "태워줄게. 가자." 태양이 따라오라는 듯 나에게 말했다. 그 순간 인학의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거절했지만, 완강하게 버티는 태양을 끝내 뿌리칠 수 없었다. 태양에게 붙잡혀 병원 로비를 나서면서 흘끗 돌아봤을 때,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는 인학을 발견했다. 그래서인지 태양의 차에 타고 극장으로 가는 중에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인학이랑 친했어?" 내가 묻자, 태양은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보다는 인학이 아버지와 내 부모님이 가까운 사이였지.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어머니가 재혼하셨던 분이 인학이 아버지셨어. 물론 서류 상의 일시적인 결혼일 뿐이지만 인학이 아버지를 꼭 내가 가로챈 것 같잖아." 놀라운 얘기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한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라서 감히 질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인학이 어머니가 독신주의였대. 게다가 인학이 아버지 집안은 굉장히 보수적이고. 뭐 그 집안 분위기는 나도 조금 아는데, 순종적인 며느리도 견디기 힘든 구석이 있어." "인학이도 알아? 자기 아버지가 너희 어머니랑……." 이런 걸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궁금하긴 하지만, 실례일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묻지도 않은 걸 먼저 선선히 말해주고 있는 태양이니까. "이젠 알지." 굉장히 얽히고설킨 인연이다. 나는 태양과 인학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을 떠올렸다. 갑자기 가슴이 푹 내려 앉는 것처럼 아득하고 답답했다.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그 때의 그 심정이 다시금 밀려온다. 왜일까? 인학이 태양의 첫사랑이란 사실이 왜 이렇게 아플까? "말도 안 돼!" 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답에 신음을 내뱉었다. 운전하고 있던 태양이 나를 돌아보며 괜찮냐고 묻는다.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 있는 걸 확인하자, 그가 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어디가 안 좋아?" 재차 태양이 물었지만, 나는 그냥 눈을 감고 시트에 완전히 기댔다. 나…… 어떡해! 태양을 좋아하나 봐! "좀 쉬었다 가자." 숨이 찬 어조로 부탁하자, 태양이 묵묵히 시동을 끈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태양이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다시 상처 입지 않겠다던 맹세는 어디 버리고, 이미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버린 태양을 좋아하게 되다니! 펄떡이는 혈맥을 쓸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주는 태양의 손가락이 시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쓰라림과 두려움이 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청담동에 위치한 지하의 작은 술집을 전세 냈나 보다. 입구에서부터 승진의 글씨로 보이는 안내장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저녁 공연이 끝난 뒤 극장에서 늦게 출발한 나는 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졸업 후 처음 만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다. 재수를 했기 때문에 대학 가서도 접촉할 계기가 부족했고, 졸업하기 전까지 핸드폰도 사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나마 가끔 승진이 시비 걸듯이 집으로 생존 확인 차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 다였다. 두꺼운 나무문을 열자마자 조용했던 골목에 왁자한 소음이 쏟아져나왔다. 그게 미안해서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생소한 내부 정경이 시야에 펼쳐졌다. 시간이 밤 열 시쯤 되고 보니, 대부분이 조금씩 취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떠들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고, 살이 붙거나 빠져서 알아보기 힘든 얼굴들도 있다. 동창회라는 거 이런 기분이구나. 반가움 반, 생소함 반. 나는 천천히 미소 지으며 한 발짝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 때, "와, 재인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번개처럼 시끄러운 내부를 갈랐다. 그러자 일제히 그 많은 녀석들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소음이 조금 잦아든 것 같은 순간이 잠시 앉았다 지나가고, 금세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반갑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서너 명의 녀석들이 동시에 날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재훈과 희웅이 허겁지겁 달려와 반가워 하는데, 승진은 정작 인사도 없다. 다만, 동창 녀석들에게 둘러싸인 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씩 웃었을 뿐이다. 걸죽한 인사와 소탈한 안부가 오고 갔다. 다들 고등학교 때보다 더 스스럼 없이 날 대해주었다. 이제 어른이라는 얘기다. 못나면 못난 대로, 잘나면 잘난 대로 각자의 인생을 스스로 앞가림하면서 살고 있는 어른들이란 거다. "더 멋있어졌다, 재인아." 등 뒤에서 들려온 말에 흘끗 돌아보자, 말끔하게 생긴 청년이 서 있다. "정수구나!" "응. 넥타이 맨 건 교복이나 양복이나 똑같은데, 이것 참 무지 어색하다." 예전처럼 말 끝에 고개를 살짝 숙이는 버릇은 여전하다. 나는 반가움에 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느낌이구나. 연신 속으로 음미하는 중이다. 여전한 바탕 위에 점점이 느껴지는 변화들을 발견하는 기쁨도 소소하고, 낯설지만 다시 보면 똑같은 버릇과 표정을 알아채는 반가움도 살갑기 그지 없다. 서로 동시간을 살아온 세월 만큼 잘 견뎌온 그들이 대견하고 든든한 기분. 재미있다. 나는 진심으로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밝게 웃었다. 정수의 등 너머로 주뼛거리면서 다가온 선민이 명함 한 장을 쑥 내밀며 설명한다. "재훈이랑 같이 학교 앞에 서점 열었어. 한 번 놀러 와." 만화방도 아니고 비디오방도 아니고, 서점이라니. 나는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약도가 적힌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선민은 식은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해 보인다. "넌 좀 낫다. 여기 있는 다른 녀석들 죄다 이 명함 받고 어찌나 놀려대는지." 재훈이와 선민이. 확실히 좀 무게도 많이 잡고 짓궂긴 했었다. 그런데 이제 학교 앞 서점의 어엿한 주인이라니. 역시 좋다. 동창회라는 거. 오길 잘 한 것 같다. 태양이 아니었으면 이런 모임 올 엄두도 못 내었을 게 분명하다. "오승진 우리 학교 선생 된 거 알지? 저 녀석 삼촌이 재단 이사장이래. 대학 갈 때 학과 선택 때문에 아버지한테 무진장 두들겨 맞더니만, 나중에 교대 가는 걸로 흥정을 봤었잖아. 결국 학교 물려받을 건가 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는 승진을 바라보았다. 무언의 시비 중인가 보다. 그 동안 연락도 없고, 보자 할 때마다 약속 어긋났던 거. 문득 나는 조금 어둑한 실내를 살폈다. 내가 온 걸 알 텐데, 태양은 어디에 있는 걸까? 자기는 올 거니까 재인도 꼭 와야 한다고 실컷 우겨놓고선. "혹시 네 바늘 찾냐?"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는 여전하다. 나는 코 앞까지 바싹 다가온 승진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바늘?" "아직도 기억 못하냐? 넌 실이고, 남태양은 바늘이라고 네가 그랬었잖아. 야야, 실이 당기면 못이기는 척 바늘이 끌려온다는 말 할 때 얼마나 웃겼는데." 큭큭거리며 웃는 승진의 말투는 가벼웠다. 하지만 눈빛만은 진지하다. 놀라운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진을 마주 보면서 나는 곰곰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 네가 말했던 그 바늘? 내 반지를 네가 줬다던?" 내가 묻자, 승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혀를 찼다. "너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여재인? 실 끊어진 바늘처럼 딴 놈한테 끌려나간 남태양은 여기에 없다." 둘러 보니 인학도 없다. 그러고 보니 태양은 인학과 함께 나갔나 보다. 나는 근처에 놓여 있는 물컵을 들어 쭉 마셨다. 왜 그런지 속이 탄다. "승진아." 긴장이 과도했는지 손에 땀이 맺혔다. 그래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건 꽤 중요한 문제니까. "나 고등학교 때 말이다." "그래." "태양이 좋아했었냐?" "……." 승진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린다. 한참의 침묵 끝에 승진은 내 어깨에 팔을 올려놓고 가만히 감쌌다. "기억나지 않으면, 애써 되살리려 하지 마." "하지만……." "한 때는 그래, 나도 재인이 니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미치게 속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너도 결국은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여재인이니까. 내가 꼭 듣고 싶었던 말이다. 놀랍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승진을 바라본다. 이렇게 진지하고 솔직한 녀석이었나? "그래도… 나한테 네 감정을 물을 정도로 절박한 거라면, 분명 가볍진 않았을 거다." 결국, 좋아했다는 말인가 보다. 여재인이 남태양을. 그렇다면 내 첫사랑은……!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태양에게만 의지했던 거구나! 표정에 내 심정이 다 드러났나 보다. 한결 어른스러워진 승진의 눈빛이 날 따뜻하게 감쌌다. 도닥도닥. 어깨를 감싼 손도 그렇게 응원을 해온다. "너 그 때 얼마나 얄미웠는지 아냐? 어딜 가나 남태양을 데리고 다녔지. 난 가끔 말이다. 우리 중에 네 손을 잡아본 유일한 녀석이 남태양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분명 그 시절에도 태양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상상해보기 어렵지 않다. 태양은 좋아할 구석이 많은 사람이니까. 무뚝뚝할 뿐이지 속이 깊고 놀랍도록 배려를 잘 하는 사람이다. 그 동안 자신에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씁쓸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태양이라서. 그리고 태양이 그 사실을 이용해 지금의 날 놀리지 않아주어서. 아마 그 시절에도 내 부탁을 많이 들어주고 그랬나 보다. 내가 왜 그렇게 태양에게 의지를 했는지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그 때처럼 또 다시 짝사랑이라니. 참 별로다. "오 선생! 뭐해? 재인이 혼자 독차지할 거야?" 저쪽에서 희웅이 소리를 지르며 부르자, 승진이 피식 웃는다. "놀자, 여재인! 다른 녀석들 모두 너랑 얘기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그러면서 무리들 속으로 내 등을 떠민다. 나는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와서 보니 나는 참 좋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것 같다. 가슴 한 쪽은 우리하게 아프지만, 진심으로 즐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야, 여재인. 너 술 잘 마시냐?" 한 녀석이 물어오자, 다른 녀석들도 궁금하다는 듯 대답을 재촉한다. "마셔 본지 얼마 되진 않았는데, 괜찮은 것 같더라." "정말 괜찮아?" 녀석들은 내가 아플까 봐 걱정인 모양이다. 수년이 흘렀어도 몸이 약한 여재인은 모두가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좀더 건강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여재인이 아니라 자신들과 즐겁게 잘 어울리는 밝고 튼튼한 여재인을. "뭐해? 술 돌려. 이렇게 돌아가면서 건배하는 거지?" 나의 외침에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동참했다. 또 다시 시끌벅적해진 분위기가 자정을 향해 갈수록 화기애애해졌다. 다들 한 번씩은 내 잔에 부딪쳐왔고, 그 때마다 반갑다는 말과 눈빛을 나누었다. 그들은 거친 세상에 대해 아무런 무기도, 힘도 없던 시절을 함께 보낸 전우였다. 그 때의 우리는 빈 손과 맨몸으로 싸웠고, 오직 위안은 곁에서 싸우고 있는 서로의 모습이었다.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해도 한 공간 안에서 묵묵히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준 친구들. 나는 다시 만난 그들과 어울려 거리낌 없이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다. 오늘 밤은 얼마든지 그들 속에서 취할 용의가 있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왠지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걱정 마. 여재인. 내가 오늘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그냥 실컷 놀다 가." 오승진이 등뒤로 다가와 저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해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꽤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을 떠난 녀석들은 거의 없었다. 웬일인지 모두가 한데 뒤엉켜 키득거리고, 추억을 되씹으며 서로 놀려대길 멈추지 않는다. 나는 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머리도 좀 아팠다. 어쩌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한 녀석이 다가와 나를 덥썩 안았다. "재인아, 시계 보지 마. 오늘 밤은 끝까지 우리랑 노는 거다. 응?" 술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서 넘실대는 모양이 다 보인다, 녀석아. 꼬인 혀로 저렇게 투정을 부려대는 친구놈이 조금 귀여워서 나는 피식 웃었다. "아까 너 들어오는 거 보고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와아, 여재인! 한 개도 안 변했구나! 그러면서 막 감탄했잖아. 내가." 자꾸 말을 붙이며 녀석이 아예 내 목에다 제 코를 비벼댄다. 잘 타일러서 떼어놓을 참으로 나는 그의 볼을 가만히 도닥였다. 그 때 웬 손 하나가 다가와 녀석의 얼굴에 닿아있던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꽤 화가 많이 난 듯한 태양이 굳은 얼굴로 서 있다. 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두근 두근. 내 심장이 또 그를 아는 체 한다. "일어나, 여재인." 딱딱한 목소리가 위압적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마저 반가워서 그를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만다. 그러자 태양의 눈썹이 꿈틀 올라간다. "취했나?" 되게 무섭게 뭐라 그런다. 좀 취하면 안 되나? 여기 있는 놈들 다 취했구만, 나는 좀 취하면 안 돼? 나는 잠시 술로 둔해진 머리로 궁금해하다가 그냥 털어 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확 당겨 일으키는 태양의 가슴에 얼굴을 콕 찧었다. "아앗! 아픈데." "그만 마시고 가자." 성큼. 태양이 먼저 한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야, 바늘! 실은 안 기다리고 대체 어디 갔던 거야?" 사과도 없는 태양의 짧은 말에 내가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정신이 아직 남아있는 녀석들이 이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저 둘은 여전하구나, 그런 표정도 있고 새삼 신기해하는 얼굴도 있다. 하지만 막상 태양은 모른다. 승진이 눈을 반짝 반짝 빛내고 있다는 것도. "너……!" 숨이 막히는 것처럼 창백하게 굳는 태양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그런 태양을 향해 싱긋 웃었다. "나 기억 돌아왔다, 태양아." 술김에 거짓말도 척척. 꽉 틀어잡힌 팔이 아픈 줄도 모르겠다. 내일이면 멍이 시퍼렇게 들겠지만, 상관 없다. 지금 태양의 표정이 너무 생생해서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좋지? 나 이제 너 기억 난다. 너 되게 멋있었잖아." 발음이 정확하진 않지만, 눈빛만은 반짝반짝한다. 말 끝에 나는 쑥스러워서 혼자 고개를 숙이고 키득거렸다. 잠시 그렇게 웃다가 갑자기 현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급히 나를 부축한 태양이 할 수 없이 의자에 도로 앉힌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머리 아파." 힘이 하나도 없는 내 중얼거림에 태양이 깊게 숨을 내쉰다. 가만히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어보더니, 열이 나는 것 같자 이마를 찌푸렸다. "차에 약 있으니까 갖고 올게. 약 먹고 바로 갈 거니까 저 녀석들한테 미리 인사해 놔." 내 눈에 낮게 경고를 하고 태양이 빠르게 사라진다. 고개를 들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몇몇 녀석들이 묻는다. "갈려고?" "몸이 안 좋아?" 이런, 이런. 씩씩하고 생기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실패인가? 나는 파리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농담을 던졌다. "추억은 방울방울이지. 여재인은 변함이 없다는 것도 보여줘야지 않겠냐?" "야야, 그래도 아프지는 마라. 맞아, 아픈 건 절대 아니다." "그래. 너 씩씩한 거야 우리도 알지. 오늘 좀 무리했나 보다. 많이 마시게 해서 미안." 진짜 친구들인가 보다. 이 녀석들, 꽤나 다정하고 진심으로 걱정을 해준다. 괜히 글썽해지는 눈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돌아섰다. 휘청. 너무 빨랐나? "조심해, 여재인."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는지 인학이 어깨를 붙들어준다.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당황한 나는 어쩐지 그의 얼굴 보기가 힘들다. 먼저 간다고 인사하고는 무작정 입구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몇 발짝 떼지도 않아서 문득 또 궁금해져 버렸다. "인학아." 아직 그 자리에 서서 날 보고 있던 그가 뭐냐는 듯 눈썹을 들어올린다. "예전에 나 기억 치료할 때 말이야. 최면 요법……." "새삼 그건 왜?" "어째서 태양이 얘긴 하나도 해주지 않았어?" 내 물음에 인학이 입술을 꼭 깨문다. 그러더니 가까이 다가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왜냐하면, 굳이 널 아프게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린아이처럼 인학의 설명에 의존해 기억을 메워나가던 시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양은 인학과 자신에게 작은 존재가 아니었을 텐데. 이미 태양은 떠나 뒤니까, 그래서 굳이 얘기할 필요를 못 느꼈던 걸까? 정말 혼자서 절절히 짝사랑했나 보다. 인학이 일부러 말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인학은 흘끗 뒷쪽을 쳐다보고는 내 귓가에 바싹 다가와 속삭였다. "너하고 있을 때의 태양을 나는 잘 몰랐지. 분명히 나하고 있을 때와는 달랐을 거거든." 이보다 더 잔인한 말이 있을까? 나는 하얗게 질린 채 인학의 차가운 미소를 바라보았다. 가끔 서늘하게 날 노려보던 그 시절의 인학이 떠올랐다. 친절하진 않아도 나에게 성실하게 대해 줬었는데. 어쩌면 그도 당시에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근처에 기댈 곳을 찾는데, 태양이 돌아와 약을 내밀었다. 진통제를 입에 넣고 태양이 입술에 가져다대주는 물을 간신히 넘겼다. 다시 앉으려는 나를 태양이 붙잡아 일으킨다. "집에 가자." 그 낮은 한 마디에 불안한 심장 박동이 잦아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고장 나면…….> 분해해서 고치는 게 아니라, 그에 맞는 열쇠를 찾아주어야 한다. 사실,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12. 밤의 도로를 달리는 차안은 조용했다. 나는 눈을 감은 척 하면서 시트에 기대 창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그 유리창에 비친 태양을 보는 거다. 유연하고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핸들을 쥐고 있는 모습. 옆 차와 뒤 차를 간간히 번갈아 살피는 잔잔한 눈빛. 그리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 모든 게 참 우아하고 남자답다. 남들처럼 향이 강한 스킨은 쓰지 않지만 은근하게 맡아지는 그만의 향기가 있다. 햇살에 잘 말려 소독된 청결한 냄새.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 중에 섞인 그만의 미세한 향 분자들을 최대한 빨아들이려 애쓰면서. 다시 길게 내어 쉬는 숨소리를 들었는지 태양이 문득 날 돌아보았다. "여재인, 노래 한 번 불러 봐라." 갑자기 저런 요구를 하다니. 나는 그의 엉뚱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나 노래 되게 못해." "그걸 내가 모르냐? 단지 오랜만에 메기가 듣고 싶어졌다. 한번 불러줘 봐." 메기라니. 그게 뭔데? 혹시 그건가? '옛날의 금잔디 동산의 메기.' 어쩌구 하는 노래. 끝까지 알지도 못하는데다가 진짜 노래 불러본지 오래됐다. 아마 뇌수술 이후로는 거의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흥얼거리거나 하지도 않는다. 안 그래도 못 불렀는데, 수술하고 나서부터는 도무지 음정을 하나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음치라는데 왜 자꾸 시켜? 약점 잡아 놀리는 취미 있어?" 조금 날카롭게 대꾸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차 안의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는다. 태양의 옆얼굴도 굳어져 있다. 그는 그냥 부탁한 건데 내가 너무 과민했다. "미안. 하지만 진짜 못해. 아마 들으면 너도 시킨 거 후회할 거야." "됐어. 변명하지 마." 한숨과 함께 뱉어낸 태양의 음성에 가슴이 묵직해진다. "인학이랑은 어디 갔었어?" 분위기가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불쑥 또 묻고 말았다. 원망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화 내면 어쩌지 싶어 눈치를 본다. 그런데 의외로 태양은 선선히 대꾸해준다. "인학이 아버지 잠깐 뵈러. 댁이 그 근처라고 해서." "아." 그 분이 한 때 태양의 아버지였다고 했었지. 참 대단한 인연도 다 있다. 첫사랑인데다, 아버지도 같다니. 게다가 서인학과 남태양, 둘다 무뚝뚝하기도 하고. 쳇. 그런 거 하나라도 닮았으니 너희는 참 좋겠다. 속으로 이죽거리고 있는데, 솔직하게 드러난 내 표정을 보고는 태양이 묻는다. "'아.' 라니?" "말 그대로 그냥 '아.' 야." "그러니까 무슨 '아.' 냐고?" 집요한 태양의 질문에 나는 버럭 성질을 내고 만다. "이래저래 만날 핑계가 많아 좋겠다고!" 이어지는 침묵. 나는 또 자연히 긴장하고 만다. 심해지는 두통을 꾹 눌러 참으며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가눈다. 그 때 아주 여유롭게 핸들을 돌려 우회전을 하면서 태양이 물었다. "질투하는 거냐, 여재인? 하긴 뭐 이게 처음도 아니지만." 숨이 막힌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다니. 애써 가다듬고 있던 호흡이 더 답답하게 가슴 속을 채우는 것 같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동안 태양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고 돌아 보는 그가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돌아본다. "질투는 아무한테나 하나?" 화가 나서 최대한 차갑게 내뱉었다. 조용해진 차 안에 그 말이 유독 날카로운 여운을 남긴다. 태양은 말 없이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후회된다. 이러는 건 정말 자신답지 않다. 더 이상 추해지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급하게 차문을 열고 내렸다. 저만치 걸어가고 있던 태양이 그 소리에 뒤돌아서서 리모컨으로 차문을 잠근다. 척!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에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그대로 태양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취소할게! 그 말 진심 아니야! 질투 맞아! 질투 맞을 거야!" 태양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등에 대고 다급하게 말했다. 우뚝 멈춰서 버린 태양이 앞쪽에 단단히 둘러진 내 팔을 내려다본다. 너무 솔직했나 보다. 그래도 아닌 척 하는 건 못하겠다. 좋아했었다는 걸 알았고, 그 때도 그가 날 뿌리치진 않은 것 같으니까 조금 용기를 내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여재인." "태양아."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천천히 팔의 힘을 풀면 그 속도만큼 천천히 돌아서는 태양의 얼굴이 보인다. 그 표정이 묻고 있다. 진심이냐고? 그걸 읽자마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가만히 내 머리를 양 손으로 붙잡아 멈추게 하는 태양이 있다. 천천히 기우는 달빛 아래에서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눈을 감는 내가 있다. "갑자기 머리 흔들지 말랬지. 그러다 또 쓰러지면……." 나직하게 속삭이는 태양의 음성이 어두운 공기 중에 퍼져나간다. 점점 가까워지는 호흡에 미친듯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나는 차라리 숨을 참았다. "그 땐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알싸하게 마비된 혀에 닿는 태양의 입술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걸 잊기로 했다. 기억을 찾았다고 거짓말을 한 채 욕심을 채우고 있는 나도.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면서 내게 키스하는 태양도. 좋아하니까. 오래 전에도 좋아했으니까. 비록 기억을 잃었다 해도 이렇게 다시 그를 마음에 담은 나니까. 조금은 태양을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을 풀어주었다. "읏!" 갑자기 태양이 두 팔에 힘을 꽉 주며 등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나는 몸이 허공에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앗, 태양."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태양이 나를 안은 상태 그대로 들어올려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폈지만 다행히도 경비 아저씨는 꾸벅꾸벅 돌고 계신다. 야심한 시각. 보는 사람은 없지만, 엄연히 공중장소였다. 곳곳에 CCTV도 있고, 어디서 누가 불쑥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볼이 발갛게 익어 버린 것처럼 뜨겁다. 몸을 빼기 위해 살짝 틀자, 태양이 거칠게 잡아당긴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그의 팔이 날 감싸고 있다. "술 냄새가 지독해, 여재인." 집 현관으로 들어가자마자 키스할 듯이 입술을 가져오던 태양이 말했다. 금방 고개를 숙이며 피하자, 내 턱을 쥐고 쿡 웃으며 다시 농담이었다 한다. 또다. 진짜 농담도 희한하게 하는 남태양이다. 태양은 거침 없이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저 앉히듯이 날 침대 위에 밀어놓고 곧장 허리를 숙여 키스를 해온다. 손으로는 바쁘게 셔츠 단추를 풀고 있다. 그러면서 기술도 좋게 입술을 떼지 않았다. 태양의 혀가 내 입안을 온통 헤집는 느낌이 몽롱하면서도 짜릿하다. "하아, 태양. 아아, 잠깐!" 상체가 완전히 드러난 태양이 내 셔츠도 벗겨내려 하자 자연 움츠러든다. 태양의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적당히 붙은 근육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부끄럽다. 준비도 안 됐는데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조금만 천천히." 내 말에 피식 웃으면서 태양이 이마에 키스해준다. 자신의 손을 말리듯 잡고 있는 나의 손등에도 정말 천천히. 막 벗겨지다 제지되는 바람에 살짝만 드러난 내 가슴에도. 한 없이 부드럽고 참기 힘들 만큼 관능적 입술이 촉촉하게 닿는다. 그러다 문득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유심히 본다. 거북이 모양의 팬던트다. 좀 특이한 모양이라 그런가 보다. 말 없이 그 옥을 쓰다듬던 태양이 조금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마주보는 내 얼굴을 한참 응시하더니 목걸이를 벗기려고 한다. "안 돼!" 내가 그의 손에서 팬던트를 빼내며 몸을 움츠렸다. "거슬려도 참아. 이건 안 뺄 거야." "왜?" 잠긴 음성으로 태양이 묻는다. "몰라." 모른다. 아무튼 안 된다. 목걸이를 빼면 이상하게 아팠다. 마음이 불안하고 악몽도 더 심하게 꾸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여재인." 나직한 한숨처럼 피부에 닿는 태양의 속삭임이 마법처럼 날 감쌌다. 스르르 안도하며 몸에 힘이 빠진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양이 날 뒤로 눕혔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람 가슴을 떨리게 할 수 있는가 보다. 나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눈꺼풀에 닿는 태양의 입술이 낯설지가 않다. 바르르 떨자, 태양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성대 저 밑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깊은 울림이 바로 곁에서 나를 떨게 만들었다. 천천히 턱을 타고 내려가는 촉촉하고 예민한 입술. 그 감촉이 점점 강도가 세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완전히 발가벗겨진 내 상체에 닿아있는 태양의 혀를 보고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 미치도록 섹시했다. 유두를 살짝 스쳐갔을 뿐인데 벌써 아래 쪽이 뻣뻣해진다. "아앗. 태양. 그만! 제발 그만해." 배꼽 주변을 쓸던 입술이 허리와 옆구리 사이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빨기 시작했다. 아프면서 짜르르한 감각이 두 다리와 가슴으로 온통 퍼져나갔다. 눈을 떠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귓속도 멍해서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무서워졌다. 그런 지배적인 감각에 떨고 있는 몸이 내 것 같지가 않아서 울음이 새어나왔다. 아아, 바보 같아! 가만히 손끝으로 눈물을 훔치다, 문득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태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아팠나?" 잔뜩 쉰 음성으로 묻다가, 내가 고개를 젓자 한숨을 푹 내쉰다. 태양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더니 금세 또 입술을 내렸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를 두 손으로 다정하게 넘긴 채 고정하듯 잡아주었다. 또 다시 정면으로 마주치는 두 눈이 진지하게 서로를 응시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불쑥 고백해 버렸다. "기억 돌아왔다는 거, 사실은 거짓말이야." 태양과의 사이에 거짓은 두지 않아야 할 것 같아서. 당장 괴롭더라도 그에게는 진심만 담아 보여주고 싶다. 맞을 각오도 했는데, 놀라거나 화를 낼 줄 알았던 태양은 오히려 담담하다. "알고 있다." "어, 어떻게?" "내가 아는 여재인은 노래를 못 해도 열심히 부르는 녀석이었거든." "……!" 태양의 설명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고통스레 눈을 감았다. 아까 날더러 노래를 불러보라고 한 건 그래서였나 보다. 기억을 되찾았다고 한 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널 어찌 해야 할까?" 태양이 나직하게 묻는다. 그런 태양의 머리칼을 다시 한 번 쓸어넘겨주며 내가 말했다. 눈에 그렁그렁한 수분이 가득 들어찬 얼굴로 고집스레 건네는 선언. "나 오늘 여기서 잘 거다." "……!" "내일도 여기서 남태양하고 같이 잘 거야." "여재인." "대신, 태양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모레도, 그 후에도 계속 이 침대에서 잘 거니까." 결국 또 내가 이겼다. 차례로 씻고 잠옷도 꼭꼭 챙겨 입고 나란히 누워 우리는 잠을 청했다. 유난히 오래 샤워를 한 태양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눕자마자 엉겨붙는 내 팔다리로 인해 금세 따뜻한 온기를 찾았다. 온기인지 열기인지는 굳이 구분할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는 분명 밤새 죽도록 섹스할 각오를 하고 이 침대로 오라고 했었다. 나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태양은 벌써 잊은 걸까? 아니면 지금 내가 취한 상태라서 건드리지 않으려는 건가?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려 미치겠는데, 태양은 이미 눈을 감고 있다. 그의 가슴 위에 올려진 손끝으로 가만히 잠옷 위를 쓸자, 곧장 태양의 손을 다가와 제지한다. "날 시험하지 않는 게 좋아." 깊고 낮은 속삭임이 예민한 내 귓가를 붉게 물들였다. 꽉 잡고 있던 내 손을 밀어내고 태양은 등을 돌려 눕는다. 그의 넓은 등이 갑자기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어둑한 방안에서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잠시 숨만 쉬다가, 나는 곧바로 태양의 몸을 타고 넘었다. "으앗!" 하마터면 침대 밖으로 떨어질 뻔 했다. 강한 팔이 내 몸을 당겨 안아주지 않았다면 떨어졌을 거다. 시름 어린 한숨이 태양의 입술에서 내 이마로 날아왔다. "여재인. 대체!" "등 돌리지 마, 태양. 나 아무 짓 안 할 테니까 그냥 바로 자. 응?" "……!" 침묵이 흘렀다. 태양은 고민 중인지 나를 안은 채 꼼짝도 않는다. 그러다가 몸을 틀어 방향을 돌렸다. 그와 함께 내 몸이 안전한 벽 쪽에 놓여진다. "기억만 찾아라, 여재인. 오늘의 복수를 실컷 해줄 테니까." 낮게 쉰 음성으로 경고한 뒤에 팔을 거두어갔다. 똑바로 눕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 태양.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만 고백한다. 그러자 금세 가슴 속이 축축해지고 눈가가 시큰거린다. 짝사랑은 이런 거구나. 굉장히 아픈 거구나. 그냥…… 이건 다 지나가는 열병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온전한 나로 다시 회복되어야 할 텐데. 아니, 아니다. 열병이면 안 된다. 지나가 버려도 안 된다. 그냥 일상처럼 오래도록 우리는 죽 함께였으면 좋겠다. 너는 사랑이 아니어도 내가 네 몫까지 두 배로 사랑하면서 앞으로도 영원히 스쳐 지나가지 않는, 한결같고 지루한 일상이었으면 좋겠다. "술주정뱅이 여재인. 일어나." 아직은 어둑한 미명 속에서 태양이 날 깨웠다. 약을 먹고 자서 그런지 다행히 두통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무거운 잠에 짓눌린 나는 쉽게 눈을 뜨지 못한다. "이제 아침밥은 네가 챙겨 준다며. 나 나가야 해." 그제야 빼꼼히 눈을 뜨고 우뚝 서 있는 태양을 올려다본다. 꼭 그 날 같다. 처음 이 집에 업혀 와 깨어났던 첫 날 아침. 그 때도 그의 얼굴은 저 높이에 있었다. "오늘 비행 있어?" 잠을 다 털어내지 못한 채 낮게 묻자, 태양이 허리를 굽혀 내 턱을 들어올리더니 빤히 들여다본다. 잇, 세수도 안 했는데. "3박 4일 일정이다." "어디 가는데?" "파리." "너무 멀다." 내 말에 태양의 눈이 착 가라앉는다. 천천히 내려온 그의 시선이 내 입술로 향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뒤로 쑥 물러나며 허리를 폈다. 윽. 뭐야, 사람 무안하게시리. "맞아. 꽤 멀지." 돌아서면서 대답하는 태양의 음성이 깊게 잠겨 있다. 아아, 어쩌지? 아침밥을 생각하며 일어서려다 나는 좀 난감해져 버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만 듣고도 금세 허리 쪽에 힘이 들어가 버린 거다. 욕구불만이 심각하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려서 못살겠다. 닿고 싶은데 눈 앞에 놓고도 마음대로 닿질 못하니 심각하게 몸이 반항을 한 거다. 왜 이렇게 단순하냐, 여재인! 철 없는 십대도 아니고. 좋아한단 감정을 깨닫자마자 이렇게 성급해지다니. "하아, 태양……. " 가늘게 혼잣말처럼 그의 이름을 뱉어본다. 열이 나는 걸 보니 볼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을 게 뻔하다. 문득 고개를 들다가 방문 앞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태양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 아직 안 나갔어?" "어디 아프냐?" "아니!" 금방이라도 다가올 듯한 태양의 물음에 급히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손을 쫙 펼쳐 앞으로 내뻗기까지. 그 모습에 태양은 잠시 멈칫 했다가, 알겠다는 얼굴로 피식 웃어 버린다. 세상에. 민망해서 돌아가시겠다. "씻고 얼른 밥 차려. 수백 명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몸이 아침을 굶어서야 되겠냐?" 못 산다. 남태양은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탈이다. 예전에 내가 버벅대며 둘러댄 변명을 그대로 써 먹는다. 태양이 등을 돌린 사이 나는 재빨리 욕실로 달려갔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한참 동안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그래도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 아래쪽을 난감하게 내려다본다. 할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쉰다. 옷을 벗고 샤워기 밑에 섰다. 쏴아아아. 온 몸으로 사정 없이 쏟아지는 냉수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태양을 언제 덮칠지 모른다. "어. 황태국이다." 급하게 몸을 닦고 머리를 털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한 솥 가득 따끈한 국이 끓여져 있다. 밥솥에는 갓 지은 밥이 고슬고슬하게 익어 있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살짝 배를 문지르며 히죽 웃는다. 정말 좋아. 막 행복해진다. "얼른 안 퍼오고 뭐해?" 식탁 의자에 앉아서 심통맞게 재촉해오는 태양도 전혀 얄밉지 않다.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그를 보고 생긋 웃었다. 자꾸만 환한 웃음이 난다. "맛있겠다. 맛있겠다." 황태국을 앞에 놓고 태양이 먹든 말든 상관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조심 조심 입에 넣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아아, 구수해서 미치겠다! "눈 뜨고 먹어, 여재인. 또 입 주변에 밥풀 묻히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태양도 얼른 먹어. 든든히 많이 먹어." 기쁘게 권하자, 태양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맛있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또 은근하게 물어온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응? 뭐?" "누가 그랬거든. 맛있는 걸 먹을 때 사랑이 마구 샘솟는다고." "말도 안 돼." 태양의 말에 나는 괜히 반기를 든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아서다. 그의 작은 별. 틀림 없다. "왜 말이 안 돼?" 태양이 묻자,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맛있는 국을 끓여줘서가 아니다. 내가 태양을 좋아한 건 그 이전부터다. 눈 앞의 그가 이렇게 멋져보이는 건 이 음식 때문이 아니라 내 애정 때문이다. "아무튼. 말 안 돼." "고집도 막무가내로 부리는 여재인." "논리도 부족한 말 막 갖다대는 남태양." 어이 없다는 듯 태양이 내 눈을 바라보면, 나도 지지 않고 그를 노려 본다. 조금 전까지 좋았는데! 행복해서 여기가 막 떨리기까지 했는데! 바보 같고 얄미운 남태양의 첫사랑! 분위기 파악 진짜 못하는 여재인의 첫사랑! 심통이 나자 괜히 이것 저것 따져대기 시작한다. "참! 그리고 니가 강아지야? 왜 사람을 막 깨물고 그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심드렁하게 반문하는 태양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웃옷을 걷어 배 부분에 난 그의 잇자국을 보여주었다. "이것 봐. 멍이 엄청 심하게 들었잖아!" 죄책감 때문인지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얼굴로 태양이 헛기침을 한다. 그러더니 재빨리 식사를 끝내고 일어섰다. 흥. 남태양도 별 수 없나 보다. 곤란하니까 자리를 피하는군. 나는 그를 흘겨보다가 다시 밥을 입에 넣었다. 꼭꼭 씹어 먹어야지. 많이 먹고 살도 찌고 피부도 고와져야지. 준비해서 가방을 들고 방에서 나오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배웅 안 해야지. 사과하기 전엔 절대 먼저 말도 안 걸어야지. "문단속 잘 하고 있어." 잠시 현관에 서서 나를 보던 태양이 저 말을 하는 순간, 금세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먹먹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조금 전 속으로 중얼대던 말 따위는 온데간데 없다. 재빨리 태양의 앞에 가 서는 여재인만 남았다. 그리고, "안 가면 안 돼?" 나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듯 던진 말에, 태양도 나도 당황하고 만다. 하지만 진심이다. 그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요일이라 나도 조금 있다 출근해야 하면서, 충동적으로 그만……. "전화할게." "매일 해." "여재인." "응?" "……." 불러놓고도 한참 말이 없다. 태양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고 그냥 뒤돌아섰다. "돌아와서 얘기하자." 너무 멀다. 그가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너무 아득하다. "운전 조심해!" 문을 열고 이미 복도로 나선 그를 뒤따라갔다. 아니 나가려다 잠옷 차림인 걸 깨닫고 그냥 문가에 서서 저렇게 외쳤다. 잠시 돌아서서 그런 내 모습을 보던 태양이 갑자기 성큼성큼 되돌아온다. 의도를 알아채기도 전에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둘러 확 끌어당겼다. 그 상태 그대로 입술을 맞춰온다. 태양의 혀가 깊숙이 들어와 내 입 안을 온통 헤집었다. 느낌이 참 야하고 진하다. 금방 혼을 빼내갈 만큼 거칠고 열정적이다. "흐읍. 앗!"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태양의 입술이 내 입술까지 뜨겁게 달궜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한 전류가 붉은 핏줄을 타고 거침없이 흐른다. 발끝까지 저릴 만큼 짜릿한 전율이 뇌를 관통하는 순간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대로 키스를 몇 초 더 끌게 되면 나는 기절하고 말 거라고. 바로 그 때 천천히 태양의 입술이 떨어졌다. 감았던 눈을 뜨자, 그가 긴 손가락으로 젖은 입가를 가만히 닦아준다. 그늘진 숲처럼 짙어진 태양의 눈동자가 무얼 말하는지 알겠다. 태양도 나처럼 솔직한 욕망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나도 태양처럼 그의 젖은 입술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태양이 내 귀에 속삭였다. "네 배에 있는 건 멍이 아니라 키스 마크다. 바보 여재인."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나를 놓고 처음 보는 미소를 짓는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꼬마를 대하듯 한심하단 눈길로 쳐다보다가, 내 머리 꼭대기를 가만히 짚어주고 가 버렸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일부터 무뚝뚝하게 던져놓고 간 그의 말이 내 마음 속에 세심하게 자리를 잡는다. 키스 마크. 태양의 흔적. 나는 가만히 배 위에 손바닥을 대 본다. 차마 그의 등을 더 볼 수가 없어서 나는 문을 닫고 가만히 기대섰다. 아직도 열을 내며 쿵쿵 뛰고 있는 심장을 내버려둔 채 뜨거운 한숨을 내쉰다. 어떡하지, 남태양? 벌써부터 네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퍼옴장편/은세] 내 집에 사는 남자 2부 下 망고탱고 수정/삭제 + 스크랩하기 (HIT: 2573/VOTE: 280) [허락메일] -------------------------------------------------------------------------------- <2부 목차> 13.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14. 조금씩 변하고 있다 15. 널 만나면 일상이 축제가 된다 16. 간절한 기대는 환상을 부른다 17. 너 때문이 아니다 18. '왜 그랬을까?'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19. 묵혀둔 말은 이미 어제의 그 말이 아니다 20. 정말이지 난 언제라도 놀랄 준비가 되어 있다 21. 범우주적 방황은 여기까지다 22. 오랜 순간에 짧은 영원을 담으며 마지막. 변하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불필요한 도덕은 자기혐오를 일으킬 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달콤한 음식, 긍정적 시각, 그리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13. 예정대로라면 오늘은 극장이 쉬는 날이다. 이번 주 화요일은 분명히 공연 스케줄이 비어있었으니까. 그런데 누가 어디서 조잡한 연극 하나를 물어왔는지, 저녁에 공연이 잡혀 있으니 신경 써 달라고 기획실에서 연락이 왔다. 어차피 하는 출근이고, 날마다 하는 일이니 큰 잡음을 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날더러 이걸 입고 나가 즉석 거리 홍보를 하라니! 절대 응할 수 없다. 아니, 절대 응하고 싶지 않다! "매니저 형, 두 시부터 흩어져서 홍보하래요." 매표요원 아르바이트생인 광일이가 배우 대기실를 기웃거리며 일정을 전달했다. 커다란 거울 앞에 우뚝 서 있던 나는 의상을 들고 내 눈치만 보고 있는 분장사를 쳐다보았다.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요?" 하지만 그녀는 말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눈빛에는 오히려 작은 흥분마저 일렁이고 있다. 이 여자도 한 패인가 보다. 분장을 도우려고 내 곁에 바짝 붙어서 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함정에 빠진 것처럼 암담한 기분이 드는 건 나 혼자인 모양이다. "후우! 마음대로 해요." 포기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그녀는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분주하게 화장품 케이스를 연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연극 이름이 '달나라로 간 백설공주'란다. 참내! 게다가 달나라의 일곱 외계인들 의상은 죄다 사무실 직원들이 채가고, 남은 건 내 몫이라며 백설공주 의상만 덜렁 던져주었다. 회의 중에 전화를 받으러 가지 않았어야 했다. 표값 할인 문제로 아침부터 관객이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지만 않았어도, 다른 직원들이 외계인 옷을 채갈 때 나도 그 중의 하나를 건질 수 있었으리라. 아니, 무엇보다 나는 하우스 매니저지 홍보 요원이나 배우가 아니란 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원통해서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려고 애썼다. 여기는 작은 극장이다. 공연 일수도 적고, 표 값도 싸고, 관객 연령도 어리다. 더 이상 불평하는 건 치사한 짓이다. 여기 직원으로 있는 한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이것도 일의 연장이니까. "매니저님, 이제 눈 뜨세요." 분장사의 흥분된 음성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겨우 진정이 된 상태에서 눈을 뜨자 그녀가 거울 쪽으로 의자를 돌려놓는다. 아, 이런! 신음이 절로 나왔다. "어색해!" "정말 예쁘잖아요." "나 남잡니다." "백설공주는 여잔데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반박의 통로를 차단하는 그녀도 보통은 넘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옷을 들고 천천히 갈아입었다. 분장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어디 숨어서 벗을 데가 없다. 알아서 눈을 돌려주겠지 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나 보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여는 동안에도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놀리듯이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자,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지퍼 올려 드릴게요." 의상이 또 하필이면 딱 맞는다. 길이도 딱이고, 허리는 조금 넉넉하고 어깨부분은 부푼 소매라 괜찮다. 스퀘어 모양으로 파인 목 부분이 쇄골 뼈를 좀 내놓긴 했지만, 야한 정도는 아니다. "세상에! 워낙 늘씬하셔서 공주 의상이 몸에 딱 맞네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또 외치는 분장사를 나는 잔뜩 노려보았다. 그녀의 잘못도 아닌데 자꾸 한숨이 나온다. 정말 내키지 않아 미치겠다. "이러고 그냥 가만 있으면 된다고?" 배우 대기실을 나가자 로비에 서 있던 외계인들과 직원들이 탄성을 지르며 돌아본다. 멋쩍고 어색한 기분에 인상을 굳히고 있자, 광일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주위를 맴돌았다. "우와, 매니저 형! 진짜, 환상이에요!" 맞아. 이것이 그냥 내 환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좋겠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우르르 몰려있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가죠. 빨리 나가서 관객을 한 사람이라도 더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호한 지시에 다들 노골적인 시선을 거두고 거리로 나선다. 길 건너 외계인 하나, 빵집 앞에 외계인 둘, 신호등 앞에 외계인 셋……. 각자 자리를 잡고 서서 목에 공연 일시와 장소가 적힌 팻말을 걸고 있다. 나는 우아하게 길가 벤치 위에 앉았다. 밀납인형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이. 말 그대로 공주니까 팻말 같은 건 없다. 대신 외계인 하나가 곁을 지키고 서 있다. 백설공주 역도 썩 나쁘진 않네. 은박지를 잔뜩 덮어쓰고 서 있는 외계인을 쳐다보며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알아보는 사람만 없어라! "어딜 만집니까?" 일부러 최대한 낮고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옆에 붙어 앉아 슬쩍 내 허벅지를 더듬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진짜 미치겠다. 저 인간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치마를 들치고 긴 속눈썹을 뽑으려고 달려드는 아이들은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었다. 은근히 눈짓으로 추파를 던지거나 명함을 쥐어주고 가는 인간들이 문제다. 아니 그것도 괜찮다. 비위는 좀 상하지만 잠깐 숨을 멈춰주고 무시하면 되니까. 하지만 방금 저 놈처럼 몰래 더듬거나 다짜고짜 손을 잡고 끌고 가려던 웬 미친 놈, 그리고 왔다갔다 하며 뒷덜미를 몇 번씩 지분거리고 가는 손길에는 치가 떨렸다. 방금 전에 어떤 두 놈은 내 뒤에서 온갖 포즈를 취하며 제멋대로 사진을 찍어갔다. "나랑 바꿉시다, 양 대리." 참다 참대 옆에 선 외계인에게 불쑥 말했다. 바로 코 앞에서 내가 겪는 수모를 모두 지켜봤던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하긴 이제 와서 분장을 바꾸기도 어려울 것 같다. "매니저님이 너무 예쁘셔서 그래요. 제가 그 옷 입고 앉아 있었다면 방금 같은 그런 사람들은 얼씬도 안 했을 텐데." "이게 다 제 책임이란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말이 뾰족하게 나간다. 양 대리에게 금방 사과를 했다. 얼굴에 먼지처럼 내려앉는 피곤이 느껴졌다. 어느 때보다 죽도록 어깨가 결렸다. 눈도 따끔따끔하고, 목도 아파오기 시작한다. 지겹도록 겪어온 전후 증상이다. 또 아프려는 건가? 흘끗 시계를 들여다보자 이제 겨우 오후 4시였다. 공연이 6시니까 앞으로 한 시간은 더 이러고 있어야 한다. 그 때 한 꼬맹이가 내 무릎을 타고 올라오려고 낑낑대는 게 보였다. 치한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밀쳐내려다, 네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녀석을 들어올렸다. "너 귀엽다." 내가 싱긋 웃으며 칭찬해주자, "넌 예쁘다." 꼬맹이가 나보고 답례를 차린다. 품에 안고 가만히 주위를 살피자 같이 온 듯한 어른이 없다. "너 혼자냐?" "너는?" 꼬맹이 참 맹랑하다. 나는 은박지 차림의 양대리를 가리키며 대꾸한다. "난 외계인하고 둘이다." "나도 엄마랑 둘인데, 엄마 없어졌어." 사람이 많은 이 곳에서 손을 놓쳤나 보다. 나도 어릴 적에 그런 기억이 있어서 안다. 요 녀석, 지금 꽤 무서울 게다. 그래도 용케 울지 않고 잘 버틴다 싶다. 기특한 놈이네. "형이 사탕 줄까?" "형 아니야. 누나야." "임마, '너'라고 할 땐 언제고, 따지긴." 옆에 놓인 바구니에서 몇 개 안 남은 사탕을 탈탈 털어 내밀었다. 그런데 물끄러미 쳐다볼 뿐 받지는 않는다. 교육을 잘 받은 녀석인가 보다. 백설공주가 주는 사탕은 받아도 된다고 하려다가, 옳지 못한 것 같아서 그냥 둔다. 그 때였다. 꼬맹이가 갑자기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린다. 놀라서 쳐다보니 녀석의 시선이 닿은 곳에 웬 여자가 달려오고 있다. 아이 보호잔가 보네. 넘어질까 봐 바로 놓지 못하고 진정시키고 있는데, 여자가 다짜고짜 달려와 내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딱!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엄청 맵고 세다. 거기다 여자의 손에 낀 반지에 뺨이 긁혀 버렸다. 어찌나 다부지게 쳤는지 턱이 끝까지 돌아가 버렸다. 아우. 아프다. 머리가 다 얼얼할 지경이다. "엄마!" "건호 이 자식! 내가 한 눈 팔지 말고 따라오라 그랬지!" 아이가 놀라서 부르자,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호통을 쳐댄다. 꼬맹이 엄마,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제일 성질 급한 여자다. "이보세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옆에서 화를 내며 따지는 양 대리를 한 손을 흔들어 말렸다. 아마도 내가 자기 아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 꼬맹이를 잃어버릴 뻔한 부모의 심정을 다 안다고 할 순 없지만 꽤 속이 탔을 거다. 그보다 나는 난감하게 코밑을 흰 장갑으로 훔쳤다. 또 피다. 오, 하느님! 공연은 엉망진창이었다. 연령 제한을 두지 않아 공연 시작부터 갓난쟁이들은 빽빽 울어댔고, 배우들은 대사를 반은 잊어 먹은 상태에서 멋대로 연기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수유실로 착각하고 안 나오는 여성들 때문에 남자 화장실이 혼성용으로 붐볐다. 음향은 꽥꽥 삑사리를 냈고, 분화구로 설치한 판자 옆을 지나던 배우는 갑자기 꺼져버린 무대 아래로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환불 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피로를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 관객들이 모두 극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시간이 밤 11시를 막 넘겼을 즈음에야 겨우 극장 앞 어두운 골목을 빠져 나왔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집에 가면 죽은 척 하고 잠들 수 있겠다. 그립고 보고픈 남태양 타령도 오늘은 덜 할 수 있을 것 같다. 밥 챙겨 먹을 기운도 없으니 억지로 식탁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전화기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새벽까지 꾸벅꾸벅 조는 것도 오늘은 생략해야지. 그렇게 떠나놓고 이틀 동안 연락 한 통 없는 녀석이다. 무심한 건 알았지만 그래도 전화를 걸어온 전적이 한 번쯤 있으니 기대를 했는데. 터덜터덜 큰 길까지 나와 택시에 몸을 실었다. 축 늘어진 팔다리가 잠시 휴식을 취한다. 창밖에서 화려하게 쏟아내는 거리의 불빛들이 모두 낯설다. 가끔은 주어진 대사가 있는 배우들이 부러워진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매순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건 하루에 우리가 하는 고민의 절반을 뚝 떼어주는 정말 매력적인 일이다. 말을 배우고 아는 단어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할 수 있는 말은 줄어드는 것 같다. 표현력이 풍부하고 다양해질수록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은 그보다 더 많아지고. 이게 바로 '어른이 된다는 것'이 지닌 딜레마다. 울고 싶을 때도 울면 되는데 마땅히 울 장소가 없다. 쉬운 게 점점 줄어든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맞는 말이다. 멀리서 보면 울 듯한 표정도 웃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을 뱉지 못해 가슴앓이하는 이의 망설임도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 멀리서 보면 다 '아름다운' 이유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간직한 아픔과 비극이 수 많은 별처럼 모여서 반짝이는 게 세상이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위로를 얻는 것도 다 그 곳이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내가 좀 감상적이다. 누군가를 가슴에 소중히 품게 되면 원래 그런 건가? 택시는 멀지 않은 오피스텔 앞에 금방 도착했다. 아직은 축 늘어진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현실이지, 영화나 드라마 속이 아니다. '돈 더 드릴 테니 그냥 이 근처를 몇 바퀴 돌아주세요.' 했다가는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택시에서 내려 가로등 밑에 잠시 섰다가, 나는 금세 발길을 돌려 근처의 텅 빈 놀이터로 들어갔다. 그네에 앉아 가만히 고개를 그네 줄에 기댄다. 차가운 금속이 열이 오른 이마를 식혀주었다. 그래도 너무 차서 오래 대고 있을 것은 못 된다. 고개를 젖히자, 불이 켜진 집들의 창이 보였다. 남태양. 넌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안 그러려고 했는데, 또 그 녀석 생각이다. 그 때 갑자기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발신번호도 보지 않고 무작정 귀에 갖다댄 채 가만히 있어 본다. "어디야?" 말을 안 하고 있었더니 저쪽에서 먼저 묻는다. "태양?" "이 시간에 왜 집에 없어?" 집으로 먼저 전화를 했나 보다. 쿵. 누워 있던 심장이 벌떡 일어났다. 기껏 식혀놓은 열기가 뺨으로 확 번지는 기분.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귀에 딱 갖다붙인다. 그러느라 태양의 음성이 딱딱하게 굳어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일이 늦게 끝났어. 지금 집 앞이야." "……." 내 설명에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짧게 말했다. "증명해 봐." "뭘?" "네가 지금 집 앞이라는 것." "어떻게?"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반문한다. 대체 종잡을 수 없는 남태양의 이런 엉뚱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내 멍한 물음에 그제야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말했다. "5분 안에 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믿어주지." 그리고 뚝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놀란 심정으로 가만히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가 말한 의미가……! 설마, 아니겠지? 남태양 때문에 내 세포들이 고생이다. 바짝 곤두셨다가 탁 풀여지고 또 금세 흥분을 해대니. 나는 씩씩하게 일어섰다. 고개를 들어 층을 세어보니 정확히 우리 라인 8층 거실에 불이 들어와 있다. 남태양! 이렇게 일찍 돌아와준 거, 나 미리 고마워해도 되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으면서 나는 입가에 제멋대로 번지는 미소를 내버려두었다. 그 동안 참 많이 힘들었다. 한꺼번에 닥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가슴이 죽도록 아팠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기를 넘고 나자, 서서히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청결하고 아름다운 태양의 집도,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양의 일상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를 향해 정직하게 뛰고 있는 내 심장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지금 태양과 함께 이 곳에서 살고 있다. 태양이 그토록 그리워하며 다시 찾아온 첫사랑이 서인학이든 누구든, 내가 그를 좋아하고 함께 사는 것에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거다. 아무리 좋아해도 태양의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감정을 앞세워 서투르게 행동하지도 않을 거다. 나는 괜찮다. 아주 잘 하고 있다. 적어도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니까. 보잘 것 없지만 능력도 있고, 크거나 미덥진 않지만 직장도 있고, 무뚝뚝하지만 매력 넘치는 동거인도 있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도 분명 함께 존재할 것이다. <조금씩 변하고 있다> 뭔가를 꿈꾼다는 거 현재진행형 맞지? 좋은 꿈을 꿔야 좋은 삶인 건 확실하지? 그럼 꿈'만' 꾸는 건 어떨까? 좋은 꿈만 꾸는 건? 요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너무 오래 꿈만 꾸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이젠 꿈에서 깨어나 좋은 현실을 만나고 싶어졌단 말이지. 14. 역시 빠르다. 엘리베이터는 정확히 10초 만에 8층에 섰다. 녹초처럼 늘어졌던 다리엔 어느 새 힘이 들어가 있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서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태양이 맞은 편 벽에 기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왜일까? 그를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안 내리고 뭐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태양이 물었다. 그 말 끝에 자신의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한다. 표정을 보니 5분이 아직 지나지 않았나 보다. "마중 나온 거야?" 내가 묻자 태양은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곳은 내 턱과 광대뼈 부근이다. 아까 꼬맹이 엄마한테서 맞은 곳이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더니 멍이 들었다. "넌 어떻게 나갔다 올 때마다 상처를 하나씩 달고 오냐?"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 나도 모르게 방어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건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야." 변명 아닌 변명을 내어보지만, "서툰 게 아니고?" 태양은 내 말을 더 아프게 쳐낸다. 섭섭하다. 마음이 울컥 해버렸다. 이럴 거면 왜 빨리 돌아온 거야? "삐졌어?" 내가 빠르게 집 쪽으로 걸어가 버리자 뒤따라오던 태양이 묻는다. 목소리에 자작하게 스민 웃음기도 내 기분을 위로하진 못한다. 때려놓고 '아프냐?' 묻는 게 더 얄밉다, 남태양. "어떤 자식이야?"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을 때 바짝 뒤따라온 태양이 낮게 물었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그 음성이 귓가에 선명히 닿아오자 문득 소름이 돋았다. 긴장한 세포들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내내 아우성을 쳐댔다. 태양에게 닿고 싶다고. 아아, 제발 진정하자, 진정. "싸운 거야, 일방적으로 맞은 거야?" "그, 그게 뭐 중요해?" "일방적으로 맞았군." 내 대답에 혼자 결론을 내린 듯 아까처럼 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태양이 내 어깨를 딱 잡고 돌려세웠다. 단호하지만 조심스런 손으로 가만히 내 턱을 들어올린다. 잠시 멍든 부위를 살펴보느라 말이 없다. 그래도 조금은 신경을 써주는 건가? 막 설레려고 하는 찰나, 그의 숨소리가 빨라지게 느껴졌다. "바보처럼 맞고만 다니는 여재인. 넌 주먹이 없냐?" "내 주먹은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니라서." 새침하게 쏘아주고 다시 돌아서려는데, 태양이 양 손으로 내 어깨를 단단히 잡고 고정시킨다. "배 안 고파? 밥 차려라, 여재인." "뭐?"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렸다. 그런 내 표정에 싱긋 웃고는 거실 소파로 걸어가 버린다. 흘끗 식탁 위를 돌아본 나는 그제야 그의 말 뜻을 이해했다. 정작 바보는 남태양 같다. 이럴 땐 '밥 차려라'가 아니라 '밥 먹어라' 해야 하는 거다. "회덮밥이네." "수저 다 놓으면 불러."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음식을 보자 배가 심각하게 고파졌다. 아침은 말할 것도 없고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저녁은 아예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바빴다. 나는 빠르게 씻고 나와서 수저를 놓고 음식의 포장을 벗겼다. "태양, 먹자!" 어슬렁 다가온 태양이 식탁 앞에서 밝게 웃는 내 얼굴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본다. 너무 금방 풀어져서 그러나 보다. 그렇다고 내가 회덮밥 하나에 넘어가 버린 건 아니다. 나는 다만 그의 무뚝뚝한 언어 선택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것으로 마음 상할 만큼 나는 둔한 사람이 아니라고. 지금껏 내게 묵묵히 배려해주었던 것 다 감사히 마음에 담고 있다고. 내 활짝 웃는 미소 속에서 그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아봐주길 바랐다. "그런데 정말 무슨 수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그래서 불만인가?" 왜 저렇게 방어적으로 묻는지 모르겠다. 내 질문 속에 흥건한 반가움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궁금해서 그러지." "몸도 좀 안 좋고 내일 볼 일도 좀 있고 해서, 같이 스테이하고 있던 동료하고 일정을 바꿨어." "그렇게도 돼? 아, 그리고 몸 안 좋다면서 파리에서 여기까지 비행기 몰고 왔어?" "수백명 승객의 안전은 아무 이상 없이 지켰으니까 안심해. 더 이상 따지지 좀 마." 사실은 수백 명의 다른 사람들보다 태양 한 사람의 안전만 생각했는데. 그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미소된장국을 마셨다. 다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묵묵히 식사를 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지만, 꽤 굶주렸던 우리 둘의 배 시계는 별개로 움직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이틀 동안 잘 먹지 못하는 동안에 위가 줄어들었나 보다. 몇 숟가락 뜨고 나니 배가 불러왔다. 태양이 날 위해서 사 온 음식이니까 남기기 싫은데. 숟가락을 듣 채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그가 물었다. "입에 안 맞아?" "아니. 맛있어. 그런데 배가 좀 부르네." 내 말에 태양이 아직도 많은 양이 남아 있는 내 그릇을 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불쾌해하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미안한 마음에 몇 숟가락이라도 더 뜨려고 하는데 그가 또 불쑥 물었다. "피곤해 보인다. 일이 많이 힘들어?" "아니. 그냥 유난히 안 풀리는 날 있잖아. 사소한 것까지 다 엉뚱하게 애 먹는 날. 오늘이 좀 그랬어." "너무 애쓰지 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놓아 버려." 태양의 충고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신기했다. 그에게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게 있을까? 그럴 때의 기분을 태양도 알까? "힘이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의욕만으로 모든 일이 되지 않는 것도 그래서야." "힘은 무한해. 그걸 끄집어내는 의지력이 부족할 뿐이지." 내 말에 태양이 피식 웃는다. 가소롭다는 건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왜 웃어?" 내 물음에 태양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너무나 여재인다운 말이라서." "……!" "하지만, 이건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힘은 결코 무한하지 않아. 그래서 체력의 안배가 중요하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보았다. 태양의 진지한 말이 고스란히 가슴 속에 스미는 듯하다. "힘내려고 무리하다 쓰러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본다." 피식. 이번엔 내가 웃었다. 왜 웃냐고 묻는 것처럼 그가 나를 빤히 본다. 그래서 나도 그 못지 않게 진지한 어조로 설명해주었다. "너무나 남태양다운 멘트 같아서." "어떤 점이?" "내 잘못을 콕 찍어다 정면에서 흔들어 보이는 거." 미소가 남은 내 얼굴을 태양이 정색을 하고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내게 물어왔다. "나 다운 멘트라……. 네가 날 아나?" 그 짧은 질문 하나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버린다. 사실이 그렇다. 그의 질문은 매우 절적한 순간에 던져진 거다. 나는 그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가 날 아는 것만큼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태양 답다고 느끼는 부분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양의 질문으로 쿡 쥐어박힌 침묵을 살살 어루만지듯 입을 열었다. "태양이 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손을 가지런히 내려뜨린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이야기한다. "착해. 말은 로봇처럼 딱딱하게 해도 그렇다고 선한 느낌은 다 가려지지 않아. 그래서 편한가 봐. 뒤에서 내 얘길 하거나 사람 뒤통수를 치지도 않을 게 분명하고. 오히려 앞에서 더 무뚝뚝하고 얄밉게 말하는 편이지. 하지만 괜찮아. 그건 정직하다는 증거니까. 무엇보다 참 매력 있어. 웃을 땐 눈가가 사르르 녹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워지더라. 체온이 높아서 자꾸자꾸 곁에 눕고 싶어져. 참 따뜻하고 포근해. 나는 이미 거기에 중독됐잖아." "……."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멈췄다. 점점 말소리가 낮아지고 동시에 느려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또 조금씩 태양의 눈이 가늘어지고 있다. "부탁을 하면 좀 곤란해도 웬만한 건 다 들어줄 것 같고, 부탁하지 않아도 상대가 필요하다 싶으면 먼저 돌봐주는 사람이지. 첫사랑을 오래 간직할 만큼 우직하면서 순수한 사람이고, 남의 심장이 막 벌렁거릴 때까지 쳐다보는 버릇도 있어. 아, 맞다. 키스할 때 입술이 굉장히 뜨거워지는 사람! 이런 게 다 너잖아, 태양."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기 시작하면서 뺨으로 열기가 확 몰렸다. "그런 네가 점점 좋아져. 자꾸 길들여지는 것 같아 조금 두렵긴 하지만."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말 걸 그랬나 보다. 태양이 뚫을 것처럼 날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어가 버렸다. 잠시 후 그가 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식탁 위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 때 낮게 헛기침을 한 태양이 내게 담담하게 제안했다. "여재인. 나하고 한 번 시작해 볼래?" "무슨……!" 믿어지지 않는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 설마 그 뜻은 아니겠지? "처음부터 사랑이라고 믿고 만나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괜찮다면 우리도 정식으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취향도 같고, 같이 사는 것도 서로 그다지 거슬리지 않고, 또……." "……좋아!" 응! 난 좋아!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태양이 웃음을 터뜨린다. 부끄럽지만, 사실 그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태양이 먼저 나에게 저렇게 제안해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난 유혹에 약한 편이지만, 감정을 숨기는 건 더 못하는 사람이다. 내 표정에, 내 눈빛에, 온 몸으로 발산되는 내 몸짓에 다 드러나 있을 거다. 그래서 태양도 사르르 녹는 특유의 비싼 눈웃음까지 보여주는 걸 거다. "태양이 너하고 사귈게. 시작하는 거, 그거 하자!" "혹시 기다렸나?" 내가 생각해도 내 반응은 좀 웃긴다. 쑥스럽고 흥분되고 아무튼 정신이 없다. 아, 그런데 방금 태양의 질문이 뭐였더라? "꼭 내가 이 말 해주길 기다린 사람 같잖아. 지금 네 반응." 좋아하니까. 어느 새 좋아하게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실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게 정답일 거다. 무엇보다도 그는 첫사랑과의 일도 남아 있으니까. "그런데 태양, 네 작은 별은……?" "……." 내 질문에 태양이 입술을 꾹 다문다. 그토록 사랑스럽게 묘사했던 자신의 첫사랑을 그새 포기했을 것 같진 않다. 만약 태양이 이 자리에서 그를 잊었다고 말한다 해도 나는 믿지 못할 것이다. "그건 생각하지 말자." "어떻게 그래? 너 첫사랑 잊을 수 있어?" "네가 도와주겠지. 안 그래?" 태양의 말에 여린 속살이 푹 패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느낀다. 안다. 이건 모험이다. 그래도…….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으니까. 그가 내게 오길 간절히 원하니까. "도와줄게. 대신……." "……." "너도 약속해. 일방적으로 나 버리지 않겠다고. 말 없이 사라져도 안 돼." 다짐을 받고 싶었다. 태양을 믿지만, 예전의 나는 상우도 믿었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하다.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상처 입지 않을 거라는. 태양은 일어나서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 턱을 들어 눈을 가까이 마주한 다음 무섭게 경고했다. "그 비겁한 자식과 나를 비교하지 마." 꾹 눌려진 분노가 태양의 까만 홍채 안에서 이글거렸다. 나는 숨을 멈춘 채 얼어붙은 상태에서 그에 의해 강제로 고개가 꺾였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날 보내지 말아야 할 건 오히려 너야.' 라고 말하는 듯 간절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빠른 키스를 하고 멀어졌다. 입술이 다 타 버린 것 같다. "이제부터 여재인의 애인은 남태양이다. 한 시도 잊지 말고 명심해." 마치 귀에 화상 자국이 꾹 남은 것 같다. 내 귀에 박아넣듯 들려온 그의 속삭임에, 내 가슴도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사람의 식욕은 참 정직하다. 몸속의 염분이 부족하면 짠 음식이 당기고, 단백질이 필요하면 고기나 생선이 먹고 싶고, 비타민이 부족하면 시거나 상큼한 게 생각난다. 그런 현상을 깨닫고부터 나는 내 욕구를 외면하거나 굳이 달래고 억누르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유혹에 약한 이유이기도 하다. 필요하니까 원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런 생각이 나로 하여금 내 간절한 욕구를 믿고 나를 돌보는 척도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즉 내 상태로 보아, 내겐 지금 태양이 굉장히 필요하다는 얘기다. "어디 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내가 작은 방으로 향하자 태양이 묻는다. "베개 가지러." "매일 매일 내 침대에서 잘 거라더니, 베개는 왜 네 방에 갖다놓았어?"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랬다. 태양도 없는데 그의 체취를 느끼려고 침대를 더듬는 것도 좀 싱거워서. 그럴수록 자꾸만 생각나니까 심신이 더 빨리 지치기에 아예 방을 옮겼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그 앞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각오는 돼 있지?" 베개를 들고 태양의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팔짱을 끼고 서서 저렇게 묻는다. 무슨 각오인지 되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밤새 죽도록 섹스할 각오를 말하는 거다. 나는 말없이 태양을 마주 보고 서서 숨을 죽였다. 따뜻한 살구 빛 전등이 그의 얼굴을 은근하게 비추고 있다. 보기만 해도 보들보들한 피부의 감촉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열기가 심장에서부터 얼굴로, 가슴으로, 등으로, 배로 퍼져 나간다. "내가 벗겨 줘도 돼?" 고요한 방 안에서 나는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단추를 잠그지 않고 걸치기만 한 태양의 파자마 상의가 내 손에 의해 천천히 밀린다. 살짝 살짝 닿는 내 손가락에 닿는 그의 가슴과 어깨의 살결이 참 따뜻하고 매끈하다. 옷은 단단하게 솟은 어깨뼈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가 그만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입술을 꼭 깨무는데, 가만히 숨 죽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태양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와 달리 끝까지 다 채운 내 잠옷의 단추를 하나하나 눈으로 풀어내는 것 같다. 얼굴로 피가 확 몰린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말도 못하게 긴장이 된다. 우리는 지금 초콜릿 껍질을 까듯이 진저리쳐지도록 달콤한 무엇을 기대 중이다. "애인, 이러다 밤새겠다." 이렇게 말한 태양이 나를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조금 버둥거리긴 했지만, 곧 얌전히 그를 바라본다. 길고 섬세하게 생긴 태양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다정하게 빗어넘긴다. 그 느낌에 스르르 눈을 감는 찰나에 태양의 입술이 거침 없이 내려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느리고 부드럽게 입가부터 쓸어주는 키스. 보드랍고 촉촉하게 살결이 젖어드는 그 느낌에 벌써부터 발끝이 짜르르해진다. 태양은 가만히 혀를 내밀어 여전히 닫혀 있는 내 입술을 핥았다. 그 때마다 할짝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서 괜히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부끄럽고 생소하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다음'을 외치고 싶을 만큼 감미롭다. "부끄러워하지 마. 안 그래도 돼." 낮게 쉰 음성이 내 관자놀이에 내려앉아 다시 촉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졌다. 주문에 걸린 것처럼 가만히 입술을 열자 곧장 태양의 혀가 들어와 내 혀를 찾았다. 처음인 것처럼 두 혀가 만나 인사하듯 서로를 쓰다듬고 비벼대다가, 깊숙이 침범해오는 태양의 혀로 인해 내 입은 온통 태양의 입술로 덮혀 버렸다. 내쉬는 모든 숨이 태양에게 스미고, 들이마시는 모든 숨은 태양으로부터 얻는 기분. 오직 세상엔 그와 나, 단 둘 뿐인 것 같다. 그토록 아늑하고 황홀한 충만감이 가슴 속에 차올랐다. 숨이 막힐수록 꿈틀대는 욕망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분출하는 기분. "기절하면 안 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경고를 던지는 태양에게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중한 것처럼 내 머리를 양 손으로 감싸 쥐고 천천히 음미하듯 키스를 하다가, 어느 새 예민한 목과 귀로 옮겨다니며 내 성감대를 찾기 시작한다. "아흣! 아아앗!" 나도 모르게 내지른 소리에 태양이 멈칫 하더니 내 귓속을 혀로 공략하기 시작한다. 시트를 꼭 쥐고 몸을 비틀던 나는 태양의 손이 빠르게 내 잠옷을 벗겨내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정말 민감해. 미치도록 하얗고, 순결해 보일 만큼 투명해." 벌거벗겨진 내 가슴과 배를 내려다보며 태양이 내 위에서 중얼거렸다. 그 시선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돌아누우려 하자, 그의 손이 단단히 허리를 잡아 누른다. 이미 허리 아래쪽은 태양에게 눌린 채 꼼짝달싹 못한 상태라 나는 숨을 헐떡였다. 무겁고 갑갑한 것보다도, 강하게 일어선 그의 것이 내 허벅지를 찌르고 있어서 난감했다. 여지 없이 상체를 숙인 태양이 다시 내 가슴과 배를 물고 뜯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피부가 내 피부와 맞닿을 때마다 움칠 움칠 세포들이 예민하게 곤두선다. "아아, 태양. 아파. 그만." 내 신음에 고개를 든 태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나만큼이나 흥분해 있구나. 그 모습에 위안을 삼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안아 줘." "얼마든지." 곧장 다가와 나를 제 품에 넣고 팔에 꼭 힘을 준다. 태양의 입술이 닿았던 유두가 그의 가슴에 눌리는 생생한 느낌에 못견디게 부끄러워져서 나도 그의 등에 두른 팔에 힘을 꼭 주었다. "좋아해." 내 나직한 속삭임에 그가 고개를 들어 내 입술에 키스한다. 정말 많이 좋아해. 널 기쁘게 해주고 싶어. 나도 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아앗. 윽!" 태양이 자세를 바꾼다 싶더니 갑자기 자신의 다리로 내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들어왔다. 굉장히 민망해져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태양이 피식 웃으며, '얼굴 발개졌네.' 라며 놀린다. "한 입에 따 먹고 싶은 홍시 같다." "뭐, 뭐야? 그런 말 너무 심하잖아." 더구나 먹는 데다 비유하다니. "너, 넌 무겁고 딱딱한 호박 같아." 내 반격에 흠칫 놀란 시늉을 하더니, 살짝 하체를 움직여 단단한 자신의 페니스를 내 것에 문질렀다. 그러자 금세 내 것도 덩달아 반응을 하려고 해서 급하게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럴수록 밀어붙이는 태양으로 인해 나는 보람도 없이 버둥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태양의 가슴에 손끝이 스치자 오히려 내 몸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추워서 그러는 줄 알았나 보다. 태양은 장난같은 몸짓을 멈추고 그대로 일어나 파자마와 속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내 잠옷 바지까지 벗기려고 허리 부근에 손을 가져왔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의 손등을 덮어쥐고 버텼더니, 태양이 내게 미소를 짓는다.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마주 웃어 버렸다. 그 틈을 타서 팬티까지 모두 확 내려버린 태양이 옷가지를 모두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허리에 손을 얹고 내 몸을 감상하듯이 내려다본다. "보지 마!" "괜찮아, 여재인. 더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니까." "정말?" "다른 표현은 생각도 안 나." 얼굴이 이젠 정말 홍시 같을 거다. 확 몰려드는 열기로 인해서 뺨이 뜨겁다. 사실 침대 곁에 서 있는 태양의 몸은 그야말로 예술 조각품처럼 멋졌다. 숨이 막힐 정도다. 군살 없이 쭉 뻗은 몸매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완벽하다. 그래서 평범한 내가 더 부끄러웠다. 그가 실망하진 않을까 염려되고 안타까웠다. 그의 칭찬은 그런 마음의 부담을 한결 덜어준다. "이제부터 정말 한다. 중간에 아프다고 멈춰도 안 돼. 오늘은 그냥 다 참아." 태양이 내 곁에 누우면서 말했다. 당연하다. 우리의 첫날 밤인데. 도망가지 않을 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양이 바로 내 위로 올라왔다. "대신 천천히 할게. 너 최대한 힘들지 않게." 태양이 내게 약속했다. 나는 벌써부터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가 점점 더 좋아지기만 해서 정말 큰일이다. 이 순간 나는 좀 무섭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습자지에 뿌연 먹물이 퍼지듯, 방금 전 깨달은 중요한 사실이 가슴 속에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새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버린 것 같다는……. <널 만나면 일상이 축제가 된다> contact [kntkt | kn-]L 「함께 닿다」의 뜻에서 1 접촉, 맞닿음(touching) 2 교제, 친교(associations) 이것은 너의 일상이며 또한 나의 소망이니, 나의 꿈은 너의 일상에 맞닿아 있다. 15. 넓고 두꺼운 이불보다도 태양의 몸이 더 따뜻했다. 내 어깨를 감싼 손도 뜨겁고, 곳곳에 내려앉는 그의 입술도 뜨겁고, 부끄럽게도 맞닿아있는 그 곳과 천천히 비벼대며 얽힌 다리도 뜨거웠다. 커다란 난로처럼 온 몸을 감싼 태양으로 인해 나는 충만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아흣! 아아, 태양!" "하아, 여재인!" 우리가 간간히 참지 못하고 불러대는 서로의 이름이 후끈한 공기 중에 축축하게 번졌다. 내 남성을 감싸쥔 태양의 손이 조금씩 힘을 주며 움직이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부풀어오른다. 서서히 내려간 태양의 입술이 고개를 든 내 것을 무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혀 버렸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태양의 손을 내 가슴을 찍어 누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엉덩이를 빼려 해도 단단히 잡힌 허리 때문에 불가능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짜릿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흐느낀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젖어든 눈꺼풀을 누르자, 눈물이 또르르 베개로 떨어진다.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의 찡한 기운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다. 힘 있게 빨아들이는 태양의 입술을 나의 그곳으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허리와 엉덩이를 쓸어내리는 손의 감각이 너무도 부드럽고 섬세해서 나는 온 몸이 다 발개진 기분이다. "그대로다. 너무 생생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알 수 없는 태양의 중얼거림이 뜨거운 숨과 함께 뱉어졌다. 고스란히 그의 흥분을 느끼고 있는 내 허벅지 안쪽으로 신경이 파드득 일어서는 느낌. 강하게 문질러오는 태양의 감촉이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 발끝까지 저릿하게 흘렀다. 전기침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양의 손가락이 나의 엉덩이 골 사이로 파고들자, 바르르 떨면서 태양의 등으로 팔을 둘러 꼭 끌어안는 내가 있다. 그럴 때마다 더 강한 포옹으로 나를 숨막히게 품어주는 태양이 있다. 한 팔로 날 감싼 채 다른 손으로 정성스럽게 나의 비밀스러운 문을 어루만진다. 놀랍고 아파서 나도 모르게 다리를 그의 긴 다리와 날씬한 허리에 꼭 감아 버렸다. "으윽! 태양……. 아아앗!" "재인아, 힘 빼. 안심해도 돼. 다치게 하지 않을게. 날 믿어." "으응, 믿어." 신음과 함께 간신히 뱉어낸 내 말에 태양이 길게 입술을 맞춰준다. 자신의 이마로 땀에 젖은 내 이마를 닦아내듯 문지르고 뺨을 꼭 붙여온다. 가슴이 저릴 만큼 다정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내 귀에 키스하며 달래준다. 좋아해, 태양. 정말 많이 사랑해. 끊임 없이 쓸어주는 손길과 매만져주는 감각이 익숙해질 무렵, 그가 내게 파고들어오기 시작했다. 묵직하고 거대하지만 조심스런 느낌. "괜찮아?" 괜찮지 않을 것 같지만 용기를 내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겨우 끝만 넣었다는 걸,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손끝으로 더듬어본 그의 위치가 내게서 꽤 떨어져 있으니까. "천천히 해야 돼." "알았어." 약속을 한 다음 우리는 서로 마주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내 입술을 내려다본 태양이 고개를 숙여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프지 않다. 짜릿하지도 않다. 솔직히 다른 감각은 잘 못 느끼겠다. 내 속에 들어오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것에 대한 생각으로, 무시할 수 없는 통증과 두려움이 자꾸만 정신을 아득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하앗! 으음. 재인아, 눈 떠 봐." 질끈 감은 눈꺼풀과 젖은 속눈썹에 그의 다정한 키스가 이어졌다. 천천히 눈을 뜨는 순간, 그의 페니스가 짧고 힘 있게 내 속으로 좀더 들어왔다. "아앗! 학! 학!" 가빠오는 숨을 몰아쉬는 사이, 태양은 그런 내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고 있다. 발갛게 익은 뺨과, 촉촉히 젖은 눈과,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새기듯 지켜본다. 또 다시 그의 허리가 움직이고 후끈한 열과 뻐근한 감각이 아래 쪽에서 느껴졌다. 숨이 막힐 만큼 아프지만, 그와 한 몸이 되는 데 성공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태양의 몸짓은 다 날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 정도 느리게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도 남자기 때문에 알고 있다. 그래서 더 태양이 대단해 보였다. 아름답고 착하고 인내심이 강한 남자. 잔뜩 긴장해서 그의 허리를 꼭 감고만 있던 다리를 천천히 내렸다. 그 정도의 움직임 만으로도 태양이 움찔하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는 상태다. 모든 걸 다 드러내 놓은 채 뜨겁게 사랑하는 중이니까. 내 다리를 그의 다리에 살짝 문지르면서 작게 속삭였다. "이제 좀 움직여 봐. 괜찮을 것 같아."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양이 허리를 젖혀 밀고 들어왔다.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참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미칠 것처럼 괴로운 얼굴로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와서야 숨을 탁 하고 내어쉬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멈추지 못한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 못지 않게 입술을 꼭 깨문 태양도 힘들어 보였다. 부르르 떨고 있는 몸이, 내가 등을 쓸어주는 순간 탁 하고 자제력을 잃었다. 내 눈을 뜨겁게 내려다 보는 눈을 보고 알았다. 까맣게 물들어있는 축축한 눈동자가 경고한다. 너 이제부터 더 아플 거야, 그래도 참아야 해, 절대 도망가지 마, 이렇게. 나는 준비하는 심정으로 그의 등에 매달렸다. 태양이 허리를 움직이며 꽉 조인 내 속을 자극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각이 날 덮쳤다. 눈 앞에서 스파크가 튀는 느낌. 아니다. 넓은 해수면이 햇살을 받아 온통 반짝반짝하는 기분. 그리고 그 속에서 파닥 뛰어오른 인어의 꼬리를 발견한 듯한 환희. 축 늘어져 있던 하체에 불현듯 힘이 쭉 들어간다. 그걸 예민하게 알아챈 태양이 앞뒤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한다. 그와 단단히 맞물려있던 나도 그와 함께 흔들린다. 그렇게 내 몸이 그와 함께 파도를 타고 있다. 밀려들 때의 세찬 쾌감이 물러나갈 때마다 미칠 듯한 아쉬움과 저릿한 통증을 남긴다. "아아, 태양! 나…. 앗! 아윽! 나 좀…! 태양!" "흣. 흐읏! 재인아! 여재인! 그래. 흣! 태양이다! 너의 애인이다!" 고개와 몸을 틀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신음하는 내게 태양이 뜨겁게 말했다. 사정 없이 밀어붙이는 그에게 눌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쾌락에 몸을 떨고 있다. 태양은 갑자기 내 등 뒤로 팔을 둘러 끌어안은 채 몸을 옆으로 굴렸다. 한 몸인 상태에서 우리는 위치가 바껴 내가 그의 위로 올라간 자세가 된다. 그 덕에 살짝 빠져나올 듯 하던 페니스를 꾹 다시 넣으며 태양이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단단히 고정된 채 그의 배 위에 앉아버린 나는 뜨거운 숨을 뱉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눈길이 꼿꼿이 서서 인사하는 내 것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확연히 잘 보이는 곳에 드러나 버린 게 부끄러워서 두 손으로 가리려 하자 태양이 소리내어 웃으며 내 손을 치운다. "하지 마." "같이 가자, 재인아." 그 말과 함께 갑자기 태양이 몸을 일으켰다. 마주 앉은 채로 더 깊이 한 몸이 된 우리는 흐트러진 서로의 머리를 붙잡고 진하게 키스했다. 깊숙이 꽉 들어찬 그의 남성이 내 속에서 뜨겁게 요동치고, 그 때마다 내 남성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우리의 배를 건드렸다. 태양의 손이 그 사이로 들어와 내 것을 힘차게 쥐었다. 그가 힘을 주고 튀어오를 때마다 처벅처벅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화상을 입는 것처럼 뜨겁고 화끈거리는 통증과 뻐근한 열락에 지배되는 순간에도 태양과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에서는 더 소중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힘껏 밀고 들어오는 태양의 몸짓에 우리는 동시에 사랑의 묘액을 쏟아내며 침대 위에 같이 쓰러졌다. 착 늘어진 내 몸이 뜨거운 태양 난로를 덮쳐 안은 형색. 행복하고, 충만하고, 뜨겁고, 만족스러웠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완전히 지쳐 버린 나는 태양의 목에 얼굴을 묻고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새벽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태양의 가슴에 반쯤 걸쳐진 내 몸이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비단의 촉감을 음미하듯 천천히 쓸어내려가다가 엉덩의 골이 시작되는 부분에 가서 멈추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고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내게 눈을 맞춰 오는 태양의 얼굴이 보인다. 숨막히도록 잘 생긴 얼굴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내게 묻는다. "잘 잤어?" "으응." 살짝 눈을 비비며 깜빡거린다. 잠을 털어내는 중에도 그의 음성이 섹시하게 심장을 깨웠다. 나직하고 뜨겁게. "태양. 여기에서 소리가 요란해." 그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내가 웃으며 말한다. 태양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더 꾹 눌러준다. "너 때문이다." 두근. 그의 심장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내 심장에게 전한다. "네가 필요해서 뛰는 거다." 달콤해라. 진지한 표정 그 어디에 저런 달콤함이 숨어 있을까? 나는 태양의 얼굴을 배회하던 시선을 입술에서 딱 멈추며 고민한다. 먼저 키스를 할까, 아님 해달라고 말할까? "걸을 수 있겠어?" 태양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흘러내린 내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그가 피식 웃는다. 둔통과 열이 아직도 느껴지는 뒤쪽의 감각 때문이 아니다. 온통 들쑤셔진 것처럼 우리하게 힘을 주기 힘든 허리 때문도 아니다. 그냥 이렇게 그와 나란히 누워있는 순간을 떨치고 일어나기 싫었을 뿐이다. "당장 걸으라고 안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 너 출근시키지 말까 해서 하는 말이야." "결근을 하라고?" 상체를 들어올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자, 태양이 내 볼을 가만 꼬집었다. "땡땡이 한 번 쳐 보고 싶지 않냐?" "어, 어떻게 알았어? 어릴 때부터 내 숙원이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 태양의 눈이 깊게 잠기며 나를 다시 당겨 안는다. 아예 자신의 몸 위에 날 얹는 바람에 우리 둘은 완전히 포개진다. "자면 안 돼." 편안함에 눈을 감았더니, 태양이 조금 다급한 듯 날 흔든다. 그제야 그의 남성이 한껏 부풀어 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밤새 참았단다. 곤히 잠든 나를 깨우지 못해, 악몽이라도 꿀 때까지 기다렸단다. 그런데 너무 잘 자는 바람에 지금까지 꼼짝 없이 애만 타고 있었단다. 내 애인이 굉장히 건강하다는 증거 같아서 괜히 흐뭇해졌다. "태양, 잠깐만." 등에 단단히 둘러진 태양의 팔을 풀고, 허리를 굽혀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뭐 하냐는 듯 궁금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가 갑자기 당황한 얼굴이 된다. 내가 당당히 천정을 향해 솟은 그의 것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태양의 페니스는 굉장히 따뜻하고 단단하고 민감했다. 그가 어제 내게 해준 것처럼 혀를 살짝 내밀어 핥아주자, 억눌린 신음이 태양에게서 새어 나왔다. 그런 즉각적인 반응이 신기했다. 군살 없는 태양의 허리를 잡고 좀더 잘 해볼 심산으로 태양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다. 하지만 그 보람도 없이 태양이 내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순식간에 가슴으로 당겨 올렸다. "됐어. 하지 마." "할게." "안 해도 돼." "해 보고 싶어." "다음에. 이 다음에 네가……. 아무튼 지금은 하지 마." 성급하게 말한 태양이 내 뒷머리를 당겨 그대로 키스를 해왔다. 대답할 기회를 잃어버린 나는 불평할 새도 없이 그의 혀에 녹아들어 버린다. 진심으로 아껴준다는 걸 느낀다. 많이 참고, 많이 양보하고, 그러면서도 점점 더 많이 준다. "한 판 더 할까?" 농담처럼 태양이 눈을 찡긋하며 물어온다. 그 표정이 굉장히 신선하고 매력적이어서 몰래 숨을 죽인다. 그러다 나는 짐짓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답을 한다. "아침에 한 판, 저녁에 한 판.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며 태양이 내 양 볼을 쥐고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그리고 이마를 쿵 박으며 귓가에 소름이 돋을 만큼 섹시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침에 한 판, 점심에 두 판, 저녁에 세 판. 이렇게!" 화해는 싸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이유 없이 서먹해졌거나, 한 쪽에서만 아는 이유로 섭섭해하거나, 열정이 식는 속도가 달랐거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거나, 본의 아닌 실수로 미안해졌거나, 서로의 바람만큼 행복하지 못하거나……. 아무튼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우리가 진심 어린 포옹을 나누게 되었을 때, 그 때가 바로 화해하는 순간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태양과 내가 화해했다고. 보이지 않는 싸움이 더 오래가고 아픈 법이다. 태양과 나는 그 동안 보이지 않게 서로를 아프게 했고, 이제는 언제 어느 때고 원하면 진심으로 포옹할 수 있게 됐다. "반찬이 하나도 줄지 않았잖아. 밥은 전혀 안 먹고 돌아다닌 거야?" 거의 열 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침대를 벗어났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나, 피곤이 내려앉은 눈가마저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런 이의 곁에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건 참으로 큰 축복이다. 냉장고를 열어본 태양이 저렇게 타박해 왔을 때도 나는 턱을 괴고 식탁 앞에 앉아 배시시 웃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밥을 많이 먹었는데. 쌀이 푹 줄어든 거 안 보여?" "당연히 안 보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태양은 말투에 성격이 녹아 있다. 당연히 모른다고 하거나 저렇게 당연히 안 보인다고 말할 때의 그는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사실 그가 반듯하고 정확한 사람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대체 내 거짓말은 무슨 수로 저렇게 금방 알아채는 거지? "쌀통의 눈금 표시에서 단 1mm도 내려가지 않았다." 게다가 철저하기까지! 나는 짐짓 한숨을 깊게 내쉬어 보이며 말한다. "애인. 내 말 잘 들어." 내 눈을 곧장 응시해오는 태양의 눈썹이 다음 말을 재촉하듯 살짝 들린다. "사람들이 '로봇 같은 사람'보다 '사람 같은 로봇'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뭔 줄 알아? 바로 틈이 있기 때문이야. 서로 맞물릴 틈. 내가 들어가고 상대가 내게 들어올 틈. 그래서 내 손에 닿기 힘든 부분까지 날 만져주고 또 내가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인가, 그 가능성을 보는 거야. 호감은 그런 데서 오는 거거든." "네 잘못을 지적하는 내 행동이 호감을 반감시킨다는 뜻인가?" "그걸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너의 그 빈틈 없는 성격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내 거만한 지적에 태양이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날 노려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목과 어깨 사이의 어느 지점을. 살짝 인상을 쓰고서. 너무 심하게 말했나? 조금 떨리는 심정으로 한 발 물러선 멘트를 궁리한다. 그러나 결국 태양의 강렬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 순간 태양이 외쳤다. "빙고!" 영문을 몰라 쳐다보자, 그가 싱긋 웃는다. "예전에 네가 그랬거든. 내가 눈썹 사일 찌푸리고 쳐다보면, 너의 그 어깨랑 목 사이가 시려진다고. 방금도 그래서 움츠렸잖아."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어깨에 힘을 풀고 납득한 표정을 짓는다. 태양콘 봉지를 찬장에서 꺼내다가 또 문득 그를 돌아본다. 그리고 쌀을 씻으려고 개수대로 가는 그를 가만히 불렀다. "애인." 심상치 않은 내 음성을 안 건지 그는 흘끗 돌아보며 물을 잠근다. 쏴아 쏟아지던 물소리가 사라지니 어느 새 집안엔 정적이 흘렀다. "솔직하게 대답해줘. 나 말이야……."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느라 잠시 멈추고. 태양콘 봉지 끝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눈도 내린 채. "많이 변했니? 예전에 네가 알던 여재인하고 지금의 나, 달라졌어?"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이다. 수술 이후로 사람들이 예전과 달라진 내 행동에 종종 놀라는 걸 느끼곤 했었다. 정말 달라서 그러는 건지, 달라졌다면 어떻게 다른 건지 내가 먼저 묻지는 못했다. 심지어 제일 가까웠던 형들에게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였다. 그들이 뭐라고 대답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형들과 가족들의 대답은 아마도 두 가지 중 하나였을 거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대답하거나, 변해도 상관 없다고 하거나. 아마 전자라면 믿지 못했을 것이고, 후자라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태양의 대답이라면……. "아니." 아무런 상처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넌 그대로다." 그런데, 대답이 너무도 간단하게 흘러나왔다. 두근. 이제는 익숙한 속도의 박동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었다.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개수대에 기대 서 있는 태양이 보인다. 그는 젖은 손을 털며 남자답게 피식 웃고 있다. 단단한 시선이 내 흔들리는 눈빛을 붙잡아준다. "변한 건 나지, 네가 아니라." "널…… 잊었는데도?" 잔뜩 미안한 심정으로 망설이듯 묻자, 그는 고개를 젓는다. "지금의 넌 내가 처음 만났던 당시 그 모습 그대로의 여재인이다. 조금 더 자라고 성숙해졌을 뿐이지 그다지 변한 건 없어. 어차피 그 때도 네가 처음부터 날 알았던 건 아니니까." 태양의 시린 미소가 내 가슴에 날아와 파랗게 물을 들인다. "그런데 나는 계속 헤어졌을 무렵의 네 모습만 찾았어. 네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내 사정에만 얽매여서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고 삐딱하게 굴었다." "태양……." "그 때도 넌 방금처럼 나를 불렀다. 내가 인상 쓰고 노려 보면 아까처럼 귀에 닿을 듯이 어깨를 움츠렸고, 눈치가 빨라서 내 기분이나 감정 같은 걸 제일 먼저 알아챘었지." 널 좋아했으니까. 나는 속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똑같아. 아팠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후퇴 없는 전진을 외치는 모습까지. 굳이 똑똑한 척도 안 하고 평소엔 못 본 척 넘어가주는 편인데, 중요한 순간에는 꼭 설명부터 하려고 드는 거. 또 아름답고 성실하지. 어쩔 땐 깜짝 놀랄 정도로 너는 예전하고 달라진 게 없어. 그러니까 쓸데 없이 고민하지 마." 태양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길게 내쉰 다음 내가 말했다. "고마워." "뭐가? 네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줘서?" "아니. 솔직하게 말해줘서." 내가 웃어 보이자, 태양도 피식 웃고는 다시 돌아서서 물을 튼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 봐, 여재인.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그는 참으로 어른이다. 참으로 어른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다. 나는 태양콘을 담을 나무 재질의 볼을 꺼내고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달려가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그런 다음 나는 곧장 떨어져서 물러서는 중이었다. "으아아앗!" 흠뻑 젖은 손이 갑자기 뻗어와 내 팔을 낚아챈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꽉 조여 안고는, 깊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 기세에 자꾸만 상체가 뒤로 꺾여서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내 애인이 건강한 정신과 신체를 소유하고 있어서 나는 흐뭇했다. <간절한 기대는 환상을 부른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거닐고 있으면 달이 꼭 나만을 위해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런 날에는, 언젠가는 너도 나를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도 들고, 어쩌면 나도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착각은 실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16. 점심을 먹고 느즈막이 극장에 전화를 했다. 다들 내가 핸드폰도 받지 않고 나타나지 않아 당황한 눈치다. 어제 공주 의상 입힌 게 탈이었다고 후회도 하고 걱정도 많이 했단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나오라고 아우성이었다. 하루 쉬겠다고 했더니 그럼 회식이 있으니 밤늦게라도 들르란다. 내키지 않지만, 결근까지 한 주제에 그럼 안 될 것 같아 승낙해 버렸다. "애인이 되어도 독점할 수 없는 건 예전과 똑같군." 한숨 같은 태양의 혼잣말이 내 등에 툭 와 닿았다. 통화 내용을 듣고 한 말인 것 같긴 한데, 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를 향해 돌아서서 막 물어 보려고 하는 찰나, 이번엔 집 전화가 울렸다. - 재인아아아, 여기가 어디냐? 지효다! 완전히 녹초가 다 된 지친 음성으로 다짜고짜 물어온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현재 상태를 금방 눈치챈다. 밤새 원고 작업을 하고 새벽에 기절했다가 방금 깨어난 것일 게다. "지구. 넌 아직 지구별에 있다." - 나 아직도 못 뜬 거냐? "그런 것 같은데. 이 전화선은 다른 별하고 연결이 안 되거든." - 젠장 맞을!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세상이 낯설까? "뭐 쓰다 잤는데?" - 빌어먹을 황 감독이 내 정기를 다 빨아먹고도 시원찮은지, 시나리오 다 갈아엎잖다. "이제 와서?" - 그러니까 이제 와서! 대박 싸이코 아니냐? "그건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대체 왜 그러는데?" - 그 인간, 이유 설명하는 부류냐? 나도 알고 싶다! 황유진 감독은 연극계에서 최고로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7년 동안 작업한 시나리오를 상연 한 달 전에 찢어 버려서 작가와 원수가 된 적도 있다. 그런데 지효가 이 정도로 참는 걸 보면, 그녀의 마음에도 대본이 썩 들어차진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새로 쓸 거지?" - 어떻게 알았냐? "응원이 필요해서 전화한 거잖아. 안 그럼 지구를 머리에 베고 지금도 자고 있을 텐데. - 기특하다. 어느 새 내 패턴을 줄줄 꿰는구나. 아무튼 시나리오를 새로 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공연 일정을 이제 와서 늦추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거다. 예매율도 40프로 정도 진행 된 걸로 아는데, 부담이 크겠군. 지효의 퀭한 눈과 부들부들 떨고 있을 손가락들이 눈에 그려진다. "무리는 하지 마. 일단 푹 자고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 네 이야기의 매력은 피로와 짜증을 걸러낸, 순도 높은 생기와 활력에 있으니까." - 어쭈. 아부도 늘었네. 자식, 넌 새 직장 어떠냐? "적어도 그만두진 않았으니까 내 걱정은 접어 둬." - 생각보다 오래 버티네. 면접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바로 튀어 나오라니까. "맛있는 것만 먹고 살 순 없잖아. 내 입맛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내버려 둬." - 알았다. 악바리 여재인이 어디 가나? 아아, 그 말 들으니 갑자기 보고 싶다, 친구야! "나도 너 보고 싶다." - 얼 만큼? "음, 한 세 시간 만큼." - 에게! 무엄해라! 다시 말해 보시지. 밤까지 전화 붙들고 안 끊어주는 수가 있어. "뭐야? 지금 떼 부리냐?" - 알지, 나 질긴 거? 빨랑 말해. 응원해준다며! "하하하! 그래! 까짓, 밤도 새워가며 실컷 불태울 만큼이다! 네가 보고 싶어서 이 몸이 아주 달아올랐다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다!" - 오오, 감미롭군! 야, 끊는다. 덕분에 뭔가 막 떠오르고 있거든. 지효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뚝 끊어 버렸다. 갑작스럽게 끝난 통화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는데, 등이 꽤 따끔거린다. 돌아보니 거실 한가운데 팔짱을 끼고 서서 태양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애인 앞에서 다른 사람과 그런 식으로 통화를 하다니. 간도 큰 여재인." "친구끼리의 농담인데 뭐. 별 것도 아니잖아. 질투의 화신, 남태양."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꾸하자, 태양은 팔을 풀고 천천히 다가오면서 낮게 말했다. "네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나 보다. 종아리 뒷부분에 소파가 닿자마자 그 위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태양은, 놀라서 올려다보는 내게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내 어깨 양 옆 소파 등받이에 손을 짚으며 낮게 경고했다. "나는 인내의 화신이다, 여재인. 괜히 자극해서 후회하지 마라." 끄덕끄덕.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분위기를 잘 타는 내 머리가 절로 움직인다. 태양은 만족스러운지 위험한 미소와 함께 무릎을 바닥에 대고 내 앞에 바싹 붙는다. 나는 재빨리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려 방어하듯 끌어안은 자세로 그를 마주했다. "회식 가지 마." 꽤 잘 먹혀 든다 싶었는지, 여전히 경고성 말투다. "가야 돼. 아까 간다고 말했잖아." 고집스레 내뱉으면, 태양의 미간이 살짝 좁혀진다. "그럼 완벽한 땡땡이가 아니잖아. 어중간한 건 질색이야." "얼굴만 내비칠게. 한 시간만 앉았다 오면 되잖아." "무슨 얼굴을 한 시간이나 보여주나? 십분으로 줄여." "거기까지 간 보람이 없잖아." "그럼 나 더러 차 안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란 말인가?" 문득 태양이 불평처럼 내뱉은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내 무릎을 감쌌던 팔을 풀고 태양의 양쪽 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나 데려다 주려고?" "그보다……." 태양은 양반다리가 되어버린 내 다리를 하나씩 펴서 소파 아래로 늘어뜨린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사이로 바짝 들어와 상체를 숙인다. 덕분에 나는 완전히 그에게 갇혔다. 속삭이는 듯한 태양의 마지막 말은 우리의 입술이 닿기 직전에 들었다. "너 데려오려고." 달콤해라! 한 번 껍질을 깐 초콜릿은 배신하는 법이 없다. 달기만 한 설탕이 아니라서, 오래도록 입 속에서 음미할 수 있을 만큼 향이 깊고 풍요롭다. 촉 소리를 내며 따뜻하게 닿았다 떨어진 태양의 입술이 붉다. 나는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살짝 물러난 태양 때문에 키스에 실패하고 말았다. 불만을 토로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입술을 노려보자 태양이 웃는다. 완벽한 스마일 모델 같은 표정. 그의 뒤통수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입술을 내밀자, 태양도 더 참기 힘들었는지 짧게 쪽 맞춰주고 바로 떨어진다. "잊지 않았겠지? 아직 점심에 두 판, 저녁에 세 판 남았다." 보채듯 상체의 무게를 완전히 그에게 실어버리자, 태양이 나를 번쩍 들어올린다. "침대? 식탁? 바닥? 욕조? 선택해." 태양이 농담조로 물어온다. 걸음은 벌써 큰 방 침대 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나는 그에게 안긴 채 가만히 그의 눈가와 뺨과 입술을 매만진다. "하늘." 지구에 떨어지기 전, 너하고 내가 있었던……. "태양, 나 하늘에서 하고 싶어." 완전히 정력을 다 소진하고 쓰러진 상태 그대로 눈을 떴다. 태양이 '죽도록 섹스할 각오'를 해야 허락한다고 선언했던 그 침대 위에서. 깜빡이며 눈을 뜨자, 어느 새 어둑어둑해진 방안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벽을 보고 엎드려 있던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된 몸을 움직여볼 엄두를 못 낸다. 그 때 조용히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태양이 조심조심 침대 위로 올라왔다. 조그맣게 출렁이는 매트리스. 스르륵 스치는 이불 소리. 나는 몰래 눈을 감는다. 그리고 낮은 숨소리와 함께 내 곁에 자리를 잡는 태양의 기척을 느낀다. 침묵은 조금 전과 다름 없이 흐른다. 하지만 공기는 조금 달라졌다.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리게 움직이며 나와 태양을 스치고 움직인다. 그건……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태양의 시선 때문일수도 있고, 그의 시선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뛰는 나의 심장 때문일 수도 있다. 촉. 나의 맨 어깨 위에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태양의 입술. 그리고 따스한 손길이 내 귀를 만지고 목을 쓸며 그 자리에 차례로 키스가 이어진다. 내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태양은 어디 가고 점점 대담하게 접촉해오는 태양만 있다. "으응." "일어나, 애인." 내가 조그맣게 웅얼거리자, 태양이 귓가에 따뜻하게 속삭인다. 모른 척 다시 눈을 감으면 태양의 손이 겨드랑이를 파고 들어와 나를 폭 감싼다. 그의 가슴이 내 등에 닿아 있다. 못 일어나겠다. 따뜻하고 포근해서. 그리고 못 살겠다. 눈물 나게 행복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맨살이 닿는 느낌은 참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증폭시킨다. 그럴 때면 내가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가, 왜 살아있는가 같은 의문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저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무얼 얼만큼 해줄 수 있는가, 그것만 알고 싶어진다. 적어도 태양과 있을 때 나는 그렇다. "뭐야, 너 다 벗고 있잖아. 그러고 어디 갔다 왔어?" "전화가 와서 받았다가, 나간 김에 돼지 밥 주고 왔다." "너 뚱이 아무 거나 먹이지 마. 걔 이상해 요즘." "이상한 거 안 먹여." "거짓말." "나 못 믿어?" "음……." 대답을 얼버무리자, 태양이 고개를 숙여 내 볼을 깨물어 버린다. 한 쪽 다리가 슬쩍 내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느낌에 피하려고 꿈틀거렸더니,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고는 완전히 덮치듯 내 목에 얼굴을 묻어왔다. "뭐 하는 거야? 또 하려고?" 사이로 들어온 태양의 다리가 완전히 내 다리를 얽어와 정확히 포개왔다. 아직 부어있던 뒤쪽이 살짝 닿은 느낌에도 예민하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나 힘든데, 태양." "회식 안 가면 되지." "그건 이미 약속했잖아." "음……." 이번엔 태양이 얼버무린다. 아까보다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들어온 태양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 등 전체에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심장의 힘찬 박동이 전해진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태양도 마찬가지였는지 힘껏 밀어붙이는 것과 동시에 내 얼굴을 덮쳤다. 뜨겁게 달아오른 온 몸이 태양의 키스로 인해 더욱 홍조가 짙어진다. 힘든 자세로 맞닿은 입술이 아쉽게 떨어지자, 이젠 내 귀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어떻게 참았니, 태양? 그 동안 이런 열정들을 다 어디에 숨겨 놓았었어? 인내의 화신, 남태양. 무엇이 너를 그토록 참게 했을까? 얼마나 인내해 왔길래 너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할까?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네가 더 이상 참거나 인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내가 열어주고 싶어. 사랑하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널 사랑했던 나를 이제는 느끼니까. "하악! 재인아! 하아! 하아! 재인아!"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것처럼 내 이름을 부르는 태양의 거친 호흡이 날 울게 했다. 미칠 것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손길과 뜨겁게 부딪쳐오는 그의 몸이 날 울렸다.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게 기쁘면서 동시에 왜 이다지도 서러운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점점 더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했다. "흑. 흐윽. 태양아! 흑. 으읍. 어엉! 어흐흑!" 그의 숨이 격렬해질수록 내 울음소리도 커져 갔다. 결국 나를 돌려 품에 안은 태양이 다정한 입술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미 흘러 넘쳐 버려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눈물은 손이 와서 닦아주었다. 쉬이. 나직하게 달래주는 태양은 왜 우냐고 묻지 않았다. 훌쩍거리며 잦아드는 울음의 이유를 나도 굳이 찾지 않았다. 어쩌면 태양도 울고 싶지 않았을까? 마음속으로는 나처럼 똑같이 느끼지 않았을까? 완전히 어둠이 내린 방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날 무렵, 나는 계속 말이 없는 태양의 가슴을 더욱 힘 주어 안았다. 그가 내게 해준 것처럼 그의 이마와 뺨에 키스도 해주었다. 이젠 네가 울 차례야. 그렇게 말하듯이. 하지만 태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내게 말했다. "울면 더 못 생겨진다니까 어두울 때 돌아누워서 우는 여재인."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 마음만 기억해도 충분히 태어난 보람을 찾은 거라고. 배가 고팠다. 힘도 없고, 여기저기 몸이 쑤시지만 일어나야 했다.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가자, 했더니 태양이 팔꿈치를 세워 머리를 괴고 날 본다. 고등학교 앞에 잘 하는 데 알아, 했더니 피식 웃으며 내 코끝을 살짝 꼬집는다. "잘만 웃어드리면 계란도 두 개 주시지?" "어떻게 알아?" 나랑 같이 간 적이 있는 걸까? 눈을 반짝 빛내며 태양에게 묻자, 그는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내 작은 별이 좋아했던 곳이니까." 따라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던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태양의 작은 별. 그가 잊지 못하는 첫사랑.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왜 이렇게 가슴이 뜨끔한 걸까? 그는 내게 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지만, 정작 잊을 마음이 없는 건 아닐까? "질투하는 건가?" 내가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자, 태양이 돌아보며 묻는다. 마치 그런 내 모습을 즐기는 것 같지만 설마 그 정도로 잔인할 리는 없겠지. 그런데 내게 질투할 자격이 있던가? 그런 자격은 태양이 내게 주는 것 아닌가?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누군지도 모를 대상에게 불공평지지 않기로 했다. "아니. 허리가 좀 아파서 쉬고 있었어." 내 대답에 태양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큰 길에서 쭉 올라가다 보면 아파트 단지가 하나 나오고 거길 지나치면 몇몇 학교가 산 아래에 밀집해 있는 곳이 나온다. 초등학교, 여자중학교, 남자고등학교. 그 곳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딱 하나 뿐이라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여중과 남고가 붙어 있으니, 학교 간의 담 높이도 꽤 높고 하교단속도 철저했던 게 기억 난다. 줄줄이 늘어선 문방구와 교복사들 사이에 내가 잘 가던 분식집이 여전히 자리해 있었다. 반가움에 태양의 손을 막 잡아 끌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 이제 삭아서 아줌마가 계란 서비스 안 주실지도 몰라." "그럴 리 없어. 아줌만 영원한 내 팬이야. 내기할래?" "뭘 걸려고?" 하긴 내기라면 뭘 걸어야 하는 거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쑥 생각나는 걸 아무렇게나 외쳤다. "뚱이!" "난 그거 별로 탐 안 나는데." "그럼 뭐가 갖고 싶은데?" "갖고 싶다기보다, 내가 이기면 오늘 너 회식 가지 마라." 끈질기다, 남태양. 그렇게 원한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까. 나는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우리는 차례로 분식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교시간이 지난 데다 야자 끝날 시간은 아직 좀 남아서 학생들이 별로 없다. 비어있는 자리에 가서 앉자, 태양이 벽에 붙은 메뉴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이모! 떡볶이랑 만두 주세요." 내가 소리치자 그가 살짝 미간을 모은다. 매운 걸 싫어하나? 그제야 그 생각이 들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에 다시 냉면을 추가 시켰더니, 태양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이렇게 오랜 만에 왔어?" 부랴부랴 단무지와 깍두기를 탁자에 내려놓으시며 아줌마가 애교스레 물으신다. 나는 그 분의 팔에 찰싹 매달리며, 요즘 먹고 살기 힘들다고 조금 징징댔다. 그러면 거친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시며 웃다가 태양을 돌아보신다. "몰라보겠어. 총각." "어, 태양이 알아요?" "옛날에 너하고 같이 왔던 친구 아냐. 맞지?"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그 때 제가 같이 왔던 누구보다." 태양이 날 지목하듯 쳐다보자, 아줌마가 대신 그를 응징해주신다. "내가 만든 떡볶이 먹고 인상 쓰던 사내애를 잊어버리기엔 아직 젊어." 그랬어? 나는 입 모양으로 그에게 묻는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태양. 아줌마는 금방 만들어오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지신다. 떡볶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날 따라온 건가 보다. 함께 온 적이 있는 이 곳도 그와 나의 추억일 수도 있을 텐데. 갑자기 또 조금 서러워졌다. 가슴 한 쪽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 "여긴 하나도 안 변했군." 태양의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3 가을, 승진이네와 함께 여기 왔을 때 아줌마는 조금 우셨다. 기억을 잃고,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내가 섭섭하셨나 보다. 그 날도 계란 두 개를 얹어주시며, 다른 녀석들은 손도 못 대게 하셨다. 무지 민망하고 당황했는데, 마음은 마음을 알아본다는 말이 맞는지 그저 편안하고 정겨운 느낌에 혼자서도 자주 왔었다. 졸업을 한 후에도 역시. 어느 순간부터 아줌마를 이모라 부르기 시작했고, 극장 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르거나 할 때면 마감하시는 것까지 도와드리곤 했다. 그러니까 오늘 태양이 내기에서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얘기다. "이런! 계란이 다 떨어졌네." 하지만 가끔 제로에 가까운 일도 일어난다. 아줌마는 떡볶이와 냉면을 우리 앞에 놓아주시면서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이렇게 덧붙이시는 거다. "대신 내가 메추리알 열 개 얹었어. 많이 먹어." 내가 눈을 들어 태양을 보자, 그도 내 눈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문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게 역력하다. 어쩌지? 나 눈물나올 것 같아, 태양아. 푸후훗! 결국 내가 먼저 웃고 말았다. 태양도 그제야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린다. 영문을 모르는 아줌마도 덩달아 웃으며 우리를 번갈아 보신다. 냉면 위에 동동 뜬 메추리알이 웃겨서 배를 잡았다. 빨간 떡볶이 위에 얹혀 있던 메추리알 하나가 도로록 굴러 그릇 가장자리에서 멈춘다. 도저히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코메디 같아서, 나는 눈가를 훔치면서도 연신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태양이 신중한 표정으로 젓가락으로 잘 집히지 않는 메추리알을 공격할 때는 아예 몸을 뒤로 빼고 배를 접고 웃어댔다. 우리 나이 어느 새 스물일곱. 열여덟의 그 때와 같을 순 없을 거다. 스물 일곱은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도착한 나이다. 그는 그 곳에서 모든 것을 혼자 자급자족하고, 식인종을 사귀고, 선교사와 토인을 구하고, 돌아갈 배를 만들며 그 곳에서 26년을 살았다. 유리 가가린은 스물일곱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고, 세계 최연소 할아버지가 된 남자의 나이도 당시 스물일곱이었으며, 얼마 전 일본에서 주식으로 200억을 번 사람 나이도 올해 스물일곱이었다. 천재소설가 김유정이 2개 신문의 신춘문예에 화려하게 등단한 나이도 스물일곱.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이다. 이쯤 되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얼만큼 나아갈 것인가와 얼만큼 자중해야 하는가에 신경 써야 한다. 조금 더 어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훨씬 더 신중해지고 노련해져야 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지금처럼 시간의 흐름을 싹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이 온다. 자주는 아니고 아주아주 가끔. 등딱지에 붙은 나이테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그럴 때는 그저 눈을 딱 감고 꿈을 꾸듯 자연스레 흠뻑 젖어 들면 되는 거다. 나이를 잊고 천진한 웃음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그래도 되는 사람들 앞에서라면, 괜찮다. 하지만 물론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꼭 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먹어라. 여재인. 맛있게 꼭꼭 씹어서 네 가슴 속에서 애정이 마구 샘솟도록." 그럴 땐 개의치 말아야 한다. 그가 첫사랑의 말을 얼마나 뼈 속 깊이 신봉하는가 따위도 절대 따지지 말 일이다. 질투나 섭섭함, 반감 같은 건 의식 저 멀리로 화끈하게 던져 버려야 한다. 그런 건 적어도 이 고마운 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학교 앞에 온 김에 재훈과 선민이 열었다는 서점에 들렀다. 빈손으로 가기가 뭣해서 분식집에서 군것질거리를 좀 사갔더니, 때마침 놀러 와 있던 희웅도 합세해서 금방 비워 버렸다. "너희들은 여전히 붙어 지내는구나." 내 말에 재훈이 이를 쑤시다 말고 웃는다. "그건 어째 우리가 할 소린 것 같다." 태양과 나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희웅과 선민. 나는 저쪽에서 몇 안 되는 경제잡지를 뒤적이고 있는 태양을 돌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좀 붉어졌나 보다. 뺨으로 열기가 느껴진다. "좋아 보인다, 재인아." 문득 건네온 희웅이의 말에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안도감이 묻어있는 음성에 괜히 짠해진다. 수술 후 처음 등교했을 때 그들에게 거리를 두었던 게 내내 마음에 남았었는데. 희미한 진동 소리에 돌아보니 전화가 왔는지, 태양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문을 열고 나간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선민이 물었다. "너 머리 수술했었다는 거 태양이도 아냐?" "말해야지. 곧 말 할 거야." "그럼 아직 모르는 거네? 너 태양이 기억은 나?"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녀석들 표정이 순식간에 흐려진다. 무얼까? 이들은 알고 나는 모르는 사연이. 꼭 알고 싶지만 용기가 안 난다. 말해주면 듣겠는데, 물을 용기가 안 나니 가슴만 두근두근 뛰고 있다. "내가 태양일 많이 좋아했다는 건 알아." 내 말에 세 사람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도 다행이라는 표정. 그런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와 내가 어떤 사이였는지, 그의 작은 별이 누군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말을 아끼는 눈치다. "인학이랑 태양이, 많이 친했어?" 그래서 불쑥 다른 질문을 던지고 만다. 선민은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며, '인학이? 서인학?' 하고 되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입안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걔네 둘이 2학년 때 짝이었지? 3학년 때는 아니지만." "맞아. 둘 다 말이 없는 놈들이니 잘은 모르겠는데 서인학이 남태양을 좀 챙기긴 했었다." "야야, 기억 나냐? 우리가 조퇴한 남태양 책가방을 가져 가려니까 갑자기 그 녀석이 가로막았던 거. 그러고 보니 친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조그맣게, '그렇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 재훈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계산대 쪽으로 달려가더니, 책상 서랍을 열고 수첩 사이에 끼워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거 우리 고3 때 찍은 건데. 너도 있고 태양도 있다." 불쑥 내 앞으로 내밀어진 사진을 받아 드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 단체 사진이다. 어지럽게 겹쳐선 녀석들이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브이. 그 한가운데 내가 있다. 창백하고 여윈 모습이지만 활짝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둘러선 재훈과 선민 그리고 오승진. 태양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었다. 맨 가쪽에 여유롭게 팔짱 끼고 서서 웃고 있는 모습. 창가로 비쳐 든 햇살이 그의 뺨과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지금보다는 앳된 모습이지만 조각가가 다듬어놓은 듯한 얼굴 윤곽은 그대로다. 잘 생기고 멋진 내 애인. 이 때도 키가 무척 컸구나. 미소가 참 멋져. 나도 모르게 가만히 그 위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곁에서 같이 사진을 들여다보던 희웅이 조용히 한 쪽을 가리킨다. "여기 서인학도 있네." 그렇다. 인학이도 있다. 얇은 안경테가 차갑고 지적으로 보인다. 웃고 있거나 아이들에게 동조하여 포즈를 취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그 풍경에 어울린다.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 밝은 갈색 머리. 그의 시선이 반대편 가에 선 태양을 향해 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크게 들린 것 같다. 정말 태양의 작은 별이 인학이란 말인가? 정말 그래서 인학이 기억을 잃은 내게 태양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걸까? "이런 사진이 있었네." 어느 새 들어왔는지 태양이 내 등 뒤에서 말했다. 두근. 나도 모르게 숨기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든다. 하지만 태양은 자신의 눈 가까이에 오도록 사진을 쥔 내 손을 잡아당겼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가 재훈을 향해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이거 갖고 싶은데." 눈치 없는 선민이 옆에서 끼어 들었다. "가져. 우린 필름이 있으니까 또 현상하면 돼." 그 말에 태양은 고맙다고 말하며 조금 전 고른 잡지 사이에 사진을 끼웠다. 나는 지효에게 줄 국어사전을 하나 골랐다. 두툼한 최신판을 받으면 좋아서 방방 뛸 거다. 얼마 전 목욕 중에 생각나지 않는 단어가 있어 급히 사전을 찾아 보다가 그만 욕조에 빠뜨렸다고 했으니까. 녀석들이 한사코 만류하는 걸 억지로 계산을 했다. 작별인사를 하며 나올 때까지도 나는 자연스럽게 웃지 못했다. 제멋대로 굳어진 얼굴 근육 때문에 이중으로 속상했다. "애인." 막 차에서 내리려는 날 태양이 부른다. 시끌벅적한 대학로 거리. 어느 골목 담벼락에 주차하고는 시동을 껐다. 거의 밤 11시가 되어가지만, 극장 회식은 저녁 공연이 끝난 10시 이후에야 시작했을 것이다. 돌아보자, 그는 더할 수 없이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술은 절대 마시지 마." "왜? 한 잔도 안 돼?" "안 돼. 너 취하면 나쁜 버릇 나와. 누가 권해도 꾹 참고 사양해." "무슨 버릇?"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한 손을 뻗어 내 볼을 가만히 잡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기울이며 그의 입술로 다가가자 그가 쿡 웃으며 짧게 키스해준다. "이런 버릇." 믿을 수 없는 말을 잘도 한다. 내가? 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면, 태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만 마시면 엉겨붙잖아. 그거 참 곤란해.' 라면서.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고개를 돌렸다. "십 분 안에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태양의 말을 등 진 채 나는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오늘의 공연도 그다지 좋지 못했나 보다. 실은 어제 못지않게 엉망으로 망친 게 확연한 분위기다. 내가 고깃집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 팀이 있는 자리를 금방 발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삼겹살과 목살이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직원들의 한숨 소리 뿐인 그 곳이, 시끄럽고 활기로 가득한 식당 안에서 유독 튀었던 것이다. "자자, 왜 이렇게 침울하세요? 한 잔들 하세요. 네?" 내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술을 권하자, 그제야 한 마디씩 뱉기 시작한다. "맞아요. 먹자고요. 다 먹고 살자고 이 고생도 하는 건데." "여 매니저가 없어서 그런가? 어제하고 오늘은 완전 극과 극이었어." "왜 똑같이 형편 없는 연극을 보고 어제 관객은 잠잠했는데, 오늘 관객들은 그렇게 아우성을 질러댄 거냐고. 왜에에!" 클레임이 엄청 났었던 모양이다. 기획부장 겸 홍보 담당인 조대형 씨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탄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르바이트 광일이가 입에 물었던 젓가락을 쳐들고 말했다. "그게 다 고객감동 서비스의 부재에서 오는 현상이거덩요! 어제는 예쁘장한 매니저 형이 사람 녹이는 미소로 관객들 가슴 벌렁벌렁하게 해줬지만, 오늘은 아무런 서비스도 없고 불평을 늘어놓아도 세심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딱! 내가 광일이의 뒤통수를 치며, "예쁘장한 뭐시라? 벌렁벌렁 뭐라고?" 핀잔을 주어도 녀석은 불시에 맞은 곳이 몹시 따가운지 계속 어루만지기만 한다. 그리곤 또 새삼 억울했는지, '맞는 말이구만, 뭘.' 꿍얼거리며 탄 고기를 집어 먹는다. '맛있냐?' 물으니, 잘 익은 목살 한 점을 집어, '아, 해요.' 그러면서 내 입에 넣어준다. 그나저나 정말 이러다간 극장 문 닫고 말겠다. 위치도 조금 외진 데다가 크기도 작아서 유치할 수 있는 연극이 제한되어 있다. 그렇다고 표 가격이 낮은 학생 연극이나 아동극만 상연하기에는 극장 세가 너무 비쌌다. 객석 수를 모두 채운다 해도 수지가 맞을까 말까다. 그야말로 대대적은 재건공사가 필요한 시점인데 자본이 없다. 그래서 누구도 섣불리 의견을 내거나 변화를 추구하자고 주장하지 못한다. "저, 그럼 이건 어떨까요?" 내가 입을 열자, 모두가 이쪽을 쳐다보며 집중한다. 실오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들이라 좀 황당해도 당장은 의견 하나가 고플 것이다. "시사연 형식으로 극을 유치하는 겁니다." "그게 뭔가?" 내 말에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김 이사님이 물어온다. 그는 극장 사장님의 아들로 거의 실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털털한 성격에 직원들과도 곧잘 어울리는 그는 현재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나는 조금 더 생각을 정리했다가 처음 꺼내보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매표를 하는 게 아니라 대관을 하는 거죠. 즉, 돈을 내고 표를 사는 관객을 유치하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장소를 빌리는 극단을 주로 유치하는 방식입니다. 지금은 극단과 관객 모두를 유치해야 하는데, 둘 다 실패하고 있잖습니까? 제 생각엔 차라리 극단만 유치해서 그들에게 객석 비용까지 모두 물게 하는 겁니다." "영화의 시사회처럼 말인가?" "이를 테면 그렇죠. 우리 극장을 이용해서 극을 상연하는 극단은 자신들의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의 표 값까지 우리에게 미리 지불을 해야 하니까요. 초대극이나, 본극 상연을 앞두고 있는 극의 시험 상연이 이런 경우에 포함됩니다." "좋은 발상이긴 한데, 대체 누가 우리 극장에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오겠는가?" "대형 예술극장에서는 대부분 흥행에 위험부담이 없는 기존 극을 유치하려 합니다. 그래서 웬만큼 이름 있는 감독이나 연극 배우들이 아니면 신극을 상연할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고요. 그럴 때 대관료가 싼 전용 시험상연 극장이 있으면 좋은 홍보 기회로 삼을 수 있지요. 평론가와 문화 관련 기자들을 먼저 초청해서 쇼케이스가 아닌 본 극을 다 보여주고 신뢰성 있는 평가를 얻고요. 그런 다음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그 땐 큰 극장으로 옮겨가기도 쉬울 테니까요. 우리가 그 발판이 되어주는 겁니다. 물론, 간단하진 않습니다." "여재인 매니저 생각에 가능성은 어느 정돈가?" "반반입니다. 시작이 중요하죠." 내 말에 모두들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 된다. 그러다 기획부 조 부장이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아, 지금 밥그릇이 떨어지나마나 하고 있는데, 망설일 틈이 어딨나? 다른 의견 없으면 어차피 상연 스케줄도 텅텅 비었는데, 한 번 해보자고!" "영업은 우리 모두 다 뛰어야겠지?" "일단 브리핑 자료와 보고서를 작성해서 사장님께 결제 받고, 모든 인맥과 발품과 능력들을 동원해서 최고의 시연극을 유치하는 거야! 어때? 이 김에 극장 간판도 싹 바꿔 버릴까?" 김 이사님도 찬성하는 눈빛으로 목소리에 힘을 준다. 재인도 말은 안 했지만 역시 낡은 간판과 내부장식이 좀 걸리긴 했다. 다 바꾸면 좋겠지만 돈이 없을 거다. 극장은 담보 잡힌 지 오래라 대출 받기도 힘들 테고. 내일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가 보기로 하고 거국적으로 건배를 외치려 하는데, 갑자기 광일이가 '어!' 소리를 내며 한 쪽을 가리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돌아본 그 곳에는 놀랍게도 태양이 서 있다. 헉! 이런! 그를 깜빡 하고 있었다. "전에 극장에 오셨던 분 맞죠? 매니저 형 찾으러……." 광일이가 벌떡 일어나며 태양을 향해 아는 체를 한다.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인사하는 태양.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윽. 20 분이나 지나 있다. 그렇다고 정말로 쳐들어오다니! "아, 여 매니저 친구신가? 앉으세요." 김 이사님이 선선히 자리를 권하자, 조금 망설이던 태양이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조금 널찍한 왼쪽을 놔두고 딱 붙어있는 광일이와 나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며, "친구가 아니라 애인입니다. 기다려도 안 나오길래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천인공노할 말을 내뱉었다. 내가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나를 마주보며 씽긋 웃는다. 웃다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나? "괜찮아요, 괜찮아. 매니저 형의 애인은 우리 모두의 애인이죠." 헤실 거리며 태양을 향해 새 잔을 건네주는 광일을 노려본다. 넙죽 받으며 녀석과 사람 좋게 웃음을 나누는 태양도 노려본다. 건배하려고 치켜들었던 손들이 곧 다시 공중에서 한 자리에 모인다. 그 중에 태양도 끼어 있다. 놀랍게도 다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우리 극장의 앞날을 위하여!" "위하여!" 다같이 외치며 소리친 건배에 태양이 눈을 빛내며 동참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는 미국에 살다 와서 한국의 이런 문화가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데리고 들어올 걸 그랬나? 이제야 조금 후회가 된다. "아아, 구려요! '위하여'라니! 제가 친구들한테 얘기해주면 아무도 안 믿는다니깐요. 요즘 세상에 '위하여!' 하는 데가 어딨대요. 이러니까 우리 극장이 요 모양 요 꼴……." 말을 하다 말고 이사님 눈치를 보며 제 입을 틀어막는다. '히익!' 하며 놀란 척 하는 광일에게 이사님이 그럼 요즘은 뭐라고 하냐고 물었다. 광일은 막상 떠오르는 말이 없는지 가만히 턱을 짚고 생각하다가 이렇게 외쳤다. "와탕카!"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모두가 깜짝 놀라 기가 막힌 듯 그를 쳐다보았다. 광일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다가 좀 작아진 목소리로 또 이렇게 중얼거렸다. "'원샷'이라 해도 되고요." "약해, 약해, 최광일. 너 와탕카의 뜻이 뭔지는 알고 있어?" 내가 또 나서서 핀잔을 주자 다른 사람들도 그냥 웃고 만다. 하지만 태양은 눈치를 챈 듯 피식 웃으며 몸을 뒤로 조금 빼준다. 광일은 아직 이쪽 분위기를 파악하기 전이라 우물우물 대답했다. "와당탕 다 같이 마시고 '카아!' 소리를 내자, 뭐 이런 뜻 아닌가요?" "틀렸어!" 아주 통쾌하다는 듯이 내가 대답하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와당카'와 '와탕카' 로 나뉘는데. 먼저 와당카는 아프리카 말로 '건배'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 그리고 와탕카는 미국 인디언 말로 '신성한 힘'이란 뜻이야." 어느 새 태양이 방석 밑에 들어간 내 손을 꺼내 검지를 치켜 세워준다. 거들먹거리는 모양새가 되지 않으려고 애써 요즘 자제하는 포즈인데. 아니나 다를까 되게 잰다는 듯 광일이 삐죽거리며 소주잔을 들었다. "매니저 형, 잘 나셨어요. 칫. 똑똑한 애인 두셔서 형은 좋겠어요." 어느 새 태양 더러 형이라 불러대는 광일의 넉살에 직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모두에게 잔이 돌아가고 두 번째 건배할 타이밍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이번엔 뭐라고 하지?" "잘난 매니저 형 애인이 선창하시죠." 원한이 쉽게 풀리지 않는지 광일이 말한다. 당황하며 사양할 줄 알았던 태양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국말로는 '건배.' 밖에 모릅니다. 영어로는 간단하게 'Cheers.' 라고 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건배하죠." 잠시 말을 멈추자, 잔들이 더 높이 치솟았다. "Best of luck!" "Best of luck!" 태양의 선창에 모두가 똑같이 크게 외쳤다. 누군가는 손뼉을 치기도 하고, '아자!'라고 한 번 더 소리치기도 했다.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 내가 끼고, 태양이 끼어 더 회식다워진 회식. 극장은 허술했지만,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마음, 이루고자 하는 의지, 이겨 내려는 노력. 이런 것들을 참 좋아한다. 몰랐던 면들이다. 이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는 결코 눈치 채지 못했던 열정들이다. 그래서 여태껏 여기 남아서 버틴 내가 자랑스럽고, 힘을 내어 고난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내가 두고 떠나와야 했던 것들에 대한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여기서의 새 출발에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 작은 세계 속에 거침 없이 들어와 행운을 빌어준 태양. 나는 테이블 밑으로 그의 손을 잡고 가만히 힘을 주었다. 따뜻하게 맞잡아오는 힘. 처음부터 너무나 익숙했던 손의 감촉. 문득 돌아보는 태양의 얼굴에 진지한 격려가 담겨 있다. 광일에게 서 있는 걸 들키기 전에 그도 우리 대화를 조금 들은 모양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손바닥을 단단히 조여 오는 그 힘만으로도 그의 응원이 전해져 왔다. 그 날 밤, 먼저 잠이 든 태양이 '작은 별'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내겐 최고로 완벽한 하루였을 것이다. <너 때문이 아니다> 바람이 끈적이는 게 아니다. 바람이 머금은 습기 때문이다. 바람이 더러운 게 아니다. 바람을 따라온 먼지 때문이다. 바람이 할퀴는 게 아니다. 바람에 휩쓸린 조각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 사과하지 마라. 날 울고 웃게 만드는 건, 네가 아니다. 17. 눈부신 햇살이 온 세상에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오피스텔을 나서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신선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새벽에 내린 비로 더욱 청명해진 하늘에는 고개를 높이 들어 인사도 해주었다. 절로 입가에 그려지는 개운한 함박 미소. 지나가는 사람이 보았다면 같이 웃어줬을 법한 표정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맞은 편 주차장 한가운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우를 발견한다. 거짓말! 그렇게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던 그가 이렇게 먼저 나타나다니! "안녕, 재인아?" 게다가 어제 만나 헤어졌던 사람처럼 인사를 해온다. "진상우……!"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뱉어내고는 나는 그 자리에 굳어 서 버렸다. 그는 많이 야위고, 근육도 줄고, 얼굴도 굉장히 창백해져 있다. 요즘은 운동도 안 하나 보다. 뭐 하고 살았는지 밥도 안 먹었나 보다. 나 버리고 도망갔으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이건 두 번 배신하는 거잖아. 눈을 깜빡이며 그의 존재를 재차 확인하는 내게 상우가 다가왔다. "매일 아침 저기 서서, 네가 그런 미소를 보여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완전히 굳어버린 나를 두 팔로 가만히 안으며 저렇게 말했다. 자신이 나타나도 나의 일상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순간이 결국 와준 것 같다면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어, 바보야. 너 때문에 내가……, 네 자식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가슴이 답답해져서 크게 숨을 들이쉬자 목구멍이 아파온다. 포옹이 이렇게 헐거울 정도로 바싹 말라 버린 그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조차 너무 미안해서 꺼내지 못하고 있는 상우 때문에, 나는 집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것도, 그것을 들고 뒤따라 내려온 태양이 내 뒤에 서 있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결국 발길 닿은 곳은 가을 형의 카페였다. 조용한 아침 시간, 일찍 문을 여는 곳은 여기밖에 생각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들어서자, 형은 조금 놀란 듯 상우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애써 묻지 않았다. 메뉴를 가져다 주지도 않았고, 어디 앉으라고 손짓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가 구석 자리에 가서 앉는 동안, 나를 위한 애플티와 상우를 위한 밀크티를 준비해주었다. 탁자 위에 놓이는 뜨거운 찻잔을 감싸 쥐며 가을 형에게 작게 고맙다고 말했다. 형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용히 떠나기 전에 상우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형의 저런 면 때문에 우리 둘다 형이 있는 카페만 찾아가곤 했었다. 친절하지만 할 만한 충고는 다 해주는 심지가 굳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든, 어떤 분위기로 앉아 있든 늘 그 곳이 원래 우리 자리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형은 여전하시다." 상우의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을 잘 거르는 상우에게는 늘 밀크티와 카스텔라를 주곤 했는데. 가을 형도 말 없이 사라졌던 상우가 얄밉긴 했나 보다. 나쁜 놈. "우리 부모님 만났다면서?" 내가 불쑥 저 말을 던지자, 상우가 움칠 한다. 그러더니 많은 질문이 담긴 눈빛을 내게 보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요한 내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는지, 이내 시선을 피한다. "아무리 압박이 심해도 그렇지, 네 마음대로 사라지는 건 무슨 경우야?" "미안해." "무슨 마음으로 그랬어?" "너와 헤어질 마음으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상우 앞에서 내 마음에 금이 짝 가고 있다. "그렇게 내 가족들이 무서웠니? 너 이해한다고 했잖아. 기다리자고 그랬었잖아!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면서 네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그런 법이 어딨어!"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소리쳐 버렸다. 오히려 그런 내 반응이 더 감당하기에 낫다는 듯 상우가 눈을 든다. 상처 입은 나 만큼이나 너덜너덜한 그의 가슴속이 보이는 듯해서 속상했다. "재인아. 내가 떠났던 건, 너의 부모님 때문이 아니야." "그럼? 대체 뭐가 널 그렇게 하도록 몰아 붙였니?"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가슴 한 쪽을 부여잡고 물었다. 통장도 돈도 모두 내 가족들에게 넘기고 집도 없는 녀석이 그 동안 어디서 지냈을까 따위를 생각하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시켰어." "뭐?" 상우의 대답에 나는 숨이 막혀서 한 동안 굳어 버렸다.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가는 내 잔을 응시하면서 상우가 다시 한 번 확인시키듯 말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의 마음도." 짜악!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손이 나가 버렸다. 상우의 뺨에 발갛게 드러나는 내 손자국을 봐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다시 말해 봐." 낮게 뱉은 내 말에 상우는 부들부들 떠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지난 3년 동안 우리가 함께했던 그 다정한 시간들은 뭐니? 먼저 날 지켜주겠다고 한 건 너야. 미친 놈처럼 날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도 너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한테 다 갚자고 말한 것도 바로 진상우, 너란 말이다. 그리고……. 그리고 네가 사라지기 전 날 밤,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했던 말도……. "3년 만에 처음으로 너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지." "……!" "알아. 재인이 네가 노력했다는 거. 그리고 네가 거짓말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을 차렸어. '아.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구나.' 하고." "뭐?" "재인아, 너는 솔직한 사람이다. 나 그거 알아. 그래서 나한테 니가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 날, 너 몰래 울었다. 3년 동안 네 곁을 지키면서 보낸 시간들 중에 그 날이 최고로 행복했어. 인간 진상우, 그렇게 숭배하고 사랑하던 여재인한테서 고백을 받다니." 상우는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눈가를 촉촉이 붉히고 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가 앞으로 들려줄 말들을 조용히 기다린다. 내겐 들을 권리가 있고, 그에겐 변명할 권리가 있으니까. "기억하냐? 나랑 사귀자고 너 꼬시면서 내가 걸었던 공약들. 그 중에 3번이 뭐였는지." "'내가 떠나라고 하면 떠나준다.' 였지. 이게 꼭 필요하다고 네가 우겼었어." "맞아. 그거였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행복한 순간에 그게 생각나더라. 하필이면!" 주먹을 꼭 틀어쥐고서 허탈하게 웃는 상우. 많이 야위고 눈빛이 깊어진 나의 옛 애인은 눈물을 참으려는 건지 또 천장을 올려다본다. "재인아, 어쩌면 나는 항상 너를 떠나는 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딱 거기서 모든 추억을 싸 안고 잠적할 수밖에 없었어. 헤어지자고 하면 너는 납득하지 못할 테고, 납득한다 해도 그럼 내가 상처 받을 테고. 그렇다고 그냥 사라지면 너 분명히 내 걱정 할 것 같고, 이유를 고민하느라 괴로워할 거고. 그나마 통장이라도 들고 나와서 네 가족들 가져다 주는 게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넌 화를 냈을 테니까. 화를 내는 게 미안함과 걱정보다는 나아 보이더라고, 그 순간에는." "그렇다면 네가……!" "맞아. 조금 전에 네가 말하기 전엔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어. 가족들이 날 찾아온 게 아니야. 내가 먼저 너의 부모님을 찾아가 부탁 드렸어. 무진장 고집 센 너를 되찾고 싶어 하시길래, 그럼 이렇게 하시라고 내가 알려 드렸다."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부모님 원망하지 마라, 재인아. 형님들도 모두 널 끔찍이 아끼시잖아. 그 분들로부터 너를 빼앗은 게 점점 죄스러워서 내 양심이 몸살을 이기지 못하더라. 다 내 잘못이야. 너를 사랑하고 곁에 두려 애썼던 것도 다 내 이기심이었어. 하지만 어떡해. 나도 네가 있어야 살겠는걸. 널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는걸." 복잡하게 뒤엉킨 머리와 가슴 때문에 어지럽다. 상우는 마지막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다. 말이 없던 녀석인데. 이것이 진짜 마지막인 것처럼. "재인아, 용서해달란 말 나는 못 한다. 그래도 이렇게 빌게. 너를 사랑했던 나, 조금이라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 줬으면 해." "기 막혀, 진상우" "우리 행복했던 순간들 많았잖아. 내가 욕심이 많아 그렇지, 너는 늘 내 마음 돌아봐주고 아껴줬었어." 그 반대잖아, 바보야. 날 아껴주고 소중하게 지켜줬던 건 너잖아. "사랑이 너무 커서 그랬어. 내 그릇보다 내 속에 담은 사랑이 더 커서. 그런 주제에 다행히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것도 알아서. 비록 널 한 번도 제대로 안진 못했지만 난 후회 안 해. 네 곁에 있었던 거, 널 사랑했던 거 모두 다 후회 안 해." 어느 새 내 눈에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이별의 대화다. 가장 안정된 순간에 찾아온 이별. 내가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이런 날이 올 때까지 상우가 숨죽이고 미뤄주었던 이별. "예전에 신호등 앞에서 네가 부르면 당장 달려갈 것 같다고 고백했던 날, 나는 재인이 너도 똑같이 말해주길 바랐던 것 같아. 바보처럼. 미련하게." 내 마음도 자신처럼, 빨간불임에도 다가가는 걸 멈출 수 없는 사랑이길 바랐을 것이다. 파란불이 들어오길 기다릴 수 있는 느긋한 마음은 사랑보다는 우애에 가까우니까. 그런데 나는 빨간불이 아닌 파란불일 때만 부를 테니 그 때 오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건데, 나는 받고만 있었던 걸까? 사실 상우는 사랑이 무서웠던 게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재인이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느끼지 못했던 내 마음을 혼자 분류하면서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뿐인 줄 아냐? 악몽을 자주 꾸는 너를 깨우러 네 방에 뛰어들어갈 때마다, 어김없이 내 얼굴을 낯설게 쳐다보는 너 때문에 혼자 또 서운해 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나에게 지쳐갔었나 보다. "누군가에게 기댈 줄도 알아야 해. 혼자는 너무 위태롭잖아. 지게도 혼자 못 서. 막대와 서로 기대놓아야 서지. 그런데 말이다. 너는 내 도움을 받기보다는 불편해도 항상 혼자 견디려고 애썼어. 받을 생각이 없다는 건, 너도 나한테 더 줄 생각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야." 결국 나는 받는 것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상우와 그의 고백 때문에 이만큼 속상한데. 그와의 헤어짐이 이토록 가슴 아픈데 어떻게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너 나 아직 사랑하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상우가 묻는다. 끄덕끄덕.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그건 재인아, 네가 나를 네 가족처럼 사랑하기 때문이야. 네 형제처럼 나를 보아왔기 때문이야. 그만큼 편이 되어준 사람이란 의미다." 너무나 씁쓸하게 웃는다. 나를 바라보는 상우의 눈은 한 없이 커다란 그리움을 담고 있다. 왈칵 올라오는 울음이 보이는데도 꾹 삼켜 누르는 게 고스란히 다 보인다. "지금 네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 알아. 그 사람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네 곁이라는 것도 알아. 그 집을 내놓을 때 덥석 잡을 사람이 누구일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었거든." "어떻게……?" "기억 안 나니? 3년 전에 우리가 너희 집을 나왔을 때, 길거리에서 만났던 사람." 상우의 설명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 날은 정말 정신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온 직후. 그 때는 세상이 온통 까맣게 절망으로 뒤덮인 것처럼 숨 막혔었다. 그 때, 길에서 말을 걸어왔던 사람……. 아! 그러고 보니! "나 아는 척 하다가 너랑 싸웠던 사람? 그러다 너 도로에서 구해줬었던?" 어떻게 그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나에 대한 실망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는 거의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었다. 당시 그런 내게 남은 건 오직 상우뿐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너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야." "뭐?" 믿을 수 없어서 내지른 내 반응에 상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기어이 너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 너의 첫사랑. 지난 3년 동안 끊임 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널 지켜보았던 사람." 하얗게 변하는 내 얼굴이 느껴진다. "내가 재인이 너 놓아줄 수 없다고 무작정 그 사람 앞에 뛰어가 소리 쳤을 때, 웃지도 않고, 나를 패지도 않고, 그저 무시한 채 네가 있을 창문만 올려다보던 사람. 마치 널 지켜보는 일이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처럼 중요해 보였던 사람." 눈을 질끈 감았더니 까만 어둠이 일시에 덮쳤다. 심장이 아프게 뛰면서 죽을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온다. "내가 그 사람을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했는지도 몰라. 나보다 훨씬 더 강하고, 나보다 훨씬 더 끈질긴 상대였어. 지금까지 내가 싸워본 그 누구보다, 지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그 사람은 자기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너를 떠나지 않았어. 반면에 나는 너와 함께 지내면서 네가 날 버리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떠났잖아. 물론 매일같이 자신의 그림자를 보여주던 그 사람에게 심리전에서도 밀린 거겠지만. 처음부터 질 걸 알고 덤벼든 거니까. 져도 억울하진 않아." 말은 이렇게 해도 얼굴에 아픔이 가득하다. 상우는 늘 혼자였다고 했는데, 이렇게 다시 혼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태양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꽉 막혀 그를 보듬어줄 여유가 없다. 사실은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아무래도 태양의 첫사랑이 나인가 보다. 태양의 작은 별이……! 상우는 그와 있을 때 뛰었던 내 심장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의 첫사랑이 태양이라는 걸 상우가 누구에게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태양으로 인해 정신 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가 했던 말들, 나를 쳐다보았던 표정들, 모두가 그래서였다. 그건 그저 단순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동창에 대한 불쾌감이 아니었던 거다. 아아, 태양!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진작 수술 얘기를 하지 않은 나의 이기심에 화가 난다. 그러면 조금 덜 억울했을지도 모르는데. 그가 견디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르는데. 그의 오랜 첫사랑 때문에 나 역시 그토록 아픈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처라는 이유만으로 뇌수술에 대해서는 그냥 까맣게 지워 버리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마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답답한 마음. 그러면서도 당장 차오르는 충만감! 태양의 작은 별이 누군지 드디어 알았다는 벅찬 감동! 하지만 나는 지금 그것에 흠뻑 다 젖어 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남자. 그의 사랑과 상처와 인내도 보아주어야 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청춘을 내게 바쳤던 사람. 오직 나 하나만 바라보며 열심히 하루를 살았던 사람. 내 말과 행동 하나 하나에 깊게 베일만큼 나를 꼭 안았던 사람.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면서 그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 때려주려고 했어. 그만 때리라고 내 다리 잡고 늘어질 때까지 흠씬 두들겨줄 생각이었어." 내 조용한 말에 상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이젠 정말 이별인가 싶어 코끝이 매워진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는 느낌에 나는 그에게 서둘러 말했다. "더 이상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진상우. 내 가족들에게도 네가 미안해 할 필요 없어." "하지만……." "그 때 난 가족 대신에 널 택했던 게 아니야. 네가 아니라, 널 포함한 내 인생을 택한 거였어." "……!" "지금도 그래. 이건 네가 아니어도, 우리 가족과 나 사이에 꼭 한 번은 풀어야 할 숙제야." 내 단호한 말에 상우의 얼굴이 일순 굳어진다. 그러더니 나직한 탄식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 그래서였구나! 그 힘든 여정을 미리 치르게 하려고, 날 니 옆에 둔 거였어!" 상우는 마치, 자신을 내 곁에 있게 해준 존재가 따로 있다는 것처럼 말한다. 신을 말하는 걸까? 우리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고 있지 않던 신의 허락을? "아무튼 상우 너 때문이 아니다. 그건 명심해. 쓸데 없이 오바해서 미안해 하거나 아파하지 말고, 날 떠났던 그 방법과 돌아섰던 순간에 대해서만 사과해." "……미안하다." "응. 그리고 나도 미안해." 이대로…… 우리 정말 헤어지는 건가 보다. 그러나 아직, 서로에게 행복하라는 말을 하기에는 이르다.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행복해 하는 서로를 견디기엔 아직 이르다는 거다. 언젠가는 우리도 아프지 않게 서로 바라볼 수 있겠지. 그 때는 너도, 떠날 순간을 미리 준비하는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있겠지. 그러니까 우리 지금 말고, 그 때 말하자. 가슴 속을 시원하게 비워줄 용서의 말도. 다시 그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줄 축복의 말도. '사랑했었다.' 라고 편안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 때쯤. 그러자, 상우야. 우리는 말 없이 각자의 차를 마셨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몰라서 더욱 천천히 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다. "하나만 물어 봐도 돼?" 상우가 내 얼굴을 그리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망설이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네 일생에서 가장 힘들고 아팠을 때가 언제야?" 갑작스러운 질문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를 빤히 쳐다본다.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집 앞 전봇대 앞에서. 서로의 바보 같았던 소원에 대해서 말하던 날. "말했잖아. 고3 때 봄이었다고." 내 여전한 답에 상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시린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나는, 나는 말이다. 재인아. 훗날 누가 똑같이 물으면, 아마도 오늘이라고 대답할 거다. 혹은 너와 떨어져 지낸 지난 몇 주 동안이었다고." "……!" 상우는 분명 그 때의 말을 염두에 두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제일 웃긴 게 뭔지 아냐? 내가 원하면 원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더 많이 아팠다는 거야.' 내가 그랬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꼭 몸이 아프게 된다고. 그에 대한 마음이 간절할수록 더 오래 앓아 눕곤 했었다고. 나는 방금, 내가 가장 아팠던 건 태양을 잃었을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우는, 자신이 가장 아팠던 건 나를 잃었을 때라고 답한다. 우리 이제 정말 끝이구나. 진짜 이별은 혼자가 아닌, 이렇게 둘이서 하는 거니까. 나는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알지 못한다. 동시에 흘리고 있는 상우의 눈물이 너무 진하고 아파보여서다. "가끔 있지……." 살다 보면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바로 지금 우리가 그렇다. 짧지만 강렬한 위로. 그래서 내가 먼저 꺼낸다. "이 각박한 세상 속에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져. 지나온 돌멩이 밑에 보석을 숨겨놓고 떠나온 기분이야. 그래서 힘이 나." 내 따뜻한 음성에 상우가 드디어 활짝 웃는다. "너도 그렇지? 내가 그의 손을 테이블 위로 끌어다 꼭 잡으면, 상우는 그 손을 들어 가만히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댄다. 거칠거칠하게 튼 입술이 안타깝지만 나는 소중하게 그 인사를 음미한다. "음. 너를 생각할 때마다 힘을 낼게. 재인이 넌, 내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못 볼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니까." <'왜 그랬을까?'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용기가 없었거나 애절하지 않았거나 혹은 정말 바보였거나. 18. 상우를 보내고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가을이 형이 다가왔다. 말없이 깊은 시선을 던져주다가 내가 두 손으로 가리키는 앞자리에 앉는다. "형, 한 남자가 있는데……." "지난번에 네가 말한 그 로맨티스트 말이냐?" "응." "그런데?" 나는 식어 버린 애플티를 한 모금 소리 없이 마시고 눈을 들었다. 가을 형의 잔잔한 눈길을 마주하자 폭풍우가 휩쓸고 간 듯한 머리 속이 진정되는 것 같다. "그 첫사랑이 난가 봐." "……." "8년 동안 기다렸던 그 남자의 유일한 사랑이 나였나 봐." 말을 꺼내자 새삼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동시에 가슴은 뭔가로 가득 들어찬 듯 벅차다. 이 느낌을 뭘로 설명해야 할까? 모르겠다. 아무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감정으로 충만하다. 세상이 한결 내 숨통을 넓혀주고 있는 기분. 그래서 세상이 새삼 더 잘 보이고 예쁜 것 같단 느낌. "우리 재인이 좋겠네." "으응?"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는 첫사랑을 찾았는데, 그로 인해 네가 억지로 겪어야 하는 변화는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조금밖에 말하지 않았는데, 가을 형은 모르는 게 없다. 말수가 적은 입을 가진 사람들은 대신에 더 많은 걸 볼 수 있는 눈을 얻나 보다. 내가 울 듯이 웃자, 가을 형은 그냥 웃기만 하라는 듯 커다란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손가락을 딱 튕겨준다. "오늘 아버지 생신인 거 알지? 해인이가 너한테 전화 한다 그러던데, 받았어?" 아아, 잊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머리털이 제법 빠졌는데. 내 가족들. 못 되먹은 나 때문에 마음 고생한 우리 부모님. 가슴이 미칠 것처럼 먹먹해진다. 내가 쏟아 부었던 비난의 말들과 말리던 해인이 형이 떠올라서. 가슴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우시던 엄마와 창백하게 질리던 아빠의 얼굴이 생각나서. 서둘러 핸드폰을 찾아보지만 없다. 그제야 아침에 식탁 위에 놓고 나온 게 생각난다. 마음이 급해졌다. 태양도 보고 싶고, 아버지 생신 준비도 해야 한다. "형! 나 전화 좀……." 내가 다급히 입을 열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형이 카운터를 가리킨다. 재빨리 달려가서 수화기를 들고 부모님 댁에 전화를 걸었다. 대기음이 한 번을 갓 넘었을 뿐인데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다. "아, 아빠." - ……! 대답이 없으시다. 내 목소리를 들으셨을 텐데도, 말씀을 안 하신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아직 날 용서하지 않으셨나 봐. 그 때, 수화기 저 너머에서 엄마의 음성이 들려온다. - 재인이 출근했을 시간이에요, 여보. 그렇게 달려가시다 넘어져 허리 다치면 어쩌려고. ……응? 왜 말씀이 없어요? 장난 전화예요? 울컥. 가슴 속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올라온다. 내 전화 기다리셨구나. 그래서 말씀을 못하시는 거였구나. 그런데 나도 말을 못할 것 같다. 죄 많은 아들이라 무슨 말씀을 드려도 내 스스로 내가 너무 괘씸해서 힘들다. "생-일- 축-하- 합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른다. 울먹이는 음성이 가득 실려 나오는 서툰 음율. 가뜩이나 못 부르는 노래가 더욱 엉망으로 송화기 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생-일- 축-하- 합니다--." 듣고 계세요, 아빠? 저 아버지 막내아들, 칠성이에요. 갓난쟁이 때부터 아빠 가슴에 수 없이 못을 박아드린 자식요. 몸 부실하고, 고집도 세고, 말까지 잘 안 듣는 골칫덩어리 재인이에요, 아버지. "사-랑-하-는……." - 으흑, 으흐흑. 재인아! 으어억! 억, 억…! 이 놈아아! 갑자기 전화기에 대고 아버지가 우신다. 내 엉망인 노래를 가만 듣고 계시다가 참지 못하시고. 무슨 음정을 그렇게 하나도 못 맞추냐고 마구 웃으셔야 하는데, 아버지는 뇌수술 후에 완전히 음치가 된 자식 놈의 노래에 기어이 눈물을 흘리신다. 꿀꺽.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덩어리를 간신히 삼키고 천천히 다시…….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무진장 많이……." 어느 새 노래가 아니다. 흐느끼듯 진심을 담아 보내드리는 내 심장의 소리다. - 재인아! 으흑! 윽! 칠성아, 이 매정한 놈아아! 지금 어디냐? 으이? 애비 안 보고 싶냐? 어이구, 어이구, 녀석아! 너는 애비 안 보고 살아도 괜찮으냐?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흐흑, 흡! 생-일- 축-하-합-니-다-----." 중간에 울음 때문에 삑사리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역시 노래로. 이젠 목을 놓아 우시는 아버지 곁에 주저앉아 함께 울고 계실 어머니가 보이는 듯하다. 갑자기 못 견디게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 안 보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수화기를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다급히 말했다. "오늘 갈게요. 아버지! 오늘 재인이가 갈 거에요!" - 그래! 어서 와라, 녀석아. 어서 와! "네. 아, 아버지.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필요한 거나……." - 이눔아! 그냥 와! 얼른 와! "예. 예, 아버지." 통화가 끊어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숨을 고르는 작업.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다시 또 들었다. 눈가에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을 재빨리 손으로 문질러 지운다. 익숙한 번호를 눌러놓고 또 심호흡을 한다. 이번에는 대기음이 꽤 길게 이어진다. 집에 없나 보다. 어디 나갔나? 아, 코 풀어야 하는데. 목소리 이상하겠다. 일단 끊고 다시 하자. 그렇게 막 통화를 포기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태양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두근! 심장아, 왜 놀라니? 나는 내 가슴 언저리를 오른손으로 가만히 쓸어준다. 굉장히 낮은 목소리. 자다가 일어난 걸까? "태양아, 나야." - ……. 이상하다. 오늘 내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왜 다들 말을 안 하지?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서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자고 갈지도 모른다는 말 하려고. 너 이번 주에 비행 없지?" 스케줄이 빈다고 했었다. 본사 교육 일정이 잡혀서 당분간 해외로 나가지 않는다고. 나는 잠시나마 그를 멀리 떠나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다. 그런 날 보면서 단순하다고 웃던 태양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아, 태양! 당장 보고 싶다! - 없다. "그래. 그럼 나 내일 갈게." - ……. "가면……." 잠시 말을 멈춘다. 가슴이 하도 뛰어서 귓속까지 쿵쿵대는 것 같다.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 내가 아팠던 것에 대해 얘기할 거다. 네가 떠나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기억을 잃었는지. 왜 너만 기억을 못하는지. 다 말할 거다. 그래야 공평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야 태양이 네가 덜 억울할 거란 것도 이젠 아니까.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저쪽에서 그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듣고 있어?" - 지금 말해. 내일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 "얼굴 보고 해야 돼. 꼭 얼굴 보고 얘기할 거야." 나의 다짐 어린 말에 태양은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먼저 전화를 끊었다. 왠지 다시 차가워진 느낌이다. 아침에 자신을 배웅할 때와는 판이한 반응. 나는 잠시 멍하게 수화기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피곤한 거겠지. 일이 많은 거겠지. 그렇게 섭섭해 하는 나를 달래본다. 이미 늦어 버린 출근 때문이 또 갑자기 생각났다. 일단 극장에 들렀다가 사정 얘기를 하고 일찍 퇴근해야겠다. 그리고 집에 가야지. 세상 밖에 나오기 전의 내 유일한 둥지였던 곳으로. 나는 서둘러 가을 형에게 인사를 했다. 내 노래를 다 듣고 있었을 형을 보기가 민망했지만, 역시 모른 척해주는 센스에 감탄한다. 그리고 고마움에 활짝 웃어주었다. 서둘러 카페를 나오는데 막 들어오려던 해인이 형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만다. "여재인! 너 대체 핸드폰도 안 받고……!" 아아, 또 다짜고짜 저렇게 본론부터 꺼낸다. 훈계와 잔소리를 막 시작하려는 여해인 씨. 우리 오성이 형. "됐어, 형! 나도 알아!" "네가 뭘 알아?" "형이 나 사랑한다는 거! 맞지?" 그렇게 뻔뻔스럽게 대꾸하곤 형의 뺨에 재빨리 쪽 뽀뽀를 해 버린다. 깜짝 놀란 해인이 형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굳어 버렸고, 나는 그 틈을 타, '저녁에 집에서 봐!' 라고 외치면서 그 곳을 뛰어나왔다. 늘 똑같은 이야기. 마치 짠 것처럼 한결같이 귀결되는 풍경. 이것은 호들갑 패밀리란 애칭으로 불리는 내 가족과, 본의 아니게 우리 집안 최고의 문제아가 되어 버린 나에 대한 최종 결론이다. 우선 첫째, 종인이 형. 보수적인 공무원인 일성이 형은 나를 꼬박꼬박 막내라 부른다. 그렇게 절대적인 귀염둥이로 날 군림시키며 다른 형들을 내 노예로 부리곤 했다. 예를 들면, '막내가 먹고 싶다잖아! 뭐 해, 여해인? 부엌은 저기야.', '너 눈 없냐, 여태인? 막내가 저 무거운 걸 들고 오는데 냉큼 안 뛰어가?' 뭐 이런 식이다. 부담스럽지만, 그 만큼 절대적인 사랑이라, 꽤 의지가 된다. 그리고 둘째, 태인이 형. 어찌 보면 내 경쟁상대다. 형은 이 말에 코웃음 칠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 삽화집을 낸, 이젠 어엿하게 성공한 화가다. 그게 또 무척 어울린다. 전형적인 둘째라고나 할까. 매우 독립적이고, 사고도 심플하다. 지금껏 우리 집안에 가출한 인물이 딱 둘인데 바로 나와 태인이 형이다. 대학 졸업하고 다늦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출했었던 이성이 형. 그를 따라잡자는 모토로, 나도 열심히 내 인생 역전을 꿈꾸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쌍둥이인 셋째, 수인이 형과 넷째, 시인이 형. 두 사람은 지금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일본에 있다. 둘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애니메이션에 심취해있었는데, 역시나 직업도 그 쪽으로 찾아가더니 급기야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 형들은 가끔 게임 씨디나 유명한 애니 피규어 등을 선물로 보내오곤 하는데, 막상 나는 그걸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모르므로, 늘 '좋다.' 라는 답장만 보냈다. 한 번은 내 대답이 식상했는지, '어떻게 좋은데?' 라고 다시 물어왔길래, '거실에 발라당 누워 하루 종일 웃음이 나게 좋다.' 라고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그 후로 형들은 일제 과자만 잔뜩 보내오고 있다. 호들갑 패밀리에도 물론 예외는 있다. 바로 우리 해인이 형. 일명 '브랜드 메이커(Brand Maker)'라고도 불리는 '네이미스트'(Namist)다. 기업이나 상품의 이름을 지어주고 기발한 카피를 덧붙여주는 직업인데, 깐깐하고 고지식해보이는 형의 외모와는 좀 안 맞는 것 같다. 하긴 의외로 털털하고 무심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외모 하나는 끝내주게 고상하시다. 나와 제일 많이 부딪치지만, 같이 있으면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형이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강인이 형. 나만 아니었으면 막내로 온갖 응석을 다 부렸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형들은 내게 조금 고마워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난 땡깡은 안 부리니까. 강인이 형에겐 좀 그런 기질이 있다. 막무가내로 사람들한테 조르는 거. 늘 빨간 머리를 고집할 정도로 평범한 건 참을 수 없어 한다. 우리 칠성 그룹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직업은 백수다. 각종 집안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용돈을 챙기는 필요악인 존재. 아마 이전의 내 극장 앞에 애인인 척하러 왔을 때도 돈을 받았을 게 의심된다. 인자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마치 이력서의 첫 머리를 장식할 만한 문구지만 그 만큼 잘 들어맞는 말도 없다. 나의 부모님은 따뜻하고 지적이며 유순한 분들이시다. 하지만 고집 하나는 끝내주셔서, '이건 아니다.' 싶은 일에는 꽤 완강하셨다. 바로 내가 그 분들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많이 닮아서 가슴에 더 깊이 박히는 막내아들. 자존심도 세고, 하고 싶어하는 것도 많아서 마음껏 애교나 응석을 부려 드리지 못했다. 살아 남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을 정도로 약했던 몸도 그렇고, 힘든 거 아픈 거 내색하지 않고 꽁꽁 숨기려는 천성도 그렇고, 참으로 쉽지 않은 자식이었을 거다. 죄송하게도. 바로 이 사랑스런 조합의 가족들을 나는 오늘 다시 만났다. 어느 때보다 가볍고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가족과의 화해는 의외로 참 쉽다. 그래서 더 시도하기가 어려운 거겠지만. 많은 말도 필요 없다. 그저, '미안해요.' 라는 말 한 마디면 족하다. 그 이상의 말은 알아서 덧붙여 읊어주시는 분들이 바로 부모님이시다. 그것도 힘들다면 그냥 그들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된다. 등만 돌리지 말고. 나는 왜 그토록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을까?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의 뿌리인 그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의 심장인 태양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뿌리와 심장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간신히 뿌리를 찾아 단단히 땅에 딛고 서게 된 나는, 이제 앞으로의 삶에 이유가 되어줄 내 심장을 찾으러 간다. 내 몸과 영혼을 더 튼튼하게 지켜줄 태양이 있는 곳으로. <묵혀둔 말은 이미 어제의 그 말이 아니다> 묻어 두었던 것들을 먹고 내 속에서 괴물은 자랐다. 말 한 마디와 함께 튀어 나온 괴물은 나를 덥석 물어 삼켰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내가 하는 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너와의 소통은 요원하다. 19. 옷 갈아입고 출근한다는 핑계로 아침에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 나가야 한다는 내 말에 새벽 같이 아침을 차려주신 어머니와 아버지 손에 일제히 깨워진 형들, 이렇게 또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었다. 집을 향하는 내 손에는 어머니가 싸주신 반찬이 들려 있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썼던 항알러지성 비누와 로션, 샴푸 같은 것들도. 아직도 그걸 사들이곤 하시는지 몰랐다. 난 참 모르는 게 많은 놈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깨달았다. 이건 내 생년월일이다. 다른 누구와 같은 게 아니라 바로 내 것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퀴즈도 정답을 알고 나면 너무 쉽게 느껴진다. 바로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태양이 심어둔 마음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아아, 태양! 심장이 머리 꼭대기까지 뛰어오르는 것 같다. 미안하다. 고맙고, 또 미안하다. 널 잊어서, 그런 내 곁에 남아줘서.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한다. 내 마음 속의 터널이 네가 있던 자리라는 걸 이젠 안다. 그 자리를 다시 메워줄 사람도 오직 너 뿐이다. 나의 태양뿐이다. "태양아." 문을 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건 조금 익숙한 장면. 돌아오는 건 침묵이고, 느껴지는 건 싸늘한 공기다. 천천히 들어서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다지 특이할 건 없다. 어질러진 곳도 없고, 문이 다 열려 있거나 빈 술병이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방문을 열어보는데 태양이 없다. 여기저기 다 봐도 그는 없다. 벌써 본사로 갔나 보다. 메모를 남겼나 살펴봐도 찾을 수가 없다. 나 보고 가지. 조금 서운한 마음을 살짝 털어버리고, 출근준비를 한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태양이 얌전히 충전기에 꽂아둔 내 핸드폰을 들었다. 돌아와서 보자, 태양. 최대한 빨리 올게. 너도 일찍 와. 평소보다 오히려 더 늦게 일이 끝났다. 저녁 공연 이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었고, 로비의 간접 조명에 문제가 있어 보여 점검을 부탁했다. 하루 종일 틈이 날 때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는데, 교육 중인 그를 방해할까 봐 한 번 걸어 보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얼굴 보고 얘기할 거라고 잔뜩 선언해놓은 처지라……. 결국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퇴근을 했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날 기다리고 있는 태양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갈 무렵에 술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그를 맞아야 했다. "술 마셨어? 동료들이랑 같이?" 현관에서 벽을 짚고 천천히 구두를 벗던 태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본다. "내가 누구랑 마셨건 바람을 피진 않았으니까 안심해, 애인." 혀가 굳을 정도로 취하진 않았나 보다. 조금 차갑고 딱딱한 어조에 나도 모르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춘다. "그래. 너는 재미있게 잘 놀았나?" 태양이 나를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묻는다. 천천히 신중하게 딛고는 있지만 걸음이 역시 불안정하다. 여차하면 부축해줄 생각으로 얼른 다가가 곁에 선다. "오랜만에 외박하니 어때?" 내가 아버지 생신이라 집에서 잔다는 말을 안 했던가? 분명히 한 것 같은데. 태양은 마치 내가 다른 데서 놀다 온 것처럼 말한다. 혹시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아서 섭섭했던 걸까? 아아, 그러게. 태양은 내 애인인데 같이 가자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 닿았다 해도 실행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아버지가 정식으로 태양을 만나보자고 먼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는 것 같다. 태양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나 보고 싶었어?" 그가 만들어내는 서늘한 분위기를 무마하고 싶어서 내가 다정하게 물었다. 물잔을 들고 마시려던 그가 뚝 동작을 멈추고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픽 웃는다. "여재인이 또 날 꼬시네." 몇 모금의 물을 마신다. 그리곤 다시 내 눈을 내려다보는 태양. 나도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가지런하고 반듯한 눈썹과 이지적인 콧날과 잘 생기고 섬세한 모양의 입술. 그거 모르지? 하룻밤이지만 네가 그리워서 죽는 줄 알았어, 태양. "작은 별이 나야?" 탁. 태양이 물잔을 대리석 식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안 깨진 게 다행이다. 시선을 피해버린 태양의 턱이 실룩 움직인다. "아니." 거짓말이다. 내가 맞다. 갈색 머리. 떡볶이 좋아하고, 노래도 못부르고, 목걸이도 똑같다. 왜 아니라고 해? 왜 그렇게 차갑게 부정하는 건데? "작은 별은 내 첫사랑이지. 넌 단지 지금 내 애인이잖아." 이해하기 힘든 말. 무겁게 내려 닫힌 벽이 느껴진다. 그것이 태양의 묵은 상처껍데기라는 걸 나는 깨닫고 있다. 자신을 까맣게 지워 버린 첫사랑에 대한 미련과 원망. 나를 사랑했던 만큼 뼛속까지 그를 아프게 했을 배신감. 가해자인 나로서는 상상만 해볼 뿐인 아찔한 고통들. 그럼에도 내게 애인이 되라 한 이유, 그건……. "태양. 나 사랑해?" "사랑하지 않아." "……!" 단호하게 뱉어내놓고 태양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내 표정을 살피듯 구석구석 정확하게 꽂히는 시선이 매섭고 따끔따끔하다. "사랑하진 않고, 그냥 애인이기만 한 거야?" 끄덕. 내 질문에 대답 없이 고개만 움직인다. 바보 우김 대장, 남태양! 네가 왜 날 사랑하지 않아? 어떻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지금까지 다 보여줬으면서. 온몸으로 그렇게 나에 대한 사랑을 외쳤으면서! 내 흔들리는 눈빛에다 대고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원하면 평생 너와 같이 살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랑하진 않아. 절대." 쉿! 그만해, 태양. 조용히 해. 내가 알려줄게. 너의 사랑은 아직 여기에 숨쉬고 있어. 그가 듣는단 말이야. 그를 또 아프게 하는 말은 하지 마. 내가 보여줄게. 사랑이 여기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해줄게. 나는 태양의 가슴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심장 근처에 키스를 하자, 움칠 놀라던 그가 내 어깨를 꽉 잡고 떼어낸다. 마주 보게 된 눈. 까맣게 윤이 나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눈빛. 뜨겁게 얽히는 시선. 이윽고 태양이 내 한 팔을 움켜잡고 성큼성큼 방으로 걸어갔다. 너무도 갑작스런 행동이라, 끌려 들어가면서도 나는 조금 얼떨떨한 상태였다. 태양이 내 몸을 번쩍 들어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을 때에야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벗어." 태양이 자신의 셔츠를 거칠게 벗어던지며 내게 말했다. 흠칫. 얼어붙었던 나는 서늘한 그의 눈 속에서 창백한 그림자를 보고 만다. 태양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나로 인해 힘들었던 그의 시간들을 보듬어줘야겠다. 잠시 망설이던 내 손이 바지 속에 들어간 상의를 끄집어냈다. 빠르게 나체가 되어가는 태양의 속도에는 못미치지만 나도 열심히 옷을 벗는다. 그와 한 몸이 되어야지. 따뜻한 체온을 섞으면서 고백해야겠다. 내가 태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실컷 보여주는 거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몸이 내 앞에 버티고 서자, 손이 주인 허락도 없이 막 떨린다. "잘 안 돼? 아니면 내키지 않아서 그런가?" 태양이 팔짱을 끼고 내가 벗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묻는다. 얼굴로 열기가 확 몰린다. 부끄럽고 당혹스럽고 어지럽다. "도와 줘." 결국 한숨을 쉬며 내가 말했을 때, 태양이 나를 확 밀어 넘어뜨렸다. 출렁거리는 매트리스 위로 튕겨오른 몸이 잠시 내 정신을 빼놓는 사이, 태양이 곧장 덮쳐와 내 팬티까지 모조리 벗겨 갔다. 빠르고 거친 손길이었다. 이미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중심이 나를 먼저 짓누르며 태양이 내 위로 올라왔다. "배운 대로 해. 지금까지 선생이 몇 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재주는 다 부려 보라고." 술 많이 먹으면 말투도 행동도 거칠어지나 보다. 숨이 막힐 만큼 저 자신과 나를 할퀴는 막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그가 취한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질투하지 마, 태양아. 그런 서툰 감정으로 널 상처내지 마. "난 너밖에 없어." 내 중얼거림을 태양이 들었는지는 미지수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거세게 부딪쳐오며 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태양은 내 가슴을 아프게 주무르면서 겨드랑이 안 쪽을 물으뜯듯 빨았다. 아파서 신음하는 내 음성에 더 흥분한 듯 꽉 조여안는 바람에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뜨거운 태양의 손이 닿는 곳마다 화상을 입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열이 지펴졌다. 나도 모르게 뱉어낸 숨넘어가듯 흐느끼는 소리가 내 귀에도 선명히 들어온다. 고개를 뒤트는 내 귀와 입술을 찾아 태양이 따라다니며 마구 깨물고 핥는다. 그리고 아래로는 아직 준비가 덜 된 내게 곧장 파고 들어왔다. "윽…! 하, 하아! 태…양!" "좋아, 여재인? 이런 게 취향인가?" 아파서 내지르는 내 가느다란 비명에 태양이 묻는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태양에게 완전히 짓눌려서, 아프기도 하고 미칠 것처럼 찌르르하기도 한 힘겨운 느낌 때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사랑해, 태양." 그래서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했다. 가장 쉽고 가장 솔직하고 가장 직설적인 고백을 했다. 이 말을 못 알아듣는 바보는 세상에 없을 거다. 그런데……. "그 상우란 자식한테도 똑같이 말했나?" 태양의 움직임이 갑자기 뚝 멈췄다. 그리고 날 내려다보면서 저렇게 물었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숨을 쉬지도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본다. 믿기 힘든 침묵 속에서 나는 하얗게 질린 채 태양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찍어누르듯 내 몸을 파고드는 그에 의해 침묵은 깨어졌다. 의미를 상실한 그의 움직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다리. 나는 마음이 아팠다. 딱딱하게 메말라 갈라진 심장에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그래서 태양을 안아줄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아파서 숨조차 쉬지 못했다. 한참 후, 태양의 인공호흡으로 드디어 숨을 쉬게 되었을 때도 이미 내겐 의식이 없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강호 형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눈에선 레이저빔이라도 쏟아져나올 것 같다. 그처럼 강렬하게 지금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술 쳐먹고 들어와 애를 죽일 작정이었냐?" "……." "이 새끼, 이 몹쓸 새끼! 내가 누누이 말했지. 감정 조절 잘 하라고!" "……." 상대는 대꾸도 없는데 강호 형 혼자 열을 내고 있다. 그의 맞은편에 우뚝 선 태양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지 마요, 형. 태양이가 뭘 어쨌다고. 나 맞은 거 아니에요. 그가 나 때린 거 아니야. 억지로 덤벼든 것도 아니고, 어디 아프지도 않아요. 내가 태양이 위로해주고 감싸주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가 나를 상처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억울해. 상처 입은 건 태양이야. 우리 태양이한테 화 내지 마요. 차라리 나한테 뭐라 그래요. 하지만 목이 꽉 잠겨 축 늘어진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 "재인이가 네 집에 있다고 네 꺼야? 씨팔! 너 내 사촌 동생만 아니었어도……." "과해." 갑자기 태양이 강호 형의 말을 자르며 낮게 내뱉었다. 낮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강한 무엇이 담긴 음성이라, 나까지 긴장한다. "반응이 너무 과하잖아. 내가 저 녀석을 죽이다니?" "뭐?" "형 방금 재인이 상태 봐서 알잖아. 아무 문제 없다며? 우리가 평소에도 섹스를 좀 격렬하게 해. 궁합이 완전 찰떡이거든. 한 번 붙으면 여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찰떡. 알지?" 파랬다 벌겠다, 난리가 난 강호 형의 옆얼굴이 보인다. 이제 고개를 돌려 형을 빤히 노려보는 태양의 얼굴도 보인다. 비웃듯이 한 쪽 입술만 밀려올라간 얼굴이 더 없이 서늘하고 차갑다. "경고하는데, 아무리 탐이 나도 넘보지 마. 여재인은 내 꺼야." 쿵! 심장이 벌떡 일어나다 천정에 머리를 박았나 보다. 내 얼빠진 표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텐데 순간 태양과 눈이 마주쳤다. 흘끗 던진 그의 시선이 돌아간지가 언젠데, 나는 뒤늦게 눈을 감아 버렸다. 아아, 얼마나 바보처럼 보일까? 다음 순간 태양이 강호 형에게 다시 강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유 같은 건 묻지 마. 무조건 여재인은 남태양 꺼니까. 아무도 안 줘." "이 비, 빌어먹을 인간! 뭐가 어, 어, 어쩌고 어째? 내, 내, 내, 내, 내가 탐이 나도, 뭐어? 씨이발! 요 주둥이가 미쳤나! 왜 일케 더듬어! 퉤퉤퉤! 퉷퉷! 아무튼 새끼야, 고새 잊었냐? 대가리가 땡땡 굳었어? 아호! 요걸 그냥! 목소리 덜덜 떨어대면서 이 새벽에 전화로 자는 사람 불러 제낀 게 누군데!" 그제야 굳어진 혀가 풀린 사람처럼 강호 형이 날뛰기 시작한다. 하지만 태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형을 문 밖으로 내몰며 조용히 불을 껐다. "시끄러워. 내 꺼 자는데 소란 피우지 마." 태양아, 실은 나 지금 심장이 마구 날뛰어서 못 자! 나를 믿지 못하는 네가 아파서도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그래도,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 하는데. 너…… 강호 형한테 찰떡 이야기는 너무 심했어! 제발 그런 걸 먹는 데다 비유하지 좀 말란 말이야! 뻔뻔한 찰떡아! 그 후 며칠 동안 극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날이 늘어가고, 그런 밤마다 태양은 대화보다는 침대로 날 이끄는 데 더 바빴다. 하루 일과를 차근차근 주고받던 태양과 나는 그 즈음 사라졌다. 얼굴만 맞대면 손을 뻗어오는 태양으로 인해 체력에 점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 준비 하느라 이를 닦다가 끌려나가기도 했고, 소파 위에서 휴식을 취하려다가 덮친 태양에게 책을 뺏긴 적도 여러 번이다. 퇴근하는 나를 그가 택시에서 끌어내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시작한 적도 있다. 지치지도 않는지 태양은 내가 그만하자고 애원할 때까지 그치는 법이 없었다. 몸보다도 마음이 지쳐갔다. 차가운 말, 딱딱한 표정이 나를 베고 지나갈 때마다 그의 가슴에 맺힌 분노와 상처 입은 자아를 만나곤 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무엇으로 달래주어야 할지 몰라 늘 전전긍긍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해도,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가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거칠게 몰아붙였다. 점점 더 궁금해지고 있다. 태양의 진심을 알게 되어서 내가 그의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더 잘 보게 된 걸까? 아니면 그 날 이후로 그가 정말로 차갑게 변한 걸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직접 물을 수는 없다. 그의 변화가 미묘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해자기 때문이다. 아픔은 대체로 조절이 가능하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하나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덮치는 아픔은 치사하게도 흉터를 남긴다. 내가 태양에게 준 아픔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반겨주어야 할 순간에 오히려 서먹하게 밀어냈으니까. 힘겹게 돌아와준 그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까맣게 그를 지웠으니까. '왜 제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죠?'라고 하나님께 묻는 태도가 옳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질 브리스코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괴로움을 하나님도 같이 겪고 계신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하면서 고통을 더 보태지 말고 그저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고. 신도 어찌해 주시지 못하는 아픔으로부터 우리가 도망칠 방법은 없다. 그럴수록 인생은 점점 더 많은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저 묵묵히 싸우고 이겨내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일인 것이다. 태양이 잘 싸워 이겨내도록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 밖에 없었다. 함께 있는 것. 그의 고통이 호소하는 것들을 다 보아주고 받아주는 것. 나는 속으로 내내 자신을 달랬다. 태양은 날 사랑한다. 그래서 상처도 크고 고통도 컸던 거다. 그러니까 그가 원하면 다 주어야지. 토달지 말고 다 들어줘야지. 이 만큼 사랑하는데 못 줄 것도 없다. 오히려 좋다. 엄청 다행이다. 그가 내게 원하는 게 있고, 그걸 내가 줄 수 있다는 건 정말 황홀한 일이니까. 단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몸이 점점 지쳐갈 뿐. 다른 건 다 완벽했다. "형, 이 태양콘의 가장 큰 매력이 뭔지 알아요?" 모처럼 일찍 퇴근한 평일 저녁,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강냉이를 씹으며 내가 물었다. 강호 형은 태양이 좋아하는 밑반찬들을 냉장고에 가득 넣고 다가오며 대답한다. "살이 안 찐다는 거?" "아뇨. 이것도 은근히 쪄요. 얼마나 배가 든든한데요." "그럼 니가 말해 봐라, 어디. 그 콩알보다 큰 씨발 놈의 강냉이가 나보다 좋은 이유!" 강호 형의 말에 내가 답을 가르쳐주려다 말고 키득키득 웃는다. 형이 와서 막 치대려고 할 때 강냉이 흘린다고 저리 가라 했더니 저런다. "이름이에요." 뜬금 없는 내 말에 강호 형이 눈살을 찌푸린다.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태양콘.' 강냉이 치곤 카리스마 있잖아요." "이쁜아." "네?" 시덥잖은 대꾸 몇 마디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은근히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강냉이그릇을 빼앗아 저리 치운다. "너 태양이 좋아하냐?" 형은 저게 내내 묻고 싶었나 보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꼭 대답을 듣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다. "좋아하죠." "너는 기억을 못한다니까 하는 말이지만, 재인아. 태양이 새끼, 참 불쌍한 놈이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힘들게 자랐어. 가난하고 학대 받고 뭐 그런 뻔한 스토리가 아니라, 아주아주 많이 외롭고 고독하게, 그러니까 그 뭐시냐, 진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들을 자꾸 자꾸 포기하면서 살아온 자식이다." 내가 묵묵히 쳐다보고 있자, 형은 잠시 그 눈을 맞추고 있다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냐면, 그러니까……." "형. 태양이 걱정하는구나." 내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으면, "눈치 깠냐?" 눈을 부릅뜨고서 그가 되묻는다. "응." "이쁜 놈이 눈치까지 빨라. 재수 없게." 쑥스러운지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린다. 나는 왠지 흐뭇해져서 마구 뒤엉킨 형의 머리를 두 손으로 빗어준다. 우리 태양이 곁에 참 좋은 사람이 있구나, 속으로 좋아하면서. "내가 잘 할게요. 태양이 내가 잘 지킬게요." "그 약속 믿는다." 끄덕끄덕. "그래도 불쌍하단 말은 하지 마요. 응?" "왜, 태양이 진짜 불쌍해질까 봐?" "틀린 말은 바로 고쳐서 써야지. 우리 태양인 힘든 어린 시절을 잘 이겨낸 멋진 놈이다, 하고." 내가 정정해주자, 강호 형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불쑥 말했다. "이쁜이. 너의 문제는 이거다." 강호 형이 무언가 또 중대 연설을 할 것처럼 침을 딱 삼키며 말했다. "잘 들어 봐라. 응?" 끄덕끄덕. "자신이 잘 났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놈이 있다. 과신하거나 자만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과히 겸손하지도 않다. 사람들이 자기한테 특별히 친절하고 잘 대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마치 버릇처럼. 지나온 그의 인생이 어땠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곱 형제의 막내로 온갖 사랑과 정성 어린 돌봄을 받았을 게 뻔하고, 그것에 익숙해진 그에겐 마치 딱 맞는 속옷처럼 살뜰한 대우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다. 나도 못 받아입고 못 얻어먹은 인생은 아닌데, 보고 있으면 괜히 부아가 치밀곤 하지. 녀석과 친하지 않았다면, 질투로 눈이 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에. 그건 나 아니데요, 형?"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원. "내가 묘사한 앞의 놈 말이다. 네가 느끼기엔 어떠냐?" 되돌아온 질문에 나는 최대한 진지하게 답변을 해준다.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특별히 나쁜 성격도 아닌데, 미워할 것까진 없잖아요. 오히려 당당하게 대우를 받고 자신감 있게 사는 건, 음, 꽤 귀여울 것 같아요." "그렇지. 그런데 너한텐 그게 없단 말이야. 내가 말한 네 문제는 그거였어." "제가 귀엽지 않다고요?" "그럼 귀엽냐?" "왜 이러세요, 형? 이래봬도 귀여운 짓 살짝 해주면 다들 뒤집어지던 걸요." "예를 들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를 슬쩍 헝클고 부시시하게 눈을 비볐다. 그리고 해맑게, 아주아주 해맑게 입을 벌리고 '아아.' 소리를 내며 웃어 보였다. 이것 참, 뭐 하는 짓인지. "또?" 어쩐지 말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여재인 자존심이 있지. 이대로 백기를 들 순 없다. 귀엽단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 말씨름에서 지고 싶진 않은 거다. 잠시 턱에 검지를 갖다 대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리고 또 귀여운 짓에는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호 형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상체를 들어 나를 확 덮쳤다. "아이고, 요 놈! 요 놈! 귀여워 죽겠다. 아주 미치겄구만!" "으아앗! 형, 왜 이래요? 나 아직 생각 중인데, 막 방해하고……." "임마! 됐어! 너 귀여워! 내가 졌다. 이 자식, 하는 짓마다 어째 요래 이쁘냐? 엉?" 형은 아예 거실바닥에 나를 안고 뒹굴며 껄껄 웃어댔다. 생긴 건 자기가 더 곱상하고 그러면서 잘도 아저씨 행세를 한다. 실 없는 형의 장난에 말려든 게 싱거워서 나도 피식 피식 웃고 만다. 슬픔은 아무하고나 나눌 수 있지만, 웃음은 코드가 맞는 사람과만 공유할 수 있다. 강호 형과 함께 있을 때는 꼭 단추를 누른 것처럼 웃음이 잘 터진다. "어이구, 나 죽네! 우리 재인이 귀여움이 사람 죽이는 귀여움이네 그려!" "오바하지 마요. 그리고 이것 좀 놓지? 태양이 오면……."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현관 앞에 서 있는 태양의 다리를 보고 말을 뚝 멈췄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거실바닥을 헤엄치던 강호 형도 동작을 딱 멈추고 그를 올려다본다. 그래서, 태양이 오면 나 놀린 거 다 일러줄 거라고 말하려던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내가 오면, 뭐?" 태양이 갑자기 내린 침묵을 뚫고 내게 곧장 물어왔다. 진작 대꾸를 못하자, 입가를 살짝 비틀어 웃으며 들어온다. "타이밍 참 절묘하지? 그 순간에 내가 딱 들어오고 말이야." "새끼, 분위기 파악 못하는 건 불치병이지. 왜 이렇게 늦었냐?" 강호 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태양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업그레이드 시켜보려는 노력이었겠지만 실패인 것 같다. "늦었는데, 형 집에 안 가?" "아, 지랄! 새끼야, 안 떠밀어도 간다! 재인이 혼자 무서울까 봐 같이 있어줬구만. 에잇! 저 싸가지!" 기분이 상한 척 투덜거리면서 외투를 챙기는 강호 형. 말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가 나가길 기다리는 태양. 그리고 어슬렁 일어나서 배웅하려고 현관으로 다가가는 나. 하지만 금세 태양에게 팔을 탁 잡혀서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이쁜아, 형 간다. 태양이 새끼가 속 썩이면 전화하고." 형, 그만해요. 왜 자꾸 태양이 자극해. "참! 내일 숙모님 여기 오신다고 전화 왔었다. 태양이 너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미적미적 할 말 다 하고, 여유있게 손까지 흔들어 보이는 강호 형. 나가기 전에 어떻게든 착 가라앉은 태양의 기분을 흔들어 띄우려고 애쓴다. "또 오세요, 형." 내 예의바른 인사에 그는 슬쩍 윙크를 던져주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내려앉는 정적. 그 한가운데에 태양과 내가 우뚝 서 있다. 내 팔을 틀어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을 정도로 힘을 주고 있다. 태양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다. 말도 못하게 아프지만 나는 감히 놓으라고 뿌리치지 못했다. 손목이 저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꾹 참고 다정하게 물었다. "저녁 먹었어?" 내 말에 태양은 고개를 숙여 나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부러뜨릴 것처럼 잡고 있던 내 팔을 뒤로 간단히 꺾었다. 견디기 힘든 아픔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온다. 태양은 그런 날 앞세워 침실로 걸어가면서 내뱉었다. "지금부터 먹을 거다." <정말이지 난 언제라도 놀랄 준비가 되어 있다> 소리 없이 스치는 바람에 부서지는 햇살. 떠도는 발자국들이 만들어낸 수만의 합창. 새는 날다가 나뭇가지에 내려앉고, 사람은 걷다가 의자에 걸터앉고, 손은 흔들다가 주머니에 넣는다. 그렇게 모두들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마음만은 고무찰흙처럼 한번 붙으니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래서 심장이 아팠다. 모든 눈부심과 소음들이 다 아팠다. 돌아가는 길은 태양과 마주서야 했다. 20. 이건 아니다. 순수한 욕망도 아니고 뜨거운 열정도 아니다. 채벌과 같은 분노와 억눌린 원망이 분출해내는 폭력이다. "이러지 마." 일부러 더 침착하게 태양을 향해 말했다. 자칫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나를 침대 위에 던져 올리고, 태양은 억지로 내 옷을 벗겨내고 있다. "할 얘기 있어. 지금 할 거야. 그러니까 들어줘, 태양." "나중에 해. 지금은 더 급한 게 있잖아?" "얘기가 더 급해." "난 이게 더 급해." 태양이 내 어깨를 찍어누르며 침대로 밀며 입술을 부딪쳐왔다. 숨 쉴 틈도 없이 그에게 틀어막힌 입술이 답답한 소리를 내며 저항한다. "그만해!" 겨우 떨어진 입술로 소리를 치자, 태양이 내 머리카락을 잡고 뒤로 꺾었다. 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태양은 천정을 향해 솟은 내 목젖을 물고 천천히 올라와 다시 광폭하게 입술을 빼앗았다. "저항할 생각 하지 마. 오늘은 봐주지 않아, 여재인." 거의 찢어지다시피 한 내 옷이 거친 태양의 손에 의해 제거되고 있다. 끊임 없이 저항하고 있지만 태양의 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헛된 몸짓에 불과하다. 이러지 마! 이러지 말자, 태양아. 자꾸 상처내지 마. 내가 너 사랑하잖아. 너도 나 사랑하고 있어. 나는 알아. 제발! 더 이상은 사랑을 아프지 하지 말아. 응? 부탁이야! "제발……!" 내가 가늘게 뱉어낸 신음에 태양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내가 아닌 침대머리를 노려보다가 다시 내 어깨를 잡고 획 뒤집어 버린다. 너무도 쉽게 그의 손에 휘둘리고 유린되는 몸뚱아리가 아파죽겠다. 그 모든 걸 지켜보아야 하는 내 마음이 더 큰 비명을 질러댄다. 제발……! 뜨겁고 끈적하게 밀려왔다 사라지는 태양을 느끼면서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난폭하게 허리를 들어올려 무릎으로 내 다리를 억지로 벌리는 소리에 귀를 닫았다. 그래서 이 행위에 동참하지 못하고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차마 기도는 하지 못했다. 신이 지금의 태양을 보실까 봐. 기도는 하지 못한다. "잘 좀 흔들어 봐. 아까는 다른 남자 품에 안겨서 잘도 웃더니." 형이잖아. 태양아, 그는 너의 형이잖아. 그리고 이렇게 너에게 꽉 잡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움직여. 너에게 완전히 잡혀서 꼼짝 못하게 붙들려 있는데, 무슨 힘으로! 잔인하다. 태양은 지금, 지렁이 위에 소금을 뿌리면서 어서 꿈틀대라고 소리치는 아이 같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태양의 거친 호흡과 젖은 신음이 귀를 어지럽힌다. 태양은 그렇게 나를 완전히 침몰시켜가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화상이 남을 거다. 격한 질투와 드디어 곪아터진 인내의 고통이 그를 내몰고 있다는 걸 안다. 그를 구해줘야 하는데, 나는 이렇게 무력하게 엎드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면 안 돼. 정말 이건 아니야! "사랑해, 태양." 상처 입은 적이 있는 말을 다시 건네본다. 내쳐지더라도 내 진심이니 꼭 전해야 한다. 이미 늦었다고 해도 끝내 말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일시정지. 태양의 동작이 그친다. 내 등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여재인."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고는, 내 다리를 잡고 다시 확 뒤집었다. 아프게 들어차 있는 그의 페니스 때문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흘렀다. 숨막히는 모멸감이 내 목을 조이는 기분.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분명히 말했었다. 나는 너 안 사랑해." 내 손을 잡아내리면서 태양이 잔인하게 으르렁거렸다. 뜨거운 눈물이 눈가로 도로록 도로록 끊임 없이 흘러내린다. 눈을 뜨고 태양의 손길로 인해 울긋불긋해진 나신을 내려다보다 흠칫한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진짜 사랑이라면 고통도 달콤해야 하잖아. "이제 그만해." 태양을 향해 내가 말했다. 엄청난 슬픔과 피로가 몰려와서 그저 씻고 자고만 싶다. 하지만 태양은 내 말에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시작도 안 했어." "그럼 시작 같은 거 하지 마. 놓아 줘!" "안 돼!" 내 강한 부탁에 갑자기 태양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힘을 주어 나를 자신의 품에 가두어 버린다. 그 몸짓이 왠지 서러워서 내 가슴 속에서 굵고 거센 울음이 만들어진다. 이미 깊이 들어와 있는 그의 것이 내 등을 쓸어대는 손길과 함께 나를 흔들었다. 감고 있는 눈을 뜨라고 채근하고, 꾹 다물린 내 입술을 열라고 명령한다. "싫어!" 발버둥을 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모든 힘을 그러모아 이 상황을 종료시키기로 결심했다. 고개를 흔들어 그를 떨쳐내고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비켜, 남태양." 하지만 태양은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 나는 그의 팔과 가슴을 마구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비키라고! 나쁜 놈아!" "……싫어?" 그 와중에는 태양은 오직 내가 소리친 그 한 마디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러더니 바르작거리는 내 다리를 단단히 잡고 위로 들어올린다. 허벅지 뒤쪽 여린 피부가 태양의 손아귀 힘에 짓눌려 몹시 아팠지만, 그보다 나를 뚫을 듯이 노려보는 그의 시선이 더 고통스러웠다. "싫지 않게 해 주지. 너도 즐겨 봐, 여재인." "안돼! 이러지 마! 태양아, 제발!" 하지 마. 이건 아니잖아! 후회할 거야. 너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나는 줄곧 알고 있었다. 나를 쾌락의 도구처럼 쓰고 있는 태양이지만, 실상은 내게서 얻은 상처투성이의 인간이라는 걸. 그래서 내가 그를 보듬어주면 더 빨리 아물고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내 오만한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태양은 내 곁에서 서서히 심장이 말라가고 있는 게 아닐까? 바로 지금처럼, 나 때문에 더욱 더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건 아닐까? 난폭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성급한 손길로 나를 헤집는 태양. 누가 주인인지 각인시켜주겠다는 듯 소유욕을 드러내는 몸짓. 몸부림치는 두 다리를 힘으로 누르고 확보한 공간에서 태양과 나 사이에 부끄럽고 힘겨운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성감대를 비벼대면서, 숨쉴 틈 없이 이어지는 격렬한 행위가 공기를 데운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태양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지다 어느 새 뚝 멈췄다. 다음 순간 힘 주어 꾹 밀어붙이며 몸을 떨던 태양이 뜨겁고 아득한 절정을 지나온 사람처럼 내 위에 털썩 쓰러졌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몸이, 서서히 식어가는 내 가슴을 덮고 있다. 나는 겨우 자유롭게 놓여진 손으로 태양의 등을 가만히 둘러 안았다. 눈을 감고 그의 축축하고 매끄러운 살결 내음을 맡는다. 과거를 잃어버린 나를, 태양은 자신의 첫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걸 이제 나는 안다. 하지만 태양은 모른다. 내가 그 과거를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그건 안 된다고 서 박사님이 진단을 내리셨다. 그 기억들은 내 마음이 스스로 닫은 게 아니라, 메스가 강제로 잘라간 거니까. "여재인?" 가슴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울음폭풍이 나를 덮치고 있다. 소리는 내지 않지만 온몸이 울음으로 가득 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태양은 끊임 없이 방울지어 내리는 내 투명한 눈물을 아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내가 깨달은 것.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결론을 내린 것. 그건 바로, '나는 결코 그에게 첫사랑인 작은 별이 되지 못하겠구나.' 라는 거였다. 바보처럼 나는 그게 난 줄 알았는데, 그건 단지 내가 잃어 버린 나였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태양으로 인해 완전히 떠난 줄 알았던 '잃어 버린 나에 대한 망상'이 그로 인해 고스란히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예뻐해줄 수 없는 아이러니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태양의 말. 그건 그가 지금의 내 안에서 작은 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까? 할 수만 있다면 타임머신이라도 만들어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울지 마." 억울해. 정말 억울해 죽겠어. 이게 뭐야?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니, 태양아! "여재인. 그쳐!" 내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자, 태양이 소리친다. 괴로움이 가득 담긴 그 음성이 망치처럼 내 가슴을 더 찍어댄다. "어흐흑! 흡! 흑흑……!" "뚝!" "엉엉! 어어엉! 흐윽. 어흐흑! 어엉엉!" 이 울음은, 한바탕 신나게 휘몰아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폭풍이다. 내 눈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눌러대며 그치라고 외치는 태양도, 이미 터져 버린 내 속의 폭풍을 잠재우진 못 할 것이다. 어찌할 줄 모르는 음성이 나를 달래고, 촉촉한 입술이 얼굴을 쓸어댄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태양의 다정한 몸짓은 그 하나로 모두가 상처였다. 새벽에 퉁퉁 부은 눈을 뜨고 나는 혼자 일어났다. 내 곁에 바싹 붙어 자고 있는 태양을 두고 나는 그 방을 나왔다. 처음부터 내 방이었던 작은 방으로 가서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겨 가방을 채운다.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말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이대로라면 태양도 나도 힘들어서 결국엔 지쳐 쓰려질 게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싶다. 그 시간 속에서 아픔을 걸러내고 싶다. 다 걸러낸 후의 따뜻하고 순수하게 행복한 미래를 상으로 돌려받고 싶다. 잘 이겨냈다는 격려의 의미로. 여기까지 잘 참아왔다는 칭찬의 뜻으로.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닫혀진 태양의 방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태양아, 우리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늘 앉아 있던 베란다의 작은 테이블과 의자. 그러고 보면 그는 햇살 가득한 그곳을 참 좋아했다. 또 그가 항상 잊어 버리고 설거지하던 싱크대 위의 고무장갑. 문득 장갑이 작다고 불평하던 그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식탁 위에 놓인 뚱이가 보인다. 태양은 별로 탐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저건 내가 기념으로 가져 가야지. 곧 다시 돌아오고 싶지만, 만에 하나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잠시 거실 탁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태양에게 편지를 썼다. 말 없이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인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 편지 옆에 태양이 내게 주었던 통장을 놓고 일어섰다. 잠시만 안녕! 주문을 외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집을 나선다. 열이 온 몸을 덮고 있는 걸 보니, 나는 이번에도 꽤 오래 앓을 것 같다. <범우주적 방황은 여기까지다> 지구, 대체로 무해함. 그러나 지구인은 대체로 유해함. 외계인은 속히 집으로 들어오길 바람. 이별이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해도, 나는 늘 변함 없는 자세로 감동할 준비를 하겠다. 지금 그렇게 너를 기다리고 있다. 21.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문밖에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발소리도 자신을 염두에 둔 것 같다. 태양은 비어있는 옆 자리를 바라보며 낮고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질투로 눈이 멀어서 힘이 약한 재인의 약점을 이용해 함부로 굴었다! 미쳤던 거다. 그처럼 저열하고 비겁한 폭력성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나약하고 짐승 같은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재인의 향긋한 육신을 먹어치울 듯이 성급하게 달려들었던 자신은 어제 완전히 돌았었다. 싫다는 녀석을 억지로 안을 만큼, 재인에게 미치고 돈 놈이었다. 괜찮은 거냐? 여재인, 너 그렇게 걸어다녀도 돼?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태양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를 볼 낯이 없다. 재인이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됐을까 봐 두렵다. 두근. 두근. 다가오는 발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 때……. "그만 일어나, 태양." 자신을 부른 음성은 어머니의 것이다.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켜 정면을 응시한다. 벌거벗은 자신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서 있는 어머니와 시선이 마주친다. 오, 세상에! 태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무릎에 팔꿈치를 얹었다. "재인이는요?" "나와서 식사하거라." 이미 출근을 한 걸까? 밖이 조용하다. 집안에 어머니와 자신, 이렇게 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 몸으로 어떻게 출근했을까? 피를 낸 건 아니지만 재인이 감당하기엔 충분히 힘들었을 거다. 요사이 자신이 그를 조금도 쉬게 해주지 않았던 걸 생각하며, 간담이 서늘해진다. 어디서 쓰러져 버리는 건 아닐까? 아파서 몸져 누워 있는 건 아닐까? 벌떡 일어나서 전화기를 찾아 헤매는데, 어머니가 단호한 얼굴로 태양에게 옷 입고 식탁 앞에 앉도록 명령했다. "밥부터 먹어. 그리고 나서 얘기 좀 하자." 재인이가 그랬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자신을 떠나겠다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을 들을 수 없기에 대화는 최대한 피했다. 재인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힘을 몽땅 빼놓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가 핸드폰을 두고 나간 날, 바로 뒤쫓아갔다가 로비에서 보았던 장면 이후로 태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진상우란 자가 재인이를 안고 있었다. 재인이도 피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포옹을 받고 있었다. 그 길로 달려가 둘을 떼어놓고 남자를 패 죽이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던 건, 순전히 재인 때문이었다. 또 다시 자신을 밀쳐내고 옛 연인에게로 돌아설까 봐. "얼마 전에 재훈 아저씨 찾아갔단 말 들었다." 어머니는 반찬을 태양 가까이로 모아주며 말했다. 재훈 아저씨는 한 때 태양의 양아버지였던 분이다. 어머니가 재혼하셨던 회사 연구원이자, 아버지 일을 늘 봐주시던 동료. 그리고 인학이의 아버지. 비록 성은 물려주시지 않았지만. "그 사람 아들이랑 네가 같은 반이었다고?" "네." "어제 서 박사 만났다. 그 아이 모친이지." "인학이 어머니는 왜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의도적인 몇 초의 정적에 태양은 숟가락을 놓고 고개를 든다. "서 박사는 재인이 기억 담당 주치의란다." 태양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어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재인이가 기억상실증이란 말입니까?" 얼굴이 하얗게 바래는 느낌. 태양은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서 갈등의 빛을 보고 있다. 안 돼. 숨기는 거 없이 모두 말씀하시게 해야 해! 애써 침착함을 가장한다. 최대한의 정신을 끌어모으며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이유가 뭐였죠?" "……." "재인이가, 기억을 잃은, 이유가, 뭡니까?" 대답이 없자, 천천히 또박또박 끊어서 묻는다. 꼭 듣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들을 때까지 물을 테다. "뇌종양 때문에 수술을 했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큰 일을 자신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언제요?" "오래 됐어." 아팠겠다, 우리 재인이! 그 많은 사람들 앞에 머리 속을 다 보이고, 힘들었겠다! 혹시 그것 때문에 재수를 했던 걸까? 하필이면 왜 자신이 없을 때 그가 아팠을까? 속상하다. 가슴이 미치도록 저린다. "어머니가 재인이를 서 박사님께 소개했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재인의 뇌수술을 담당했던 신경외과 주치의에게 소개했지. 그리고 인학이가 재인이의 최면 치료 때 많은 도움을 줬다더구나." "어떤 치료였습니까?" "일종의, 기억을 채워 넣는 작업이었다. 재인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술 직전 2, 3년 간의 일들, 학교에서 알고 지냈던 친구와 선생님들, 그리고 갖가지 학습과 엉킨 기억들의 재구성. 뭐 그런 거였어. 치료라기보다는 결국 재인이가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했던 거지." 그걸 서인학이 도와줬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녀석이 나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된다. 몇 년 전 만났을 때,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았던 재인의 시선과, 속으로 당황했을 그의 심정이. 엄청 힘들었을 것 같다. 적막과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녀석인데. 그 낯선 상황들 속에서 익숙해지려고 혼자 싸웠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저민다. 인기도 많은 녀석이었는데, 어색한 반 친구들의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왜 나한테 말하지 않으셨어요?" "말했더라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곁에 있어줄 수 있었잖아요! 적어도 혼자 힘들게 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니. 네가 돌아왔다면, 재인이가 그렇게 된 보람이 없었을 거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태양이 주먹을 꼭 쥐고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자신의 말실수를 깨들은 듯 어머니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이건 재인이가 써 놓고 간 모양이다." 갑자기 곤란해졌기 때문인지, 어머니가 태양에게 종이 한 장을 내민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받아든 태양은 이내 숨이 막히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빠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마치 재인의 흔적을 찾는 것처럼. 그러다가 문득 식탁 위에 항상 보이던 돼지저금통이 없다는 걸 발견한다. 재인이가 가져갔나 보다! 또 다시 태양 더러 자기 없이 살라 하는 거다! 심장이 춤을 춘다.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날뛴다. 더 이상은 안 돼! 너 없이는 나 못 살아! 절대 안 살아, 여재인! 쿵 쿵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 피를 토하는 심장이 운다. 돌아와라! 내 곁에 다시 와라, 재인아! 우린 같이 있어야 돼!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해! 태양의 손에 꾸깃해진 편지가 다시 어머니의 손으로 옮겨간다. 다가온 그녀의 손이, 어느 새 젖은 태양의 뺨을 가만히 닦아낸다. 그리고 위로하듯 나직한 음성으로 결코 위로가 될 수 없는 말을 들려주었다. "서 박사가 최종진단을 내렸다. 재인이 기억, 되돌릴 수 없는 거란다. 의지가 강하고 성정이 곧은 아이였지.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근성도 있고. 스스로 기억을 차단할 만큼 정신이 유약한 아이가 아니라는 증거라더구나. 특히나 간절한 추억일수록 재인이로서는 기억하고 싶었을 거라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칼이 되어 태양의 가슴을 죽 죽 그어내리고 있다. 재인이에게 자신이 했던 모진 말들이 자꾸만 제 속에서 난도질을 해댄다. 그에게 작은 별이 아니라고 했다. 예전과 똑같이 감정에 솔직하고 순수하게 다가와준 그에게 몹쓸 짓을 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해진 태양의 얼굴을 두 손을 감싼 채, 어머니가 또박또박 태양의 두 눈에 중요한 사실을 새겨넣는다. "재인이 찾아야 한다, 태양." "물론입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 당장 찾아서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할 거다. 그 모든 시간들을 다 보상해줄 순 없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다. 재인이를 위해서 저는 못 할 게 없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작은 별이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다 들어줄 거다! 이별만 빼고. 그와 헤어지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다! "당장."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어머니는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태양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노려보자, '당장 찾아야 해.' 라고 말했다. "박경식이 어제 갑자기 출소했다는데 행방이 묘연해." "……!" "재인이가 기억을 잃어버린 바람에 재판에 증인으로 서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는 나오는 즉시 재인이부터 찾을 거다." "왜요? 그가 재인일 왜요!" 이해할 수 없다. 태양은 어머니의 어깨를 부여잡고 물었다. 절대 피해하실 수 없도록. 이번에는 정말로 다 듣고 만다는 심정으로.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는지, 시름 어린 한숨을 내쉬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체념과 염려가 복잡하게 담긴 눈이 태양을 향한 채, 촉촉한 수분에 젖어든다. "네가 한국을 떠나던 날, 재인이가 박경식을 다른 길로 유인했었다." 그 한 문장을 채 다 듣기도 전에 태양은 눈을 질끈 감았다. 회한이 담긴 눈물이 어머니의 눈에서 흐른다. 박경식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무덤까지 가져갔을 이야기. 음성에도 그 축축함이 마구 섞여 더욱 서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태양은 조금 전에 자신이 느꼈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란 걸 실감한다. 모든 게 다 자신 때문이었다. 저 때문에 재인이 생명까지 잃을 뻔했던 것이다. 그토록 심각한 기억상실의 후유증도 다 저를 먼저 보내려고 애쓰며 수술을 늦췄던 탓이다. 심장이 죽을 것처럼 타들어간다. 폐까지 불길이 번진 것처럼 호흡이 뜨거워진다. 여재인, 만에 하나 다시 또 그런 위험한 짓 하면 가만 안 둬! 아니!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이젠 내가 네 곁에서 절대 안 떠나! 찾을 거다! 너 찾아서 내가 꼭 지킬 거다! 어차피 내 인생에는 재인이 너 하나밖에 없었다. 내 하늘에 작은 별 하나만 남기겠다고 선언한 그 순간부터, 나에게 다른 모든 것들은 오직 그 별을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으니까. 그 때는 내가 가진 게 없어 실패했지만, 이젠 아니다. 열정과 순수만으로 무장하고 있던 열여덟의 내가 아니야. 힘 없이 네가 떠미는 대로 떠나야 했던 내가 더 이상 아니다. 기다려! 이번에도 내가 갈게. 그리고 만나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다! 태양은 어머니의 손에서 다시 재인의 편지를 되찾아왔다. 그리고 반듯하게 접어 방 안의 보관함에 넣으며 대신 재인의 반지를 꺼냈다. 그것을 목에 걸고 이젠 절대 빼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게 집을 나섰다. 언젠가도 한 번 본 듯한 느낌의 저 사랑스런 편지와 그 동안 든든하게 자신을 지켜준 이 반지의 주인을 찾으러. <태양아. 잠시 떠나 있으려고 메모를 남긴다. 네 얼굴 보면 못 갈 것 같아서 이렇게 몰래 떠날게. 미안해. 힘들고 괴로울 때 너를 만나서 나는 참 많은 걸 깨달았어. 있잖아, 세상은 고된 만큼 뭔가를 꼭 남겨주는 것 같아. 지쳐 쓰러질 것 같았던 나에게 태양이 네가 나타나 준 것처럼. 꺼지지 않는 불처럼 앞으로도 너는 내 속에서 살 거야. 영원히.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이건 너무 속상하다. 억울하기도 하다. 주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지금도 참 많은데. 상처와 분노, 걱정과 아픔들. 네가 나로 인해 겪어야 했던 그 많은 감정들을 더는 겪게 하지 않는 것. 그것 밖에 없네. 태양이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내 마지막 배려. 바보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네가 아직도 날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해. 널 잃은 건 난데 말이야. 너에게 먼저 등을 돌린 것도 나인 주제에. 미안해. 내가 많이 미안하다, 태양아. 평생을 바쳐도 다 갚지 못할 만큼 소중하고 큰 것들만 내게 준 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것뿐이다. 태양이 네가 알아서 바닥을 짚어줘. 너무 깊이 파서 잘 보이지 않는 이 속의 마음 말이다. 아무리 좁고 깊은 우물이라도 태양은 비추잖아. 사랑한다. 진심이니까 믿어줘. 나는 너를 만날 때마다 사랑에 빠지거든. 이제 다시는 널 잊지 않을게. 나의 첫사랑이자 나의 주인은 바로 너, 태양이니까.> 이것은 옛날이야기 중의 하나다. 자기 신발 수치를 적어놓은 종이를 깜빡하고 놓고 왔다고 십리 길을 걸어 장터에서 집까지 되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 종이를 들고 다시 장이 서는 곳까지 왔을 때에는 이미 장이 파하고 신발 장수도 떠난 뒤였다. 신어 보고 맞으면 내게 가장 맞는 신발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따로이 재어놓고 정해놓은 그것 하나만을 고집한다. 태양은 어릴 적 프로비던스 도서관에서 읽었던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쉽게 풀어놓은 동화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어른이 되면서 그 교훈을 잊어 버리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자신처럼. 정말 이건 꼭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다. 태양은 그 시절 자신을 사랑했던 작은 별을 고집하며, 현재 곁에 존재하는 재인을 부인하려 했다. 정작 그를 놓아주지도 못하면서. 재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극장에도 나오지 않고 집에도 가지 않았단다. 태양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꽁꽁 숨어 버린 작은 별. 그럼에도 그를 꼭 되찾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내가 세상에서 절대 참을 수 없는 게 딱 세 가지가 있는데……." 재인과 함께 들른 적이 있는 '티틀리스'란 카페로 갔다. 그 곳의 주인인 가을이 태양을 앞에 앉혀 두고 말을 꺼냈다. 내내 참고 있었는지 신중하고 느릿하게 결론부터 말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여재인이란 이름을 가진 착한 외계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입니다." 묘한 화법이다. 태양은 그를 묵묵히 마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재인을 아끼는 사람이다. 눈빛만 봐도 그런 건 쉽게 알 수 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다. "소중히 대하세요. 그 방법을 모르면 가르쳐줄 분들을 소개해줄 수도 있습니다." 의외의 말에 고개를 들자, 가을은 태양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태양은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에 잠시 숨을 죽였다. 어느 새 비가 굵어지고 있었다. 전면 유리창 밖에서 굵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카페 유리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유리창 밖을 바라보며 소파에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밖에서 조금 커 보이는 외투를 입고 비를 맞으며 서 있다. 아무래도 저 외투는 카페 안에 있는 남자의 옷인 것 같다. 유리창을 문지르는 창밖의 남자. 그리고 그 손을 유심히 바라보는 소파의 남자. 그는 울고 있다. 아니, 우는 건 그들 둘 다인지도 모르겠다. 바깥에 선 마른 남자의 얼굴은 온통 비로 가려져 있으니까. 바로 그가 빗물이 떨어지는 밖의 유리창에 대고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내리는 비가 금세 지우고 말지만 쓰는 걸 멈추지 않는다. 앉아 있는 남자의 표정으로 봐선, 고백이지 싶다. 태양은 고개를 돌렸다.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소중한 순간을 훔쳐보긴 싫다. 그러기엔 코끝이 너무 찡하다. 가슴 속에 맺힌 그리움이 너무 거대하다. "고백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은 그보다 더 정직한 행동으로 전달됩니다." 가을이 조용히 말했다. 태양은 그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그 곳을 뛰쳐나왔다. 우산도 두고 왔다. 빗속을 한참 걷다가 빈 벤치 위에 앉았다. 어릴 적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 위에서 비를 맞으면 떨던 날처럼. 하지만 이젠 그 때와 다르다. 지금은 모든 게 다 달라졌다. 지켜주고 싶은 걸 지켜줄 수 있는 힘. 어머니가 계속 말해온 그것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있다. 재인아, 이 그리움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남으면 널 위해 남은 평생을 살게! 태양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바닥의 빗물을 내려다본다. 그러니 돌아와라. 얼른 내 곁에 와서 딱 붙어라. 그렇게 절대 떨어지지 말아라! 흠뻑 젖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태양은 자신의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콧날이 날카롭고 수 없이 깨문 듯한 입술이 발갛게 부어있는 한 여자. 그녀도 비를 맞고 뛰어다녔는지 머리와 옷이 다 젖어 있다. "남태양 씨?" 집앞으로 걸어가서 그녀 앞에 서자,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묻는다. "그렇습니다만." "재인이 숨겨둔 거라면 얼른 내놔요." 다짜고짜 건네온 한 마디에 태양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초조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이 태양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를 낸다. "대체 재인이 어딨어요? 아아, 미치겠네! 나쁜 놈, 잠적을 하려면 신고부터 해야지!"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누구에요?" 그제야 태양을 빤히 올려다보며 여자가 말했다. "저는 재인이 친구 성지효라고 하는데요. 저기, 문부터 좀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화장실이 급한데." 태양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내려다본다. 위험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데, 예의가 좀 없다. 다짜고짜 밀어붙이는 분위기. 그렇다고 위협적이지도 않지만.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을 열어 자신부터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란 소리도 안 했는데, 그녀는 닫히는 문을 잽싸게 잡고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는 화장실이 아니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집안을 살피는 거다. "화장실은 방금 지나친 거기 딱 하납니다." "재인이 진짜 없네." 태양의 딱딱한 설명에도 여자는 혼잣말만 한다. 화장실은 핑계고 재인을 찾으러 쳐들어온 건가 보다. 누가 여재인 친구 아니랄까 봐. 언젠가 피아노 앞에서 자신을 들어 안고 있는 태양에게 재인도 그랬었다. 쉬 마려우니까 내려달라고. 그런데 내려주자마자 그는 곧장 태양을 잡으러 달려왔었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이상하네. 집에도 없고, 극장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얘가 어딜 갔지?" "재인이를 급하게 찾는 이유가 뭡니까? 태양이 팔짱을 끼고 묻자, 지효는 그제야 울상이 된다. "재인이 없으면 우린 완전히 망해요!" 새삼 울분이 솟는지 마구 흥분하면서 떠들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황 감독이 중앙예술관에서 극 상연하는 걸 취소하겠다잖아요. 재인이가 짤린 걸 뒤늦게 알고는 그 인간 어찌나 펄떡펄떡 날뛰던지! 인간 성지효, 안전경비구역에 가둬놓은 심장이 다 폭격을 맞았다니까요. 누군 재인이 안 좋아하나? 심지어 나는 친구거든요? 젠장! 이미 예매표도 반이나 나갔는데, 그 인간이 미쳤지! 아아, 대본도 다 찢어버리고! 상연은 두 달도 안 남은 상태에서, 무대구성도 안 짜고! 나쁜 싸이코, 황유진! 이번 연극 끝나고 나면 아무도 없는 산골로 유인해다 확 파묻어 버려야지! 아무튼 극장 쪽에서도 재인일 급히 찾는 모양이던데, 대체 얜 어딜 갔대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진짜!" 마구마구 흥분해서 쏟아내는 지효를 바라보다, 태양은 턱을 잡고 고개를 기울인다. "재인이는 개똥이 아닙니다." 태양의 심각한 어조에 지효가 흠칫 굳으며 변명한다. "마,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그래도 그의 찌푸린 표정이 풀리지 않자 침을 꼴깍 삼키며, "전 개똥이라는 말을 아주아주 사랑스런 존재에게만 갖다붙이거든요." 보충설명을 한다. 진짜 비굴하다, 성지효! "태양 씨, 재인이 어디 갔는지 정말 몰라요? "모릅니다." "아, 미치겠네! 이번 극은 진짜 멋지게 써서 재인이한테 보여주려고 했는데! 바보 작가라는 말도 절대 못하도록 아주 가슴이 저릿저릿한 스토리로다가……." "재인이가 그런 걸 좋아합니까?"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지효의 말을 끊으며 태양이 묻는다. 지효는 눈을 반짝 빛내며 그런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난 태양 씨 정체가 더 궁금한데." 분위기 전환이 빠른 여자다. 태양은 말려들지 않으려고 애써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재인이 기다릴까요? 심심하면 얘기도 좀 나누면서." 지효가 거실 바닥에 털썩 내려앉자, 태양은 마지 못해 타월을 가져다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얼른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언젠가 강호 형과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미국에서 파일럿이 되기도 전에 손을 꿰매야 했던 태양은 뒤늦게 학교에서 퇴학 당할까 봐 긴장을 하던 중에 술을 마셨었다. 그 때 자신이 물었었다. 얼 만큼 더 아파해야 사랑이 완전해지냐고. 완전해지면 사랑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줄 알았으니까. 강호 형은 태양에게 기가 막힌다는 듯,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저었고, 이렇게 말했다. - 완전하면 그게 어디 사랑이냐? 안 아프면 그게 사랑이야? 태양은 전혀 위로받지 못한 기분으로 강호를 바라보았다. 강호는 계속해서 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죽도록 그리우니까 사랑이지. 애가 타도 채워지질 않으니 사랑이지. 욕심난다고 지랄할 때마다 다 가지고, 그립다고 발버둥칠 때마다 다 만나지면, 그 사랑이 오래 가겠냐? - 그럼 아프지 않게 되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거야? - 사랑이니까 아파도 참는 거지. 바보냐? 사랑이니까 아파도 좋아서 못 놓는 거다. - 그럼 형, 오랫동안 입어보지 못했던 옷처럼 어색한 사랑도 여전히 사랑이야? 강호가 상담사도 아닌데 자꾸만 물었었다. 물어도 물어도 나오는 대답들이 죄다 그럴 듯해서 묻고 또 물었다. 그러면 얼마 못 가 그는 꼭 이렇게 외치며 뜬구름 잡던 대화를 종식시키곤 했다. - 이 놈이 철학 책을 씹어 쳐먹었나! 그런 건 새끼야, 별들에게 물어 봐! 그 무렵의 태양은 그저 도장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잘 하고 있다고, 잘 견디고 있다는 칭찬 도장 같은 것 말이다. 얼 만큼 배우고 익혔나, 이제 얼마나 더 강해지면 되는 건가 하는 검사 도장도. 태양은 지금도 그런 게 필요했다. 끊임 없이 재인의 행적을 쫓고 있는 어머니가 그를 찾을 때까지, 비로소 자신을 용서하고 저 현관으로 재인이 돌아올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다는 확인 도장이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이젠 그걸 부탁할 사람이 없다. 강호 형은 재인이 돌아올 때까지 전화도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이젠 제 집처럼 이 곳을 들락거리는 지효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태양은 매일 꿋꿋이 집을 비우지 않고 재인을 기다렸다. 그렇게 겨울이 성큼 다가와 가을을 한 걸음 물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 순간에 짧은 영원을 담으며> 해를 머리에 인 나무는 이렇게 말했다. "쉬어요. 이제부터 내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22. 어제도 녀석은 복권을 샀었다. 로또 한 장 거머쥐고 잠시 뿌듯한 미소를 지었더랬다. 밥을 먹다가도 지갑을 찾아 그 안을 열어보며, 복권이 잘 있나 구경도 한다. 오승진은 복권 마니아다. 몰랐는데 녀석은 아직 철들려면 멀었다. "이건 배신이야! 처절하고 완벽한 허탈! 오, 신이시여!" 인터넷에서 무슨 기사를 읽다가 갑자기 저렇게 뱉어낸다. 나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읽던 책에서 얼굴을 들고 그를 본다. 승진이 눈에 불을 내고 있다. 입술에 침을 바르며 해대는 설명도 어찌나 과격한지.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다, 생구라다, 정부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해싸면서. 그 기사에 의하면 복권 당첨자들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과히, 복권 마니아인 녀석에겐 치명적인 내용이군. "통계조사라잖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얘기지." "그렇다는 사람도 있단 얘기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게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버전으로 내 옆으로 풀썩 쓰러지는 오승진.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토닥 쳐주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행복해야 돼!" "치, 그런 억지가 어디 있냐?" "억지든 아니든 그게 내 심정이란 말이다. 여재인, 너!" 갑자기 불똥이 나한테 튀려냐? 승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아 내게 손가락을 쭉 뻗는다. "네가 고생고생해서 번 돈을 결혼 축의금으로 냈는데, 그 커플이 금방 깨지고 사네 못 사네 하면, 열이 나겠어 안 나겠어!" "무슨 말이야, 지금?" "복권 당첨금은 우리의 꿈과 희망을 모아 만들어준 일종의 부조금이야.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의 꿈을 이루어주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는 믿음으로 산다고! 복권이 허황된 꿈이라고? 아니야! 이건 한 쪽에 몰아주기식 십시일반이란 말이야! 천시일반, 만시일반, 이렇게 다 함께 힘을 모아서 행복을 부풀리는 거. 이해 안 돼? 그런데 그 돈으로 왜 도리어 자기의 꿈과 삶을 버리고 사회로부터 꽁꽁 숨는 건데! 왜! 차라리 낭비를 하라 그래. 흥청망청 쓰면서 사회에 죄다 돌려주기라도 하란 말이야!" 귀가 쩌렁쩌렁 울린다. 이렇게 목청 큰 놈인 줄 올랐다. 하지만 승진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이제 보니, 그에겐 복권에 대한 남다른 철학과 의리가 있었던 거다. "맞아. 듣고 보니 너 흥분할 만해." "그지?" "응. 자, 그럼 계속 흥분해." 내가 책을 들고 일어서자, 승진이 올려다본다. "응? 너 어디 가?" "뚱이 배 불리러. 방금 너 엎어질 때 요거 떨어졌거든." 오백원짜리 동전을 들여 보여주며 내가 활짝 웃는다. 승진은 흥! 소리를 내며 돌아앉아 버린다. 조금 더 옆에 남아서 맞장구쳐줄 걸 그랬나? 잠시 고민하다가, 동전을 한 번 던졌다 잡고는 그의 방을 나왔다. 꽤 넓은 승진의 아파트는 특히 부엌이 굉장히 넓었다. 식탁도 크고 의자도 많았다. 모두 합쳐 여덟 개다. 어릴 때부터 큰 데서만 먹어서 좁은 상 위에선 밥이 안 넘어간단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는 학생들이 집에 찾아오는 걸 좋아한다. 희웅이 무리들이 와서 밥 먹고 가는 것도 좋아하고, 조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형제가 찾아오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항상 모자라지 않게 의자를 준비해 두려는 거다. 소파도 긴 것만 3개다. 일인용 소파는 공간효율이 낮아서 싫단다. 태양의 집을 나와서 나는 곧장 승진을 찾아왔다. 가장 오래 폐를 끼쳐도 폐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승진이 동창회에서 그랬으니까. 집에 남아도는 방들이 자신을 외롭게 한다고. 이 곳에 온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처음 일주일은 곧 죽을 듯이 아팠고, 그 다음 일주일은 책만 종일 읽었고, 그 후 일주일은 훌쩍 여행을 다녀왔고, 다시 일주일은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푹 쉬고 있다. 그 사이 승진은 열심히 학교로 출퇴근을 했고, 걸려오는 친구녀석들 전화를 다 물리쳤으며, 집으로 쳐들어온 학생 놈들을 문전박대하고, 당분간 형제들을 향해 자신의 집에 금족령을 내렸다. 다 나 때문이었지만, 승진이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얼마 전 내가, 왜 결혼을 안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하며 씨익 웃었다. "내 첫사랑이 아직 임자를 못 만나서 방황하는데 지금 가면 아깝잖냐." 나는 어디를 가나 첫사랑 타령이라면서 그를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 끝이 미묘하게 사그라지는 걸 승진도 본 것 같았다. 누군진 몰라도 그 놈의 첫사랑이 얼른 임자를 찾아야 녀석도 외로움을 덜 텐데. 나는 승진이 흘린 오백원을 뚱이에게 먹이고 가만히 흔들어 본다. 짤랑짤랑 소리가 나야 하는데, 역시나 둔탁한 소리가 섞여서 들린다. 태양이 여기다 지폐를 넣었나 보다. 바보 태양. 보고 싶은 태양. 안 되겠다! 뚱이의 배를 갈라 보아야겠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승진의 방으로 갔다. 커터 칼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려고 문을 벌컥 열었는데, 승진이 실로 화들짝 놀라면 부랴부랴 전화기를 침대 쪽으로 던진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야, 노크할 줄 몰라! 아우, 소중한 내 간! 오늘 저녁은 네가 순대 사와! 웃음을 팔든, 돈 칠갑을 하든 니 능력껏 삶은 간도 팍팍 끼워서. " "오승진, 우리 수술하자." "뭐?" 내가 눈을 찡긋하자, 승진은 자꾸 그러면 설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억의 조각들은, 불러모으는 동안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윤색된다. 같은 이야기를 매번 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거다. 나는 오랜 친구녀석과 함께 식탁을 뚱이의 수술대로 쓰면서, 문득 동창회가 있던 날 오전에 만난 서 박사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뇌수술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은 경우, 한두 달 안에 거의 다 되살아나기도 하지만 일이 년이 지나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완전히 잃었다고 보는 편이 맞아. 여러 검사를 통해서 확인했지만 재인이 너는 해리성 기억장애도 없고, 일시적 억압이나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도 아니었어. 정신적 원인이 아니라 신체적 원인이란 말이지. 이 경우엔 떼어낸 뇌 부위를 다시 붙이는 방법 밖에 없단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뇌를 다시 붙여달라고 하고 싶었다. 종양 같은 건 좀 남아있어도 되니까 절삭해낸 뇌 부분만은 돌려달라고. 그런 내 심정을 아셨던 건지, 박사님은 이렇게 위로를 하셨다. '하지만, 기억은 말이다. 재인아. 뇌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대부분은 뇌에 저장되겠지만, 일부는 영혼에도 남거든. 전생을 기억한다던가, 사후세계의 일을 진술하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건 그것밖에 없어. 그리고 기억이 없어도 기억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너도 조금은 해당된단다.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모두 다 뇌 속에 담고 살 순 없어. 흐려지고 쇠퇴하고 다시 재입력되고 그러는 거지. 안 그래?' 안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도, 내가 태양의 첫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하필이면 왜 그걸 잃었을까? 재수도 참 없었다, 여재인. "얜 뭐가 이렇게 딴딴하냐?" "손 안 다치게 조심해." "혹시 재인아, 내가 이 칼에 베여 죽거든, 양지 바른 곳에다 이 칼을 꽂아 줘." "그럼 넌?" "난 돋보기로 환생해서 이 칼을 향해 강력한 빔을 발사할 테다. 복수해야지."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승진을 쳐다보자, "안 웃기냐? 내 제자들은 좋아하던데." 라며 히죽 웃는다. 아무래도 승진의 인기 비결은,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오를 수 있는 만만함인가 보다. "아앗! 벌어졌다! 당겨! 찢어!" "그냥 확 잡고 벌려 봐!" "어우, 요 딴딴한 거! 내가 널 기필코 헤쳐놓고야 말리라!" 뚱이의 배가 사정없이 갈라지자, 승진과 내가 수선을 피우기 시작한다. 차르르르. 쏟아지는 동전들. 그 동안 내가 모아 넣었던 놈들이 꽤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파란 종이들. 지폐가 아니다. 수표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메모지. 깔끔하게 두 번 접힌, 같은 모양의 종이가 꽤 여럿 들어 있다. 승진이 그 중 하나를 집어들고 묻는다. "이건 뭐냐?" "태양……!" 나는 두근대는 심정으로 멍하니 그것들을 내려다보고만 있다. "어라? 이 위에 번호도 매겨져 있는데?" 승진의 말에 우리는 조금 흥분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야, 바늘! 네 머리에 뚫린 구멍이 휑해서 어째 살고 있냐? 네 실은 여기 있는데, 하핫!.' 방문을 열기 직전 승진의 말을 들었었다. 못들은 척했지만, 심장이 먼저 알고 뛰었다. 여기 있는 건 승진과 나. 두 사람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실이란 말이다. 나의 바늘은 태양 밖에 없으니까, 승진이 전화기 저 너머의 태양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던 거다. 뚱이의 배를 찢고, 태양의 메모를 발견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각자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승진과 나는 태양이 이토록 빨리 도착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 우리는 막 떡볶이에 순대를 섞네 마네로 투닥거리고 있었다. "여재인!"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태양이 내 이름을 외쳤다. 주뼛거리며 부엌에서 나온 내가 그 앞에 나타나자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 검은 코트를 걸치고 긴 몸을 우아하게 움직여 내게 걸어오는 태양. 나는 승진의 아이보리색 스웨터와 청바지를 걸치고 어색하게 서 있다. 오랜 만인데, 너무 부스스한 모습이라 속상하다.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 태양의 표정은 굉장히 복잡미묘해서 나는 그가 화를 낼지 웃어줄지 감을 잡지 못한다.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와서 화가 많이 났다 해도 할 수 없다. 그 때 자신은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는다. 그가 떨고 있나 보다. 아니면 내가 떨고 있거나. 둘 다인 건지도 모르고. 다시 차분해진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던 태양이 잠긴 음성으로 낮게 말했다. "가자." 오직 그 한 마디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현관으로 이끄는 태양을 손을 잠시 떨구어내고 나는 식탁으로 돌아가 얌전히 포개놓은 푸른색 메모지들을 챙긴다. 완전히 난자된 뚱이를 보고 태양은 놀란 모양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 나는!" 한 번도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태양에게 승진이 소리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도 나와. 재인이가 입을 따뜻한 외투 하나 챙겨서." 라고 말했다. 승진은 소리내어 투덜거리면서도 방으로 사라진다. '어디 가는데?' 묻는 내게, 태양이 빙그레 웃으며 '비밀.' 이란다. 두근 두근. 한 달 만에 만난 태양의 얼굴은 속상하게도 많이 마른 듯하다.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얼굴도 아주 하얘졌지만, 그의 품만은 여전히 따뜻하다. 모든 게 너무 쉽고 자연스럽다. 이렇게 돌아가게 되는 건가?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럼 또 같은 상처를 반복할지도 모르는데. 사랑하진 않지만 평생 같이 살 수는 있다던 태양의 말이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양을 보면서 단순한 행복이 내 안에서 제조되는 걸 느낀다. 맞다. 사랑은 참으로 단순하다! 우리도 이제 복잡한 머리는 좀 닫고, 단순한 가슴만 열어놓은 채 살면 좋겠다. "저 시체하고 돈은 두고 가?" 승진이 방에서 나와 부엌 쪽을 가리키자, 이번엔 내가 대답한다. "선물이야. 저걸로 복권 사." 그러자 승진이 이마를 확 찌푸린다. 아까의 그 인터넷 기사가 떠오른 걸게다. 저러면서도 머릿속으론 알뜰하게 복권이 몇 장 나올지 계산하고 있을 거다. 나는 잊을 뻔했다는 듯, 태양의 팔짱을 끼며 당부했다. "참! 그리고 뚱이는 양지 바른 곳에 있는 재활용쓰레기통에 묻어 줘." 혹시 애들이 보고 울면 안 되니까, 깊숙이 파묻도록. 좋은 장소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다. 좋은 시간은 더욱 그렇고, 좋은 스케줄은 더더욱 그렇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여기 다 모여 있다고 신기해했다. 마지막 요소인 좋은 사람들.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이 다 있다. 나는 지금 휴직 중인 극장에 나와 한 객석을 차지하고 있다. 크기는 아담하지만 고급스럽고 아름답게 리노베이션 된 실내는 볼수록 놀랍다. 안락하고 넓은 좌석과 새로 깔린 푹신한 카펫도 꽤 비싸 보인다. 예전의 낡고 오래된 극장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기가 힘들다. 이 곳 하우스매니저인 내가 찾기 힘들다고 말하는 건, 없다는 뜻과 통한다. 한 달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변화로는 엄청나다. 범인은 아무래도 태양인 것 같다. 회식 자리에서 엿들었던 극장의 생존 문제.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자본에 대한 결핍을 그가 채워준 것이 분명하다. 들어올 때, 이사님이 그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걸 보았으니까. 그리고 내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옛 동료들의 모습이 마치 그림 같다. 정장을 차려 입은 희웅이 무리는 처음 보는 모습이지만 이 곳과 잘 어울린다. 모두 성장을 하고 먼저 와서 앉아있던 가족들이 내가 들어가자 손을 흔들었다. 놀라움에 태양을 돌아보자, 그는 어서 앉으라는 듯 비어 있는 가운데 자리를 가리켰다. 저쪽에 중앙예술관의 예전 동료들도 보였다. 현진은 날 알아보고 일어나서까지 인사했다. 대체 무슨 극인데 이렇게 다 모였을까? 승진이 저쪽 통로에 서서 프로그램을 넘겨준다. 받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또 다시 옆자리에 앉은 태양을 돌아보았다. "자꾸 나 보지 말고 지금부터 즐겨." 싱긋 웃으면서 그가 말했다. 즐기라고? 오오! 물론이다. 단지 지금은 모든 게 새로워서 그렇다. '시나리오 성지효. 감독 황유진.' 프로그램에 찍힌 그 대목만으로도 난 즐겁다. 이윽고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웅성거리던 실내가 예의바른 정적에 감싸인다. 극이 시작하기 직전, 귀가 멍해지는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던가! 핀 조명이 무대 왼쪽 내려 앉고 그 속에 키가 큰 남자배우가 서 있다. 뚜벅뚜벅 그가 정중앙으로 걸어가는 동안 주위가 밝아지면서 전 무대가 드러난다. 어느 남자 고등학교의 시끌벅적한 교실 안 풍경이다. 그 때 칠판 앞에 서 있던 조그마한 배우가 교실 맨 뒤쪽 자리로 걸어간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아까의 키 큰 배우에게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주번인데 왜 이렇게 늦게 와?" 무슨 소리냐는 듯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키 큰 남자. 상대적으로 작은 배우가 갑자기 손뼉을 딱 치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차! 넌 미국에서 전학 와서 주번이 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는 팔짱을 끼며 조금 거들먹거리는 몸짓으로 무대 앞으로 걸어나온다.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섬세한 핀 조명이 그 배우를 따라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작은 배우는 카랑카랑한 음색과 어울리게, 무대 위의 다른 배우들보다 한층 화려하고 빛나 보인다. "지금부터 내가 주번이라는 특수계급에 대해 설명해줄게." 이렇게 말하며 그가 왼쪽 검지를 세웠을 때, 객석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 반응이 내 지인들의 것임을 예민하게 느낀다. 또한 저 배우, 왠지 쓰는 말투나 행동이 나랑 닮았다. 설마……! "저게 나야?" 내가 나직하게 소리를 죽여 물으면, 태양이 내게 몸을 기울이며 역시 낮게 대답한다. "그리고 저쪽은 난가 본데." 모른 척 대꾸하는 태양의 옆 얼굴이 공모자의 그것처럼 반짝인다. 나는 가만히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뛴다. 지금부터 보게 되는 장면들이 모두 내가 잃어버린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예상. 그것이 내 머리 속에 북처럼 둥둥 울리며 전신을 긴장시켰다. 성지효, 너……! 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난 거야? 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쓴 거야? 이렇게 갑자기 작은 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나…… 그냥 이렇게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 되는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 시절에 태양과 내가 나누었던 게 뭔지, 여기서 이렇게 그저 보고, 듣고, 느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벌써부터 눈물이 나. 어떡해……! 사랑해, 친구야. 너 진짜 멋지다! 황유진 감독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 안 잊을게요. 저 열심히 살게요! 이 작품을 여기서 시연할 수 있게 힘을 쓴 모든 사람들, 지구 끝까지 따라 붙어서라도 인사할 거예요! 고맙다고. 최고라고! 그리고, 그리고 또 지금 여기 와준 사람들. 아직까지도 내 편인 사람들! 앞으로는 내가 당신들의 편이 되어줄게요. 언제까지나! 끝까지! 그리고 작은 별. 그 곁의 태양. 두 사람의 첫사랑도 열심히 지켜보고 절대로 잊지 말아야지. 마지막으로, 하나님! 역시 멋쟁이세요! 이보다 더 굉장한 상은 없습니다. 저한테 이거 주시려고 그 동안 어떻게 참으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칭찬해주셔서, 이렇게 눈물나게 좋은 상 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시지 않고, 이렇게 다시 열렬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완벽함은 비록 오래가지는 않을지라도, 존재함 자체가 엄청난 감동임을 나는 배우고 있었다. <변하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는 변해갑니다. 나도 변해갑니다. 그는 변하였고, 나도 변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은 그 차이를 뺀 만큼 닮았듯이, 변하는 우리가 있다면 그걸 뺀 만큼 그대로인 우리도 있을 테니까요. 23. 연극은 완벽했다. 시나리오도, 배우의 연기도, 무대 연출도 일류다웠다.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서부터가 극화인지 나는 모르지만, 아무튼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직 미완의 작품이라 더 다듬어야 하고, 한 달 후에 있을 본극을 중앙예술관에서 상연할 예정이었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스텝들과 그들의 지인들이 초청된 자리였다. 황유진 감독의 컴백 작품 시연회이자, 리노베이션 후 '일곱 번째 별'로 개명한 우리 극장의 첫 상연 극이었다. 붉어진 눈밑을 닦으며 일어나는 관객들 속에 섞여 태양과 나도 로비로 나왔다. 감동에 젖은 상태라 쉽게 입을 열진 못했지만, 극장 곳곳의 고급스런 인테리어를 살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재인아! 재인아!" 빠져나가는 사람들 속에 우뚝 서 있는데,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지효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땠어? 어땠어?"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폼이 요구하는 반응은 딱 하나다. "멋졌어. 굉장히." 칭찬을 건네자, 온 몸으로 막 뿌듯해서 죽으려고 한다. "내가 언젠가는 가슴 절이는 연애스토리로 대박 터뜨릴 거라 그랬지?" "남의 인생 표절이나 해놓고 잘난 척은." "그 인생을 똑같이 따라 사는 게 표절이지. 이건 '완벽한 예술로의 승화' 라고 하는 거야!" 새침하게 핀잔을 던져주면서, 지효는 태양을 흘끗 올려다본다. "재밌게 봤어?" 웬 반 말? 둘이 그 새 친해진 건가? "훌륭하더군." 태양의 짧은 칭찬에 의기양양해져서는 지효의 미소가 더 커진다. 그녀는 무언가 더 자랑을 해대고 싶었겠지만, 우리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결국 스텝들 쪽으로 물러났다. 이건 순전히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전 직장 동료들이 이번 연극을 통해서 더 따뜻해진 시선으로 나를 보는 듯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깊은 이해와 호의적인 눈길이, 등과 얼굴에 닿는 걸 예민하게 느낀다. 그들도 이번 연극이 누구의 이야기인지 아는 것 같았다. 쑥스럽고 당황스럽다. 나는 자꾸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자리로 피하고 싶어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태양은 극장 사람들하고 인사하느라 못 본 것 같지만. 그 때 처음 보는 남자가 불쑥 다가와 아는 체를 하며 나를 잡아끌었다.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면서도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이끄는 대로 끌려간다. 그리고 내가 노리고 있던 좀 외진 구석 자리에 딱 멈춰 서서 이런 저런 말을 걸었다. 극에 대해서, 그리고 바뀐 극장에 대해서 의미 없는 질문도 했다. 내가 여기 매니저라는 걸 아는 사람인가? 혹 이전에 여기 왔던 손님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해주었다. 태양이 저쪽에서 나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빠르게 옮겨왔으니 날 놓쳤나 보다. 소리쳐 부르려 하는데, 갑자기 남자가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 어디론가를 눈짓을 한다. 동시에 내 다리를 세게 걷어차 주저앉게 했다. 윽. 신음을 뱉으며 바닥을 짚는데, 순간 내 바로 위 천정에 매달린 조명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전에 내가 손을 봐야 한다고 몇 번 말했었는데. 걱정을 하는 순간 조명이 다시 한 번 크게 휘청인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드는 것처럼. "재인아!" 태양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는 로비에서 그가 날 찾아냈다. "위험해!" 나도 알아.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태양아. 아무래도 급소를 맞았나 보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쭉 흘렀다. "오지 마!" 그 순간, '지지직! 투툭!' 소리가 났다. 거대한 조명이 내 머리 위로 곧장 떨어진다. 오지 마, 태양! 나는 눈을 감고 본능적으로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콰쾅! 챙그랑! 투두두둑!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조명이 박살 나는 소리가 로비에 커다랗게 울렸다. 이어지는 사람들의 아우성. 직원들의 고함소리. 그리고 나를 감싼 이의 가슴에서 들리는 빠른 심장소리. 엄청난 굉음이 났는데도,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조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등을 감싸며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해인이 형이다. 태양보다 조금 더 가까이 있던 형이 날 발견하고 먼저 덮친 것이다. 그리고……. "태양 군. 괜찮나?" 그런 해인이 형을 태양이 감싸고 있었다. 깨진 파편이 튀었는지 그의 눈 밑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저 사람 잡아요! 도망 못 가게 해요!" 갑자기 터진 광일이의 외침 때문에, 태양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사람들 속을 파헤치고 달아나려던 남자가 몇 번의 발버둥 끝에 붙잡혔다. 나를 구석까지 끌고 왔던 사람이다. 그리고 언제 와 있었는지, 정복 차림의 경찰 둘이 2층 계단에서 다른 한 남자를 끌고 내려왔다. 공범인가 본데. 도대체 왜 날……! "아무래도 경찰서에 같이 가봐야겠습니다. 형님, 재인이 좀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태양도 많이 다치진 않았는지 벌떡 일어나 선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와 해인이 형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주었다. "태양아!" 내가 부르자, 돌아서려던 그가 다시 날 바라본다. "이게 마지막이야." "뭐?" "널 위험하게 만드는 거. 너와 잠시 떨어지는 거. 네가 나 때문에 아파하는 거." 태양의 진지한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가 물처럼 촉촉하다. 큰일이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이 나려고 하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스물일곱 살 어른이 대중 앞에서 울다니. "그 모든 게 다, 지금이 마지막이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가만히 잡아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몸짓조차 취하지 못했다. 태양은 허리를 굽혀 내 귓가에 입술을 내리더니, 마지막으로 작게 속삭였다. "웃어라, 작은 별.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잖아." 뚱이의 뱃속에 들어있던 파란 종이의 정체는 이랬다. (0) 쪽지 퀴즈다. 여재인. 기억력 테스트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난이도는 점점 어려워지며, 채점 기준은 마지막에 나온다. 바로 시작하려면, 1번 쪽지를 찾아라. . . . (1)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다. 첫 문제이니 사지선다로 나간다. 태양과 작은 별의 첫키스 장소는? 1) 밤나무숲 2) 옥상 3) 양호실 4) 운동장 풀었으면, 2번으로 가라. 설마 찍어놓고 피곤하다며 여기서 쉬는 건 아니겠지? . . . (2) 작은 별은 노래를 참 못 부른다. 그래도 열심히 불러서 고2 때 실기시험 A 받았다. 믿기지 않는가? 하지만 사실이다. 노력 점수가 가산되어 그렇다. 여재인이 부르는 노래를 남태양은 메기라고 불렀다. 그럼, 그들이 시험 쳤던 진짜 곡명은 무엇인가? 동창들한테 전화돌릴 생각 마라. 치팅(컨닝)은 무조건 탈락이다. . . . (7) 비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할까? 여재인이 남태양에게 가르쳐주었다. 힌트. 작은 별 말이, 비가 와도 우울해하지 말라더라. 비는 쳐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솟아오르기도 하는 거라고. . . . (11) 자존심 상 안 넣으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와서 이 질문은 꼭 해야겠다. 며칠 전 냉장고에 체리를 사다놓은 사람은 누구인가? 보너스 문제인 만큼 보기를 주겠다. 1) 남태양 2) 남태양 3) 남태양 4) 남태양 . . . (마지막) 이번엔 주관식이다. 생각나는 대로 답해도 된다. 가장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바, 답이 훌륭하면 보너스 점수가 나간다. '메기'로 A를 받았던 그 저력으로 풀길 바란다. 이 문제의 답이 마음에 들면, 너를 나의 평생 대장으로 임명하겠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연히 내가 너의 대장이 된다. 그러니 경건한 마음으로 풀도록! 자, 준비 됐나? 여재인, 하늘이 왜 파란 줄 아는가? 나는 태양이 내준 퀴즈를 하나씩 풀면서 그가 내게 떠올려주고 싶었던 기억들이 뭔지 조금씩 알아나갔다. 이미 지효와 황감독의 연극을 보고난 뒤라서 그런지 문제들은 대체로 쉬웠다. 나를 해하려 했던 박경식이란 남자는 놀랍게도 살인미수죄 명목으로 다시 잡혀들어갔다. 가석방 기간 중에 저지른 일이라 이번에는 더 큰 형을 선고 받을 것이다. 그 후에는 미국의 정신병원으로 이동수감될 거란다. 전화를 걸어온 태양은 내게 혼자 있지 말고 부모님 댁에 가 있으라고 했다. 다정한 말투와 아쉬움이 가득 담긴 전화기 너머의 그 음성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전하고 싶은 마음을 차마 전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의 숨소리만 듣고 있었다. "퀴즈는 다 풀었어?" "응." 태양은 조금 벅찬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렇게 잘 참다가 결국 숨차게 질문을 던졌다. "내 대장이 되어 줄 거야?" 나는 조금 웃는다. 귀엽다, 태양. 그 말 정말 귀엽다. "모르지. 채점자는 내가 아니니까." 나직하게 대답하면, 태양이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작은 별!" 불평하듯 그렇게 소리치며 막 항의하려던 태양이, "사랑해, 태양." 내 조용한 한마디에 그만 뚝 숨을 멈춘다. 한참을 그렇게 숨도 안 쉬고 꾹 참더니, "나도 재인아! 너 사랑해! 엄청 많이 사랑한다!" 라고 심장을 터뜨리듯 큰 소리로 고백을 해온다. 저도 놀랐나 보다. 이렇게 전화로, 그것도 다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어지는 침묵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겠다. 아마도 멋진 프로포즈를 준비하고 있었을 테지. 적어도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은 이런 상태에서 단순한 고백을 해 버릴 생각은 없었을 거다. "아무튼 전화 무진장 좋아하는 남태양." 극에서 작은 별이 태양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 대사를 흉내내듯 내가 속삭이자, 그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텔레파시보다는 정확하고 빠르잖아." "무드도 진짜 없는 남태양." "방금 고백한 사람한테 막말하는 여재인." 불평 릴레이인가? "하지만 이런 게 더 달콤해." 준비된 장소에서 준비한 프로포즈는 이미 받았잖아. 오늘의 연극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프로포즈는 또 없을 것이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태양이 작게 숨을 내쉰다. "작은 별." "나 이제 다시 작은 별 된 거야?" "여재인은 영원히 작은 별이다. 아마 지구보다 오래 사는 작은 별일 거다." "태양도. 우리 태양도……." 울먹이며 잇지 못하는 내 음성 위로 태양의 고백이 다시 이어졌다. "나한테는 5년의 유예기간이 있었다. 지금은 반 이상 지났지만. 실은 나 말이다. 그 기간이 끝나면 널 강제로 납치해 가려고 했었다. 미국으로. 그 생각 하나로 버텼어. 이런 나, 무섭지 않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냥 고개만 저었다. "나는 가끔 내가 무섭다, 재인아. 너를 가슴에 담고도 더욱 욕심을 내는 내가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네가 말려 줘. 내가 아무 것도 상처내지 못하도록." "응." "네가 대장이다." "……!" "지금부터 다시 작은 별이 대장 한다." 태양은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날 용서했다. 그리고 대장으로 모시겠단다. 가슴 속에 먹먹하게 들어차는 수많은 감정들을 꿀꺽 삼켜 넘기고서 내가 말한다. "아주 먼 길을 돌아 내게 완전히 돌아와줘서 고마워, 태양." "당연하지. 내 대사가 그거였잖아." "응?" 태양은 웃음을 터뜨리며 전화기에 입술을 바싹 붙여, 아놀드 아저씨보다도 더 섹시한 발음으로 속삭였다. "I'll be back!" 사랑스런 나의 사이보그는 애교도 무적이다. 햇살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문을 꼭 닫아야 그 투명한 햇살의 미미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겨울이 찾아오는 티틀리스의 바 앞에 걸터앉아서 가을이 형이 만들어준 클럽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나의 신청곡인 Rita Calypso의 'Never Let Him Go'가 나오자, 새로 볶은 커피를 내리고 있는 가을 형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형은 하늘이 왜 파란지 알아?" 내 물음에 가을 형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렇게 되묻는다. "하늘이 파랗기만 한가?" 역시 가을이 형답다! 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정답이야! 하늘이 파란 건 아직 덜 익어서 그래. 하루 종일 햇볕을 쬐면 저녁 무렵에 농익어서 발개지니까." 보충설명을 하는 내 머리를 가을 형은 가만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갑자기 그 질문은 왜?" "아니 그냥. 태양 때문에 매일매일 빨개지는 하늘이 좀 웃겨서." 피식 웃는 형의 표정과 헤헤 웃는 내 얼굴이 일상에 잠긴다. 단순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단순하지 않은 세상과의 괴리 사이에서 갈등을 시작한다. 그것은 전쟁이 될 수도 있고, 일방적인 한쪽의 승리로 금방 사그라지기도 한다. 태양과 나는 전쟁을 선포했었다. 그리고 끝까지 싸웠다. 적지 않은 부상도 입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전리품들을 얻었다. 나는 샌드위치 안에 든 양파를 꺼낼까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둔다. 그리고 얼마 전 극장으로 날 찾아온 태양의 부모님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내게 머리까지 숙이고 사과를 하시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래봤자 당신들께서 내게 미안한 점들을 설명하신 게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그 분들이 내게 태양을 돌려주려 애쓰셨다는 걸 알고, 몰래 감동했다. 그리고 말했다. [태양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마세요.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같은 편이니까요. 태양이 편. 그렇죠? 농구 경기 중에도 공 잡느라 자기 편 선수를 실수로 밀어도 뭐라 그러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 분들과 함께 나란히 웃었다. 겨울의 찬 공기 속에 따뜻한 우리의 입김을 나누어 주면서. 그 날 집에 돌아와 나는 태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태양, 어린 시절 겪었던 그 고통들은 어떻게 이겨냈어?] [사실 어렸을 때는 남들도 다 나랑 똑같이 겪는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더군. 철들면서 나름대로 방황도 많이 했었어. 중요한 건 그 순간에도 나는 견디고 있는 중이었다는 거야.] 멋진 말이다. 태양의 대답을 음미하고 있는데, 그가 또 불쑥 말했다. [그리고 네 덕분에 그 모든 사춘기의 방황을 종식시켰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읽으라고 건네준 위인전에 이런 말이 쓰여 있더라.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난 이도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된다. 그러니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집안을 탓하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사치다.'] [이순신 장군?] [맞아. 그 분이야.] 영웅은 세상을 구하기도 하지만, 한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나는 턱을 괴고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서 뜨거운 얼 그레이를 한 모금 마신다. 투명한 햇살 덕에 더 잘 보이는 먼지들은 공중을 부유하며 떠돌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그러다 괜히 웃음이 나서 리타의 맑은 음색을 따라 흥얼거린다. 못말리는 음치의 노래가 엉망으로 뒤섞여 나오지만 왠지 그래서 더 유쾌하다. 저쪽에서 가을 형이 내 노래에 웃음을 터뜨린다. 몸을 기울이며 불쑥 물었다. "형, 행복해?" 내 또 묻자, 가을 형은 나를 보며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내 행복에 겨워서 막 물어대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는 듯. 그 때 내 핸드폰이 벨소리를 냈다. '반짝반짝 작은 별'의 오르골 연주가 청아하게 실내를 울린다. "여보세요? 어디야? 왜 안 와?" 태양이다. 숨소리가 거친 걸로 봐서 뛰고 있나 보다. 여기서 만나 같이 우리 집에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는데. 늦으려는 모양이다. 10분만 더 기다려 달란다. 내가 조금 늦어도 되니까 조심해서 오라고 하자, 태양은 알아서 '사랑한다!' 를 세 번 외치곤 전화를 끊었다. "누군데 그렇게 달콤해 죽겠다는 표정이야?" 이번에는 가을 형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말도 안 했는데 내 홍자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쪼르륵 부어준다. 나는 따뜻하고 향긋한 차에 코를 가까이 가져가면서 음미하듯 말했다. "아아, 내 집에 사는 남자." 結. -=-=-=-=-=-=-=-=-=- 잊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인 듯 합니다.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겠지요. 그렇게 결국 같은 자리,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자리에서 열심히 변화하기. 그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은 것도 다 아무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희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러니 감동할 준비를 해두지요. 현재 우리가 잊고 있는 첫사랑이 언제, 어느 때 불쑥 찾아올지 모릅니다. 참! 티틀리스를 배경으로 스쳐갔던 '한결 같은 곰'과 '곰 같은 한결'이 조금 반가우셨을까요? 무척 길고 힘들었던 여정을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6. 2. 은세 올림.